◆ 덕과 윤리.........善/5. 행복과 時空間

오늘의 행복과 미래의 유토피아

오갑록 2010. 1. 15. 18:39

만족과 보람 ......

 

■ 행복과 시공간(時空間)

         오늘의 행복과 미래의 유토피아

 

 

       행운이란 말을 숙명의 의미 속에서 찾는다면, 행복이란 말은 사람의 능동적이고 자립적인 활동성과 깊은 관련을 갖는다고 한다. 행복은 오늘 즉, 지금의 어떠한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며, 생활의 만족과 삶의 보람을 느끼는 흐뭇한 상태를 말 한다.

 

 행복이 지금의 상태로서 한정된다는 의미는 과거나 미래의 시간 속에 오늘의 행복이 지금처럼 그대로 존재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오늘 느끼는 이 행복은 쌓아 놓고 꺼내 쓰는 물건과 다르며, 저축한 예금을 찾아 쓰듯  할 수도 없다. 상거래 행위에서의 채권이나 채무처럼 빌려주거나 꿀 수 있는 성격도 못 된다.

 

 만족과 보람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찾게 되는 것일까? 그 행복의 주제를 찾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자신의 마음 속에서 짓게 되는 허상에 불과할 수도 있다. 행복은 만질 수도 없고 향기 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의 오감으로 느낄 수는 없는 그 무엇이다. 그래서 크기나 량을 말 할 수도 없다. 누구의 것이 더 크다거니 많다거니 할 수 없다는 특성이 있다. 재물이 많아서, 재능이 많아서 또는 아름답다거나 건강해서 삶의 만족과 보람도 그만큼 따라서 비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삶에 필요한 것들 이기는 하지만 행복지수가 그들의 크기에 따라서 커지는 것이 아니다.

 

 시간과 공간은 사람이 느끼는 행복의 요소들을 한정 짓는다. 시공(時空)의 한정됨이란 다름 아닌, “오늘이라는 제약과, 지금 라고 하는 제약이다. 사람들이 행복을 따질 때, 때때로 간과하는 부문이 여기에 있다.

 

 풍요함과 아름다움이 어우러진 파라다이스를 자칫 행복의 요소로서 우선하여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그 곳에도 시공(時空)의 한계가 행복을 한정 짓고 있다. 지난날의 영광이나 미래에 올 파라다이스가 내 행복에 과연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시간적인 제약이 따르게 되는 것이 행복이다. 그리고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파라다이스에 지금 내가 서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느끼는 흐뭇함이 그 풍요와 황홀경과 비례해서 같은 크기로 느낄 수 있다고도 상상하기 어렵기에 행복은 공간적으로도 제약이 뒤따르는 것이다.

 

 행복이 갖고 있는 시공(時空)의 한계를 바로 알지 못한다면, 풍요와 아름다움, 파라다이스를 열심으로 불러대고 찾아 헤맨들 소용없는 짓이 될 수도 있다. 설령 황홀경 속에 선다고 하더라도, 너무 늦거나 빨라서, 행복을 느끼는 시기를 놓칠 수도 있다. 또는 그 속에 서있는 자신을 바라보며, 다가선 신기루 앞에서 느끼는 허탈함을 느끼는 격이 될 수도 있다.

 

 나이 들고 늙어감을 한스러워 하거나,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께 못다한 효도를 탓하는 성공한 이들의 때 늦은 후회들도 삶에서의 시공(時空)의 한계를 탓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한 시공(時空)의 제약이 있다 하더라도, 걱정이나 근심 없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곳, 그 파라다이스는 녹녹하지 못하고 어렵사리 살아가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는 선망의 장소가 아닐 수 없다. 모든 사람이 꿈꾸며 그리는 그 곳은 미래의 오늘이 도래할 것과, “자신이 그곳의 주인공이 될 것을 전제로 하며 그리는 꿈이다. 시공(時空)의 한계를 극복하고 그 곳에 서기를 바라는 꿈인 것이다.

 

행복을 느끼는 상태가 능동적이고 자립적인 활동성에서 온다고는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행복을 위해 유토피아니 파라다이스와 같은 장소를 소원한다. 미래에 오는 내세(來世)에는 내가 그 곳의 주인이 되기를 희망한다. 시간과 공간의 주인공이 되기를 바란다. 때로는 그 때를 위해서 오늘을 희생하겠다는 다짐을 하기도 한다. “지금의 나라는 주제는 그 때를 위한 밑거름 정도로 낮추어 여기기도 한다.

 

 행복이 무엇인가를 따지면서, 흐르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일까를 짚어 보고, 미래의 오늘이라는 그 가치는 어떤 것인지도 가늠해 본다. 문학작가들이 쓰고 평가했던 유토피아와 그러한 사상들이 나의 행복에 과연 어떻게 연계 될 수 있는지도 함께 생각하여 본다.

 

 행복의 주제는 무엇보다 나와 오늘이 우선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본다면, “아름다움, 풍요함, 파라다이스, 미래와 같은 요소들은 나의 행복에 과연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일까?

 

2010. 1. 15. ()

오갑록 (K L Oh)

 

 

  

 

■ 유토피아

 

 

     헨리 8세 때 추밀원 의원과 대법관직을 역임했던 영국의 인문주의자 토마스 모어(Tomas More, 14771535) 1516년 쓴 유토피아는 16세기 무렵 영국사회의 여러 병리 현상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가운데 새로운 사회를 꿈꾼 것이다. 공화정제, 전 시민이 교대로 농경에 종사, 노동시간은 6시간, 나머지 여가는 교양시간, 필요한 물품은 시장의 창고에서 자유로이 꺼내 쓸 수 있으며 남녀는 혼인하기 전에 미리 서로의 나체를 볼 수 있도록 하고, 안락사를 허용한다는 등의 이상향(理想鄕)을 그린 작품이다. 유토피아(Utopia)는 어디에도 없는 장소다. 어원적으로 보면 그리스어의 ou(없다), topos(장소)를 조합한 말로서 "어디에도 없는 장소"라는 뜻.

 

가공의 인물 히틀로다에우스가 신세계에서 보고 들은 가공의 여러 나라들, 특히 유토피아에 관해서 모어와 서로 이야기하는 형식을 취한다. 주로 당시의 유럽사회를 비판한 제1권과, 이상적인 사회 유토피아를 묘사한 제2권으로 되어 있다.

 

(위키백과)유토피아는 중세적 사회질서에서 근세적 사회질서로 옮아가는 재편성의 시기를 맞아, 또는 거기에서 생기는 사회 모순에 대한 단적인 반성으로서, 또는 근세 과학기술 문명의 양양한 미래에 대한 기대에서 생긴 것이다. 전자의 예로는 종교개혁 사상 가운데 가장 과격파인 '천년지복설(千年至福說)'의 비전을, 후자의 예로는 뉴아틀란티스를 각각 그 전형으로 들 수 있다. 이들 유토피아의 비전은 또한 18∼19세기의 생시몽, 푸리에, 오언 등의 이상사회의 계획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 근세의 유토피아 사상과, 나아가서는 루소 등의 원초적 자연상태로서의 황금시대에 대한 꿈이나 플라톤의 이상국에 대한 꿈까지를 포함하여 일관된 특징은, 그것들이 이상향을 아무데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라고 하면서도, 실은 어디까지나 현세와의 시간적. 공간적 연속선상에서 꿈꾸고 있다는 점이다. 즉 유토피아는 '도원경(桃源境)'이니, '황천국(黃泉國)'이니, '하데스(Hades)'니 하는 원시시대 이래 인류 일반에게서 볼 수 있는 '타계관념(他界觀念)'처럼 시공(時空)을 단절한 양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은 에른스트 브로호, 마르쿠제 등 20세기 유토피아 사상의 계승자들의 사상에 있어서나 또는 조지 오웰, 올더스 헉슬리 등의 20세기의 '() 유토피아' 사상에 있어서도 같다.

 

 

□ 유토피아원문 중에서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불평과 절망에 싸여 있는 가운데, 혼자 호화롭고 사치스런 삶을 즐기는 자는 감옥을 지키는 간수라고는 할 수 있어도 나라를 다스리는 자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요컨대, 다른 병을 일으키지 않고는 하나의 질병을 치유하지 못하는 자가 돌팔이 의사이듯, 백성들의 건전한 생활조건을 망침으로써 밖에 나라의 삶을 개혁하지 못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자유인을 다스릴 줄은 모른다는 것을 마땅히 시인해야 할 줄로 압니다.”

 

“그런데, 모어 선생, 솔직히 제 심정을 말씀 드리자면, 사유재산이 존재하고 모든 것이 돈으로 평가되는 곳에 정의와 번영이 실현될 수 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가장 나쁜 시민들이 가장 좋은 것들을 갖는 곳에 정의가 있다거나, 극히 소수가 모든 것을 나누어 갖는 곳에 번영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라면 말입니다. 그리고 그 소수가 모두 고르게 다 유복하지 않다고 치더라도, 나머지 대다수가 비교할 수 없이 비참하게 사는 곳에 어찌 정의와 번영이 가능할 수 있을까 여겨집니다.”

 

“자만심은 번영을 그 스스로의 이득으로 가늠하지 않고, 남의 손해로 가늠합니다. 만약에 지배하며 경멸할 수 있는 가난한 무리가 없다면, 가난한 자의 불행에 비하여 그 행운이 찬란히 빛나지 않는다면, 부의 과시가 남의 가난을 더 뼈아프게 하지 못한다면, 자만심은 여하한 숭배의 대상이 된다 해도 마다할 것입니다. 이 지옥에서의 뱀은 언제나 인간의 마음을 감아 조이면서, 더 나은 생화를 가지려는 것을 방해함에 있어서는 마치 흡착상어처럼 작용합니다.”

 

 

 

 

■  유토피아와 해도진인설 (海島眞人說)

 

(고석규) 중에서 일부 발췌

      농민들의 역할이 본래 비극적이라고는 하지만, 역사상 농민들의 항쟁은 거의 한결같이 패배하여 죽음을 당하는 것으로 끝나기 일쑤였다. 그런데도 그들은 싸웠다. 그들에게 싸울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반드시 진다고 믿는다면 애당초 싸울 엄두조차 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힘과 용기를 준 건 이길 수도 있다는 아니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긴 다음 맞을 새로운 사회에 대한 기대도 한몫 했으리라. 또 싸우는 것이 정당하다는 신념도 용기를 배가시켰으리라.

 

19세기민란의 시기에 우리 농민들에게는 이처럼 저항행위의 정당성, 승리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는 믿음들이 있었다. 정감록이나 홍경래불사설, 해도진인설(海島眞人說), 미륵신앙 등이 그것이었고 동학이 이를 집성하였다. 이것들 중 지금까지 잘 안 알려져 있고 그래서 좀 독특한 믿음이 있다. 바로 해도진인설이다. 해도진인설은 뭘까? 해도를 이상국가로 생각하고 거기서 어떤 영웅이 나타나 현세의 어려움을 구원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다. 도대체 왜 이런 믿음이 나타났을까? 그리고 그런 믿음은 전혀 황당하기만 한 것일까? 물론 답은아니다.’이다.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뭔가 불안한 사회라는 뜻이다. 플라톤이 꿈꾼아틀란티스도 아테네의 불안을 배경으로 한다.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토마스 모어의 시대도 그랬다. 르네상스로 새로운 희망에 들뜨지만, 역시 변화에 대한 불안이 고조되던 때였다. 이때 사람들은 에덴의 낙원처럼 주어지는 유토피아가 아닌,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창조하는 유토피아를 그리게 된다. 모어의 유토피아는 산업화 초기 영국의 현실에 대한 비판이 만들어낸 이상이었다. 양떼에 쫓겨난 농민들에게 주려 했던 이상사회였다.

 

 우리 조상들은 어떤 유토피아를 그렸을까? 홍길동의 율도국을 첫손에 꼽을 수 있다. 율도국은수십 대를 전자전손(傳子傳孫)하여 덕화유행하니,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넉넉한그런 곳이었고, 홍길동이 새 왕으로 등극한 후는 나라가 태평하고 곡식이 잘 되며 사방에 일이 없는 그런 나라가 되었다. 이런 홍길동의 율도국 꿈을 안고 민중들에게 퍼져나간 또 다른 생각이 있었으니 바로 조선후기인 19세기민란의 시기에 나타난 해도진인설(海島眞人說)이었다.

 

 해도진인설은 현실에서 태어난 이상이었다. 조선후기에 섬은 한편으로는 새로운 개척의 땅이었고, 그래서살기 좋은 땅이 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육지사람들이 보기에 섬은 불온한 집단이 사는 곳이었다. 섬에는 사람의 대열에도 끼지 못하는 천한 존재인 수군(水軍), 죄를 짓고 도망하거나 주인을 피해온 사람들, 그리고 유배되어온 반역죄인들이 살고 있었다. 한마디로 섬은반역향(反逆鄕)’이었다. 그래서 섬은살기 좋은 땅이지만반역향이었다.

 

 이런 두 가지 인상은 묘하게 교차한다. 이제 민중을 구원할 진인을 찾는다면 육지의 봉건정부에 온통 불만을 갖고 있을 섬 사람 가운데서 찾는 게 제일 빨랐다. 그리고 섬은 이상사회로 보기에 하등 모자랄 게 없었다. 민중들이 생각해 낸 해도진인설은 이렇듯 공상이 아니었다. 섬의 현실에 토대를 둔, 그래서 육지의 현실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 이상이었다. 홍길동전에서 찾은 이상사회가 율도국이란 섬이었던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민중들의 믿음 속에 있었던 해도는 율도국이었고 진인은 홍길동이었다.

 

 그러고 보니 플라톤의아틀란티스역시 섬이었고, 모어의 유토피아 역시 섬이었다. 고립의 땅, ! 그래서 상상의 나래를 맘껏 펼 수 있었는지 모른다. 유포티아는 유토포스가 만들었다. 유토포스는 율도국의 홍길동 같은 사람이다. ……

 인간 세계를 고해(苦海)라고 한다. 고통의 바다! 그 바다에 불쑥 솟은 섬은 피로에 지친 사람들을 쉬게 하는 이상사회가 아니었을까? 다도해를 품고 있는 서남지방의 미래 속에는 이런 유토피아가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중남미 문학 속의 유토피아

 

                                               (우석균), 서평 중에서 발췌

 

      콧대 높은 서구인들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인 유럽을구세계로 비하하고, 아메리카를신세계라 칭한 이유가 무엇일까? 1492년 신대륙 발견 직후부터 이미 아메리카를 식인종이 우글거리는 땅으로 간주했으면서도새로운이라는 상큼한 수식어를 붙여 준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서구인들이 너무도 오만했기 때문에 붙게 된 수식어였다.

 

 원주민은 인간이 아니라는 어처구니없는 신학적 해석이 득세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서구인들에게 아메리카는 그들 마음대로 요리해도 되는 새로운 재료였다. ‘인간도 아닌원주민이 가혹한 수탈의 대상이 된 것은 물론이고, 또 한편으로 구세계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이상의 날개를 마음대로 펼쳐볼 수 있을 빈 땅, 즉 너무나 사람을 설레게 하는 새로운 땅으로 아메리카를 간주하는 인식이 생겨나게 되었다.

 

 다들 신세계 현실을 보지 못하고 꿈에 부풀어 있다 보니 그리스의 이상향 아르카디아, 에덴동산, 젊음의 샘, 풍요의 나라 하우하, 여인왕국 아마존 등을 신세계에서 찾아 헤매는 황당무계한 일도 많았다. 그러나 이를 비웃기보다는 신세계가 인류 역사상 아주 특이한 공간적 상상력을 선사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토머스 모어의유토피아”(1516)가 바로 그 결정판이다. 그는 절친한 사이였던 에라스무스의 권유로 어느 신세계 탐험기를 읽게 된다. 그리고 그 책의 쿠바 묘사 부분에 착안하여유토피아에 등장하는 이상향을 구축하였다. 이후 캄파넬라의태양의 도시”(1623)에 이르기까지 소위 유토피아 문학이 줄을 잇는다.

 

유토피아 문학에 등장하는 이상향은 으레 외부세계와 단절된 공간이다. 현세에 이상향을 건설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이나 인간세계와 떨어져 있어야 이상향이 타락하지 않는다는 인식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는 세계체제의 탄생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월러스틴이 주장하듯이 신대륙 발견은 자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세계체제를 태동시켰다. 이 체제의 냉혹함을 일찍이 간파한 토머스 모어 같은 선각자들이 세계체제의 논리가 아직 미치지 않은 공간, 따라서 보통의 인간사회로부터 될 수 있으면 격리된 공간을 갈구한 끝에 신세계를 유토피아로 여기는 독특한 공간 상상력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멕시코를 대표하는 소설가 까를로스 푸엔떼스(멕시코)우리의 땅”(1975)에 이런 종류의 상상력에 경도된 훌리안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가 신세계 행을 결정한 것은 구세계 인간들이 저지른 온갖 잘못에서 자유로운 곳으로 가서 마치 조물주처럼 아예 인류 역사를 새로 건설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 중남미의 유토피아적 상상력

 

중남미 식민사를 살펴보면 유토피아가 시대적 상상력이요 공간 인식이었음을 보여준다. 신세계에 원주민 공동체를 건설한 예수회 신부들의 애독서가 바로유토피아태양의 도시였던 것이다. 이런 종류의 공동체가 과연 원주민에게도 유토피아였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예수회가 1763년 중남미에서 추방된 일은 근대 초기의 유토피아적 상상력에 종지부를 찍은 사건이었다. 예수회 추방은 스페인 왕실이 중상주의를 발전 모델로 삼아 식민지 경영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예수회를 걸림돌로 여겨 단행한 사건이었다. , 구세계의 행정력이 예수회 마을 같은 오지에까지 미치면서 구세계와 신세계의 공간적 단절을 상상력의 근간으로 했던 유토피아는 그 존립 기반이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 중남미는 실로 오랜 세월을 미개한 땅으로만 간주되었다. 가령 헤겔은역사철학“ (1822)에서 신세계를역사 없는 아메리카라고 규정하고 있다. 역사가 진보한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던 헤겔이니 이런 언술은 아메리카가 최초의 발전 단계에도 진입하지 못했다는 평가이다. 중남미라는 공간을 인식하는 데 역사 시대-역사 이전 시대 같은 시간의 척도를 사용하고 있는 점이 주목을 끈다. 시간이 공간 인식을 제어하는 이런 양상은 아르헨티나의 수필가 사르미엔또의 “파꾼도 혹은 문명과 야만“ (1845)에서 그대로 재생산된다. 그는 서구를 문명의 땅으로, 팜파를 야만의 땅으로 규정하였다. 팜파가 문명이 꽃을 피우지 못한 곳, 즉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지 못한 곳이니 야만의 땅이라는 것이다.

 

 중남미에 유토피아적 상상력이 부활한 것은 중남미 소설을 세계문학의 반열에 올려놓은 소위 붐 세대 작가들에 의해서이다. 그 기원은 서구가 또다시 자본주의의 폐해를 심각하게 인식할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슈펭글러가 1차 세계대전이라는 미증유의 참극을 목격하고 쓴서구의 몰락이나 피카소가 아프리카 가면의 원초성에서 예술적 영감을 얻은 일 모두가 자본주의의 탐욕과 천박함에 물든 서구 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중남미 인들은 그들의 공간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서구 낭만주의에서처럼 문명 이전의 원시적인 것들은 오히려 미덕이 되었다. 문명세계에서 탈주하여 원시세계로 가려고 몸부림치는 한 음악가의 이야기를 다룬 알레호 까르뺀띠에르(쿠바)의 소설잃어버린 발자취“ (1953)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까르뺀띠에르 역시 시간을 통해 공간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사르미엔또와 마찬가지이다. 단지 과거를야만이나미개의 상태로 보지 않고 유토피아로 보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렇게 과거에서 유토피아적 공간을 찾는 행위는 비록 자긍심 고양이라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이지만 현실도피 혹은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그리고 사실 붐 세대 소설은 유토피아보다는 조지 오웰의 “1984“를 연상시키는 디스토피아를 주로 형상화하였다. 가령, 후안 까를로스 오네띠(우루과이), 후안 룰포(멕시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콜롬비아)짧은 인생“ (1950), “뻬드로 빠라모“ (1955), “백년의 고독“ (1967)에서 각각 산따마리아, 꼬말라, 마꼰도라는 허구적 공간을 창조했다. 이 공간들은 중남미 전체를 총체적으로 투영하고 해석한 일종의 소우주라는 점에서 곧잘 비교의 대상이 되어 왔다. 산따마리아는 환멸과 좌절과 위선이 가득한 신기루와도 같은 곳이고, 꼬말라는 지옥을 연상시키는 뜨거운 열기 속에서 죽은 자들이 끊임없이 웅얼거리는 디스토피아이다. 마꼰도 역시 광기, 금기위반, 방탕, 편집증으로 점철된 삶을 살다 고독하게 죽어가는 주민들로 가득한 곳이라는 점에서 꼬말라와 산따마리아처럼 디스토피아의 성격을 띠고 있다.

 

 

□ 혁명과 유토피아

 

그러나백년의 고독은 다른 두 작품과 커다란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1959년 쿠바 혁명의 성공에서 비롯되었다. 혁명이 임박했다는 느낌이 중남미 전역을 휩쓸면서 미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고개를 들었다. 유토피아는 이제 오직 미래에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혁명이라는 급진적인 방법을 통해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에 과거와 현재는 철두철미 파괴의 대상이 되었다.

 

 마꼰도는 꼬말라나 산따마리아와 달리 창조적인 미래 건설을 위해 파괴되어야 할 공간인 셈이다. 미래에서 유토피아 찾기는 훌리오 꼬르따사르(아르헨티나)마누엘의 책“ (1973)이나 에르네스또 사바또(아르헨티나)파괴자 아바돈“ (1974)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작품들 역시 유토피아라고 할 만한 공간은 등장하지 않는다. “마누엘의 책은 오히려 혁명 전사들의 도덕적 해이나 무능력을 비판하고 있으며, “파괴자 아바돈의 아르헨티나는 요한계시록 속의 처절하고 무시무시한 공간처럼 형상화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에서도 이 두 작품은 새로운 인간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시각을 내비친다. 그리고새로운 인간의 창조야말로 바로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가 주창한 쿠바혁명의 이념이었다. 1970년대 초반부터 서서히 혁명의 전망이 어두워지고 연이어 경제위기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시달리면서 미래는 더 이상 유토피아가 될 수 없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붐 작가들의 전성기도 막을 내린다. 하지만 유토피아는 오직 미래에 있다는 상상력은 한 시대를 강력하게 이끌고 갈만한 에너지를 분출했고 결국 중남미 소설사에 아주 뚜렷한 흔적을 남기는 성과를 거두었다.

 

 

 

■ 문학 속의 이상향

 

: spr경영연구소, 서평 중에서 발췌

 

.  철학자의 지배를 꿈꾼 플라톤의국가

 

 ‘유토피아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토머스 모어이지만, 이상사회에 대한 탐구는 그보다 훨씬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 플라톤이 말한 이상적인 국가는 정의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일종의 도덕 공동체였다. 그는 국가의 구성원을 세 계층, 즉 머리의 지혜에 대응하는 통치계급, 가슴의 용기에 상응하는 군인계급, 손발의 절제에 상응하는 민중계급으로 나누고, 특히 철학자가 국가를 지배해야만 국가의 질서와 인간의 이상이 일치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영향을 받은 모어는, 철인정치 이념에 동의했다. 다만, 플라톤의 이상국가가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탐색에 그쳤다면, 모어가 그린유토피아는 합리적 이성에 기반을 둔 구체적인 제도의 실행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현실에 한 발 다가섰다고 할 수 있다.

 

. ‘태양이 지배하는 나라, “태양의 나라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저술가인 토마소 캄파넬라가 그린태양의 나라는 이성으로 계몽된 인간에 의해 통치되며, 사람들은 각자 적성에 맞는 일을 함으로써 공동체의 선에 기연한다는 점에서국가유토피아와 공통점을 지닌다. “태양의 나라는 사유재산, 부당한 부, 빈곤이 존재하지 않으며,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필요한 것 이상을 소유할 수 없다.

 

.  과학에 입각한 이상사회, “새로운 아틀란티스

 

 플랜시스 베이컨은 과학이 진보하여 인간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을 때 사회 환경이 개선된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아틀란티스에서는 주권자가 설치한 교육기관에서 자연과학과 기술을 연구하고 생산력의 증대를 꾀한다. 그가 꿈꾼 이상사회는 학문이 일구어내는 세계였다.

 

 

 

 

■ 유토피아와 엔트로피

 

: 리더스 가이드 RG, 서평 중에서 발췌

     야만인 존은 어머니로부터 들은 문명세계를 꿈꾸며 자랐다. 아무런 고통도 없이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아갈 희망을 간직하고 살던 존은 어느 날 문명세계에 초대된다. 문명세계는 고통도 없고,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쾌락이 충만한 세상이지만 존이 바라던 세계는 아니다. '인간다움'은 없다. 선택할 수도 없고, 노력을 통해 이루어갈 수도 없는 세계이다. 물질과 쾌락이 충만한 세계를 버리듯 도망쳐 나온 존은 야만의 세계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야만의 세계도 그가 속한 세상은 아니다. 선악과를 먹은 하와처럼 물질문명의 욕구를 잠재울 수가 없었다. 존은 어느 세계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이 되었다. 존은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헉슬리의멋진 신세계 '물질문명이 충분히 발달한 세계가 과연 행복할까?'를 묻는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보며 물질문명은 어디까지 발전할 것인지 궁금하다. 이에 대해 과학열역학은 물질문명의 발전은 한계가 있고, 빨리 발전할 수록 빨리 멸망할 것이라고 말한다.

 

 “엎질러진 물처럼 다시 복원할 수 없는 것이 에너지이다. 뜨거운 물체의 열이 차가운 데로 가는 경우는 있지만, 차가운 것이 뜨거워지는 것은 없다. …… 엔트로피는 물질의 열적 상태를 나타내는 물리량이다. 이것이 증가하면 무질서하게 퍼진다는 의미이고, 감소한다는 것은 가용 가능한 상태로 변한다는 것이다. ……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은 인류의 물질문명에 근본적인 경고를 하고 있다. 역사가 헤시오도스는 그리스 신화의 다섯 단계를 황금시대, 은의 시대, 청동시대, 영웅의 시대로 구분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다음 단계는 더 쇠퇴한다는 이야기다. ……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는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주체다. 이를 두고 버트란트 러셀은 '모든 생명체는 주변환경에서 가능한 한 많은 것을 변화시켜 자신을 위해 사용하려 하는 일종의 제국주의자들'라고 말했다. 식물은 땔감으로도 쓰이고, 열매도 맺고 하니 엔트로피를 감소시킬 것으로 생각되기 쉬우나, 태양으로부터 열량을 받아 그 일부가 축적되었을 뿐이니, 동물에 비해서는 엔트로피 증가 폭이 작을 뿐이다. 현대문명의 빠른 속도라면 멀지 않은 미래에 재생 가능한 에너지는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엔트로피의 증가를 걱정할까? 우리는 옷도 잘 입고 잘 보호되고 있다. 또 그럴 여유가 없다. 제레미 리프킨은 그의 책엔트로피에서 이를 두고, 조지오웰의 “1984”를 빗대어전쟁은 평화가 되고 거짓말은 진실이라는 식으로 세뇌 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리프킨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모두 기계적 세계관, 즉 인간의 능력으로 물질의 풍요를 만들어 갈 수 있다고 믿는 다고 비판한다.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이상주의도 결국은 고 엔트로피 세상을 열어갈 뿐이라고 말한다.

 

 

 

 

■ 유토피아 사상

: “유토피아와 유토피아 사상” ipcp.edunet4u.net

일부 내용을 발췌 요약함

 

      모든 사람은 그가 소유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항상 불만을 품게 되고 결핍된 것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그것을 갈구한다. 현존하는 사물에 대한 이 끝없는 불만과 그것을 충족시키려는 인간의 부단한 노력과 욕망이 바로 모든 진보와 개혁의 근원이며 보다 나은 생활을 설계하게 하는 원천이다.

 

 이러한 점에서 유토피아를 진보의 원리라고 적극적으로 평가한 인물은 아나톨 프랑스였다. 그는 주장하기를 "다른 시대의 유토피아 인들이 없었다면 인간은 아직도 동굴 속의 비참하고 발가벗은 상태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유토피아는 모든 진보의 원리이며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한 시도"라고 하였다. 프랑스의 지적처럼 유토피아의 대망(待望)은 곧 진보에 대한 신념이라 할 수 있다. 진보에 대한 신념은 이성에 대한 신뢰를 뜻하며, 이성의 신뢰란 인간이 이성을 통해 사회환경을 통제하고 보다 더 좋은 생활조건을 창조할 수 있다는 신념을 의미한다.

 

 이러한 면에서 유토피아 사상은 유럽문화의 지적 전통을 특징짓는 하나의 큰 사조였다. 자연정복, 사회통제, 복지증진은 근대 유럽문화의 핵심개념이며 진보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지난 4세기에 걸친 진보는 외계자연(外界自然)의 정복과 재산의 공유화(共有化)만이 진정한 목표가 아니었음을 입증하게 되었다. 오늘날 가공할 파괴력을 지닌 핵무기가 과연 건전한 이성과 도덕에 의해 통제될 것인가는 매우 의심스럽다. 더욱 현대 과학기술의 비약적 발전은 기술관료적 사회구조를 불가피하게 만들어 인간의 소외와 비인간화를 심화시켰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유럽인들은 19세기의 낙관적 신념을 상실하고 그들이 기대했던 진보의 목표가 하나의 환상이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환상에서 깨어난 실의와 좌절은 오늘날 유토피아 문학의 부재(不在)와 유토피아 사상의 마비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다니엘 벨의 지적처럼 이데올로기의 종언(終焉)은 아닌 것이다. 유토피아의 논의는 항상 새롭게 시작될 수 있으며 다만 유토피아의 이데올로기화의 함정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베르댜에프가 언급했듯이 유토피아는 인간의 본성에 내재된 완전생활에 대한 꿈이기에 유토피아가 설혹 전체주의적 속성을 초래할 수 있다 하여 인간은 그 꿈 자체를 포기하거나 배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유토피아는 사람마다 시대마다 달리 나타날 수 있으며, 한 시대의 유토피아는 다른 시대의 악몽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토피아의 상상마저 완전히 억제해야 할 만큼 유토피아에 공포를 느낄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보다 나은 생활에 대한 꿈과 소망이 봉쇄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생의 절망이며 공포인 것이다. 사실상 유토피아는 불안과 위기, 환멸과 좌절의 시대일수록 더욱 절실히 요구된다 하겠으며 이 점에서 오늘날처럼 인간이 유토피아를 필요로 하는 때도 없다 하겠다.

 

 왜냐하면 이성(理性)과 양심(良心)이 마비되고 독선(獨善)과 아집(我執)이 지배적인 사회, 정의(正義)와 법()이 무시되고 폭력이 횡행하는 사회, 자유와 인권이 유린되고 강압(强壓)과 전제(專制)가 군림하는 사회, 복지(福祉)와 공익(公益)이 외면되고 빈곤(貧困)과 사리(私利)가 우선되는 사회, 대안(代案)과 지표(指標) 없이 부정(否定)의 논리만이 무성한 사회일수록 그 사회가 지향할 새로운 사회상(社會像)과 가치관(價値觀)을 정립해 줄 유토피아가 절실히 요망되기 때문이다. 유토피아에 대한 새삼스러운 관심과 이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제기되는 것이다.

 

 

□ 유토피아의 개념

 

…… 유토피아를 완전사회와 이상적 질서의 추구라는 적극적인 관점에서 해석할 때, 그것의 스펙트럼과 범주는 참으로 광범하고 애매하다.

 

. 문학작품에 나타나는 목가적(牧歌的)인 자연상태나 황금시대를 가리킨다. 예를 들면 헤시오드의노동(勞動)과 날에서 엿보이는 황금시대의 신화, 성서에 나타나는에덴동산”, 유헤메루스(Euhemerus), 오비드(Ovid), 루시안의아르카디아”, 중세의 코케인 등이 그것이다.

 

. 픽션에 의해 설계된 이상사회 또는 최선의 국가상, 즉 모어의유토피아”, 캄파넬라의태양국”, 모를리의자연법”, 윌리암 모리스의무가유향(無可有鄕)에서 온 소식”, 웰즈의근대 유토피아등이 이 범주에 해당한다.

 

. 플라톤의국가론”, 아리스토텔레스의정치학”, 루소의사회계약론처럼 정치사상에 있어서 이상적 정치질서와 그 원리를 제시한 것을 들 수 있다.

 

. 튀르고, 콩도르세, 헤겔, 마르크스의 경우처럼 역사철학에서 추구하는 역사의 최종적 완성단계. . 존 볼, 토마스 뮌처, 영국혁명기의 제5왕국파, 19세기의 안달루시아파 등에서 보이는 종교집단이나 혁명집단이 표방하는 천년왕국의 추구. . 이밖에 지식사회학에서 다루는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 문화인류학과 교육심리학에서 다루는 행복한 생활과 인간의 성격개조론 등이 모두 유토피아의 범주에서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따지고 보면 위대한 사상가와 철학자의 체계적 사상은 대부분 유토피아적 요소를 내포하지 않는 것이 없다.

 

 

□ 유토피아의 특징

 

유토피아 문학장르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번째 특징은 '가공적'인 점에 있다. 유토피아는 글자 그대로 ”no-place”를 의미한다. 물론 유토피아 작품에서도 정치제도와 이론이 잘 표출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픽션적 기술에 불과하다. 기존상태를 전복하려는 혁명론, 통치원리의 수립을 위한 일반이론, 마땅히 해야 할 가치체계의 선언 등은 비록 그것이 이상적 가치를 내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토피아의 문학 쟝르에 포함되기 어렵다. 예를 들면, 정치적 이상의 역사적 선언문인 미국의 독립선언문과 프랑스혁명의인권선언”, 고도의 정치강령을 선포한공산당 선언”, 인간의 영원한 도덕률을 제시한 예수의산상수훈등이 그것이다. 그렇다고 유토피아의 가공적(架空的) 성격은 상상력을 무한히 허용하여 완전한 환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어느 기점에서 유토피아는 환상과 분리된다. 그것은 유토피아 작가가 현실사회에 확고한 기반을 두고 있어, 그의 유토피아적 비전은 현실에 대한 분석과 비판에서 유래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소가 유토피아를 ”no-where”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가게 만들며 이점에서 그것은 순수한 개인적 환상과 차이가 있다.

 

두번째 특징은 비록 그것이 픽션형태라 하더라도 특정한 사회와 국가에 대한 구체적 상을 제시해 준다는 점에 있다. 이 점에서 유토피아는 풍자문학(諷刺文學)과 다르다. 풍자문학도 현실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고발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그 같은 비판은 어디까지나 현실에 대한 부정적 태도에 그칠 뿐, 건설적인 대안이나 사회상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여성동등권을 주장한 아리스토파네스의여성의회”, 인간의 사악함을 풍자한 조나단 스위프트의걸리버 여행기”, 사회주의 혁명을 해학적으로 다룬 조지 오웰의동물농장등은 이 점에서 유토피아 문학과 구별된다.

 

그러나 유토피아의 현실 비판에는보다 나은 사회”, ”보다 완전한 사회를 건설하려는 의도와 노력이 내포되어 있다. 그것도 사회제도의 부분적 변화와 개선을 위한 제안이 아니라 비록 가공적이지만 사회의 전면적인 재구성의 정립하려는 의식적인 개혁이다. 그러므로 유토피아에는 행복한 생활에 요구되는 모든 사회적 조건들, 예컨대 욕구충족, 영구평화, 즐거운 노동과 여가, 평등과 자유 또는 합리적 기반에 입각한 불평등 등을 만족시킬 수 있는 사회정치적인 재조정(再調整)의 방안이 제시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유토피아가 추구 하는완전한 사회상(社會像)”은 매우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유토피아는 역사적 상황과 현실에 따라 항상 그 비전을 달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혼란기의 유토피아는 강력한 질서의 창출을 그 목표로 할 것이며 빈곤한 시대의 유토피아는 풍요한 사회를 꿈꾸게 될 것이다.

 

 

□ 유토피아 사상의 가치

 

.  비판정신

유토피아 사상은 기본적으로 현실 초월의식이다.

따라서 자칫하면 그것은 현실도피의 심적 위안물이나 지적 유희물로 전락되기 쉽다. 그러나 이것을 보다 적극적으로 평가할 경우, 그것이 가지는 효용과 가치는 막중하다. 그것의 가치는 한마디로 비판의식과 개혁사상, 그리고 새로운 질서의 창조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유토피아는〈보다 나은 사회상〉에 대한 묘사이다. 그것은 마땅히 그래야 할 당위의 세계이며 규범의 세계이다. 따라서 그것은 어떠한 형태로 表象되든 그 자체가 이미 현실에 대한 반대상으로서 그 안에 현실에 대한 비판과 부정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유토피아 사상은 현실비판이라는 부정의 원리와 규범의 제시라는 긍정의 원리를 동시에 갖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부정의 원리는 현실 사이의 부조리와 악을 고발하여 사회개혁사상을 고취시켜 주며 긍정의 원리는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신뢰를 통해 이상사회의 목표와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역사적 진보와 창조의 바탕이 된다. 이 점에서 유토피아 사상은 일종의 변증법적 논리(辨證法的 論理)를 따른다. 유토피아는 현실부정의 전제(前提)로서 원초적인 신화세계나 황금시대()를 설정한다.

 

그 다음 낙원의 상실과 타락의 결과로서의 현실(), 그리고 그 현실에 대한 否定(否定 否定), 즉 유토피아로의 복귀가 그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많은 개념들, 예컨대부활, 부흥, 재생, 개혁의 말 자체가 모두 과거의, 황금시대를 회복하여 새 시대를 건설하자는 의지의표현인 바, 이 점에서 르네상스는 그 시대 자체가 완전히 유토피아적 분위기에 싸여 있는 시대상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기존의 사회제도를 과감하게 배격한 모어, 캄파넬라, 윈스탄리의 공유제는 따지고 보면 에덴동산의 순수성을 회복하자는 것이며 기존의 철학체계를 전면 배격한 베이컨의 대개혁은 아담의 자연지배권을 되찾자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유토피아 사상에서의 현실초월의식, 즉 에덴동산을 부활하려는 허황된 꿈은 현실적으로는 사회개혁사상의 주요원리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 개혁사상 유토피아 사상은 현실초월적이지만 사회개혁적 기능을 갖는다는 점에서 신화나 이데올로기와 차이가 있다. 유토피아는 출발에 있어서는 신화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신화의 세계는 역사 밖에 있는 불변의 세계이다. 이에 비해 유토피아는 인간의 이성과 의지를 신화에 적용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유토피아는 막연히 신국(神國)을 동경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창조하고자 하며 이 점에서 유토피아는 기본적으로 현실의 구조적 조건으로부터의 해방정신의 표현이다. ……

 

 

□ 르네상스 유토피아의 특성

 

 이와 같이 유토피아 사상은 한 시대의 비판정신과 개혁사상의 발로로서 새로운 사회상을 수립, 이를 실현하려는 인간욕구의 표현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현실 초월의식이지만 또 한편으로 현실에 대한 철저한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어, 그 시대성과 역사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 이것은 격변하는 시대에서 더욱 활발히 나타나고 있는 바, 16, 17세기는 유토피아 사상사에 있어 가장 주목할 시대의 하나이다. 이 시대는 역사상 가장 큰 전환기의 하나로서 르네상스, 종교개혁, 지리상의 발견, 과학혁명, 영국혁명 등의 격동 속에서 중세의 질서가 붕괴되고 근대의 세계가 태동하고 있었다. 따라서 새로운 사회를 모색하려는 다양한 비전과 계획이 이 시기에 전례 없이 활발하게 제시되었고, 그 결과 현대사회를 특징짓는 공산주의, 자본주의, 과학문명, 입헌정치 등을 예견케 하는 제 이념과 모델이 당시 유토피아 사상가들에 의해 진지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정신계에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은 크리스트교의 분열과 새로운 과학의 출현이었다. 크리스트교의 분열은 당대인들에게 정신적 갈등과 불안을 가져다 주었고 세계의 종말이 다가오리라는 성급한 좌절과 비관주의를 낳게 하였다. 이에 반해 새로운 발견과 발명을 가능케 한 과학의 발전은 새 시대의 도래를 예언하는 낙관과 희망을 품게 하였다. 이와 같은 비관(悲觀)과 낙관(樂觀)이 교차하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봉건질서의 붕괴가 초래한 사회적 혼란과 무질서를 극복하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려는 노력이 다각적으로 모색되고 있었다. 유토피아 사상은 당시의 이 같은 지적 풍토를 잘 반영해 주는 것으로써 그것은 한 면으로는 중세의 세계관과 봉건질서로부터의 해방정신의 표현이며, 다른 한 면으로는 근대사회가 지향해야 할 바람직한 목표와 규범의 제시이기도 하였다.

 

 유토피아 작가들이 설계한 이상사회상은 그 형태와 성격이 실로 다양하였다. 정치면에서는 군주정, 신정정치, 입헌정치의 원리가 도입되고 있는가 하면, 경제적으로는 사유제와 공유제, 종교 면에서는 카톨릭, 프로테스탄트, 범신론 등이 채택되고 있어 당시 작가들의 다채로운 입장과 사상을 잘 표출해 주고 있다. 유토피아는 작가 자신의 바람직한 사회상을 묘사한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사회 각 분야에 대한 개인적 취향이 체계 없이 망라되어 있다. 따라서 다양한 유토피아 작품들을 일정한 유형과 틀 속에 집어 넣는다는 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예컨대 베이컨의아틀란티스는 사유제 사회라 할 수 있으나 실제로 베이컨이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하나도 없으며 안드레애의크리스트 교국(敎國) ”은 공유제 사회이나 본 작품의 주된 내용은 종교와 과학에 더 치중되어 있다. 이와 같이 유토피아 작품은 각기 다양한 특성을 갖고 있지만 당시 유토피아에 깔려 있는에토스중 최대공약수를 찾는다면 그것은 크리스트교와 자연주의(과학)라 할 것이다. 이것은 유토피아 작가들의 주된 관심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단적으로 반영해 주는 것이다. 그들의 주된 관심의 하나는 부패한 크리스트교 사회의 질서를 재정립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자연법에 입각한 새로운 사회질서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전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 크리스트교적 공유제 사회를 주장한 모어라면 후자의 대변자는 과학적 유토피아를 내세운 베이컨이었다. 이 양자의 중도적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 캄파넬라와 안드레애이다. 이들은 모두 사회악(社會惡)과 오류(誤謬)의 근원이 인간의 타락에 기인한다고 믿고 있었다. 따라서 모어의 목표가 타락 이전의 자연상태, 즉 크리스트교적 덕성(德性)과 이성(理性)의 부활이라면, 베이컨의 목표는 자연지배권의 회복(回復)이었다.

 

요컨대 르네상스기의 유토피아는 크게 두 경향으로 나타난다. 그 중 하나는 이성과 덕성, 법과 질서를 통해 이상사회에 도달하려는 경향이다. 이 경향의 대변자들은 모든 것이 집산적 방식에 의해 계획. 통제될 때 사회정의와 행복이 실현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크리스트교적 공유제 유토피아, 예컨대 모어, 에버라인, 도니, 캄파넬라, 안드레애, 윈스탄리 등의 유토피아가 바로 이 유형에 해당된다. 이들은 모두 인간의 본성에 대한 비관적 관점에서 사회적 조건과 제도의 개선만이 인간을 길들이고 인간의 이성과 덕성을 회복시키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이 기존제도의 전면적인 개편, 즉 사유제를 폐지하고 공유제를 도입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이에 비해 르네상스 유토피아를 특징짓는 또 하나의 경향은 자연과 과학에 대한 깊은 신뢰로서 이것은 모든 것을 과학과 과학적 방법으로 통제함으로써 새로운 지상낙원을 건설하려는 꿈인 것이다.

 

 이 사조의 대표자인 베이컨은 인간의 회복과 완전은 사회개혁과 혁명보다 과학의 진보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사회정의와 평등보다는 우선 빈곤과 궁핍에서 해방되어 인류의 복지를 실현하는 것이 모든 사회문제의 선결조건이라고 베이컨이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볼 때 인류의 복지실현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여 사회환경을 개선할 수 있을 때 가능하며, 인간의 자연지배는 과학의 진보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었다. 과학의 진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올바르고 새로운 방법의 발견이었다. 그가 발견한 새로운 방법이란 인간의 감각적 경험으로부터 출발하여 궁극적으로 이성의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귀납법(歸納法)이었다. 그는 이 방법이 완성된다면 인간상태의 비약적인 향상과 인간의 자연지배권의 확대(擴大)가 현저해지리라고 생각하였다. 캄파넬라, 안드레애, 코메니우스, 하틀리브, 그랜빌 같은 과학적 유토피아 작가들의 대부분은 이 점에서 베이컨과 공통된 노선(路線)을 취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어를 비롯한 크리스트교적 공유제 유토피아 작가들에게 있어, 공유제가 인간의 비이성적 요소를 억제하기 위한 수단이었듯이 베이컨을 중심으로 한 과학적 유토피아 작가들에게 있어서 귀납법(歸納法)은 인간의 이성적 판단을 저해하는 우상(偶像)과 편견(偏見)을 막기 위한 수단이었다. 결국 이들에게 있어 인간의 약점을 극복하는 길은 자연의 이성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크리스트교적 공유제 유토피아 작가들이 이성을 정치, 경제, 도덕 등 인간의 실제생활과 결부시켰다면 과학적 유토피아 작가들은 이성을 자연법칙과 과학에 적용하였다. 여기에서 새 질서를 크리스트교의 원리 위에 수립하려는 사람들과 장연의 원리 위에 수립하려는 사람들 사이에 하나의 공분모(共分母)가 발견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크리스트교의 질서와 자연의 질서는 서로 조화될 수 있다고 믿게 되었고 그것이 조화될 때 평화와 안정, 번영과 행복의신 크리스트교 공화국이 건설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Pansophia의 꿈이다. 판소피아의 유토피아는 크리스트교의 세계가 심히 동요되고 있던 17세기에서 전통적 크리스트교 문화와 새로운 과학을 결합하여 유럽의 질서를 재통일하려는 마지막 시도였다. 그러나 이 시도는 결국 실패하였고, 따라서 판소피아의 꿈의 좌절은 결과적으로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근대 유럽문화의 세속화(世俗化)를 초래(招來)하였다.

 

 

 유토피아란더 좋은 사회더 좋은 세계에 대한 동경과, 그것의 가능성에 대한 사색, 그러한 이상이 실현되리라는 기대와 희망이 그것이다. 그리고 유토피아는가공적이며 또한 특정한 사회와 국가에 대한 구체적 상을 제시해 준다는 특징이 있다.

 

 르네상스기의 유토피아는 이성과 덕성, 법과 질서를 통해 이상사회에 도달하려는 경향과 자연과학에 대한 높은 신뢰를 갖는 경향, 즉 모든 것을 과학과 과학적 방법으로 통제함으로써 새로운 지상낙원을 건설하려는 꿈이 담겨 있었다. 아무튼 유토피아 사상은 한 시대의 비판정신과 개혁사상의 발로로서 새로운 사회상을 수립, 이를 실현하려는 인간욕구의 표현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현실초월의식이지만 또 한편으로 현실에 대한 철저한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어 그 시대성과 역사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

 

 

 

 

■  우리의 유토피아 vs 그들만의 유토피아 

 

: 세르주 알리미

. 전통적 지배체제 극복한 '서로 돕는 사회' 가능. 완전히 다른 세상을 상상하는 것에서 시작하자

 

초현실주의 시인 루이 아라공은모두가 꿈을 꾸고 있는 기나긴 꿈을 꾼다고 말했다. 그리고꿈을 꾸고 있는 기나긴 꿈을 꾼다고 말했다.

 

 그리고 소설가 앙드레 지드는 다음을 상기시켰다. “얼마나 많은 의지 박약한 젊은이들이 스스로 용맹함으로 충만한 줄 알다가유토피아라는 말만 듣고도 지레 겁을 먹고는, 분별 있는 이들의 눈에 공상가로 비쳐질까 두려워했던가! 인류가 이룩한 모든 위대한 발전이 다름 아닌 유토피아를 실현하는 길인데 말이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려면 인류학자, 경제학자, 역사가, 투사들이 몽상적인 광대 구실에 스스로를 가두어서 좋을 게 없다. 성격만 좋고 실속은 없으며, 현실 기틀의 구축자라는 유리한 처지를 상대편에게 넘겨줄 가능성이 농후한 그런 광대 말이다.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신 자유주의도 마찬가지로 어떤 유토피아의 구현이기 때문이다. , 과거에는 유토피아적 영감에 불과 하던 것들이 이제 위정자들의 정책으로 자리잡았다.

 

 

 

 

  유토피아와 이상향 / 이기주의 탐욕

 

: casypark 블로그 중에서, 일부 발췌

……

유토피아가 과연 실현가능성이 없는 것일까? 현재의 지구인류 수준을 놓고 보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유토피아가 충분히 실현가능하며, 실현될 수 있다고 본다. 예를 들자면, 플레이아데스 문명 같은 세계다. 물론 나로서는 실제 플레이아데스 문명이 현존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모른다. 다만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 쓴 책을 통해서, 플레이아데스 문명권에서 왔다고 하는 사람들이 전한 이야기를 읽고 (그러한 세계가 실제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라고 믿고 있을 뿐이다.

……

불교에서 말해지는 이른바 三千大千 세계 중, 이상적인 세계를 극락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극락 혹은 천국은, 인간들이 사는 물질세계, 육체적 인간이 거주하는 세계는 아니다. 영적인 실체들, 즉 영혼들의 세계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고 있는 外界文明이라는 것이 이런 형태였음을 말하는 것이었을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세가지 형태가 존재할 것으로 보인다. , 우리 지구차원의 세계처럼 밀도가 높고, 낮은 파동으로 진동하는 물질세계로서의 외계문명, 반 에테르 체(지구인류의 물질세계보다는 높은 파동으로 진동하며, 밀도가 보다 낮은 반 물질의 외계문명) 외계문명, 그리고 영적인 실체로 이뤄진 외계문명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세 번째 단계의 외계문명은 사실 상, 천국, 극락, 혹은 천상의 문명권이라고 부르면 맞을 듯 하지만, 실제 이런 형태의 외계문명권을 외계문명권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미지수다. 이들 단계라면, 사실 상, 영혼의 세계에 다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지구를 방문하고 있다고 하는 외계인들은 어디에 속하는 부류인가? 플레이아데스 문명권을 놓고 보면, 명백히 물질적 인간의 세계에 가깝다. 마이어가 셈야제를 만나서, 그들의 비임쉽을 타고, 그들 세계를 방문한 것(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만 놓고 봐도 그렇다. 그들의 세계는 우리 지구와 같은 3차원적 물질세계라는 의미다. 물론 그들이 존재하는 세계의 진동 주파수 대역이 우리 인간이 거주하는 지구에 비하여 높은 파동 대역에 속하고, 그들의 육체적 밀도가 인간에 비하여 낮은 편에 속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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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우주는 물질우주와 영적인 우주로 나눠져 있다. , 物質界 靈魂界 나눠져 있다는 것이다.

 

. 물질계(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차원)

저급한 아스트랄 계 Astral Plane; 지구층면, 인간이 죽으면 가장 먼저 가게 되는 유계, 귀신, 유령 등 지상을 벗어나지 못한 영들이 존재하는 세계 포함

 

 . 아스트랄계(靈魂界)이 영혼계도 //下界/地獄界/아수라계(魔界)/동물군집 영혼계/요정 및 기타 영적 실체들이 존재하는 세계, 즉 무수한 영적 세계가 존재 한다. 즉 영혼계라고 하지만, 단일 차원이 아니라, 무수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보통 일반적 지구인간의 경우, 이 단계에서 일정기간 지낸 후, 다시 지구 물질계로 환생하며, 그러한 윤회과정을 반복한다고 한다.

 

. 고급 아스트랄 계 天界 이른바 일반적 영혼계를 통과한 영혼들이 가게 된다는 고차원적 영혼의 세계, 천국이다. 일반적 영계를 통과한 영혼들은 두 번 다시 물질계로 환생하지 않게 된다고 하며, 이들은 남은 기간 동안 다시 무수하게 많은 차원의 영적 세계에서 환생과 죽음을 거듭하며 발전 진보해 간다고 한다. , 같은 일반적 아스트랄 계에 거주하는 영혼이라고 해도, 다시 물질계로 환생할 필요가 없을 만큼 진보, 발전한 영혼들의 경우는, 물질계로의 還生 終了하고, 영혼세계에서의 환생 사이클로 진입한다.

 

. 신계(神界) 悟性 깨달음의 영광에 빛나는 들의 世界, 神的 영광과 광휘에 휩싸인 世界, 즉 신적 지위에 오른 영혼들의 세계

 

. 사념계(思念界)모든 영적인 실체를 벗어 던지고, 순수의식으로 돌아가기 위한 세계, 이른바 상념만이 존재한다고 하는 세계, 영혼계에서 지내온 영적 부채와 카르마를 벗는 시기) 아라아트 아델사타

 

. 근원계(根源界)영적 세계에서 살면서 가졌던 그 모든 카르마, 영적인 부채를 모두 상환하고, 근본 순수의식으로 돌아가기 일보 직전의 세계, 프탈레(플레이아데스 인들의 표현에 따르면)

 

. 창조의식(創造意識)근본 순수의식, 창조주와의 합류, 절대계, 순수의식으로의 회귀, 이 단계로 상승한 영혼(個我)은 한 주기의 우주체험을 종료한 것이며, 그가 발원하여 나온 순수의식, 창조의식에게 되돌아가 하나가 된다. 조그마한 個我 개화(開花)하여 大宇宙 창조(創造) 거대의식과 하나가 되어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 상태가 되어도, "나"라고 하는 개별적 정체성은 보존되는 가운데, 내가 바로 전체이며, 전체가 바로 나라는 사실을 뚜렷이 자각하게 된다고 한다. 현상계에 존재하는 모든 영적 실체들이 깨달음을 얻어 전체의식, 창조의식으로 되돌아가게 되면, 이 우주는 눈 녹듯 사라지고 모든 것은 절대계, 순수의식 그 자체로 회귀하며 한 주기가 종료되는 것이다.

 

. 휴식 및 새로운 주기로의 이행이전 우주에서 겪고 경험한 지식과 지혜가 추가된 또 다른 새롭고 강력하며 진보된 우주가 창조된다. 새로운 주기의 시작이다.

 

 이와 같은 분류를 놓고 본다면, 이른바 고차원의 영적, 과학적 발전수준을 이룬 외계문명이란 도대체 어디에 속하는 세계이냐는 의문인 것이다. 이렇게 따져 놓고 보면, 그들은 사실 상 물질세계가 아니라, 영적인 세계라는 의미가 되고 만다. 그렇지 않겠는가?

 

사실상 영적인 세계라고 하면, 물질계 적인 의미로서의 과학이라든지 어떤 문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예를 들자면, 영혼세계(아스트랄 세계 Astral Plane)에서는 일종의 운반수단인 UFO, BEAM SHIP 같은 것들이 필요치가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 세계는 物質的 實體 아닌 영적실체(靈的實體) 世界이며, 그 곳에서는 모든 것이 상념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 생각 그 자체가 바로 현실인 것이다.(물론 업보에 따른 제약이 존재하지만 말이다) 물론 이 세계도, 아스트랄 바디 Astral Body라고 하는 영혼의 집, 옷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육체적 용기 Physical Body에 담긴 인간에 비해서는 비할 데 없이 자유로워지는 세계다.

 

누군가를 생각하거나, 어딘가에 가 있는 것을 상상하면, (물론 영혼 상태가 되면 남녀의 성적 구분이 없어진다, 영혼은 中性이며, 없기 때문이다)는 그 곳으로 가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왜 굳이 비임 쉽(UFO)으로 불리 우는 운반체가 필요해진다는 말인가?

 

 빌리 마이어가 저술한 플레이아데스 문명을 놓고 본다면, 그들의 문명세계는 분명 물질세계의 문명이다. 물론 우리보다 높은 파동의 주파수 대역에 존재하는(정신적, 영적, 의식적 차원이 보다 높다는 의미다) 세계이지만, 분명히 물질세계다. 그들의 표현에 따르면, 그들 역시도 육체적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우리와 같은 영계(靈界) 가게 된다고 한다. 다른 환생 주기로 접어들기 위해서다. 그들 역시도 더 진보하고 발전해 가야 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우리 인류보다 보다 오래 살며(인류의 10배에 달하는 수명을 가진다고 한다. , 우리 나이로 100살이면 그들 나이로는 고작 10살에 해당된다.) 보다 높은 고차원의 의식과 과학문명을 보유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영혼의 세계는 아닌 것이다. 말하자면, 물질계는 물질계인데, 보다 고차원적인 물질계라고나 할지물론 그들에게는 인간에게는 없는 텔레파시와 마인드 컨트롤, 홀로그램 창조기술 및 유체이탈, 무성생식과 같은 신적 능력(?)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러나 분명히 육체적 존재이며, 물질계에 존재하는 존재들이다. ……

 

 그런데, 요즘 전달되는 여러 가지 메시지들을 보게 되면, 이 우주에는 인간처럼 물질적 육체(물론 그 물질적 육체의 밀도나 파동 주파수 대역이 조금씩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어쨌든 물질적 육체는 물질적 육체다. 즉 물질적 육체 및 물질 에테르 적인 육체.)를 지닌 외계문명 외에도, 물질에테르 체, Ether Body를 지닌 문명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는 집단의식화하여 존재하는 외계문명도 있다고 한다. 물질적 파동 수준의 외계문명 외에도, 일종의 영적 수준의 외계문명이라는 얘기인데,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나는 도저히 알 길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상태라는 것이 사실 상 따져 놓고 보면, 영적인 세계를 의미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는 분명히 物質宇宙. 영혼의 세계, 말하자면 Astral Plane이 아니며, 靈的 宇宙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묘사하는 여러 가지 말들을 보면, 영락없는 영혼세계에 다름이 아닌 그런 존재들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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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만약 그들이 영적 우주에 존재하는 자들이라면, 굳이 UFO나 비임 쉽 같은 운반체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며, 물리적 우주법칙에 종속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그들은 먼 거리를 여행하기 위하여, 빛의 속도를 초월해야 하며, 이른바 제로 시간대에 진입하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 초광속(超光速) 우주비행을 가능하게 하려면, 엄청난 수준의 과학발전과 이에 따른 정신적, 영적 수준의 발전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먼 거리의 우주를 여행한다는 것 자체가 그들이 靈的 世界 존재하는 존재들이라기 보다는, 물질적 우주에 존재하는 존재들이라고 판단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의 상태를 묘사하는 정보를 보게 되면, 마치 영혼세계에 다름이 아닌 거다.

 

 물론, 요가난다의 스승, 스리유크테스와의 묘사에 의하면, 천상계(고급 아스트랄 세계)에는 수많은 세계가 존재하며, 이들 천상계의 주민들은 빛으로 이뤄진 이른바 비행선, 운반체를 타고, 빠른 속도로, 이 쪽 세계에서 저 쪽 세계로 여행하며 오고 간다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을 보자면, 고차원적 영계에 거주하는 주민들(영적 실체, 영혼들) 역시도, 먼 거리의 다른 천체나 별나라를 갈 때는, 빛으로 만든 운반체를 이용한다는 점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물론 스리유크테스와의 묘사를 놓고 본다면, 그 우주는 물질우주가 아니라, 영적인 우주다. , 인간이 존재하는 이 물질우주가 아니라, 인간이 천한 물리적 육신을 벗어 던지고, 보다 미묘한 영적인 옷으로 갈아 입은 영혼세계 주민들이 사는 우주라는 말이다. 말하자면 고차원적 영역에 존재하는 우주를 의미한다. 즉 인간의 죽음 후의 세계, 靈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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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 나타난 외계인, 외계지성체들 또한 물질우주로부터 온 지성체들이지, 그들이 영적인 우주에서 온 지성체들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다.

영적인 우주에서 굳이 물질화한 UFO나 운반체를 타고 지구 물질계를 방문할 이유가 있을까? 엄연히 서로 다른 차원의 세계인데 말이다. 말하자면, 지구인류에게 어떤 교육이나 지도, 혹은 도움을 주려고 왔다고 한다면, 영적 우주에서 오는 존재들은 아마도 다른 방법을 쓸 것이 분명하다. 예를 들자면, 예수그리스도, 불타 석가모니, 인도의 뭇 영적 스승들과 같은 현인, 성자들의 지구 파견(인간으로의 還生, 肉化)이다. 혹은 여타의 진보된 영적 실체를 통해서, 인류에게 어떤 가르침을 전하는 형태를 띠게 될 것이다. 물론 현재 물질우주에 존재하는 다른 외계문명이 인간세계에 비해서 월등하게 발전된 과학기술과 영적, 정신적 수준에 있다면, 그들 또한 텔레파시라든지, 지구세계로의 환생을 통해서 이와 같은 메시지 전달 및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영혼세계와 물질우주는 분명히 다르다. 나는 그 점은 확신한다. 그런데 내가 왜 혼동이 되는가 하면, 지금 우주(외계)에 존재한다고 하는 외계문명권에서 온다고 하는 자들이 묘사한, 그들 자신의 상태 및 어떤 과학기술적, 영적인 능력을 묘사하는 내용들이 도무지 구분이 되지를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적우주에 존재하는 영적 실체들인가? 아니면, 물질우주에 존재하는 물질적 실체들인가? 이도 저도 아니다!

 

거기다가 또 다른 의문점은 만일 플레이아데스 문명권이 물질우주에 존재하는 문명권이라고 한다면, 그 곳에 태어나는 영혼들은 고도로 진보한 영혼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영혼들은 굳이 물질계로 환생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진보한 영혼들이다. 내가 알기로는 물질계로의 윤회전생 사이클이 마감된 영혼들, 즉 고도로 진보한 영적 실체들은 다시는 물질계로 환생하지 않게 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플레이아데스 문명 권의 존재들은 분명히 물질적 실체(지구 인류보다는 높은 파동 수준의 육체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육체는 육체다) 속으로 환생해 온 존재들이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여기에는 두 가지 결론 밖에는 없다. , 플레이아데스 문명이 인간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은 물질세계에 존재하는 문명이 아니라, 靈的 宇宙 존재하는 靈的 世界 可能性(어차피 영혼이 비록 물질계로 윤회전생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 영혼은 영혼세계에 무수하게 존재하는 다른 영적 차원의 세계로 윤회전생 하게 된다고 한다. 물론 지구적 환경보다는 월등히 좋은 유토피아 적인 세계가 펼쳐지는 것은 물론이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생존경쟁이나 가혹한 삶의 환경, 어렵고 힘든 정신적, 육체적 노동과 스트레스, 기타 삶의 고통과 환란이 거의 없다는 얘기다.), 아니면 지구와 같은 물질 우주에 존재하는 문명이지만, 높은 차원의 물질적 우주(영적 우주에 근접해 가는)에 존재하는 문명권(이른바 물질 에테르 문명권?)

 

어쨌든, 영적인 세계, 영적인 우주에도 무수하게 많은 다른 차원의 세계가 존재하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물론 우리가 영적인 세계, 영적인 우주라고 하지만, 그들 차원에서 본다면, 그것 역시도 그들에게는 현실이며, 물질적인 측면의 성격을 띠고 나타나는 현실일 것이다. , 우리 입장에서 본다면(물질계의 인간) 아스트랄 세계는 보이지 않으며, 존재하지 않는 허상으로 보이지만, 막상 우리가 아스트랄 세계로 가게 된다면, 그 세계는 또 다른 현실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 우리가 물질계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접촉했던 그 모든 것들처럼 모든 것이 그대로 물질적 측면이라는 성격을 띠고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유계 측면에서 본다면) 이는 우리의 영적 의식이 담긴 그릇이 그 세계에 맞게 변형된 아스트랄 바디가 된다는 점에서 그렇게 될 것이다.

 

 

□  탐욕과 이기주의

 

어쨌든 플레이아데스 인들이 전해준 바에 따르면, 그들 문명은 우리 인류가 고대로부터 희구해 온 유토피아 임은 분명하다. 여기서 또 다른 의문은, 비록 그들이 그토록 높은 단계의 문명을 이룩했기는 하지만, 수십만 년에 걸쳐서 탐욕과 지배욕에 의한 치명적 전쟁이 계속 발생되어 왔다는 점이다. 그 결과로서 그들 사회는 계속해서 멸망과 재건을 거듭했다는 얘기인데…… 그렇다면, 그들 역시도, 고도로 진보하고 발전된 정신적, 영적 의식을 지닌 초인, 신적 존재들은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 그들이 지배욕, 탐욕에 의한 전쟁을 중지하고 평화를 찾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이라는 메시지를 믿는다면 말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수 많은 외계문명(인간 사회에서는 우주에 존재하는 외계문명이 부인되고 있으며, 외계인을 논하면, 유치하며 저열한 발상이나 SF 공상과학 정도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치밀한 정보차단과 왜곡의 결과일 뿐, 실제 존재하는 것이 외계문명이라고 확신한다.)들이, 모두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 같이 고도의 정신적, 영적 수준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그들 중 많은 경우는 우리보다 수천 년에서 수만 년, 수십만 년을 앞서 간 과학기술과 정신적, 영적 경험, 지혜와 지식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인간에게 흔히 나타나기 마련인, 지배욕, 권력욕, 탐욕이 모두 제거된 성자 수준에 그들 모두가 놓여 있는 점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유로는 그들이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치명적 전쟁을 겪었다는 그들의 메시지 내용에서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지구를 배후에서 지배하고 있다고 알려진 어둠의 세계비밀 정부나 사악한 외계인들의 경우를 놓고 봐도 그렇다.

 

이들에게는 현재 인류를 월등히 초월하는 고도의 과학기술과 초능력이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들이 성자 수준에 놓여 있는 자비롭고 사랑에 가득 찬 그런 존재들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우리 인간이 발전 진보한다는 의미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해답이 될 것이다. , 그 정신적, 영적 수준이 가장 중요한 핵심적 측면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탐욕과 이기주의가 배제된, 그리고 그것을 초월한 이타주의와 사랑, 자비, 형제애이다.

 

우리 인류가 그토록 유토피아를 희구하지만, 그것을 달성할 수 없는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근본적 요인은 바로 이 지배욕과 탐욕, 이기주의에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보다 월등하게 발전되었다고 하는 외계인들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어떤 면에서 본다면, 인간보다도 더 사악하고, 이기적이며, 야만적이고 탐욕에 가득 찬 무리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사악한 외계인들이다. 그리고 비단 사악한 외계인만이 아니라, 이른바 착한 외계인, 사랑과 평화 속에 살아가는 외계문명이라고 할지라도, 그들 역시도 무수하게 많은 전쟁의 참화 속에서 멸망과 재건을 되풀이 했다는 점에서 봐도 그렇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인간의 마음이다. 그 존재의 중심적 가치관과 정신적, 영적 수준이다. 이는 에드거 케이시가 말한 바와 같이, (비록 내가 산을 들어 움직이고, 바다를 휘저어 폭풍을 일으키는 힘이 있을지라도, 만약 내게 사랑이 없다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말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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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이 지구세계가 맞다면, 이들은 지구에 초청되지 않은 우주 불량배들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이 곳이 다른 세계라고 해도, 이들은 명백하게 지옥에 다름 아닌 세계를 만들어 놓고 있는 것이다. 자각하고 깨어나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다 더 행복해 질 수 있으며, 더 즐겁고 평등한 유토피아 세계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우리 마음에 달린 문제지만, 유독 교활하고 잔인하며 사악하고 악독한 자들, 지배욕, 권력욕, 탐욕과 이기주의에 가득 찬, 소수의 무리들에 의해서 이와 같은 행복의 기회가 박탈되고 있다는 점을 우리 모두는 알아야 한다. 물론 우리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오점들, 역시 이와 같은 불행한 현상을 부추기는 중대요인인 것 역시 사실이다.

 

결국은 이기주의와 탐욕이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