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과 즐거움 ......
■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
행복에 대한 서양인의 고전적인 이해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을 중심으로 논문(김양현) 중에서 일부를 발췌하여 요약함
□ 복과 행복의 구분
국어사전에서는 복이 행운이란 말을 숙명의 의미 속에서 이해하고 있다면, 행복은 사람의 능동적이고 자립적인 활동성과 깊은 관련을 갖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 행운, 좋은 운수 또는 행복스런 운명, 좋은 운수 또는 행복스런 운수 . 복, 삶에서 누리는 좋고 만족한 현상과 거기서 얻는 기쁨과 즐거움
생활에서 누리게 되는 만족과 그것으로 말미암은 기쁨과 즐거움
; (자신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대상으로 하여 만족과 기쁨
해당 대상이나 경우를 많이 가지거나 당하거나 겪게 되는 것
; 미신적 관념에서, 숙명론적으로 받게 되어있다고 하는 행운
. 행복, 복된 좋은 운수; 생활의 만족과 삶의 보람을 느끼는 흐뭇한 상태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을 느끼어 흐뭇이 즐거운 상태
좋은 일이 많고 복이 많이 차례져서 부러운 것이 없이 즐거운 상태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생활에서 사람이 맛보는 크나큰 만족과 기쁨
우연 혹은 운명과 결부된 행운을 평가절하 하고 배격한 것은 아니지만, 서양인들은 그들의 역사에서 의식적으로 줄곧 행운보다는 행복에 더 많은 가치를 두어 왔고, 또 궁극적으로 추구할 것으로 이해 하여 왔다.
서양에서 행복은 고대로부터 인생의 최상의 선으로, 곧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추구하는 최고의 궁극목적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럼 행복은 무엇인가? 모든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지만 행복이 무엇인가에 대한 규정과 이해는 매우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행복을 부나 명예 혹은 권력에서 찾으며, 또 어떤 사람은 행복을 건강과 장수에서, 또 혹자는 학문적 탐구와 이론적 관조에서 찾는다. 우리의 경우에 아주 오랫동안 수(壽),부(富),귀(貴), 다남(多男) 등이 복의 상징이 되어온 것처럼, 서구에서도 부, 명예, 권력, 건강, 장수 등이 행복이라는 생각은 아주 오래된 생각이었다.
철학에서 말하는 행복은 좋은 우연, 곧 행운도 아니고, 욕망 충족의 결과인 한 순간의 편안한 심정의 상태도 아니다. 일반적으로 철학에서 행복의 개념은 인간의 활동성 자체에서 생겨나 긴 시간 동안 지속되는 어떤 종류의 만족감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을 최초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제시한 사람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이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
. 무엇이 행복인가에 대한 물음
사람은 누구나 행복한 삶, 복 있는 삶을 원한다. 현대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서양문명의 탄생지였던 그리스 사회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을 부, 명예, 권력, 건강, 장수 등으로 이해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인의 행복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행복과 안녕을 실천철학의 중요한 연구과제로 삼았는데, 그에 따르면 행복한 삶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공동체 속에서의 좋은 삶 혹은 성공적인 삶이다. 달리 말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공동체 속에서의 삶 전체에 대한 인간 자신의 만족과 연관시켜 파악하였고, 선하고 올바른 삶을 통하여 참된 행복을 얻는다고 보았다.
행복이 인생의 최고의 선이라는 데에 일반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그 행복이 무엇이냐는 질문의 답은 사람에 따라, 또 한 사람에게 있어서도 경우에 따라 다르다. 보통 사람들은 쾌락, 부, 명예, 권력, 건강 등등 분명하고 뻔한 것을 행복이라 여기지만, 이처럼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이 행복은 그런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경우에 있어서도 어떤 때는 건강이 행복이었다가, 또 어떤 때는 부유함이 행복이 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바로 이 점이 구체적인 무엇이 행복이라는 답변은 곧바로 반박될 소지가 있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해 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쾌락, 명예, 부 등이라고 여기는 대중들의 견해를 반박하고, 세 가지 삶의 형식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것은 플라톤의 “국가” 편에서 유래한 것인데, 쾌락적인 삶, 정치적인 삶, 관조적인 삶이다.
대중들은 동물적인 본성에 합당한 쾌락적인 삶을 택하고, 교양 있고 능동적인 사람들은 명예를 행복이라 생각하는데, 그것은 정치적인 삶의 목적이다. 관조적인 삶은 자족적이며 참된 행복에 이르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조적인 삶을 최고의 행복이라고 주장한다. 돈 버는 생활은 부득이한 측면을 갖지만, 부는 분명히 우리가 찾는 최고의 선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유용성의 가치를 가지며,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 지속적인 활동성으로서의 행복
행복을 부, 명예, 권력, 건강, 장수 등을 얻거나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상태’로 이해한 당시 대중들의 견해와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인간 고유의 능력이 탁월하게 발휘되는 활동성으로 이해하였다. 즉, 행복을 어떤 무엇을 가지고 있는 상태로 본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탁월함(덕)을 통로로 파악한 것이다. 탁월한 행위는 그 자체로 즐거운 것이며, 선하고 고귀한 것이다. 이러한 활동들에서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자족의 행복을 인지한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하기 위해 외적인 여러 가지 선들, 예를 들어 친구, 재물, 좋은 집, 혹은 외모나 건강 등이 필요함을 부인하지 않는다.
“우리가 자족적이라 함은 어떤 한 개인만을 위하여 족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부모나 자녀와 아내와 일반적으로 친구들과 동포들을 위해서도 족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은 본래 사회적인(정치적인)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이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사회적‧공동체적인 행복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말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 개념은 사회적 규정성과 깊은 연관관계 속에서 그 의미를 완전히 드러낸다고 하겠다.
행복은 궁극목적이요, 최고의 선이며, 또 그 자체로 부족함이 없는 자족적인 것이라는 논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의 본질에 대한 물음에 답하려고 한다.
그는 인간에게만 고유한 능력과 본질을 해명함으로써 행복의 본질을 밝힐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는
행복이 인간의 본질과 밀접하게 관련되며, 또 인간 본질의 탁월한 실현이 바로 행복임을 암시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인간이 식물처럼 생명의 기능인 영양과 성장을 가진다는 점에서 보면, 생명이 인간 고유의 기능과 본질은 아니다. 인간과 동물이 공유하는 감각능력도 마찬가지로 인간만의 특수한 능력이 아니다. 인간이 식물, 동물과 공유하는 부분을 빼고 남는 부분이 인간만의 고유한 기능이고 그 본질이라는 점, 바로 이 점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우리에게 제시한 귀결점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이성적인 정신(영혼)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본질인 정신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지는데, 그 하나는 이성적인 원리에 순종하는 의미에서의 능력이요, 그 다른 하나는 이성적인 원리를 소유하며 이성적으로 사유한다는 의미에서의 활동이다. 인간 고유의 능력은 한마디로 정신이 이성적 요소에 부합하는 활동성이다.
거문고 타는 사람의 능력은 거문고를 탁월하게 잘 타는 데 있듯이, 탁월한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능력의 활동을 통해 행위를 탁월하게 수행한다. 따라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선인 행복은 자기 활동의 참된 탁월함이라는 의미에서 정신의 활동성이다.
행복은 인간의 탁월함(덕)에 따른 활동성인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이 탁월함은 신체의 탁월함이 아니라 정신의 탁월함이다. 다시 말해서 행복은 인간에게만 본래적이고 고유한 정신의 활동인 것이다.
정신의 이성적 요소를 이론적인 지성과 실천적 지혜로 구별하듯이, 아리스토텔레스가 탁월함(덕)도 두 종류로 나눈다. 지적인 탁월함과 도덕적인 탁월함이 그것이다. 지혜, 지성, 도덕적 통찰은 지적인 탁월함이요, 관후나 절제는 도덕적인 성품의 탁월함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은 어떤 무엇을 소유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활동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부를 소유한 상태도, 권력을 소유한 상태도, 건강한 상태도, 비록 그것들이 행복을 위한 외적인 조건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그 자체로 행복은 아니다. 행복은 인간이 자신의 본성을 실현하기 위한 지속적인 정신의 활동성이라는 점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요체이다.
행복이 한 순간, 하루, 혹은 생의 한 국면에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애 전체를 통한 인간 본질을 발현하고 실현하는 지속적인 활동성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거시적인 의미에서 행복을 생애 전체를 통한 성공적인 삶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잘라 말해서 “행복은 온전한 덕과 생애 전체를 통하여 비로소 성취되는 것이다”
비록 여러모로 운이 따르지 않고 오히려 큰 불행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고귀한 성품을 지닌 사람은 불행 속에서도 빛을 발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인생의 여러 가지 어려운 변화와 불행을 정신의 위대함과 고귀함을 가지고 품위 있게 견디어 낼 것이며, 인간의 능력 중에서 가장 안정적인 지속성이라 할 도덕적인 탁월성(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행복한 사람은 아주 심오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자기 삶의 의미를 충족하는 사람이다. 잠깐 동안이 아니라 생애 전체를 통하여 온전한 덕을 따라 지속적으로 활동하며, 자기의 이성에 따라 활동하고, 또 그 이성을 가꾸고 성숙하게 하여 최선의 정신 상태를 가지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또한 동시에 가능하다면 여러 가지의 외적인 선들도 충분히 가진 사람이 아닐까?
. 행복의 외적 조건과 획득방식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의 외적인 선들이 필요함을 인정한다. 예컨대 건강, 친구, 재물, 정치적 영향력, 좋은 집안, 좋은 자녀, 미모 등등의 외적인 선이 없으면 행복의 순전한 형태가 흐려지거나 행복에의 도달이 쉽지 않다는 점을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외적인 선이나 재화의 불가피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참된 행복을 위해서는 비단 정신적인 선들뿐만 아니라, 신체적 선(건강, 외모)이나 외적인 선들(재산, 권력 등)이 필요함을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의 획득방식에 대한 물음을 다음과 같이 제기한다. 학습이나 습관 혹은 훈련을 통해 행복해 질 수 있는가, 아니면 행복은 신의 선물 혹은 우연에 의한 것인가? 그의 답변은 분명하다. 신이 준 선물이 있다면, 행복은 바로 신이 내린 최선의 선물이겠지만, 행복은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니고, 탁월함(덕)의 학습과 훈련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덕에 대한 능력이 아예 없어진 사람을 예외로 한다면, 사람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배우고 세심하게 노력할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점에서, 행복은 많은 사람들이 노력을 통해서, 곧 “학습이나 마음 씀에 의하여” 획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위대하고 가장 고귀한 것을 우연에 의한 것으로 봄은 매우 엉성한 생각이다”고 단언한다. 한마디로 행복이 지속적인 노력의 결실이라는 점은 또한 행복이 어떤 종류의 유덕한 활동이라는 행복의 정의로부터도 명백하다. 이렇게 보면 외적인 선들은 궁극목적인 행복의 수단이나 조건일 뿐이다.
□ 행복주의 윤리학에 대한 칸트의 비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행복은 인생의 최고의 목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 행위의 최종적인 척도이며, 도덕적 원칙이다. 말하자면 행복은 삶의 궁극목적이며 그 밖의 모든 것은 행복을 위해 봉사하는 수단으로 설명된다. 또한 행복은 우리가 선을 행하고 악을 멀리해야 할 근거이다.
이처럼 행복을 인간 행위의 최고의 원칙으로 삼는 윤리학을 흔히 행복주의 윤리학이라 부르는데, 그 누구보다도 이러한 행복주의 윤리학을 철저하게 비판하고 경계한 사람이 칸트일 것이다. 칸트는 행복의 원리를 도덕성의 토대로 삼음으로써 발생할 폐해를 단호하게 경고하면서, 행복이 도덕성의 원천이 될 수 없음을 다음처럼 지적한다.
“자기 행복의 원리는 가장 혐오스런 것이다. 그것은 단지 그 원리가 틀렸기 때문만도 아니고 잘사는 것이 언제나 선량한 태도에 달려 있다는 주장이 경험과 상치되기 때문만도 아니다. 또한 그것은 한 사람을 행복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과 선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다른 문제이고, 또한 그 사람을 영리하고 자신의 이익에 밝게 만드는 것과 그를 덕스럽게 만드는 것이 다른 문제이기 때문에, 자기 행복의 원리가 도덕성을 확립하는 데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하기 때문만도 아니다. “그 원리가 배척되어야 하는 보다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도덕성의 토대를 허물어뜨리고 도덕성의 모든 숭고함을 무화(無化)시키는 그런 동기를 도덕성의 기초에 놓기 때문이다. 그 동기는 덕을 향한 동인(動因)을 악덕을 향한 동인과 같은 줄에 놓고 오로지 계산을 더 잘하는 것만을 가르치며, 둘(=덕과 악덕) 사이의 종류상의 차이를 아주 완전히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사실 칸트 이전의 철학자들은 도덕성의 원천을 행복이나 공동체의 질서, 신의 의지, 혹은 인간의 도덕감 등 여러 가지 심급(Instanz)에서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심급에 기대어서는 도덕의 객관적 타당성을 근거 지울 수 없다는 것이 칸트의 입장이다. 도덕원리의 안전한 토대 닦기를 위해서 칸트는 전적으로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도덕적 행위의 원리와 기준을 정초 함에 있어서 다름 아닌 이성 개념이 최고의 심급으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다. 말하자면 도덕의 원리를 ‘순수한 실천 이성의 개념’ 속에서 선험적으로 발견해야 한다는 주장인 셈이다.
칸트의 논지는,
도덕법칙은 경험 개념이나 원리들이 아닌, 순수한 이성 개념에 선험적(a priori)으로 근거해야 한다. 도덕법칙이 모두에게 구속력을 가지려면 그것의 근거는 경험적이어서는 안되고, 선험적이어야 한다. 이러한 입장을 칸트는 다음과 같이 은유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모든 도덕적인 개념들은 완전히 선험적으로 이성 안에 자신의 거처와 원천을 가져야 한다”. 말하자면 도덕적 개념들이 이성 안에서 선험적으로 발견되어야 하고, 또 순전히 이성적인 심사숙고를 바탕으로 근거 지워져야 한다는 뜻이다.
칸트가 행복이 도덕, 곧 올바른 행위의 원천이 될 수 없다고 본 이유는 이렇다. 행복이란 개념은 너무 불명료한 것이며, 또 그 개념에 속하는 모든 요소들은 경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의 개념은 보편타당성을 담보한 도덕성의 기초로서는 부적합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도덕의 요구나 가치가 행복에 의존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행복에 촛점을 맞추는 대신에 도덕법이 의지의 유일한 규정 근거임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행복이 도덕법칙을 부여하는 원칙으로 적합하지 않지 않다는 점에서 보면, 그것은 도덕의 기준도, 도덕적인 동기도 될 수 없다. 따라서 도덕적인 의지는 행복의 목적과 욕망과 무관하게 규정되어야 한다.
칸트는 행복론과 도덕론 사이에 분명한 경계선을 설정한 것이다. 한마디로 행복론은 경험적 원리를 그 근간으로 하며, 도덕론은 경험적 원리를 눈곱만큼도 갖지 않는 것이다.
“행복의 원리와 도덕의 원리를 구별된다고 곧바로 양자가 대립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순수한 실천 이성은 사람들이 행복에의 요구를 포기하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의무를 지켜야 할 때에는 결코 행복을 고려해서는 안 됨을 말한다”
유한하지만 합리적인 인간이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또 피할 수 없는 욕구능력의 규정근거이다. 이 점을 잘 간파한 것으로 보이는 칸트가 문제 삼는 대목은 행복의 원리에 따라 혹은 자기 이익을 위해 의무가 소홀히 되거나 태만하게 되는 지점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칸트가 도달한 귀결점은 분명하다. 즉 비록 인간 각자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임은 물론이고, 나아가 행복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이 인간의 보편적인 관심사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보편적인 실천의 도덕법의 근간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칸트의 생각은 인간의 삶은 행복을 최고의 목표로 설정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덕성을 토대로 중심이 잡혀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도덕법칙에 따라 행위 한다면, 인간은 행복할 가치를 누릴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칸트에 따르면, 최상선은 행복이 아니라 도덕성으로서의 덕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도덕성은 행복과 일치하지 않는다. 도덕적 인간은 행복할 가치가 있으나, 실제로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다. 결국 행복이 행복할 가치와 필연적으로 비례하는 것이 아니기에, 덕은 최상선을 의미할 뿐 최고선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행복은 반드시 덕에 비례한 것은 아니며, 또 도덕성은 행복의 수단이 아니다.
이 점에서 칸트는 인생의 궁극목적을 행복으로 파악한 아리스토텔레스와 견해를 달리 하고 있다. 칸트에게 행복은 인생의 궁극목적이 아니고, 중요한 것은 오히려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의 도덕성의 문제이다. 도덕적으로 행위 하는 사람은 행복할 가치가 있으며, 또한 자신의 행복뿐만이 아니라 타인의 행복을 고려할 도덕적인 의무를 갖는다.
■ 고대 철학자들의 행복론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16대 로마 황제(161~180 재위);
후기 스토아학파의 대표적인 철학자, 수사학, 철학, 법학, 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 재주가 있었음
“아우렐리우스의 인생의 법칙”은 최고의 인생을 살기 위한 아우렐리우스의 77가지 가르침을 담고 있음
아우렐리우스가 전쟁, 전염병, 자연재해가 일상 이었던 2천 년 전 난세의 세상에서 스스로를 다잡기 위해
자신만의 인생 지침을 설정하였는데, 이것이 현대인에게 불멸의 명상록으로 재탄생 하게 됨
. 에피크로스 (Epicurus,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크로스는 개인적·정신적 쾌락의 추구를 인생의 최대 목표로 하는 사상을 주장함. 에피크로스의 쾌락
주의는 무절제한 쾌락이 아니라, 간소한 생활 속에서 정신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절제된 쾌락이었음
. 에피크로스 학파(쾌락주의): 정신적 쾌락, 감각과 경험 중시, 이상적 상태 = 아타락시아
. 스토아 학파(이성주의): 금욕주의, 이상적인 상태 = 아파데이아
. 두 학파의 공통점: 개인의 안심입명과 행복추구
. 에픽테토스(Epictetus, 고대 그리스 (55년경~135년경);
스토아 학파의 대표적인 철학자, 소아시아에서 노예로 출생함. 고문으로 절름발이가 되었으며
이 때 스토아 철학을 배웠으며, 노예에서 해방되자 철학을 가르쳤음. 그의 사상은 의지의 철학으로서
실천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으며, 자유로울 수 있는 최대의 것으로는 신을 생각하였음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이 얼마나 이상한 행동인가. 인간들은 자신들과 더불어 사는 동 시대의 사람들을 칭찬하려고 하지는 않으면서, 자신들이 본적도 없고 보지도 못할 후세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것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그것은 조상들이 너에 관하여 말을 하지 않았다고 네가 슬퍼하는 것과 대동소이한 것이다.
. 죽음이란 감각적 인상과, 충동에 의한 조종과, 마음의 방황과 육신에 대한 봉사로부터의 휴식이다.
. 남이 하는 말을 경청하고, 최대한 말하는 사람의 영혼 속으로 들어가는 습관을 가져라.. 변화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변화 없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어떤 외적인 일로 네가 고통을 당한다면, 너를 괴롭히는 것은 그 외적인 일이 아니라, 그 에 대한 네 판단이다. 그리고 그 판단을 당장 지워 없애는 것은 너 자신에게 달려 있다.
. 육신의 모든 것은 강이고, 영혼의 모든 것은 꿈이요 연기다. 그리고 삶은 전쟁이자 나그네의 체류이며, 사후의 명성은 망각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길라잡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오직 한 가지, 철학뿐이다.
. 이웃 사람들이 말하고 행하고 생각하는 것에 마음 쓰지 않고, 오직 자신이 행하는 것이 올바르고 신의 마음에 들도록 마음 쓰는 사람은 얼마나 많은 여가를 버는가?
선한 사람이라면 주위의 나쁜 성격을 둘러볼 것이 아니라, 좌고우면 하지 말고 목표를 향해 곧장 달려가야 한다.
. 인간사란 얼마나 부질없고 하찮은 것인지 보라. 어제는 한 방울의 진액이었다가 내일은 미이라나 재가 된다. 따라서 이 짧은 시간을 자연에 맞게 보내고 나서 즐거운 마음으로 떠나도록 하라. 올리브가 다 익은 뒤 낳아준 대지를 찬미하고 길러준 나무에 감사하며 떨어지듯이......
. 적에게 복수하는 최선의 방법은 그 적처럼 되지 않는 것이다.
□ 에피크루스
. 진리의 기준은 감각이고 정열이다.
. 인생을 즐겁게 하는 것은 지속적인 음주나 향연이 아니라, 선택과 거부의 근거를 조사하는, 그리고 영혼을 괴롭히고 많은 혼란을 야기하는 공허한 의결을 패퇴시키는 냉철한 관조이다.
. 다른 사람들로부터 당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전혀 없이 평온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 자신을 다른 사람들의 친구로 만들어야만 한다. 그가 친구로 삼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면 최소한 적으로 만드는 것은 피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그의 능력 밖의 일이라면 가능한 한 그들을 멀리해야 한다.
□ 에픽테토스
. 그대에게 기쁨을 주며 이익을 주는 것, 따라서 그대의 사랑을 받는 것에 관해서 그것이 본시 어떠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밝히는 것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특히 아주 사소한 일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 이 세상 모든 일들이 그대 생각대로 되기를 바란다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일어 날 테면 일어나라고 바라는 편이 마음 편할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행복할 것이다.
. 병은 육체에 장애를 일으키는 것이지 의지에 장애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의지가 스스로 질병을 불러들이지 않는 한 절름발이는 다리가 병신이지 의지의 병신은 아니다. 어떤 일이 그대 신변에 일어날 때는 반드시 그렇게 타일러 주라.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대에게 장애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테니까.
. 진정한 행복은 우리들의 힘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만 있는 것인 만큼, 질투라든가 선망은 무의미한 것이다.
□ 근대 지성들의 행복론
부활교회 회원논단 중에서,
내용중 일부를 발췌한 내용임
■ 러셀의 행복론
.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1970,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수리논리학 분야의 저작들과 평화운동, 핵무장 반대운동을 비롯한 사회정치운동으로 유명하다. 195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사상은 분리된 두 개의 주제를 갖고 있었다. 그 하나는 절대 확실한 지식의 탐구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삶에 대한 관심이었다. 전자는 그의 스승이며 협력자였던 화이트 헤드와의 공저 "수학원리"로 결실을 맺어 현대의 기호논리학과 분석철학의 기초를 이루었다
러셀은 20세기 지식인 가운데 가장 다양한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 인물이었다. 철학. 수학. 과학. 윤리학. 사회학. 교육. 역사. 정치학. 논쟁술에 이르는 적어도 40권 이상의 책을 쉬지 않고 출간했다. 그의 탁월함은 자신의 지능을 최대한 사용하는 놀라운 능력과 기억력이 밑받침 되었지만 그의 활동력의 원천은 심오한 휴머니즘적 감수성이었다. 그 심오한 휴머니즘적 감수성은 스스로 자유로운 무정부주의, 좌파, 회의적 무신론의 기질이라고 불렀던 성향을 통해 사회변혁운동에서 일관성 있게 표현되었다.
□ 행복의 의의
버틀란드 러셀 (Bertrand Russell : 1872~1970)은 "변화하는 세계를 향한 새로운 희망"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힘들고 길었던 수많은 길들을 지나, 지성으로 자연의 장애를 극복하는 방법을 발견 했으며, 자유와 기쁨 속에서 나 자신을 비롯한 모든 인류가 다 함께 평화롭게 사는 방법을 발견 했다.”
그야말로 이 말은 한 세기에 걸쳐 삶의 고투 끝에 마침내 행복의 피안에 도달한 철인의 진심 어린 술회이다. 확실히 인간의 행복은 환희를 향해 가슴을 열고 과거의 어둠 속으로 공포를 떠나 보냄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는 "행복의 정복"에서, “행복은 무르익은 과일처럼 복된 환경에 의해 입 속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피할 길 없는 불행과 심신의 여러 가지 질병과 투쟁과 빈곤 그리고 죄악이 충만한 이 세상에서 남녀를 막론하고 행복한 인간이 되려면, 누구나 다 함께 당하는 여러 가지 "불행의 원인"과 과감히 싸울 수 있는 방법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라고 설파 한다.
그의 행복론은 무수한 인생의 우여곡절을 거쳐온 그의 나이 58세에 쓰여졌다는 점에서 그의 행복에 대한 생각들은 그 자신의 풍부한 인생체험에서 나온 일종의 확증을 가진 처방전이며, 특히 창조의 세계를 응시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키워가는 청년들에게는 가야 할 바를 일러주는 나침반과도 같은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 불행의 심리적 장애
러셀의 윤리사상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는 "윤리와 정치에 있어서의 인간사회"라는 책 가운데서 현대사회의 바람직한 윤리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사회제도"와 "개인이 갖는 여러 욕구들의 성질"을 함께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바람직한 윤리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사회 윤리적 측면과 개인 윤리적 측면" 그 양자를 모두 면밀하게 살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그의 행복론 또한 이미 그 양자의 측면이 유기적으로 함께 다루어질 수 밖에 없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개인의 행복은 그를 둘러싼 외적 조건 및 그의 내적 마음의 상태 내지 인생관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에, 외적으로는 "평화의 확립"이 기본적으로 전제되어야 하고, 내적으로는 현대사회의 정신적 장애인 "갈등들을 일으키는 정념들"의 내용과 그 심리적 장애의 원인들을 분석하여 이를 토대로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계발함으로써 행복한 인간사회로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했다.
러셀은 심리적 장애 즉 불행의 원인이 되는 요소들로서 다음과 같은 것을 들고 있다.
. 염세적인 인생관을 가진 "바이런적 불행의식" . 인간생활의 즐거움을 방해하는 "경쟁" . 사물에 대한 욕구의 좌절과 그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과정에서 빠져드는 "권태와 자극" . 긴장의 연속에서 생기는 "피로" . 타인의 장점이나 우월함에 대한 "질투" . 자기자신의 장점을 과대포장 하는 "피해망상" . "죄의식" . "여론에 대한 공포"
러셀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이러한 "심리적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기자신을 초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즉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타파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중심적인 감정이나 정서가 여러 정념의 형태로 발전하여 장애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 행복을 정복하는 방법
러셀의 행복론은 “부정적 접근법”이라 할 수 있다. 그의 행복론은 기본적으로 아주 주관적이고 실체가 불분명한 조건들을 갈팡질팡 추구하기 보다는 그러한 조건들을 저해하는 뚜렷한 불행의 객관적 요인들을 찾아내어 이를 제거하기 위한 사회적. 개인적 조건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고, 개인이 추구할 수 있는 긍정적 태도 또한 그러한 기본 바탕 위에서 논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행복의 정복"이란 피할 수 없는 불행, 질병, 심리적 장애, 갈등과 빈곤과 악의로 가득 찬 세계 속에서 개인들을 공격해 오는 불행의 실제적 원인들을 찾아내어 그것과 맞서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 같은 전제하에 러셀이 제시하는 행복의 요소를 살펴보면,
. 건강 (Health)과 열의 (Zest) . 서로에 대한 애정 (Affection) . 일 (Work) . 균형감을 갖게 하는 비개인적 흥미 (Impersonal interest) . 생활을 위한 노력 (Effort) . 결과를 받아들이는 체념 (Resignation)
□ 희망의 윤리
러셀은 행복론을 전개하면서 객관적인 외적 조건과 주관적인 내적 조건 양자를 모두 중요하게 생각했다. 따라서 여러 가지 사회적 조건들과 대결하고 그 개선을 위한 노력을 촉구함과 동시에 행복을 위해 개인들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추구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는 인간성의 개선을 위한 방법론을 구상하면서 인간의 생물적 본능을 결코 무시하거나 간과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이 참기 어려운 위선이라든지 정서 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되 마치 결을 따라 대패로 나무를 다듬듯 그 정념들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방향을 탐구했던 것이다.
현대사회는 "합리적이고 창조적인 희망" (Rational and creative hope) 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부정적 감정보다 긍정적 감정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절망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사랑의 능력과 동정의 능력은 물론, 인류를 향한 웅대한 희망의 능력을 쟁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이 현대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용기와 희망과 흔들리지 않는 신념" (Courage hope and unshakable conviction) 이 필요하다. 자칫하면 부서질것 같은 자신의 정신을 고무하고 격려하면서, 서로의 삶에 필요한 "희망의 윤리"를 창조하는 데에 현대인들의 보람이 있는 것이고, 거기에 현대인의 행복도 존재한다. 우주 속에서 인간은 그 무력감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으나 우리는 우리의 모든 능력을 다해 싸우며 극복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행복을 획득하기 위해서 고통과 좌절과 싸워가면서 인생의 목적을 향해 끊임없이 전진해야 한다. 그리고 인생에 승리하기 위해서 관심은 넓혀가되 아집은 한걸음 뒤로 물러서게 해야 한다. 러셀은 희망의 윤리를 영원한 생명의 흐름에 대한 확신을 통해 추구해 간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인간의 존재를 강에 비유하여 말한다.
“ 처음에는 좁은 제방 사이를 흘러가기도 하고, 바위에 부딪치면서 폭포가 되어 떨어지기도 한다. 그러다가 차츰 큰 강이 되고, 강폭도 넓어지고 물의 흐름도 완만해 지면서 마침내 아무 고통도 없는 큰 바다를 이루면서 개인으로서 인간의 존재는 그 속에 잠기는 것이다.”
인생이 이와 같다면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보편적 생명’ 속에 융합시킴으로써 개인의 고통과 괴로움을 초월하여 그 스스로의 존재가 갖고 있는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 러셀의 행복에 이르는 지혜
. 인간은 동물이나 식물과 마찬가지로 대지에서 영양을 섭취한다. 대지에서 우러나는 생명의 리듬은 매우 느리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은 대지의 필연적인 순환이다. 휴식은 운동 못지 않게 중요하다. 그리고 이 오랜 생명의 성쇠를 함께 맛보는 것은 어른들 보다 어린이에게 더욱 필요한 일이다.
. 지혜로운 자는 걱정을 할 필요가 있을 때만 그렇게 한다. 수양을 쌓은 마음은 어떤 특정 문제를 밤낮으로 골똘히 생각하는 법이 없다. 생각해야 할 때만 생각하는 것이다.
. 걱정이 되는 어려운 문제를 결정해야 할 경우에는 깊이 생각하여 곧 결단을 내린다. 망설이는 것처럼 정신을 낭비시키는 일은 없으며, 또 무익한 일이 없다.
. 어떤 불행이 닥칠 때 실제로 그것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라. 능히 일어날 수 있는 이러한 불행을 정면으로 노려본 다음에, 결국 그 불행이 그다지 어두운 것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는 정당한 이유를 스스로 찾아내라. 그러한 이유는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기껏해야 내 한 몸에 일어나는 일이 결코 우주적인 의미를 가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 인간성의 여러 가지 성질 가운데서 가장 불행한 것이 "질투"이다. 질투심이 강한 사람은 남을 해치려고 하며, 사실 몰래 해칠뿐더러 질투로 인하여 자기자신 까지 불행에 빠진다. 자기가 갖고 있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지 못하고, 타인이 갖고 있는 것에서 괴로움을 찾는 것이다.
. 남을 너그럽게 생각하는 늠름한 태도는 남에게 행복을 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커다란 행복의 원인이 된다. 왜냐하면 늠름하고 너그러운 인간은 대체로 남의 호감을 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죄악감에 사로잡힌 자에게는 거의 불가능하다.
. 아무도 완전무결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또한 완전하지 않다고 해서 부질없이 신경을 쓸 필요도 없다. 자기 자신의 장점을 너무 과장하는 데서 피해 망상이 온다.
. 무릇 행복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분명한 것과 가상적인 것. 동물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감정적인 것과 이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두 가지 행복의 다른 점을 간결하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하나는 모든 인간에게 열려있는 행복이요, 또 하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자에게만 열려있는 행복이다.
. 인간에 대한 정다운 관심은 일종의 애정이라고 하겠다. 행복을 증진시키는 애정은 각자의 특징과 장점을 기뻐하며 자기와 접촉하는 사람의 이득과 즐거움을 증진시키려고 할망정 상대방을 지배하여 엄청난 칭찬을 받으려는 욕심은 부리지 않는다. 대인관계에서 이런 태도를 갖는 사람은 행복의 원천이 되며, 그 보상으로 따뜻한 대접을 받게 된다.
. 인생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지혜와 올바른 도덕의 근본이 되며, 교육의 목표가 된다. 목표가 언제나 인간생활을 행복하게 한다고는 볼 수 없지만, 적어도 행복한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조건이다.
. 불행이 닥쳐왔을 때 꿋꿋이 견디어 나가려면, 행복할 때 자신의 관심세계를 넓혀두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생명력이 왕성하여 여러 방면에 흥미를 갖고 있는 사람은 어떤 불행이 닥쳐오더라도 인생과 세계에 대한 넓고 건전한 흥미로써 이를 극복해 나간다.
. 행복한 사람은 객관적으로 살아가고, 자유로운 애정과 광범위한 흥미를 갖고 이를 통하여 자기의 행복을 소유하는 자요, 자기가 남에게 흥미와 애정의 대상이 되어 행복을 느끼는 자이다. 남의 사랑을 받는 것은 행복의 커다란 원인이 된다. 그러나 대체로 애정을 요구하는 자는 사랑을 받지 못하는 법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남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남에게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다.
. 행복한 인간은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의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아 괴로워하는 일이 없다. 그의 인격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분열하지도 않으며, 세계에 대하여도 대립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자기 자신을 "우주시민" 이라고 생각하고, 우주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마음껏 향락하며, 자기들 뒤에 오는 생명과도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함으로써 죽음에 대하여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다. 이처럼 생명의 물줄기와 본능적으로 깊이 결합될 경우에 우리는 가장 큰 기쁨을 누릴 수 있다.
■ 알랭의 행복론
. 알랭 (Alain, 1868~1951, 본명은 에밀 샤르티에(Emile-Auguste Chartier), 노르망디 지방 모르타뉴시 출생);
철학자, 비평가, 저서에 “예술론집”, “교육론”, “행복론”
고등사범학교 졸업 후, 제1차 대전 종군 경험 등을 거쳐 정년까지 고등학교 교사로 일했다.
알랭이라는 필명으로 많은 책과 기사를 발표했다. 1906년부터 지방 신문에 ‘어느 노르망디인의 프로포’라는
칼럼을 기고하기 시작해, 제1차 대전 전후로 약 5,000편을 복수의 신문과 잡지에 발표했다. 그 중에서도
행복에 대해 쓴 93편을 엮어 출판한 것이 “행복론(Propos sur le bonheur, 1928)”이다. 이 책은 힐티,
러셀의 「행복론」 과 함께 “세계 3대 행복론”으로 일컬어진다.
저서 "정신과 정념에 관한 81장, 알랭의 어록, 행복론, 사상, 문학론, 스탕달, 발자끄, 정신의 계절" 등
□ 저서 “幸福論” 요약
그의 "행복론"은 1906~1926까지 20년간에 걸친 행복에 관한 알랭의 어록을 편찬한 책이다. 그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자주 접하는 광경들을 섬세한 감각과 예리한 통찰로 그려가면서 행복에 이르는 참된 지혜를 하나하나 찬찬히 일러주고 있다.
이 작품에는 "행복은 미덕" "행복은 관대한 것" "행복한 법" "행복해야 할 의무" 등 행복이란 이름이 직접 들어간 4개의 단편을 비롯하여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콩트 등의 사상을 원용하여 쓴 행복에 관한 철학적 수상 등 많은 단편들이 담겨있다.
특히 "노기, 신경쇠약, 울화, 가정의 평화, 부부, 의식" 등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우리 일상의 주제들은 그야말로 인생이나 사회 전반에 걸쳐 우리들이 앓고 있는 병들에 대한 일종의 처방전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정도이다.
알랭은 은사 라뇨나 플라톤, 데카르트, 헤겔 등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데카르트의 영향은 심대하며, 데카르트 사상 가운데서 ‘정신과 신체의 합일’ ‘상상. 오성. 의지’와 관련한 부분은 특별히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 알랭은,. “행복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행동을 의미한다.” 그가 말하는 행복의 지름길은 한 마디로 자유로운 행동 가운데 존재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스스로 행복을 추구하되 자기 안에서 그 무엇을 찾아내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행복은 구해질 수 없다.”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행복을 얻은 사람들 만이 타인들도 행복하게 하면서 동시에 스스로도 행복을 간취하는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생각에 우리 자신의 내적인 행복은 결코 덕에 반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이미 행복 그 자체가 미덕인 것이다.” 요컨대 행복은 덕 혹은 힘 그 자체를 의미 한다.
그 외에 행복의 방법으로서 현재의 것이든 과거의 것이든 자신의 불행한 이야기를 타인에게 말하지 말 것 등을 권하고 있다. 그의 행복론을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와 행동을 떠나서는 행복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스스로의 정념에 사로 잡히지 말 것’ ‘정확한 판단이 서면 반드시 실천 할 것’ 이것이 그 요체라고 할 수 있다.
□ 알렝의 행복에 이르는 지혜
. 산 자만이 죽음을 당하며, 행복한 사람들만이 불행이라는 무거운 짐을 주체스럽게 해석한다. 그리고 사람은 자기 자신의 불행보다는 남의 불행을 더 절실히 느끼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위선이 아니다.
. 종교적인 태도는 의사가 주의해서 볼 만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마음의 안정을 찾으면, 신체의 기관이 편안해 지고 생명의 기능이 더욱 활발해 지기 때문이다.
. 화롯가에서 개가 하품을 하는 것은 사냥꾼들에게 걱정은 내일로 미루라는 표시이다. 주저없이 하품을 하는 이 생명력은 보기만 하여도 아름다운 것으로, 이 본보기를 따르지 않을 수 없다.
. 행복의 근원인 理性을 마비시키는 정욕들인 재물, 권력, 쾌락은 지성의 빛을 흐리게 하고 결국은 이것을 없애 버린다. 그러므로 현자들은 외관상 아름다운 그 부대를 조심스럽게 뒤져 본다. 그것은 자기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리지 않고 애써서 획득하고 간직한 정의감을 헛된 운명 속에서 조금이라도 빼앗기고 싶지 않다고 언제나 명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아무도 원하지 않는 평범한 운명을 짊어지고 가려고 할 것이다.
. 인간은 의욕하고 창조하는 데서만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인간은 남의 손을 통해 그냥 얻은 쾌락에서는 권태를 느끼기 쉽고, 자기 손으로 얻은 쾌락에서 훨씬 더 즐거움을 느끼는 법이다. 그러므로 행동이 따르지 않는 쾌락보다는 차라리 행동이 따르는 고통을 택한다. 역설가인 디오게네스는 고통이 쾌락보다 낫다는 말을 즐겨 했다. 그러나 이 경우 고통이란 스스로 택하고 스스로 구한 고통을 의미한다.
. 사람들은 언제나 행복이 자기를 피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서 얻은 행복에 대한 말이라면 사실이다. 얻은 행복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가 손수 만든 행복은 절대로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 그것은 배우는 일을 의미한다. 그리고 인간은 언제나 배워야 한다. 알면 알수록 더욱더 많이 배우게 된다.
. 종교는 우리에게 해악을 끼치기도 한다. 인간의 약점이나 고뇌를 노리고 있다가 사람들을 생각에 잠기게 하는 설교로 빈사상태에 처한 사람의 덜미를 잡는 설교자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나는 이런 장의사의 웅변을 미워한다. 삶에 대하여 설교해야지 죽음에 대하여 설교해서는 안 된다. 희망을 던져 줘야지 공포를 일으키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인류의 참된 보물인 기쁨을 공동으로 길러내어야 한다. 이것이 현자의 비결이며, 이것이 내일의 광명일 것이다.
. 미래에는 두 가지가 있다. 스스로 다가오는 미래와, 손수 만들어 내는 미래가 그것이다. 그런데 진정한 미래는 이 양자로 되어 있다. 폭풍이나 일식처럼 스스로 오는 미래에 대하여는 희망을 가져도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나 지상에 있어서 근면한 인간에 의해 얼마나 많은 변화가 이루어 졌는가!
. 특히 신념이라는 것이 사실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인간계에 있어서는 자기의 신념을 계산에 넣지 않으면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자기가 쓰러질 것 같다고 생각하면 쓰러지고 마는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희망에 배신을 당한다고 생각하면 희망에 배신을 당하는 것이다. 이 점에 유의하라. 자기 스스로 날씨나 폭풍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우선 자기의 내부에서, 그리고 자기의 주위에서, 다음에 인간세계에서, 우리는 부단히 그것을 만들어 내야 한다.
. 행복이란 쇼윈도 속의 물건처럼 우리가 선택하여 돈을 내고 집으로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행복은, 당신이 그것을 손에 갖고 있지 못하면 행복할 수 없다. 만일 당신이 이것을 외부에서 찾으려면 결코 아무것도 행복한 모습을 취하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행복에 대하여는 추리할 수도 예견할 수도 없다. 그것은 지금 현재 갖고 있어야 한다. 행복이 미래 속에 있는 것처럼 여겨질 때에는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당신이 이미 행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희망을 갖는다는 것이 곧 행복을 의미한다.
. 행복하게 된다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 대한 투쟁이다. 이 투쟁에서 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있는 힘을 다하여 싸운 연후가 아니면 결코 패배하였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아마도 가장 분명한 의무일 것이다. 특히 나에게 분명한 것은 행복해 지려고 원하지 않으면 행복해 질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선 자기가 행복해 지려고 원하고 이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행복하다는 것이 타인에 대한 의무라는 사실은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다. 세상에서 행복한 사람 만이 사랑 받는다는 것은 지당한 말이다.
■ 칼 힐티의 행복론
. 칼 힐티 (Karl Hility, 1833~1909 스위스 출생); 1851 독일 괴팅겐 대학(쇼펜하우어와 같은 대학)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법학 공부 1874 베른대학에서 스위스 국법 및 국제법 강의 1890 국회의원 1909 국제 중재재판소 위원 "민주정치의 이론가와 이상주의자", 행복을 주제로 한 "행복론".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저술
□ 저서 "幸福論"
특징은 기본적으로 스토아 철학과 기독교 신앙이 잘 조화된 주제로, "도덕적 실행"과 심사숙고 후 즉시 실천에 옮기는 경단과 결심이 중시되고 있다. 행복을 논하는 경우 2개의 문제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행복이란 무엇일까"라는 이론적 문제이며, 다른 하나는 "행복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라는 실천적 문제이다.
과거의 철학은 주로 전자를 문제 삼아 왔지만, 현대인이 요구하는 것은 행복을 보다 더 실제적인 측면에서 생각해 본다는 점에서 힐티는 후자를 문제 삼았다.
힐티는 우리가 하는 일 내지 직업활동들은 그 활동 들이 기본적으로 금전, 명예, 향락의 수단으로 있는 한 행복은 영원히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 반면 일 그 자체에 전심으로 몰두하면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인간이 진정 행복하고 싶다면 "1주일에 6일 동안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자기의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빵을 먹지 않으면 안 된다."
스토아 철학에서 영향을 받은 힐티는 "행복은 평정을 지속하는 힘"에서 주어진다고 말한다. 야심이나 세속적인 성공을 염두에 두지 않고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열심히 한다면 마음은 자연스럽게 평정을 이루게 된다. 반면 금전, 명예, 향락에의 욕망은 마음을 혼란하게 만들어 불안과 초조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 결과 피로나 병을 얻게 된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일이란 정신적 노동(학문이나 예술 등)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실제 행복은 그러한 정신적인 노동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단순한 육체노동을 기계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오늘날의 인간들에게 힐티의 행복론은 한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 힐티의 행복에 이르는 지혜
. 행복의 첫째 조건은 윤리적 세계질서에 대한 확고한 신앙이다..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라는 것은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이다.. 미래는 일하는 사람의 것이다. 권력과 명예도 일하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게으름뱅이의 손에 누가 권력이나 명예를 안겨 줄까?
. 행복하기를 바라거든 먼저 일을 시작하자. 실패한 생애는 대개 그 사람이 전혀 일을 가지지 않았거나, 일이 너무 적었거나, 혹은 정당한 일을 가지지 못한데 그 원인이 있다. 그러나 일을 우상으로 섬기지는 말자. 일함으로써 참된 신에게 봉사하자.
. 어느 정도 고독을 사랑한다는 것은 조용한 정신의 발전을 위해서나 또는 진실된 행복을 위해서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 행복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있다. 아니, 알고는 있지만, 그것을 존중할 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괴테 "타소"에서)
. 불행 그 자체에서 이득은 없지만, 그것은 3명의 건실한 자식을 갖고 있다. 그들의 이름은 "힘, 인내력, 동정심"이다.
. 대체로 고난은 장래의 행복을 뜻하고 그것을 준비해 주는 것이므로, 나는 그러한 경험을 통해서 고난을 당한 때에는 희망을 갖게 되고, 반대로 너무나 행복할 때에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 위대한 사상은 반드시 커다란 고통이라는 밭을 갈아서 이루어 진다. 갈지 않고 둔 밭에서는 잡초만 무성할 뿐이다. 사람도 고통을 겪지 않고서는 언제까지나 평범하고 천박함을 면하지 못한다. 모든 곤란은 차라리 인생의 벗이다.
. 기쁨이 무엇인가는 원래 많은 괴로움을 참아낸 사람들만이 알고 있는 것이다. 그 밖의 사람들은 진정한 기쁨과는 거리가 먼 단순한 쾌락을 알고 있는데 불과하다.
. 성공은 차라리 늦을 수록 좋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빠른 성공은 사람의 나쁜 성질을 잡아 일으키고, 실패는 좋은 성질을 키워 나가기 때문이다.
. 늙음이 진정한 사랑을 사람으로부터 탈취할 수는 없다. 죽음조차도 사랑을 폐기할 수는 없다. 사랑은 오히려 不死의 진실한 보증이다.
. 죽음은 밤의 취침, 아침의 기상이라는 과정과 본질적인 차이가 없는 커다란 과정이다.. 인간의 모든 성질 중에서 질투는 가장 추악한 것, 허영심은 가장 위험한 것이다.. 이 세상은 오로지 사랑으로 살기 위한 기회로 성립되어 있다.
. 정열이 없는 곳에는 가치 있는 인생도 사업도 없다. 진리를 구하고 찾는 데에는 냉철한 理智의 힘이 필요하지만 이를 밀고 나가는 것은 정열이다. 어디까지나 진리에 충실 하려는 정열, 이것이 없고서는 이지의 힘도 명철해지지 못한다. 정열은 인생의 힘이다.
. 침상에 누울 때, 내일 아침 일어나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기는 사람은 행복하다.
■ 쇼펜하우어의 행복론
.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 독일 단치히 출생); 22세 때 괴팅겐 대학 입학. 1833년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 정착
염세주의 철학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프로이센 제국의 국가철학자였던 헤겔의 정신철학에 반대하여 ‘의지의 형이상학’을 주창하였다. 그의 사상은 정신분석학과 실존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비합리주의에 주목한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적 사상가로 평가 받아도 좋다.
서양철학에서 쇼펜하우어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그는 헤겔 사후 서양철학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할 정도의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니체, 프로이트, 키에르케고르, 베르그송, 비트겐슈타인은 쇼펜하우어의 사람들이며 리스트, 바그너, 톨스토이, 토마스 하디, 프루스트, 토마스 만, 등의 작가들이 그에 심취하였다. 니체는 장차 쇼펜하우어가 헤겔보다 더 유명해질 것이라고 말했으며, 톨스토이는 쇼펜하우어를 “가장 천재적인 인간”으로 불렀다. 쇼펜하우어의 의지형이상학은 그의 제자 에두아르트 폰 하르트만의 무의식 철학과 니체의 권력의지를 매개로 하여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사실상 정신분석학에서의 리비도와 같은 것이다.
이 세상은 "존재하는 세계 가운데 최선의 세계"(라이프니츠)가 아니라 오히려 혐오스럽고 참을 수 없는 세계라는 것의 그의 세계관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살이라는 수단으로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 자살은 생의 근저에서 생을 그저 무모할 정도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 밖에 모르는 "살고자 하는 의지"로부터 나오는 에너지를 잘 지배하지 못하고 거기에 패배한 사람이 선택하는 비겁하고 미련한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살하는 사람은 진정한 행복의 세계 즉 "열반"(니르바나)에 들어갈 수 없다. 그곳은 "살고자 하는 의지"를 지배할 수 있는 사람들 만이 도달할 수 있는 곳 이기 때문이다.
이같이 쇼펜하우어는 인생을 부정적으로만 파악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가 굳이 인생의 행복을 논하게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즉, 이 세상이 아무리 싫다할 지라도 우리가 어쨌든 현재 이 세상에 태어나 살고 있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에 의하면 물론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최선은 아니라 하더라도 차선책으로 어쨌든 이 괴로운 인생을 살아갈 각오를 가지고 가능한 한 유쾌하게 보내는 기교를 아는 것은 결코 쓸데 없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행복론은 정확하게 말해 ‘살아가는 지혜를 위한 잠언’이라는 형식을 취하게 되었던 것이다.
. 사람의 행복을 결정하는 3가지 요소 . 인격 ; 사람됨됨이. 이것에는 건강, 역량, 미모, 기질, 도덕적 품성, 지능 및 교양이 포함 . 재산 ;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 소유물 . 표상 ; 타인으로부터 평가되는 것으로 명예, 지위, 명성
□ 쇼펜하우어의 행복을 위한 권고와 잠언
. 지혜가 있는 사람들은 향락을 추구하지 않고 무엇보다도 고통이 없는 상태를 추구하며, 불행을 줄이기 위해 노력한다. 환상에 지나지 않는 행복을 뒤쫓아 가며 방황하는 데에 많은 불행의 원천이 있다. 또한 너무 많은 욕구에 매달려 자신의 생활 영역을 허황되게 넓혀가는 것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욕구를 향해 뻗으면 뻗을 수록 그만큼 불행에 휩쓸릴 가능성도 커지기 때문이다.
. 오직 현재만이 분명하고도 확실한 현실이고 진실인 것이다. 우리는 모름지기 이 유일한 현실에 충실해야 한다. 모호한 미래에 허황한 꿈을 갖고 다가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행복이란 이 현실에 만족하는 사람에게 속해 있기 때문이다.
. 타인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조심과 배려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어떠한 사람이라도 개성이 있고, 게다가 그것은 천부적인 것이자 조금도 바꿀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과 교제하면서 상대를 무시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그러므로 우선 무생물을 상대로 하여 자신의 인내력을 수련해 두는 것이 좋다.
. 대기의 압력이 없으면 육신이 파열해 버리는 것과 같이, 삶에 번민과 실패와 노고라는 무거운 짐이 없다면 지나친 방종으로 인하여 송두리째 파멸하거나 시한부 변덕과 사나운 광기와 어리석음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늘 얼마만큼의 걱정과 고뇌와 불행을 필요로 한다.
. 삶이란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우리에게 보내진 선물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고역으로 갚아야 할 의무이며 과업이다. 그러므로 크고 작은 모든 일에는 일반적인 불행, 그칠 줄 모르는 노력, 경쟁, 계속되는 투쟁, 몸과 마음을 다 바치는 긴장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수행하는 활동이 있을 뿐이다.
. 가난은 하류층의 끊임없는 채찍이며, 권태는 상류층의 채찍이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일요일은 권태를, 나머지 6일은 가난을 나타낸다.
. 인생의 3대 善인 ‘건강과 청춘과 자유’도 소유하고 있는 동안은 전혀 느끼지 못하다가 잃은 뒤에야 비로소 느끼게 된다. 이 3가지도 "소극적인 善"이기 때문이다.
. 인간에게 죽음이 없었던들 철학적 사색을 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삶과 죽음은 모두 생존에 속한다.
. "행복하게 산다"는 말 자체가 가지는 의미는 "불행을 줄이고 그럭저럭 살아간다"는 뜻뿐이라는 가르침에서 시작해야 한다. 인생은 향락을 누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극복하고 헤쳐나가기 위해 있는 것이다.
. 우리의 행복과 불행은 결국 마음이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는가, 그리고 그 마음이 무엇에 의해 움직이는가에 달려 있다. 순수한 지적 생활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다만 이 지적인 생활을 감당하고 즐기려면 뛰어난 정신적 소양이 있어야 한다. 만일 현실적인 일을 활발히 해 나가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면 잠시 내면생활을 중단하는 것이 상책이다.
□ 쇼펜하우어의 행복에 이르는 지혜
. 세상의 훌륭한 것들과 만나라. 폭넓은 흥미를 갖고 추구한 지식이 깊을수록 인생의 기쁨은 늘어난다.
. 지성, 판단력, 기품 있는 취미가 인생에 결실을 가져다 준다.. 행복할 때는 불행할 때를 생각하라.. 미래의 희망을 남겨두어라. 욕심이 없으면 행복하다. 그러나 미래의 희망이 없다는 점에서는 불행하다. 사람은 희망 때문에 살아간다.
. "멀리서 본 숲처럼" 아름다운 행복, 인간의 행복은 아름다운 나무들이 우거져 있는 숲과 같다. 이 숲을 멀리서 보면 놀라울 만큼 아름답지만, 가까이 가거나 그 안으로 들어가면 조금 전의 아름다움은 어느덧 사라지고 아까의 아름다움이 도대체 어디 있는지 몰라 나무들 사이에 멍하니 서 있게 된다. 우리들이 다른 사람의 명예나 재산, 행복을 부러워하는 것도 그와 마찬가지다.
. 악착스럽게 사는 대신 지식을 얻으려 노력하라. 자신에게 맞지 않는 일을 하느니 차라리 여가를 충분히 즐기는 것이 낫다.
■ 밀의 행복론
. 밀(J. S. Mill, 1806-1873, 영국 런던); 공리주의 철학자, “돼지의 철학에서 인간의 철학으로”"인간다운 품위를 갖춘 사람의 행복"을 중시하여, 밀의 공리주의를 단순히 쾌락의 양만을 추구했던 벤담의 공리주의와 비교하여 "질적 공리주의"라고 부름.
. 모든 의견에 평등한 자유가 인정되는 것이 인류에 있어 중요하다는 것을 양심적으로 인정하는 마음이 우러나야 하고, 이러한 마음이 우러나는 인내의 태도야 말로 추천하고 권할 만한 값어치가 있는 유일한 관용이며 또 무척 높은 도덕관념을 가진 인간에게 가능한 단 하나의 관용인 것이다.
. 아이에게 재미없는 딱딱한 학문을 정력적으로 그리고 보다 힘든 지구력으로써 배우게끔 하자면, 엄한 가르침과 게으르면 벌을 받는다는 것을 알려주는 일은 불가결한 방편이다.
어린 아이들이 배워야 할 것은 가급적 상냥하게, 재미있게 가르쳐 주자는 것은 물론 훌륭하다고 해야할 노력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원칙이 지나쳐서 상냥하게, 재미있게 가르쳐진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배우기를 요구하지 않게 된다면 교육의 주된 목적 하나가 희생되고 만다. 새로운 교육법은 싫어하는 일은 아무것도 못하는 인간 만을 기르고 있는 것 같이 나에게는 생각된다. 나는 교육의 한 요소로서 무섭게 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 자유란 외부로부터의 강제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적극적인 힘"이다.
. 권력이 문명사회의 한 구성원에게 본인의 의사에 반해서 정당한 제재를 가할 수 있는 유일한 경우에는 타인에게 가해지는 해악의 방지를 목적으로 하였을 때이다.
. 개인의 행위 중에서 사회에 책임을 져야 할 유일한 부분은 타인과 연계되어 있는 부분이다.
단순히 자신에게만 연관된 부분에 한해서, 개인의 독립성은 당연히 절대적이다. 개인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즉 자신의 육체와 정신에 대해서 주권자이다. (밀의 "자유론"에서)
. 사유의 자유가 필요한 주된 이유는 위대한 사상가들을 탄생시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와 반대로 보통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성취할 수 있는 정신적 발달을 획득하도록 하는 데 있다.
. 기독교의 창시자는 至高의 道德을 이루는 많은 본질적 요소를 기록된 말씀 속에서 제공하고 있지 않으며, 또 제공되도록 의도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기독교 교회는 그 말씀 들에 기초해서 자기들이 수립한 윤리체계 속에서 그 본질적 요소를 내 팽개쳤다.
. 만일 기독교인들이 이교도들이 기독교에 공평하게 대하기를 가르치려고 한다면, 그들 자신이 이교도에게 공평해야 한다.
. 오류가 편견으로 경색되고 진리 자체가 허위로 과장 됨으로써 진리의 효과를 상실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들이 한쪽의 의견에만 주의를 기울일 때이다.
. 인간은 선과 악을 구별하도록 서로 돕고, 선을 택하고 악을 기피하도록 장려해야 할 의무를 상호간에 지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고귀한 재능의 활용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그리고 우매하기 보다는 현명하고, 비천하기 보다는 교양적인 대상과 사상에 대한 그들의 감정과 목표를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서로를 계속해서 자극해야 한다.
.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종교를 믿도록 만드는 것이 한 사람의 의무란 생각은 이제껏 자행되어온 모든 종교적 박해의 근원이며, 만일 이 생각이 수용된다면 모든 박해는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다.
. 자유의 원칙은 개인이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박탈할 자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 까지를 요구하지 않는다. 자신의 자유를 소외시키도록 허용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 인간의 본성은 모형에 따라 형성되어 그것에 부과된 작업을 정확하게 해내도록 설정된 기계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 자신을 생명체로 만드는 내면적 힘의 성향에 따라 모든 방향으로 발달하고 성장하기를 요구하는 나무와 같은 존재이다.
. 人生은 問題이지 정리(定理)가 아니다. (밀의 "자유론"에서)
■ 벤담의 행복론
.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 영국 런던); 공리주의 철학자,
가치 판단의 기준을 효용과 행복의 증진에 두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실현을 윤리적 행위의 목적으로 봄
공리주의는 쾌락의 계량가능성을 주장한 벤담의 "양적(量的) 공리주의"와 쾌락의 질적 차이를 인정한
J. S. 밀의 "질적(質的) 공리주의"로 나뉨
. 功利性이란 어떤 대상의 성질이며, 이것에 의해 그 대상이 그의 이익이 고려되는 당사자에게 이익, 평의, 쾌락, 善 또는 幸福을 낳거나 또는 위해, 고통, 해악 또는 불행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는 경향을 갖는 것을 의미 한다.
. 공리성의 원리란 幸福을 促進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또는 행복에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가에 따라 모든 행위를 시인하고 또는 부인하는 원리를 말한다. 유익한 말로 표현하자면 최대 행복의 원리이다.
. 금욕주의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종교가와 도덕가이다. 도덕가들은 희망 즉 쾌락의 예상 때문에 금욕주의의 꾀임에 빠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 희망이란 철학적인 허영심이라는 마음의 양식 즉 사람들로부터 영예와 명성이 주어지는 것에 대한 기대이다.
그리고 종교가들은 공포 즉 고통의 예상 때문에 금욕주의의 꾀임에 빠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 공포는 미신적인 환상에 기원하는 것으로서 까다롭고 복수심에 넘친 신의 손에 의한 내세의 처벌에 대한 공포이다.
금욕주의자들도 동기는 다르다 하더라도 원리는 공리성의 원리와 동일하다.
. 영속할 수 있는 행위의 유일한 정당한 근거는 결국 공리성에 대한 고려이다.
. 공리성의 원리는 수미(首尾) 일관하게 추구할 수 있다. 그러나 금욕주의의 원리는 어떤 사람에 의해서도 수미 일관하게 추구된 일은 결코 없으며 또 그와 같은 일은 불가능하다. 이 지구상 인구의 1/10에 대항하는 사람들에게 금욕주의의 원리를 수미 일관하게 추구시켜 보라. 그러면 그들은 하루 사이에 지구를 지옥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 한편에서 모든 쾌락의 양을, 다른 한편에서 모든 고통의 양을 합산한다. 만약 그 차이가 쾌락 쪽이 많다면 그 개인의 이익과 관련하여 전체적으로 그 행위가 보다 좋은 경향을 가질 것이며, 그 차이가 고통 쪽이 많다면 그것은 전체적으로 그 행위가 나쁜 경향을 가질 것이다.
. 슬픔이라 불리는 고통의 양은 실제상 외부적인 표적에 의해서는 거의 측정할 수 없다. 그것은 이를테면 눈물의 양이나 흐느껴 우는 시간에 의하여 측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결 명백한 표적은 맥박일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얼굴 근육은 지배할 수 있어도 자기 심장을 지배할 수는 없다.
■ 불교에서의 행복론
불교적 행복관의 단초는 이미 석가모니 부처의 출가 동기에서부터 잘 나타나고 있다. “나는 젊고, 지극히 행복 했었다. 전혀 근심이란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래서 노인, 환자, 죽은 사람들을 보고 그들을 멀리하고 혐오하였다. 그러나 문득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나 또한 늙어 병들어 죽는 것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이와 같이 자신을 관찰했을 때, 나의 청춘의 교만함, 건강의 과시, 생명의 자랑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해서 나는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을 받고 태어난 이래 행복과 혈기로 가득 찬 내 인생의 봄날,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었던 것이다.” (增支部經典) 이러한 석가의 술회는 자신이 지금까지 행복한 생활이라고 생각한 것은 실은 무상하고도 허망한 것이며,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 반대로 생로병사와 관련된 비참한 생활이었음을 말해 준다.
진정한 행복의 근원을 찾고자 출가한 석가는 기나긴 수행을 통해 다음과 같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사람은 생사에 의해서 마음이 움직이는 일도 없고, 세상 명예나 평판에 의해서 마음이 흔들리는 일도 없고, 근심도 없고, 분노도 없고, 오직 열반의 평안함 속에 거할 수 있으며 인간의 행복으로서 그보다 뛰어난 것은 없다.” 요컨대 진정한 행복이란 ‘涅槃의 평안함’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석가가 깨달은 열반이란 어떠한 경지 인가? 열반이란 본래 타오르는 불길이 바람에 의해서 후욱 불어 꺼져버린 상태를 의미한다. 즉, 모든 번뇌가 멸해 떠나 다시 생기는 일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마음이 평온하고 고요한 그런 상태라 하겠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생활을 돌아보면 온갖 종류의 고민과 괴로움과 슬픔 들이 끊이질 않는다. 이를테면 생로병사는 물론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 미워하는 사람과 만남, 갖고 싶은 것을 못 가짐, 기타 심신에 발생하는 모든 괴로움 등 이른바 온갖 고통 때문에 마음은 항상 불안하고 동요해 마지 않는다. 이것들은 모두 우리들의 헛된 욕망, 즉, 탐진치(貪瞋痴) 등의 번뇌로 인하여 생긴 것 들이다. 사람은 헛된 욕망에 의해서 괴로워한다. 요컨대 삶의 고통과 번뇌는 ‘마음의 평안함이 최고의 행복’(法句經)임을 깨닫고 있지 못한 데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열반의 경지는 보통 말해지듯 단지 번뇌 적멸의 소극적인 경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魔王 魔人 때문에 부서지지도 않고’(智度論) 거짓 욕망에 좌우되지도 않는 ‘항상 자유인’으로서 자율적인 인격을 이룬 경지이다. 불교는 결코 현실도피의 염세적인 속세관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 오직 피하고 버려야 하는 것은 거짓 욕망이며, 올바른 의욕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늘리고 키워나가야 한다. 이러한 자율적인 인격 위에 행복이 도래한다는 것이다.
적까지도 사랑하는 자비는 원망하는 마음을 자신에게서 끊어버리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무릇 이 세상에서 원망에 대해 원망으로 보답하는 한 원망은 그치질 않는다. 자기가 원망을 버리는 것이야말로 모든 원망을 그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불변의 진리이다.” (法句經)
석가는 또 세상의 사람들에게 “자신을 길러준 부모의 은혜에 감사하고 부모를 존경하고 봉양해라. 그리고 자비를 행하듯 부모를 모시면 이것이 진실의 보은이다.”고 말한다.
석가는 죽음에 임박하여 제자 아난다에게 “자기를 등불로 삼아 자기를 의지하게 하고, 법을 밝혀 법에 의지하게 하라. 방종하지 말고 정진하는 것이 좋으니라.”(長部 經典)고 가르쳤다. 깨달음을 통해 마음의 평안과 조화를 이룬 자기야말로 행복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불교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유약함을 인간 스스로가 갖추고 있는 지혜의 힘을 통해 수행 초극 할 수 있음을 가르쳐준 ‘인간 신뢰의 종교’라고 말 할 수 있다. 자기의 해탈과 다른 사람에 대한 자비, 즉 자기의 완성과 다른 사람에 대한 봉사를 하나로 실현한 석가모니 부처의 행동과 가르침은 현대에 있어서도 불교도의 행복관의 핵심이 되면서 동시에 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과 깨달음의 말씀으로 늘 살아 있다고 할 것이다.
□ 불교에서의 행복에 이르는 지혜
. 오늘은 어제의 생각에서 비롯되었고 현재의 생각은 내일의 삶을 만들어 간다. 삶은 이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이니 순수하지 못한 마음으로 말과 행동을 하게 되면 고통은 그를 따른다. 수레의 바퀴가 소를 따르듯. (法句經)
. 무지에 굴복하지 마라. 쾌락이나 헛된 야망에 빠지지 마라. 명상 속에서 언제나 깨어 있는 사람은 마침내 저 기쁨의 절정인 ‘니르바나’에 이르게 된다. (法句經)
. 열반 (니르바나 , Nirvana, 涅槃)
니르바나(Nirvana, 涅槃)는 불교의 궁극적 목표이자 최고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니르바나에 대한 언급은 어렵고 조심스러워진다. 어떤 면에서는 그것은 이미 이론의 영역을 넘어서 있는 수행과 실천, 체험과 증득의 문제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러나 열반을 수행과 실천의 문제로만 치지 도외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목표에 대한 명확한 지식과 이해는 올바른 수행과 실천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니르바나의 어원적 의미는 불길이 꺼진 상태(吹滅)인데, 열반은 일반적으로 죽음의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이것은 부처님의 죽음을 그렇게 부른 데서 연유한 것이지만, 사상적으로는 몸과 정신이 모두 아주 없어진(灰身滅智) 무여(無餘)열반을 정신적으로는 해탈을 성취했지만 아직 육신은 남아있는 유여(有餘)열반보다 더 수승한 열반으로 취급하는 소승불교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 열반은 죽음의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부처님께서 현생에서의 열반(現法涅槃)을 무엇보다도 강조하셨던 점만으로도 충분히 짐작 할 수 있다.
부처님은 열반을 가리켜 절대안온, 최고 락(樂), 안전, 섬, 피난처, 평화, 심지어는 불사(不死)라고 까지 하셨다. 비록 열반이 어원적으로 불길이 꺼진 상태의 의미임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생명 또는 삶의 불길이 꺼진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비구들아, 모든 것은 불타고 있느니라. 불타고 있는 것은 어떤 것들인가? 비구들아, 눈이 불타고 있고, 대상(色)이 불타고 있고, 안식(眼識)이 불타고 있다. 그것은 탐욕과 증오와 무지의 불로 타고 있느니라. 또한 그것은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 그리고 슬픔과 한탄과 고통과 비탄과 절망으로 불타고 있느니라고 하신 가르침에 비추어 보더라도 그 불길 은 탐욕과 증오와 무지, 즉 3독심의 불길이며 모든 고통과 번뇌의 불길인 것이다.
따라서 열반은 생명의 불길이 꺼진 상태가 아니라 바로 이 탐진치의 불길, 고통과 번뇌의 불길이 꺼진 상태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바람 잔 숲에 새들이 날고 물결 고요한 호수 위에 고기들이 뛰노는 것처럼, 탐진치와 고통과 번뇌의 불길이 꺼짐으로써 우리의 순수한 본래적 생명은 비로소 새처럼 자유롭게 약동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열반은 생명의 불길이 꺼진 상태이기는 커녕, 오히려 우리의 순수한 본래적 생명이 연기도 그을음도 없이 완전 연소되는 상태를 뜻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석존이 설한 거문고의 비유가 시사하듯, 열반의 삶이란 악기의 침묵이 아니라 조율이 잘 된 악기에서 울려나는, 장단이 잘 맞는 아름다운 음악의 연주에 비유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요컨대 니르바나는 결코 빛 바랜 삶이나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유와 평정과 생명으로 충만한 푸르른 삶이다. 불교가 삶의 예술(the Art of Living)인 만큼, 불교의 궁극적 목표인 열반은 그 예술 자체임과 동시에 그 예술이 빚어낸 지혜와 자비의 삶 또는 자유˙평정˙생명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열반은 삶의 소멸이 아닌, 정화되고 승화된 삶의 질에 대한 언명인 것이다.
. 지혜로운 이는 이 집착의 집을 떠나 자유로운 삶을 택하나니 외롭고 적적한 곳에서 그대 자신의 진정한 행복을 맛보라. 소유욕과 헛된 야망, 그리고 그대 마음을 덮고 있는 이 무지와 갈등으로부터 벗어나서.
. 미움 속에 살면서 미워하지 않음이여! 내 삶은 더없이 행복하여라. 사람들 서로서로 미워하는 그 속에서 나만이라도 나 혼자 만이라도 미워하지 말고 바람처럼 물처럼 살아가자. 고뇌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고뇌하지 않으매 여기 크나큰 즐거움이 솟는다. 고뇌하는 사람들 속에서 고뇌하지 말고 살아가자! (法句經)
. 어리석은 자와 함께 가지 마라! 거기 원치 않는 고통이 따르게 된다. 원수와 함께 사는 것 만큼이나 고통스럽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거기 기쁨은 넘쳐 강물로 흐른다. 그 영혼이 새벽처럼 깨어있는 이, 인내심이 강하고 고개 숙일 줄 아는 이, 이런 사람을 만나거든 그의 뒤를 따르라. 저 별들의 뒤를 따르는 달처럼.
. 사랑으로 분노를 다스려라. 선으로 악을 다스려라. 자선으로 탐욕을 다스려라. 그리고 진실을 통해서 거짓을 다스려라.
. 행복이라느니 불행이라느니 하는 것을 불이라고 한다. 하지만 앎이 지극히 순수하여 일체의 헤아림을 벗어나며 지혜가 허공과 같아서 걸림이 없는 그것이 바로 不二의 법문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앎은 본질적으로 어리석음과 다르다. 어리석음이란 정작 측량할 수 없는 것, 思量의 도를 초월한 것이다. 이와 같이 아는 그것이 바로 不二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불이의 법문에 들어가는 도리는 실로 문자도 없고 말도 없으며 마음의 움직임도 없는 무생법이다. (維摩經)
.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이다.
내 삶에서 절정의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이다.
내 생애에서 가장 귀한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 ‘지금 여기’이다.
어제는 지나간 오늘이요, 내일은 다가오는 오늘이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하루를 이 삶의 전부로 느끼며 살아야 한다. (碧巖錄)
. 인간의 모든 욕망은 덧없고 허무하며 물거품과 같고 아지랑이와 같고 물속에 비친 달과 같으며 뜬구름과 같은 것이다. (華嚴經)
. 큰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렵혀 지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숫타니파타)
. 이른 새벽에 초인종이 울렸다. 집주인은 문을 열었다. 거기 아리따운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말했다. “난 幸福의 신입니다. 당신에게 행복을 주려고 찾아 왔습니다.” 집주인은 반갑게 그녀를 맞아 들였다. 그런데 잠시 후 또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자 거기 추녀가 피고름을 흘리며 서 있었다. 집주인은 말했다. “당장 꺼져! 이 미친년이 아침부터 재수 없게 남의 집 문전에서 기웃거려...” 그러자 추녀가 말했다. “난 당신에게 不幸을 주려고 온 신입니다. 아까 당신 집에 들어간 幸福의 신은 나의 언니입니다. 우리는 늘 같이 다닙니다. 당신이 만일 나를 맞아들이지 않는다면 나의 언니도 당신 집을 떠날 것입니다. 자, 나를 받아들이든가 아니면 언니를 떠나게 하든가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 하십시오.” (阿含經)
■ 기독교에서의 행복론
□ 가톨릭의 "하느님 나라와 행복"
‘하느님이 사람 각각을 만드신 것은 당신 자신의 영광과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리고 또한 사람들이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경배하면서 영원한 행복을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는 문답문은 가톨릭 신앙에서 행복의 길이 어디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리스도교에서는 행복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파악’하고, 그 정신적인 영혼의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현세적인 차원의 행복론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천주교는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를 부정하면서도 사람 각각의 행동에 수반하는 감각적 쾌락을 하느님의 창조의 결과로서 긍정한다. 또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올바르게 사는 것과 행복의 관계를 인정하고, 플라톤처럼 최고의 행복을 ‘테오리아(관조)’, 특히 천주 하느님에 대한 테오리아에서 찾는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사회 생활과 행복의 불가분성에 동의하고, 스토아의 평정한 부동심 ‘아파테이아’에도 동조한다. 물론 그것들은 완전하게 같은 의미는 아니지만, 그리스 사상이 제기하는 이러한 문제들은 서양의 그리스도교 사상에 충분히 흡수되고 있음을 철학사는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행복관의 원점은 신학자나 교리학자들의 것이 아니라는 점은 신학 이전에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약성서를 보면, 하느님은 창조된 것들의 ‘좋은 점’을 인정하고 물질의 풍부함 또한 신의 축복으로 여기고 있다. 인간은 하느님에 대한 경배와 감사의 마음 속에서 자신들의 노동을 통해 소득을 얻고 그것을 이용해 가정생활의 즐거움을 누리고 장수하기를 기원한다. 지상의 행복 또한 가치 있는 것으로 참된 신앙인 만이 그것을 신으로부터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자연세계의 가치에 대한 이러한 태도와 더불어 기독교에서는 보다 중요한 또 하나의 요소를 강조 한다. 그것은 ‘지상의 행복’에 대한 ‘천상의 행복’의 강조이다. 이것은 헤브라이 초기에는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지만, 후기의 예언자 들이나 ‘지혜의 책’ 속에서 이미 강조되기 시작한 ‘행복’에 대한 생각이다.
인간은 비록 이 세상에서 궁핍하고 힘들어도, 하느님을 믿고 그 가르침에 따라 올바른 길을 걸어가면 그 자체로 최고의 행복, 마음의 평온함을 얻는다. 올바른 길을 걷지 않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은 거짓이며, 종국적으로는 영원히 멸망에 이른다.
신약성경은 이 후기의 구약성서의 사상을 부정하기는커녕 그러한 사상을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해 혁명적인 구원의 역사로 새롭게 이어받고 있다. 그리스도가 자신의 가르침을 ‘복음’ 즉 행복과 구원의 길을 알리는 소리로 부른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이 복음의 대상이 된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당시 너무도 간절히 행복을 구하던 사람들 즉 가난하고, 슬프고, 박해 받는 사람들이다.
사실 세상에서는 돈, 권력, 쾌락, 명예를 누리는 자들이야말로 행복한 사람들로 생각되어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행복은 참된 영혼의 소유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소유물에 의존해 있다. 이에 반해 그리스도가 말하는 행복은 하느님의 나라와 같이 내면적이자 정신적인 것이다. (누가복음 17/21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 물론 기독교는 소유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는 행복은 소유물에 의한 것이 아니고, 소유물을 대하는 태도에 달려 있음을 분명히 한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라.” (마태복음 6/33) 즉 신의 의지에 합당한 세계를 실현하는 태도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 기독교도와 행복: 프로테스탄트
기독교를 한마디로 특징지으라고 한다면 행복의 종교라고 말할 수도 있다. 기독교의 핵심이 되는 복음서가 문자 그대로 행복을 알리는 것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음도 결코 우연적인 것이 아니다. 구약성서 속에서 구세주가 올 것 이라고 약속되고 있고, 이미 그 속에서부터 그가 행복과 평화를 가져올 것으로 그려지고 있음은 흥미로운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서의 축복과 관련한 하나의 오해가 있다. 기독교가 여러 가지 기쁨을 약속하고 또 행복을 가져다 준다 해도 그것이 곧 세상에서 출세하고 부자가 되고 명예를 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 크리스천에게 부과되어 있는 제일 어려운 임무 중의 하나는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라.”(누가복음 6/35) 는 명령일 것이다. 물론 그런 선행을 행하는 사람에게 큰 상이 약속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른바 현세적인 이익과 같은 것이 아니고,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세상 그 어느 것에 비할 바 없는 각별한 은총과 사랑인 것이다.
사랑이 깊으신 하느님을 아버지로서 받들고, 하느님의 자식으로서 살 수 있는 바로 그것이 인생 최고의 행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근원적인 행복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사람의 힘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을 사랑함으로써 독생자 예수를 통해 인간을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원하려는 전능자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 그리스도교에서의 행복에 이르는 지혜
.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를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라. (시128/2~3)
. 지혜가 너로 선한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또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니 대저 정직한 자는 땅에 거하며 땅에 남아 있으리라. (잠 2/20~21)
.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 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으니라.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잠언 3/13)
. 눈의 밝은 것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좋은 기별은 뼈를 윤택하게 하느니라. 생명의 경계를 듣는 귀는 지혜로운 자 가운데 있느니라. 훈계 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 견책을 달게 받는 자는 지식을 얻느니라. (잠15/30~32)
.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잠19/11)
.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 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 하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 19/21
.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14/27)
.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롬 13/8)
.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라. (요한1서 4/7~8)
■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
연구보고자료, "니코마스 윤리학" 중에서 주제글 발췌
□ 최고 선으로서의 행복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 기예나 탐구, 합리적 선택은 어떤 선(좋음)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모든 행위와 선택을 그것이 그에게 좋은 것이라고 혹은 좋은 것과 연관되는 것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행한다. 좋음은 인간 행위가 추구하는 목적이 되며, 이런 점에서 ‘좋음’ 개념과 ‘목적’ 개념은 그 내포에 있어서 동일하다.
□ 통념적 행복과 부
아리스토텔레스는 돈을 버는 삶은 강제된 삶이라고 규정한다. 부는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해서만 유용하다는 단순한 이유로 행복의 후보에서 배제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더 나아가 부가 봉사하는 목적 자체가 다시 행복일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암시를 주지만, 부는 아무리 해도 그 자체 목적이 될 수 없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진정한 행복의 자격을 가지지 않았다고 논증한다.
□ 행복의 정의
여러 탁월 함들 중에서 최상의 그리고 가장 완전한 탁월함’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를 놓고 전문가들 사이에 심각한 의견 대립이 있다. 일부는 ‘관조’(theoria) 혹은 ‘이론적 이성’을 이것의 후보로 내세우며, 이를 근거로 관조적 삶이 인간의 최고선이라 주장한다. 흔히 ‘주지주의적(intellectualist) 견해’라 불리는 이 의견에 따르면, 관조적 내지 이론적 삶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이다. 주지주의자에 따르면 관조만이 행복을 구성하거나, 관조만이 행복의 중심 축이 된다.
□ 행복의 구성 요소와 덕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궁극적 목표는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행복은 ‘완전한 덕에 따르는 “어떤 종류의” 영혼의 활동’이다고 한다.
덕들은 인간 삶의 본질적 가치들이다. 우리는 이것들 각각을 우리 삶의 행복의 부분으로서 욕구한다. 이것들 각각이 그 자체로 좋은 것이라는 이유로 그리고 동시에 이것들이 모여 하나의 완전한 목적 혹은 완전한 좋음이 구성된다는 이유로 우리는 이것들 각각을 욕구한다. 행복이라는 목적이 가장 큰 선(善), 즉 최고선(最高善)이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이것이 가장 큰 선이 되는 방식은 저것들을 배제한 채 홀로서 (가장 큰) 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저 선들 모두와 함께 그리고 오직 함께 함을 통해서만 그러하다.
다시 말해 명예, 즐거움, 지성 그리고 덕은 행복이라는 완전한 선을 구성해 준다는 의미에서, 이것들은 행복을 ‘위한’ 것이다. 다른 것들이 아니라 오직 이것들이 있어야만 행복은 완성된다는 의미에서, 혹은 더 정확히 표현하면, 이런 것들로 행복은 이루어 진다는 의미에서, 이것들은 행복을 위해 ‘필요하며’ 그리고이런 의미에서 이것들은 행복의 수단이 된다.
□ 인간의 사회적 본성과 덕
인간의 삶이 행복에 도달했다면, 그 삶은 완전하면서도 자족적인 방식으로 좋은 것이다. 이 때 조심해서 새겨야 할 것은, 행복한 삶이 자족적이라고 할 때 그 삶은 ‘홀로된’ 삶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행복은 자족적이지만, 이것은 “부모, 자식, 아내, 그리고 일반적으로 친구들과 동료 시민들과의 결합 속에서 살아가는” 삶의 형식을 통해서 구현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연적으로 폴리스적 동물, 즉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 자신의 진정한 본성과 인간다움을 그가 몸담고 있는 사회적 관계틀 및 맥락 내에서 깨닫고 실현하기 때문이다.
행복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 사회적 본성을 떠나 성립할 수 없으며 따라서 행복이 이 본성적인 사회성의 탁월한 발휘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한, 덕은 행복의 필수적인 구성 요소일 수 밖에 없다.
□ 품성의 덕
. 행복과 덕
행복은 완전한 덕에 따르는 어떤 종류의 영혼의 활동이므로, 우리는 덕에 관하여 검토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아마도 그것이 행복에 관하여 우리가 더욱 잘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덕의 유형
덕도 영혼의 이러한 차이에 따라서 구별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덕들 가운데 어떤 것을 사유의 덕들이라 부르고, 다른 어떤 것들을 품성의 덕들이라고 부른다. 철학적 지혜(sophia), 이해(synesis), 실천적 지혜(phronesis)는 사유의 덕들이라 부르고, 관후함과 절제는 품성의 덕들 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사람의 품성에 관해서 말할 때, 우리는 그는 지혜롭다거나 혹은 이해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 않고, 그는 온화하다거나 혹은 절제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현자(sophos)를 그의 [영혼의] 품성 상태(hexis)에 따라서 칭찬한다. 품성 상태들 중 칭찬받을 만한 것을 우리는 덕들이라고 부른다.
□ 쾌락과 행복
대중들 특히 지극히 통속적인 사람들은 즐기는 삶을 좋아한다고 지적하면서 권력의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보여 주는 쾌락에의 경도가 이러한 삶이 행복한 삶이라는 견해를 뒷받침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삶이 사실 짐승들에 알맞은 삶이며 노예와 다름없는 삶이라고 지적하면서 쾌락을 추구하는 삶을 진정한 행복의 후보가 아니라고 배척했었다.
이 대목에서 쾌락과 행복을 연결하는 고리는 장애를 받지 않는 활동이라는 점이다. 그 어떤 장애도 없이 자신의 고유한 활동을 온전히 발휘하는 것이 가장 선택할 만한 것이며 행복의 내용이라면, 그리고 쾌락이 바로 이 장애를 받지 않는 활동이라면 행복과 쾌락은 적어도 이 관점에서 내재적으로 연결되어있다.
□ 행복과 쾌락의 불가분리성
아리스토텔레스는 쾌락과 행복이 장애를 받지 않는 활동이라는 점에서 연결됨을 지적한 후 행복한 생활에 쾌락이 없어서는 안될 것이라는 통념을 설명한다. 행복은 완성된 것에 관련하는데 어떠한 활동도 방해를 받게 되면 완성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무 장애도 받지 않는 온전한 활동 내지 활동의 완성으로서의 쾌락은 행복과 분리될 수가 없다.
□ 행복의 부분으로서의 쾌락
만일 쾌락이 좋음이나 활동이 아니라고 하면 행복한 사람이 쾌락을 주는 생활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사실상 만일 쾌락이 좋음이 아니고, 더군다나 행복한 사람이 고통스러운 생활을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한다면, 무엇 때문에 그에게 쾌락이 필요하겠는가? 왜냐하면 만일 쾌락이 선도 악도 아니라면, 고통도 역시 선도 악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슨 까닭으로 그가 고통을 피하겠는가? 그러므로 만일 신실한 사람(spoudaios)의 활동이 또한 더 즐거운 것이 아니라면, 그의 삶 역시 더 즐거운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다.
□ 행복의 완성으로서의 쾌락
모든 사람이 삶을 추구하는 까닭에, 우리는 모든 사람이 어떤 쾌락을 욕구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산다는 것은 어떤 활동이고, 또 우리 각자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에 관련해서 그리고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들을 가지고 활동한다.
예를 들면, 음악가는 여러 가지 가락(音律)에 관련해서 그의 청각을 가지고 활동하고, 배움을 사랑하는 사람은 탐구하는 것들에 관련해서 그의 사유(dianoia)를 가지고 활동한다. 다른 나머지의 경우들 각각에서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활동한다.
그런데 쾌락은 이러한 활동을 완전하게 하며, 따라서 또한 사람들이 욕구 하는 삶도 완전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또한 쾌락을 목표로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쾌락은 각 사람에게서 그 “각각의” 삶을 완전하게 하는 것이고, 또 삶은 선택할 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 신적(神的)인 것으로서의 행복
아마도 이러한 삶은 인간적 차원의 것보다는 높은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이러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인간인 한에서가 아니라 인간 속에 신적인 그 무엇이 있는 한에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신적인 것은 인간의 복합적 본성보다 더 우월한 것인 만큼, 이것의 활동은 다른 종류의 탁월함에 따르는 활동보다 그 만큼 더 우월하다. 그러므로 지성이 인간에 비교해 볼 때 신적인 것이라면, 지성의 삶은 인간적인 삶에 비교해볼 때 마찬가지로 신적이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는 인간이니, 인간적인 것을 생각하고’, 혹은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으니, 죽어야만 할 것들을 생각하라’고 권고하는 사람들을 따를 필요가 없다. 오히려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우리 자신이 불사불멸의 것이 되게 하고,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최상의 것을 따라 살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이 최상의 것은 크기에서는 작지만, 그 힘과 가치에 있어서는 모든 것을 훨씬 능가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부분이 각각의 사람 자신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다. ……, 각 존재자의 본성에 고유한 것은 각각에게 최상인 것이며 그리고 가장 즐거운 것이다. 따라서 지성에 따르는 삶이 인간에게 최상이며 가장 즐거운 것이다. 무엇보다 지성이 바로 인간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그러므로 지성을 따르는 삶이 가장 행복한 것이다
■ 인생의 법칙
"The 77 laws of your life"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이현우 역, 윈엔원북스) "목차" 중에서
□ 나는 이 세상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01.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02.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나는 모래알과도 같은 존재다
03. 자연의 목적에 따라 모든 사물이 생겨났다 사라진다
04. 자연의 이치에 대해 논쟁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05.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애초에 예정되어 있었다
06. 기쁘든지 괴롭든지 일상의 일을 보고 놀라지 마라
07. 자연의 활동에 익숙한 사람만이 충만한 기쁨을 누린다
08. 나는 끊임없이 변화를 경험하면서 비로소 존재한다
09. 이 세상에 정지해 있는 사물은 아무것도 없다
10. 아무런 목적 없이 사는 것은 우주의 목적에 어긋난다
11. 모든 활동의 적당한 때를 정하는 것은 자연의 몫이다
□ 내일부터의 인생을 특별 보너스라고 여겨라
12. 어떤 존재라 할지라도 죽는다는 데는 예외가 없다
13. 생이 마치 천 년이나 남아 있는 것처럼 살지 마라
14. 내게 죽음의 순간이 언제 닥칠지 전혀 개의치 마라
15. 내가 세상에 머문 시간이 긴들 짧은들 아무 차이가 없다
16. 죽음 그 자체가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17. 사람들의 선의와 사랑을 간직한 채 죽음에 임하라
18. 죽는다고 해서 내 생명이 완전히 끝나는 게 아니다
19. 사려 깊은 사람은 오히려 죽음을 미소로 맞이한다
20. 나는 목숨이 다할 그 순간까지 자연의 길을 따라가리라
21. 세상과의 작별에 그 어떤 주저함도 없는 삶을 살라
22. 내일부터의 인생을 특별 보너스라 여기면서 살아라
23. 살아생전의 명성은 신기루마냥 헛된 일에 불과하다
24. 사후의 평가에 집착하는 인생은 너무나도 덧없다
□ 내 영혼 속보다 더 조용하고 평온한 곳은 없다
25. 내면의 움직임에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여라
26. 내 영혼 속보다 더 조용하고 평온한 은신처는 없다
27. 힘들고 괴로울수록 자아라는 작은 영역으로 물러서라
28. 어떤 본성이 나를 인도하는가에 내 시선을 집중시켜라
29. 나를 지배하는 이성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아내라
30. 이성 이외의 다른 어떤 것에도 예속되어서는 안 된다
31. 타인의 가식적인 찬사에 영혼이 병들게 하지 마라
32. 내 인생의 동력 장치는 육체가 아닌 내면에 숨겨져 있다
33. 외부적인 원인에 의해 일어나는 일들에 동요되지 마라
34. 내 영혼의 능력을 어디에 사용하고 있는지 자문하라
35. 인생의 참된 기쁨은 자연이 준 본분을 다하는 데 있다
36. 행동을 할 때 그 목적에 대해 자문하는 습관을 들여라
37. 자연은 나의 정신과 몸을 뒤엉키게 섞어 놓지 않았다
□ 인생의 길에서 내 영혼이 비틀거리게 하지 마라
38. 나에겐 어떤 어려움이라도 극복할 힘이 있다
39. 나를 괴롭히는 고민의 대부분은 내가 빚어낸 것들이다
40. 사람들이 비난을 퍼부어도 순수한 마음은 바뀌지 않는다
41. 쾌락과 욕망의 꼭두각시 노릇을 지금 당장 멈춰라
42. 가지지 못한 것들 대신 내가 가진 축복들을 헤아려보라
43. 올바르지 않으면 행하지 말고, 진리가 아니면 말하지 마라
44. 허세야말로 인생을 좀먹는 가장 간교한 사기꾼이다
45. 남의 평가보다는 스스로의 자신에 대한 평가가 소중하다
46. 내일의 명성에 연연하지 말고 오늘에 최선을 다하라
47. 사람들의 찬사와 비난은 칼의 양날과도 같음을 알아라
48. 지금 나에게 지워져 있는 짐은 오직 현재만의 것이다
49. 괴로워하는 대신에 고통을 없애기 위해 실행에 옮겨라
50. 우울증을 치료하려면 지인들의 장점을 떠올려봐라
□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은 인생의 소중한 의무다
51. 서로를 개선해가든지 아니면 내가 포용하든지 하라
52. 내 이해관계의 척도로 누군가의 선악을 논하지 마라
53. 다른 사람의 악행은 그냥 그곳에만 머물게 하라
54. 소문이 나를 어떻게 비방해도 나의 본질은 변함없다
55. 비난을 퍼붓는 사람들에게마저 친절히 대하라
56. 한 점에 불과한 우리가 화해하지 못하는 것은 덧없다
57. 그와 똑같아지지 않는 것이 가장 고상한 형태의 복수다
58. 상대의 잔인함에는 온유로, 악행에는 치유책으로 맞서라
59. 황당하고 분하더라도 그를 용서하는 것은 나의 의무다
60.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았다면 내 탓이라고 생각하자
61. 화를 내는 것은 연극배우에게나 어울리는 일이다
62. 타락의 늪에 빠진 사람조차도 기꺼이 사랑하라
63. 나의 잘못을 바로잡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받아들여라
64. 사람을 사귐에 있어 위선을 피하고 진실로 대하라
□ 정의를 성취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성공이다
65. 선한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스스로 시험해보라
66. 선행을 하는 데 있어 어떤 보상이나 평판도 바라지 마라
67. 사회 전체의 완성을 위해 내가 맡은 역할을 감당하라
68. 공공의 이익을 항상 염두에 두면서 생각하고 행동하라
69. 공공의 이익에 위배되지 않는다면 타인의 일에 관여 마라
70. 사회에 봉사하는 일은 혼신의 힘을 다할 가치가 있다
71. 내 삶의 목표는 오로지 공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72. 공익의 안녕에 반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멀리 하라
73. 영혼의 고결함보다 더 즐거운 일은 세상에 없다
74. 선한 의지로 언제나 정의가 제시하는 길을 따라가라
75. 좋은 평판을 듣고 있다면 먹칠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76. 그 누구에게도 거칠게 말하거나 부당하게 행동하지 마라
77. 사람으로 태어나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
□ 아마렐리우스 명상록 중에서
. 우리는 변화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과연 변화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자연이 변화보다 더 소중히 여기고 더 적절히 생각하는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장작이 연료로 변화하지 않는데 따뜻한 물로 목욕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음식물이 변화를 거부하는데 어떻게 영양을 섭취할 수 있을 것인가? 변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도 사물이 유용하게 된다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일어나는 변화 역시 이와 유사한 것이며, 자연의 섭리가 동일하게 적용되는 문제가 아니겠는가? 예기치 못한 변화무쌍함으로 인해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만물을 관장하는 우주의 본성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으며, 사물의 배합 방식 또한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 모든 존재는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과 같아서 멈춤이 없고, 그 활동은 영원토록 변화를 거듭하며, 그 원인 또한 무한히 바뀌어간다. 결국 이 세상에 정지해 있는 사물은 아무 것도 없다. 바로 우리 곁에는 무한한 과거와 미래가 위용을 자랑하고, 모든 사물은 깊은 영원의 심연 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인생의 시간이 마치 영원한 것처럼 갈망 하고, 노여워 하며, 안달하는 인간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자신의 체중이 300파운드에 채 미치지 못한다고 해서 애통해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자신의 수명이 더 오래 주어지지 않는다고 안달인가? 당신에게 주어진 체중에 만족하는 것처럼 당신의 수명에도 만족하라.
. 견딜 수 없는 일들이 사람에게 일어나는 법은 결코 없다. 마찬가지로 소나 포도 나무나 돌들에게도 각각 그 자신의 본성에 걸맞는 일들만 일어나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사물은 자신에게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일들만 경험하게 되는데, 어찌하여 당신은 불평하는가? 우주의 본성은 결코 당신이 견딜 수 없는 일들을 일으키지 않는다. 당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당신이 이겨낼 수 있는 것이든지, 아니면 그럴 수 없는 것이든지 둘 중 하나이다. 만약 당신이 견뎌낼 수 있는 능력의 범위 안에 있는 일이라면 불평하지 말고 당신의 이성이 그것을 감당해 나가도록 참아라. 그러나 혹 당신이 이겨낼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할지라도 그것에 반감을 나타내지는 마라.
. 가능하면 사람들이 더 선해질 수 있도록 가르쳐라. 행여 가능하지 않을지라도, 그들에게 친절히 대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친절이란 바로 그런 때 사용하라고 당신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신조차도 그런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있으며, 때로는 너무 관대하게도 그들이 갈망하는 건강·부·명예 등을 소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까지 한다. 당신도 이렇게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누가 막겠는가? 만일 누군가 잘못을 범했다면, 부드럽게 타이르고 그가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깨닫도록 하라. 그럼에도 그를 뉘우치게 하는 데 실패했다면, 당신 자신의 부족함을 탓해야지 누구도 비난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서로를 위해 존재한다. 그러므로 서로를 개선해가든지 아니면 포용하든지 하라.
. 올바른 원칙에 입각해서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살고자 했을지라도, 실패했다면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거나 포기하거나 낙심하지 마라. 그럴 때는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되, 당신 행동의 대부분이 인간 본성에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라. 그러나 언제든지 다시 돌아가 시작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훈련하고 이를 즐겨라. 당신이 철학으로 되돌아갈 때는 학생이 스승을 대하듯 경직된 마음으로 하지 말고, 마치 눈병 난 사람이 달걀이나 거즈를 붙이듯이, 또는 환자가 찜질 약이나 물약을 바르듯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성에 복종하는 것이 더 이상 당신에게 문제가 되지 않고, 당신은 이성 안에서 안식을 찾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