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다움..........美/1. 미(美)의 본질

미(美)의 본질은 생명의 신비에서 비롯되는가?

오갑록 2012. 7. 22. 00:00

신비 ......

 

■ 미()의 본질

 

 

□  아름다움의 본질 

 

    생물들 간에는 타고 날 때부터 주어진 천적(天敵)들이 각각 있다. 양이나 기린 같은 초식동물은 사자와 같은 육식동물이 천적이고, 들풀 같은 식물들은 초식동물들이 그 천적이다. 쥐와 고양이, 진딧물과 무당벌레, 곤충과 제비 등의 관계도 천적이며, 기생하는 미생물과 숙주들 간에도 천적이 된다.

 

닭과 지네의 관계도 서로 상극이라고 부르는 천적의 관계이다. 놓아 먹이는 닭에게 지네가 눈에 띄면 바로 사냥감이 된다. 그러나 닭의 뼈가 땅에 묻혀 있다면 지네가 아주 좋아한다. 때문에 지네잡이 방법에 닭 뼈가 쓰이기도 한다. 또한 옛적부터 닭과 지네가 궁합 좋은 자양강장제라며 전래되어 보약으로 널리 응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천적들 간에는 무엇이 어떻게 작용하기에 상호간에 좋아하거나 두려워하게 되는 것일까? 천적의 상호관계는 후천적인 요인이라기 보다는 선천적으로 느껴지는 감각에 따라 결정 지워지는 자연현상임을 반박하기 어렵다. 인간이 느끼는 아름다움, ()의 본질도 그 자체가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천적들 간에 서로 느끼게 되는 감정처럼 생명의 어떤 신비로움에서 자연적으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미각, 후각, 시각, 촉각, 청각 등의 오감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다. 달콤한 맛, 향긋한 향, 고운 색과 선 명암과 질감, 따스하고 시원하다거나 부드러운 촉감, 고운 소리들이 아름다움의 한 요소가 된다. 그리고 그들이 어우러진 복합 쟝르 라고도 할 수 있는 육감을 통해 갖는 아름다움이 있다. 시나 소설과 같은 문학을 통해서 가질 수도 있고, 정치, 행정, 공학 등의 다양한 학문이나 상공업 예체능의 행위에서 또는 봉사활동 가운데서 아름다움을 마음 속에 품을 수도 있다. 믿음과 종교를 통한 득도의 길을 걸으며 형이상학적 감성에서도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다.

 

아름다움이란 그 중심이 항상 에게 있다고 본다. “, 나의 가족, 나의 이웃, 나의 벗, 나의 학교, 나의 직장, 나의 종교, 나의 고향, 나의 나라, 나의 조국, 내가 속한 인류, 나의 영혼 …… “를 중심으로 한 개체나 조직을 위해서 ()”한 곳으로 향하게 하는 것을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라고 본다. 나를 중심으로 한 개체가 배부르고 따스하고 더 편하게 하여 내가 편하고 오래도록 잘 살고, 건강을 바탕으로 후손도 번창하게 할 수 있는 것들이 ()”한 방향이다. 이렇게 볼 때 아름다움의 본질 대한 의문을 쉽게 풀어 준다.

 

예로 들어, 이성에 대한 아름다움을 떠 올려 보자. 어디에 기준한 아름다움일까? 그 해답도 위와 같은 방법으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배우자를 선택하여 살아가며 내가 더 편하고 나의 후손을 더 번창하게 하려면, 보다 더 건강하고 똘똘한 배우자를 찾아야만 할 것이다. 무엇이 더 건강한 지는 생물들이 천적을 본능적으로 알아채는 것처럼, 선천적인 감각으로 느끼게 되는 무엇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건강한 혈색, 건강한 체형, “에게 잘 할 것 같은 순종적인 시선이나 모습, 나올 곳은 제대로 나오고 들어 갈 곳도 제대로 이뤄 진(= S라인?) , 씨 불리기에 알맞게 어울리는 외모 …… 그러한 것을 여성의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라고 해석해 본다. 그러한 여성들이 "나"라고 하는 평가의 주체로서는 ()”한 것이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다.

 

다른 예를 들어, “아름다운 강산이라고 한다면, “나 나를 중심으로 하는 개체가 잘 먹고 잘 살며 종족을 벌릴 수 있는 좋은 장소를 이름한다고 본다. “에게 이로운 생물들에게 풍성한 먹거리, 온화한 기후, 안온한 거처 지를 제공할 수 있는 좋은 곳을 가리켜 아름다운 곳이라고 부를 것이다. 나에게 좋은 풀과 나무가 잘 자라고, 내가 좋아하는 곤충과 동물이 잘 서식할 수 있어, 나의 후손이 번창 할 수 있는 곳이 아름다운 곳이 된다고 본다. 그곳이 나에게는 ()”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감을 통해 갖게 되는 아름다움이란 모두들 에게 ()”한 것들을 두고 말한다. 씹고 삼켜서 몸에 좋은 자양분이 되는 것을 맛있다고 한다. 보고 듣고 만져서 좋게 느끼는 것들이 나에게 유리한 것들이 더 많다. 감미로운 맛과 향기 나는 것들, 감미로운 볼거리와 물건들, 감미로운 소리들은 우리에게 좋다고 여겨 진다. 이를 두고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다. 어떤 형태이든 자기에게 해롭다고 여긴다면 추하다는 생각이 들것이다. 사람에게 아름답게 보인다고 하여 그것이 개나 소에게도 그리 보이지 아니할 것이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에게 이롭더라도 개나 소에게는 쓸모 없거나 해로운 경우가 그러할 것이다. 나이, , 빈부, 종교, 지역, 시대 등의 격차에 따라, , 청년과 노인, 가진 자와 없는 자, 남과 여, 후진국과 선진국, 유식자와 무식자…… 간에는 서로 좋고 그름에 대한 이해가 엇갈리거나 정도에 차이가 있게 된다. 때문에 내가 본 아름다움이 마주한 상대의 눈으로는 추하게 여겨 질 수도 있는 것이다.

 

대소변 보고, 코 풀고, 성행위 배설 행위 따위들도 몸을 위하고 자신의 종족을 늘린다는 개념으로는 좋은 짓이니 자신에게는 아름다움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이들은 혼자만이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이라는 특성이 있다. 나 아닌 타인에게는 좋은 일이 못되니, 그러한 행위를 두고 남이 아름답다고는 하지 않음이 옳다고 본다. 스스로 하는 짓이야 좋다고 느끼는 것이 당연하지만, 남에게는 추하게 보이므로, 이런 행위들은 가리거나 남 몰래, 음침한 곳, 또는 야밤에 처리하는 것이 사람들의 습성이자 본능에 가까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체외로 배설 하는 행위지만 선하거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인식되는 것도 있다. 일 하고 나서 흘리는 땀 방울의 모습이다. 땀 흘리면 얼룩지고 냄새도 난다. 그렇지만 추하게 보지 않는 이유가 있다. 흘리는 땀은 자신에게 발전의 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본인 뿐만 아니라 그의 이웃에도 좋은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가 흘린 땀방울이 이웃, 직장, 국가 .....  자기가 속한 곳에도 순기능, "선()”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일하며 흘리는 땀방울을 아름답게 여기는 것이다.

 

먹고 마시는 모습도 이와 같은 이치로 본다면 추한 모습이 된다. 먹고 마시는 것이 자신에게는 좋고 선한 행위이기는 하지만, 남의 경우는 그가 먹어 치운만큼 내 먹을 몫은 줄게 되는 격이 될 터이니 추한 모습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먹다가 다른 이에게 들키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고, 지하철의 맞은편 좌석에서 부끄러움 모르고 씹고 마시는 젊은 이들 모습이 종종 눈에 거슬리는 이유가 되는 듯 하다.

 

우리가 느끼는 미(), 아름다움의 본질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앞의 몇몇 사례에서처럼 아름다움이란 "나"나 내가 속한 조직에게 선()한 영향을 줄 수 있는 것들을 두고 하는 표현이다. 그것은 내가 속한 생명을 잉태하고 생명을 유지하고 생명의 숫자를 더 불리는데 순기능이 되는 사물, 여건, 생각 등에 대하여 긍정적이라거나 호감 가는 것들을 함축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라고 본다.

 

()는 진(), ()과 더불어 인간이 추구하는 많은 가치 가운데 하나를 지시하는 개념이다. 시각, 청각 등 오감을 통한 아름다움들은 직접 또는 연상에 의한 간접 방식으로 삶을 선한 곳으로 이끄는 것들이라고 판단된다. 아름다운 음악이 그렇고, 아름다운 미술품이 그러하며, 멋진 음식이 그렇다. 자연, 인체, 건축예술, 연극처럼 몇 가지 감각의 복합요소가 적용되는 것들도 기본은 비슷하다.

 

바움가르텐(Alexaner Gottlieb Baumgarten, 1714~1762)은 인식과 감각적 표출 양식의 학문을 미학이라고 했다. 미는 우리 마음에 즐거움과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서, 고대인들은 아름다운 사물이나 아름다운 색, 아름다운 음만이 아니라 아름다운 사고나 아름다운 제도라는 말을 썼으며, 플라톤은 미의 사례들로서 아름다운 성격이나 아름다운 법, 미의 이념이라는 말을 쓰기도 했다.

 

서구 미학에서대 이론(Great theory of beauty)”의 기초가 된 것은 고대 그리스 인들의 시각과 지각에 기초한 미의 이론이라고 한다. 미는 수와 척도와 비례에 있다는 이론이다. 미의 객관성에 관한 주장이라고도 하는데, 미가 아름다운 사물들의 객관적 성질, 즉 비례에 있다는 주장으로서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에 즐거운 것이라는 객관주의적 사고는 미로부터 일체의 상대성의 요소를 배제하고 있다. 그래서 참된 미는 감각이나 상상이 아니라 이성 혹은 마음에 의해 파악된다는 미의 이성적 본질이라는 주장과 상통 하는 바가 있다.

 

길이 1인 막대기를 적당하게 잘랐을 때, 긴 토막과 짧은 토막의 비율이 원래 막대(1)와 긴 토막의 비율과 같아지도록 하는 지점 값이 황금비 (황금율 또는 외중비 라고도 함)이다. 0, 1, 2, 3, 5, 8, 13, 21…… 형태의 수열은 앞 값과의 비율이 1 : 1.618…에 수렴한다. 이 수열을 피보나치 수열이라고 하며, 이 비율(1 : 1.618)이 황금비율 이 된다.

 

이 황금비율은 자연계에서도 찾아 볼 수 있으며, 우리 일상생활의 산업디자인에도 많이 응용된다고 한다. 꽃잎의 수, 씨의 배열, 꽃 차례, 잎 차례 등도 피보나치 수열에 기반을 두며, 세포 분화 방식도 피보나치 수열에 따른다. 달팽이 껍질과 우주의 나선 은하의 모양도 황금비 기반의 나선형이다. 이러한 황금비는 고대부터 조화를 갖춘 이상적인 비율로 간주되어왔는데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에서 황금비를 찾아볼 수 있다. 시인 단테는신이 만든 예술품”, 16세기 천체 물리학자 케플러는()스러운 분할(Divine Section)”이라 했으며 신의 형상을 따라 지어내진 신의 피조물이라고 했다. 엽서, 담배 갑, 명함 등의 가로와 세로의 비율처럼 현대 산업디자인에서도 이 황금비율은 많이 응용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가 느끼는 미(), 아름다움이란 수와 척도와 비례에서 비롯되며, 객관적이고도, 이성적인 본질이라는 것도 근거 없는 주장만은 아니라고 본다. 동식물 생물의 세계에서 천적이 따로 존재함과 같은 이치라는 생각이다.

 

 

□ 빛과 색의 아름다움

 

아름답다고 하면 가장 먼저 생각 드는 것이 보고서 느끼게 되는 "시각적인 미(美)"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빛이나 색상도 각기 아름다움의 한 요소가 된다. 그리고 빛이나 색상을 통해서 인지되는 명암이니 질감도 각기 요소가 될 수 있다. 그 같은 질료로서 구성되는 형상이니 문양도 아름다움의 요소가 되며, 대개의 경우 이들 모두가 서로 복합된 조화를 이루면서 아름다음이 표출된다. 

 

사람이 사물을 보고 느끼기까지는 빛과 색의 역할이 먼저 있어야만 한다. 빛의 작용이 절대적이다. 자연에서 발생되는 빛을 살펴 보자. 지구상 자연에서의 빛은 태양으로 부터 얻게 된다. 매일 반복하여 뜨고 지는 해이지만,“여명(黎明)의 눈동자를 제대로 감상하기란 쉽지 않다. 설령 운 좋게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고 해도 계절이나 일기 등 주변 여건에 따라 느끼는 감정의 깊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본다. 어느 해 여름철, 하기휴가를 맞아 새벽 동틀 녘에 낙산사에서 동해에 떠오르는 일출을 맞이하던 기억을 떠올려 본다. 당시는 떠 오르는 해보다도 붉게 물든 구름이 끝없이 이어진 하늘과 여름날 새벽의 푸른 창공이 어우러져 이루는 장관이 더욱 장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돋이 구경이라고 해봐야 형형색색으로 세상 물들이며 밝아오는 빛의 향연에 탄성과 발 구르며 반기는게 고작이다. 하루 낮동안 오늘도 또 다시 이 세상을 밝혀 주는 그 눈동자의 깊은 의미를 짚어 볼 마음의 여지는 우리에게 좀처럼 찾아 들지 않는다.

 

내가 오늘 하루를 살아 가는데 있어서 그 빛의 의미는 무엇일까?

 

가시광선 파장범위인 390 ~ 760 nm 의 전자파를 발산하는 광원을 바라보는 것으로서, 물리적인 한쪽 단면만으로 여기기에는 우리 인간들의 감정은 복잡하게 진화되어 왔나 보다. 빛은 전자파 파동의 한 부분이며, 그 속도는 1초에 30km. 파동은 파장과 진폭 진동수로 구분되는데, 색은 파장의 길이에 따라 달라진다. 색이란 빛이 물체를 비추었을 때 생겨나는 반사, 흡수, 투과, 굴절, 분해 등을 통해서 눈을 자극함으로써 생기는 물리적인 지각현상이다.

 

우리는 색을 어떻게 경험하는가? 인간은 기억, , 외부 압력, 또는 안구나 시신경의 전기적 자극 등으로부터 색을 경험한다. 그러나 색에 대한 일반적인 자극은 눈 안의 망막 중심부에 발생하는 복사 에너지의 분광조합 사이의 변화이다. 색 자극이 인간의 눈에 미치는 가장 큰 영향력은 색소와 염료의 특성인 선택적 흡수현상에 기인한다. 그것은 흡수된 에너지가 파장에 따라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한정된 파장의 전자파에 불과한 빛과 색 자극에 의해 인식한 단편들을 기초로 하여 이 세상의 진리를 꿰어 보려고 사람들은 안간 힘을 쓰곤 한다. 그러나 미국의 철학자 산타야나(Santayana. 1863~1952)의 말처럼 그 진리라는 주장은 작은 단면에 불과 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지식은 길을 비춰주는 연기 나는 소나무 횃불이다. 그러나 한 발짝 앞에는 신비와 불안의 공허가 덮여 있다". 무엇을 본다는 것은 빛과 인체의 색 자극이 어우러진 미술작품이다. 우리의 생각과 사고를 형성하는 것들도 대부분이 그렇게 하여 본 것들을 토대로 이루어 진 모래성과 같다.

 

 

□ 문양(紋樣)이 주는 아름다움

  

오래 전, 어릴 적부터 관심이 끌리던 문양(紋樣)이 한가지 있었다. 그것이 페이즐리 문양이라는 사실을 최근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배경도 궁금했고, 특정한 문양도 빛이나 색상처럼 사람들에게 어떤 감정을 갖게하고 어떤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지도 궁금했다. 문양이 우리에게 주는 아름다움의 본질이 어디에서 어떻게 유래하는지 궁금하곤 한 것이다.

 

아름다움은 음악 미술만이 아니라 자연과 사물, 문학과 같은 생각이나 활동, 철학이니 종교와 같은 형이상학적 사고에도 적용된다. 우리가 가지는 이러한 여러 부문의 미적 요인들 중에서 특히 선(線)이 인간에게 어떻게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지가 궁금하다. 선은 시각으로 느끼게 되는 것이니 빛이 있어야 한다. 빛을 받아 발현하는 색이 우리의 시각기관을 자극하여 알게 되는 여러 현상 가운데 한가지가 선이고, 그 선(線)이 사람에게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도록 유발 할 수 있는 특징들을 굳이 나눈다면, 크기, 굵기, 색상, 명암, 곡율, 형태나 문양 등을 꼽을 수 있다고 본다.

 

식물들의 여린 새싹을 보면서 나 스스로의 나약함을 떠 올릴 때도 있고, 콩나물이나 고사리처럼 꼬부라진 새싹을 보며 굽은 등 속에 감춰 진 생명의 무한 함을 읽으려고 애 쓸 때도 있다. 생명을 잉태한 이 같은 굽은 등의 모습은 식물에서도 볼 수 있지만, 어쩌면 동물들도 유사한 면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져 본 기억이 있다.

 

포유동물이 수정 과정을 거쳐 탄생하는 발생기의 처음 얼마 동안은 물고기와 같이 아가미를 가지거나, 원숭이와 같이 꼬리를 갖는 등, 다양한 진화의 단계를 재현한다는 발생반복설이 있다. 이러한 배아의 발생반복설은 1860년대 후반에 헥켈(Ernst Haeckel) 에 의해 주장되어, 발생의 초기 단계에서 배아(胚芽)들 사이에는 그럴듯한 유사성(발생학적 상동성이라 불림)이 있다는 주장을 했다. 과거에는 다윈(Darwin)의 진화론의 이론을 전개하는 증거로서 이를 강조했었지만 최근에 와서 잘못된 이론으로 알려지고 있다.

 

물고기, 도롱뇽, 거북이, , 돼지, 암소, 토끼, 그리고 인간의 배아들을 비교한 그림을 교과서나 참고서를 통해서 익히 보아 왔을 것이다. 발생초기에는 어린 고사리 싹처럼 꼬부라져 틀어지고 꼬리가 있는 부분이 모두들 흡사하게 그려져 있었다. 교과서 그림은 1860년대에 스케치한 그것을 근거로 했지만, 현대의 물리화학과 광학기기며 각종 첨단기기의 발달로 이제는 그보다 더욱 세밀한 부문의 생명발생에 관한 사진까지도 우리는 접하게 되었다.

 

결국, 과학기술의 발달로 생명의 경이와 신비로움을 한 겹 더 벗겨 주었다고는 하지만, 신비에 쌓인 생명발생에 관한 한편의 아름다운 추상의 단면을 우리로부터 앗아갔다고도 생각 된다. 새 싹을 추상화한 것에서 유래한다는 페이즐리 문양에 대해 혼자만 가지곤 하던 어린시절 신비감이 허탈하게 느껴지는 까닭이다.

 

어릴 적 겨울철이면 온 식구가 덮고 자던, 커다란 이불 겉감의 울긋불긋한 문양을 떠 올린다. 페이즐리 문양들 이다. 이부자리의 겉 쪽 직물문양에 흔하게 그려지곤 했었던 반찬용 소채류인 자주색 가지 모양이나 올챙이 모양을 한 구부러진 문양을 보며 무슨 깊은 의미가 담긴 문양은 아닌지 하고 때때로 궁금해 하곤 했다. 중등학교를 다닐 때는 헥켈의 생명발생 초기 그림들이 그 페이즐리 문양과 닮은 꼴의 모양으로 미루어생명의 신비를 형상화한 밑그림들 일거야하는 정도로 여길 때도 있었다이즈음도 넥타이에 그려진 쌀알 크기의 크고 작은 문양 등 생활 주변에 종종 눈에 띄곤 한다.

 

아름다움의 근간은 생명의 원천과 인과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신비감이 떠 오르면 의례 그 페이즐리 문양을 떠 올려보곤 한다. 페이즐리 문양은 어찌 보면 계란이나 새들의 알 형상을 닮았다. 콩나물, 고사리처럼 새싹의 형상을 닮기도 했고, 동물들이 뛰거나 움직일 때 생동감 넘치는 운동 궤적의 굴곡들을 닮았다고 느낄 때도 있다. 생물 시간에 접한 짚신벌레 그림이 그 문양과 많이 흡사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여성의 얼굴과 체형의 미모에서도 그러한 선을 떠 올려 본다. 위 아래 눈꺼풀의 선이며, 콧날, 턱의 선, 각선미, 엉덩이며 앞가슴의 굴곡을 이루는 S라인 선, 머리를 돌릴 때 굽이치는 윤기 나는 긴 머릿결도, 굽이진 귀밑머리의 섬세함에도, 선정적인 웨이브 춤에서도, 그 문양과 흡사한 선의 모습이 있기에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소화장기의 융털돌기나 흥분절정기 성의 돌기부문, 인간의 씨앗으로 볼 수 있는 3 ~ 5 미크론 정도의 정자 형체도 확대 그림으로 보면 그 문양과 닮은 면이 있다. 고무나무, 벤자민, 홍콩야자와 같은 관엽식물들이나 호접란 등은 요즈음 우리의 일상에서 흔한 관상식물로 애용되는 것들인데, 그들 잎새의 선을 유심히 보면서도 페이즐리 문양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동양의 고전적 전통문양들도 선의 흐름이 그것과 닮았으며, 도마뱀 공작 코끼리 같은 동물들의 그림에서도 페이즐리 문양의 기본 패턴들이 반복되고 있음을 직감하곤 한다. 마음이나 사랑의 표시로 통용 되는 하트 문양도 중심을 축으로 반토막을 내서 본다면 유사한 굴곡을 보여 준다. 오래된 사찰을 찾아 절 구경을 가서도 비슷한 문양을 자주 경험하곤 한다. 사천왕상 옷자락의 선, 대웅전 뒷편 벽화에 의례 등장하는 흰구름과 바람결에 날리는 선승의 도포자락 그림 끝에서 찾을 수 있는 선, 부처 좌대의 연꽃 잎을 이루는 선, 나무로 만든 목어의 수염이 이루는 선 ......, 페이즐리 문양의 기본들이 연속해서 연결된 듯하다. 나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Pieta) 조각상을 좋아한다. 그 중에서도 조각상 아랫부문 옷자락 끝, 질감과 선들의 아름다움이 나의 마음을 제일 사로잡곤 한다. 무슨 이유에서 일까하고 짚어 보면 그 기본 문양이 페이즐리 문양에서 느끼게 되는 동양적인 냄새가 흐름을 알 수 있다.

 

 

페이즐리의 독특한 문양은 선사시대의 바빌론에서 기원하여, 15세기 경 인도의 캐시미르와, 18세기 영국의 페이즐리 지방에서 꽃 피운 문양이다. 이 문양이 오랜 세월을 거치며 유명해진 배경에도 미()의 본질이 그 문양 속에 잘 녹아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수와, 척도와, 비례에서 객관적인 아름다움의 요소가 함축된 문양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이다. 누가 보더라도 좋게 느껴지는 도안이었기에 시대나 국가를 초월해서 인류의 생활 디자인에 응용되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어릴 적 덮고 자던 이불 호창의 화려한 그 페이즐리 문양에는 생명의 신비가 들어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이 장년에 들어선 지금에 와서는 아주 흐릿해 졌지만, 인간이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 ()의 요소가 그 속에 묻어 있을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 섞인 공상을 떨칠 수 없다.

 

   2009.12.13.()

   오갑록 (K L Oh)

 

 

 

□ 페이즐리 문양의 유래

 

페이즐리란 문양의 이름은 19세기 초 (1810~1820)에 생산되기 시작한 숄의 산지인 스코틀랜드의 도시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인도의 문양을 모방한 것으로 망고, 무화과 등의 열매를 반으로 자른 단면의 형태이거나 눈물방울 올챙이 솔방울 전나무 등을 양식화 한 패턴과 함께 아름다운 색상이 조화를 이룬 문양들이다. 이러한 독특한 문양은 선사시대의 바빌론에서 기원하여 유럽과 인도에서 알려진 전설상의 생명수인 야자수의 움트는 싹을 추상화 한 것이다.

예전에는 주로 직조품 이었으나, 현대에는 프린트 패턴의 소재로서 의복 실내장식 패션 소품 등에도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에트로홈피에서 일부내용 발췌)

옛날 인도의 예술문화로서 꽃피웠던 캐시미르 직물의 문양을 완벽하게 재현시킨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페이즐리 문양이다. 캐시미르 문양 중에서는 인도의 파라다이스라 불려졌던 캐시미르 지방에서 15세기경에 만들어진 직물을 손꼽는다.

 

아쿠바르 대제는 세계 각처의 귀족으로부터 진상품에 대한 답례품으로서 캐시미르 직물의 숄을 보냈고 그러한 결과 캐시미르 숄이 상류 계급 사회에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17세기 후반에는 유럽에서 그 인기에 편승하여 돈을 벌려는 상인들이 캐시미르 직물의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고, 이 시기에 개발된 것이 캐시미르 직물과 유사한 형태를 갖는 직물을 만들 수 있도록 고안된 두꺼운 바탕에 무늬 있는 천을 짤 수 있는 자가드 기계였다.

 

19세기 빅토리아 왕조 시대에는 스코틀랜드 서남부에 있는 페이즐리 자가드 기계에 의해서 숄의 대량생산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결과 세계 도처에서 캐시미르 문양의 숄이 보급되어 어느 사이엔가 문양의 명칭이 페이즐리라고 바뀌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많은 시간의 공을 들여 성심 성의껏 짜내었던 수예품으로서 캐시미르 숄의 우아함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마침 이시기에 인도의 캐시미르 지방에 혹독한 기근이 닥쳤고, 숄을 짜내었던 직업적인 수공예인들은 병에 걸려 죽어갔고, 캐시미르 지방의 작물 문화도 이 시점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이 캐시미르 문양을 현재의 패션에 표현하며 생산하여 이 문양을 부활시킨 업체가 있다. 밀라노의 생산. 공급 브랜드인 ETRO이다. 오늘날 캐시미르 문양이라고 하면 ETRO라고 말하여질 정도로 호화스럽고 다양한 색상의 캐시미르 문양이 ETRO를 상징하는 모티브라고 이 업체는 주장한다.

 

1960 년대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발렌티노, 조르지오 아르마니 등에게 최고급 여성의류의 소재로 캐시미르 원단을 제공했던 짐모 에트로는 당시 패션업계의 배후 실력자로서 이름이 높았으며 1968년에는 오늘날 캐시미르 문양의 메카로서 성장한 'ETRO'를 창업한 오너가 되었다. 짐모 에트로는 복잡하고 매우 세밀한 문양이 갖는 신비성에 강하게 끌려 들어 갔고, 원래의 캐시미르 문양의 직물을 생산할 것을 결심하고, 오래된 캐시미르 문양의 밑그림과 문헌, 캐시미르 숄을 수집했다고 한다.

 

 

□ 페이즐리 문양 및 유사 문양 모음

 

 

일반적인 페이즐리 문양 사례와, 자연현상이나 동양의 전통 고전문양 등에서 페이즐리 문양이 연상되는 그림 들을 올려 본다.

 

 . 페이즐리 문양

 

 

 

. 공작, 도마뱀, 코끼리 문양, 동양적 전통 고전문양

 

 

 

 

 

. 종교적 의미의 표상 문양 가운데 유사한 선(線)들

 

 

 

. 인체에서 찾을 수 있는 페이즐리 문양과 유사한 선(線)들

  

 

   

 

                

 

 

 

 . 물 방울에서 느끼는 선(線)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