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정...............善/11.욕망 (慾望)

욕망

오갑록 2013. 8. 10. 08:51

 최고의 ......

 

욕망은 환유이다. 욕망은 기표이다. 그것은 완벽한 기의를 갖지 못하고 끝없이 의미를 지연시키는 텅 빈 연쇄 고리이다. 그렇다면 욕망의 구조도 은유와 환유가 아닌가. 아무 것도 욕망하지 않는 것은 곧 죽음이다. 대상은 실제처럼 보였지만 허구가 아닌가. 대상을 실재라고 믿고 다가서는 과정이 상상계요, 그 대상을 얻는 순간이 상징계요, 여전히 욕망이 남아 그 대상을 찾아 나서는 것이 실재계다.

 

주체의 욕망을 충족시킬 것처럼 보이는 대상, 즉 대체가 가능하리라 믿는 단계, 이것이 압축이요, 은유이다. 그러나 충족시키지 못하고 다시 그 다음 대상으로 자리를 바꾸는 전치, 이것이 환유이다. 그러므로 욕망 역시 언어처럼, 무의식처럼, 은유와 환유로 구조되어 있다.

 

욕망은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다. 그렇지만 허상을 실재라고 믿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때 욕망은 권력자의 눈길처럼 음험해진다. 인간은 대상이 허상임을 알 때,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고, 자신의 시선 속에 타인을 억압하는 욕망의 시선이 깃들어 있음을 깨달을 때, 좀 더 쉽게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

                                                                                                          (라캉의 욕망 이론 중에서)

 

 

 

■  욕 망 (스피노자  "감정의 규정" 중에서)

 

 

  욕망이란, 인간 본질 그 자체이다. 이 경우 인간은 주어진 각 변화 상태(변체 =  변양)에 의하여 어떤 것을 하게끔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욕망이 자의식을 동반하는 충동이다. 그리고 충동은 인간의 본질 그 자체이다. 이 경우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한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인간의 충동과 욕망에는 실제 아무런 차이점도 있을 수 없음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신의 충동을 의식하건 않건 간에 충동 그 자체에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충동. 의지. 욕망 혹은 잠재적 충동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인간본성의 모든 노력을 통일적으로 총괄하기 위하여 욕망을 정리한다.

 

예를 들면 욕망이란  어떤 것을 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경우의 인간 본질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규정으로 보아서는 정신이 자신의 욕망 혹은 충동을 의식할 수 없다. 따라서 이와 같은 의식의 원인을 포함하기 위해서는 그의 주워진 각 변화상에 의하여 결정되는 한이라는 조건을 첨가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본성의 변화상태를 인간 본질의 개개의 상태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때 상태가 본래적인 것이건, 혹은 그것이 사유의 속성으로 파악되건, 연장의 속성으로 파악되건, 혹은 그들 양자에 동시에 속하건, 어떤 경우건 좋다. 따라서 나는 여기서 욕망이라는 개념을 근거로 인간의 노력. 잠재력 충동. 의지 등 모든 것을 이해한다

 

그리고 그들은 같은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 감정의 변화에 따라 다양화하며, 그리고 때로는 흔히 상호 대립되기도 한다. 그 때문에 인간은 여러 방향으로 무질서하게 이끌리고 또 자기가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는지 알지 못한다.

 

 

 

■  삶과 지성에 대하여 (욕망)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이.윤기 역

와타미 자료 중에서 발췌

. 하고 싶은 일이 분명해지는 순간 무슨 일인가가 벌어집니다. 삶이 당신을 돕습니다.

. 어떤 일이 정말 하고 싶을 때 당신은 그 일을 합니다. 밖에 나가서 크리켓을 하고 싶다.

  재미를 느낄 만한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면 당신은 그 일을 할 방법과 수단을 찾아 냅니다.

  어떻게 하면 실행할 수 있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 그런데 여러분이 탐욕스러우면 '못쓴다'고 생각하고, 탐욕을 버리는 생활을 실천하려고 한다고

  칩시다. 이건 어리석은 짓입니다. 왜냐하면, 탐욕이라는 것은 버리려고 애쓴다고 해서 버려지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 남을 따르려 하지 않을 때, 공포를 물리칠 때, 스스로 맑고 분명하게 생각할 수 있을 때, 여러분은

  가장 똑똑한 인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련한데도, 똑똑해지겠다고 애쓸 때 여러분은 진짜 미련한

  사람 축에 들고 맙니다.

 

. 어떤 일에 버릇이 들었다는 것은 여러분 마음이 이미 무덤을 향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 내 말을 이해한다면, 여러분은 더 이상 무엇인가를 성취하겠다고 애쓰지 않을 것입니다.

  성취에 대한 욕망이 오직 슬픔과 고통의 씨앗이 될 뿐이라는 사실을 꿰뚫어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의존의 문제를 전적으로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 내면적으로 심리적으로 타인에게 의존할 때 여러분은 노예가 됩니다.

 

. 즉 우리는 남에게 내적으로 의존하고 있어서 사랑한 만큼 사랑 받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그저 사랑하고 사랑을 거기에 남겨 놓으려 하지 않고 반대 급부를 요구하고 거두어들입니다.

  바로 이렇게 요구하기 때문에 우리는 의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네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거야 장사지,

  시장에서나 사고파는 것이지 어디 사랑입니까?

 

. 나무를 심고, 가꾸고, 강을 바라보고, 이 땅의 풍요로움을 즐기고, 하늘을 나는 새들을 관찰하면서

  그 날개짓의 아름다움을 구경하고, 삶이라고 불리는 이 엄청난 구경거리 앞에서 눈을 씻고 마음을

  여는 경지, 여기에 자유가 없을 수 없습니다.

 

.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갖추고도, 삶의 넉넉함, 실존의 아름다움, 투쟁, 정신적 고통, 웃음, 눈물을

  이해하고, 마음을 단순하게 쓴다는 것은 대단한 기술이 없으면 안됩니다.

 

. 여러분 자신, 즉 여러분의 현재 상태를 이해하는 일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이해하자면, 현재 상태를 다른 것으로 변화시키고 싶어하는 욕망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 작은 일을 주도하다 보면 나중에 큰 일을 주도하게 되는 수야 있겠지요. 그러나 자발적으로

  나무 한 그루를 심을 때, 남을 늘 인정스럽게 대할 때,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사람에게

  미소를 보낼 때, 길에 솟아나온 돌을 뽑을 때, 길을 가다가 만나는 동물을 쓰다듬어 줄 때,

  이럴 때 여러분은 작은 일을 주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 시간의 틀 너머 존재하는 상태가 있는지 없는지 진심으로 알아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문명에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집단 의지에서 뛰쳐 나와 뒤에 홀로 서야 합니다.

교육의 필수적인 기능은 곧 이것을 가르치는 것이어야 합니다. 홀로 설 수 있게 하여,

다수의 의지나 자신의 의지에 갇히지 않고, 무엇이 참된 것인지 스스로 찾아 낼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주는 일, 이것이 교육이 해야 할 일입니다.

 

. 만일 생계를 꾸리기 위해 기술자가 되었다면, 혹은 여러분의 아버지나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기술자가 되었다면 여러분은 일종의 강요에 시달리고 있는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종류야 어떻든 강요 당하는 삶은 모순과 갈등에 시달리기 마련입니다. 반면에, 여러분이 정말 좋아서

기술자나 과학자가 되었다면, 인정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좋아서 나무를 심고,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쓴다면 다른 사람과 경쟁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게 될 것입니다.

 

. 정말 하고 싶어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는 데도 상당한 지성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만일 여러분이

  생계를 꾸리지 못하면 어떻게 할까, 이 썩어 버린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한다면

  여러분은 이런 일을 찾아 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 무슨 말이냐 하면, 어떤 것도 강요 당하지 않을 때, 무엇이 되지 못해도, 무엇을 얻지 못해도,

  어디에 이르지 못해도 두려워하지 않을 때만 창조적일 수 있습니다.

 

 

. 나는 탐욕스러운 사람이라고 칩시다. 그런데 사회와 성전은 내가 달라져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는 탐욕을 부리지 않게 됩니다. 이 경우 나는 달라진 것일까요, 아니면 탐욕이라는 걸

  다른 뜻으로 부르고 있는 데 지나지 않는 것일까요?

 

. 그러나 내 탐욕의 문제를 조사하고 이해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는 이 탐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탐욕을 버렸다는 말과는 전혀 다릅니다.

  

. 욕망이 없는 상태를 이루고자 하는 것은 마음의 장난일 뿐입니다.

  욕망이 참상의 씨앗이 되니까, 여기에서 도피하려고 마음은 욕망이 없는 상태를 상정하고

  이렇게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이상을 성취시킬 수가 있을까 하고.

 

. 욕망이란 무엇입니까? 에너지 아닙니까? 여러분이 에너지의 목을 조르는 순간 자신을 미련한 인간,

  생명이 없는 인간으로 만들어 버리는 셈입니다.

 

. 욕망에서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자유로워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욕망의 목을 조이지 않는 일입니다. 에너지라는 것을 바로 이해하고 바른 길로 이를 이용하는

  일입니다.

 

 

 

 

■  욕망의 딜레마

         생산하는 욕망과 욕망의 딜레마중에서           들뢰즈와 가타리의 욕망 이론

                                                                                                  (논문: 문성원) 중에서 일부발췌

□  목적론과 욕망

 

     욕망을 결핍과 연결하여 보는 견지에는 일종의 목적론이 결부되어 있기 마련이다. 결핍이 해소된 상태가 목적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 욕망을 가진 존재는 이 목적을 추구하며 그것을 향해 움직이는 것으로 이해된다.   . 일단 목적이 달성되면 해당 욕망은 사라진다.   . 그러므로 여기서 욕망은 수단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이럴 경우, 욕망에 대한 철학적 관심은 목적에 대한 관심에 종속되기 쉽다. 목적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문제고, 욕망은 이 목적 추구 과정에 맞게 제어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생각은 한편으로, 생물학적 욕구와 그 해소 과정을 출발 모델로 삼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욕망과 욕구를 구별하여 욕망을 의식이 개입된 것, 그래서 보다 고차적인 것으로 본다 해도, 욕망을 결핍과 연관 짓는 한, 그 기본 구도는 달라지지 않는다. 생물학적 욕구에서는 그 목표점이 생리적 평형으로서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데 있다고 파악된다. 욕구가 존재한다는 것은 이 항상성이 깨져 있으며 그래서 그것을 회복하려는 경향과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욕망의 경우도 이 항상성과 유사한 목표를 갖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심리적 평형이 목표로 존재하고, 고통과 쾌락이 그 목표를 향한 운동을 유발하고 조절하는 기능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메커니즘이 항상 성공적으로 작동하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현재의 욕망이 겨누고 있는 대상이 그 욕망을 해소하는 데 적절하지 않은 것일 수 있다. 나아가 여러 욕망이 얽히고 충돌하는 경우, 이 욕망들을 위계화하고 조절할 필요가 있다. 사유의 역할이 강조되는 것은 이런 지점들에서다.

 

욕망의 대상이 그 욕망의 목적에, 즉 그 욕망이 함축하는 결핍을 메우는 데 적합한지를 따지는 것에서부터, 욕망의 목적들을 견주고 평가하는 일이 과제가 된다. 직접적인 경험에 주어지는 것은 욕망의 현상들이지만, 반성적 사유가 초점으로 삼는 것은 욕망의 목적이다. 개별 욕망의 목적뿐 아니라 욕망들 전체의 궁극 목적까지 다루어진다.

 

‘행복’은 그러한 궁극 목적의 대표적 예다.

개인의 행복만이 아니라 사회의 행복도 이러한 목적의 연장선상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렇게 설정되는 목적은 결핍이 해소된 상태로 여겨질 뿐 아니라, 결핍을 규정하는 기준 역할을 떠맡는다. 무릇 결핍이란 그 자체로 독립적이기 곤란한 의존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결핍은 부족한 무엇을 전제하며, 그 무엇이 채워진 상태에 대한 상()을 끌어낸다. 결핍으로 이해된 욕망이 그 내용에 대한 적극적 규정을 얻기 위해서는 결핍이 없는 상태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보면, 욕망을 결핍으로 보는 견지는 어떤 이상(理想)을 목적으로 내세우는 사유와 만날 공산이 크다. 실은, 이상적 목적을 앞세우는 사유가 욕망을 조망할 때, 결핍을 중심으로 욕망을 파악하게 되는 것이라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목적을 설정하고 계획을 세우는 능력은 인간 두뇌의 두드러진 특징이므로, 행위를 이해하는 데 목적 위주의 사유가 지니는 강점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목적론적 발상의 문제점은 실제로 목적 설정이 이루어지지 않는 영역에까지 목적 중심의 파악을 확장하는 데 있다.

 

자연의 목적, 역사의 목적, 인생의 목적 따위를 상정하고 그것을 통해 현실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를 시도한다. 이럴 때, 욕망은 욕망 자체로 고려되지 못하고 외부에서 부과되는 목적에 따라 규정될 소지가 많아진다. 거꾸로, 욕망이 종속적인 위치를 벗어나 행위의 설명 요소로 적극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목적론적 사유가 힘을 잃는 때라고 할 수 있다.

 

 근대에 들어오면서 신 중심의 목적론이 뒤로 물러나고 인간의 욕망이 변화의 동인으로 재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이 욕망은 곧 새롭게 구축된 체계의 계기로, 무엇보다 생산과 소비 활동에 필요한 요소로 이해되기 시작한다. 그러한 한, 욕망은 사회발전이라는 체계적 목적에 포섭되며, 바람직한 형태를 기준으로 통제받아야 할 것이 되어버린다.

 

마르크스주의에서처럼 욕망을 고정된 것이 아니라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변화하는 것으로 보는 경우에도, 전체의 목적론적 구도는 큰 힘을 발휘한다. 욕망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향해가는 도정의 한 요소로 여겨지지만, 이것은 결국 사회 발전을 이끄는 ‘근본적인 필요’에 종속된다.

 

오늘날의 처지에서 보면, 이러한 생각이 계몽주의 이후 큰 영향력을 행사해온 진보의 목적론에 속하는 것이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 목적이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하는 것은 이 목적론의 큰 틀 속에서의 차이일 뿐이다. 나아가, 그 목적이 정치적인 것이냐 경제적인 것이냐, 이를테면 민주주의냐 경제성장이냐 하는 것도 욕망의 문제를 종속시키고 억누르는 구도 내에서의 차이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속에서 욕망은 자유나 풍요 등 적극적인 목표의 결핍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취급될 따름이다. 

 

요컨대, 욕망이라는 주제가 한껏 부각되기 위해서는 목적론의 틀을 벗어날 필요가 있다.

 

작금의 촛불 시위는 어떤 방식으로 해명될 수 있을까? ……

우리는 욕망이야말로 이 새로운 양태들의 잠재성에 주목하는 데 어울리는 범주가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이때의 욕망은 특정한 결핍에 의해 규정되거나 어떤 목적에 종속되는 것 이상이어야 할 것이다. 즉 이 때의 욕망은 안전한 먹을거리에 대한 욕망, 민족적 자존심에 대한 욕망, 집권자와의 의사소통에 대한 욕망, 나아가 선진화에 대한 욕망 이상의 것이어야 한다. 그럴 때에만 욕망은 주어진 목적에 종속되는 소극적 원인으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한 적극적 원인으로서 파악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와 같은 욕망 개념이 등장했던 전례를 알고 있다. 지난 세기 후반의 68 5월 혁명을 배경으로 들뢰즈와 가타리가 제시했던 욕망 개념이 그것이다.

 

 

□  생산하는 욕망

 

들뢰즈와 가타리가 욕망을 중심 개념으로 들고 나온 저서는 앙띠 오이디푸스(1972)이다.

……

존재론적 순서로 보면 변화의 근원이자 동인으로서의 욕망 자체를 입증하는 일이 먼저겠지만, 인식의 면에서나 실천의 면에서는 이 욕망의 자유로운 분출을 억압하는 구조를 밝히고 해체하는 일이 시급하다. 그래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을 생산적이고 혁명적인 것으로 내세움과 동시에, 결핍으로 욕망을 규정하는 관점을 집요하게 비판한다. 다음의 언급에는 이들이 욕망에 거는 기대와 그 욕망의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우리가 욕망을 혁명적 심급으로 내세운다면,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이익을 앞세운 많은 데모들은 견뎌낼 수 있지만 어떤 욕망의 데모도 견뎌낼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욕망의 데모는 자본주의의 구조들을 바닥에서부터, 유치원의 수준에서조차 솟구치게 하는 데 충분하다. 우리는 모든 합리성의 비합리를 믿듯 욕망을 믿는다. 그리고 이것은 욕망이 결핍, 즉 갈망이나 동경이 아니라, 욕망의 생산이자 생산하는 욕망, 실재-욕망(réel-désir), 즉 실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생각하는 욕망은 우선, 자본주의를 뒤엎을 수 있는 에너지의 원천이고 역량이다. …… , 계급적 이해관계로 잘 포착되지 않고 다양한 방향과 폭발력을 가진 이 힘의 원천을 그들은 욕망이라고 표현했다. ‘욕망’은 근원적이면서도 직접적인 움직임을, 그러면서도 통일되지 않은 분산적인 움직임을 나타내는 데 적합해 보인다. 무엇보다 욕망은 특권적인 사회계층이나 계급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부분에 편재하는 힘을, 그러나 규격화한 질서 잡힌 모습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질서와 규격을 넘어서고자 하는 힘들을 지칭하는 데 어울리는 용어다.

 

기성 질서를 위반할 수 있다는 특성은 이제 통제의 필요와 연결되기보다는 변화와 창조에 대한 기대로 연결된다. 그러니까 욕망에 대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강조는 기존의 사회적 제도와 틀에 대한 강한 거부를 함축하는 셈이다. 욕망은 사회의 모든 곳에, 자본주의 사회 곳곳에 스며있다. 시장과 공장뿐 아니라 학교와 관공서와 병원에, 심지어 ‘유치원’에도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이 스며있는 모든 곳에서 욕망은 기성의 틀과 규범을 뒤흔들어버릴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실상 존재하는 것은 사회라는 몸체와 욕망뿐이다. “욕망과 사회가 있을 뿐, 이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이러한 해방적인 욕망, 즉 사회를 해방하는 욕망이자 스스로 해방되는 욕망은 미규정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욕망이 어떤 다른 규정이나 목표를 갖는다면 또 하나의 목적론적인 함정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새로운 목표나 규정 역시 욕망을 제어하고 규제하는 족쇄가 될지 모른다.

 

이렇게 보면, 기존의 규정뿐 아니라 새로운 선() 규정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비로소 해방적인 에너지의 자격을 갖출 수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욕망은 불확실하고 종잡기 힘든 것이 된다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목적론적 규정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장점은 자칫 해체적이고 파괴적인 역할 안에 갇혀버릴 수 있다. 또 비록 욕망이 그러한 한계를 넘어서서 무언가 긍정적인 산물을 낳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미규정적 상태에서 비롯하는 것인 한, 그 욕망의 산물을 예측하기는 곤란하다. 따라서 욕망에 대한 기대는 일종의 비합리에 의존하는 모험으로 비칠 수가 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 들뢰즈와 가타리는 우선 해체와 파괴의 부정성을 덜어내는 데 초점을 맞춘다.

 

해체나 파괴는 기존의 것에 대한 부정이고 그런 점에서 거기에 얽매여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들뢰즈와 가타리가 제시하고자 하는 욕망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파괴와 해체의 이미지에 맞서 그들이 내놓는 것은 ‘생산하는’ 욕망이다. 생산하는 욕망 또는 욕망하는 생산. 욕망은 파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생산하는 것이고, 해체에 그치지 않는 이 생산이 욕망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정해진 것의 생산, 나아가 어떤 동일한 것의 재생산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생산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의 생산이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산이다. 그것은 차라리 자연의 생산에 해당하며, 더 정확히 말하면 자연과 인간의 구별을 넘어서는 흐름과 절단의 끝없는 과정을 나타낸다. 그런 점에서 이 생산은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1969)에서 말하는 차이, 즉 끊임없이 달라지면서 생성하는 차이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만하다. 그래서 이 생산은 소비와 대비되는 것이 아니라 소비를 포함하는 소비들의 생산이기도 하다. ……

 

분명 비합리는 우리의 예측을 넘어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비합리가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만일 비합리가 합리의 바탕에 놓여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비합리의 차원은 합리의 차원보다 더 실재적일 수가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러한 실재성을 받아들이며, 여기에 속하는 욕망을 긍정한다. 합리의 빛에 다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욕망은 어둠의 욕망이고 디오니소스적 욕망인 셈이다. 그러나 이것은 실재하는 욕망이며, 그것도 적극적인 의미에서 실재하는 욕망이다. 그러므로 이 욕망은 라캉의 욕망이 그러하듯 상징계에 속하는 어떤 것일 수 없다.   

 

 

□  오이디푸스와 욕망의 억압

 

 들뢰즈와 가타리의 견지에서 보자면, 상징계란 오히려 이 욕망을 억압하는 관념들의 체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영역을 지배하는 것은 앞서 논의한 목적론적 틀이며, 그 속에서 욕망은 생산이 아닌 결핍으로 규정된다.

 

결핍으로서의 욕망은 당연히 그 결핍의 충족을 지향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목적론적 사유가 여기에 관여하여 욕망을 제어하고자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관여가 부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 긍정적인 목적을 제시하여 욕망을 규정하고 그 욕망을 부추기기보다는, 욕망이 노리는 바를 부정적인 것으로 설정하고 그렇게 규정된 욕망을 억누르는 방식으로 관여하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그 억누름의 정당성도 목적의 형태로 제시되지만, 그것은 개별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반성적 사유나 총괄적 욕망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진다. 이와 같은 궁극적 또는 이상적 목적은 흔히 선()으로 자리 잡고, 그 선의 이름으로 욕망을 구속하고자 한다. 그래서 이러한 통제를 벗어나거나 선의 체계에 반발하는 욕망은 악한 것으로 징치받기 마련이다. 

 

…… , 프로이트 이래 정신분석학에서 오이디푸스적 욕망의 설정은 이 욕망에 대한 억압의 정당성을 또한 설정하고 있으며, 그렇게 해서 이미 욕망을 억압하고 있다.

 

“욕망이 어머니를 욕망하고 아버지의 죽음을 욕망하기 때문에 억압되는 것은 아니다. 거꾸로 욕망이 억압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욕망에 근친상간이라는 이지러진 거울을 들이댐으로써, 욕망을 수치스럽게 하고 아연실색케 하며 출구 없는 상황에 몰아넣어, 문명의 더 나은 이익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욕망이 <자기 자신>을 포기하도록 쉽사리 설득한다.

 

이렇게 해서 오이디푸스는 욕망을 길들이는 도구가 되며, 가족은 이런 도구가 장착되어 억압을 행하는 기관이 된다.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단위인 가족은 그 역할의 일환으로 욕망에 대한 통제 메커니즘을 상징적 질서 속에서 작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에서는 결핍으로 규정되는 상징적 욕망과 생산하는 실재의 욕망을 구별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후자는 전자를 통해 억눌려 지고 왜곡되며 조작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오이디푸스 구조를 통한 통제 메커니즘이 가족 관계나 성적인 관계에 머물지 않고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들로 확장된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욕망의 길들임은 부정적인 것으로 규정된 욕망의 포기를 설득하지만 그 욕망의 제거를 목표로 삼지 않는다. 욕망이 완전히 사라진다면 지속적인 길들임과 통제가 불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욕망은 포기되어야 하나 존속한 채로 그렇게 되어야 하며, 그래서 계속 결핍에 시달리는 상태로 남아 있어야 한다. 결핍으로서의 욕망은 이제 상징계가 제공하는 대상, ‘문명의 이익’을 낳는 대상들을 추구하지만 그 결과는 언제나 충족을 빗겨간다.

……

들뢰즈와 가타리는 오이디푸스 구조야말로, 즉 욕망을 결핍으로, 부정적인 것으로 놓는 관념의 배치야말로, 이러한 억압과 통제의 기초적이고 주요한 방식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  욕망의 딜레마와 ‘기관 없는 신체’

 

……

실재의 욕망이 명백한 실체를 드러내기 어려운 것이라면, 이 반() 오이디푸스라는 지향이 오히려 실재에 대한 그들의 생각에 큰 반향을 미쳤을 법도 하다. ……

 

이들이 중시하는 ‘추상적인 기계’라는 개념은 구체적 상황의 코드에 얽매이지 않은 기계, 형식화되지 않은 잠재적 기능을 가진 기계를 가리킨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런 기계의 기능과 욕망이 등치되기는 어렵다. 욕망은 기능 자체라기보다는 기능이 행해지게 하는 어떤 추동력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욕망은 이제 기계와 직접 결합하기 곤란해진다.

즉 ‘욕망하는 기계’라는 용어가 부적절해진 것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기계’ 개념의 활용방식을 기능을 중심으로 다시 세운 탓이라고 할 수 있다. 욕망의 편에서 보면 근거지를 옮겨야 할 필요가 생긴 셈이다. 이렇게 해서 욕망이 다시 자리 잡는 곳은 조금 더 저변으로 내려간 차원, 즉 기계들이 배치되는 곳인 ‘기관 없는 신체’이다. 이 ‘기관 없는 신체’는 이전에도 ‘욕망하는 기계들’이 기입되는 장소로 여겨졌는데, 이제 욕망의 직접적 기반으로 등장하며 욕망 자체와 등치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욕망의 거주지가 바뀐 데 불과한 것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이 책의 후속편이라 할 수 있는 천 개의 고원 (1980)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보자.  

 

 기관 없는 신체(CsO)는 욕망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욕망하며 이것에 의하여 욕망한다. 기관 없는 신체가 욕망의 공속면(plan de consistance)이거나 내재성의 장이어서만은 아니다. 기관 없는 신체가 난폭한 탈지층화의 공허함에 빠지거나 암적인 지층의 증식에 빠지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욕망이다. 욕망은 때로 자신의 소멸을 욕망하거나 때로 소멸의 역량을 가진 자가 되기를 욕망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돈의 욕망, 군대, 경찰, 국가의 욕망, 파시스트 욕망, 파시즘조차도 욕망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욕망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와 만난다. 물론 모든 욕망이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욕망은 앙띠 오이디푸스에서와 마찬가지로 결핍과 무관한 것으로, 생산하는 것으로, 실재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앙띠 오이디푸스에서도 욕망이 긍정적인 것으로만 나타났던 것은 아니다. “억압 역시 욕망되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이 문제다. 우리에게 익숙한 욕망의 딜레마는 여기에서 생겨난다. 욕망이 혁명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이 욕망을 억누르는 것 또한 욕망이 아닌가?

 

앙띠 오이디푸스에서는 ‘참된’(vrai) 욕망을 상정함으로써 이 문제를 풀려고 했다.

 

그러나 무엇이 참된 욕망인가? 계급의식이나 역사발전 따위를 다시 들고 나오는 것은 욕망의 반목적론적 문제의식을 무화하는 것이기에 용인하기 어렵다. 누가 욕망하는가를 기준으로 삼으려는 것도 신뢰할 수 없는 방책이다. 히틀러의 집권을 욕망한 것은 누구였던가? 68혁명 시기에 드골이 퇴진한 이후 퐁피두를 다시 욕망한 것은 누구였던가. 쇠고기 파동의 주역인 현 정권을 애당초 욕망한 것은 누구였던가?

 

‘욕망하는 기계’는 욕망을 이 같은 주체의 문제로부터 해방시킨다. 목적을 지닌 어떤 유기체적 주체가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기계들이 욕망하는 것이다. 주체란 이런 욕망하는 기계들이 기관 없는 신체에 기입됨으로써 발생하는 것이지만, 이 주체는 고정된 자기동일성을 가지지 않으며 따라서 어떤 운동의 중심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주체의 범주는 상징적 조작에 의해 왜곡되기 쉽다.

 

결핍으로서의 욕망에 시달리는 주체, 오이디푸스적인 주체가 그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징적 욕망과 실재의 욕망을 구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요컨대, 앙띠 오이디푸스에 따르면, 참된 욕망이란 곧 실재의 욕망이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욕망의 딜레마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까? 이 참된 욕망은 어떻게 하여 거짓된 욕망을, 즉 조작된 상징적 욕망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거짓된 욕망을 욕망하는 것은 실재의 욕망이 아니란 말인가? 만일 아니라면 그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앙띠 오이디푸스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아직 실재의 욕망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놓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실재 욕망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대신에 거짓 욕망을 작동하게 하는 다른 힘을 끌어들인다.

 

그것은 “정신분석보다도, 가족보다도, 이데올로기보다도, 아니 이것들을 합친 것보다도 조금 더 강력한, 조금 더 밑바닥에 있는 힘”, “욕망의 힘들을 정복하여 단념시키는” 강력한 힘이다. 우리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이 힘을 결국 사회적 리비도의 한 극으로, 즉 편집증적 극으로 돌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기에 대비되는 또 다른 리비도의 극은 분열증적인 극이다.

……

 그러나 이러한 설정은 미봉(彌縫)의 해결일 수 있다. ‘사회적 리비도’의 정체가 다시 문젯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도대체 리비도와 욕망은 어떻게 다른가? 리비도는 욕망의 일종인가, 아니면 또 다른 힘인가? 만일 리비도가 욕망보다 더 근원적이고 강력하다면 ‘실재의 욕망’은 정말 실재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리비도가 욕망보다 더 실재적이라고 해야 되지 않겠는가? ……

 

 욕망들의 흐름과 연결로서의 욕망. 이 욕망이 욕망하고 생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욕망들 자체, 곧 기관 없는 신체 자체이다. 하지만 이 생산은 단순히 주어진 것의 재생산이 아니다. 생산하는 욕망이 나아가는 방향은 여러 갈래일 수 있다. 고원과 고원을 잇는 흐름의 연속성을 향할 수도 있고, 코드화를 통해 견고해지는 고원의 지층을 향할 수도 있다. , 한 고원의 공허한 꼭대기를 향할 수도 있다. 이 같은 욕망의 움직임은 심지어 이런 흐름과 움직임을 파괴하고 소멸시키는 쪽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여기에 따라 기관 없는 신체에도 여러 유형이 존재한다. 공속면 위에 있는 충만한 기관 없는 신체, 한 지층 위에 있는 암적인 기관 없는 신체, 파괴된 지층의 잔해 위에 있는 텅 빈 기관 없는 신체 등이 그것들이다.

 

첫 번째는 억압을 깨뜨리고 구속의 경계를 가로질러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는 긍정적인 욕망에 해당하지만,

두 번째는 자기 영토의 무차별적 확장을 꾀하는 돈의 욕망, 국가의 욕망 따위의 파시스트적 욕망에 해당하고,

세 번째는 착란적, 자살적 붕괴로 이끄는 마약중독자나 마조히스트, 또는 우울증 환자의 자기 파괴적 욕망에 해당한다.

 

 이렇듯 천 개의 고원에 이르면 욕망은 매우 포괄적인 것이 된다. 이제 참된 욕망과 거짓된 욕망, 분열증적 리비도와 편집증적 리비도의 구별은 사라지고, 기관 없는 신체의 다양한 유형과 다양한 욕망의 방향이 남는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욕망의 딜레마가 만족스럽게 해소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문제가 더 어려워지고 모호해진 인상이 짙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제 욕망의 ‘실험’과 ‘시험’을, 그리고 ‘신중’을 이야기한다. 욕망의 해방과 욕망의 억압이라는 선명한 대치 대신에 욕망의 다양한 배치와 다양한 길이 제시된다. ……

 

 

□  타자를 향한 욕망

 

……

앙띠 오이디푸스가 가지고 있던 나름의 분명한 목표, 즉 목적론적 틀에서 가해지는 욕망에 대한 억압을 깨뜨리고자 하는 목표는 천 개의 고원에서 등장하는 다지화한 반목적론의 고원들 속에서 희석되어 버렸다. 반목적론이라는 목적을 스스로 구현한다는 점에서 볼 때, 천 개의 고원앙띠 오이디푸스에 비해 확실히 세련된 모습을 보여준다.

 

언어와 기호, 종교와 문학, 생물학과 인류학 등 온갖 분야를 땅 속의 감자 줄기처럼 엮어가는 전개 과정은 그 자체가 목적의 위계적인 질서를 거부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또 이렇듯 분산적인 뿌리줄기(리좀)에 해당하는 고원들은 그 하나하나가 고정되지 않는 흐름을, 즉 기관 없는 신체를 지향한다. 우리가 앞서 보았던 것처럼, 이 기관 없는 신체는 곧 욕망이다. 그러므로 천 개의 고원을 통해 이제 욕망은 자신을 욕망하는 기관 없는 신체로서 무수한 고원 속에 스며있는 셈이다. …… 

 

여러 영역에 나타나는 고원들은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강도와 배치에 따르는 일의적(一義的)인 존재의 지반을 가진다. 영토화와 탈영토화, 지층화와 탈지층화의 운동은 여기에 활력을 불어넣지만, 이러한 운동에 수반하는 욕망은 어떤 주체의 욕망이 아니라 익명적인 욕망이며, 그래서 실상 타자가 없는 욕망이다. 이와 같은 욕망은 이제 그 세계 너머의 새로움을 겨누지 못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을 결핍으로 보는 관점을 비판하고 욕망이 특정한 목적에 의해 규정되지 않고 작용할 수 있다는 생각을 피력했다. 이러한 견지는 욕망을 쾌락과 고통에 의해 인도되는 수동적인 처지에서 놓여나게 하며, 선악의 기준을 매개로 삼은 억압의 장치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렇게 해서 이들이 노린 것은 기성의 질서를 넘어설 수 있는 새로움의 도래였지만, 생산하는 욕망을 앞세운 이들의 시도는 욕망의 분출을 억압하는 현실의 문제와 관련하여 딜레마에 부딪히고 만다. 욕망의 억압 또한 욕망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 딜레마는 ‘욕망하는 기계’에서 ‘기관 없는 신체’로 욕망의 거주지를 바꾼다고 해서 해결되지 못한다. 논의의 본래 초점이던 욕망을 다른 것으로 희석시킬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런 귀결은 결핍이 아닌 욕망, 목적론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그 대상인 타자를 찾지 못한 데서 비롯한 것이 아닐까?

   

 나에게 생겨난 결핍을 메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존의 어떤 기준에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상 자체에 끌려서 생겨나는 욕망, 다시 말해 그 원인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 있는 욕망, 그 타자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확실히 알지 못하더라도 끝내 거부하기 힘든 타자를 향한 욕망 ― 이런 욕망을 우리는 경험하지 않는가. 이것은 좋음에 대한 욕망, 우리가 욕망하기 때문에 좋은 것이 아니라 좋기 때문에 우리가 욕망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타자에 대한 욕망이다. ……

 

 

 

 

■  합리적 선택과 욕구

 

                        “니코마스 윤리학연구논문, 해설 중에서 (김남두 외)

□  합리적 선택

 

.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

  . 합리적 선택은 덕에 가장 고유한 것이며     어떤 합리적 선택을 하는가를 보는 것이     행위를 보고 판단할 때 보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려 준다는 것이다.

 

  . 행위의 결과는 많은 우연적인 요소 때문에     애초에 그 사람이 의중에 두었던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정확히 알려 주지 못하지만     어떤 사람이 합리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더 정확하게 알려 준다는 것이다.

 

  . 동물이나 아이들도 자발적 행위는 하지만 합리적 선택에 따른 행위는 하지 않는다는 것은

    합리적 선택이 상당한 정도의 이성성을 중핵에 가지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고,

  . 즉흥적이거나 별안간에 한 행위는 합리적 선택에 따라 한 행위가 아니라는 지적을 통해

    이러한 이성성이 상당한 시간의 숙고를 거쳐야 한다는 조건을 읽어 낼 수 있다.

 

. 욕구/격정

 

  . 합리적 선택을 갖는 주체의 관점에서 보자면     오직 이성을 가진 것만이 합리적 선택을 가질 수 있다.

 

  . 욕구와 격정은 동물들도 가질 수 있는 것이니 같을 수 없고,     합리적 선택이 관계하는 대상은 욕구의 대상인 즐거움이나 괴로움이 아니기에     합리적 선택에 따른 것은 욕구나 격정에 따른 것과 같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가  욕구나 격정을 합리적 선택과 관련이 없는 것으로 갈라내는 중요한 이유는     이성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 때문으로 보인다.

 

. 바람/소원

  .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람의 대상과 합리적 선택의 대상이 어떻게 차이나는지를 설명한다.

 

  . 불가능한 것이나 자신의 노력으로 이룰 수 없는 것들을 바랄 수는 있지만, 합리적으로 선택할 수는 없다.     . 사람은 불사(不死)를 바라거나 자기가 좋아하는 배우가 상을 받기를 바라지만       이런 것들을 합리적으로 선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 또 바람이 주로 목적과 관련되는 데 반해       합리적 선택은 목적에 이르는 수단에 주로 관계한다.

 

  . 건강해지기를 바라지만 우리가 주로 합리적인 고려를 통해 선택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건강해지는가이다.

     . 합리적 선택의 대상은 우리 자신의 힘이 미칠 수 있는 것들이며

       주로 수단적인 성격을 갖는 것들이라는 것이다.

 

. 믿음  . 믿음 혹은 견해는 영원한 것들이나 불가능한 것들에 대해서도 가질 수 있다.  . 믿음들은 "참과 거짓"을 기준으로 나눠지는데 반해,     합리적 선택의 경우 "좋음과 나쁨"을 기준으로 나눠진다.  . 또 어떤 합리적 선택을 하느냐의 문제는       . 어떤 믿음 혹은 견해를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와는 달리         한 인간의 도덕적 성질에 직접적인 관련을 갖는다는 것이다.       . 믿음은 주로 "진리"가 문제되는 영역이라면         합리적 선택은 "좋고 나쁨"과 같은 윤리적 영역에 속한다는 지적이다.

 

 

 

 

 

■  라캉의 욕망이론

 

                                                                                                     : 한림대학교 의과대학 학회지

 

    라캉은 당시 프로이트에 의한 정신분석학적인 문학 해석의 한계를 넘어 심리구조에서 언어학의 개념을 도입하여 새로운 문학 해석 방법을 연구한 사람입니다. 현대 문학이론들이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의한 해석에 치중하였고 그 결과 모든 문학적 상징을 性적으로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라캉은 인간의 정신적 삶을 기호학적으로 풀어냅니다. 그래서 인간이 태어나 사회 생활을 하는 과정을 언어학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러한 과정이 바로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로 요약이 됩니다.

 

□  상상계(거울단계)

 

거울단계는 생후 6개월 내지 18개월 된 어린아이가 거울에 비친 자기 영상을 보고 매우 즐거워하는 모습을 관찰함으로써 유래되었습니다. 상상계는 다음과 같이 구성됩니다.

 

  . 어린이가 어른과 함께 거울 앞에 서서 거울 앞의 모습과 실제를 혼동한다.   . 어린이는 영상이 실재가 아니라 허구임을 깨닫는다.   . 어린이는 영상이 이미지임을 깨닫고 자신의 이미지와 타인의 이미지가 다름을 깨닫는다.  그래서 거울 속에 모습을 비추며 놀이를 한다.

 

어린이는 처음에 자신의 전체적인 모습을 볼 수 없겠죠. 손이나 발 등이 자신이 볼 수 있는 자신의 모습의 전부일 뿐입니다. 그러다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총체적인 모습을 보게됩니다. 바로 이 시기에 주체성이 발달하기 시작하며 자기 몸 일부를 사랑하는 자기성애의 단계에서 몸 전체를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며 발전해갑니다. 상상계에서 어린이는 아직 자신과 타인의 구분하지 못합니다. 어린이는 다른 아이가 울면 따라 우는데 이것이 자신과 타인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어린이와 가장 까깝게 지내는 어머니도 마찬가지로 여겨 어머니와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상상계는 이러한 상상적 오인을 특징으로 하는데 상상계에서 형성되는 주체성은 결국 허구적일 뿐입니다. 왜냐면 자신이 본 자신의 총체적인 모습은 거울을 통해 본 허구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이는 필연적으로 자기로부터의 존재 내 결핍을 갖게 되며 '자아'라는 개념을 갖게 되면서 아이의 자아는 분열되고 맙니다. 분열된 자아 때문에 상상계에서 어린이는 혼란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 단계인 상징계로 넘어가게 되지요.

 

□  상징계

 

상징계는 언어와 문화로 이루어진 보편적 질서의 세계입니다. 자아가 형성될 수 없었던 상상계와는 달리 상징계에서는 자아가 형성되기 시작하는데 그러나 이러한 상징계로의 진입은 희생을 필요로 합니다. 바로 어머니라는 존재 외에 아버지라는 금기를 받아들임으로서 상징계로의 진입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상징계로 진입한 어린이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겪으면서 어머니에 대한 욕망을 아버지의 법으로 전치하게 됩니다. 쉽게말하자면 어머니라는 존재는 자신과 동일시했기 때문에 별다른 정의 없이 그 존재를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라는 외부의 금기를 받아들이고 사회라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매우 어린 아이가 외부 세계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을 말하지요. 외부 사회의 무엇을 받아들일 때는 그 사물의 이미지를 그 사물의 이름으로 전치하게 됩니다.

 

, "우유"라는 외부 물질을 이미지로 가지고 있다가 그것이 '우유'라는 언어로 표현된다는 것을 알게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과정은 어린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강압적인 것입니다. 강압적으로 그 이미지를 "우유"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아이는 억압을 받게 되고 그 과정에서 무의식이 생기게 됩니다. 또한 동일시하던 어머니와 분리되면서 무의식적으로 상실에 대한 끊임없는 그리움과 욕망을 가지게 됩니다.

 

□  실재계

 

이 과정에서 어린이는 의사소통이 가능해지고 사회로 진입을 하게됩니다.

 

 

□  언어학 이론

 

라캉은 사유의 체계에 언어의 구조를 끌어들인다. 그는 프로이트가 발견한 무의식이나 성본능을 억압하고 자아의 자율성만을 강조한 모던시대 정신분석학이 보수적인 엘리트주의로 흐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성본능을 귀환시키면서 이것에 소쉬르 언어학을 적용하여 주체가 어떻게 언어(혹은 기표)의 지배를 받는지 보여준다.

 

소쉬르는 언어는 사물을 지칭하는 기표와 지칭당하는 대상인 기의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그리고 언어는 차이(혹은 관계)에 의해 변별의 기능을 갖는 자의적 체계라고 했다. 이 두 가지 정의는 각기 기호학과 구조주의로 가는 토대가 되는데 앞의 것은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일 대 일의 정확한 대응이 되지 못하고 기의가 미끄러져 의미가 수없이 확산되는 언어의 비유성 쪽으로 나가고, 뒤의 것은 은유와 환유의 두 축으로 정립되어(예를 들면 bill pill에서 b p는 대치, 압축, 은유이고, ill은 인접, 전치, 환유이다) ,반의 대립항이라 는 구조주의 시학을 낳는다. 라캉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적용하여 주체와 욕망을 해석한다. ……

 

언어가 한 가지 의미에 고정되지 못하고 의미가 고리를 물 때, 즉 기표만이 존재할 때 그 언어를 통해 생각을 표출하는 인간은 이 기표에 절대적으로 종속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 언어의 세계 속에 사는 한, 주체는 기표의 지배를 받기에 그것은 '언어처 럼 구조된다'는 것이다. 주체는 언어처럼 구조되어 있다. 그런데 그 언어는 은유와 환유로 구조되어 있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프로이트의 꿈작용을 되돌아보자.

 

의식의 고리가 헐거워진 틈새를 비집고 억압된 무의식은 꿈으로 나타난다. 이때 꿈의 내용은 닮은 형상으로 대치되고(압축, 혹은 은유) 이것도 들킬까 염려되어 그 옆에 인접한 것과 자리를 바꾼다(전치, 혹은 환유). 그렇다면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은유와 환유라는 언어의 구조와 같은 게 아닌가. 다만 프로이트의 시대에는 언어과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이었기에 그는 이것을 무의식의 영역으로 억압시켜 의식과 분리시키는 오해를 범했다는게 라캉의 말이다.

 

소쉬르의 언어관으로 인해 인간이 기표에 의해 지배받고 그 기표는 은유와 환유로 이루어졌으니 주체는 곧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해당된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되어 있다' 라는 말은 인간이 언어를 통해 존재하는 한 '인간의 의식은 은유와 환유로 구조되어 있다'는 뜻이고, 이것이 바로 라캉이 시도한 프로이트의 재해석이다. 그리고 이런 재해석에 의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라캉에 와서 정치, 사회, 문화예술의 분야로 확대 된다. 그 모든 영역이 의식에 의해 이루어지기에 이제 문제는 단지 신경증환자의 치료로 한정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욕망은 어찌 되는가. 무의식과 똑같은 원리에 의해 욕망 역시 표층으로 올라온다.

 

□  페미니스트 이론

 

사랑에 빠진 두 연인은 서로에게 인정받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 사랑의 요구는 연인들의 갈망을 채워 주기는커녕 점점 더 큰 욕망의 화로 속으로 밀어넣어 두 사람을 외롭게 만든다. 인정받고 싶을수록 갈망이 클수록 외로움은 더욱 커질 뿐이다. 사랑은 구체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에 손안에 넣을 수가 없다. 그것은 원초적인 힘이요, 대상을 향한 요구(demand)이다. 그러나 연인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성적 욕구(need)의 충족일 뿐이다. 요구는 추상적인 것이요, 욕구는 구체적인 것이기에 그 차액은 늘 남아 연인을 외로움에 떨게 하고 결핍에 시달리게 하고 끝없이 욕망 속을 헤매이게 한다.

 

프로이트가 중요시했던 성본능은 무의식과 마찬가지로 자아의 자율적인 능력을 강조하던 모던시대에 와서 억압되었다. 라캉은 성본능을 다시 귀환시켜 새롭게 해석해낸다. 특히 남녀 사이의 차별이라는 당대 사회를 반영했던 프로이트 이론이 남녀평등 혹은 여성이론이 부상되는 라캉의 시대에 어떻게 재해석되는지는 중요하다. 라캉은 페미니스트들에게 많은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서 유아기의 성심리를 설명했다. 남아는 어머니의 남근이 되려는 갈망으로 아버지를 증오하고, 여아는 반대로 남근을 선망하여 아버지를 원하고 어머니를 증오한다. 이런 증상은 유아기를 벗어나 남근기로 접어들면서 사회성을 얻게 되는데 이때 작용되는 것이 거세 콤플렉스이다. 거세공포를 느낀 아이는 어머니의 남근이 되려는 갈망을 포기하고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여 또 하나의 아버지를 꿈꾼다. 여아는 자신이 결핍의 존재임을 깨닫고 어머니를 질투하고 아버지(남근) 를 선망한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이런 성본능과 성차별 이론이 '도라의 경우' 어긋남을 보게 된다. 도라는 여성이었지만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했고 남성적 요소를 내보였기 때문이다.  ……

 

남근은 보이지 않을 때만이 기능을 발휘한다. 그것은 드러나면 허상이요, 억압되면 기능을 발휘하는 진리와 같다. 스스로를 감출 때만 기능하는 진리의 모순. 남근이 보이지 않을 때, 그것이 기능을 발휘할 때가 상상계요, 그것이 제 모습을 드러내 기능을 상실하는 순간이 상징계이다. 그러므로 성욕망은 단 한 번의 성적 결합으로 영원히 종식되는 일회성이 아니다.

그것은 계속 남아 대상을 갈구한다. 따라서 남녀는 정.반의 대립관계가 아니라 영원히 흘러넘치는 '희열(jouissance)'의 관계이다. 남녀는 각기 하나(혹은 전체)가 아니고 더구나 둘이 합쳐 '하나'가 되지도 않는 넘침의 관계이다.

 

그래서 라캉은 여성이란 단어 앞에 정관사를 붙였다가 지운다. 있다고 믿지만 씌어지는 순간 지워지는 상상계와 상징계의 변증법적 연결이다. '전체 혹은 하나'인줄 알았 는데 얻는 순간 넘치는 것, 즉 욕망의 또 다른 기호이기도 하다. 그것은 설명되지 않고 설명할 수도 없이 그저 경험할 수 밖에 없는 여성의 '희열'이며 진리 그 자체이다. 그래서 사유는 '희열'이다. 그리고 사랑의 편지는 진리가 허구임을 보이는 분석담론 이요, 과학적 담론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사랑의 문자, 즉 사랑의 기표이다.

 

'왜 너는 내가 생각하는 곳에서 나를 생각해주지 않는가.' 타자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이 일치하리라고 믿는 연인은 이렇게 묻는다. 그녀의 모습 속에서도 자신의 모습만을 보는 연인. 신을 사랑하면서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요, 먼저 자신을 사랑하면서 신에게 충성을 바치기에 우리는 신에게서 또 하나의 내 모습만을 볼 뿐이다. 14세기에 유럽을 휩쓸던 궁정풍 사랑이 동성연애가 극도로 타락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 나왔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궁정풍 사랑은 여성을 닿을 수 없이 높은 곳에 신처럼 위치시키고 변함없이 사랑을 바치는 이상화 된 사랑이다. 라캉은 이런 식의 사랑이 유행했던 것은 남녀 사이에 성관계가 없는 것을 은폐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가장 숭고하고 절대적인 듯 보이는 신에 대한 사랑도 이기적인 자기애라는 것을 깨닫고 내가 생각하는 곳에서 그녀가 생각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녀는 신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베르니니가 조각한 '성 테레사의 [희열]'은 신의 얼굴이 된다. 신비주의자들의 증언처럼 오직 경험할 뿐 설명되지 않는 것, 남근을 넘어서 희열을 향해 가는 것은 상상계를 넘어서 상징계를 경험하는 것이고 신은 주체와 대상의 정점에 위치한 거세자로서 둘이 하나됨을 막는다. 그래서 사랑의 욕망은 영원히 지속 되는 에로스로서 표시된다. 에로스가 하나가 됨을 막기 위해 프로이트도 죽음의 신 타나토스를 둘 사이에 놓았다.

 

남녀가 합쳐서 하나가 된다는 환상, 즉 주체가 상상계에 머무는 것을 거부하고 상징계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라캉의 분석담론은 남성을 남근으로 여성을 결핍으로 보는 대립적 성차별론을 극복한다. 그리고 여성의 [희열], 드러내면 허상이 되고마는 진리와 같은 차원으로 놓아 전통적인 남근중심주의를 넘어선다. 여성의 희열도 남근도 똑같이 기표요, 무의식이요, 스스로를 감출 때만 기능하는 진리이다.

 

이처럼 라캉의 주체와 욕망에 관한 이론은 페미니스트이론으로서 주요한 원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문학작품의 분석에서, 시각예술의 영역에서도 이런 논리는 다르게 '반복'된다.

 

㈜ 참고자료

. 라캉(Jacques Lacan; 1901~1981): 파리의 유복한 카톨릭 집안 태생

   1919년 의과대학에 다녔으나 철학, 문학, 초현실주의 사상에 심취

   1932년 의학박사 학위논문인 "인성과 관련된 편집증적 정신이상"

   1936년 국제정신분석학회에 '거울단계' 발표

 

 . 프로이트- 신경증, 히스테리로 시작. 치료가능성 다()

 . 라깡- 정신병에서 시작. 치료가능성 무()

 

1936년 거울단계에 관한 최초의 이론 제시. 이후 언어학쪽으로 관심 이동. 정신분석학을 육체와 관련된, 신경 생물학적 연구의 한분야로 간주하려는 경향에 반대하면서 구조 언어학을 적극적으로 정신분석에 적용하려 함.

 

 

 

■  라캉의 욕망이론  요약

          . 자크 라캉( 19011981 ), 프랑스 파리 태생의 정신분석이론가

                                                                                                                             (퍼온글 요약)

□  20세기 후반부 세계 문화의 흐름

 

 19세기말에는 작품을 읽고 저자가 그런 작품을 낳게 된 심리적 동기를 추적하는 이드 심리학, 20세기 모던시대에는 자아가 어떻게 스스로 상황 속에 적응시켜 가는가를 보는 에고심리학 등 당대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 것인데, 20세기 후반부 세계문화의 흐름 가운데 한 가지 특징은 모더니즘의 건조하고 메마른 추상적 엘리트주의로부터 탈출하여 인간과 역사를 보는 시각에 일상과 감흥을 불어넣으려는 시도이다. 여기에서 욕망, 권력, 담론, 지식, 주체의 문제가 부상되고 특히 에로티시즘이 부활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식 사유체계에서 주체는 환상이 조금도 개입될 수 없는 완벽한 에고이다. 이런 이성에 대한 의문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서 성 본능이라는 욕망과 어우러져 과학이 아닌 문학의 영역, 그 이상으로 확산된다. 그가 발견한 무의식은 혁명적 발견이다.

인간은 유아기를 지나 사회적인 존재로 영입되면서 사회가 금기하는 욕망을 처리해나가는 과정에서 이런 욕망들이 깨끗이 사라져버리지 않고 억압되어서 무의식으로 남아 의식에 영향을 준다고 말한다. 프로이트는 꿈의 분석뿐 아니라 말실수처럼 정상인의 경우에도 억압된 욕망이 표출되는 것을 다룬다.

 

광기-권력-담론-인식 등의 변화 과정을 추적한 미셀 푸코, 구조주의를 마르크스에 적용했던 루이 알튀세르, 현상은 서로 달라도 원리는 하나라는 구조 인류학을 탄생시킨 레비 스트로스, 자본주의사회에 내재한 파시즘적 욕망구조를 들추어내며 욕망-이미지 등 모호한 대상을 연구한 들뢰즈, 프로이트를 구조적으로 재해석하여 무의식과 언어의 관계를 파고들었던 쟈크 라캉, 바타이유의 에로티시즘의 부활 등 20세기 후반부에서 욕망은 주체의 문제와 함께 주요한 지적 동기가 된다.

 

□  욕망이론

 

 20세기 후반부에 프로이트는 어떻게 귀환되며, 특히 모던 시대에 억압되어온 무의식은 어떤 식으로 재해석하는가에 대해 라캉은 프로이트가 발견한 무의식을 다시 끌어들여 소쉬르의 언어관을 적용하여 구조주의 이론을 만든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소쉬르가 나오기전에 꿈 작용을 언어의 구조처럼 분석했다. 라캉이 암시를 얻은 것은 바로 이곳이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되어 있다>라는 말은 라캉의 이론을 가장 분명하게 표현한다. 이때 <언어처럼>은 은유와 환유로 구조된 <차이>의 체계인 언어를 말하기도 하고 언어는 기표와 기의로 이루어진다는 소쉬르 언어관을 일컫는 것이기도 하다. 무의식에 언어체계를 끌어들임으로써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의식의 차원으로 부상된다. 인간은 언어를 통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라캉은 사유의 체계에 언어의 구조를 끌어들여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성 본능을 귀환시키면서 이것에 소쉬르 언어학을 적용하여 주체가 어떻게 언어(기표)의 지배를 받는지 보여준다.

 

소쉬르는 언어는 사물을 지칭하는 기표와 지칭 당하는 대상인 기의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언어는 차이에 의해 변별의 기능을 갖는 자의적 체계라고 했다. 기표는 단 하나의 기의에 고정되지 않고 관계 속에서 또 다른 의미를 낳는다. 언어가 한 가지 의미에 고정되지 못하고 고리를 물 때 즉 기표만이 존재할 때 그 언어를 통해 생각을 표출하는 인간은 이 기표에 절대적으로 종속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 언어의 세계 속에서 사는 한 주체는 기표의 지배를 받기에 그것은 < 언어처럼 구조된다 >는 것이다.

 

소쉬르의 언어관으로 인해 인간이 기표에 의해 지배받고 그 기표는 은유와 환유로 이루어졌으니 주체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해당된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되어있다>라는 말은 인간이 언어를 통해 존재하는 한 <인간의 의식은 은유와 환유로 구조되어 있다>는 뜻이고 이것이 라캉이 시도한 프로이트의 재해석이다.

 

그리고 이런 재해석에 의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라캉에 와서 정치, 사회, 문화예술의 분야로 확대된다. 무의식과 똑 같은 원리로 인해 욕망 역시 표층으로 올라온다. 욕망은 환유이다. 욕망은 기표이다. 그것은 완벽한 기의를 갖지 못하고 끝없이 의미를 지연시키는 텅 빈 연쇄 고리이다.

 

그렇다면 욕망의 구조도 은유와 환유가 아닌가. 아무 것도 욕망하지 않는 것은 곧 죽음이다. 대상은 실제처럼 보였지만 허구가 아닌가. 대상을 실재라고 믿고 다가서는 과정이 상상계요, 그 대상을 얻는 순간이 상징계요, 여전히 욕망이 남아 그 대상을 찾아 나서는 것이 실재계다.

 

주체의 욕망을 충족시킬 것처럼 보이는 대상, 즉 대체가 가능하리라 믿는 단계, 이것이 압축이요, 은유이다. 그러나 충족시키지 못하고 다시 그 다음 대상으로 자리를 바꾸는 전치, 이것이 환유이다. 그러므로 욕망 역시 언어처럼, 무의식처럼, 은유와 환유로 구조되어 있다.

 

욕망은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다. 그렇지만 허상을 실재라고 믿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때 욕망은 권력자의 눈길처럼 음험해진다. 인간은 대상이 허상임을 알 때,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고, 자신의 시선 속에 타인을 억압하는 욕망의 시선이 깃들어 있음을 깨달을 때, 좀 더 쉽게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

 

 

□  욕망과 주체의 문제 (주체는 결핍이요, 욕망은 환유이다)

 

. 상상계 (거울단계);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어린 아기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신과 완전히 동일시하는데 이 단계를 라캉은 <거울단계>라하고 <보여짐>을 모르고 <바라봄>만이 있는 단계이며 <상상계>라고도 하는데

. 상징계

이 단계는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사회적 자아로 굴절된다. 언어의 세계요, 질서의 세계인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이 거울 단계는 사라지거나 억압되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연결된다. 이제 유아는 타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기에 자신의 욕망을 타자의 욕망에 종속시킨다. 거울단계는 비활동성 혹은 고착이라는 특성을 갖고 신경증환자는 모두 이 단계에 머물러 자아와 상황을 구별하지 못하고 소외되며 타자의식이 전혀 없어 광기가 존재한다.

 

도대체 라캉은 이런 분석을 통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이렇게 주체를 결핍으로 보는 것에 무슨 미덕이 있다는 것인가.

 

‘나’라는 주체 속에는 바라봄과 보여짐이라는 두 개의 주체가 있다. 데카르트식 주체는 보기만 하는 주체, 즉 보여짐을 당하는 주체를 상정하지 않은 셈이다. 보여짐을 모르는 주체는 왜 위험한가? 그것은 아직도 거울단계에 있는 주체이기 때문에 대상을 실재로 믿고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소외된 신경증환자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 고착에서 벗어나 대상이 허구임을 깨닫고 다시 또 연기된 대상을 향해 가는 것, 대상으로부터 탈출하는 것, 대상에서 벗어나는 반복 없이 삶은 지속될 수가 없는 것이다.

 

라캉 역시 당대의 실존적 자아와 현상학적 자아를 전복하기 위해 자아를 해체하고 있다. 타자를 인정하지 않는 고립된 주체는 심한 경우 히틀러처럼 역사를 광기로 몰아넣는다는 것이다. 라캉은 주체를 결핍으로 보고 욕망을 환유로 본다. 그것은 주체를 대상에 대한 왜곡된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고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오인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 <타자의식>을 갖게 한다. 이 타자의식이 라캉의 이론이 지닌 미덕이요, 그의 이론이 문학, 정치, 사회, 여성이론으로 확장되는 근거이다.  

 

□  시각 예술 이론에서의 "응시"

 

 실재계의 행복한 만남이란 어떤 것일까?

스스로가 데카르트적인 <사유하는 주체>가 아닌 <욕망하는 주체>임을 인정할 때 인간은 실재와 불행하지 않은 만남을 이룰 수 있다고 라캉은 말한다.

 

우리 의식은 보기만 하는 시선(eye)이 아니라 보여짐(gaze=응시) 이 함께 하는 중첩적인 것이다. <보여짐>을 강조하는 것이 라캉의 ‘욕망하는 주체’이다. 세계 속에서 인간은 보여지는 존재다. 응시는 주체가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들어서듯 바라보기만 하는 것에서 보여짐을 아는 순간 일어난다. 자신이 세상에 의해 보여짐을 의식할 때 주체는 고립과 소외를 벗어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타자의식」이다. 그것은 바로 사회의식이다.

  

 

 

 

■ 디오니소스적 욕망   요약

        

                                                                                                              : 다음 신지식 중에서

□  디오니소스적 욕망이란,

                  ㈜ 디오니소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술을 담당하는 신 (Dionysus, 박카스의 다른 이름)        

   술마신 상태, 즉 이성보다 감성이 우선되며 본능적 즐거움을 추구할 때 디오니소스적이라고 한다. 이 술의 신에 대한 의식(儀式)은 열광적인 입신(入神)상태를 수반하는 것으로, 특히 여성들이 담쟁이 덩굴을 감은 지팡이를 흔들면서 난무하고, 야수(野獸)를 때려 죽이는 등 광란적인 의식에 의해 숭배되는 자연신이었으나, 그리스에 전해져서는 이 신의 제례에서 연극이 발생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시되고 있다. 왜냐하면 디오니소스는 술의 즐거움, 즉 쾌락을 주는 신이었기 때문에 신에 대한 의식을 할 때에도 광란의 상태에서 접신하여 즐겁게 웃고 떠들며 상대방에 잘못을 비판하는 의식이 행해졌으며 이런 의식에서 희극이 생겼다고 보는 것이다.

 

반대로 아폴론적이라고 하면 감성보다는 이성이 앞선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니체가 주장한 바는 아폴론적이었던 (이성에 의지헀던) 서양역사를 비판하고 디오니소스적인(이성보다는 자신의 본능과 감정에 충실한) 사회를 주장한 것이다. 그가 주장한 초인이 바로 그런 인물이었을 것이다.

 

다른 예로는, 나르시스즘, 자기 모습을 보고 반해서 물에 빠진 자기애의 대표자. 그리고 프로메테우스, 인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고귀한 정신의 소유자 (마치 예수처럼……), 판도라,  유혹에 약한 존재(실은 판도라의 상자가 더 많이 쓰임. 인류에게 닥친 고난, 혹은 희망의 상징)등 등

 

 

□   디오니소스적 세계관

 

창조의 일면에 파괴가 따르는 자기 모순적인 생성을 디오니소스적이라 합니다. 언제나 같은 일이 영원히 되풀이되는(고착화되지 않는) 세계를 디오니소스적 세계라 합니다.

 

아폴론적 세계는 가상의 세계라 할 수 있습니다. 세계는 암담하고 공포로 가득 차있고 차가운 기운만이 인간의 주위에 도사리고 있는 광란의 바다 위에서, 하나의 조각배 위에 그 허약한 배를 크게 믿으며 한 뱃사람이 앉아 있는 것처럼 고통의 세계 한가운데에 개개의 인간들은 <개별화의 원리>를 믿고 의지하며 고요히 앉아 있는 그런 세계입니다.

 

신념과 원리에 사로잡혀 있는 자의 조용한 앉음새의 최고의 모습이 아폴론적 세계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디오니소스적 세계는 바로 이러한 개별화의 원리가 파괴되면서부터 나타납니다. 아폴론이 고통의 현실을 영원하고 조화로운 진리성, 완전성으로 극복하려고 하지만 디오니소스는 그 현실의 원초적 공간으로 달려갑니다.

 

주신찬가에서 말하는 마취적 음료에 의해 사람들은 흥분과 격정의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원초적이며 근원적이고 동력적인 생명력을 지닌 인간들의 세계입니다. 고통과 공포의 대상이었던 자연과 화해의 제전을 펼치게 된다는 것으로 디오니소스적 도취는 인간으로 하여금 삶의 가치를 고양시키도록 해준다는 것입니다.

 

디오니소스적 세계관에 있는 사람들은 예술가들이 많습니다. 인간의 육체에서 생겨나오는 감정과 열정과 욕망을 통해 부단한 변화 속에서 스스로를 창조하고 생성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원불변의 세계, 피안의 세계, 신의 세계에 대한 부정입니다.

 

 

.  디오니스적 욕망

 

니체는 디오니소스를 굉장히 숭배했다고 한다. 그는 세상을 맑은 날씨처럼 말짱한 정신 상태의 아폴론적인 것과 막 사랑에 빠져 허공을 딛고 사는 듯한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나눴는데,  질서와 조화, 엄격, 균형 등의 아폴론으로 대변되는 이성보다는 감정, 육체, 순간적 열정과 활력으로 상징되는 디오니소스가 인간이 사는 이 땅에서의 삶을 건강하게 긍정하는 신으로 더 인정한 것 같았다. 위대한 창조에는 때로 열정적인 도취와 황홀한 충동이 필요한 법이니까 ……

 

      술의 신 디오니소스는 죽은 어머니의 몸에서 꺼내어져 아버지의 몸 속에서 산달을 채우고 태어난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남편 제우스가 세멜레라는 인간 여인과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아낸 헤라는 교활한 속임수를 통해 세멜레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제우스는 한 줌 재가 되어 사그라진 세멜레의 몸에서 태아를 꺼내 자신의 넓적다리에 넣어 아기를 살려낸 뒤, 세멜레의 동생인 이노에게 양육을 부탁했다. 하지만 헤라의 분노는 세멜레를 죽인 것으로는 부족했다. 그녀는 이노를 미치게 해서 디오니소스를 키울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재빨리 알아차린 제우스가 다시 디오니소스를 구해내 니사 산에 사는 님프들에게 맡겨 몰래 키우도록 했지만, 헤라는 다시 디오니소스에게까지 광기(狂氣)를 불어넣었다. 헤라의 저주로 디오니소스는 미쳐서 이곳 저곳을 떠돌 수 밖에 없었다. 디오니소스의 방랑은 그를 불쌍히 여긴 레아 여신(제우스와 헤라의 어머니)이 직접 나서 저주를 풀어준 뒤에야 겨우 끝이 날 수 있었다.    

                                                                                    (그리스 신화 ‘디오니소스’ 중에서)

 

 

□   희랍인 죠르바 (디오니소스적 인간형)

                                                                                                       : 네이버 블로그, sarahgm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 1883 -1957)의 이름을 널리 알려지게 한 소설은 1946년에 발표된 희랍인 조르바《그리스인 조르바 Zorba the Greek 원제목-Víos kai politía tou Aléxi Zormpá》이다.

 

이 소설 '희랍인 조르바'는 앤써니 퀸이 주연한 영화로 더욱 많이 알려지게 된다.

 

'조르바'라는 주인공은 탄광사업을 하고자 하는 남자가 고용한 늙은 남자인데 그야말로 본능에 충실한 사람, 본능을 따라 산 인간형이다. 일평생 술과 음악에 빠져 살았고 여자를 좋아하며 세상의 윤리도덕이나 시선 따위에 신경쓰지 않고 살아가는 거칠고 직정적인 저질 인간, 천박한 인간형에게서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숨겨진 자기 자신의 욕망, 인생의 힘! 이나 자유혼을 보았던 모양이다.

조르바는 새끼 손가락이 없는 이유를 물어보자 도자기를 빚는 데 걸리적거려 도끼로 잘라버렸다고 말하고 사업이 망해버린 뒤에는 “빈털터리가 되었으니 아무 것도 우릴 방해할 것이 없다”며 춤을 추자고 하는 그런 인간형이다. ()의 神, 열광과 축제의 神 '디오니소스(Dionysus 박카스의 다른 이름)적 인간형'이다.

 

카잔차키스는 이것 저것 스스로 만들어 놓은 관념의 덫에 잡혀 사는, 질서와 규범의 태양신 아폴로 'Apollo적 인간'형과 내면에 도사린 디오니소스적인 욕망의 경계선을 평생 살았던 것 같다.

 

본능이 이끄는 대로 아무 생각없이 개념없이, 그렇게 살아가는 조르바의 삶의 단순성이 예민한 자의식과 종교적 죄의식을 아래 늘 스스로 괴로워하며 살아가는 '창백한 지성인'들에게는 속으로는 한없이 부러운 삶의 태도일 수도 있겠다.

 

니체에게 열광했던 카잔차키스는, 그리고 한때 철저한 금욕과 극기를 수련하는 수도사 출신으로서 평생 '수도사 의식, 또는 소명을 버린 죄의식이 있었을 그는 이 조르바로 상징되는 한 늙은 건달에게서 짜라투스트라의 초인 超人위버멘쉬(Uebermensch)-모든 종교적 금기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게 살아가는 그 모습의 원형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이 조르바의 삶의 스타일은 오쇼 라즈니쉬에게도 매력적이었던 것 같다.

 

인도의 철학교수 출신 명상가로서 힌두교, 자이나교, 선불교, 유교, 기독교, 그리스 철학 등이 혼합된 가르침을 전파했고 나중 미국 오레곤에서 수많은 추종자들을 이끌었던 오쇼 라즈니쉬(Osho Rajneesh 1931~1990 본명/ 라즈니쉬 찬드라 모한 Rajneesh Chandra Mohan Jain)는 평생에 가장 놀라운 책으로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들곤 했는 데 그가 말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은 카잔차키스의 조르바를 인용한 '조르바 붓다'(Zorba Buddha) 였다. 조르바의 자유정신과 부처의 삶을 조화시키는 것이 그가 말하는 초인이었는 지 모르겠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 1883 -1957):

 

 1883년 크레타 섬에서 태어난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프란시스 수도사들이 운영하는 학교를 졸업한다. 그후 아테네 대학을 거쳐 파리로 유학가게 되는 데 그 시절 마케도니아의 아토스산에서 6개월 동안 칩거하며 하나님을 만나고자하는 수도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하나님은 과연 어디에 계시는것일까? 예수 그리스도는 나에게 누구인가? ……"

 

훗날 그는 '영혼의 자서전'이라는 책에서 이런 문장을 쓴 바 있다.

   "나는 편도나무에게 말했노라.

   그대여, 나에게 하나님에 대해 말해다오.

     그러자 편도나무에 꽃이 활짝 피었네"

 

깊고도 깊은 산속의 수도생활, 그러나 아마 생각만, 생각만 복잡하고 많았던 기간이었던 것 같다. 그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영혼의 순례, 사상의 편력을 거치게 되죠. 그는 니이체와 베르그송 그리고 불교(佛敎)에 흠뻑 빠지고 몰두하고 그리고 나아가 러시아로 가서 마르크스 주의에 심취하는,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의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정치의 경험도 있다. 그는 1945년에서 1948년까지 그리스의 내무부장관을 역임했다..

 

그의 이름을 알리게 했던 '희랍인 조르바'를 쓴 이후 그는 또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 돌아가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평생의 질문에 이제는 스스로 대답하고 싶었던 것일까?

 

1951,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의 혼이 담긴 '최후의 유혹 Last Temptation of Christ -Ο Τελευταίος Πειρασμός)을 쓴다. 그리이스 정교회에서는 이 소설을 불순하다고 여기지만, 희랍인 조르바였던, 조르바이고 싶었던 그에게 영원과 구원은 아직도 끊임없는 질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최후의 유혹'이 그가 평생 누구인지 알기 원했던, 때로는 피하고 때로는 멀리했던 그러나 한번도 떠나본 적이 없는 예수님께 바치는 신앙의 고백서라고 여겨진다. 이 소설은 인간 예수의 모습을 상상하여 많이 기록했기에 내용이 불순하다고 비판을 많이 받았지만 그러나 여기에서 보여지는 것은 그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처절한 사랑이다.

   "이 책을 읽게 될 모든 자유인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깊은,

   사랑이 마음에 넘쳐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리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이 책에서 카잔차키스는 그가 평생 고민했을 상상을 펼친다.

만일,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았다면?’ “엘리엘리라마사박다니”와 “ 다 이루었도다.”사이의 기간동안 최후의 유혹을 당하셨다면 ……

'사랑하는 여인, 아이들, 가정의 평화, 아이들 웃음소리, 따뜻하게 부는 바람, 밝은 햇살 …'

   "그는 정신을 차려, 이곳이 어디이고, 내가 누구이고. . 아픔을 느끼는지.

   기억해내려고 애를 썼다. 그는 머리가 흔들렸다.

   얼핏 그는 이곳이 어디이고, 내가 누구이고. . 아픔을 느끼는지.

   기억이 되살아 났다.

   "다 이루어졌다! 테 텔로스타이!"

그리고 그 말은 이런 뜻이었다.

   "모든 일의 시작이니라 …… "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중국 여행중에 광동에서 맞은 천연두 예방 접종이 잘못되어 병이 나고 1957년 독일의 병원에서 숨을 거두게 되는 데 그의 작품을 읽고 노벨상에 추천했던 '알버트 슈바이쳐'가 병문안을 왔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때 알베르 까뮈와 한표 차이로 노벨상을 타지 못했다는 일화도 있다. 카잔차키스의 유해는 나중 그의 고향 그리이스-희랍의 크레타섬에 묻히게 된다.

 

그의 고향 무덤에 그가 생전에 기록한 비문이다.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이므로."

 

 

 

■ 욕망과 행복의 관계 (심리학의 관점에서 본)

 

 

                                                                                               권석만, (논문 중에서 부분 발췌)

‘행복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 심리학자들은 크게 두 가지의 입장, 즉 쾌락주의적 입장과 자기실현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  쾌락주의적 입장

 

쾌락주의적 입장을 지닌 심리학자들은 행복을 개인이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긍정적인 심리상태라고 본다. 즉 행복은 개인이 자신의 삶에 대해서 만족스럽게 느끼는 주관적인 심리 상태라는 생각이다. 이들은 ‘주관적 안녕(subjective well-being)’이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개인이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경험하는 주관적인 심리상태로서 정서적 요소와 인지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 주관적 안녕의 구성요소

 

. 정서적 구성요소

 

  (긍정적 정서)

        즐거움, 만족감, 행복감, 자존감, 애정감, 고양감, 환희감

  (부정적 정서)

        슬픔, 우울감, 불안감, 분노감, 질투감, 부담감, 죄책감/수치감

 

. 인지적 구성요소

  (만족도 평가차원 평가 영역)

        현재 및 과거의 삶에 대한 만족도, 미래의 삶에 대한 낙관도

        삶의 변화에 대한 필요성, 자신의 삶에 대한 중요한 타인의 견해

  (평가 영역)

        자기, 가족, 건강, 직업, 여가, 재정상태, 소속집단

 

□  자기실현적 입장

 

반면에, 행복을 자기실현적 입장에서 탐구하는 긍정 심리학자들이 있다. 이들은 개인이 자신의 긍정적 성품과 잠재능력을 충분히 발현함으로써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삶을 구현하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본다. 자기실현적 입장의 긍정 심리학자들은 심리적 안녕(psychological well-being)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 심리적 안녕의 6가지 구성요소(Carol Ryff, 1989, 1995)

 

. 환경의 통제(environmental mastery) :

    주변 환경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잘 처리하는 능력과 이에 대한 통제감을 지닌다.

    자신의 가치나 욕구에 적합한 환경을 선택하고 창출해 낸다.

 

. 타인과의 긍정적 인간관계(positive relations with others) :

    타인과 따뜻하고 신뢰로운 관계를 형성한다. 타인의 행복에 관심을 지닌다.

    공감적이고 애정어린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능력을 지닌다.

    인간관계의 상호 교환적 속성을 잘 이해한다.

 

 

. 자율성(autonomy) :

    독립적이며 독자적인 결정 능력이 있다. 자신을 특정한 방향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요구하는

    사회적 압력에 저항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내면적 기준에 의해 행동을 결정한다.

    외부적 기준보다 자신의 개인적 기준에 의해 자신을 평가한다.

 

. 개인적 성장(personal growth) :

    자신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 자신이 발전하고 확장되고 있으며 자신의 잠재력이

    실현되고 있다고 느낌을 지닌다. 새로운 경험에 개방적이다. 자신의 발전과 성장을 위해 노력한다.

 

. 인생의 목적(purpose in life) :

    인생의 목적과 방향감을 지니고 있다. 현재와 과거의 삶에 의미가 있다고 느낀다.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신념체계를 지니고 있다. 삶에 대한 일관성 있는 목적과 목표를 가지고 있다.

 

. 자기수용(self-acceptance) :

    자기 자신에 대해서 긍정적 태도를 지닌다. 긍정적 특성과 부정적 특성을 모두 포함한 자신의

    다양한 특성을 인정하고 수용한다. 과거의 삶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느낀다.

 

 

 

또한 자기실현적 입장의 긍정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긍정적 성품에 깊은 관심을 지닌다. 인간의 성격과 덕성에 근간한, 지혜, 자애, 용기, 절제, 정의, 초월 등의 핵심 덕목을 중심으로, 개인이 자신의 긍정적 성품과 강점을 자각하고 계발하여 일상생활의 현장에 활용함으로써,

 

즐거운 삶(pleasant life), 몰입하는 삶(engaged life), 의미 있는 삶(meaningful life)을 영위하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Christopher Peterson과 Martin Seligman, 2004)

 

 

□  행복의 욕망충족 이론

 

욕망충족 이론(desire fulfillment theory)에 따르면, 욕망은 그 자체로 인간을 행복하거나 불행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보다는 욕망의 충족 여부에 의해서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혐오하는 존재이다. 욕망의 충족은 쾌락적 경험을 유발하는 반면, 그 좌절은 고통스런 경험을 초래한다. 다양한 욕망을 충분히 충족시킬수록 행복해진다는 것이 이 이론의 골자이다.

 

인간의 행복 정도는 다양한 욕망(생리적 욕구, 재물욕, 명예욕, 지식욕 등)을 충족시킬 수 있는 환경적 또는 상황적 조건(예: 의식주, 재산, 계층, 사회적 지위, 교육수준 등)에 비례한다. 다양한 욕구를 충분히 충족시킬 수 있는 환경적 여건을 잘 갖춘 사람일수록 더 행복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욕망충족과 행복의 관계는 간단하지 않다. 욕망충족 이론이 시사하는 가정들은 긍정 심리학의 연구 결과들과 일치하지 않는다.

 

    첫째, 기본적인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환경적 여건을 잘 갖출수록 주관적 안녕의 수준이 증가하지 않았다. 다양한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외부적 조건들(예: 재산과 소득, 교육수준, 사회적 지위, 직업, 결혼여부, 신체적 매력도 등)은 주관적 안녕과의 상관 정도가 상당히 미미한 것으로 나타났다(Peterson, 2006). 예컨대, 소득수준은 빈곤상태를 벗어날 때까지는 행복도에 기여했지만 그 수준을 넘어서면 그 영향력이 미미한 것으로 나타났다.

 

    둘째, 행복은 욕망충족의 여부보다 자신의 상태를 비교하는 기준의 속성에 의해서 결정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욕망충족으로 인한 행복은 일시적일 뿐만 아니라 상대적이다. 인간은 자신의 상태를 어떤 기준(다른 사람, 과거의 삶, 이상적 자기상, 지향하는 목표 등)과 비교하여 그 기준과의 긍정적인 차이를 인식할 때 행복감을 느낀다. 다른 사람과의 사회적 비교가 주관적 안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개인의 욕망이 충분히 충족되더라도 그보다 더 풍요로운 상태에 있는 사람과 비교하게 되면 행복도가 저하된다. 또한 욕망이 충분히 충족되지 않더라도 과거에 비해 자신이 더 나은 상태에 있다고 판단하면 행복도가 높아진다. 일반적으로, 높은 기준과 상향적인 비교를 하면 행복도가 저하되는 반면, 하향적인 비교를 하면 행복도가 증가

하는 경향이 있다.

 

    셋째, 인간은 욕망이 충족되면 곧 그러한 상태에 익숙해져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은 쾌락을 느끼는 자극을 반복적으로 접하게 되면 그에 대한 쾌락이 약화되는데, 이러한 현상을 적응(adaptation)이라 하며 둔감화(desensitization) 또는 습관화(habituation)라고 불리기도 한다. 쾌락은 유쾌한 보상적 경험이기 때문에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는 동시에 반복적으로 경험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반복적인 쾌락경험은 그 유쾌함의 강도가 감소한다. 행복은 항상 주어지는 자극보다 새롭게 발생한 긍정적인 변화에 대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욕망은 끊임없이 보채는 아이와 같아서 지속적으로 충족시키기가 어렵다. 하나의 욕망이 충족되면, 다른 욕망이 부각되면서 그 충족을 요구한다. 또한 인간의 욕망은 다양하기 때문에 한 욕망의 충족은 다른 욕망의 좌절을 유발하여 내면적인 갈등을 초래한다. 뿐만 아니라 인간사회에서는 구성원들의 욕망이 충돌한다. 한 사람의 욕망충족은 다른 사람의 욕망좌절을 초래하여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게 된다.

 

 

□  욕망과 행복의 관계에 대한 통합적 이해

 

‘욕망’은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낱말이지만 학술적인 용어는 아니다. 또한 욕망과 유사한 의미를 지니는 용어들이 많다. 예를 들어, 본능(instinct), 충동(impulse), 추동(drive), 소망(wish), 욕구(need), 동기(motivation) 등의 다양한 용어들이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심리학에서는 욕망이라는 용어보다 욕구 또는 동기라는 용어를 선호하여 사용한다. 욕구(need)는 만족하지 못하는 내면적인 상태를 말한다. 편안함과 행복감을 느끼기에는 무언가가 부족한 결핍상태를 의미한다.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욕구는 두 가지 특성을 지닌다.

 

    첫째, 욕구는 방향성을 지닌다.

즉 행동의 방향에 영향을 미친다. 한 시점에서 할 수 있는 다양한 행동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는지에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욕구는 어떤 특정한 것에 대한 추구이다. 욕구는 어떤 특정한 대상이나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 예컨대, 식욕은 음식을 찾게 만들고, 갈증은 물을 찾게 만들며, 성욕은 이성을 찾게 만든다.

 

    둘째, 욕구는 행동의 강도에 영향을 미친다.

즉 욕구가 강렬할수록, 특정한 행동을 하려는 강도가 커진다. 여러 가지 장애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행동을 힘들여 계속하는 것은 그에 대한 욕구가 강하기 때문이다. 또한 욕구의 강도는 어떤 행동을 먼저 하고 다른 것을 다음으로 미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우선순위를 정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욕구가 강렬할수록 그에 관한 행동을 더 빨리 하게 된다.

 

심리학자들은 욕구가 행동으로 표출되기까지 상당히 복잡한 심리적 과정을 거친다고 가정한다.  동기는 욕구와 행동 사이를 매개하는 심리적 상태이다. 즉 동기는 내재해 있는 욕구가 특정한  행동에 한 단계 더 가깝게 다가가 구체화된 심리적 상태를 의미한다. McClelland(1984)에 따르면, 동기는 추구하는 목표나 경험에 관한 구체적인 생각들과 그에 대한 열중이나 집착을 의미한다. 즉 동기는 욕구에 인지적 요소와 정서적 요소가 가미되어 특정한 생각과 열망 상태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갈증은 무언가 목을 축일 수 있는 것을 추구하는 막연한 내면적 상태라면, 동기는 ‘시원한 물을 상상하고 그것을 찾기 위해 열중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욕망에 비해서 동기는 추구하는 목표가 좀 더 분명하게 구체화된 심리적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동기는 내면적 욕구에 의해서만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외부적 사건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Carver & Scheier, 2005).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는 말이 있듯이, 맛있는 음식을 보면 먹고 싶은 마음이 생겨난다. Murray(1938)는 이러한 외부적 영향을 설명하기 위해서 ‘압력’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압력(press)은 무언가를 얻고자 하거나 또는 피하고자 하는 동기를 만들어내는 외부적 조건을 말한다. 즉 외부적인 유혹을 의미한다. 맛있는 음식을 보게 되면 먹고 싶은 동기가 일어나며, 감금상태에서는 자유를 얻고자 하는 동기가 강해진다.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 이유는 그러한 행동을 추구하는 내면적인 동기가 있기 때문인데, 이러한 동기는 무언가가 결핍된 막연한 불만족 상태를 뜻하는 욕구와 더불어 환경적인 압력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

 

    생리적 욕구(physiological needs)는 인간의 신체적 조건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으로서 개체의 생존과 종족의 보존에 기여한다. 이러한 욕구에는 음식, 수분, 공기, 체온, 수면, 휴식, 성(sexuality)에 대한 욕구가 해당된다. Murray(1938)는 이를 일차적 욕구(primary needs)라고 불렀다. 선천적인 욕구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심리적 욕구(psychological needs)는 선천적인 신체적 조건보다 후천적인 경험과 학습에 의해서 더 뚜렷한 영향을 받는 욕구들을 의미한다. 이러한 욕구에는 권력, 성취, 자존감, 친밀감 등에 대한 욕구들이 해당된다. 심리적 욕구는 생리적 욕구로부터 파생된 것일 수도 있으나 개인의 후천적 경험에 의해서 더 많은 영향을 받기 때문에 매우 다양할 뿐만 아니라 개인차가 현저하게 나타난다.

 

인간의 욕망에 대한 논란 중 하나는 무의식적 욕망에 관한 것이다. 인간은 자각하기 어려운 무의식적 욕망을 지닌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 특히 근원적인 욕망은 무의식의 저변에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자각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우리가 의식하는 욕구나 동기들은 여러 가지 심리적 기제에 의해서 변형되고 왜곡된 것이다. 그렇다면 근원적인 무의식적 욕망은 어떤 것인가?

 

진화론을 주장한 Charles Darwin은 인간의 욕망 역시 진화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Franken, 2002). 인간은 근본적으로 동물과 다를 바가 없으며, 인간의 욕망은 동물이 지니는 본능(instinct)과 유사한 것이다. 다만 인간은 동물과 달리 본능적 욕망을 통제할 수 있을 뿐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욕망과 행동은 생물학적 구조에 의해서 유발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생물학적 구조는 오랜 진화과정에서 환경에 대한 적응을 위해 선택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욕망과 행동은 개체의 생존과 종의 보전을 돕기 위한 것이다.

 

진화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인간이 나타내는 다양한 행동들은 생존과 번식을 위한 적응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Buss, 2004). 첫째,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 의식주와 안전에 대한 욕구를 지닌다. 또한 다른 종의 위협으로부터 질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환경적 위협에 투쟁하도록 설계된 불안과 공포를 지닌다. 둘째, 번식을 위해 짝짓기의 욕구를 지닌다. 즉 이성을 유혹하고 성행위를 통해 후세를 생산하려는 욕구를 지닌다. 셋째는 양육의 욕구이다. 출생된 어린 자식을 보호하고 건강하게 양육하기 위한 욕구이다. 이러한 욕구들이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구를 구성하고 있다. 또한 암컷과 수컷은 진화과정에서 담당한 역할과 기능이 다르기 때문에 각기 다른 심리적 본성과 기제를 지닌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Sigmund Freud는 Darwin의 진화론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사람이다. 그는 심리치료 경험과 자기분석을 통해서 성욕이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망이며 다른 욕구들은 성욕으로부터 파생된 것이거나 방어기제에 의해서 변형된 것이라고 여겼다 (Brenner, 1955). Freud는 말년에 죽음의 본능 또는 공격 본능을 제시 하기도 했지만, 성욕을 가장 근원적인 욕망으로 보았다.

 

무의식을 중시하는 정신역동학자들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에 대해서 다양한 주장을 제시하고 있다. 분석심리학을 창시한 Carl Jung은 무의식의 핵심인 자기(Self)가 확장되어 개인의 정신세계 전체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려는 개인화(individuation) 경향을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동력으로 보았다. 개인심리학을 제창한 Alfred Adler는 열등감과 이를 보상하려는 욕구가 인간의 기본적 동기라고 주장하였다. 현대 정신분석학의 한 조류인 대상관계 이론은 타자와 관계를 형성하려는 욕구를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구로 여긴다(Cashdan, 1988).

 

3의 심리학이라고 불리는 인본주의 심리학의 대표적 인물인 Abraham Maslow와 Carl Rogers는 자기실현 욕구를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상위의 동기라고 주장한다. Maslow(1954)는 자기실현(self-actualization)을 ‘개인이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을 충분히 발현하려는 경향‘이라고 정의했다. 그에 따르면

 

    가장 낮은 단계에는 생리적 욕구(physiological needs)가 존재한다.

        음식, 물, 호흡, 성(性), 수면, 배설과 같은 기본적인 욕구로서 개체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것들이다.

 

    둘째는 안전 욕구(safety needs)로서 다양한 위험을 회피하고 안전한 상태를 갈구하는 욕구를 뜻한다.

        여기에는 건강, 직장, 가족, 재산 등의 안전을 추구하는 욕구가 포함된다.

 

    셋째는 애정 및 소속 욕구(love/belonging needs)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과 사랑을 주고받으며 집단에 소속하고자 하는 욕구를 지닌다.

 

    넷째는 존중 욕구(esteem needs)로서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느끼고자 하는 욕구이다.

        자기긍지와 자기만족을 느끼기 위해 자신을 발전시키려는 욕구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가장 높은 단계에 위치하는 것이 자기실현 욕구(self-actualization needs)이다.

        이는 자신이 지닌 잠재능력을 충분히 발현하고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성취하고자 하는 욕구이다.

 

Maslow에 따르면, 욕구는 낮은 단계의 하위 욕구로부터 높은 단계의 상위욕구로 발달해간다. 특히 하위 욕구가 만족되지 않으면 상위 욕구로의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상위 욕구로의 발달은 하위 욕구의 충족을 전제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배고프고 목마르고 위험에 쫓기는 상황에서 애정 욕구나 존중 욕구는 뒤로 밀려나며 음식과 물을 찾아 안전한 곳에 피신하려는 욕구와 행동이 우선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애정 욕구가 충분히 충족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존중 욕구나 자기실현 욕구가 잘 발달되지 않는다. 하위 욕구의 충족에 의해 상위욕구가 발전하여 행동에 영향을 미치더라도 하위욕구에 불만족이 생겨나면 우리의 행동은 하위 욕구의 충족을 위해 퇴행 되게 된다. 이렇듯, 인간의 동기는 서로 위계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으며 상위 욕구로의 발달은 하위 욕구의 안정된 충족을 필요로 한다.

 

 

□  욕망과 행복의 관계에 대한 두 가지 입장

 

욕망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가 아니면 불행하게 만드는가에 대해서 대립되는 두 가지 견해가 존재한다(Veenhoven, 2003).

 

. 욕망은 눈먼 야생마와 같아서 우리를 절벽으로 인도한다고 견해가 있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우리가 욕망에 대한 고삐를 틀어 쥐고 제어하지 않으면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이러한 견해의 극단은 금욕주의(asceticism)이다. 욕망은 사악할 뿐만 아니라 어리석고 위험한 것이므로 엄격하게 억제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 (또 다른 한가지는) 욕망은 우리의 삶을 건강하고 적응적으로 인도하는 지혜로운 안내자의 역할을 한다는 입장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 Veenhoven(2003)에 따르면, 이러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견해를 지니고 있다.

 

    첫째, 욕망은 삶의 의욕과 활기를 제공한다.

욕망은 삶에 에너지를 불어넣는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아무런 욕망이 없다면, 무슨 동력으로 삶을 영위해 나갈 것인가? 욕망을 과도하게 억제하는 것은 생기 없는 무미건조한 삶을 초래할 뿐이라는 것이다.

 

    둘째, 욕망은 삶에 필요하고 시급한 과제에 대응하는 능력을 증진 시킨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은 생존과 적응에 필요한 활동을 촉진하는 신호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신호를 무시하게 되면 우리의 삶이 부적응인 것으로 전락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몸은 수분이 부족할 때 갈증을 느끼게 하여 수분을 섭취하게 만들고, 영양이 부족할 때는 식욕을 느끼게 하여 영양을 섭취하게 만든다. 고독감은 사회적 존재인 인간으로 하여금 대인관계에 참여하도록 촉진한다.

 

    셋째, 욕망은 즐거움의 원천이다.

욕망의 충족을 통해서 우리는 즐거움과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긍정적 정서는 그 자체로 보상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스트레스에 대한 인내력을 증가시키고 현실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한다. 또한 대인관계를 증진하고 건강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우울증 상태는 그 자체로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현실적 과제에 무기력하게 대응하고 위축된 대인관계를 초래하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욕망에 대한 긍정적인 견해를 지닌 사람들은 금욕주의자들이 너무 편향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다고 비판한다. 금욕주의자들은 욕망과 쾌락 추구를 무절제한 탐욕이나 방종과 같은 극단적인 상태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즉 욕망의 위험성을 지나치게 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적절한 욕망과 쾌락의 추구는 몸과 마음을 즐겁게 함으로써 인생을 향유하도록 만든다. 오히려 욕망에 대한 과도한 억제나 억압은 삶을 메마르게 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정신장애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  욕망의 조절

 

인간은 욕망을 지닌 존재인 동시에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욕망은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이며, 행복은 인간이 지향하는 목표이다. 욕망과 행복의 관계는 욕망을 어떻게 적절하게 조절함으로써 개인이 추구하는 행복한 삶을 실현하는 데 활용하느냐는 문제로 귀결될 수 있다. 즉 자기조절(self-regulation)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생명체의 특징 중 하나는 환경을 인식하는 의식을 지닌다는 점이다. 의식의 수준은 매우 다양하며, 고등동물 일수록 의식의 용량이 크다. 의식(consciousness)은 고등동물의 중요한 심리적 현상이며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체는 외부환경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해 가는데, 생명체마다 각기 환경과 상호작용 하는 방식이 다르다.

 

진화 심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욕망은 인간의 생존과 번식을 돕는 적응적인 것이다. 그런데 욕망은 다양한 환경적 상황에 맞추어 스스로를 조절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즉 욕망은 시력이 나쁜 야생마와 같다. 장애물이 적은 벌판을 시원스럽게 달리기에는 좋은 야생마이다. 그러나 인간의 생존조건이 다양하고 복잡해짐에 따라 욕망은 좌충우돌하는 야생마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즉 욕망은 인간의 생존과 적응을 돕는데 한계를 드러내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야생마의 방향과 속도를 조절하는 욕망의 조절기제가 필요하게 되었다. 욕망만으로는 다양한 환경에 효과적으로 적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의 행동을 하기까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과정은 매우 복잡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요인들이 관여한다. 내면적 욕구와 환경적 압력이 행동을 동기화 하는 과정에 개인의 신념과 인지가 관여한다. 신념은 개인이 경험을 통해 형성한 지식, 믿음, 가치 등을 포함한다. 아울러 인지적 판단과정을 통해서 환경적 사건의 평가, 목표 설정과 대응 행동의 계획, 행동의 결과에 대한 예상, 환경의 통제 가능성 등을 고려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욕구들이 충족을 위한 경합을 벌이게 된다. 이렇듯 욕망이 행동으로 표출되기까지 매우 복잡한 심리적 과정이 관여하게 된다.

 

□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인지적 요인

 

욕망과 행복의 관계는 인지적 요인이 관여함으로써 매우 복잡해진다. 인간의 경우, 욕망은 개인적 신념과 가치관의 영향을 받아 의식적으로 지향하는 목표로 변형된다. 이러한 목표를 성취했을 때 기쁨과 만족감을 경험하며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욕망충족 과정을 좀더 정교하게 발전시킨 행복의 설명이론이 목표 이론(goal theory)이다(Austin & Vancouver, 1996). 목표는 개인이 행동을 통해 성취하고자 하는 구체적인 지향점을 의미한다. 인간은 자신이 추구하는 목표를 달성하거나 목표를 향해 진전되고 있다고 믿을 때 행복을 느낀다는 입장이다.

 

인간이 자신의 상태를 평가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사회적 비교(social comparison)이다. 자신을 타인과 비교함으로써 자신의 상태를 평가하는 것이다. 비교대상에 따라서 사회적 비교는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과 비교하는 수평적 비교(lateral comparison),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들과 비교하는 상향적 비교(upward comparison),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과 비교하는 하향적 비교(downward comparison)로 구분할 수 있다. 어떤 비교기준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행복도가 달라진다. 실증적 연구에 따르면, 상향적 비교를 하는 사람들보다 하향적 비교를 하는 사람들의 행복 수준이 더 높다(Lyubomirsky & Ross, 1997).

 

현재의 자신을 평가하는 또 다른 비교기준은 과거의 자신이다. 현재의 상태를 과거와 비교하여 긍정적인 변화를 인식할 때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과거와 비교를 할 경우, 삶의 여건이 열악한 상태에 있었던 사람들은 비교기준이 낮기 때문에 새로운 변화를 긍정적인 것으로 경험할 가능성이 높다. 반면에 탁월한 삶의 조건에서 생활해온 사람은 비교기준이 높기 때문에 긍정적 변화를 인식하기 어렵다. 행복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현재의 절대적 상태가 아니라 과거보다 나아졌다는 긍정적 변화의 인식이다.

 

행복을 이해하는데 고려해야 할 또 다른 중요한 요인은 쾌락에 대한 적응 현상이다. 인간은 아무리 긍정적인 환경과 행복감 속에서 살더라도 그러한 상태가 지속되면 행복감이 저하된다. 즉 욕망이 충족되거나 목표가 달성되어 행복감을 느끼게 되더라도, 그러한 상태가 지속되면 행복감이 감소한다. 인간은 지속되는 긍정적 상태에 대해 적응을 하여 둔감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  욕망과 행복의 관계에 대한 통합적 이해

 

인간은 욕망을 지닌 존재인 동시에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인간의 삶은 욕망을 지니고 행복을 지향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욕망은 무언가 결핍되어 있음을 느끼는 심리적 상태인 동시에 그러한 결핍감을 해소할 수 있는 대상에 대한 지향 상태로서 외부세계에 대한 행동을 유발하는 원동력이다. 적절한 행동을 통해서 결핍감이 해소되면, 즉 욕망이 잘 충족되면 기쁨과 만족감이라는 긍정 정서와 더불어 행복감을 경험하며 평정상태(equilibrium)에 이르게 된다.

 

유기체로서의 인간은 내적 또는 외적 요인들 간의 상호작용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평정 상태(equilibrium)를 유지하려는 경향성을 지닌다. 이러한 평정상태는 내부적인 생리적 변화나 외부적인 환경적 자극에 의해서 깨어진다. 욕망은 깨어진 평정 상태를 회복하려는 노력의 시발점이다. 평정 상태가 깨어지면 무언가 부족하거나 불편하다고 느끼는 결핍감, 즉 욕망을 느끼게 되며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대상을 지향하게 된다.

 

인간은 개인적 경험에 근거한 가치관과 사회환경적 여건을 고려하여 결핍감을 채울 수 있는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추구한다. 내면적 욕구들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환경적 요인을 고려하여 현실적인 목표와 계획을 수립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기조절이 매우 중요하다. 현실적인 고려 없이 욕망의 즉시적 충족을 추구하는 충동적 행동은 대부분의 경우 좌절과 불행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욕망은 인지적 과정의 개입을 통해 구체적인 목표로 전환되어 목표지향 행동을 유발한다. 행동을 통해서 목표가 달성되면 결핍감이 해소되면서 쾌감과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느끼는 만족감의 정도는 목표로의 진전속도나 목표의 달성 수준에 대한 인지적 평가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된다. 아울러 타인 또는 과거와의 비교를 통해서 자신의 현재 상태를 평가한다. 비교기준과의 긍정적인 차이를 인식하게 되면 만족감과 긍정 정서는 증가하는 반면, 부정적인 차이의 인식은 긍정 정서를 저하시킨다.

 

주관적 안녕으로서의 행복은 결핍감이 해소되는 욕망충족 과정에서 경험하는 긍정적인 정서와 인지적 평가의 복합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행복의 상태가 지속되면 긍정 정서와 행복감은 약화되어 평정상태로 회귀한다. 평정상태는 특별히 유쾌한 긍정 정서나 불쾌한 부정 정서를 느끼지 않는 중성적인 정서상태로서 평안하고 이완된 심리적 상태를 의미한다.

 

욕망은 평정상태의 균열로 인해 생겨나는 결핍감에 대한 유기체의 반응으로서 평정상태를 회복하려는 노력의 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행복은 욕망의 충족을 통해서 결핍감을 해소하고 평정상태로 회귀하는 과정에서 체험하는 긍정적인 심리상태라고 할 수 있다.

 

 

 

 

 

■  쾌락과 욕망

 

 

 

                                                                                                            블로그 태양은덥다중에서

사물 인식론에 있어서는 플라톤의 합리적 이성과는 다른 감각에 의한 지각에 기인한다고 하여 차이를 보이지만, 그들 철학의 목적인 쾌락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이성의 지배하에 놓여야 할 하위적인 쾌락의 개념이 아닌 이성의 원리와 나란히 하는 쾌락이므로 그러한 면에서는 플라톤의 이성주의와도 비슷함을 발견할 수 있다. ……

 

 

에피쿠로스 철학은 아테네의 사모스 식민지 출신의 에피쿠로스(341∼270 B.C.)에 의해 창립되어 스토아 철학과 같이 헬레니즘 시대에 그리스와 로마에서 유행했던 철학이었다. 헬레니즘 철학은 그리스의 쇠망 이후 로마 지배기, 지배적 사상이 없었던 로마가 사상적으로 그리스의 것을 그대로 답습했던 철학 사조를 지칭한다.

 

아테네는 더 이상 세계의 중심이 되지 못했으며 로도스나 알렉산드리아 등의 도시가 학문적으로 번창하게 된다. 동방과 로마의 문화 및 윤리관이 그리스로 유입되었으며 정치적 타락 와중에 각 개인이 평등하다는 세계 시민사상이 도모되었다. 이러한 혼란은 인간의 윤리적인 욕구와 초월적 세계의 행복을 동경하는 종교적 욕구를 자극한다. 또한 혼란은 살아남기 위한 개인의 본능을 실천문제에 집중하도록 유도한다. 때문에 지금까지의 순수하게 이론적인 자연철학, 앎의 문제, 존재의 문제에 대한 관심은 자연히 등한시되었다. 따라서 철학의 사조와 철학자들은 어느 때보다 인간의 내면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서 이론의 탐구보다 윤리문제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했다.

 

이 그리스 말기 윤리 종교 시대를 장식하는 철학적 경향들의 하나가 에피쿠로스 철학이며 동시에 경향을 구성했던 철학으로 스토아 철학, 회의론 철학, 신플라톤주의를 들 수 있다. 이 새로운 경향들 중에서 스토아 철학은 소크라테스 학파에 속하는 퀴니고스 철학으로부터, 에피쿠로스 철학은 퀴레네 철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회의론 철학은 메가라 학파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신플라톤주의는 비록 순수한 형태의 그리스 철학의 영역에 속했으나 중세 기독교 철학에 영향을 미쳤다.

 

에피쿠로스는 스승인 나우시파네스를 통해서 데모크리토스의 저술과 회의론자 피론의 이론을 연구했다. 여러 곳에서 가르치다가 기원전 206년 아테네에 학교를 세우고 그곳에서 사망할 때까지 37권의 책을 저술했으나 현재는 단편들만 전해지고 있다. 그는 자신의 체계를 44개의 명제로 요약했는데 이것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에피쿠로스 철학은 스토아 철학과 마찬가지로 문화의 타락을 피하고 해방되고 독립된 사람의 행복한 삶을 목표로 삶는다. 포도주 통을 집으로 삼고 알렉산더 대왕의 신하 되기를 거부하며 거지처럼 삶을 이끈 디오게네스처럼 에피쿠로스 철학자들도 가정과 사회 그리고 국가의 일에 무관할 것을 주장했다. , 에피쿠로스 철학은 개인에게 할 수 있는 한, 세상의 일 따위는 잊어버리고 자기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것을 권유하는 철학이다.

 

이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리스 고전 국가의 고전적 삶의 이상이 무너지고 개인이 공동체로부터 소외되어 황량하고 불확실한 세계 속에 불안하게 내던져져 있다고 느낄 수 밖에 없는 시대 상황의 결과였다. 에피쿠로스는 인간의 정치적(사회적) 활동을 고상한 활동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인간의 본성상 필수적인 일이라 여기지 않았다. 그가 사회라는 장치에 기대하는 것은 서로 고통을 주지도 받지도 않는 것뿐이며 법과 정의도 인간의 상호관계에서 서로 해를 입히지도 말고 해를 당하지도 않는 상호이익의 협정이나 소극적 방어수단으로서 필요할 뿐이다. 따라서 부득이한 상황이 아니라면 인간은 정치적 삶으로부터 물러서서 자기의 정원으로 은둔하여 거기서 삶의 의미와 기쁨을 추구해야 한다는 자유라는 그리스의 고전적 삶의 이상을 정치적 실천에서가 아니라 은둔적 삶에서 느끼는 소박한 자족을 통해 실현하려 했다.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은 모든 종류의 불쾌함을 제거하고 피해 조용한 은둔생활에 전념했다. 스토아철학은 냉철한 이성으로 충동과 욕망을 억제하는 금욕을 이상적인 것으로 여겼음에 반해 에피쿠로스 철학은 부당한 선입견을 피하고 자연과 신에 대한 공포감을 멀리하려고 했다. 에피쿠로스 철학은 개인적 삶으로 은둔하여 삶의 완성과 행복을 추구했기 때문에 육체의 한계 내에 갇혀 있는 개별자로서의 내가 직접 소유하고 느끼고 관리할 수 있는 경향으로 흐른다. 인간이 사회적 인간을 떠난 개인이 될 수 있다면 육체의 쾌락과 마음의 즐거움이 가장 큰 인간의 목적일 수 있음을 보인다. 에피쿠로스 철학은 쾌락주의 철학이며, 따라서 그 가장 큰 목표는 참된 쾌락의 증언과 실현이다.

 

에피쿠로스는 참된 쾌락이 무엇인지를 밝히기 위해 우선 인간의 욕구를 분석했다. 쾌락은 인간 욕망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는 욕망의 충족이 언제나 순수한 쾌락으로 끝나지 않는 까닭을 무엇보다 욕망 그 자체의 비본래성(非本來性)에서 찾았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욕구들 가운데 어떤 것은 자연적이며 필연적이며, 어떤 것은 자연적이기는 하지만 필연적이지는 않으며, 그리고 어떤 것은 자연적이지도 필연적이지도 않으며 단순히 공허한 망상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한다. 즉 인간이 느끼는 많은 욕구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 규정된 집단 혹은 개인적 망상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오직 자연적이고 본래적인 욕망이 추구되고 충족될 때 인간은 참된 쾌락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이 진정한 쾌락을 누리고자 한다면 먼저 충족되어야 할 욕구와 절제되어야 할 욕구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결과로부터 에피쿠로스는 쾌락 역시 좋은 쾌락과 나쁜 쾌락을 구분했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의 분별은 소피스트적 쾌락주의와 가장 분명히 구분되는 기준이다. 에피쿠로스는 원칙적으로 쾌락의 원리를 이성의 원리와 일치시키려 했다. 쾌락을 이성의 원리 아래 일방적으로 종속시키려 하지는 않았으나 쾌락의 원리를 이성의 원리와 나란히 했던 것이다.

 

에피쿠로스의 철학이 이성주의가 아니라 쾌락주의로 판단되는 근거는 그의 철학에서 행복한 삶의 실제적 내용이 쾌락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근거로부터 에피쿠로스는 차별적 쾌락을 추구한다. 쾌락과 고통을 선택하고 회피하는, 즉 쾌락을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은 다시 쾌락이다. 결과적으로 얻을 수 있는 가치가 쾌락인지 고통인지는 쾌락의 유용성을 통해서 판단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쾌락의 가치적 완전함도 쾌락을 통해 평가된다. 이는 플라톤적 사고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모든 존재의 참됨은 순수하고 완전한 이념인 이데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불완전한 쾌락의 가치는 완전한 쾌락에 의해 평가된다. 에피쿠로스의 참된 쾌락은 향락 자체에 있는 쾌락 혹은 적극적인 의미에서 무한히 큰 쾌락이 아니라 정반대로 고통의 부정, 즉 고통이 없는 상태로 보았다. 다시 말해 완전한 쾌락은 무한히 큰 쾌락이 아니라 무한히 작은 고통, 또는 고통의 전적인 부정과 결여이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동적(動的) 쾌락과 정적(靜的) 쾌락으로 구별했다. 동적 쾌락은 결핍으로부터 충족으로 이행할 때 느끼는 쾌락이며 인간이 말하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쾌락이 여기에 속한다. 반면에 정적 쾌락은 마음에 불안이 없고 몸에 고통이 없는 평정상태를 뜻한다.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진정한 쾌락은 정적인 쾌락이다. 이와 같이 에피쿠로스 학파는 순수하게 정신적인 쾌락만이 선한 삶을 가능하게 하며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 믿었다. 이러한 논리 위에서 에피쿠로스는, 행복은 마음의 안과 밖에서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참된 쾌락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고통과 불안의 부재 상태에 있을 때 실현되는 것이다. 고통도 불안도 없는 이러한 절대적 평온함을 가리켜 에피쿠로스는 아타락시아(ataraxia)라고 칭했다. 이성의 금욕에 의한 부동심을 주장한 스토아 철학의 아파테이아(apatheia)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참된 쾌락은 오로지 고통을 피하는 소극적인 범위에 있었기 때문에 육체를 위하여 요구하는 최고의 쾌락은 맛있는 음식과 성적인 쾌락이 아니라 고작 헐벗고 굶주리지 않는 것뿐이었으며 권력이나 명예, 재산 등도 마찬가지의 가치로 여겼다. 이런 차원에서 에피쿠로스는 '자연의 의도에서 비춰본다면 가난이 최대의 부유함이며, 한계를 모르는 부유함(욕구를 포함한)은 커다란 가난'이라고 언급했다. 진정한 쾌락과 행복을 육체적 쾌락이나 외부적 재화에서 찾지 않았던 점에서라면 에피쿠로스나 스토아 철학자들은 공통점을 가진다.

 

에피쿠로스 철학이 사회성을 완전히 등한시 한 것은 아니다. 인간의 사회적 의무를 강조했던 스토아 철학과는 차이를 보이지만 개인의 사사로운 인간관계는 중요시했다. 특히 이러한 개인의 수많은 인간관계들 중 에피쿠로스는 우정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았다. 에피쿠로스는 우정을 얻는 능력을 행복에 기여하는 지혜의 활동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우정은 공적인 일에 투신하지 않고 사사로운 공간에 머무르려 하는 인간에게는 가장 이상적인 인간관계이며 에피쿠로스의 소극적 쾌락에 적합한 인간관계이다. 이상과 같이 에피쿠로스 철학의 삶의 목표는 육체의 고통과 마음의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으며 이런 삶을 우정으로 가득 찬 삶 속에서 추구했다. 에피쿠로스는 모든 사람에 대한 인간애(philanthropia)를 강조했기 때문에 그의 철학적 공동체는 노예나 여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었다.

 

에피쿠로스의 종교적 관념은 당시 헬레니즘이라는 시대적 상황의 필연에 있었다. 그리스의 옛 신들은 더 이상 본래적인 생명력과 종교적 권위를 잃고 그를 대신할 새로운 권위가 등장하지 못하자 많은 종류의 미신이 창궐했다. 이렇게 종교를 대신한 미신의 혼란함 속에서 에피쿠로스는 종교적인 의미를 구현한다. 종교문제에 있어서도 스토아 철학과 에피쿠로스 철학은 대립적인 길을 걸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전래되어 오는 다신교적 종교를 제우스를 중심으로 일신교적으로 체계화하면서 사람들의 종교심을 순화시키려 했던 반면 에피쿠로스는 아예 모든 초자연적 세력을 인간의 삶으로부터 추방하여 인간의 운명이나 신의 개입으로부터 자연적인 존재로 만듦으로써 가능한 불안요인을 원칙적으로 없애는 길을 택했다. 결국 에피쿠로스는 종교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신의 운명을 떠난 종교로부터의 자유로운 마음을 택한 것이다.

 

죽음의 문제에 있어서도 에피쿠로스는 일반적인 방법과는 다른 태도를 보인다. 대개 인간은 죽음의 두려움을 종교적 믿음을 통해 극복하려 한다. 그러나 종교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든 바처럼 에피쿠로스는 일반적 태도와는 정반대로 내세와 죽은 뒤의 심판을 철저히 부정하고 죽음을 절대적인 소멸로 이해함으로써 죽음의 공포를 벗어나려 했다. 아니 죽음의 공포를 생각하지 않으려 한 것이 더 정확하다. 인간이 살아서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무관하다. 반대로 죽음이 인간에게 죽음이 찾아올 때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은 단지 존재의 절대적 소멸 그 순간이나 그 자체일 뿐 지속적인 개념이 아닌 것으로 에피쿠로스는 이해했다.

 

에피쿠로스 철학은 세계에 대해서는 데모크리토스의 이론을 인식의 문제에 관해서는 감각주의를 따른다. 세계의 사물들은 원래 원자들의 덩어리에서 생기는데 소용돌이 운동에 의해서 무거운 원자들과 가벼운 원자들이 서로 분리되는 과정을 통해서 세계가 태어난 것이다. , 사람의 모든 생각은 감각적 지각으로부터 생긴다고 본다. 그래서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이성적(합리적) 인식을 부정한다. 모든 인식은 사물에서 나온 상들의 감각 기관의 구멍을 통해서 성립하기 때문에 이성적 인식이란 무의미하다. 그러면 에피쿠로스 철학이 말하는 개념이란 무엇인가. 따라서 개념이 진리이기 위해서는 언제나 개념이 감각적 지각에 의해서 확인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감각주의적 인식의 이론은 감각적 지각을 인식의 기준으로 여기기 때문에 자칫하면 모든 것을 의심하는 회의론에 빠질 경향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