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 ......
■ 내 시간과 타인의 시간
"My Time and the Time of the Other"
자료: Rudolf Bernet, 내용 중 일부 발췌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시간은 정말로 무엇인가? 나에게 아무도 묻지 않더라도 나는 안다. 그러나 내가 질문자에게 설명하고자 한다면, 나는 알지 못한다.” 라고 했다.
. 시간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 자체로 시간적이기 때문에 어렵다.
즉 시간을 전제하고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간을 추상적인 연구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시간을 초월하여 문제를 제기할 수 없고, 영원성이라는 관점 아래서 시간을 관찰할 수 있었던 곳으로부터 시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시간과 망각 사이의 필연적인 연관성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어렵다.
시간은 지나가고 사라지며 결코 되돌아오지 않는 것에 비하여, 안다는 것은 기억력과 인지를 전제한다. 정말로 시간의 경과는 우리의 이전의 경험을 망각하게 할 뿐 아니라, 시간이 또한 우리에게 시간 자체를 망각하게 한다.
과거로부터 어떤 것을 기억하는데 성공할 때도 시간을 지속적으로 망각하고 있다. 우리가 시간을 파악하여, 시간을 행동과 인생의 목표에 관계시키며, 그래서 시간을 인간적인 이야기가 되게 할 때조차도, 시간은 우리로부터 사라진다.
. 시간이 무엇인가를 왜 알아야만 하는가?
. 과거의 시간으로부터 미래의 시간에 있을 어떤 것을 배울 수 있는가?
. 한 시대로부터 다른 시대로의 전환은 지속인가 아니면 단절인가?
. 더 이상 나에게 속하지 않는 미래, 즉 나의 죽음 이후에 일어날 미래에 있어서
책임의 시간은 무엇인가?
우리의 삶의 중요성은 단지 우리 자신에 의존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다른 사람이 우리의 삶을 함께 결정하고,
그래서 우리의 삶의 시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를 둘로 나누어 탐구할 수 있다.
. 역사적인 시간으로 변화되는 공동체의 삶과
. 타인에 대한 윤리적 책임감을 우리 삶에 부여할 때의 변화 탐구로 나눌 수 있다.
□ 내 삶의 시간
베르그송이나 후설과 같은 철학자들은 내 삶의 시간을 생애를 살았던 시간으로 본다. 그 결과 그들은 생애를 심리적이나 정신적인 시간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내 삶의 시간과 물리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는 사물들에 발생하는 시간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들에 따르면 물리적인 시간과 달리 심리적인 시간은 공간적인 움직임을 내포하고 있지 않고, 모든 공간적인 개념과 이야기할 수 있는 형식을 제거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숫자와 계산을 하고 있는 심리적인 활동은 시간적인 움직임에 대한 실제적인 측정이라고 말했다.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정확성을 가지고 있는 디지털 시계의 이러한 객관적 시간은 우리 삶의 시간을 경험하는 방법에 적용할 수 없다.
행복과 슬픔은 지속되는 기간이 있지만, 그 지속의 방식은 어떤 시계로도 측정될 수 없다. 심리적 시간이 가지는 두 가지로 대표되는 속성들, 즉 심리적 시간이 가지고 있는 지속성이나 중단되지 않는 특성과 주관적이거나 개인적인 본질을 생각하면,
내 삶의 심리적 시간의 지속성에 관한 한, 이것은 곧 내가 내 삶을 사는 방식에만 관계되는 것으로 인지될 것이다. 여기서 내가 연속되는 내 삶을 사는 방식이라고 한다면,
. 어떻게 내가 이 연속되는 내 삶을 사는가?
. 무엇과 무엇간의 지속성인가?
. 이것은 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삶 사이의 지속성의 문제다.
시간은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시간은 그 자체가 내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경험에 내용과 함께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칸트는 시간을 주체가 내용에 귀속되는 한 형태라고 주장한다. 반면 하이데거는 시간이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존재자의 존재라고 하면서 존재와 시간을 일치시키고 있다.
시간의 존재가 가지는 양상이 어떻든지,
내 생애의 현재 경험에서 나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나의 현재 삶, 과거 삶, 미래 삶을 함께 항상 경험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서도 분명하다.
지속성과 나의 삶이 가지는 시간의 총체에서 오는 생활이 특히 강하게 부각되는 기억과 기대와 경험의 본질을 천착(어떤 내용이나 원인 따위를 파고들어 알려고 하거나 연구)함으로써 이 모든 것들은 분명해진다.
기억하는 일에 있어서도 나는 다시 한번 현재에서 내 과거 삶에서의 일을 경험한다. 이것은 나의 과거 삶에서의 특별한 경험으로 기억하는 일에서 내가 경험하는 것은 현재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속하는 것이다. 과거로부터 뭔가를 기억해 냈을 때 나는 그것을 정말로 경험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그 경험은 더 이상 거기에 없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기억하고 있는 것은 과거에 속한 것으로서 내가 현재로서 경험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엄밀하게 말해서 나는 현재 그것을 이미 끝나버린 어떤 것으로 경험하기 때문이다.
기억하는 일을 이처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시간으로서 시간을 경험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나의 이전의 경험 내용과 똑같은 것을 현재에 기억한 내용, 그 차이는 현재와 과거시간에 속하는 것에 관계할 뿐이다. 더구나 기억하는 일은 시간 경험이라는 아주 복잡한 형태이다. 왜냐하면 기억하는 일이 서로 다른 두 개의 시간에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경험이 단순히 한 지평의 형식 속에서 과거를 포함하는 일반적인 경험과는 달리, 기억하는 일은 그 자체가 명백히 과거를 가리키고 있어서 그것이 지나간 것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현재가 된다.
이리하여 기억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는 과거, 미래와 얽혀진 현재시간을 경험할 뿐만 아니라, 지나가고 있는 움직임으로서의 시간도 경험한다. 이러한 시간의 일시성이 가지는 아주 복잡하고 향수 어린 색다른 경험이 주는 커다란 매력은 어쩌다가 기억을 해낸 사람이 시간은 생각해내지 못한다는 것을 구체화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기억하는 일에는 내 생애의 지속성뿐만 아니라 그 시간을 통한 나의 정체성도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프르스트의 걸작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기억의 문제에 전적으로 전념하고 있는데, 이 책은 ‘발견한 시간’이라는 제목의 장으로 의미심장하게 끝을 맺고 있다.
내 생애의 지속성과 이러한 시간을 통한 내 인격적인 정체성에 대한 경험은 기억하는 일이 현재의 관점으로부터 과거의 시간도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의 관점으로부터 미래의 시간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프르스트의 작품이 한번 더 분명하게 보여주듯이 사람은 항상 미래의 눈으로 기억한다.
□ 기대가 가지는 고유한 시간 경험
기대는 기억의 경우와 아주 비슷하다.
미래의 존재를 미래적인 것으로 현재로 이끌어 들여 올 때에도 우리는 우리 삶의 지속성과 우리 인격의 동일성을 경험한다.
내 미래가 내 과거와 동일한 방식으로 나에게 속해 있는 것은 아니다. 내 과거의 삶이 애초에는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의해 결정되었지만 이제는 전적으로 내 소유물이 된 것과는 달리, 내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은 단적으로 나에게 달린 것은 아니다. 따라서 기억은 우선 역시 내 의식 혹은 나의 사밀(私密)한 삶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무엇이다. 그에 반해 기대는 내 자신에 대한 앎을 능가한다. 기대는 다른 삶 또는 타인의 삶, 즉 “외부”에 관계한다.
내 시간은 그것이 나에게 속한 한 내 삶의 시간이다. 그것은 중단 없는 지속을 통하여 내 인격의 동일성 확인시켜 주는 시간이요, 다른 말로 하자면 주관적일 뿐 아니라 심리적인 시간이다.
□ 내 시간의 주관적인 성격 해석
나는 내 삶의 시간을 내 의식을 통하여 표상할 수 있음을 의미하며,
내 삶의 방식이나 내가 내 삶의 시간에 실존적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에서 나는 시간에 종속되는 방식으로 행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시점에서 나는 현재의 삶뿐 아니라 내 과거 및 미래의 삶에도 관계하는 것이 사실이다.
타인과 관계에 의해 내 삶의 시간이 변화되는 두 가지 다른 방법은 “역사와 윤리”의 시간으로 각각 생각할 수 있다.
. 역사의 시간, 내 삶의 시간의 의미를 내 삶의 한계 너머로 확장한다는 것을 함축
. 윤리의 시간, 내 시간을 다른 사람을 위한 시간으로 만드는 책임의 의미를 함축
역사의 시간은 내 삶의 시간을 위협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에 대한 윤리적 책임은 내 삶의 시간의 경험에 끼어들고 방해한다.
□ 역사의 시간
미래의 시간이 현재의 시간이 되고 현재의 시간은 과거의 시간이 되지만, 한 시간으로부터 다른 시간으로 흘러가면서 전환되는 것은 회복될 수 없는 변화를 함축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변화로 말미암아 내 시간이 타인의 시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역사는 내 삶의 시간이 타인의 시간 속에 끌려 들어감을 전제한다. 이때 그 타인은 반드시 동시대 사람이 아닐 수 있다. 오히려 사실은 내 삶의 시간과 같은 시간에 일어난 것들의 많은 부분이 역사적인 고려에서 배제된다. 역사에서 한 사람은 그 이전 세대의 삶과 관련하고 종국에는 미래 세대의 삶과 관련한다. 그래서 역사적 시간은 세대간을 묶는(trans-generation) 시간이다.
다시 말하면 역사는 다른 세대에 속한 사람들의 삶을 다루고 그래서 다른 세대들을 서로 묶어준다. 역사는 소위 세대간의 “간격”에 대해 무엇인가를 한다. 역사를 위한 시간이 존재하지 않을 때 그 간격을 넓어진다. 삶의 환경이 빠르게 변하고 역사적 의식이 희미해질 때 세대 차이는 아주 넓어질 위험이 있는 것이다.
역사는 인간 공동체의 삶과 관련해야만 한다는 것이 그 첫째이고 역사는 지금 살고 있는 공동체와 다른 시간에 살았던 공동체들 사이의 지속성과 관련한다는 것이 그 둘째이다.
공동체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자면 일단의 사람들이 삶의 내용이 그들이 어디엔가 함께 속해 있다는 감정에 의해서 결정될 때 그들은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공동체의 이름으로 말하는 사람은 “나”라고도 “그들”이라고도 말하지 않고 “우리”라고 말한다. 공동체는 근본적으로 제외시킴과 포함시킴이라는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
우리가 모두 인간이라는 사실만으로는 우리가 모두 동일한 역사적 공동체에 속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인간이라는 사실만으로 역사-시간적으로 함께 속해 있다는 감정을 형성시키기에 충분하지 않다. 인류의 초역사적인 개념에서처럼 본질적인 공동체는 아니다.
하나의 역사적인 공동체의 공통점은 역사를 통해 영속하는 것, 즉,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것이다. 역사의 중요한 개념은 전통이다. 전통 속에서 물려받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전통이 있다는 사실보다는 중요하지 않다. 또한 전통이 일방 통행이 아니라는 것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통에 의해 형성된 하나의 공동체는 다음 세대들에게 어떤 것을 물려줄 일에 흥미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이전 세대들의 상속자임을 느낀다. 그것은 그것이 받아왔던 것을 넘겨주며, 그것이 그것을 미래의 세대들에게 물려주는 것은 그런 상속에 대한 배려와 흥미에서다.
그것은 행동과 의식들, 사고방식들, 확신과 가치들, 언어, 예술과 정치의 전통들이 있다.
. 첫 번째의 전통은 하나의 기원을 향하며 역사적 시대의 고고학적인 결정을 전제로 한다.
. 두 번째 전통은 여전히 목적으로 달성시키는 방향으로 유도되며
역사적 시간의 목적론적인 개념을 함축한다. 예를 들면 기독교는 그 기원의 중요성과 종말론적인
목적을 연관시키는 “구원의 역사”를 주장한다.
주관적이고 역사적인 시간의 지속성에 대해, 우리 자신의 개인과 공동체의 이러한 견고함에 대한 이런 찬양이 비윤리적일 필요는 없다. 미래 세대들과 더불어 앞선 세대들에 대한 충실성은 오히려 존경과 도덕적인 관심을 나타낸다.
역사는 미래에 대한 가족주의적인 관점을 갖는다. 그것은 미래 세대들을 아들과 상속자들로 여긴다. 역사는 미래 세대들의 이질성을 보지 못하고, 예기치 않은 욕구들에 무심하며 그들의 새로운 생활방식들을 두려워한다. 미래에 대한 그런 역사적인 접근은 그 모든 것에 대해 무책임하지 않지만 그것의 책임감은 조건적이어서 실제적인 윤리적인 책임감을 입증하지 못한다.
□ 윤리학의 시간
레비나스에 의하면 윤리적 책임은 기억과 역사의 시간으로 환원될 수 없는 새로운 시간의 개념을 의미한다. 윤리의 시간은 내 시간도 우리의 시간도 아닌 타인의 시간이다.
그에게 있어 실제적인 윤리적 책임은 타인에 대한 보수적인 혹은 가족주의적 태도와 화합될 수 없다. 윤리학은 모든 형태의 이기적인 자기중심적 관계와 인간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시키는 개인의 기억과 역사적인 전통과 근본적인 단절을 가정한다.
기억과 전통의 시간과 달리 윤리학의 시간은 지속성이 아니라 중단된 시간이다.
중단된 시간은 간섭으로 인해 지나가 버린 시간이다.
미래, 현재, 그리고 과거의 상호 혼합된 것들이 용해되는 시간, 인생의 현재, 미래 과거가 더 이상 단순하고 유일하게 내게 소속되지 않는 시간이다.
내 인생의 중단이라는 일반적인 형태는 죽음이다. 죽음은 내게서 오지 않고 그 밖의 다른 곳에서 온다. 죽음은 내게 속해 있지 않은 채 내 인생의 가장 심오한 부분을 건드린다. 이것이 내가 죽음을 표상할 수 없고 전유할 수도 없는 이유이다.
죽음은 타인이 아닌 그 밖의 다른 곳에서 온다. 그것은 인식될 수 있는 형태나 모습도 없다. 죽음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죽음은 2가지 경우, 즉 살인과 희생의 경우에만 타인과 명백하게 관계한다.
그러한 개입이라는 윤리적인 의미인, 타인의 개입이 죽음의 경우보다 더 분명한 또 다른 개입의 형태들이 있다. 이 새로운 형태들은 미래뿐만 아니라 과거와 현재시간과 관계가 있다.
타인에 의해 내 과거의 윤리적 개입은 용서이다. 용서는 내 과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고독과 때로 견딜 수 없는 죄의식과 실수라는 무거운 짐으로부터 나를 해방시킨다. 이런 죄의식에 대한 개입은 내자신의 밖에서 올뿐만 아니라, 타인, 즉 아마도 내가 죄를 짓게 한 사람에 관해서 타인으로부터 온다. 용서는 내가 기대할 수도 없는 선물이며 은혜이다. 용서는 전적으로 타인에게 속하는 것이지만 내 인생의 전체를 변화시킨다. 따라서 나는 과거를 다르게 본다. 내 견해는 나를 용서한 타인의 견해가 되며 내가 보는 것은 내가 원래 내 인생으로 경험했던 인생과는 다른 인생이다.
희망은 윤리적 개념의 시간과 관계된다. 희망은 내 인생을 변화시키고 이런 변화는 오직 타인으로부터 온다.
희망은 용서처럼 내 미래의 삶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해주는 타인으로부터 오는 감사의 선물이다. 희망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으리라는 타인에 대한 분명한 혹은 함축적인 약속을 전제하고 있다. 타인에 대한 신뢰가 없는 곳에 희망은 없다.
타인의 개입이 현재의 시간을 윤리적 의미를 지닌 새로운 시간으로 만든다. 내 인생의 현재의 시간은 특히 주관적인 자기 중심적인 시간이다.
우리는 나의 자기 중심적인 시간의 지속성을 뚫고 들어와 그것을 윤리적 시간으로 만드는 타인이 나를 타인으로 더 정확히 말하면 타인을 위한 주체로 변화시킨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과거의 실수로부터 나를 용서하는 타인은 동시에 내게 미래에 더 많은 책임을 요구한다.
희망은 희생과 자기 희생을 요구한다.
민족중심주의와 국가주의의 형태들은 문화다원적인 사회의 형태들에 자리를 내주어야한다. 역사적인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함께 묶는 공동성은 더 이상 명백하고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역사에 의해 확립되어야 할 어떤 것이다.
미래에 대한 윤리적 태도가 희망으로 이끌어져야 하고, 이런 희망은 미래 세대에 대한 절대적인 신념과 우리의 즉각적인 쾌락을 희생시키는 것을 가정한다. 우리는 21세기의 미래 세대가 어떻게 살아가게 될 것인가, 혹은 그들의 요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에게 단지 어떤 것이 아니라, 모든 것, 우리의 전 관심과 전체의 삶을 돌려야 한다. 타인을 위한 시간으로서의 윤리적 시간은 우리 자신이 자연스럽게 후손에게 몰두하고 있는 것을 끝내는 곳에서 시작된다.
우리의 삶은 결코 윤리적이거나 자연스럽지 않다.
□ 아우구스티누스 (참고자료)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는 로마 제국에 속해 있던 북아프리카의 작은 도시 타가스테에서 태어나, 37살 늦깎이 신부가 되어 복음에 열성을 다 했고, 구원론을 통해 원죄에 대한 가르침 이끌었다.
. 개종의 배경 (다음지식 중에서)
그의 젊은 시절 방탕한 삶은 평온을 가져다 주기는 커녕, 산만함과 내재적 분열과 고뇌를 안겨다 준다. 욕망을 찾아 방황한 경험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평정을 갖는다는 것은 타락한 선이나 유희에서 멀어져서 자기 자신에로 회귀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개종에서 얻은 이 근본적 변화만이 진실한 대상, 즉 절대자, 다시 말하면, 신을 발견하면서, 욕망에 물든 영혼을 평온하게 하는 만족으로 이끌 수 있었다.
. 시간성과 영원성
그러나 어떻게 절대자가 유한하고 시간적인 삶에서 단절을 행할 수 있을까? 신적 초월의 문제는 시간적 세계 가운데서 영원성(자)이 마주하거나 거리를 두는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되돌아 갈 수 없는 연속적 변화에 맡겨진 피조물은 절대자를 진실로 맞이할 수 있을까? 시간을 타락 또는 저하(하강)로 생각하는 플라톤(Platon)과는 반대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성을 유한한 모든 존재에게 창조와 속죄의 장소로 생각한다. 신은 우리를 무로부터 끌어 낼 수 있고, 또한 유한성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다. 지식(인식)과 신앙에 의하여, 인간은 스스로 “한계를” 넘어 설 수 있으며, 절대존재의 충만에 접근 할 수 있다.
. 신앙, 권위, 이성
지성적 존재만이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이성만으로는 진리 인식으로 이끌 수 없다. 그래서 "신앙은 신의 탐구에 앞선다" 초월적 지혜에서 나온 메시지를 신봉하는 것은 권위(성서, 교회)에 도움을 가정하는 것이고, 신적 증거가 행해지는 것을 이해하도록 해주는 합리적 수단의 작동을 가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권위에 복종하는 것은 지성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권위가 이성의 임시적인 굴복에 동의한다 할지라도 신앙은 영혼을 밝혀주는 인식을 불러오고, 이성에게 신의 말씀에 접근 통로를 열어 준다. 그래서 "신앙은 ‘신을’ 추구하고, 지성은 ‘신’을 발견한다"고 말한다.
. 지상의 국가와 천상의 국가 “신국(La cité de Dieu)”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두 개의 국가가 세계에 공존하고 있다고 말하며, 이 두 개 국가는 매우 다른 목적에 부합한다고 한다. '지상의 국가'는 의지의 퇴폐(타락)에서 나오며, 이 지상국가는 "신을 경멸하는 자기 사랑(자기애)"를 원리로 삼고 있다. 반대로 '천상의 국가는 "자신을 경멸하는 신의 사랑"에 근거하며, 신을 사랑하고 신의 법에 따라 사는 모든 민족을 재결합시킨다.
■ 칸트의 시간
자료: 쉽게 읽는 칸트 (랄프 루드비히 저)
자료 중 일부 발췌
□ 선천적(a priori) 인식
우리는 모든 인식이 경험과 함게 시작된다는 것은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인식이 경험과 함께 시작된다고 하더라도 그 전부가 바로 경험으로부터 발생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경험 인식이라는 것도 우리가 인상을 통해 받아들인 것과 (감성의 인상에 의해 단지 야기 된)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 우리의 고유한 인식 능력이 결합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식 능력의 부가물을 인식의 원소재와 구별하는 일은 오랜 훈련에 의해 이 부가물에 주의하게 되고 그것을 분리하는데 숙달되어야 가능하다.
그러므로 경험으로부터 독립되어 있고 또한 감각의 모든 인상으로부터 독립된 그러한 인식이 존재하느냐 하는 문제는 더 깊은 연구를 요하며, 한번 보고 당장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인식을 선천적 인식이라 부르고, 이를 경험적 인식과 구별한다. 경험적 인식이란 그 원천이 후천적(a posteriori), 즉 경험 속에 있는 것을 말한다.
모든 경험으로부터 독립된 인식을 위해 칸트는 선천적(a priori) 이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이 단어는 칸트에게 있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는 a priori 를 잘못 사용하고 있는 일상 언어에 대해 즉각적으로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다. 지반을 파해치면 집이 무너진다는 것을 선천적으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선천적이라는 단어가 '순수한' 의미에서 사용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이러한 지식은 경험 없이는 얻어 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이것은 순수일 수 없다.
모든 경험을 도외시 할 때 바로 그럴 때에만 어떤 것이 선천적일 수 있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에 그는 a posteriori = 후천적 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다시 말해, 인식은 가능한 경험 이후에 얻어지는 것이다.
□ 선험적의 의미
칸트는 학문으로서 형이상학이 다루는 문제는 이 세계에서의 우리의 가능한 인식의 무수한 대상들이 아니라 단지 형이상학 그 자체와 이성학으로서 형이상학이 가지고 있는 과제이다. 칸트는 이성이 사용하고 있는 새로운 체계에 하나의 이름을 부여하고 있는데 이 체계를 선험 철학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칸트철학의 핵심적인 용어인 선험적이란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형이상학은 무한한 다양성을 지닌 이성의 대상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성 자신만을 다루는 것이요, 전적으로 이성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과제만을 다루기 때문이다. 이 과제는 이성과는 구별되는 사물의 본성을 통해 제출되는 것이 아니라 이성 고유의 본성을 통해 제출되는 것이다. 만일 이성이 경험 속에서 만나는 대상들에 관해 자기 자신의 능력을 미리 완전하게 안다면, 경험의 모든 한계를 넘어서는 이성을 사용해 볼 수 있는 범위와 한계를 완전하고도 정확하게 정하는 것이 수월할 것이다.
선험적과 비슷하게 들리는 초월적 이라는 용어를 보자.
초월적 이라는 말은 뛰어넘다. 경계를 벗어나다 라는 뜻이다. 벗어나게 되는 경계는 우리의 오감으로 지각할 수 있는 경계와 같은 인간의 현실성을 말한다. 신 또는 무한성 같은 개념들은 초월적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우리의 감각적 경험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칸트의 개념인 선험적 이라는 말 역시 경계를 벗어난다.
그러나 앞을 향하여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즉 모든 경험을 띄어넘어 저편으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뒤쪽을 향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 무엇이 모든 인식의 근거가 되는가?' '모든 인식 가능성의 조건은 무엇인가"를 의미한다.
생물학적, 심리학적 또는 신학적 인식조건이 아닌 인간의 오성에서의 인식 가능성의 선천적 조건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경험 이전에 놓여 있는경험의 조건에서 중요한문제는 인식의 대상들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가능한 인식 방식이다.
대상들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선천적으로 가능한 범위 내에서 대상들 일반에 대한 우리의 인식 방식을 다루는 모든 인식을 나는 선험적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들의 체계는 선험철학이라고 불릴 것이다.
□ 오성과 감성
그렇다면 선험적 이라는말의 뜻, 즉 대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 방식은 무엇을 말하는가?
어떤 것을 인식하기 위해 나는 우선 나의 오감, 즉 시각, 촉각, 미각, 청각 그리고 후각을 통한 지각을 필요로 한다. 칸트는 이 오감을 대신하여 하나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그 개념의 의미를 오늘날 짧게 표현하면 '감성' 이다. 그러나 어떤 것을 인식할 때 나는 감성 외에 다른 것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모든 인식은 또한 오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 오성(사물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판단하는 능력)은 나의 직관의 질료에서 개념을 형성한 것.
칸트는 인간의 이중적 인식능력에 관하여 언급한다.
모든 인식은 두 개의 근본 축은 오성과 감성이다. 오성은 감성에 의존하고 있고 그 반대로 오성없는 감성을 결코 올바른 인식을 성취하지 못한다.
아마도 인간의 인식에는 단지 이 두 개의 줄기만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줄기들은 공통적인, 그러나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하나의 뿌리에서 발생했다.
. 칸트의 중요한 문장
.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다. (오성은 감성에 의존한다.)
.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감성은 오성에 의존한다.)
□ 선험적 감성론
. 감성은 대상들에 의해 '촉발될' 수 있는 능력이다.
. 내가 보고 있는 책상은 나의 시각에 작용하고,
. 내가 앉아 있는 의자는 나의 촉각에 작용한다.
. 대상들의 이러한 작용은 우리에게 직관 들을 제공한다.
. 나는 나무로 만들어진 대상들을 보고 있다.
. 이것이 오성과 함께 사고 되면 오성에서 개념이 생겨난다.
. 대상들이 우리의 감성에 미치는 결과는 감각 혹은 경험적 직관 이라 부른다.
. 이 직관의 대상을 칸트는 이제 현상이라 부른다.
감성의 모든 선천적 원리에 관한 학문을 나는 선험적 감성론 이라 부른다. 이것은 순수 사고의 윈리를 포함하고 있는 선험적 논리학에 맞서는 학문이다. 선험적 감성론에서는 우선 감성을 고립시켜야 하는데 이 일은 오성이 이 개념을 통해 사고하는 일체를 분리하는 데서 이루어진다. 이런 조치를 취하는 것은 경험적 직관 이외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기 위해서이다. 두 번째로 우리는 이 경험적 직관으로부터 감각에 속하는 모든 것을 분리시킨다. 이것은 감성이 선천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인 순수 직관과 현상의 단순한 형식 이외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연구해 나감으로써 선천적 인식의 원리로서 감성적 직관의 두 가지 순수 형식인 시간과 공간이 있게 됨을 발견할 것이다.
□ 시간과 공간
자 이제 우리는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지각의 감성은 고립된다. 그뿐 아니라 경험적 직관들만 남을 때까지 오성이 개념에서 산출했던 모든 것은 분리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제 감각에 속하는 모든 것도 분리되어야 한다. 그 결과 우리 인식의 원리로서 '감성적 직관의 두 형식'을 우리는 발견한다. 그것은 외감이라고 부르는 공간과 내감이라고 부르는 시간이다.
우리는 외감을 매개로 대상을 우리의 외부에 있는 것으로 표상하며, 이런 대상들 전부를 공간 안에서 표상한다. 대상은 공간 안에서 그 형태, 크기, 상호관계가 규정되고 또 규정될 수 있다. 심성은 내감에 의해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내적 상태를 직관하게 되는데 물론 이 내감은 하나의 객체로서의 영혼 자체에 관한 직관을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영혼의 내적 상태에 대한 직관만이 가능해질 수 있는 특정한 형식이 있으므로 내적 규정에 속하는 모든 것은 시간과의 관련들 속에서 표상된다.
시간은 외적으로 직관될 수 없다.
이것은 공간이 우리안에 있는 어떤 것으로 직관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면,
. 공간과 시간은 무엇인가?
. 그것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인가?
. 그것은 단지 사물의 규정이나 사물들의 관계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 그렇다면 그것은 사물 그 자체가 직관되지 않는 경우에도 사물 그 자체에 속하는 규정이거나
혹은 관계인 것인가?
. 그렇지 않으면 공간과 시간이라는 술어는 심성의 주관적 성질 없이는 어떠한 사물에도 첨가될 수
없는 것으로 오직 직관형식에만 고착되어 우리의 심성의 주관적 성질에만 부착되어 있다는 것인가?
이런 문제들을 구명하기 위해 우리는 우선 공간 개념을 고찰하고자 한다. 나는 하나의 개념에 속하는(비록 상세하지는 않더라도) 판명한 표상을 구명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이 구명이 선천적으로 주어진 개념을 의미하는 것을 포함할 때에는 형이상학적이다.
시간과 공간이 왜 감성적 직관의 순수형식인지는 이제 네 가지의 근거에서 증명된다.
첫째, 시간(공간)은 외적 경험에서 끌어낸 경험적 개념이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감각들이 나의 외부에 있는 어떤 것에 관계하기 위해서는 즉 내가 감각들을 서로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병존해 있는 것으로 표상하기 위해서는 따라서 감각들이 서로 상이할 뿐만 아니라 다른 시간(공간)에 있는 것으로 표상하기 위해서는 그 근저에 시간(공간)의 표상이 먼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간(공간)이라는 표상은 외적 현상과의 관계에서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외적 경험자신이 위에서 말한 시간(공간)이라는 표상에 의해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둘째, 시간(공간)은 모든 외적 직관의 근저에 놓여 있는 필연적인 표상으로 선천적이다.
우리는 시간(공간) 안에 대상이 전혀 없다고 생각할 수는 있으나 시간(공간)이 전혀 없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시간(공간)은 현상에 의존하는 규정이 아니라 외적 현상을 가능케 하는 조건으로 보여진다. 즉 시간(공간)은 필연적으로 외적 현상의 근저에 놓여 있는 선천적 표상이다.
우리는 시간(공간)공간 속에 대상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간(공간)이 없다는 것은 결코 생각할 수 없다. 즉 시간(공간)적인 것을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시간(공간)은 필연적이고 또한 선천적인 표상이다.
셋째, 시간(공간)은 추리적 개념이 아니다,
혹은 사람들이 말하듯 사물 일반과의 관계에 대한 개념이 아니다. 시간(공간)은 하나의 순수직관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제일 먼저 하나의 유일한 시간(공간)만을 표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많은 시간(공간)들에 대해 말할 때에도 우리는 그것을 동일하고 유일한 시간(공간)의 일부로 이해한다. 또한 이 부분적 시간(공간)은 일체를 포괄하는 유일한 시간(공간)에 이른바 그 구성 요소로서 선행될 수 있으며, 단지 그 유일한 시간(공간) 안에서만 생각될 수 있을 뿐이다. 시간(공간)은 본래 유일한 것이며, 시간(공간)안에 있는 다양함은 즉 시간(공간)들 일반에 대한 일반적 개념은 오직 이 유일한 시간(공간)의 제한에 기인한 것이다. 여기에서 귀결되는 것은 (경험적이 아닌) 선천적 직관이 시간(공간)에 관한 모든 개념의 근저에 놓여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모든 기하학적 원칙은 예를 들어 '삼각형의 두 변의 합은 나머지 한 변보다 크다' 라는 원칙은 결포 직선과 삼각형의 일반적 개념으로부터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 오직 직관으로부터 동시에 필연적 확실성을 가지고 선천적으로 도출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비록 수많은 시간(공간)들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이것들은 한 시간(공간)의 구성요소들이 아니다. 물론 어제(거실)라는 시간(공간)은 그저께(숲속)라는 시간(공간)과 분리될 수 있으나 특유의 시간(공간)적인 것은 시간(공간)과 분리될 수 없다. 시간(공간)의 표상은 다른 모든 시간(공간) 개념의 기초가 된다.
넷째, 시간(공간)은 주어진 무한한 크기로서 표상된다.
그런데 개념이라 서로 무한하게 다른 표상 군속에 (이런 여러표상들 간의 공통된 징표로서)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개념은 그런 표상 근들을 자기 속에 포괄하는 표상이라 생각 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어떠한 개념도 그 자신의 무한히 많은 표상 군을 자기 속에 포괄하는 것처럼 생각될 수는 없다. 그러나 개념과는 달리 시간(공간)은 무한히 많은 표상 군을 자기 속에 포괄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시간과 공간의 여러부분은 동시에 무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간(공간)공간이라는 근원적인 표상은 선천적 직관이며 개념이 아니다.
시간(공간)은 하나의 무한한 크기이다. 하지만 어제(거실)이 하나의 개념이라는 예와 같은 그러한 개념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시간(공간)을 없는 것으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시간(공간)은 선천적 직관이다.
첫째, 둘째의 증명에서 칸트는 경험론을 비판한다.
즉 공간과 시간은 선천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셋째, 넷째의 증명에서 칸트는 합리론을 비판한다.
즉 공간과 시간은 사고의 개념이 아니라 직관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 시간과 공간의 차이
그렇다면 공간과 시간 사이에 등급이 있는가?
칸트는 '그렇다' 라고 말한다. 공간상의 외감은 시간성의 내감에 종속된다. 왜냐하면 시간적인 것은 공간적으로 무조건 직관되지 않지만, 공간적인 모든 것은 시간적으로 직관되기 때문이다. 시간의 우위는 사고 속에까지 파고든다. '시간의 표상은 지각의 기초가 된다' 는 칸트의 명제는 이미 하나의 시간적 범주이다.
시간은 모든 현상 일반의 선천적인 형식의 조건이다.
공간은 모든 외적 직관의 순수형식이므로 선천적 조건은 외적 현성에만 제한된다. 이와 반대로 모든 표상은 그것이 외적 사믈을 대상으로 가지든 가지지 않든 간에 그 자신이 심성의 규정으로서 내적 상태에 속하고 이 내적 상태는 내적 직관의 형식적 조건에 속한다. 따라서 내적 상태는 시간에 속하므로 시간은 모든 현상 일반의 선험적 조건이요. 또 이로 말미암아 내적 형상의 직접적인 조건이 되므로 간접적으로는 외적 현상의 조건이기도 하다.
모든 외적 현상은 공간 속에 있고 또 공간의 관계에 따라 선천적으로 규정된다고 내가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내감의 원리로부터 아주 보편적으로 모든 현상 일반 즉 감관의 모든 대상이 시간 속에 있고 필연적으로 시간 관계 속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내적으로 직관하는 우리의 방식과 이 내적 직관을 매개로 하는 표상력의 모든 외적 직관을 파악하여는 우리의 방식을 도외시하고, 즉 대상을 있는 그대로 다룬다면 시간은 없는 것이다. 시간은 다만 현상에 대해서만 객관적 타당성을 가질 뿐이다. (.....) 그러므로 시간은 단지 우리의 (인간적) 직관의 주관적 조건이며 (우리의 직관은 대상에 의해 촉발되는 한 언제사 감성적이다.) 시간은 주관을 떠나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장은 언제나 우리의 감관에 주어질 수 있는 모든 대상에 관해 시간의 경험적 실재성, 즉 객관적 타당성을 가르친다. 그리고 우리의 직관은 언제나 감성적이기 때문에 시간의 조건 아래 속하지 않는 대상은 경험 안에서는 결코 우리에게 주어질 수 없다. 이와는 달리 우리는 시간의 절대적 실재성에 대한 요구를 거부한다. 즉 시간은 절대적 조건이나 속성으로서 사물에 속하는 것을 거부한다.
□ 선험적 감성론
이제 끝으로 칸트 스스로가 마무리한 몇 문장으로 선험적 감성론을 요약하고자 한다.
우리의 모든 직관은 현상의 표상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즉, 우리가 직관하는 사물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직관되는 것은 아니요. 사물에 관계 그 자체도 우리에세 현상되는 것과 같은 성질의 것이 아니다. 또 우리가 우리의 주관이나 감관 일반의 주관적 성질만을 제시한다면 공간과 시간에 내재되어 있는 객관들의 모든 성질과의 관계뿐 아니라 공간의 시간 그 자체까지도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현상으로 우리 안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대상이 우리 감성의 모든 수용성에서 분리되었을 때 그 자체가 어떠한 성질인가 하는 것은 우리에게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는 대상을 지각하는 인간 특유의 방식 밖에 모른다. 이 방식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모든 존재자들이 반드시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 방식만을 다루고 있다.
□ 초월적 감성학 (공간, 시간)
“순수이성비판 (초월적 감성학) - 임마누엘 칸트” 중에서
감성적 직관의 두 개의 순수 형식 - 공간과 시간
□ 공간에 대하여
이 개념에 대한 형이상학적 해설
. 공간은 외적 경험에서 추출된 경험적 개념이 아니다.
개념이라면 공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대상의 존재를 가정해야 한다.
. 공간은 모든 외적 직관의 밑바탕에 있는 필연적인 선험적 표상이다.
현상에 의존해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현상을 가능케 하는 조건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표상할 수가 없다.
. 공간은 사물 일반의 관계에 대한 추론적인, 또는 이른바 보편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순수 직관이다.
사물들이 공간이라는 표상 아래에 포섭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이 공간 안에 있는 것이다.
. 공간은 ‘주어진’ 무한의 양으로 표상된다.
무한한 것(표상)을 자기 안에 포함하는 표상으로서
공간은 개념적인 크기일 수가 없다.
. 공간 개념에 대한 초월적 해설
‘공간 표상’에서부터 ‘선험적이고 종합적인 인식들(예, 기하학)’이 생겨날 수 있다.
(예) 공간은 3차원을 가진다.
이상의 개념들로부터 나오는 결론
. 공간은 사물 자체가 갖고 있는 ‘성질’이거나
혹은 사물 자체를 ‘규정하는 것’일 수가 없다.
. 공간은 외감에 주어지는 모든 현상들의 형식이다.
따라서 감성의 주관적인 조건아래서만 ‘외적직관’은 가능하게 된다.
공간이라는 이 술어는 오직 사물이 우리에게 현상되는 한에 있어서만,
즉 감성의 대상이 되는 한에 있어서만 사물에 적용된다.
즉, 현상하는 사물을 포함하는 것이지 사물 자체를 포함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 시간에 대하여
시간 개념에 대한 형이상학적 해설
. 시간은 어떤 경험으로부터 추상된 도출적 개념이 아니다.
시간 표상이 선험적으로 밑바탕에 없다면 동시성이나 연속성 등은 지각되지 않는다.
. 시간은 모든 직관의 기초에 놓여 있는 필연적 표상이다.
전적으로 시간에서만 현상의 현실성이 가능하다.
. 시간 자체는 제거될 수 없다 - 선험적 필연성
시간은 1차원만 갖는다.
. 시간은 감성적 직관을 위한 순수 형식의 하나이다.
. 시간의 무한성이란, 시간의 모든 일정한 길이는 그 기초가 되는
단 하나의 시간을 제한하는(조건을 제시하는) 것만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 시간 개념에 대한 초월적 해설
시간 표상이 선험적 (내적) 직관이 아니라면 그 어떤 개념도 변화의 실현성,
즉 모순 대립적인 관계를 이루는 술어를 동일한 대상에 결합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동일 사물이 동일 장소에 동시 존재) 이해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이상의 개념들로부터 나오는 결론
. 시간은 그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 시간은 내적 감각기관의 형식 즉, 우리 직관과 내적 상태를 감각하는 형식이다.
. 시간은 모든 현상 일반의 선험적인 형식적 조건이다.
공간 - 외적 순수직관
모든 외적 현상은 공간 속에 있으며, 공간 관계에 따라서 선험적으로 규정된다.
시간 - 내적 순수직관
모든 현상 일반, 즉 감각기관의 모든 대상들은 시간 속에 있으며 필연적으로
시간 관계 속에 존립한다.
모든 사물은 시간 속에 있다.(x)
모든 사물은 현상(감성적 직관의 대상)으로서 시간 속에 있다.
시간은 공간처럼 가능한 병존 관계가 아니라 가능한 선후 관계와 관련하여 공간처럼
하나의 무한히 주어진 양이다.
■ 시간과 역사
“헤겔의 근대적 시간의식과 철학의 역사성” 중에서
인용: 논문(연.효숙) 중에서 일부발췌
? 시간과 역사
……
역사가 인간과 얽히고 인간이 시간적 존재이자 역사적 존재라는 것에 대한 철학적 반성은 근대에 들어서서 보다 두드러지게 나온다. 역사철학은 인간적인 사건에 대한 눈이다. …… 탈근대적 철학은 인간적인 사건으로서의 역사철학에 혐오를 보내고, 또다른 계보와 기원에 입각한 철학을 찾고 있다. . 인간적인 사건으로서의 역사철학이 인간을 역사적인 사건 속에 가두어 버렸고, . 역사적인 사건 속의 주인공이 된 인간이 자기 눈을 자폐적으로 가두어 버렸다는 이유에서이다.
근대 계몽주의의 무시간적인 역사적 사유에 시간을 도입한 것은 ‘칸트’ 그리고 ‘헤겔’이다.
. 칸트는 시간을 내감의 형식으로 도입한다.
. 이러한 시간은 구체적인 살아 있는 시간이 아니다.
그에 반해 헤겔은 구체적 시간을 도입하려는 강력한 욕구와 동기를 갖는다.
. 헤겔은 근대의 위기 속에서 인간적인 사건으로서의 ‘세계사’를 구축하여
. 모순과 분열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고 영원성과의 화해를 시도하려고 했다.
. 헤겔은 그리스적인 ‘자연적 시간’과 기독교적인 ‘종말론적 시간’ 간의 화해를 통해
‘나선형적 역사적 시간’을 만들었다.
. 나선형적 역사적 시간은 자연적 시간 속에서 유한성으로 머물고 마는 인간의 비극에 직면하여,
. 정신으로서의 인간이 자신의 사건을 기록하고 진행시키면서, 시간을 지배하여
. 자연의 위력으로서의 시간을 확보하고
. 시간으로서의 위력인 ‘개념’으로 자신의 형이상학을 구축할 때 드러난다.
. 개념으로서의 역사 속의 인간은 하나의 보편사를 형성하면서 역사가 이성적 사건임을 입증한다.
그렇다면 시간과 역사는 서양 근대에서 서로 어떻게 얽히기 시작했는가?
. 그리스의 자연적 시간에서 역사적 시간으로의 이행이 근대에 비로소 가능했던 철학사적 배경은 무엇인가?
. 역사적 시간을 바탕으로 하여 서양 근대에서 ‘보편적 역사’는 어떻게 가능했는가?
. 그에 따라 근대적 시간 의식 속에서 ‘철학’의 정체성은 어떻게 보여졌는가?
달리 말하면 자기의식의 성찰적 시간성은 근대의 역사성과 어떤 필연적인 연관을 갖는가?
. 근대적 시간은 근대적 자아, 근대적 자기의식와 어떤 연관을 맺고 있으며, 또 이러한 철학적 작업의 기초에
서 ‘시간성’과 ‘자기의식’은 ‘역사성’, ‘역사철학’의 문제와 어떠한 연관을 갖는가?
이러한 문제제기가 헤겔에 이르러 성숙됨으로써 서구 근대에서 역사의 시대가 등장하고 역사철학의 문제가 자기의식과 연관하여 주된 문제가 되었다. 헤겔의 역사 철학의 작업은 이러한 자기의식과 시간과 역사성과의 연관 속에서 이뤄졌다. ……
? 자연의 시간, 역사의 시간
. 서양 초기 그리스 신화 시대의 그리스인들
시간은 등장했으나, 시간의식, 역사 의식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우주의 영원한 순환을 믿는 그들에게서 시간은 변화의 징표이고 우주의 영원성을 훼손하는 파괴적인 원리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들에게 시간은 우주의 질서를 측정해 주는 자연적이고 순환적인 시간으로 다갈 올 뿐이었다. 이러한 증거는 신화 시대 때부터 발견된다.
그리스의 창조 신화에 따르면, “최초에는 크로노스, 즉 시간이 지배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아무런 인륜적 작품도 없는 황금시대가 있었다. 거기서는 산출된 것, 이 시간의 아이들은 시간 자신에 의해서 먹혀 버렸다. 제우스의 머리에서 미네르바가 탄생하고 아폴로와 뮤즈도 그 일가에 속하게 되었다. 제우스가 비로소 시간을 억압하여 시간을 흐르게 하였다. 제우스는 인륜적인 작품, 즉 국가를 산출한 정치의 신이다.”
이 신화에서 크로노스가 지배한 시간은 자연적 원리에 불과하고, 역사를 아직 담고 있지 못하다. 크로노스의 시간은 사실상 황금 시대에 존재하는 것으로 자기가 산출한 것을 무조건 잡아 먹음으로써 스스로 파멸과 자기 파괴에 빠지는 형식이다. 제우스가 이러한 자기 파멸의 신을 처단하고, 국가를 세웠다는 것은 이 때부터 무상한 시간이 감성계에서의 부정성의 형식으로 작동하고, 국가 속에서 역사가 시작됨을 비유적으로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국가의 건립을 통한 역사 시대의 개시가 곧 역사에 대한 반성과 역사철학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여전히 이 때 시간은 우주와 자연의 변화를 측정하는 계기일 뿐이다.
(주) 크로노스는 그리스 종교의 신, 신화에서 그는 우라노스(하늘)와 가이아(땅)의 아들인데 어머니 가이아의 지시로 하르페를 가지고 아버지를 거세시킨다. 이렇게 해서 하늘과 땅이 갈라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 크로노스는 누이 레아를 배우자로 삼아 포세이돈 등 다섯 자매를 낳았는데 이들을 모두 잡아먹었다. 그러나 제우스가 태어나자 레아는 제우스를 크레타에 숨겨 안전하게 성장해서 아버지로부터 형제 자매들을 구하고 싸워 이긴다. 싸움에서 진 크로노스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고도 하고 황금시대의 왕이 되었다고도 한다.
. 그리스 시대 전체
기독교 이후, 혹은 근대 이후에 비로소 분명하게 출현하는 역사적 시간에 비해 볼 때, 자연적 시간의 공간인데, 신화에서도 비유적으로 이러한 구분에 대한 의미를 유추해 볼 수 있다.
플라톤에 이르면 이러한 신화 시대의 시간관이 형이상학적인 토대에서 더 확고하게 자리잡는다.
. 시간의 기원은 우주의 탄생에서 비롯된다.
. 우주의 기하학적 모형은 영원한 것이며,
. 또 절대적 안정의 완벽한 상태로서, 파르메니데스의 실체의 세계와 유사한 것이다.
. 우주(세상)는 영원한 이상적 모델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졌으나, 우주는 변화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러한 변화를 일으키는 매개는 ‘시간’이다.
“시간은 천구와 더불어 생겨났는데, 이는 만약 언젠가 이것들의 해체 사태가 일어난다면, 이것들은 생겨나기를 함께 하였으므로 해체되는 것도 함께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한 본성을 지닌 그 본에 따라 생겨났는데, 이는 그것이 그 본을 가능한 한 최대한 닮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야 물론 본이 영원토록 있는 것인 반면에, 천구는 그것대로 일체 시간에 걸쳐 언제나 ‘있어 왔고, 있으며,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원의 움직이는 이미지’인 시간은 우주와 그 영원한 모델 사이의 간격을 메워주는 변화의 양상이다. 이 움직이는 이미지는 천체의 움직임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플라톤은 ‘시간’과 ‘우주’를 긴밀히 연결시켜서, 천체의 움직임에 의해 시간이 실제로 생산된다고 보았다.
플라톤의 시간 이론이 남긴 영원한 유산은 ‘시간’과 ‘우주’가 서로 불가분이라는 사상이다. 즉 시간은 그 스스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주의 한 특징이다.
. 그리스 초기 시인들 및 중기 이후 철학자들의 생각
. 우선 신화적 시대에서 시간은 크로노스와 제우스와의 싸움과 연관해 볼 때,
. 황금시대,무시간적 시대에서 시간이 출현함으로써, 시간은 파괴적, 부정적인 원리로 생각된 듯 하다.
. 크로노스가 시간을 의미한다는 것은 자기의 원리인 파괴의 원리로 다른 존재자들을 억압하고,
시간 속에 즉 파괴 속에, 변화 속에 가두어 둔다는 것을 뜻한다.
. 이는 자연적 시간의 한 원형적 형태라 할 수 있다.
다음에 대체로 우주의 영원성을 믿었던 철학자들(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은
. 시간은 다소 불만스러운 요소였던 것 같다.
. 공간이 영원성을 상징한다고 보았던 것에 비해
. 변화, 생성, 파괴, 소멸 등은 시간을 통해 이뤄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스 시대에서 시간은 변화의 한 근원인 것은 분명한 듯이 보이지만, 이 시간이 인간의 사건, 역사와 맺는 관련에는 그리스인들이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더군다나 시간이 인간의 영혼, 의식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는 불투명하다.
그러나 로마 말기, 중세 초기에 등장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관은
. 그리스 시대의 시간관과 뿌리에서부터 다른 기원을 갖는다.
. 그에게서 독특하게 나타나는 것은 시간을 재는 ‘영혼’, 즉 인간의 내면성과 주관성의 측면이다.
.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의 세가지 시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은 실상 마음 속에 이른바
세가지 형태 - 과거의 현재, 현재의 현재, 미래의 현재 - 로 존재하는데, 나는 마음 밖에서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 즉 과거의 현재는 기억이며, 현재의 현재는 직감이며, 미래의 현재는 기대다.”
. 그에게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물리적이고 자연적인 시간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 과거에 대한 기억으로, 현재의 지각으로, 그리고 미래에 대한 기대로서 시간이 존재한다.
. 시간에 대한 인식은 무엇보다도 내 안에, 내 영혼에서 일어난다.
. “내가 시간을 재는 것은 곧 나의 영혼 안에서이다.”
.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을 재는 주체인 영혼을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 영혼 안에서 시간을 잰다는 것, 시간을 재는 주체를 상정한다는 것은
분명 근대적 시간관의 맹아(사물이 처음 생겨나는 시기)로 볼 수 있다.
그리스적인 자연적 시간관과 달리 기독교식의 시간관은 시간의 주체를 자신의 내면성에서 상정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근대 이후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인간 주관성에 대한 맹아는 ‘시간’과 ‘주관성’의 연관에서 볼 때, 이미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시간이 주관성과 밀착되어 인간은 시간을 자각하는 존재이며, 시간 속에 일어나는 역사적 사건은 인간적 사건으로 되고, 이 속에서 무한히 반복을 일삼는 무한 퇴행의 그리스적 시간관, 단순한 반복으로서의 순환 운동적 시간관은 주관성의 개입에 따라 다른 의미를 얻게 된다. 자연적, 순환적인 시간은 무한 진행을 표상하며, 그리스적 시간, 우주적 시간은 진정으로 인간의 사건을 다루지 않았다. 반면에 역사적 시간은 정신과 시간의 통일의 단초가 되며, 근대적 시간 의식의 맹아를 이룬다.
. 구체적으로 살펴 보면,
물리적이고 추상적이며 우주적인 자연적 시간에서 떠나 ‘나’를, ‘영혼’을 붙잡아 역사적 시간을 찾아 가면서 우리는 본래의 시간 형식, 인간적인 사건 속에서 일어나는 시간을 간파하게 된다. 어렴풋하게나마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보다 분명하게는 근대 이후 우리에게 자연적 시간인 지금의 형식적 고립화를, 본래적 시간 형식인 ‘개념적 역사’를 통해 극복하는 것이 제시된다.
. 이 맹아는 우선 칸트에게서 보여진다.
. 칸트는 주관성, 내감의 형식으로서의 시간을 도입한다.
. “시간은 내감의 형식, 즉 우리 자신과 우리의 내적 상태를 직관하는 형식이다.”
. 뉴튼적 시간관에 대한 철학적 정초를 하기 위한 칸트의 시간의 작업은
그것이 주관의 내감의 형식이라는 면에서 뉴튼의 자연과학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 왔다.
. 시간이 외감인 공간과 달리 주관성의 통일의 형식을 지녔다고 칸트가 주장함으로써,
. 세계는 시간의 형식으로, 의식의 흐름과 통일 역시 시간의 형식의 통제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사건은 철학사에서 데카르트의 코기토의 정초와는 또다른 획기적인 사건으로, 인간의 세계에 대한 자기 성찰, 인간이 세계와 맺는 관계는 전적으로 내재적인 지평으로 향하게 되었다. 시간에 기초를 둔 칸트의 이러한 주관성의 도입과 더불어 이제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진정으로 자기의 내면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러나 칸트가 ‘시간’을 내면화하여 주관적 형식으로서의 시간을 ‘역사적 시간’으로 설정하려고 하였으나, 자폐적인 특성 때문에 역사적 시간이 제대로 구현되고 전개될 수 없었다. 칸트적 이성의 자기 위기가 도래했던 것이며, 이 위기는 철학의 위기로, 시대적 위기로 이어졌다. 그래서 이 칸트의 길은 헤겔적 길로 즉 주관화된 시간의 길의 ‘세계사의 구현’의 길로, 그래서 명실상부한 ‘역사적 시간’의 길로 나가게 된다. 이 때 시간의 자폐적 주관화를 면할 수 있는 안전 장치가 필요한 것이며, 자폐성을 트이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헤겔은 시간을 ‘개념’과 관계시킴으로써, 시간과 절대성을 연결시키려고 하였다.
그런데 칸트에서 헤겔의 길, 즉 시간이 주관적이자, 세계사적 시간의 흐름으로써 역사적 시간으로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정신적 시간으로 외연의 확장은 “정신현상학”의 주된 기획 속에서 마련된다.
. 이는 자기의식의 이중성의 길, 즉 ‘전망’과 ‘회고’의 이중적 원리에 기인한다.
. 이 이중적인 원리는 “정신현상학”의 서술 구조의 추동력이 된다.
. 헤겔에 이르면 자기의식의 구조 자체가 역사적 시간의 순서에 의해 전개된다.
.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의 형성(회의주의, 스토아주의, 근대 계몽주의, 낭만주의 등등)이 보이는데,
이러한 의식의 형성 자체가 ‘역사성’을 가지며 역사성의 축적, 시대의 흐름을 함의한다.
. 자기의식의 서술구조는 회고와 전망의 두 관점을 견지한다.
. 회고적이고 하향적으로 목적이 미리 선점된, 철학자의 눈으로 설정된 목표인
미래, 과거, 현재 등으로의 한 길이 있고,
. 전망적이고 상향적으로 현재에서 미래로, 혹은 정신의 자기 전개의 발전적 과정의 다른 길이 있다.
? 시간과 주체성, 역사
헤겔의 시간관은 바로 이전의 칸트의 시.공의 원리 즉 내감의 원리를 일차적으로 그대로 계승한다.
칸트에서처럼 시간은 공간과 마찬가지로 감성, 곧 직관의 순수 형식이다. 공간이 추상적인 객관성 즉 외감이라면, 시간은 추상적인 주관성 즉 내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간의 원리는 여전히 유한하고 덧없는 추상적인 것이다. 현실 속에 있는 규정된 것은 유한한 것이고 덧없는 것으로 시간이라는 부정성의 형식을 갖고 있다. 즉 시간은 유한성의 형식 자체이다.
그러나 헤겔이 보기에 이러한 외면적이고 추상적인 시간만을 고립화시켜 보는 것은 시간의 본질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오히려 “시간은 순수 자기의식으로서의 자아의 동일성의 원리이다. 이 시간은 고대 그리스의 자연적 시간에서처럼 만물이 시간 속에서 생성되는 원리이기 보다는, “시간 그 자체가 이 생성, 곧 생기와 소멸, 존재하는 사상 활동, 모든 것을 생산하면서 동시에 그 산아를 절멸해 버리는 크로노스이다”
이 때의 크로노스로서의 시간을 헤겔의 근대적 눈으로 보면 단순히 외적인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주관하는 통일적인 ‘부정성의 원리’이다. 이 원리의 주재자는 주관인 셈이다. 주관은 단순한 자아일 뿐만 아니라, 자아의 역사적 세계의 경험 속에서 자아의 고유한 주관성의 본질로 파악되기 때문에, 달리 말하면 주관이 유적 역사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동일성의 구성원리를 간파하기 때문에, 시간의 차원들 즉 현재, 미래, 그리고 과거는 질적인 의미를 획득한다.
헤겔에 와서 시간은 주관성의 주요 형식이 됨으로써 자연적 시간이 마감되고, 시간은 역사적 시간을 의미하게 되었다. 즉 자연 속에서 시간이 다만 영원한 순환일 뿐이라면, 각 개체 속에서 동시에 유(Gattung)의 의식이기도 한 의식은 시간의 “위력”을 극복하고, 시간 자체의 원리를 실현한다.
헤겔에게서 순수 자기의식으로서의 원리의 한 측면이 시간으로 나타나지만, 또 한편으로 다른 자아의 자기 동일성이 있다. 이 자아는 개념, 즉 정신이다. 개념은 ‘독자적으로 자기 자신과 함께하는 현존하는 자아가 자신이 되는 동일성으로, 시간이 대자적으로 정립된 부정성인 반면, 개념은 즉자 대자적으로 ‘절대적인 부정성’이다. 절대적인 부정성으로서의 개념의 본질은 자유이다.
이 절대적 부정성으로서의 개념이 시간을 지배한다. 즉 시간이 개념의 위력이 아니라, 개념이 시간의 위력이다. 시간은 개념의 힘, 지배력 속에 들어간다. 즉 개념은 시간 가운데 있거나 하나의 시간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을 지배한다. 그래서 자연에 속하는 것만이 시간에 복종하는데, 이는 자연에 속한 것만이 유한하고, 반면에 참된 것, 이념, 정신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겔에게서 영원으로서의 개념과 유한한 것의 형식으로서의 시간이 분리되고, 대립되어 있다고 이해하면 안된다. 양자를 분리하게 되면 영원이라는 개념이 시간 외부에 현존하는 것이 되며, 영원이 마치 시간이 지난 다음에 오는 것이 되어, 영원이 시간의 한 계기에 불과한 미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지배하는 개념은 바로 ‘정신’의 형식이므로 이제 헤겔에게서 시간은 유한성의 한 형식으로만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위력에 의해 존립하게 된다. 말하자면 ‘정신’ 속에 시간이 존재한다. 정신 속에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시간이 더 이상 단순한 변화의 산물이 아니라, 근대적 자아의 자기 존립 방식의 전형적인 방식을 보여 준다는 데에 있다.
정신과 시간의 관계에 대한 하이데거의 헤겔 해석은 근대적 자아의 본질과 그 시간 의식의 한 단면을 잘 드러내 준다.
“정신이 자기 실현과 함께 ‘부정의 부정’이라고 ‘규정된 시간’ 속으로 떨어지는 것은 정신에게 적합하다’ 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정신 자체는 시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즉 정신과 시간의 둘간의 관계는 무엇인가? 정신의 본질은 개념이다. 개념은 자기를 사유하는 사유 자체의 형식이다. 즉 자기를 ‘비아의 파악’으로서 개념화하는 것이다. 개념은 자기를 이해하는 자기가 이해되고 있다는 것. 이 자기는 개념으로서의 ‘자유’이다. 자아는 개념으로서 현존재에 도달한, 순수한 개념 자체이다. 자아는 자기를 자기에 관계시키는 통일이다. 그러나 그 자아는 직접적으로 통일이 아니라, 자아가 모든 규정성과 내용을 사상하고 자기 자신과의 무제한한 동등성이라는 자유 속으로 귀한함으로써 통일인 것이다.”
이렇게 이해된 근대적 자아 속에서 시간과 정신, 유한성과 영원의 이념으로서의 무한성의 이분법적 형식이 극복된다. 영원한 이념으로서의 정신, 개념이 없이는 시간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시간을 자신의 한 존립 방식으로, 즉 내재화한 형식을 취한 정신으로서의 인간은 개념으로서의 영원을 피안에, 자신이 다가갈 수 없는 저 너머의 세계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주체성’ 안에서 자기가 현상하는 방식을 시간을 통해 구체화한다. 그래서 영원성은 시간의 형식을 통해 스스로 자기를 현상화하면서 그 얼굴을 드러내고, 시간은 영원성의 위력에 힘입어 근대적 자아를 자유의 주체로 설정할 수 있게 되었다.
……
‘시간’의 ‘의식’으로의 통일, ‘의식’의 ‘시간’으로의 통일을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정초하고자 한 헤겔에게서 역사적 전망이 ‘거대 역사’로, ‘보편사’로 귀결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인간 중심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한 안전 장치로서의 보편사적 역사적 측면을 갖고서 헤겔은 역사철학을 정립한다. 역사철학이 형이상학을 대체하고 보편사적인 역사철학적 인식이 헤겔식의 관념론적인 근대적 시간 의식의 본 모습을 결정한다.
? 근대적 시간의식과 철학의 역사성
헤겔의 시간관이 근대의 시간관 전체를 다 대변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시간과 주체성, 시간과 정신의 관계를 통해 ‘역사적 시간’을 정립한 헤겔은 근대적 시간 의식의 한 전형을 마련한다고 할 수 있다. 초기 계몽주의적 시간관, 자연과학적 시간관, 칸트적 시간관과는 다른 ‘역사적 시간’으로서의 시간관은 서구 근대성의 한 전형적인 단면이자,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헤겔에게서 보여지는 ‘근대적 시간의식’의 정체는 무엇일까? ‘근대적 시간 의식’의 한 전형은 시간을 ‘주관성’과 더 나아가 ‘정신’의 지배 하에 둠으로써 인간적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인 시간을 점유하여, 보편적인 세계사를 가능하게 하려는 근대적 인간의 욕구를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 시간의 정립으로 인간과 세계 그리고 역사는 근대인들에게 어떻게 드러났는가? 시간이 역사적 시간이 됨으로써, 인간적 사건으로서의 역사가 역사철학으로 정립됨으로써 근대인은 자신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어떤 기획을 감행하려고 했던 것일까?
헤겔에게서 이제 철학은 인간의 피안에 있는 알 수 없는 영원한 고향으로서의 이데아를 붙잡기 위해 눈을 밖으로, 우주로 돌리는, 그래서 전통 형이상학의 보호막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보기 위해 자신으로 내면으로 주관성으로 정신으로 침잠한다.
……
헤겔의 이러한 역사적 시간, 자기의식으로서의 시간은 자기 성찰적 시간이자 자기 안을 들여다 보는 반성적인 의식으로서의 시간이다. 이 시간으로 자기 안을 들여다 볼 때 근대인은 세계와의 상호 소통을 견지하는 부정성으로서의 시간이자 시대의 위기를 감지한 시간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 시간관은 헤겔 이후에 여러 가지 도전에 직면한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헤겔의 관념론적 시간 의식과 대립해 있는 마르크스의 시간관이다.
마르크스는 구체시간, 추상시간 등으로 시간에 대한 유물론적 이해, 정치 경제학적인 이해를 드러냈다. 즉 마르크스는 내면의 시간이 밖으로 드러난 현실적 시간을 본 것이며, 내면의 자기 성찰적 시간이 구체적인 근대 자본주의 사회 현실에서 어떻게 외화되어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지 보려고 하였다.
또 하나는 니체에게서 비롯되는 역사에 대한 과잉 봉사에 대한 비판과 푸코가 염려하는 근대철학이 깊이 빠져 있는 인간학의 잠에서 비롯되는 비판이다. 그래서 헤겔의 절대적 주체는 오직 유한자와 무한자의 상호 관계와 자기 자신에 도달하고자 하는 소모적 운동에 근거를 둔다는 혐의를 받는다.
……
근대는 헤겔의 역사철학에 와서 일종의 진보사관으로서의 나선형적 역사적 시간의 정점을 맞는다. 이 때 나선형적 역사관은 역사가 단순히 직선적인 진행형이 아니라는 점, 동일성의 운동을 견지하지만 회귀의 지점이 바로 출발의 그 자리가 아닌, 자기 폐쇄적인 자기 반성이 아니라, 현실의 흐름과 부단히 소통하는 자기 부정적인 운동 구조를 갖는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
헤겔의 자기의식, 주체성이 관리하고 지배한 시간을 정신의 영역 속에 안착시킴으로써 근대 시대의 모순과 위기, 분열을 부단히 막으려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근대적 시간의식, 시대의 표상은 그래서 그 다음 철학을 준비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화두로 등장할 수 밖에 없게 된다.
■ 현실, 현재, 이 순간, 그리고 역사
글 Tora, 2009.7.
글 중에서 일부발췌
□ 현실
현실이란 가능적 존재에 대한 현재적 존재라고도 해석된다.
삶과 희망 사이에서
시간들과 공간들 사이에서
가능태로서의 나와 답답하고 막막한 현재적 나 사이에서
삐걱이고 어긋나고 헛돌고 비켜 가면서
나는 이곳의 나와
잠시, 혹은 오래, 어쩌면 영원히
헤어져 살아간다.
그러므로
해질 무렵에 시간이 붕괴하듯
내면의 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두려움과 슬픔의 밀의는
바로 이산된 자신을 향한 그리움의 통각이 아닐까.
"언젠가 내가 돌아오면" 중, 전경린
염소를 몰고 집을 나가고, 늑대, 여인이 되어 반란을 일으키고, 스스로 기생이 되어 천민의 삶을 살고, 그리하여 사막 같은 삶의 끝까지 걸어가는 것, 전경린은 이를 사랑, 열정이라 부른다. “언젠가 내가 돌아오면”에서 우리는 이런 사랑을 다시 만난다. 도덕과 규범과 제도를 거스르는 불륜의 사랑, 혹은 허위적이고 예속적인 삶을 끊고 이젠 스스로 서서 자기의 삶을 살겠다는 선언. 사랑과 열정으로 ‘세상 끝까지’ 가려는 이들은 혜규의 카페 입구에 걸린 로댕의 조각상처럼 그 세상 끝에서 입맞춤을 하리라. 그러나 열정을 마모시키는 것이 삶이라고 믿었던 그녀의 인물들은 이제 사랑은 삶 속에서 단련되고 길어진다는 것을 깨달은 듯하다.
마녀가 되어 집을 떠나갔던 그들은 이제 일상으로, 가정으로 돌아와 사랑이 삶이 되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다른 시간으로 가기 위해서는 우선 지금 이곳에서의 삶을 차곡차곡 밟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이들의 행보는 마녀들이 사는 법, 마녀들이 만들어 가는 사랑이라 할 만하다. 일상에 묻힌 마녀성을 발견하고 일탈을 꿈꾸던 전경린의 인물들이 일상으로 돌아와 타인에게서 상처를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그들을 끌어안고 사랑하는 과정은 낯설지만 따뜻하다. 이들 호랑이, 여자 혹은 마녀들은 이제 식물, 여자를 꿈꾼다. 하지만 이들이 마녀라는 주홍글씨를 떼어 내고 그들 안에서 식물성의 향기를 뿜어내기까지는 이들에게도 그리고 작가에게도 아직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모른다. 이들은 아직 사막 위에 서 있다. (서평 중에서)
현실은 과거의 존재를 재현하고자 재 실현 되는 존재라고 볼 적에
실제 현실이 희망과 멀리 떨어진 삶의 한가운데로 들어서서
본래의 공간이 존재할 수 없도록 막힌 시간에 운명을 두었다.
운명은 늘 쫓기며 달려가는 숨가쁜 긴장을 타고 가다가
날렵한 가지 끝에 가까스로 매달린 열매처럼 애간장을 태우면서
땅에 닿겠다고 힘없이 떨어져 안길듯한 순간을 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공중에서 폭발하여 산산이 그릴 때를 의미한다.
삶을 현실의 존재로 보면 희망은 지금 이순간의 존재가 되고
시간을 운명의 존재라 하면 공간은 바로 이순간의 존재가 된다.
□ 지금 이 순간
생명은 순간의 존재로
생명이 존재하는 순간은
두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며
두 손으로 잡을 수 없이 느껴질 뿐이다.
순간을 모으면 하나의 큰 느낌으로 다가 온다.
그 느낌이 하나가 이어져 기억이 되살아 나온다.
기억은 지나온 순간이 있기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며
그로 인해 기억의 존재는 생명이 지나간 그 길을 비추게 된다.
기억은 이 순간에 존재하지 않기에 지금 이 순간엔 없는 것이다.
지금 없는 기억이 지나면 바로 지금 이순간에 존재한 생명이 되고
내가 존재한 생명은 내가 되므로 다시 찾는 순간으로 기다리는 것이며
다시 만나게 되는 그 순간은 나의 미래가 되는 나의 생명으로 존재하여
나의 생명은 지금 이순간에 내게 다시 돌아와 나의 존재를 만드는 것이다.
기억이 없는 생명이란 순간에 존재에 불과할 뿐이다.
그리하여 생명은 쉬지 않고 기억을 만들며 기억을 보존하고자
노력하고 기억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보다 확대하는 힘을 찾아야 한다.
기억은 영상이며 생명이 그려나가는 경험이다.
기억은 수많은 영상으로 경험은 영상 속에 흐르는 리듬이다.
생명이 기억을 더듬을 때 경험 속에 흘러간 리듬이 다시 흐르고
순간은 기억을 잇는 리듬을 타고 흐르며 존재의 생명을 연장한다.
사람들은 경험의 산물이며 경험은 기억의 생명이다.
생명은 기의 결합이며 기는 힘의 새로운 원천으로 흐른다.
하나의 삶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경험은 지극히 한정되었기에
사람들은 서로의 경험을 주고 받으며 생명을 좀 더 유지하게 되고
서로 다른 경험을 통하고 나눌 때 기억의 영역을 보다 확장 할 수 있어
그로 인해 보이지 않는 의식 또한 자라 눈뜨면 지금 이순간에 보다 가깝게
다가가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순간의 안목으로 확장시킨다.
지금 이순간이 보다 확대 되여 가까이 볼 수 있다면
생명의 존재는 지나온 과거와 다가올 미래에도 그만큼 가까워지며
다가간 거리만큼 지금 이순간 살아 숨쉬는 힘도 확신으로 차 오를 것이다.
나의 기억 속에 내가 아닌 다른 기억들이 포함될 때면
나는 그 기억을 따라 아주 먼 그곳의 생명을 실감케 되고
내 안에 새로이 되살아난 생명으로 다시 이순간에 존재가 된다.
나의 생명 속에 되살아난 기억과 함께 걸어가는 지금 나의 순간은
비록 내가 존재하는 나 자신이 아니라 할지라도 나의 순간과 누군가의
순간이 함께 또 다른 내가 될 수 있기에 그로 인한 나의 생명은 커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지금까지 채울 수 없었던 부족한 면을 지금 이 세상에 없는
예전의 누군가가 다시 채우기 위해 내 안으로 살아 나오는 계기가 열리게 되고
그 계기를 통해 새로이 채워지는 또 다른 생명은 그전에 내가 미처 채울 수 없었던
경험의 기억들까지 더하여 둘이 함께 완성하는 새로운 여행길을 떠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이순간은 더 이상 나의 지금 이순간이 아닐지 모르고
지금 숨쉬는 나의 생명도 내게 주어졌던 그 생명이 아닐 것이다.
내 안에 숨쉬는 생명의 소리는 누군가 대신 내쉬는 소리가 될 수 있고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그 마음을 느끼게 된다.
형체가 사라져 비록 얼굴을 볼 수 없다 할지라도 그 얼굴을 볼 필요가 없이
오직 소리가 들려오는 바로 그 마음으로만 내 귀를 공들여 기울일 수 있을 것이다.
이순간에 그가 누군가 궁금하다는 이유 하나로 그를 따라 가고 싶고
내가 그를 대신하여 지금 그의 마음으로 나오는 손과 발을 움직인다면
그가 원하는 그 곳이 어딘가 상관없이 나는 그곳으로 쉬지 않고 걸어 갈 것을
내가 내 자신에게 말을 건네주며 내 말을 따라가는 나의 육신이 내 뜻을 들어
나와 함께 내가 향하는 그 곳으로 따라와 주기를 나는 간곡히 열망하는 것이다.
그러면 언젠가 그가 누구였는지 만날 수 있을 그 때가 반드시 있을 것 같고
그때는 그가 누구였든 상관없이 기쁜 마음으로 그를 맞이할 수 있을 것 같고
나는 누구보다 그를 잘 알게 되기에 그의 곁에서 영원할 수 있다는 사실만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이제 마지막으로 보내는 남은 생을 그 믿음으로 의지한 채
바로 지금 이순간의 존재로써 쉬지 않고 영원히 살아 숨쉬는 생명이 되는 것이다.
함께 웃고
함께 숨쉬며
함께 걸어가는
지금 이 순간
□ 역사와 삶의 시각
역사를 이미 지나간 사실로 두면 수 많은 견해가 따라 나오게 된다.
견해란 들여다 보는 개인의 각도와 식견으로써 분분이 달라지는 것으로
자연적인 환경은 보이지 않는 각도로 각기 다를 수 밖에 없으므로 이로 인한
오차는 지극히 당연히 따라 붙는다 해도 실상 눈치를 챌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 개인의 간단한듯한 삶만을 놓고 보아도 수시로 잊어버리는 부분들로 가득하다.
길지 않은 몇 십 년의 삶 속에 기억에 남을 수 있는 불과 몇 가지로 식견을 갖고 살아가는
삶이란 자체가 어찌 보면 매우 단순한 생각으로 볼 수가 있으므로 가장 근래에 가깝게
읽었거나 알게 된 지식을 더함으로써 한편으로 앞서 간듯한 착각으로 빠지는 것이다.
인간의 탄생과 죽음은 삶에 있어 지극히 간단한 명제로써 가장 쉽게 예를 들 수는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은 무엇보다 치명적인 것이고 또한 언제 닥쳐올지 예견할 수 없음은
실제로 누구에게나 똑같은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죽음이 무관이 여기듯 말하고
먼 미래의 생길 일로써 맨 뒤에 밀어놓은 마지막 보류인양 눈앞의 현실만을 중시하며
가끔씩 그 현실에 죽음의 순간이 누군가에게 일어났을 때만 두려움으로 표현할 뿐이다.
죽음과 동시에 두 눈에 보여졌던 육신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존재로써 사라지는 것이다.
죽음은 생명이 떠나버린 빈 육신을 의미하며 동시에 죽음은 생명이 더 이상 생명으로써
이 땅 위에 부지할 수 없게 되었음을 알려주는 이유와 과정을 찾아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눈에 쉬이 들어오는 육신의 죽음을 통해 육신이 늙으면 기운이 다 빠져나감을 알 수 있고
병이 들었다면 그 병으로 더는 생명을 부지할 수 없게 되는 여러 이유를 알아 보는 것이다.
……
한 줄로 엮어져 흘러가는 역사는 진실로 이어져 쉬지 않고 침묵으로 나갈 뿐이다.
역사는 생명이며 진실로써 죽음을 불사하고 다시금 생명으로 돌아 가는 진실을 품는다.
어느 누가 현실이란 이름 하에 허망한 포장지를 행복으로 착각 토록 대신 보여 준다면
그 현실이야말로 진실에서 멀리 벗어나 정처 없는 어둠을 헤매는 가상의 허상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역사의 진실은 단 한번도 변한적 없이 제자리를 돌고 있기에 습관적으로 나오는
시각적 오류를 의도적으로 이용하는 누군가에 욕기로 인하여 진실한 현실을 꿈꿨던 현대인들마저도 뜻하지 않은 오류를 자신도 모르게 범하는 수순으로 뒤따라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결국 자신을 잃어버린 오류는 개인으로 돌아가고 세대라 불리는 현 시대 아래 벌어진 차이로
순간을 버리고 진실이 아닌 빈 허공 속으로 던져짐으로써 시대의 오류는 난망 되어 질 것이다.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며 더 나아가 미래의 행복을 모두가 동등하게 나눌 수 있도록
역사라는 투명성을 진실한 하나로 지향하는 것이 이상적인 미래를 실현하는 길이라면
행복을 추구하고 추구해야 하는 개인은 자기 앞에 놓여진 삶을 통하지 않을 수 없으며
더불어 역사라는 모두의 진실을 진심으로 함께 지켜보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인이 가진 삶 자체를 진실로 보듬는 생각들로 매 순간들을 채우는 일에 지체할 수
없을 것인데 그러다 보면 각자가 지니고 있는 이중적 시각에서 저절로 벗어나 조화를 이루는
자각이 열릴 수 있으며 한층 개화된 시각으로 올라가 자연으로 부여 받는 기회를 맞을 것이다.
자연의 눈으로 시대의 역사를 다시 볼 수 있다면 가증으로 뒤덮인 현실의 착각을 벗게 되고
마침내 스스로의 삶으로 자신을 해부하고 자신 속에 숨겨졌던 진정한 진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삶은 고스란히 자신의 몫으로 자신의 미래는 자신이 창조한다,
자신은 자신을 가진 창조자로써 미래는 창조자인 자신이 앞으로 나가는 것이다,
자연이 나를 창조해냈듯이 나는 내 삶을 창조하여 삶 속에 다시 자연을 담는다,
그래서 자연이 담기는 창조의 삶이 고스란히 자연으로 빈틈없이 모두 채워졌을 때
삶은 자연으로 자연히 하나가 되어서 오직 자연만이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리라,
□ 현재
현재를 말하는 사람들 중에 과연 몇 명이나 현재에 존재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래를 생각하지만 실제는 과거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이며
대부분이 미래를 설계한다고 믿고 있는 것도 생각에 불과할 뿐 실제 그 생각자체가
과거에서 비롯되어 과거로 돌아가도록 주체 된 환영의 조각들이다.
인간의 육체가 과거에서 태어나 지금에 이른 것이라 보이지만 실제로 보이는 것은 과거에
태어난 존재가 아닌 현존의 실체로써 실체로 보이는 육체에 스며든 기생체가 시간과
더불어 설계된 가상의 환영이 체면으로 장애가 되도록 주입 된 것이다.
주입된 환영의 가상은 끝이 없는 지점에 이르러 스스로 파멸되어 어디선가 소멸한다.
인간의 생각 역시 육체보다 더 오래된 과거에서 비롯된 것으로 믿고 싶겠지만 실제로
생각의 실체는 처음 나왔던 과거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단순히 정지된 돌과 같음에도
무의식 속에서 생각에 의존하여 시간으로 유지되는 기생체가 정지된 돌에 흔적을 따라
움직임으로써 그 움직임이 무의식의 생각으로 간주되어 육체를 조정하기에 이른다.
육체 안에 스며든 투명의 기생체는 빛과 비슷하게 생긴 파장의 에너지를 갖고 있지만
빛과는 정반대의 거리가 먼 에너지의 존재이다.
육체는 빛과 상관 없이도 기생체의 에너지에 의존하여 살아갈 수 있지만 결국엔 죽음으로써
그 동안 얻을 수 있었던 모든 것을 모두 잃어버리고 자연히 소멸하게 된다.
그래서 소멸을 원치 않는 육체는 보이지 않는 빛과 꿈같은 환상으로 보이는 기생체 사이에서
번민하게 되고 더하여 환상을 깨우는 고통을 맞이하기도 한다.
즉 환상 자체는 빛으로부터 벗어나있는 육체가 자성하여 빛을 찾아 돌아 가려 할 때
벗어 던지지 않으면 안 되는 육체의 과거이며 생각의 흔적들이다.
현재는 오직 지금 이 순간뿐이며
이 순간은 에너지가 아닌 에너지 밖으로 벗어나 빛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빛은 순수함이며 늘 현존하고 있는 오늘이며 이순간이 되는 현재이다.
꿈은 기생체의 흔적이며 환영이다.
꿈에서 눈을 뜨면 환영이 저편으로 달아난 것을 볼 수 있다.
□ 이 순간
피 천 득
이 순간 내가
별들을 쳐다본다는 것은
그 얼마나 화려한 사실인가
오래지 않아
내 귀가 흙이 된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제 9교향곡을 듣는다는 것은
그 얼마나 찬란한 사실인가
그들이 나를 잊고
내 기억 속에서 그들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친구들과 웃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즐거운 사실인가
두뇌가 기능을 멈추고
내 손이 썩어가는 때가 오더라도
이 순간 내가
마음 내키는 대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은
허무도 어찌하지 못할 사실이다
□ 과거나 미래의 일은 없다
레프 톨스토이
우리는 과거를 괴로워하고
이로 인해 현재에 불충실함으로써
미래까지 망친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있는 것은 현재뿐이다.
현재의 삶은 매 순간이
그 어떤 것보다 더 소중하다.
나는 나이를 먹을수록
기억이 또렷해진다.
이상하게도 즐거웠던 일들만
기억이 나고
때로는 현재의 일보다
그 기억 때문에
더 즐거워지기도 한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과거나 미래의 일은 없다.
모든 것이 바로 지금
이곳의 일이다.
현재 속에서 평생을 산다면
미래에 대해서도
죽음 이전이나 이후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지 않게 될 것이다.
■ 체중과 생명의 시간 자료 : 조.용현, 일부 부분 발췌
......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칸트, 베르그송 까지 철학자들은 시간이 객관적 실재가 아니고 주관적 현상임을 강조해왔다. 그것은 우리의 의식 경험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시간에 관한 철학자들의 관점도 철학자들에 따라 크게 다르며 객관적 현상에 가까운 쪽에서 주관적 현상에 가까운 쪽에 까지 걸치는 넒은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다. 전자에 칸트가 있다면 후자에 베르그송이 있다. 전자의 경우 시간은 우리의 선천적 직관 형식이기 때문에 객관적 실재는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의 의식 경험 안에서는 보편적이다. 후자의 경우는 단적으로 그것은 "持續" 그것은 우리 경험의 충실도에 따라 달라진다.
아래는 동물생리학자 슈미트-닐센의 생리학적 시간에 관한 논의이다.
(Schmidt-Nielsen,Scaling,Cambridge Univ.,12장)
□ 크기와 시간
. 심장 박동수와 시간
작은 동물은 큰 동물 보다 더 빠른 템포로 일생을 산다. 호흡은 더 빠르고, 심장은 더 빨리 뛰며 다리는 더 빨리 움직인다. 모든 것이 큰 동물에 비해 더 빠르다. 시계상의 시간이 큰 동물이든 작은 동물이든 상관없이 똑같은 생리적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뾰족뒤쥐의 심장 박동수는 분당 1000회인데 대해 코끼리는 30회에 지나지 않는다. 코끼리의 심장이 1000회 뛰는 데는 약 30분이 걸린다. 다른 생리적 기능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뾰족뒤쥐는 코끼리보다 더 빠른 삶을 살고 그래서 시계 상의 시간 단위는 이 두 동물에게서 아주 다른 의미를 갖는다. 생리적 시간은 상대적 개념이며 동물의 크기가 그 동물의 시간을 규정한다.
작은 심장은 더 빠른 속도로 뛰고 박동간의 간격도 더 짧다. 진동수와 시간(주기)은 반비례한다. 거꾸로 말하자면 진동수는 시간의 역수다.
진동수 = 1 / 주기
체중(Mb 단위kg)에 대한 심박수(fh)는 통상 분당 심박수로 표시하는데 슈탈에 의하면 아래와 같다.
fh = 241 * Mb ^ -0.25
그러므로 1회 박동에 요하는 시간 (th, 단위 분)은 다음과 같다.
th, = (1/ 241) * Mb ^ 0.25
Mb가 1kg이면 심장박동주기는 0.249초로 1초의 1/4이다. 초당 4번 뜀으로 분당 240번 뛰게 된다.
생리적 빈도 가운데 많은 자료가 있는 것은 포유동물들의 호흡빈도이다. 슈탈에 따르면 동물들의 호흡빈도는 아래와 같다.
freap = 535 * Mb ^ -0.25
이 식에서 동물들의 호흡시간을 알 수 있다.
tr, = (1/ 53.5) * Mb ^ 0.25 = 0.0187 * Mb ^ 0.25
심장 박동수와 호흡수에서 체중의 지수가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심장 박동수와 호흡수간의 비율을 계산해 보면 아래와 같다.
fh / freap = (241 * Mb ^ -0.25) / (53.5 * Mb ^ -0.25) = 4.5 * Mb ^ 0.01
지수 0.01은 별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장 박동수는 호흡수의 대략 4.5배라고 일반화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비율은 동물의 크기와는 무관하며 모든 포유동물에 대해서 타당하다. 물론 이 경험 식은 평균값이며 동물에 따라서는 이 일반 값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다.
새는 포유동물 보다 더 느리게 호흡하며 심장 박동율도 늦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의 호흡수에 대한 심장박동수의 비는 약 9.0이다. 이것은 호흡당 심장박동수가 새가 포유동물의 2배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 대사율과 시간
동물의 삶의 속도가 얼마나 빠른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측도는 대사율이다. 아래 식이 보여주듯이 대사율은 체중이 증가함에 따라 감소한다.
P* = Mb ^ -0.25
시간은 대사율의 역수이기 때문에 대사 시간 (tmet) 또는 생리적 시간은 체중에 따라 다음과 같이 변한다.
tmet = Mb ^ 0.25
이것은 우리가 심장 박동률에서 본 것과 동일한 관계에 있다. 아주 작은 동물에게는 심장이 1초에도 서너 번 뛰지만 큰 동물에게는 그 보다 더 긴 시간이 걸린다. 똑같은 것이 모든 대사율의 과정에도 적용된다. 생리적 시간은 체중이 증가함에 따라 시계의 시간의 척도에서 증가한다.
그러므로 대사적 시간을 생리적 시간으로 사용하는 것이 이치에 맞으며 실제 시계의 시간은 동물의 크기에 따라 그들의 삶에 그 의미가 아주 다르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 동물들의 삶: 얼마나 길고, 얼마나 빠른가?
작은 동물들의 삶은 아주 빨리 전개되며 그래서 그들은 오래 살지 못한다. 그러나 생리적 시간에서는 그 동물이 크든 작든 무관하게 똑같은 수명을 누린다. 30g의 쥐는 분당 150회 호흡하고 일생(3년)동안 2억 회 호흡한다. 5톤의 코끼리는 대략 분당 6회의 호흡을 하며 40여 년의 생애 동안 쥐와 대략 같은 수의 호흡을 한다. 쥐의 심장은 분당 600번 뛰며 일생 동안 8억 번 뛴다. 코끼리의 심장은 분당 30회 뛰는데 일생 동안 뛰는 심장 박동수는 쥐와 비슷하다. 물론 수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잡아 먹고 잡아 먹히는 가혹한 자연환경하에서 동물들이 평균적으로 살아가는 기간으로 정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포식자가 없는 상황에서 살수 있는 최대값을 잡아야 할 것인가? 우리가 조사할 수 있는 것은 사육장의 동물이다. 이것을 기준으로 조사해 보면 포유동물의 수명은 그 크기에 의존하며 다음 식에 따른다.
t life = 11.8 * Mb ^ 0.20
새장 속의 새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t life = 28.3 Mb ^ 0.19
위의 두 방정식은 인상적인 사실을 보여준다. 우선 수명이 몸의 크기에 따라 증가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포유류와 조류의 식에서 그 지수 값이 사실상 같다. 그러나 같은 크기의 포유류보다 새가 더 오래 산다. 그 계수의 차가 약 2.5이기 때문에 새가 같은 크기의 포유동물 보다 약 2.5배 오래 산다고 말할 수 있다.
□ 하루살이의 하루
생리적 시간으로 보았을 때 모든 포유동물들의 수명은 같다. 그러나 천문학적 의미에서의 수명은 다른데 그것을 결정하는 기준은 그 몸의 크기이다. 동물들의 일생 동안의 심장 박동수와 호흡수 그리고 대사의 횟수는 동일한데 사이즈가 커질수록 그 주기가 길어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수명이 길어진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 논의를 확장시키고 싶은 유혹을 떨칠 수 없다. 생리적 시간은 바로 의식경험의 가장 원초적 형태이다. 그렇다면 동일한 생리적 시간을 산다는 것은 그 의식경험의 양에서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 질은 다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인간의 의식경험이 더 고차적 경험이라는 것은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고차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별도의 논의를 필요로 하는 주제이다. 필자(조.용현 )가 여기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것인 “정신은 어떻게 출현하는가?, 조.용현 지음"을 참조) 다만 두 동물이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천문학적 시간의 관점에서 어린이의 시간은 느리게 가고 노인의 시간은 빨리 간다. 같은 시간 안에 어린이가 겪는 의식의 경험량은 노인의 경험량 보다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리적 의미에서 인간은 10대가 끝났을 때 70수명의 2/7를 살은 것이 아니라 이미 반 이상을 살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생리적 시간으로 본다면 20대 초에 -가속도까지 감안하면- 이미 40대에 접어든 것이다. (이 수치는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필자가 편의상 붙여본 것이다.) 우리의 삶은 서서히 시작해서 점점 가속되는 차에 비유할 수 있다. 20대초에 살날이 앞으로 2/7가 남았고 느긋해할 일이 아니다. 시간상으로 보아 이미 반을 훨씬 지난 것이다. 천재들은 이미 20대에 그 과업을 완수한다.
시간의 의미는 개인의 일생에서도 달라지지만 크기가 다른 두 종의 경우는 그 차이가 더 분명해진다. 10g의 쥐에게 시계상 시간으로 하루가 100톤의 푸른 고래에게는 거의 2달에 해당한다. 그러나 두 종이 사는 생리학적 시간은 같다. 그들은 똑같은 양의 시간을 향유하고 죽는다. 하루살이의 하루도 그 자체로서는 영겁이다.
□ 걸리버에서
걸리버와 릴리푸트인이 생리적 시간에서는 동일한 시간을 누린다고 하더라도 물리적 시간은 서로 다르다. 그것은 크기와 연관되어 있다. 걸리버가 소인국에 1년 동안 머물렀다고 생각해보자. 그 기간이 릴리푸트인들(릴리푸트인들의 키는 걸리버의 12배이기 때문에, 몸 전체의 크기(부피)는 12×12×12, 곧 1728 배)에게 생리적 시간으로는 얼마일까?
t = 11.8 * 1728 ^ 0.20 = 52.4
52년이 흘렀다! 걸리버의 1년은 릴리푸트인들에게는 52년에 해당한다. 걸리버를 맞이했던 릴리푸트의 왕을 비롯한 그 세대는 이미 죽고 없을 것이다. 걸리버가 소인국을 떠날 때 그가 도착했을 때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몇몇 노인들은 걸리버가 해안가에 도착했을 때의 그날을 마치 전설처럼 손자들에게 들려주고 있지 않을까?
■ 상대성 이론과 시간 공간의 철학
물리학과 첨단기술, 글 중에서
20세기의 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은 현대물리학의 두 축을 이룬다.
. 이들은 물질의 기본구조와 상호작용에 대한 이해를 증진하고
. 반도체를 이용한 전자 기기의 개발과
. 원자력의 이용 등을 통하여 그 위력을 발휘하였다.
현대물리학과 고전물리학의 자연계와 자연법칙에 대한 이론의 인식 차이는,
. 고전물리학은 자연법칙이 물리계의 초기상태와 최종상태를 일의적으로 연결해 주지만
. 양자역학은 자연법칙은 물리계가 어느 주어진 초기상태로부터
여러 다른 최종상태로 진화해 가는 확률적인 가능성만을 결정해 준다.
상대성 이론이 고전물리학과 근원적으로 다른 부분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 고전물리학에서의 시간과 공간은
. 서로 독립적이며, 물질의 존재로부터 아무 영향을 받지 않는 존재로서
. 이를 "절대 공간", "절대 시간"이라 부른다.
. 구체적으로, 공간은 유클리드 기하로 기술되는 연속적이고 균질적, 등방적인 무한대 3차원공간이고
. 시간은 모든 관측자에게 똑같이 나타나는 무한히 연속되는 시간이다.
. 이러한 시간과 공간 개념은 가장 간명한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상식적인 감각과도 잘 부합되는 것이다.
. 그러나 이것이 실제 관측을 통해서도 확인될 수 있는 개념인지는 별개의 문제이며,
혹시 근사적으로만 성립되고 엄밀하게는 틀린 개념인지를 고려해 볼 여지가 있는 것이다.
. 상대성 이론에서의 시간과 공간의 인식은
. 특수상대성 이론과 일반상대성 이론 각각에서의 시간과 공간의 개념에 차이가 있다.
□ 뉴턴 역학의 시간과 공간
뉴턴(1643-1727)에 의해서 세워진 근대물리학의 기초의 핵심 운동법칙은,
. 1 법칙(관성의 법칙): 힘이 가해지지 않은 물체는 등속도 운동을 한다.
. 2 법칙(가속도의 법칙): 물체에 힘이 가해지면 물체는 힘의 방향으로 힘의 크기에 비례하는 크기의
가속도를 갖는다.
. 3 법칙(작용 반작용의 법칙): 물체 A가 B에 힘을 가하면 B는 A에 같은 크기의 반대 방향의 힘을 가한다.
제1법칙이 성립되는 계, 즉 힘이 가해지지 않은 물체는 등속도 운동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계를 "관성계"라 부른다. 뉴턴은, 관성의 법칙이라고 부르는 이 제1법칙을 통하여, 공간의 모든 점에 대해서 성립하는 관성계, 즉 전공간(global) 관성계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기초 위에 자신의 역학체계를 세웠다. 뉴턴은 나아가 물질의 존재와 전혀 무관하고 항구적인 성격의 "절대 공간"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 절대 공간에 대해서 정지해 있는 관측계는 관성계로 보았다.
한 관측계에 고정되어 있는 양동이에 담긴 물의 표면의 모양을 보면 이 관측계가 절대 공간에 대해서 회전하고 있는지 또는 일반적으로 가속도 운동을 하는지 아닌지를 판정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마하(1838-1916)는 이 절대 공간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물체의 관성은 이러한 절대 공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주 내의 모든 다른 물체와의 상호작용을 통하여서만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를 "마하의 원리"라고 한다.
뉴턴의 이론이 간명하지만 직접 관측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절대 공간의 존재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비하여 마하의 원리는 절대 공간 대신에 직접 관측이 가능한 물체의 존재를 관성의 원천으로 삼았다는 면에서 경험주의 철학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의 개발 과정에서 이 마하의 원리를 심각하게 고려하였다.
□ 뉴턴 역학에서 관성계는 유일하게 존재하는가?
절대공간에 대해서 정지해 있거나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모든 좌표계가 관성계인 것이다. 이렇게 수 없이 많은 관성계가 존재하면 그 중에 어느 것이 절대공간에 대해서 정지해 있는 계인가? ……
뉴턴의 운동법칙에 관한 한 어느 한 관성계를 물리적으로 특징 지워 구분해 낼 방법이 없다.
모든 관성계는 동일한 자격을 가지며 어느 계가 정지해 있고 어느 계가 움직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물리적인 기준이 없다. 달리는 기차에 타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땅 위에 서 있는 사람은 그가 움직이고 있다고 말하고 기차에 같이 타고 있는 사람은 그가 정지해 있다고 말한다. 이 때 누구 말이 절대적으로 옳고 그른가를 가릴 수 있는 물리적인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속도의 개념에는 절대적인 의미는 없고 상대적인 의미만 남는다. 갈릴레이 좌표변환에 대해서 꼴이 변하지 않음을 갈릴레이 상대성 원리라고 부르며 뉴턴 역학에는 갈릴레이 상대성 원리가 적용되고 있다.
□ 특수상대성 이론의 시간과 공간
19세기 후반에 전자기 법칙에 대한 이론이 맥스웰(1831~1879)에 의해서 완성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절대정지계를 물리적으로 지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 대두된 것이다.
맥스웰 방정식에 의하면 진공 중에서 전파되는 전자기파는, 그 파가 발생할 때의 파원의 운동상태에 관계없이 또 파의 진행방향에 관계없이, c=3×10^8 m/s로 주어지는 속력으로 진행한다. 이 사실은, 갈릴레이 좌표변환식을 적용할 경우, 모든 관성계에서 다 성립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즉, 전자기 법칙까지 포함하는 물리 이론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상대성 원리가 깨어지는 것이다.
미켈슨과 몰리가 1887년에 행한 실험은 지구의 운동 방향과 그에 수직한 방향 사이의 빛(전자기파의 일종)의 전파속도의 차이를 확인하고자 하는 시도이었는데 끝내 그 차이를 검출하지 못하였다. 이 부정적인 실험 결과를 설명하기 위한 여러 시도가 있었지만 궁극적인 해답은 아인슈타인(1879-1955)이 1905년에 발표한 특수상대성 이론에 의해서 주어졌다.
아인슈타인은 전자기파의 전파속도가 어느 관측계에서나 다 똑같이 c임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이 사실과 갈릴레이 좌표변환식이 함께 성립할 수는 없으므로 전자기파 전파속도의 불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좌표변화식이 다른 것으로 대치될 수 밖에 없다. ……
전자기 법칙에 관한 한 모든 관성계는 로렌쯔 좌표변환에 의하여 동등한 자격을 회복하였지만, 거꾸로 뉴턴 운동방정식은 로렌쯔 좌표변환에 의하여 그 꼴이 바뀌므로 뉴턴 역학에 관해서는 관성계간에 차별이 생긴다. 아인슈타인은 이 차별성을 제거하기 위해서 뉴턴의 운동방정식에 수정을 가하여 로렌쯔 변환에 대해서 불변인 운동방정식을 만들어 내었으며 이것이 상대론적 운동방정식이다.
나아가 아인슈타인은 특수상대성 이론에서 모든 물리법칙은 로렌쯔 좌표변환에 대해서 불변인 꼴이어야 한다는 가설을 세웠다. 이로써 모든 물리법칙은 어느 관성계에서나 동일한 꼴로 기술되며 관성계간의 차별성은 없어지고 따라서 절대정지계의 개념은 물리적으로 의미가 없는 것이 된다.
로렌쯔 좌표변환식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사항은, 갈릴레이 변환에서는 시간좌표가 변환되지 않는데 비하여, 로렌쯔 변환에서는 시간좌표가 공간좌표에도 의존한다는 것이다.
시간은 더 이상 공간으로부터 독립된 정체성을 갖는 존재로서 인식되지 않으며, 따라서 상대성 이론에서는 절대 시간의 개념을 포기한다.
두 개의 관성계 S와 S'에서 S'계가 S계에 대해서 x축 방향으로 V의 속도로 움직일 때,
시공간 상의 두 점 사이의 좌표 차이에 대한 변환식은 Δt'= γ(Δt-VΔx/c2), Δx'=r(Δx-VΔt), Δy'=Δy, Δz'=Δz 이다. 이 변환식으로부터 유도되는 다음 몇 가지는 고전물리학 이론과는 다르게 특수상대성 이론이 고유하게 제시하는 사항들이다;
. 동시의 상대성: S계에서 두 사건이 서로 다른 위치에서 동시에 발생하여 Δt=0, Δx≠0인 경우, Δt'≠0이다. 즉, S계의 동시가 S'계에서는 동시가 아닌 것이다. 동시의 개념이 더 이상 절대적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 개념이 되었다. 어느 두 사건이 동시에 발생하였는가 아닌가라는 질문은 관측자를 지정하기 전에는 완성되지 않은 질문이며 관측자에 따라 답이 다른 질문이다.
. 시간 지연: 1초에 한 눈금씩 움직이는 시계가 S계에서 공간적으로 고정되어 있다고 하자. Δx=0이므로 Δt'=γΔt이고, Δt=1초일 때 Δt'=γ초이다. 예를 들어 V= √3c/2인 경우 γ=2이므로 이 시계가 한 눈금 움직이는 시간이 S'계에서는 2초로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움직이는 물체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그 물체가 고정되어 있는 경우보다 느리게 진행한다. 우주선(cosmic ray)의 높은 에너지 입자나 대형 가속기에서 가속된 입자의 속도는 빛의 속도에 근접하므로 시간 지연 효과는 매우 크게 나타날 수 있으며, 실제로 이들의 반감기는 정지상태에서보다 훨씬 긴 것이 실험적으로 확인된다.
. 길이 수축: S'계의 x'축에 고정되어 있는 길이 1 m의 막대를 생각해 보자. 이 막대의 길이를 S계에서 측정하기 위해서는 막대 양끝의 x 좌표를 동시에 읽어서 서로 빼주면 된다. 따라서 Δt=0, Δx'=1 m를 변환식에 대입하면 Δx=γ-1 m를 얻는다. 위의 예와 같이 V= √3c/2인 경우, S계에서 측정하는 길이는 0.5 m이다. 일반적으로, 움직이는 물체의 길이는 정지상태 때에 비해서 움직이는 방향으로 줄어든다.
□ 일반상대성 이론의 시간과 공간
아인슈타인은 특수상대성 이론을 발표한 후 뉴턴의 중력 이론을 자신의 특수상대성 이론의 틀에 맞게 수정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이 이론에서는 시공간에 대한 전혀 새로운 개념이 도입되었는데, 그것은 중력장의 효과가 시공간의 휨(curvature)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물질의 분포와 운동상태가 시공간의 휨을 결정하고 시공간의 휨이 물체의 운동에 영향을 미친다. 시공간은 자연현상들이 벌어지고 있는 배경 무대로서의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배우의 역할도 담당하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 이론을 개발하는 과정에는 자신이 1907년에 발표한 "등가 원리"가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그 내용은 중력장의 효과와 관측계의 가속도 운동의 효과는 국부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등가 원리의 더 원시적인 형태는 중력질량과 관성질량의 동일함이다. 질량의 개념은 서로 다른 두 경우에 등장하는데, 그 하나는 중력의 원천으로서의 질량이고 다른 하나는 힘과 가속도 사이의 비례상수로서의 질량이다.
이 둘을 구분하기 위하여 전자는 중력질량(mg), 후자는 관성질량(mi)이라고 부른다. 중력가속도가 g인 중력장 내에서 물체에 가해지는 중력은 F=mgg이다. 이 중력 하에서 움직이는 물체의 가속도는, 뉴턴의 제2법칙에 따라, a=F/mi=gmg/mi로 얻어진다. 만약 중력질량과 관성질량의 비가 물체마다 다르다면 중력장 내에서 자유낙하하는 물체들은 서로 다른 가속도를 가질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두 동일한 가속도를 갖는다는 사실은 갈릴레오가 처음 이야기하고 실험으로 보여준 이래 최근까지 점점 더 높은 정밀도의 실험을 통하여 검증되어 왔다. 1971년의 브래진스키와 파노프의 실험은 1/10^12의 정밀도까지 이 사실을 확인하였다.
……
어느 한 점에 대해서만 자유낙하하는 관측계를 그 점에 대한 국소 관성계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균일하지 않은 중력장이 존재하는 경우, 공간상의 모든 점에 대해서 공통인 관성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각 점에 대한 국소 관성계들만 존재한다.
4차원 시공간에서 …… 임의의 점 Xμ에 대한 국소 관성계가 존재하고 그 점에서의 고유시간(dτ)은 국소 관성좌표계 ξXα를 사용하면, 특수상대성 이론에서와 같이, 민카우스키 메트릭(ηαβ)을 통하여 dτ2=-ηαβdξXαdξXβ로 주어진다. 시공간의 모든 점에서 메트릭을 민카우스키 메트릭으로 변환시키는 좌표변환이 존재하면 이 시공간은 본질적으로 평평한 민카우스키 시공간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가 휜 시공간에 해당한다.
중력장 내에서 자유낙하하는 물체나 빛은 이 휜 시공간의 측지선(geodesic)을 따른다. 구대칭의 물체 주위의 진공에서 아인슈타인 장방정식의 해는 슈워쯔쉴드 메트릭으로 알려져 있고, 이 메트릭으로 주어지는 공간에서의 측지선을 조사함으로써 알려진 일반상대론적 효과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태양 주위를 스쳐 지나오는 별빛은 태양 쪽으로 휘어 온다,
. 수성의 공전 궤도는 세차운동을 한다,
. 먼 천체로부터 오는 복사는 적색편이를 일으킨다, 등.
이러한 현상들은 모두 실제 관측을 통해서 확인되고 있다. ……
질량은 태양과 비슷하고 반경이 태양 반경의 백분의 일 정도 되는 백색왜성의 표면으로부터 오는 복사의 중력 적색편이의 크기는 약 만분의 일 정도이다.
블랙홀(black Hole)의 경우에는 이러한 적색편이가 무한대로 일어난다. 블랙홀의 바깥에서는 그 안으로부터 오는 어떠한 신호도 유한한 시간 내에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어떤 비행체가 블랙홀을 향하여 여행한다면 그 비행체는 그 안에 싣고 가는 시계로는 유한한 시간 내에 블랙홀에 진입할 수 있지만 밖에서 관찰하는 사람이 그 비행체가 블랙홀에 진입하는 것을 관찰하려면 무한대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 우주론에서의 시간과 공간
아리스토텔레스(384-322 B.C.)의 견해에 따른 희랍 시대의 대표적인 우주관은
. 하늘의 모양은 구형이고, 그 구의 중심에 공 모양의 지구가 움직이지 않고 고정되어 있다.
. 하늘에 보이는 별들의 하루 24 시간에 걸친 규칙적인 운동으로부터,
. 지구와 북극성을 잇는 축을 중심으로 24 시간만에 1 회전의 일정한 각속도로 회전하고 있는 천구며,
. 별들은 이 천구의에 박혀서 천구의와 함께 움직인다고 생각하였다.
. 대부분의 별들이 천구의상의 위치를 바꾸지 않는데 반하여 태양은 1년을 주기로 별들 사이를 움직여
가는 것으로 보인다. 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하여 제2의 천구의를 도입하고 태양이 여기에 박혀 있다고 봄
. 달이나 행성들의 운동은 더욱 복잡하게 보여서 이들의 운동을 마찬가지 요령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더욱 더 많은 수의 천구의를 도입할 필요가 있었다.
16세기에 지동설을 주장하고 나선 사람이 코페르니쿠스(1473-1543)이다.
. 태양의 행성들이 복잡한 불규칙적인 운동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유는 태양과 행성들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와 다른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돌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 이 이론은 후에 케플러와 갈릴레오에 의해서 더욱 확고히 뒷받침되었다.
우주에 관한 논의에서 제기되는 또 하나의 문제는 우주의 크기이다.
일반상대성 이론의 출현 이전에는 공간 자체의 유한성을 생각하기란 불가능하였으므로, 문제는 무한한 공간 안에 물질이 어떤 유한한 크기의 영역에만 제한적으로 분포되어 있는지 아니면 무한대 전 공간에 고르게 분포되어 있는지에 국한되었다.
희랍의 아리스토텔레스는 별들의 분포가 유한한 영역에 제한되어 있다는 견해를 취한 반면에, 16세기의 부르노(지동설을 주장하다가 1600년에 로마에서 화형 당함)는 안으로만 경계가 있고 밖으로는 끝없이 계속되는 빈 공간이 존재하는 상황은 상상하기 어렵다 하여 우리의 태양과 지구와 같은 무수히 많은 태양과 지구들이 존재할 것이라고 하였다.
뉴턴은 좀 더 과학적인 근거에 의하여 무한한 물질분포 쪽의 견해를 취하였던 듯하다.
그는 한 사신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물질이 유한한 크기의 제한된 영역에만 분포되어 있다면 바깥 부분에 있는 물체들은 중력에 의해서 안쪽에 있는 물체들을 향해서 끌릴 터이므로 중심을 향해서 떨어져서 결국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를 이룰 것이다. 그러나 만약 물질이 무한한 공간에 고루 분포되어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덩어리로 뭉칠 이유가 없고 무한한 공간 여기 저기에 무수히 많이 생길 수 있어서 그렇게 하여 태양이나 다른 별들이 형성될 수 있었을 것이다."
무한한 공간에 물질이 고루 퍼져 있다는 가설에도 문제가 없지 않았다. 지구에서 관찰하는 별의 광도는 평균적으로 지구로부터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지만 지구에서 보이는 단위 입체각당의 면적은 거리의 제곱에 비례하고 별의 갯수는 그 면적에 비례하므로 단위 입체각당 지구로 오는 빛의 양은 지구로부터의 거리에 무관하게 된다. 따라서 무한한 공간에 무한한 개수의 별이 고루 퍼져 있다면 하늘의 어느 방향을 보아도 우리의 시선 끝에는 별이 존재하여야 되며 하늘은 태양으로 온통 빈틈없이 덮여 있는 것과 같이 밝아야 하는데 어째서 실제의 밤하늘은 깜깜한가? 올베르의 역설이라고 알려진 이 의문점은 무한히 크고 영원히 존재하는 유클리드 공간에 물질이 고루 퍼져있는 우주모형의 타당성을 배제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1916년에 일반상대성 이론을 발표한 후 이어서 1917년에 리이만 시공간의 개념에 입각한 새로운 우주모형을 제시하였다.
이 모형에 의하면 우주 공간은 4차원 유클리드 공간 내의 구의 표면으로 주어지는 3차원 공간에 해당하며, 이 3차원 공간 내에 물질이 대체로 균일하게 분포되어 있다. 4차원 구의 반경에 의해서 결정되는 우주 공간 크기는 유한하며, 어디에도 우주의 끝이라고 할 만한 경계가 없는 모형이다.
아인슈타인은 우주의 크기는 변함이 없는 정적인 모형을 생각하였으며, 이 모형을 자신의 장방정식에 대입하였을 때 우주의 에너지 밀도나 압력이 물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값을 가져야 되는 모순이 발생하므로 이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서 장방정식에다 "우주론적 항"이라는 새로운 항을 삽입하는 수정을 가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에 허블의 관측에 의해서 우주는 정적인 것이 아니라 그 크기가 실제로 팽창하고 있다는 증거가 얻어졌으며, 이에 따라 1931년에 아인슈타인은 우주론적 항을 도로 삭제하고 장방정식을 원래대로 복원시켰다.
아인슈타인의 우주 모형을 기폭제로 하여 일반상대성 이론에 입각한 우주론의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져 결국 "표준모형 우주론"의 개발로 이어졌다. 표준모형 우주론에서는 "우주론적 원리"를 가정하는데, 그 내용은 우주 공간이 거시적인 척도로 볼 때 거의 균일하고 등방적이라는 것이다. ……
유한한 시간 전에 우주는 물체들이 극한적으로 밀집되어 무한대 에너지 밀도와 무한대 온도의 상태에서 폭발적인 팽창을 시작하여 그 팽창 속도가 점차 줄어들고 있지만 아직도 팽창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표준모형 우주론은 일명 "대폭발(big-bang) 우주론"이라고도 불린다.
대폭발 특이점은 모든 물리법칙의 적용이 불가능해지는 점으로서, 이는 일반상대성 이론이 그러한 극한적인 상황에서도 유효하다고 가정하였을 때 도달하는 점이다. 대폭발 특이점에 접근하면 일반상대성 이론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고 더 근본적인 다른 이론으로 대치되어야 한다는 것이 현재의 믿음이다. 이 이론은 양자론과 상대론을 모두 포용하는 양자중력장 이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대체로의 인식인데 이 방면에 아직은 확립된 이론이 없다. 현재로서는 초끈(superstring) 이론이 활발히 연구되고 있고 또 우주 시공간이 3+1차원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기술될 수 있는 가능성의 거론 등이 흥미롭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