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정...............善/21.부끄러움(恥)

부끄러움

오갑록 2010. 7. 7. 18:51

수줍은 ......

■  부끄러움

 

    남을 대하기 떳떳하지 못한, 체면이 깎이는 일이나 아니꼬운 일을 당하면 창피(猖披)하다고 한다. 또는 여기서 느끼는 부끄러움을 창피하다거나 수치(羞恥)스럽다고 한다.

 

고개 돌려 살포시 눈길 떨군 채 불그스레 상기된, 앳된 소녀의 모습도 부끄러움을 연상케 하지만, 갓 싹이 터서 올라오는 고개 숙인 새싹이나, 이슬 머금어 휘늘어진 연초록 풀잎의 모습처럼 자연에서도 부끄러움을 연상케 한다. 따스한 봄 햇살을 받으며, 풀잎을 보며, 큰 산 아름다운 능선으로 이어진 산자락을 바라보며, 새소리 물소리 고운 소리를 들어가며 …… 대자연에서 느끼는 부끄러움도 아름다움의 한 줄기라고 생각하여 본다.

 

누구에게나 부끄러움의 그늘 뒤에 숨긴 조그만 아름다운 순간들 몇 가지는 간직하고 있다. 오래 전의 일이지만 여태껏 기억에 남는 부끄러움들이 있다. 곱게만 보이던 선생님과 마주친 눈 빛에 황급히 눈길 돌리던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부끄러움도 있다. 부끄러운 생각에 새벽 잠이 깨인 적도 있다. 내미는 손 떨림에서 그 이의 부끄러움이 느껴지기도 하고, 빨개진 볼에서도 그 이의 부끄러움이 엿 보이고, 파르르 작은 떨림 속에서도 그 이의 부끄러움은 느껴 온다 

 

40여년이 훨씬 더 지난, 중학교 1학년 봄, 음악시간의 일이다. 매주 음악시간은 선생님 피아노 반주로 초 봄 한달 내내 슈베르트의 “월계꽃”  합창 연습을 했다. 그리고는 1학기 중간고사 때가 되어, 한 명씩 앞으로 나와 "월계꽃" 한 소절씩 부르는 실기시험을 봤다. 그 때 나는 끝내 입 밖으로 노래 소리를 내지 못했다. 무엇이 그리도 부끄러웠는지는 모르겠다. 생각 할 때 마다 바보스럽게만 여겨진다. 내가 받은 중간고사 음악 실기점수는 35점(중 1학년, 그 때의 성적표를 지금도 보관 하고 있어, 최근 새삼스레 그 성적을 짚어 본다 ㅎ) , 지금 기억에 그 날 결석생은 60점이었는데……, 그래도 그 때의 리듬만은 그 부끄러움과 함께 좋은 기억으로 한 편에 살아 생동하고 있다.

 

   방긋 웃는 월-- ♪~   한 송이 피었네    향기로운 월--    힘껏 품에 안--    ---- 얼굴을    어루만져 주었-    사랑스런 월계-  ♬~♩

 

우리집안의 애들을 봐도 그렇다. 볼 때마다 좋아하고 깔깔대며 나를 따르던 세 살 박이 꼬마가 이레도 채 안된 한 참만 못 봐도 부끄러워 고개 떨구고 손톱 만지작 거려가며 딴 전 피우는 양이 영락없는 나를 닮았다.

새내기 사회초년생 때만해도 작은 부끄러움은 여전했다. 떨리는 듯한 손으로 내민 결재서류에도 부끄러움은 녹아 있었다. 신입사원 회식자리에서도 그랬다. 곁에 앉은 술시중 여인이 마냥 부끄러워 고개 돌리며 움츠리곤 한다. 떨리는 듯한 손으로 집어주는 안주를 받으면서도 주는 이 보다 받는 내가 더 부끄러웠다. 어스름한 조명 아래,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부끄러이 내미는 연락처 적힌 쪽지에도 몇 일이고 간직했던 욕정에 찬 그 때의 작은 설레임이 기억에 새롭다. 코쟁이 외국인 앞에만 서면 움츠려 들고 작아지던 나, 몇 마디 익힌 영어 한 구절마저도 부끄러움에 녹아 엉켜 버리곤 했다. 순진한 성인 초년생, 그 때는 부끄러움이 있었다.

 

헐떡대며 올라선 산사(山寺), 절에만 들어서면 느끼고는 하던 부끄러움이 있다. 대웅전 앞, 열린 여닫이 문 문턱 언저리를 서성이며 선뜻 다가서지 못한 채 훔쳐 보는 석가상 앞에서, 무섭고 두렵다기 보다는 차라리 부끄럽다고 여겨지는 몸 속 깊은 저 편의 작은 떨림은 무엇이었을까? 작고 초라하여 보잘 것도, 자랑 할 것도 없는 스스로의 빈약함에서 짧은 순간 느껴오는 부끄러움이었을까? ()욕, 정()욕, 영()욕 ……,  헛된 탐욕으로 물 든 스스로를 들킬까 봐 밀려오는 부끄러움이었을까?

성당 주변이나 조용한 음악을 들으면서도 형언키 어려운 부끄러움을 느끼곤 한다.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성가곡, 알레그리의 “미제레레 메이 데우스(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를 흘려 듣노라면 눈시울이 적셔지는 것만 같은 부끄러움으로 젖어 들곤 한다. 굳이 영혼을 더럽혀서 라는 데 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더라도, 스스로의 작은 모습도 부끄럽고, 깨끗지 못한 헛된듯한 생각이 부끄럽다. 그리고 쓸데없이 작은 욕망들이 부끄럽고, 편협 되고 그릇 된 자신의 세상살이 안목들이 부끄럽다.

 

부끄러움은 언제 느끼는가? 감출 것이 있기에 부끄러움이 있다. 그렇지만, 감추고픈 흠은 너와 내가 다르다개중에는 부끄러워함이 이상하게 여겨지만, 부끄럽게 여겨지지 않는 자신이 참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곳도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치약 보다 즐겨 하는 소금 양치질 습관 때문인지 누렇게 된 이빨이 부끄럽지 않고, 작고 왜소한 자신의 몸매가 부끄럽지 않다. 내가 끌고 다니는 소형차가 그리 부끄럽지는 않고, 떨어 진 속 옷, 등 짝에 고구마 모양을 한 뻥 뚫린 구멍의 런닝 셔츠도 부끄럽지는 않다. 오랜 기간 본사 터줏대감으로 근무 하다가 공장에 처음 부임 시 받아서 현장용으로 신기 시작한 현장용 안전화가 한 켤레 있다. 햇수로는 17년이나 지난 지금도 애용하고 있다. 뒷굽은 덧댔고, 양쪽 볼도 주름지고 헤져 구멍 나 양말이 비친다. 뒤꿈치는 접히고 닳아져 가죽이 하얗게 칠이 벗겨졌고, 그나마 한 짝의 앞꿈치는 물텀벙이 아구처럼 입을 헤 벌린다. 바닥 깔 창도 이제는 닳아질대로 닳아져 신문지 접어서 수시로 갈아 깔며 신는다. 그래도 부끄럽지는 않다. 당시 두어 해쯤 지날 즈음 안전팀장이 억지로 새것을 권했지만 왠지 헌 것이 더 정감이 가서 여태껏 끌고 다닌다. 남이 보면 흠이지만 내게는 보조개만큼이나 귀엽고 중하다는 느낌 때문이다. 무심코 질질 끌고 다닌 것이 어느새 17년이나 됐다. (남의 눈으로는 추접하게 보일지도 모르는 부끄러운 사진   “지난날의 흔적”)

 

보리밥 한 공기에 김치 국과 김치 한 사발로 때운 오늘 아침상이 부끄럽지 않다. 유명 호텔 한정식당에서 한 상에 몇 십만 원씩 하는 식단이 좋아 뵈지 않는다. 그럴듯한 양식 식단에 곁들여 나오는 “베지터블 수프”는 라면 수프 냄새만 듬뿍 배어 식상하곤 한다. 제대로 익힌 김치로 얼큰하게 맛깔 낸 오늘 아침 상의 김치 국과 어찌 비하랴. 하류의 공업고등학교라고 내세우기 꺼리는 벗도 있지만 그 모교가 나는 부끄럽지 않다. 스스로를 못난이 라고 하시는 어머님이, 남보다 배움이 덜하다고 잘 안 나서는 아내가, 나의 가족이, 가정이, 학교가, 고향이, 나라가, 그리고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까지도…… 나는 부끄럽지 않다. 

 

부끄러움을 유발하는 데에는 일반적인 특성이 있다. 누구나 다 아는 흠이나 아픔, 잘못에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감출 구석, 감출 여지가 있는 것들일 때는 부끄럽게 여겨진다. 스스로가 그것을 잘못으로 또는 흠으로 인정하고, 누구에게인가 들킬 수 있다고 여길 때 부끄러움을 갖는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절대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뉘우침 없는 정치판의 일부 철면피들이 그러하고, 살생과 강도 짓 한 알려진 중죄인들이 그러하며, 거리에 뒹구는 부랑아들이나, 여론에 내몰린 악덕 기업인들이 그러하다.

 

부끄럼은 두 가지 부류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작은 부끄럼이다. 좋아하는 이에게 흠 잡힐까 하는 생각에 드는 부끄럼이다. 한 구석에 숨은 점 하나나, 냄새 나고 접혀져 주름진 곳 속살들이 그렇다. 냄새 밴 엉터리 지식도, 구린내 밴 속물들의 재산도 그렇다. 몰래 혼자서만 즐기는 그른 짓의 행태도 들킬까 봐 그렇다. 남모르게 품어 본 온갖 탐욕들도 그렇다.

 

또 하나는 보다 큰 부끄럼이 있다. 영혼과 신이 있다고 믿는 순간, 그 들에게 들키게 될 스스로의 모순에 느끼는 큰 부끄러움이다. 헛된 욕망, 헛된 생각으로 가득 찬 자기의 본 모습을 불당 앞에 서서 느낄 때도 그렇고, 성스러운 성가 곡을 진심으로 듣게 될 때처럼, 진리니, 순리니, 섭리니 하는 우주근본 본질 앞에 알 몸으로 선 자신의 모습을 그려 볼 때 그렇다고 생각하여 본다.

 

더럽고 악하고 추하거나 과도한 욕망들을 안은 채 이들을 억제하고 누르고 가리거나 감추면서 이들을 들킬까 봐 부끄러움을 갖게 된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 그러한 부끄러움을 품는 이가 많은 사회라면 남을 위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건전하고 건강한 사회의 바탕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여본다.

 

성공한 정치가가 느끼는 부끄러움, 성공한 기업인이 느끼는 부끄러움, 학문으로 성공한 학자가 느끼는 부끄러움, 종교계의 원로로서 느끼는 부끄러움, 독실한 신앙인으로서 느끼는 부끄러움, 훌륭한 군인으로서 느끼는 부끄러움, 인간/국민으로서 느끼는 부끄러움, 남성/여성으로서 느끼는 부끄러움, 가장/아내//아들/부모로서 느끼는 부끄러움, 학생/근로자/경영인으로서 느끼는 부끄러움…… 

 

조선시대 어느 학자가 느끼는 부끄러움은 어떠했는지도 열어 본다.

 

 

     2009.3.31.()

     오갑록 (K L Oh)

 

 

 

□  부끄러움을 닦는 법                     조선 중기의 학자, 息山 李萬敷(1664~1732)   

 

부끄러움이 있다면 부끄러워해야 한다.

부끄러움이 없어도 부끄러워해야 한다.

부끄러움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부끄러움이 없고,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은 반드시 부끄러움이 있다.

때문에 부끄러운데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능히 부끄러움이 있게 되고,

부끄러운데 부끄러워하면

능히 부끄러움이 없게 된다.

 

부끄러운 일에 부끄러워함이 있는 사람은

그 부끄러움을 가지고 부끄러워하고,

부끄러운 일에 부끄러워함이 없는 사람은

부끄러움이 없음을 가지고 부끄러워한다.

 

부끄러움을 가지고 부끄러워하는 까닭에

부끄러움이 없게 되려고 생각하게 되고,

부끄러움이 없음을 가지고 부끄러워하는 까닭에

부끄러움이 있으려 생각하게 된다.

 

부끄러운데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능히 부끄러움이 있게 되고,

부끄러운데 부끄러워하면

능히 부끄러움이 없게 된다.

이것을 일러 부끄러움을 닦는다고 한다. 

요컨대 이를 닦아 힘써 행할 뿐이다.  

                                        息山先生文集卷之十一,  雜著

 

. 脩恥贈學者 (부끄러움을 닦는 법)    有恥可恥。無恥亦可恥。有恥者。必無恥。無恥者。   必有恥。故恥無恥。則能有恥。恥有恥。   則能無恥。恥有恥者。以恥爲恥也。恥無恥者。   以無恥爲恥也。以恥爲恥。故思無恥。   以無恥爲恥。故思有恥。恥無恥而能有恥。   恥有恥而能無恥。則是謂脩恥。要脩之力行而已。

                                         (podoo, 2007.5.6)

  

 

. 부끄러움은 사람이 느끼는 가장 기본적 인간성이라고 하는데 ......

       그 부끄러움도 때로는 확대되거나 돋 보일까?

 

 

 

                                                                            

 

■  도서: 부끄러움

 

 

□                                                                              

버나도 카두치, 성격심리학자, 책 소개에서 발췌

우리 몸과 마음을 지배하는 부끄러움, 어떻게 다스릴까?

학교나 직장생활, 연애와 대인 관계가 힘겨운 수줍은 이들을 위해 부끄러움의 정체를 밝히고 해결법을 모색하였다. 저자는 인디애나 대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20년간 '부끄러움'을 주제로 연구해 왔다. 그는 수천 명의 상담자들을 다루어 온 경험을 바탕으로 많은 사람들이 겪지만 확실한 실체를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의 메커니즘을 파헤쳤다. 부끄러움의 정체는 무엇이며 우리는 주로 어떤 상황에서, 왜 부끄러움을 타게 될까? 저자는 부끄러움이 기질적으로 타고 나는 것이? 남녀는 부끄러움을 탈 때 어떻게 다르며, 연령에 따라 나타나는 부끄러움은 어떠한지 다양한 상담 사례를 통해 밝히며 그 극복 방법을 알려 준다.

 

인디애나 대학 심리학과 교수로 20년째 성격심리학, 대인 관계 이론을 가르쳐 오고 있다. 부끄러움 생활 연구소를 설립해 인간의 부끄러움 연구에 기여하고 있으며 부끄러움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원하는 삶을 살도록 조언자 역할도 다하고 있다.

 

. 부끄러움, 그 정체는 무엇일까   . 왜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얼굴이 빨개질까?   . 나는 수줍음을 심하게 타는 사람인가? 셀프 테스트   . 수줍음에 대한 잘못된 오해   . 새로운 시각으로 부끄러움 바라보기. 부끄러움의 세 얼굴   . 몸의 변화를 감지한 순간 더 수줍음을 탄다 - 신체적 증상   . 알아도 피할 수 없는 부끄러움의 딜레마 - 심리 현상   . 자기 자신을 창피해하는 사람들 - 자기 정체성. 수줍음은 타고 나는가? 만들어지는가?   . 타고난 부끄럼쟁이는 없다   . 낯가림이 심한 취학 전 아동    . 친구를 사귀지 못하는 숫기 없는 어린이    . 사람들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청소년    . 인간관계에 벽을 느끼는 어른들 . 부끄러움의 컬쳐 코드    . 애정 문제에 유난히 수줍은 사람들    . 직장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소시한 사람들    . 동양과 서양, 부끄러움을 보는 시선과 관습 차이

 

. 부끄러움은 타고난다? 아니다. 부끄러움은 '학습'된 것이다!

전신에 열기가 느껴지고 얼굴은 붉어지며 심장엔 과부하가 걸리고 등에는 찬물을 끼얹은 것만 같은 절절한 느낌. 바로 부끄러움이다. 부끄러움을 타면 위축되고 말수가 적어지며 사람들과 시선을 맞추는 것도 버거워진다. ……

카두치 박사는 부끄러움은 성격 장애도 몹쓸 병도 아니며, 누구나 특정상황에서 부끄러움을 타고 낯선 사람과 있을 때 위축감을 느낀다고 얘기한다. ……

 

. 부끄러움을 현명하게 극복하는 비결

카두치 박사는 부끄러움 타는 사람들이 내적 갈등에 휩싸일 때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바를 감행하는 순간에는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을 이해하고 자신만 별나다는 의식을 버릴 것을 강조한다. 부끄러움 타는 사람들은 자신이 남들보다 적응 기간이 느림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부정적 사고 체계의 진행과정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말 한마디에 자기 가치가 땅에 떨어진다거나 실수에 지나치게 민감한 태도를 고치는 것도 중요하다. 관점의 초점을 자기 내면에서 밖으로 돌리면 더 넓고 합리적인 시야를 가질 수 있다. 적당한 사교적 기술을 익히는 것도 필요하다. ……

 

 

□                                                                                          

.호영, “부끄러움” 책 소개 중에서

인간에게 예외 없이 타고난 감정 부끄러움. 현 사회에 번지고 있는 여러 가지 중독현상들의 심리적인 뿌리가 수치심에 있음을 밝히고 이 수치심을 어떻게 건전한 부끄러움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지를 상세히 설명했다. 또한 심리학과 문화인류학, 정신분석, 자기심리학 그리고 정신의학 등 여러 측면에서 연구된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부끄러움은 누구나 타고나는 감정이고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감정이다.

부끄러움은 감춘다고 없어지지도 않고 두려워하고 미워하고 싸운다고 해서

그 힘이 약해지지도 않는다.

의식에서 없애려고 무시해도 다시 나타나는 것이 부끄러움이며,

부끄러움을 혐오하다 보면 결국 자기 혐오가 생길 뿐이다.

그 감정은 고통스럽지만 인생이 한 부분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그 과정은 쉽지가 않다.

부끄러움을 이해하고 원인을 알고 수용하는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오랜 시일이 걸린다.

하지만 결국 부끄러움과 긴장이 해소되고 나면,

나에게는 마음의 평화가 찾아온다.

부끄러움은 진정한 나의 일부이기 때문에,

내가 나의 부끄러움과 익숙해지고 친해지고

나의 부끄러움을 존경할 수 있어야

비로소 자기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태도로 이어진다.

우리가 부끄러움을 통해 양심의 재가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은 인간의 조건이다.

 

부끄러움을 신호로 삼아 나의 삶을 행복하고 선하게 이끌 수 있다면,

이것은 건전한 부끄러움이 되는 것이다.

배짱으로 살아야 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현대는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알고

자신의 부끄러움을 건전하게 승화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한 시대이다.

 

. 천의 얼굴을 가진 부끄러움    . 부끄러움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타고난 감정이다    . 부끄러움의 감정반응 . 부끄러움에 예민한 사람들    . 지나친 책임의식    . 한 번 실패한 죄인    . 언제나 옳아야 하는 장로님    . 인정중독    . 강박적 비교    . 자기비하    . 해로운 기억    . 부친의 그림자 . 부끄러움이 없는 문화    .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    . 우리 문화에서 부끄러움이 없어져 가고 있는가? . 영혼의 함정 - 유독성 수치심    . 지나친 수치심    . 수치심의 내면화    . 수치심의 전가 . 수치심과 중독현상    . 알코올 및 마약중독    . 섭식장애    . 감정중독 (Feeling addiction)   . 사고중독 (Thought addiction)   . 행동중독 (Action addiction)   . 광신 (Religious addiction). 수치심으로부터의 해방    . 나의 부끄러움을 이해하는 단계    . 부끄러움에 대한 나의 방어    . 나의 부끄러움의 원인    . 부끄러움의 수용    . 행동지침 . 건전한 부끄러움은 삶을 선하게 이끈다    . 참된 '' 의 목소리    . 부끄러움은 우리가 잘못된 길에 빠지는 것을 예방해 준다    . 나의 약점이 노출되기 때문에 부끄러운 것이다    . 열등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 부끄러움은 창조력의 원천이다    . 부끄러움이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 부끄러움의 문화적 특징    . 일본의 치 문화    . 유교사상과 부끄러움    . 조선시대 의식화와 감정의 격리    . 한국 문화 속의 부끄러움 . 부끄러움에 관한 이론들    . 정신분석    . 부끄러움과 자기    . 객관적 자기인식    . 감정이론    . 진화론과 부끄러움    . 생존을 위한 본능으로서의 부끄러움    . 사회심리학적 접근    . 부끄러움에 대한 방어

 

 

 

■  부끄러움

 

 

 

부끄러움이란 정서는 행동을 감추고 사회적 의사소통을 단절하거나 혹은 말의 속도를 빠르게 증가시킴으로 해서 그 경험이 명확해지는데, 이러한 두 가지 상반된 행위양식(행동 감추기, 말 빨리 하기)은 같은 기능적 결과를 함유한다. 복잡한 정서(complex emotion) 중 부끄러움, 죄책감, 자긍심, 당황스러움 등과 같은 정서를 자의식적 정서라 하는데, 이러한 정서들은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상대방이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 평가하고 판단하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경험되고, 자기자신이나 행동에 대한 기준이 포함된 자기 준거적 과정을 포함되기 때문에 자의식적 정서로 분류되며 도덕적 위반 행위를 제지하고 도덕적 행위를 촉진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셸러의 부끄러움 이론을 통해 본 한국인의 수줍음” 중에서  (

한국심리학회지 2004, 김기범)

 

숱한 자기 계발서와 리더십 서적은 성공이 불굴의 '강인함' '용기'의 산물이라고 상찬해왔다. 두려움과 부끄러움은 절대 드러내서는 안될 내면의 그늘이자 약점이다. 바로 그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두려워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말라는 말에서 여성 리더십의 새로운 가능성을 본다. ……                                                        “두려움은 힘이다! 부끄러움은 선물이다!” 중에서  (박선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 버릇은

이제 덧니의 매력까지를 계산하고 있어 세련된 포즈일 뿐이다.

뱅어처럼 가늘고 거의 골격을 느낄 수 없이 유연한 손가락에

커트가 정교한 에메랄드의 침착하고 심오한 녹색이

그녀의 귀부인다운 품위를 한층 더 해 주고 있다.

아름다운 포즈였다.

 

그러나 부끄러움은 아니었다.

노련한 연기자처럼 미적 효과를 미리 충분히 계산한 아름다운 포즈일 뿐 이었다.

부끄러움의 알맹이는 퇴화하고

겉껍질만이 포즈로 잔존하고 있을 뿐이었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중에서    (박완서)

                                                              

 

 

 

■  수줍음이 사라져간다

                                                                                                                                                                                                                           

.서령

부끄러우면 뺨이 붉어진다.

소년의 뺨이 혹은 처녀의 볼이 수줍음으로

복숭아 빛깔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삶의 황홀이다.

 

아직 세상 속으로 나서지 않은 여리고 떫고 풋내 나는 감성이

기존의 거칠고 노련하고 기름진 것들과 맞닥뜨릴 때 드러내는

피톨의 저항 같은 것,

수줍음은 때 묻지 않음의 신호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수줍어하는 소년도, 처녀도 만나기가 어려워졌다.

다들 당당하고 날씬하지만 수줍은 태를 느낄 수가 없다.

거침없이 배꼽과 겨드랑이와 엉덩이 선을 드러내는 패션이

수줍음까지를 앗아갔나.

자신의 미에 도취된 듯한 도도한 표정은 뭔지 향기가 빠진 꽃 같다.

아쉽고 허전하다.

 

꼬마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낯가림하느라 엄마 치마꼬리 뒤로 숨는 애들을

굳이 예쁘다는 건 아니지만

거침없이 제 주장을 또랑또랑하게 밝히는 아이들 앞에

어른인 내가 괜히 기가 죽는다.

 

부끄러움은 수줍음과 닮은꼴이지만 뿌리가 조금 다르다.

수줍음이 아동용이라면 부끄러움은 성인용이랄까?

수줍음이 그저 감성적인 주저(躊躇)나 무구(無垢)나 동경(憧憬)에서 나온다면

부끄러움은 이데올로기가 개입한 자기검열에 가깝다.

 

부끄러움으로 낯이 붉어지는 어른을 만나는 건

수줍어 볼이 발개지는 아이를 만나는 것보다 더 희귀한 일이 돼 버렸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어른이 수줍어하는 아이를 기르는 것 같다.

 

어른들이 부끄러움을 모르는데 아이가 수줍어할 리가 없다.

수줍음은 어쩌면 눈부심의 다른 이름이다.

어른이 가진 아슬한 사유체계, 분별력과 포용력,

굳건한 인내력과 든든한 완력 앞에

아직 미숙한 자신의 힘을 내보이기 주저되어

낯이 붉어지는 것이 수줍음의 경로 아닐까?

 

어른이 그저 젊음을 탐하는 호색한으로 보인다면

처녀들이 제 여린 몸을 수줍어하는 대신

반사적으로 제 아름다움을 무기로 쓸 궁리나 하는 수밖에!

 

박완서 선생이 쓴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란 소설을 대학 때 읽었다.

거기 부끄러움을 가르치는 학원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주인공의 탄식이 나온다. 그 책이 나오고 30년이 지난 지금

세상 부끄러움의 총량은 이전 대비 30% 이하로 줄어든 것 같다.

 

그 시절 내 고민은 지나치게 수줍음이 많다는 점이었다.

저만치 시계탑 앞에 내가 좋아하는 김춘수 선생이 나타나면

서른 걸음 앞에서 이미 얼굴이 불덩이처럼 붉어졌다.

그걸 들키기 싫어 일부러 스승 곁을 비켜서 갔다.

속마음을 도무지 감출 수가 없어 곤혹하고 난감했던 시절을 지나

웬만한 일에는 가슴조차 뛰지 않는 무감한 중년이 되는 것도

돌이켜보면 잠깐,

지금 난 다시 부끄러움이 사라진 세상을 개탄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 너무 자주 눈에 띈다.

후안무치의 전형인 그들은 주로 텔레비전 정치뉴스 시간에 활동한다.

세상 부끄러움의 총량을 줄인 범인들은 바로 이 사람들인 것 같다.

그들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다'

시인 윤동주의 말을 뻔뻔하게 되뇐다.

그러면서 스스로 후안(厚顔)의 두께를 불려놓고

기어이 우리 보통사람들에게까지 후안불감증을 감염시켜버렸다.

 

큰일났다.

부끄러움은 명예의 기본이다.

무수오지심 비인야(無羞惡之心 非人也)를 말했던 맹자 아니라도

인간의 품위는 자신을 되돌아보는 성찰에서 나온다.

부끄러움을 되찾아야 한다.

뺨이 발개진 소년과 처녀들에게

넉넉하게 미소를 던지는 어른들이 많아져야 한다.

 

사회 구성원의 체감 행복도를 높이는 비결은

맹자 시절과 한 치도 달라지지 않았다.

양보하고(辭讓之心) 동정하고(惻隱之心) 분별하고(是非之心)

부끄러워하는(羞惡之心) 마음,

그게 있어야 세상이 살만해진다.

경제성장 몇 %보다 훨씬 시급한 일이다.

                                                    (

문화.산책, “수줍음이 사라져간다” 2008.09.02,)

 

 

 

 

■  부끄러움의 미학 

                                                                                                            .재석, koreatimes.co.nz, When we are hipped or a dear friend is dead, there stars are, constantly shining over head.우리가 우울할 때나 사랑하는 친구가 죽었을 때도, 별은 머리 위에서 변함없이 빛나며,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별을 바라보고 싶어 하고 노래한다. 중고등학교 시절 국어교과서에 실렸던 윤동주의 '별 헤는 밤' '서시' 두 편의 시도 별을 노래하고 있다. ……윤동주는 시대의 아픔에 온몸으로 저항했던 투사라기 보다는, 척박한 조국의 현실에 상처받은 자신의 영혼을 쓰다듬고 끊임없이 내출혈을 앓으면서 자신의 부끄러움을 노래했던 시인이었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을 여러 가지 각도에서 얘기한다. 하나 덧붙이자면, 인간은 부끄러움을 아는데 동물은 부끄러움을 알지 못한다. 자신의 타고난 본능에만 충실하게 살아나가면 되는 동물은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다. 동물은 동물 이상도 동물 이하의 존재도 아니기 때문이다. 개나 돼지는 옷을 입지 않지만 인간은 겉옷 속에 속옷까지도 켜켜이 입는다. 부끄러움을 아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팬티를 입는 형이하학적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인간은 형이상학적 의미에서도 부끄러움을 느낀다. 인간은 별처럼 높은 이상을 향해 부단히 노력하지 않으면 나태해지고 인간 이하의 존재로, 나중엔 짐승만도 못한 흉물로 추락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인간이 지향하는 높은 이상과, 자신이 바라보는 별의 모습에 자신의 행위가 많이 부족하다고 느끼거나 많이 어긋났을 때 인간은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부끄러움은 자연계에서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참으로 인간적인 형벌이자 자존심이다.

 

육신만이 아니라 영혼마저도 흔들리는 갈대 같은 존재인 인간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아니 누구나 무수히 많은 잘못을 저지르며 벌받고 다시 별을 바라보며 부끄러워하고 반성하며 성장해 나간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에게 지탄받는 일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그들을 뻔뻔하다고 하고 심한 경우에는 인간성을 상실했다고도 한다.

 

자신들의 부당한 권력 유지를 위해 국군들을 동원해 국민들을 향해 총을 겨누게 하고도 위풍당당할 수 있는 광주와 양곤의 군부 실세들을 보며 인간이 어느 정도까지 뻔뻔할 수 있는지 절망스러울 뿐이다.

그들과 대극점에 놓인 양심의 소유자가 윤동주였다. 부끄러움에 대한 성감대가 그 누구보다도 발달돼 있던 감성의 소유자 윤동주는 끊임없이 부끄러움을 노래한다.

 

'코스모스'에서는 "코스모스 앞에 선 나는/ 어렸을 적처럼 부끄러워지나니"라고

태생적 부끄러움을 동심으로 노래했고,

'쉽게 씌여 진 시'에서는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세상의 편안함과 쉽게 악수하려고 하는 지식인의 나태함을 아파하고 있다. 

 

그의 시가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그의 시 도처에 세상에 대한 모든 부끄러움을 감지하는 섬모 같은 솜털들이 살아서 눈물 흘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의 시는 인간 최고의 선 중에 하나인 '부끄러움의 미학'을 담고 있다.

 

  1984년 서울 종로에서 처음 교단에 섰을 때, 나는 내가 담임을 맡은 학급의 급훈을 윤동주의 서시 앞 부분으로 정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별처럼 아득한 목표였지만 치기 어린 젊은 선생이었던 나는 내 반의 급훈처럼 살며 가르치고 싶었고, 나의 아이들도 윤동주의 마음을 가진 인간으로 성숙해가길 바랬다. 그러나 영악한 세상과 점점 살을 섞어 가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 보던 나는 몇 년 후에는 급훈을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로 줄일 수 밖에 없었고, 그로부터 또 몇 년 후에는 '부끄럼이 없기를'로 급훈과 삶의 목표를 하향 조정해 버렸다. 그런데 그마저도 문득문득 지키기 힘들어 지는 것이 부끄러운 내 자화상인지도 모른다.

 

  저 창 밖을 세월처럼 스쳐 가는 바람이 내가 젊은 날 심었던 그 별이 무성한 나무의 별 이파리들을 얼마나 많이 날려 버렸을까. 내 청춘의 숲을 향해 거슬러 걸어가자니 바람에 흔들리며 내가 아프게 놓쳐 버리고 슬그머니 놓아 버린 별 이파리들이 숲 길에 즐비하다. 그 별 이파리 하나에는 프란치스코가, 별 이파리 하나에는 네루다가, 별 이파리 하나에는 잔느 모로가, 별 이파리 하나에는 탄호이 저가, 별 이파리 하나에는 콜린 윌슨이, 별 이파리 하나에는 고리끼가, 별 이파리 하나에는 카잔차키스가 다시 누군가에게 별이 되어 날아가려고 반짝이고 있다.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별이 빛나는 밤'처럼 아름다운 오클랜드의 밤 하늘을 우러러 보니 윤동주가 아슬히 멀리서 별이 되어 노래하고 있는 것 같다.     (2007.10.9)

 

 

. 서시                                          .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존재의 부끄러움

 

                                                                                                                mezzy.teamcscw.com

     '부끄러움'에 대한 기억은 아주 옛날, 놀이터 흙 속에 조개를 주워 먹던 어릴 적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바지에 똥을 싸거나 같은 반 친구와의 싸움에서 얻어 터진 일 같이 일상적이고 피상적인 부끄러움은 아니다. 그 부끄러움은, 일상적인 수치가 그렇듯이 나의 외부로부터 내부로 향하는 관계의 영향력이 아니다. '부끄러움'은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 어느 날 아침 눈을 떴을 때나 언제나처럼 길을 걷고 있을 때 나를 덮친다.

 

부끄러움이 찾아오는 때가 언제인지 나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 상황들에는 어떤 공통도 개연성도 없다. 어릴 때는 그 때 참을 수 없이 부끄러울 뿐이었지만, 그것은 마치 사르트르의 '구토'처럼 존재의 밑바닥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 같은 것이다. 부끄러움은 사회와 관습이 나에게 가릴 것을 요구하는 곳, 없앨 것을 요구하는 곳, 성기, 항문, 콧털 같은 것들 사이로 비집고 나오곤 한다. 하지만 그것은 끓어오르는 마그마가 화산 구를 통해 비집어 나오는 것처럼, 피부 아래의 피지가 피부의 미약한 틈새 사이로 비집고 나오는 것처럼, 사회가 마련해 둔 '정당한 부끄러움' 사이로 존재의 부끄러움이 감추어져 드러나는 것에 불과하다. 체험하는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는 배설과도 같다.

 

그 부끄러움은 사회적 경험 이전의 것이기 때문에 비유하기가 쉽지 않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나를 가린 모든 것이 사라진, 지나가는 사람들 앞에 나체를 드러낸 부끄러움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내 주위의 정체성이 강한 사람들 중에 몇 명은 목욕탕 가기를 끔찍하게도 싫어 했드랬다. 모르는 사람들 앞에 자신의 알몸을 드러내고 그 사람들과 같은 물에 몸을 담그는 행위가 아득하게 현기증 난다고 말했었다. 결국 자신이 만들어 냈던 자신의 이미지가 걷히고 자신의 본질이, 감추어 두었던 허리의 살집이 드러나는 것이 몹시도 고통스럽다는 이야기다. '부끄러움'은 나에게 정신적인 대중 목욕탕 같은 기분을 가져온다. 내가 감추려고 노력했던 모든 것들이 허구였으며, 니체가 말한 바처럼 진리 이면에 감추어진 진리 의지, 실은 진리가 허구적으로 꾸며졌을 뿐이라는 사실이 형광등 아래 버짐 핀 피부처럼 허옇게 흩날린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고 처음으로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성기와 가슴을 가리고, 두려움에 벌벌 떨며 살게 되었다고 한다. 종교는 그것을 원죄라 선포하며, '모름' ''으로 바꾼 그 역사적인 사건 때문에 그들의 후손인 모든 인간은 원죄를 갖고 태어난다고 말한다. 신은 믿지만 종교는 믿지 않는 나로서는 종교가 재판한 '안 죄'에 대해 니체적인 조소를 품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안 죄'는 사실 '안 죄(죄 아님)'. 그러나 많은 일들이 그렇듯이, 반드시 누가 죄를 짓지 않아도 고통과 상처는 생겨 나곤 한다. 알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이분법, '앎과 모름'의 이분법이 선악과를 통해 인간의 정신 근본에 내려 앉았지만, 그것은 봄날 흩날리는 황사 바람처럼 참을 수 없이 가벼운 관념이다. 인간은 앎과 모름으로 세상 모든 것을 재단하지만, 사실 인간 자신은 앎과 모름 사이의 경계선에 걸쳐 있는 찰나의 존재에 불과하다. 그 불안정함, 아는 것도 알고 모르는 것도 알지만 사실,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그 모순으로부터 '부끄러움'은 온다.

 

형이 말한 것처럼, 본질을 드러내는 것은 두려움을 넘어서 공포다. 피부를 벗겨 내고 속살을 드러내는 것처럼 고통스럽고 털이 곤두서는 일이다. 그러나 존재의 본질적인 공포는 그보다 더 속에서부터, 비어 있는 허무함으로부터 온다. 피부와 살과 뼈와 내장을 모두 벗겨 낸 다음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자신을 한 꺼풀 한 꺼풀 벗겨 내 본질을 드러내는 일은, 사실은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 일이다. 내게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내 무의식이 눈치챌 때, 그렇게 내게 부끄러움이 찾아 오나 보다. 가진 게 없으니까, 쪽 팔려서.

 

 

 

 

■  부끄러움을 떨쳐 버리라 (Shake your shyness!)

                                                                                                                                                                                                                     WisdomEnglish, .정화

Shyness is a form of excessive self-focus,

a preoccupation with one's thoughts, feelings and physical reactions.  

부끄러움이란 일종의 지나친 자기중심주의 때문이다. 자기 생각과 느낌 그리고 몸 반응에 너무 얽매인 결과이다.

 

부끄러움의 뿌리는 지나친 자의식입니다. 부끄러움은 필요 이상의 지나친 체면의식 때문입니다. 부끄러움은 실체도 없고 정당한 이유도 없는 허상입니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부끄러워합니다. 최근 조사결과에 의하면 미국 성인 50% 정도 스스로 ‘부끄럼 타는 사람들’ [shy people]이라 규정하고 있답니다. 그리고, shy people’은 날로 증가 추세라 합니다.

 

우리네 한국사람들에 비해, 보다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 스타일을 구사하며 자유분방해 보이는 ‘미국사람들’이 이럴진대, 우리는 과연 얼마나 더 스스로 부끄럼 타는 사람들일까요? 얼마 전, 지구촌 전체를 가늠하는 ‘shyness survey’ 결과를 보면, 가장 부끄럼을 안타는 민족은 유태인 [31%] 그리고 가장 심하게 부끄럼 타는 민족은 일본인 [57%]으로 나와 있더군요. 한국인도 부끄럼이라면 일본인에  크게 뒤지진 않겠지요.

 

왜 부끄러워할까요?

 

지나친 ‘self-focus - , 자기에게 맞춰진 초점이 너무 강해서, 다시 말해, 너무도 ‘자기’라는 아상[我相]이 드높아서 그럴까요? 남들 앞에서 구겨질지도 모르는 체면을 부여잡고 턱 놓칠 못하기 때문일까요? 남들한테 따돌림 받기 싫고, 기왕이면 타인의 신망과 존경을 받고 싶어하는 이기심 때문에 부끄러움이 더욱 커지는 걸까요부끄러움의 뿌리가 지나친 자의식 때문이란 덴 수긍이 가지만, 글쎄 그게 다는 아닌 것도 같습니다.

 

Everyone is shy --- it is the inborn modesty that makes us able to live in harmony with other creatures and our fellows.  누구나 다 부끄러워한다. 이 부끄러움이라는 생래적 수줍음 덕분에 우린 다른 피조물들과 또 다른 사람들과 조화롭게 살 수 있는 게다.

 

 

누구나 다 생래적으로 태어나면서부터 갖고 있는 ‘실존적’ 수줍음. ‘실존적’ [existential]이라 함은 그 뜻을 한 마디로 헤아리기가 좀 버거운 말입니다. 굳이 해설하면 맛이 살짝 가는 그런 표현이기에, 그저 독자들의 저마다 해석에 맡깁니다. 내가 어디서 와 지금 뭘 위해 뭘 하고 있으며 그리고 돌아갈 때가 되면 과연 어디로 어떻게 돌아가는가 등등에 관한 질문들을 한데 묶어 ‘실존적’ 질문이라 한다니, ‘실존적 부끄러움’이 과연 뭔가에 대한 힌트는 조금 될까요?

 

별다른 지혜도 없이 무지하게 뻔뻔한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여겨온 우리네 정서로 보자면, 사실 부끄러움은 하나의 덕목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맹자 성선설의 뿌리가 된다는 ‘사단’[四端] 중 하나가 곧  羞惡之心 義之端也 [수오지심 의지단야] -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바로 의의 단서니라,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던가요? 다들 조금씩 부끄러워하니 그래도 세상이 그만큼 의롭게 돌아간다는 말씀입니다.

 

“소녀, 부끄럽사옵니다.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더욱 예쁘고 고혹스러워 보입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윤동주의 서시[序詩]를 읽으며 한없이 부끄러워집니다.

“네 이놈, 하늘 부끄러운 줄 알렸다!서슬 퍼런 호령에 움찔합니다.

“조상님들 보기 부끄러워 이를 어쩌나.애처로운 아낙네의 한탄에 덩달아 슬퍼집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문화에서 ‘부끄러움’이란 실존적 한[] 애절함마저 함의한 꽤 괜찮은 덕목 같기도 합니다. 양심에 비추어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부끄러워할 줄 아는 자세가 바로 무지한 뻔뻔함을 벗어난 의로움의 잣대가 된다니 ‘shyness’가  그저 내칠 물건만은 아니로군요.

 

Shyness is not who we are, but something we feel while we do the things we do.

부끄러움은 우리의 됨됨이가 아니다. 부끄러움이란 우리가 뭔가를 할 때 느끼는 그 무엇일 뿐!

 

덕목으로서의 부끄러움이나 실존적 수줍음으로서의 ‘shyness’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수줍음이 지속적 성격장애가 되어 사회생활에 지장이 되는 경우는 문제가 다릅니다. 부끄러움이 일시적 또는 상황적 [situational]이라면 별 문제가 아닌데, 이게 성격상 내내 지속되는 속성이 되어 버리면 심각한 사회공포증 내지 대인공포증을 유발하게 된다는 얘깁니다.

 

전보다 많은 사람들이 성격장애로서의 부끄러움을 호소하자, 보다 본격적인 연구와 처방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영어를 외국어로 공부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그 공포감’도, 그 저류에는 바로 이 감당하기 어려운 부끄러움이 도사리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니, shyness’에 관한 일반 처방들이 우리 영어후학들께도 효과만점의 처방전이 됨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죠.

 

앞서 밝힌 바대로, 사회적 부끄러움의 뿌리는 자존심과 자기중심적 초점입니다. Shyness is a form of excessive self-focus.  ‘익쎄~씨브 셀~프 포~우커스’ - 바로 그겁니다. 지금 눈 앞에  닥친 일 보다는, 그 일로 인한 나의 자존심이나 체면 또는 두려움 같은 감정의 군더더기들 때문에 부끄러움이 장애가 되는 겁니다. 부끄러움 자체에 빠져 버리기 때문에, 부끄럽지 않다면 쉽게 해낼 수 있었던 일도 그만 실패로 돌아 갑니다. ‘그저 했더라면’ 될 일을, 공연히 부끄러워하다 놓쳐 버립니다.

 

Shyness is NOT who we are. 부끄러움은 우리의 됨됨이가 아니다.

부끄러움은 내가 아니다. 내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일 뿐, 부끄러움 자체가 나는 아닌 것이다. 그러니, 처방은 간단합니다. Just do it! 그저 할 뿐! 나이키 커머셜이 그토록 명쾌하게 폐부를 찌르는 건, 보편지혜를 관통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모를 뿐. 그저 할 뿐.” 진짜 멋지고 통쾌한 말씀입니다.

 

Shyness is everywhere! 온통 수줍음이 편재한다. 알고 보면, 다들

수줍어합니다. 수줍지만, 그래도 할 뿐입니다. 에이브라함 링컨앨버트 아인슈타인, 밥 딜런, 브래드 핏트, 엘비스 프레슬리, 짐 케리, 쥴리아 로버츠, 니콜 키드먼, 탐 행크스, 러버트 드니로, 리차드 기어, …  이렇게 이어지는 유명 인사들 - 모두 수줍기로 이름난 분들입니다. 다들, 자기 분야에서 내로라 하는 사람들, 알고 보면 다들 부끄러움을 달래며 사는 여린 영혼들이랍니다.

 

The way you overcome shyness is to become so wrapped up in something that you forget to be afraid.    부끄러움을 극복하는 길은 하는 일에 푹 빠져 두려움 자체를 잊어 버리는 길이다.

 

딱히 그럴듯한 처방을 찾는다면 이미 중심을 벗어난 일입니다. 처방은 늘 병[] 속에 있습니다. 독 안에 해독약이 들어 있듯이 부끄러움 안에 부끄러움을 극복하는 처방이 들어 있습니다. 부끄러움을 무시하는 게 바로 명 처방입니다. 부끄러워하는 느낌을  지켜보는 주인공을 알아채면 됩니다. 수줍음이 주인이 아니라수줍음을 느끼는 그 한 물건을 알아채는 또 한 물건, 바로 그걸 똑바로 알아채면 부끄러움은 저절로 물러 갑니다.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탠포드 대학이 있는 팔로 알토 소재

Shyness Institute’에선 과연 어떤 프로그램으로 수줍음을 달래 주는지 한 번 살펴 볼까요?

 

Mindfulness Based Stress Reduction Program,

Instructor: Sally Reese

 

In this class you will:

Develop mindfulness skills to manage social anxiety.

Access the ability to be non-judgmental, compassionate, patient, present and aware.

Learn to respond, rather than to react, to stressful situations.

See that there is more “right” with you than “wrong” with you.

Learn to be present to your ever-changing body and mind states.

 

그리고, 프로그램 개요 밑에 다음과 같은 인용이 두 개 달려 있더군요.

Be where you are; otherwise you miss your life. - Buddha

지금 있는 곳에 존재하라, 아님 그댄 삶을 놓치게 된다. - 붓다

There is a crack in everything - that’s how the light gets in. - Leonard Cohen

만물엔 갈라진 틈이 있다. 그게 바로 빛이 드는 방법이다. - 레오나르드 코헨 [음유시인/가수]

 

영어 커뮤니케이션의 부끄러움 - 오직 한 처방뿐입니다.

부끄럽습니다. 압니다. 그래도 그저 할 뿐입니다.

I feel shy, and I will do it anyway!

 

 

 

■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필도 목사 설교, 2002.11.21 중에서 발췌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로마서 1 0:11, 13)

 

아이를 키우다 보면 아주 어릴 때는 벌거벗겨 놓아도 전혀 부끄러운 줄 모르고 잘 놉니다. 그러나 아이가 돌을 맞고 일년 이년쯤 지나면 언제부터인가 옷을 벗겨놓으면 부끄러워하고 싫어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아이가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그만큼 그 아이가 성장했다는 증거입니다.

누구나 이 세상을 살다 보면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많이 있습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어떤 일에 실패했을 때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주위의 사람들은 일이 잘 풀려 보란 듯이 성공한 반면에, 자신은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실패했을 때 자존심이 몹시 상하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

 

인생의 경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진정한 성공과 실패는 적어도 그 사람의 일생을 마칠 때가 되어야 알 수 있습니다. 인류역사를 돌이켜 보면 당대에는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으나 사후 몇 십 년 혹은 몇 백 년 후에 재평가되어 성공한 사람으로 기록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실패했다고 해도 절대로 절망하거나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정말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범죄하면서 죄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남을 속이고 사는 사람 정말 부끄러운 사람입니다. 남의 것을 도적질을 하여 잘 사는 사람도 부끄러운 사람입니다. 밤낮 노름에 빠져 사는 사람도 부끄럽기 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얼굴이 화면에 나올까 봐 옷으로 가리고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으려고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또 창녀로 자신의 몸을 팔아 먹고 사는 사람들도 정말 부끄러운 사람입니다. 또 부당한 방법으로 목적을 이룬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한때 성공했는지 모르지만 참으로 부끄러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짓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보니 전혀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뇌물로 구속되는 정치인들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런 문제로 TV에 등장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하나같이 부끄러워하는 사람을 본적이 없습니다. 구속되어도 자기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재수 없어 걸렸다고 항변하며 조금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끄러움 중에 가장 큰 부끄러움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입니다.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 요한계시록 22:15

이런 자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아 부끄러움을 당치 않게 될 것입니다

 

 

 

 

■  "부끄러움"

 

                                                                                                        

수필가, .오영(1907-1976)

(주제부끄러움의 한국적 아름다움          한국적인 정서인 고전적 부끄러움의 멋

 

(감상)  이 작품은 단순한 사춘기적 감정으로서의 부끄러움을 넘어서서, 가장 한국적인 정서로서의 부끄러움을 보여 주고 있다. 지은이의 시선이 담담하고도 단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도 고전적 부끄러움의 멋을 표상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일화적 경험의 순간 속에서 포착되는 인간사의 아름다움에 대한 발견이 이 수필의 은은한 격조로 연결된다. 별다른 부연이나 설명 없이, 또 과다한 감정의 노출 없이, 한국적 부끄러움의 장면을 그려 내고 있는 점이 이 수필의 묘미라 할 수 있다.                              (국어.나라, 현대문학 중에서)

 

         고개 마루턱에 방석소나무가 하나 서 있었다. 예까지 오면 거진 다 왔다는 생각에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이 마루턱에서 보면 야트막한 산 밑에 올망졸망 초가집들이 들어선 마을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넓은 마당 집이 내 진외가로 아저씨뻘 되는 분의 집이다.

 

  나는 여름 방학이 되어 집에 내려오면 한 번씩은 이 집을 찾는다. 이 집에는 나보다 한 살 아래인, 열세 살 되는 누이뻘 되는 소녀가 있었다. 실상 촌수를 따져 가며 통내외까지 할 절척(切戚)도 아니지만 서로 가깝게 지내는 터수라, 내가 가면 여간 반가워하지 아니했고, 으레 그 소녀를 오빠가 왔다고 불러 내어 인사를 시키곤 했다. 소녀의 몸매며 옷 매무새는 제법 색시꼴이 박히어 가기 시작했다. 그 때만 해도 시골서 좀 범절 있다는 가정에서는 열 살만 되면 벌써 처녀로서의 예모를 갖추었고 침선이나 음식 솜씨도 나타내기 시작했다. 집 문 앞에는 보리가 누렇게 패어 있었고, 한편 들에서는 일꾼들이 보리를 베기 시작했다. 나는 사랑에 들어가 어른들을 뵙고 수인사 겸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로 얼마 지체한 뒤에, 안 건너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점심 대접을 하려는 것이다. 사랑방은 머슴이며, 일꾼들이 드나들고 어수선했으나, 건너방은 조용하고 깨끗하다. 방도 말짱히 치워져 있고, 자리도 깔려 있었다. 아주머니는 오빠에게 나와 인사하라고 소녀를 불러 냈다.

 

  소녀는 미리 준비를 차리고 있었던 모양으로 옷도 갈아 입고 머리도 곱게 매만져 있었다. 나도 옷고름을 매만지며 대청으로 마주 나와 인사를 했다. 작년보다는 훨씬 성숙해 보였다. 지금 막 건너방에서 옮겨 간 것이 틀림없었다. 아주머니는 일꾼들을 보살피러 나가면서 오빠 점심 대접하라고 딸에게 일렀다. 조금 있다가 딸은 노파에게 상을 들려 가지고 왔다. 닭국에 말은 밀국수다. 오이소박이와 호박눈썹나물이 놓여 있었다. 상차림은 간소하나 정결하고 깔밋했다. 소녀는 촌이라 변변치는 못하지만 많이 들어 달라고 친숙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짤막한 인사를 남기고 곱게 문을 닫고 나갔다.

 

  남창으로 등을 두고 앉았던 나는 상을 받느라고 돗자리 길이대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맞은편 벽 모서리에 걸린 분홍 적삼이 비로소 눈에 띄었다. 곤때가 약간 묻은 소녀의 분홍 적삼이.

 

  나는 야릇한 호기심으로 자꾸 쳐다보지 아니할 수 없었다. 밖에서 무엇인가 수런수런하는 기색이 들렸다. 노파의 은근한 웃음 섞인 소리도 들렸다. 괜찮다고 염려 말라는 말 같기도 했다. 그러더니 노파가 문을 열고 들어 왔다. 밀국수도 촌에서는 별식이니 맛 없어도 많이 먹으라느니 너스레를 놓더니, 슬쩍 적삼을 떼어 가지고 나가는 것이었다.

 

  상을 내어 갈 때는 노파 혼자 들어오고, 으레 따라올 소녀는 나타나지 아니했다. 적삼 들킨 것이 무안하고 부끄러웠던 것이다. 내가 올 때 아주머니는 오빠가 떠난다고 소녀를 불렀다. 그러나 소녀는 안방에 숨어서 나타나지 아니했다. 아주머니는 “갑자기 수줍어졌니, 얘도 새롭기는.” 하며 미안한 듯 머뭇머뭇 기다렸으나 이내 소녀는 나오지 아니했다. 나올 때 뒤를 흘낏 훔쳐본 나는 숨어서 반쯤 내다보는 소녀의 뺨이 확실히 붉어 있음을 알았다. 그는 부끄러웠던 것이다.

 

 

 

 

■  존재의 의미, 인연의 사슬

                                                                                                                  글 Tora, 2010.6.

                                                                                                                  글 중에서 일부발췌

 

처음 둘은 만나서 하나가 된다.

하나가 된 그것은 시작이 되고 다시 형체로 변한다.

움직이던 형체는 살아 숨쉬는 생명으로 다시 나온다.

생명은 또다시 빛을 향해 깊고 어두운 계곡 밖으로 나와야 한다.

빛을 만나는 순간 존재는 인간으로써 살게 되는 의무가 주어진다.

 

존재는 온전한 인간이지만 아직 인간이 아니다.

인간은 인간다울 때 하나의 인격체로써 다시 존재를 하게 된다.

그리하여 인격체가 되기 위한 존재는 이끄는 손을 잡고 걷기를 처음 시작한다.

홀로 설 수 있는 인격이 되기를 바라보며 함께 나란히 걸어간다.

네 개의 손은 두 개의 손이 되어 온전한 인격체가 될 때를 함께 기다린다.

 

온전해 보이는 인격은 당당한 인간으로써 세상에 설 준비를 다시 하게 된다.

세상에 있는 자신의 길을 찾아 다시 배우고 익히며 앞으로 나간다.

그렇게 인격체는 본연의 길을 따라 자신인 존재의 의미를 찾아서 간다.

이는 세상과 인간 사이에 처음 있었던 서로의 약속이며 의무가 된다.

그리고 약속을 어기는 존재는 그리하여 존재성이 자연히 지워지게 된다.

지워져 가는 존재성으로 인간성을 잃어가며 그리하여 지워진 그 자리에

대신 어둠의 늪으로 채워지게 되는 것이다.

 

완성되지 못한 인격체는 실수를 하고 잘못하기도 한다.

먼저 앞서간 존재의 부모는 기본의 인격을 채워주는 역할을 한다.

혹여 실수를 해도 부끄러움을 느끼고 다시 고칠 수 있도록 가르친다.

부끄러움이란 인격체가 느끼게 되는 가장 기본의 인간성이 된다.

만약 부끄러움이 빠지면 이는 기본의 인격이 빠진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부모의 도리로써 의무를 제대로 이행 못한 것으로 간주된다.

 

부끄러움이 없다면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 존재할 진정한 의미를 잃게 된다.

혹시 부모가 처음부터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어디선가 잃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부모가 걸었던 발자취를 따라가면 어디선가 찾게 될지도 모른다.

 

......

 

 

진정 부끄러움을 알기에 숨겨야 했다면 이는 인간의 마음일 것이다.

그 부끄러움으로 비슷한 실수들을 피할 수 있게 된다면 이는 인간의 기본자세가 될 것이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감추고 계속 부정하게 부끄러운 짓을 행한다면 이는 인간의

마음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이 없다는 것은 이미 누군가가 잃어버려 지워졌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지워진 마음은 과거 속에 어딘가 숨겨져 들어가있을지 모른다.

너무도 부끄러워 지워 버린 과거 속에 함께 지워졌을지도 모른다.

 

다시 과거를 되찾는다면 어쩜 잃었던 부끄러움이 그 안에 그대로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부끄럼도 느낄 수 있어야 기본의 인격을 지닌 인격체로써 세상에 존재하지 않겠는가?

 

무심코 던졌던 굴욕과 치욕으로 그보다 더한 굴욕과 치욕을 되돌려

받은 것이라면 이는 어찌해야 되는 것인가?

스스로 일궈내지 못한 해방의 역사가 그래서 고삐물린 소처럼 이끄는 대로

가야 했다면 이제 어찌 그 고삐를 풀어 버릴 것인가?

 

 

식민이 신민으로 가면을 쓴 채 자유와 민주를 외치고 미래의 발 목울 잡고

있었다면 이제 어찌 그 발목을 빼내야 하는 것인가?

어느덧 정신을 담은 지주는 온데간데 없고 주춧돌도 다 빠지고 버팀목만

남은 채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고 있다면 어찌해야 하겠는가?

세상을 모르는 눈이 세상을 속이려 한다면 세상은 그 눈을 어찌 들여다보고 있겠는가?

 

자신을 제대로 들여다 볼 수 없는 눈이 세상을 본다고 말한다면 어찌 그 말을 믿을 수가 있겠는가?

부끄러운 줄 모르는 그 눈이 세상의 환한 빛을 어찌 당당히 바라볼 수 있겠는가?

 

세상은 한시도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

앞으로 가지만 어디를 향하든 방향은 상관이 없다.

언젠가 모두가 다 한곳에서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목이 잡힌 자는 절대 함께 갈수가 없다.

잡힌 그곳에서 영원히 멈추어 버렸으니 말이다.

 

선택은 누구에게나 주어진다.

그리고 그 선택에는 본연의 책임과 의무가 반드시 따라 나온다.

다하지 못한 의무와 책임은 그대로 이어져 내려가게 된다.

 보이지 않는 인연의 사슬은 인간은 그 누구도 끊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그 인연을 어찌해야만 되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