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덕과 윤리.........善/4. 나눔과 덕

나눔의 덕과 경제학

오갑록 2011. 4. 17. 16:04

정돈된 ...... 

 

■  나눔의 덕과 경제학

                 

 

□  나눔의 지혜

 

 엉클어 진 서로의 이해 타산을 잘 나눈다고 함은 항상 어렵다. 삶의 과정에서 크건 작건 간에 나눔을 잘 못하면 금수만도 못한 놈으로 낙인 찍히거나, 싸움의 빌미가 되기도 한다. 가족이나 친인척, 벗이나 동료, 거래가 이어지는 개인이나 조직, 국가 간에도, 나눔의 지혜는 우리들 인간 삶의 과정에 피할 수 없는 중요한 과제가 되곤 한다. 바늘 도둑이건 소 도둑만큼 큰 도둑이건 간에 훔치는 것도 나눔과 관련되는 것이요, 아이들 싸움이나 나라간의 전쟁도 서로 빼앗거나 빼앗기지 아니하려는 나눔의 과부족에서 기인한 것이 많다. 돈을 만들고 돈을 헤아리고 이를 주고 받으며 하는 상거래 행위도 결국 나눔의 현대기술 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 경영. 금융. 국세기본법. 세법, 관세법 …… 나눔의 지혜를 현실에 맞게 구분하며, 나눔을 운용하는 모습들이다.

 

합리적이지 못하고 힘으로 빼앗으려 들면 강도라고 하고, 주인장 모르게 훔치면 도적질이라고 한다. 규정, 법 협정 ...... 하는 따위의 나눔의 합리성을 위한 경계선을 그어 놓기는 하였지만, 그들은 도로의 차선처럼 항상 명확하지는 못하다. 그 선을 잘 읽고 해석하여 주는 기술자가 소위 교육자 변호사 세무사 판사 등으로 불리는 분들이다. 나눔의 선, 그 구분이 애매하고 어렵기 때문에 해석하고 판단하여 주는 기술자가 요구되는 것이다. 도덕과 윤리라는 개념 중 상당 부문이 이들을 주제로 한 정당한 나눔에 관하여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한 동안 일했던 "D 화학"에서의 경험담 이다. 80년대 초반 한 화학약품 공장을 인수합병 하였는데, 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당시 경제기획원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기소되어 처벌을 받은 적이 있었다. 정당한 경쟁을 방해하는 위법행위라고 하는 것이다. 도둑이나, 강도나 마찬가지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해당 품목의 독과점 형성으로 인한 해악이 예상되기도 하지만,  설비나 조직 등 조업능력을 확충 함으로서, 규모의 경제를 고려하고, 품목의 가격 경쟁력, 품질 경쟁력, 생산성 향상 등을 통한 국제경쟁력 배양과 같은 긍정적인 면은 무시되고 말았다. 공정거래법의 기업합병 위반사례 시정명령 제1호의 사건으로 남고 말았다. 관련 법규 교육 시에는 사례로서 교육 되곤 하는 쓴 경험이 되어 버렸다. 

 

그 즈음 사례로 기억되는 한가지가 더 있다. 특정 품목의 일반관리 판매비가 30%를 넘겼다며 비용의 과도한 지출을 문제 삼아, 행정당국이 과징금을 물린다는 판정을 했다. 정당한 상행위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품 매출시 비용으로 얼마를 쓰고, 이익은 얼마를 남겨야만 도둑이 아니란 말인가? 1% 미만의 티끌만큼 이익을 남기며 수행하는 사업이 있는가 하면, 때로는 수백 배씩 남기며 하는 첨단기술 사업도 있다. 우리는 그들을 모두 도둑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이들 사례는 당시의 행정당국이 사례의 기업경영이나 재화의 나눔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자유경쟁, 자유무역주의, 자유방임론과 같은 경제학원론과 어긋남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시대적 사회적 배경이 각기 따로 있으니 수긍 가는 면도 있을 듯하고......

 

경제나 기업경영에서 이해 당사자 상호간 합의와 함께, 그 사회가 인정하는 합당한 나눔이란 무엇일까?

재화나 부를 상도덕에 어긋남이 없이 공평하고 정당하게 나눈다고 함은 그렇게 만만한 일 만은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정당하고 떳떳한 부자를 찾기가 쉬운 일은 아니라는 뜻이 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를 보는 시각이 모든 계층에서 모두 곱지만은 못한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설령, 내가 덕이 있고 덕으로 부를 쌓아 왔다손 치더라도, 다른 욕심에 찬 눈으로 바라보는 그 부의 모습은 검은 구석, 그늘진 구석이 더 돋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담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은 나눔의 본성에 대한 사람의 감정을 철학적 윤리적 모습으로 정리하여 본 듯하다.

 

경제학 경제원론 첫 방에 나오곤 하는 아담 스미스의 자유무역주의는 자유방임론으로도 불리는데, 나눔의 관계가 상호 자유주의에 입각할 때 사회의 풍요로움을 이끌 수 있을 것이라는 경제학의 기본 틀을 세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개인과 사회의 이익 극대화, 풍요로운 사회를 기치로 아담 스미스가 제창한 정당한 나눔에 관한 자유무역주의 원론들 중,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과 그 의미들을 이곳 저곳에서 간추려 본다.

 

     2008.   .   .

     오갑록

 

 

■  아담 스미스의 도덕감정론

 

 

인간은 아무리 이기적이라 해도, 그의 본성에는 특정 원칙이 존재하고 있어 타인의 행운에 관심을 가지고 타인에게 행복을 안겨주고 싶어한다. 비록 자신은 타인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해도 말이다.

                                                   A.Smith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  도덕 감정론]

 

 

.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

 

부유하고 권세 있는 사람들을 거의 숭배에 가깝도록 경찬 하는 성향, 그리고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을 경멸하고 무시하는 성향은, 신분을 구별하고 사회 질서를 확립하고 유지하는데 필요하다고 할 수 있으나, 동시에 우리의 모든 도덕 감정을 타락시키는 가장 보편적인 원인이다.

 

지혜와 덕성에만 바쳐야 할 존경과 경탄으로 부와 권세를 대한다는 것, 그리고 악덕과 어리석음에 쏟아야 할 경멸이 흔히 부당하게도 가난과 나약함에 보내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모든 시대의 도덕 군자들이 불만을 가져왔다.

 

우리는 존경 받을 만하기를, 또 존경 받기를 바란다. 우리는 경멸 당할 만한 것, 또 실제로 경멸 당하는 것을 모두 두려워한다. 그러나 세상에 나가보면 결코 지혜와 덕성만이 존경 받는 것이 아니고, 악덕과 어리석음만이 경멸 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의 존경 어린 관심이 지혜와 덕망 있는 사람에게보다는 부유하거나 권세 있는 사람에게 더 강하게 쏠리는 경우를 자주 본다. 권세 있는 사람들의 악덕과 어리석음보다 순수하고 양심적인 사람들의 가난과 나약함을 더 경멸하고 있음도 자주 목격한다.

 

존경과 경탄을 받을 만 하게 되는 것과 그것을 획득하고 향유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야심과 경쟁심의 목적이다. 이처럼 모든 사람들이 그토록 바라는 목표를 이룰 수 있는 각기 다른 두 길이 우리에게 열려있다. 하나는 지혜를 연구하고 덕을 쌓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부와 권세를 얻는 길이다.

 

우리의 경쟁심에도 두 가지 다른 성질이 있다. 하나는 거만한 야심과 과시적 탐욕이고, 다른 하나는 소박한 겸양과 공평한 정의이다. 우리 자신의 성격과 행동을 형성해갈 두 개의 다른 모델, 두 개의 다른 모습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 하나는 색채가 요란하고 화려하며, 다른 하나는 윤곽이 보다 정확하고 섬세하며 아름답다. 한 쪽은 방황하는 이들의 이목을 끌지만, 다른 쪽은 매우 탐구적이며 주의 깊은 관찰자만이 알아볼 수 있다.

 

대개 현명하고 덕이 있는 사람들은 유감스럽게도 선택된 소수에 불과하며, 이들은 확고하고 진정한 지혜와 덕을 숭배하는 사람들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부와 권세를 경탄하고 숭배하지만, 아주 이상한 것은 그 사람들이 대부분 그 부나 권세와 가장 무관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

 

 

□  아담 스미스

 

 아담 스미스의 자유주의는 경제에만 국한되지 않고 철학, 윤리학, 신학, 법학까지 포괄하는 하나의 종합적인 체계이다. 스미스는 1751년에 글래스고 대학의 논리학 교수로 취임했지만 1752년에 도덕철학(moral philosophy) 교수로 자리를 옮겨 1764년에 버클루 공작의 가정교사로 취임하여 동 대학을 떠날 대까지 도덕철학을 가르쳤다. 당시 이 대학의 도덕철학과정은 자연신학(natural theology), 윤리학(ethics), 정부학(jurisprudence)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여기서 ‘jurisprudence'는 요즘 보통 법학이나 법철학으로 번역되지만 당시는 정치학, 행정학, 경제학 등 요즘의 사회과학 전체를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이근식: 1999)

 

스미스의 경제학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제학이 포함되었든 그의 도덕철학 전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당시 도덕철학은 자연신학, 윤리학, 법학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중에서 그의 윤리학은 『도덕감정론』에 정리되어 있고 법학은 『법학강의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강의록들은 법학과 경제학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스미스의 도덕철학 강좌는 신학, 윤리학, 법학, 경제학 네 부분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중 경제학 부분만을 발전시켜서 후에 출판한 것이 『국부론』이다.

 

  이처럼 스미스의 경제학은 그의 신학과 윤리학과 법학의 기초 위에서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자유주의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먼저 그의 도덕철학의 전 체계를 살펴 보아야 한다.

 

 

 

□   문제제기 (도덕 감정론의 방법론과 동감의 원리에 대하여)

                                                                                                                                황규선 

『국부론』에서 아담 스미스는 이기적인 개인들간의 자유로운 상호관계가 풍요를 가져올 것이라는 주장에 근거하여 경제학 체계를 세웠다. 여기서 스미스가 본 개인은 물질적 동기에 의해 움직이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도덕감정론』에서 스미스는 도덕적 판단의 방법, 즉 동감이 사회내의 개인들간의 개별적 차이를 줄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논하고 있다. 여기서 개인은 타인들과 동감에 기초하여 자신의 행동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한 사람에 의해 집필된 『국부론』과 『도덕감정론』이 이와 같이 양립될 수 없는 모순이 존재하는 것은 불가사의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사실 19세기에 독일학자들은 이 수수께끼를 ‘아담 스미스 문제(Das Adam Smith Problem)’라 불렀다.

 

이와 같이 잘 알려진 ‘아담 스미스 문제’는 『국부론』에서 가정된 인간본성은 이기심임에 반해, 『도덕감정론』은 동감이라는 해석에 근거한다. 여기서 동감은 자비롭거나 이타적인 인간의 본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이러한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스미스의 인간본성 개념은 모순적인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 ‘문제’를 해석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 초기의 일반적인 해석은 스미스가 『국부론』(1776년 처음으로 출판됨)을 쓸 당시 그가 『도덕감정론』(1759년 처음으로 출판됨)에서 제시했던 인간본성의 견해를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엄밀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스미스가 『국부론』을 집필에 전력하고 있을 당시에 그는 또한 『도덕감정론』 3(1767), 4(1774)을 발행했다. 그리고 『국부론』이 출판되고 난 이후에도 그는 두 개의 증보판(각각 1778, 1790)을 발행했다. 사후에 출판된 『도덕감정론』 최종 판은 그의 기본명제에 대한 수정 없이 『국부론』과 『도덕감정론』에서 제시한 견해를 동시에 견지하는 중요한 증보판이다. 그의 초창기 교수 시절 그의 제자들에 의해 필기가 된 강의노트들은 인간본성에 관한 스미스의 견해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는 입장을 더욱 약화시킨다. 이기심과 동감 모두 초창기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담 스미스에 대한 그 이후의 연구들은 이러한 ‘문제’가 의사문제(pseudo-problem)라고 보았다. 독일학자들이 스미스의 동감개념을 본능적인 자비 혹은 이타주의로 해석한 것은 오류라는 것이 오늘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스미스는 이 개념이 연민 또는 동정으로 잘못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명시했다.

 

연민 또는 동정은 우리가 타인들의 슬픔에 공감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사용되는 용어이다. 그 의미에서 있어 아마 원래 동일할지도 모르지만, 이제 동감은 열정에 대한 우리들의 공감을 나타내는 것으로 적절하게 사용될 것이다.”

 

『도덕 감정론』을 세심하게 검토해 보면 스미스에게 있어 동감은 도덕적 판단이 이루어지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스미스의 동감은 하나의 판단을 형성하는 것과 관련된 감정이입 또는 반성적인 상상이라 부르는 것이 보다 적절하다. 따라서 스미스의 동감개념이 스미스가 의도한 바대로 이해된다면 적어도 독일학자들이 인식했던 방식의 모순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이 곧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사이에는 어떠한 모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아담 스미스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았으며, 『도덕감정론』은 전체적으로 『국부론』과 충돌할 뿐 아니라, “『국부론』은 자연법과 매개됨에 반해, 『도덕감정론』은 시민 공화주의의 문맥을 가지기” 때문에 현재 우리들은 “새로운 … 아담 스미스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는 새로운 해석이 생겨난 이유도 사실 거기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견해들의 정당성 여부는 지금까지와 같이 스미스의 두 저서가 모순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스미스의 사상은 최근의 스코틀랜드 계몽사상의 연구동향이 제시하듯이 무엇보다 그가 살던 당시의 스코틀랜드 현실에서 스미스가 직면했던 사상과제와 그 자신의 사상형성의 과정에 근거해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되며, 그러한 사상을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전제로서 스미스 사상의 기본적 구조 그 자체가 『도덕감정론』, 『글래스고우강의』, 『국부론』 등 세 저서의 상호관계 속에서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즉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스미스의 이론체계에 대한 통합적인 논의가 필수적이다.

 

 

 

■  아담 스미스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

 

 

중상주의자들은 결국 상인자본의 이익을 옹호했다. 18세기에 이르자 영국에서는 중상주의 정책으로는 더 이상 자본주의를 발전시킬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프랑스의 농촌부르조아지는 수적으로 적었고 영향력도 미미했다. 중상주의를 압도할 수 있는 힘은 산업부르조아지에서 나올 수 있었다. 산업부르조아지의 성장과 함께 경제이론의 영역에서 중상주의를 대체한 것이 고전파였다. 아담 스미스는 바로 고전학파의 창시자이다.

 

 

□  아담 스미스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

 

아담 스미스(1732-1790)는 산업혁명의 전야인 1732년 영국의 스코틀랜드에서 출생했다. 14세 때 글래스고우 대학에 입학했으며 거기서 그리스 문학과 수학도덕철학 등을 공부했다. 중상주의자였던 허치슨으로부터 사회과학 일반에 관한 도덕철학을 수학했다. 1740년에 옥스퍼드 대학으로 옮겼는데 잉그랜드 지역은 스코틀랜드지역보다 농업 및 기타 경제발전에서 앞서가는 곳이었다. 여기서 그는 데이비드 흄의 인간 본성론에 영향을 받는다.

25세가 되던 해 에딘버러에서 강사자리를 얻어 수사학을 가르쳤으며 26세에 글래스고우 대학에 교수로 취임했다. 29세에는 스승인 허치슨 교수로부터 도덕철학강좌를 이어 받았는데 25세에 취임한 이래 아담 스미스의 강의는 크게 4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제1부는 자연 철학 제2부는 도덕감정론 제3부는 정의론 제4부는 편의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대적 의미에서 보면 제1부는 산학 제2부는 윤리학 제3부는 법학 그리고 제4부는 경제학으로 구성된 것 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아담 스미스는 프랑스를 여행할 기회를 가져 중농학파 학자들 그리고 볼테르와 같은 프랑스 사상가들과 교류할 기회를 가졌다. 이후 아담 스미스는 약10년 동안 국부론의 저술 에 전념했으며 철학, 역사, 정치 등의 연구에 몰입했다. 1787년에는 글래스고우 대학의 총 장이 되었으며 1790년에 서거하였다.

아담 스미스가 활동했던 시기는 정확히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의 시기였다. 도시에서는 상인자본이 성장하고 있었고 농촌에서는 매뉴팩쳐가 새로운 생산형태로서 광범하게 등장하고 있었다. 아담 스미스는 매뉴팩쳐 시대의 경제학자라고 할 수 있다. 분업에 기초한 제조소 형태를 띤 대규모 산업자본주의의 탄생은 아담 스미스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한 배경이 되었다. 첫째, 사회전체를 분업이 행해지는 거대한 작업장으로 보았다. 둘째, 상업 및 농업노동과 더불어 공업노동의 중요성을 파악할 수 있었다. 셋째, 서로 다른 생산분야들간의 교환을 동일량의 노동지출에 기초한 등가생산물의 교환으로 보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넷째, 상이한 사회계급에게 돌아가는 여러 형태의 수입(임금, 이윤, 그리고 지대)을 정확히 분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부론이 나온 1776년은 산업혁명이 이제 막 개시되는 시기였을 뿐이다. 산업혁명 이 시작되기도 전에 산업혁명 이후 작용할 경제의 원리를 국부론에서 미리 서술하고 있는 것은 아담 스미스의 천재성을 확인시켜준다고 하겠다.

 

 

□  아담 스미스의 사회경제 사상

 

. 자연권

 

프랑스의 중농주의 학자 케네는 자연권에 어긋나는 정책 내지 법률이 시행되면 국가는 파멸할 것이고 자연권이 이행될 경우 경제는 발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담 스미스 는 정치경제가 자연권에 예속된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정치 체'(political body)라 표현함으로써 정치경제는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라는 인식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인식은 비로소 정치경제학이 하나의 독립된 과학으로 성립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케네와 아담 스미스의 인식상의 차이는 두 나라의 경제적 상황차이를 반영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자연권에 어긋나는 법률의 시행으로 자본주의의 발전이 지체되고 있었지만 영국에서는 그러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상당히 진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아담 스미스 이래 자연권으로부터 정치경제가 독립되어 이를 대상으로 하는 독립된 정치경제학이 성립할 수 있게 되었다.

 

. 경제인과 사회 및 경제적 자유주의

 

정치경제가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힘 즉 경제가 발전할 수 있는 힘을 아담 스미스는 '모든 사람이 자기 생활상태를 더욱 좋게 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는 힘'에서 찾았다. 일반적으로 경제인은 '다른 사람과의 자유경쟁을 통하여 자신의 이익을 독립적으로 추구하는 인간'으로 정의된다. 아담 스미스는 독립상품 생산자를 경제인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인식은 사회적 조건이나 역사적으로 변화하는 인간형을 상정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몰 역사적인 인간형에 대한 규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형의 상정에서 역사성의 상실 즉 몰 역사성은 고전학파의 결정적 결함으로 지적된다.

 

사회는 개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인은 자기에게 이익이 있을 때에만 교환을 통해서 타인과 관계를 한다. 이러한 교환은 인간의 중요한 본성이다. 따라서 사회는 개인이 이기심에 의해 교환을 하는 교환체이다. 즉 사회의 기원을 개인이 갖고 있는 이기심에서 찾은 것이다. 사회는 개인주의적이고 따라서 합리주의적이다.

 

한편 뒤에서 살펴보듯이 스미스는 분업으로부터 국부론을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방법 속에서 아담 스미스는 사회전체를 서로를 위해 일하고 노동생산물을 상호 교환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노동사회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회를 각 개인들이 노동하며 교환하는 사회라는 개념으로 파악함으로써 스미스는 공업의 중요성을 알 수 있었고 노동가치이론에 접근할 수 있었다.

 

사회를 생산활동을 통해 서로 의존하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노동사회로 간주함으로써 스미스는 중상주의자들과는 달리 상품과 화폐의 교환이 궁극적으로는 다양한 생산자들이 노동을 투입해 자신이 생산한 생산물들을 교환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또한 노동생산물의 교환 속에는 여러 생산자들의 생산활동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인식은 경작자로부터 사회의 다른 계급(즉 지주와 공업계급)으로 상품이 이동하는 것을 자연의 물적 소재가 단순히 이동하는 것으로 보았던 중농주의자들의 편협성을 극복할 수 있게 했다. 나아가 모든 생산자들이 서로 의존한다는 생각은 모든 생산부문이 동등한 지위에 있는 생산분야라는 인식을 갖게 했다. 여기서 중산주의자들이 무역에 부여했던 특권이나 중농주의 자들이 농업에 부여했던 특권적 지위는 그릇된 것임이 분명하게 된 것이다. 각 생산분야 사이의 교환은 등가물의 교환이다.

 

아담 스미스는 자유방임주의와 낙관주의를 피력했다. 개인의 이익이 모든 경제제도의 기원이고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경제발전의 원동력이라 생각한 아담 스미스는 이를 매개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경제적 자유주의는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사상이었다. 진보적이었던 경제적 자유주의사상은 이후 세이, 바스띠아 등에 의해 체제 옹호 적은 것으로 변질된다.

경제이론에 대한 아담 스미스의 사상은 모든 경제현상은 자연적이고 내부에 고유한 규칙성을 갖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규칙성은 경제인의 불변의 성격에 기초하고 있다.

 

……

 

아담 스미스는 모든 사 물에는 자연적인 경로가 있다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경제발전에도 자연적인 경로가 있다. 이러한 경제발전의 자연적인 경로를 제약하고 있는 것이 중상주의 정책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스미스는 직업이전의 자유를 제한했던 도제법이나 노동이동의 자유를 가로막는 정주법의 철폐를 주장했다.

또한 상속법의 철폐를 통해 소유권의 자유로운 이전을 보장할 것을 주장했으며 국내상업의 발달을 위해서는 지방관세법을 폐지해야 한가고 생각했다. 아울러 자유무역을 위해 관세를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익을 우선하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공익도 발전한다고 아담 스미스는 생각했다.

이러한 사상은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와는 다르다. 프리드만을 중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는 자유방임과 시장원리를 주자하는 점에서는 자유주의적 입장에 서있다. 그러나 아담 스미스 의 자유주의는 당시의 생산력 발전을 제약하고 있었던 규제를 철폐하려는 진보주의적인 사상이었던데 반해 오늘날의 신자유주의는 경제문제 공해 스태그플레이션 등의 문제를 시장 원리로 해결하려는 보수적인 사상인 것이다.

 

 

 

 

■ 아담 스미스 (Adam smith)

                                                                                                                                     퍼온글

 

 철학자로서의 생애

 

  아담 스미스는 1723,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몇 달 뒤에 스코틀랜드의 키어칼디(Kirkaldy)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별 사건 없이 그저 조용했다. 열 네 살 때 글래스고우대학에 입학했다. 여기서 그는 옥스퍼드대학의 장학금을 타 낼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옥스퍼드대학에서는 6년이란 긴 세월을 보냈지만 동료학우들의 낮은 지적 활동 수준과 저속한 도덕성에 크게 실망하였다. 1751년 그는 강의를 하기 위해 에딘버러 대학에 갔다. 그리고 그 다음해 갑자기 빈자리가 생겨서 글래스고우 대학의 윤리학교수가 되었다. 행운이 이 젊은 교수에게 따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 다음해에 아담 스미스가 가장 좋아했던 과목인 도덕철학의 교수자리가 비게 되었고, 바로 그 자리에 아담 스미스가 임명되었던 것이다. 그는 윤리학을 강의했다. 그리고 1759년에 그의 저서인 도덕 감정론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이 출판되었다. 오늘날의 독자에게는 이 책이 구식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흥미 있는 책이기도 한다. 이 책의 근본사상은 윤리체제는 개인의 인간관계로부터 자연스런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18세기의 자연법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는 견해이다. 그러니까 개인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타인의 반응을 관찰함으로써, 어떤 행동이 적합한가 부적합한가를 판단한다. 그리고 나서 사회와 개인에게 모두 유익한 행동유형을 승인하면서, 사회적 합의는 발전한다. 이 과정이 발전해서 초기의 타인지향적 인간행위 이론 (other-directed theory)을 낳는데 이른다. 아담 스미스의 이 책은 즉각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으며, 지식인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아담 스미스의 명성은 높아졌으며, 심지어 그의 밑에서 공부하기 위해 유럽 대륙으로부터 학생들이 오기까지 했다. 그는 경제학에 관한 책을 쓰는 작업에 착수했으며, 대학에서는 경찰, 정의, 세입 그리고 국방 에 대한 강의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큰 행운이 찾아왔다. 나중에 재무상으로 아메리카 독립전쟁 발발의 한 원인이 되었던 차세와 그 밖의 세금에 책임이 있었던 정치가인 찰스 타운센드(Charles Townshend)가 돈 많은 과부와 결혼을 하였으며, 10대의 의붓아들도 얻게 되었다. 버크루치라는 이 젊은 공작에 대한 적절한 교육이 매우 중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타운센드는 최고의 선생을 구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이전에 아담 스미스의 저서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젊은 공작의 개인교사로 삼기 위해 마흔 살의 철학자에게 접근했다. 철학자 데이비드 흄을 포함한 그의 친구들은 아담 스미스가 그 자리를 받아 들인 것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자리는 프랑스에서의 3년 간의 체류와 1년에 300파운드씩 평생토록 연금을 지급하는 것이었다. (300파운드면 약1,500달라 정도인데, 그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프랑스에서는 대부분을 뚤루즈(Toulose)에서 보냈다. 그곳 생활에 싫증이 난 아담 스미스는 경제학에 대한 저서를 쓰기 시작했다. 그 뒤 파리에서 아담 스미스는 당시 경제학에 대한 저서를 쓰기 시작했다. 그 뒤 파리에서 아담 스미스는 당시 지도적인 중농주의자인 케네와 튀르고를 만나, 이들의 이론을 토론했다.

 

스코틀랜드로 다시 돌아온 아담 스미스는 그의 연금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저술작업을 계속했다. 그의 친구들은 그의 저서가 언제 끝나게 될지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담 스미스는 끝없이 그 일에 매달리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마침내 1776, 국부론(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the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이 출판되었다.

 

이 책은 성공적인 것이었지만 인기는 없었다. 비록 일부 사람들에 의해 읽혀지고 찬사를 받았지만 일반대중들은 무시했다.  윌리암 피트(William pitt, 1759~1806, 영국의 정치가, 수상을 역임했음. 통칭 대피트의 아들인 소피트임) 1780년대 후반의 그의 조세안의 일부를 바로 아담 스미스의 사상에 근거를 두었던 것 같다. 그러나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이라는 새로운 과학을 세우려는 데 여념이 없었던 새로운 세대의 저술가들이 아담 스미스를 그들의 과학의 창시자로 자리잡게 한 것은 아담 스미스가 죽은 지 20년이 지나서였다. 그 동안 국부론의 저자인 아담 스미스는 스코틀랜드로 돌아가, 1778년에는 그의 아버지가 가졌었던 지위인 관세변무관에 임명되었다.  1790년의 그의 죽음은 그의 동시대인들에게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지나가 버렸다.

 

아담 스미스는 극적인 삶은 살지 않았다. 세 살 때 그는 몇 시간 동안 집시들에게 유괴된 적이 있었고, 어른이 되어서는 단 한번 잠깐 동안 강도와 마주친 적이 있었을 뿐, 그밖에는 거의 모험적인 일이 없었다. 그는 전형적으로 멍한 사람이었다. 어느 일요일 아침, 실내복을 입은 채 고향인 키어칼디의 정원을 거닐면서 무언가 골똘한 생각에 빠졌다. 그는 그런 상태에서 길을 잘못 들어, 교회 종소리로 정신이 들 때까지 무려 15마일이나 던펌라인(Dunfirmline)쪽으로 걸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그의 특색 없는 성격에도 불구하고, 국부론은 위대한 저서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당시 사회철학의 핵심적 문제를 설명했기 때문이다.

 

 

  사회철학의 문제

 

18세기 사회철학의 핵심적 문제는 사회질서가 어떻게 개인주의 사회에 잠재해 있는 혼란 가운데서도 성립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일반인의 일상생활에 깊숙이 침투한 시장경제의 확대로 중세적인 각종 사회적 지위와 의무가 점차적으로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야기되었다.

 

중세에는 각자는 각종 조직된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자기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에 따른 권리와 의무가 있었다. 영주와 농민, 제분업자와 성직자는 타인에 대한 전통적 내지 세습적 의무를 바탕으로 하여 기능을 계속 발휘해 온 마을 공동체의 각 구성요소였다. 기술자와 상인은 길드의 회원이었으며 도시의 시민이었다. 그리고 각 기술자와 상인은 실제로 그랬었는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길드 또는 도시의 헌장에 바탕을 둔 각자의 위치와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종교의 교리는 자연의 질서와 사회의 질서를 모두 받쳐 주는, 신에 의해 주어진 보편적인 자연법이 있다고 주장했다. 만약 다른 사람들은 기도만 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은 소수의 지배자를 떠받치기 위해 일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이 모든 필요한 일을 수행하도록 고안된 사회질서를 수립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중세 사회체제는 급속도로 사라지고 있었으며, 18세기 중엽에는 런던과 같은 번잡한 도시들에서 상당부분이 이미 사라져 버렸다. 도시는 국제무역, 금융 및 재정, 그리고 그 밖의 돈벌이를 지향하고 있었다. 그러면 무엇이 조직된 집단으로 구성된 사회체제와 기존의 권리 및 의무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는가? 사회가 자신의 기호만 따르고 다른 사람을 능가하려는 개인의 단위 - 그리고 이기적인 단위 - 로만 구성된다면, 과연 사회는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이 같은 개인주의적 혼란의 분위기에서 어떻게 사회적 조화는 달성될 수 있을까?

 

 

  영국사회의 개인주의

 

18세기의 영국의 정치의 영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생활영역에서 개방적인 사회였다. 개인적인 창의와 혁신은 대중적 현상이 되고 있었다. 실용적인 기예와 미술부문에 있어서, 그 당시는 영국 도자기와 치펜데일 쉐라톤 같은 대 가구 제조업자들의 황금시대였다. 영국의 회화는 게인즈버로우(Gainsborough), 레이놀즈(Reynolds), 롬니(Romney), 그리고 그 밖의 화가들로 절정에 이르렀으며, 헨델은 그의 위대한 오라토리오를 작곡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형태의 문학도 등장하였다. 소설(데포의  로빈스 크루소 , 리차드슨의  파멜라 (영국 최초의 서간체 소설),휠딩의  톰 죤스) 새로운 형태의 전기(보스웰의 사뮤엘 죤슨의 생애), 대중적인 역사(흄의 영국의 역사, 기본의  로마제국 흥망사), 그리고 정기적인 수필집 (애디슨과 스티일이 만든 태틀러 앤드 스펙테이터에 실린 수필들)등이 모두 이 때에 나왔다. 최초의 일간지가 런던에서 나왔으며, 최초의 월간지도 등장하였다.

 

대영제국은 캐나다, 지브랄타, 말타, 그리고 세일론의 획득으로 더욱 확대되었다. 로버트 클라이브(Rovert Clive, 1725~1774, 동인도회사의 일개 사무원으로부터 입신한 영국의 장군, 정치가, 그의 plassey  에서의 승리가 인도에서의 영국의 지배권을 확립시켰음)와 워렌 헤이스팅즈(Warren Hastings, 1732~1818, 영국의 정치가, 최초의 인도 총독)가 인도에서의 영국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제임즈 쿠크(James Cook, 1728~1779, 영국의 항해가) 10년 이상 동안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에서부터 캘리포니아와 하와이에 이르는 태평양 일대를 탐험하였다. 죠지 뱅쿠버(Jeorge Bancourver Bruce)는 아메리카의 북서 해안을 탐험하였다. 그리고 제임즈 비루스(James Bruce)는 아프리카를 관통하는 대담한 탐험을 하여 나일강의 근원을 발견했다. 상업과 해군은 18세기 초에 덴마크를 능가하였으며, 암스테르담 대신에 런던이 유럽의 조선과 금융의 첫 번째 중심지가 되었다.

 

각종 기술변화가 생산주의(industrialism)의 기초를 닦고 있었다.

 

면직물 산업은 근대적 형태의 의복제조업을 창조한 일련의 기술혁신에 의해 변모되었다. 기술혁신은 산업혁명의 길잡이가 되었고 랭카셔와 리버풀을 거대한 제조업 및 조선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1738년에 존케이(John Kay)는 직조의 속도를 대단히 빠르게 한 비사(flying shuttle)를 발명해냈는데 이 때문에 방계의 부족현상이 발생했다. 그 다음 무식한 방직공이자 목수였던 제임즈 하아그리브즈(James Hargreaves)가 방적기를 발명했다. 그 후 몇 년 뒤에 더욱 개선된 방적기가 이전에 이발사였던 리차드 아아크라이트(Richard Arkwright)에 의해 개발되었다. 1779년에 소농의 아들이었던 사뮤엘 크롬톤(Samuel Crompton)은 최상품의 실을 이전보다 훨씬 많이 생산할 수 있는 뮤울"(mule) 정방기를 완성시켰다. 크롬톤의 발명품은 도둑질을 당했으며, 그는 죽을 때까지 가난했다. 그러나 그는 영국의 방직공업에 가장 큰 자극을 주었다. 많은 양의 방직용 실을 생산할 수 있게 됨에 따라 면화수요가 크게 증가하였는데 미국에서는 일라이 휘트니(Eli Whitney)가 목화를 기계로 세척하는 조년기(cotton gin)를 개발했다. 전 세계적으로 목화재배는 크게 확대되었고, 미국에서는 또한 목화재배지의 노예제도도 확대되었다.

 

산업의 혁신에 앞서 농업에 있어서의 새로운 기계류와 기술의 개발이 있었다. 독농가였던 제스로 털(Jethro Tull) 18세기 초에 씨앗을 심는 파종기를 개발하였으며, 이랑을 지어서 재배하는 방법을 도입했다. 아담 스미스의 후원자의 할아버지이자 저명한 정치가였던 찰스 타운쉔드(Charles Townshend) 1730년에 정계에서 은퇴한 뒤 여생을 새로운 작물, 특히 순무나 클로버 같은 사료용 작물의 개발에 힘의 기울였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획기적 변화였다. 왜냐하면 이전에는 토지가 그 탈옥성을 회복하기 위해 묵혀 두어야만 했는데, 이제는 사료용 작물을 재배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러면서도 휴경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성공적인 독농가인 로버트 베이크웰(Robert Bakewell)은 가축사육의 기술을 개발하였으며, 개량된 가축경영관리 방법을 도입하였다. 유명한 농업저술가인 아더 영(Arthur Young)은 그의 일생의 대부분을, 새로운 영농방법을 출판하고 또한 그 새로운 방법의 채택에 필요한 엔클로저(enclosure: 울타리를 두른 소유지. 영국에서 15세기~18세기에 걸쳐 행해진 농업혁명에서, 대지주가 분산되어 있는 소유지를 매매 또는 교환에 의해 한곳에 집중시켜 울타리를 쳤던 운동)를 옹호하는 데 보냈다.  새로운 영농기술은 대규모의 농장, 자본의 증가, 그리고 울타리가 쳐진 농토를 필요로 했다. 그래서 1760년부터 1830년까지 영국의 개방된 토지들은 광범위하게 울타리가 쳐졌던 것이다. 소농가 마을의 공동토지는 대규모 농지 속에 해소되었다. 농업 생산이 증가되고 생산비가 낮아졌다는 것은 더 많은 인구가 성장하고 있는 공업도시의 노동력으로 참가할 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이러한 것들은 단지 몇 개의 주요한 사건 및 그와 관련된 주요한 인물일 뿐이다. 이 외에도 상업과 공업, 농업, 탐험과 제국의 건설, 예술, 그리고 그 밖의 영국사회의 다른 측면에서의 수 많은 사람들이 창의력과 상상력을 가지고 여러 기회를 이용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서민 출신이었다. 심지어 특권의 마지막 보루인 정치에서도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와 같은 몇몇 신참자들이 노력해서 저명하고 권력 있는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바로 이것이 아담 스미스와 같은 철학자들이 분석하려고 애쓴 그 당시의 사회적 과정의 실제적이고 일상적인 측면이었다. 그들은 모든 측면에서 일상의 질서가 큰 소용돌이 속에서 변화하는 경제를 볼 수 있었다. 자신만을 위해서 애쓰는 수많은 사람들의 개인적 노력을 통해 진보는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과정의 배경은 어떤 질서도, 어떤 이성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인류는 더 나은 것처럼 보이는 세계로 확실히 앞으로 어쩌면 머뭇거리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어떤 측면에서는 해결해야 할 이론적 문제가 있었다. 변화하고 있는 개인주의적, 경쟁적 사회에서 질서정연한 사회적 관계를 창출하는 원리는 무엇일까? 다른 측면에서 문제는 아주 실제적이었다. 정부의 규제와 통제는 그 같은 사회의 진보를 방해할 것인가 아니면 촉진할 것인가?

 

 

  과학과 정치이론에서의 자연법

 

새로운 세계관이 아담 스미스의 시대에 생겨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새로운 세계관의 틀 속에서, 사회과학의 저술가들은 인간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르네상스(15세기와 16세기)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관점을 도입하였으며, 종교개혁(16세기)은 자연과 사회 현상에 대한 종교적 설명을 크게 약화시켰다. 17세기와 18세기의 과학과 수학의 발전은 신학적 설명보다는 자연주의적 설명(naturalistic explanation)을 크게 강화하였으며, 자연의 힘만으로도 사건을 설명하는 데 충분한 이론이 생겨나게 되었다.

 

자연과학에서 가장 위대한 진보는 영국의 물리학자 아이작 뉴튼(Isaac Newton, 1642~1727)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Mathematical Principles of Natural Philosophy, 1687)는 운동, 중력, 그리고 힘의 균형, 즉 평형을 유지하기 위한 에너지의 보존 그 속에서는 모든 물체가 그들의 적절한 위치를 갖는다라는 기본적 자연법칙의 영향하에 움직이는 기계적 우주를 보여 주었다. 이 위대한 이론은, 에드먼드 핼리(Edmund Haley, 1656~1742, 영국의 천문학자역주) 1682년에 혜성의 궤도를 계산한 이후 예견했었던 대로 1759년에 핼리의 혜성이 다시 돌아옴으로써 일반에게 증명되었다.

 

다른 과학도 자연법칙의 바탕 위에서 이와 비슷하게 발전되었다. 로버트 보일(Robert Boyle, 1627~1691, 영국의 화학자, 물리학자, 보일의 법칙을 발견) 1660년에 기체의 체적은 일정한 온도에서 압력과 반비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앙뜨왕느 라브와지에(Antoine Lavoier 1743~94, 프랑스의 화학자로 근대화학의 시조)는 수량적 화학분석을 통해 물질 보존의 법칙을 증명하였다. 즉 물질은 형태는 변하지만 그 질량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물학에서는 윌리암 하아비(William Harvey, 1578~1657 영국의 의사)가 혈액순화의 법칙을 발견하고 이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18세기에, 식물학자와 동물학자에 의해 식물과 동물이 상호 관련된 집단끼리 체계적으로 분류되었을 때, 자연의 질서정연함이 크게 강조되었다.

 

정치이론은 자연법과 규칙성, 그리고 균형을 강조한 최초의 사회과학 부문이었다. 네델란드의 법학자이자 근대 국제법의 창시자인 위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 1583~1645)는 그의 기본적 사상으로서, 인간은 본래부터 사회적 존재이며, 어떤 형태의 사회조직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고 말했다. 따라서 만약 인간사회가 존재하려면, 어떤 최소한의 조건들, 즉 사회의 자연법칙이 실현되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로티우스는 사회의 자연적 조건으로 재산의 안전, 선량한 믿음과 공정거래, 그리고 개인의 노력과 보수간의 일치 등을 열거했다.

 

그러나 자연법적 국가이론이 가장 완전하게 전개된 곳은 영국에서였다. 영국인들은 17세기와 18세기 동안 줄 곳 군주제를 변화시키는데 진력해 왔는데 이 군주제는 피지배자의 동의에 바탕을 둔 입헌 개부를 수립할 신성한 권리가 있다는 이유로 절대권을 주장해 왔다.   이와 관련된 사건과 논쟁으로부터 민주주의의 고전적 이론은 싹터 나왔다.

 

인간은 본래부터 이기적이며, 그래서 인간은 개인으로서의 자신의 자연적 권리생명, 자유, 재산의 소유를 보호하기 위해 정부를 세운다고 주장되었다. 절대군주제의 옹호자였던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는 군주에 의해 행사되는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인간근성에 있는 이기적이고 호전적인 요소에 대한 사회적 억제는 그만큼 더 성공적이게 될 것이라는 근거에서 절대주의를 옹호했다. 이와는 달리 죤 록크(Johm Locke, 1632~1704)는 질서와 자유는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인간은 혼란을 피하고 자신의 자연적 권리를 보존하기 위해 정부를 세우며, 절대권력은 어느 누구에게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가의 기능은 자연의 법칙을 시행하고 그 법칙의 위반을 처벌하는 것이며, 자연의 법칙은 국가의 행위보다도 우월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구조 속에서 개인의 행동은 자유로워 질 수 있다고 록크는 말했다. 이 같은 민주주의 이론의 토대에도 록크와 그의 추종자들은 다수지배의 이론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질서 보존에 대한 각자의 이해는 본질적으로 비슷하며, 공동 선을 결정하는 최선의 방법은 다수결이라는 것이다. 무엇이 개인의 최선의 이익인가 하는 것은 단지 개인만이 알 수 있으며, 각 개인은 그 어떤 경우에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반면, 대규모 집단의 합의가 심각한 잘못에 빠질 가능성은 별로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유태인 철학자 바루크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는 자유주의 정치철학에 마지막 고리를 덧붙였다. 즉 정의로 권력을 조절하기 위해서는 정부 내에서의 견제와 균형(checks and balances)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국의 정치이론가들은 재빨리 이 사상을 민주주의 이론에 통합시켰다.

 

18세기 초에 정치철학자들은 자연법 사상에 근거를 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이론을 전개했었다. 이와 비슷한 방법에 의한 경제분석이 그 다음안건이었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많은 저술가들이 경제생활의 자연법칙과 개인적 자유 및 정부행위의 자연법칙과의 관계에 대해 체계적인 논문을 써 보려고 시도했지만 결국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아담 스미스가 노력을 기울였던 방향도 바로 사회철학의 이 같은 문제에 대한 것이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의 결과가 국부론이었다.

 

 

  아담 스미스의 자연적 자유의 체계

 

아담 스미스는 각 개인이 자유롭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증진할 수 있는 자연적 자유의 체계 (system of natural liberty)를 옹호하였다. 이 체계는 개인과 사회에 모두 가장 큰 부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실제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는 개인의 노력은 전체사회와 다른 개인들에게 최대의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다. 이것이 개인주의 사회에서 사회질서가 발전할 수 있도록 해 주는 단순한 원리였다.

 

중상주의와 정부 규제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만약 인간의 행동이 규제되고 통제되지 않는다면, 개인들의 이기적 욕망이 모든 사람을 위한 부를 감소시키게 될 것이라고 가정했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노력이 모든 사람들을 위한 더 많은 것을 향해 인도되지 않는다면, 나를 위한 더 많은 것은 너를 위한 더 적은 것을 뜻한다는 것이 이들의 가정이었다.

 

이 같은 주장은 틀린 것이라고 아담 스미스는 말했다. 만약 내가 너로부터 무엇인가를 원한다면, 나는 네가 원하는 무엇을 생산하여, 네가 가지고 있는 것과 그것을 교환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우리 둘은 모두 이익이다. 왜냐하면 우리 둘은 모두 교환으로 받는 생산물의 가치보다 가치가 적은 것을 포기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 둘의 복지는 교환이 없을 경우에 비해 증가된다. 아담 스미스는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가 저녁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 양조장 주인, 또는 빵 가게 주인의 자비심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면서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휴매니티가 아니라 그들의 자애심(self-love)에 호소하는 것이며 우리 자신의 필요에 관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이익에 관해 말해 주는 것이다.

 

아담 스미스에 따르면 자유사회에서의 이기적 욕심은 한 국가가 성취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진보와 성장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를 개선하기 위해 절약을 하고, 그렇게 함으로서 더욱 많은 자본이 국가의 자원에 덧붙여지게 된다. 그들은 그 자본을 가장 유리한 방법으로 사용할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서 다른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물건을 생산하게 될 것이다. 심지어 법률과 규제가 투자의 자유를 방해하는 경우에도, 이 같은 동기는 워낙 강렬하여 그것은 여전히 성장과 부를 가져다 주게 될 것이다. :

 

자신의 지위를 개선하기 위한 모든 사람의 한결같고 지속적이고, 간섭 받지 않는 노력 이것은 개인적인 부유함뿐 아니라 대중적 국가적 부유함의 일차적 원천이다. 이것은 정부의 낭비와 행정부의 엄청난 실수에도 불구하고 개선을 향한 자연스런 진보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강력한 것이다.

 

경제적 진보의 가장 큰 장애물은 정부라는 것이 아담 스미스의 견해였다. 자연적 자유의 체계에서는 정당한 정부기능은 단지 세 가지가 있을 뿐이었다. , 사법부의 설치 및 유지, 국가방위, 그리고 "공공 사업체 및 공공기관의 설립 및 유지 그런데 이것은 어떤 개인이나 소수의 개인들을 위해 설립되거나 유지될 수는 없는 것이다."등이다. 그러나 아담 스미스는 세 번째 범주에도 그렇게 많은 것을 허용하지는 않았다. 도정, 통신은 인정했다. 그러나 그 비용은 일반 납세자에 의해서 보다는 통행세 등을 통해 사용자에 의해 부담되어야 한다. 교육과 종교교육은 허용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교육은 일반적 혜택이 있기는 하지만, 정부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사기업 또는 자발적인 기부금 등에 의해서도 제공 되어질 수 있다.  정부의 기타 업무는 설령 최선의 동기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유익하기보다는 해가 될 것이다.

 

사회의 자본의 몫이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가는 것보다 더 많은 몫을 특정산업으로 향하도록 노력하는 모든 체제는...... 사회의 진보를 진정한 부와 위대함의 방향으로 가속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둔화시킨다.

비록 아담 스미스는 분명히 정부 사업을 좋지 않게 보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기업에 대해 완전한 자유를 주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는 공공이익에 반하여 자신의 이익만을 꾀하려는 기업인들의 경향을 알고 있었다.

 

같은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만나는 것은 유흥과 오락을 위해서인 경우는 거의 없다. 만나서 나누는 대화란 공공의 이익에 반하는 공모나, 가격을 올리는 계략이 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 스미스는 독점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대기업과 거대한 공장이 성장하기 이전인, 오늘날보다 훨씬 단순한 시대에 살았던 것이다. 그의 책에 등장하는 산업생산의 유일한 예는 20여명의 수공업 노동자들이 고용된 공장이다. 그 당시에는 거의 모든 사업을 시작하는 데 필요한 자본은 소규모였으며, 기술도 단순 했을 뿐 더러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독점은 다만 특정한 특권이 정부에 의해 인정되고 보호되는 경우에만 존재하였다. 아담 스미스는 정부에 의해 보호받지 않는 사적 독점은 결코 오래 지속될 수 없다고 확신했다. 독점의 이익은 즉각적으로 경쟁을 유발할 것이고 그것은 독점을 파괴할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자동조절적 시장

 

만약 이기심이 경제의 원동력이라면, 그것이 작용하는 메카니즘은 자동 조절적 시장(self-adjusting markets)의 체제였다. 이익을 올리려고 노력하는 판매자간의 경쟁은 자연적으로 소비자의 필요와 욕구에 들어맞는 생산패턴을 낳게 될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생산자에게 동기를 부여하기에는 충분할 정도로 최소한의 이익은 유지될 것이다.

 

아담 스미스에 따르면, 모든 상품은 자연가격(natural price)을 가지고 있다. 미개발된 사회에서는 그것은 생산에 필요한 노동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사유재산이 발전한 더 진보된 사회에서는 자연가격은 생산비, 즉 임금, 지대, 이윤을 위해 지불되어야 하는 액수에 의해 결정된다. 어떤 상품의 시장가격이 그 상품의 자연가격과 다를 때마다 시장의 힘은 그것을 되돌려 놓기 위해 작용하게 된다. 아담 스미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어떤 상품의 가격이 토지의 지대와 노동의 노임을 지불하고, 또한 상품을 재배하고, 다듬고, 시장에 가져오는 데 사용된 자본의 이윤을 자연율 만큼 보장하기에 충분한 정도보다 높지도 낮지도 않을 경우, 그 상품은 자연가격이라고 불리어질 수 있는 가격으로••그러니까 정확하게 그 값어치대로, 또는 그 상품을 시장으로 가져온 사람에게 실제로 소요된 금액으로 팔려지게 된다.••.

 

시장에 나온 어떤 상품의 양이 실제의 수요에 미치지 못할 때, 그 값을 기꺼이 지불하려는 모든 사람들은••그들이 원하는 양을 모두 공급받을 수가 없다••. 이들 중 일부는 기꺼이 더 높은 가격을 지불하려 할 것이다. 그래서 즉시 그들 사이에 경쟁이 시작될 것이고, 그러면 시장가격은 상승하게 될 것이다.

 

어떤 상품의 양이 실제의 수요를 초과할 때에는 그 상품은 그것을 시장으로 가져오기 위해 지불되어야 하는 지대, 임금, 이윤 등 모든 가치를 기꺼이 지불하려는 사람들에게 모두 팔려질 수는 없다.••그렇게 되면 시장가격은 하락하게 될 것이다.

 

이 같은 가격변화는 그에 상응한 생산량의 변화를 유발한다. 어떤 상품의 시장가격이 자연가격보다 높을 경우에는, 더 많은 양이 생산되고 시장으로 출하될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시장가격이 자연가격보다 낮은 경우, 그래서 생산에 사용된 자원이 그들의 자연율에 따라 지불 되어 질 수 없는 경우에는, 생산은 감소할 것이다. 아담 스미스는 생산이 어떻게 가격에 반응하는가를 기술하고 있다.

 

시장에 나오는 모든 상품의 양은, 유효 수요에 자연히 적응한다.••그것이 실제의 수요를 초과하는 경우에는, 그 상품의 가격을 구성하는 요건들 중 어떤 것은 자연을 보다 낮게 지불될 수밖에 없다. 만약 그 구성요소가 지대라고 한다면, 지주의 이익이 침해되므로 지주는 토지의 일부를 즉각적으로 회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임금이나 이윤이라고 한다면, 노동자들의 이익과 고용주들의 이익이 각각 떨어지므로 그들도 지금까지 제공해 온 노동이나 자본을 각각 회수하게 될 것이다. 그 결과 시장에 나오는 양은 곧 유효수요를 충족시키는데 충분한 양 이상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상품 가격의 각각의 구성요소는 자연율로 다시 증가하게 될 것이고, 전체가격은 그 자연가격으로 상승하게 될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시장에 나오는 양이 유효수요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에는 그 가격의 구성요소들 중 일부는 가격의 자연율 이상으로 상승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그것이 지대라고 한다면, 그 밖의 모든 지주들의 이익추구로 자연히 지주들은 이 상품의 재배를 위해 더 많은 토지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임금이나 이윤이라고 한다면, 그 밖의 모든 노동자와 상인들은 이익을 올리기 위해 곧 그 상품을 마련하고 시장으로 가져오게 하는 데 더 많은 노동과 자본을 각각 제공할 것이다. 시장에 출하된 양은 곧 유효수요를 충족하기에 충분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상품가격의 각 구성요소는 자연율로 이내 감소하게 될 것이고 전체가격은 자연가격으로 하락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자연가격은, 말하자면 모든 상품의 가격이 계속해서 끌리고 있는 중심가격(central price)이다. 때때로 특별한 사건 때문에 상품가격은 자연가격보다 훨씬 높게 유지될 수도 있으며, 때로는 심지어 훨씬 낮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상품가격을 이 평온과 지속의 중심에 안주하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들이 어떤 것이건 간에, 상품가격은 끊임없이 그 중심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어떤 상품을 시장으로 가져오기 위해 매년 동원되는 노동의 총량은 이런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유효수요에 적용한다. 그것은 유효수요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그리고 결코 과잉이 되지 않는 만큼의 정확한 양을 항상 시장에 가져오는 것을 자연적으로 겨냥하고 있다.

 

지난 2세기 동안, 이 같은 시장균형(market equilibrium)에 대한 기술에 거의 아무것도 첨가되지 않았다. 현재의 경제학자들은 자연가격이란 용어보다는 정상가격(normal price)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정상가격이 통용되는 정확한 조건을 설명하는 데 더욱 주의를 기울인다. 훨씬 더 복잡한 생산비분석이 발전되어 왔으며, 생산의 수준이 가격에 대해 반응을 보이는 과정 역시 아주 세밀한 부분에까지 분석되어 왔다. 그러나 공급과 수요가 어떻게 균형가격(equilibrium price)을 결정하는가, 경쟁이 어떻게 그 균형가격을 생산비를 감당하는 바로 그 수준까지 밀어 올리는가, 그리고 생산은 어떻게 수요에 반응하는가 등의 기본적인 설명은 그 뒤로 이어지는 여러 세대의 경제학자들의 저술에서도 근본적으로 전혀 바뀌어지지 않았다.

 

자연 조절적 시장경제에 대한 아담 스미스의 분석은 대단히 큰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소비자의 수요가 어떤 것이든,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변화하건 간에, 생산이 자동적으로 소비자의 수요패턴에 적응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판매자들 사이의 경쟁이 소비자들에게 만족스러운 수준의 생산이 지속될 수 있도록 해 주면서도 가장 낮은 수준까지 가격을 끌어내리게 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또한 자원이 가장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방식으로 사용될 것이라는 점을 보여 주었다. 여기서 기준이 되는 효율성과 경제성은 소비자가 요구하는 수준만큼 생산이 지속됨과 동시에 소비자의 만족이 가장 낮은 가격으로 충족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 모든 것이, 정부나 그밖에 경제를 관리하는 다른 기관으로부터의 간섭이나 지시가 전혀 없이 시장경제력의 자유로운 기능을 통해 이룩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아담 스미스는 이 같은 이상적인 결과는 경제행위의 완전한 자유의 축소, 예컨대 제품의 비밀, 거래의 비밀, …… 독점 그리고 경쟁을 제한하는 모든 법률들 등과 같은 자유의 축소에 의해 방해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아담 스미스는 특히 모든 형태의 독점에 반대했으며, 그의 가장 혹독한 비평 중의 일부는 독점의 해악에 대한 것이다. 

 

독점자는, 계속해서 시장에 부족하게 공급 함으로서, 다시 말해 유효수요를 완전하게 충족시킬 만큼 공급하지 않음으로서, 그들의 상품을 자연가격보다 훨씬 높은 가격으로 판매하고, 또한 그들의 현재 소득이 자연율 보다 훨씬 높은 임금이나 이윤수준에 있다 해도, 그 소득을 더욱 높인다.

독점가격은 모든 경우에 있어서 구매자들로부터 짜낼 수 있는 가장 높은 가격이다독점에 이르게 하는 경제적 자유에 대한 제약의 근원이 무엇이든 간에 정부든, 기업이든, 노동이든 간에 아담 스미스는 그것에 반대하였다.

 

 

  두 가지 제한

 

이 시점에서, 자유로운 시장에 대한 아담 스미스의 분석에 있어서는 두 가지 제한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한계는 19세기의 사회주의자들이 행한 비판의 핵심이었으며, 그 후의 경제학자들의 이윤은 그것을 만족스럽게 극복하지 못했다.

 

첫 번째 제한은 유효수요(effectual demand)의 본질과 그 수요와 소득 분배 유형과의 관계성에 관한 것이다. 생산이 소비자 수요의 유형과 조화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만약 소득분배가 크게 불공평하다면 그 유형은 부자에게는 많이, 가난한 자에게는 적게 공급할 것이다. 소득분배가 온당하고 적절하지 못하다면 생산이 효율적이고 경제적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만약 소득분배가 잘못되면, 자유로운 시장이 생산을 수요와 조화시키기 위해 아무리 효율적으로 작용한다 해도, 생산의 유형도 잘못될 것이다. 이 같은 근본적인 문제는 생산혁명의 초기의 상회주의자들에 의해 거의 즉각적으로 제기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 바로 뒤에 칼 마르크스에 의해 자본주의 파멸의 이론으로까지 발전되었다. 그 뒤 여러 세대에 걸쳐 경제학자들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기 위해1890~1910년의 기간에 가장 성공적으로 노력했는데 그 결과는 충분하게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경제적 정의(economic justice)와 밀접하게 관련된 두 번째 제한은 토지와 자본에 있어서의 사유재산에 관한 것이다. 훌륭한 경제적 자유주의자였던 아담 스미스는 사유재산제도를 경제적 인센티브(유인)의 보존을 위해 자연적이고 필요한 것으로 옹호하였다. 그러나 그는 단지 진보된 사회에서만 그 필요성을 인정하였다.  미개사회에서는 노동만이 생산의 요소로서 보수가 필요했으며, 생산비는 임금 하나만으로 구성되었다. 진보된 사회에서는 토지에 대한 지대와 자본에 대한 이윤이 생산비의 구성요소가 되었다. 지대와 이윤의 경우 생산비는, 인간의 노동과 이기심의 동기와 같은 의미에서의 자연적인 현상이 아닌, 분명히 사회적 조직(social organization)의 산물이었다. 이것은 시장에서의 자연적 힘의 균형이라는 아담 스미스의 장대한 체계를 손상시켰다.

 

사회주의자들은 아담 스미스의 논리에 있는 이 같은 빈틈을 재빨리 간파하였다. 그들은, 노동에 대한 보수만이 자연적인 것이며, 생산물의 완전한 가치가 토지와 자본의 사회적 소유를 통해 노동에 의해서 얻어질 때에만 사회의 자연적 상태가 되찾아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나면 사회의 전체 생산물이 일을 한 사람들에게 돌아가고, 유효수요의 유형은 불로소득에 의해 왜곡되지 않을 것이기에 경제적 정의 또한 이룩될 수 있게 된다. 이 책의 다음 여러 장들에서는 현존하는 질서에 대한 비판가와 지지자 사이의 경제적 정의를 둘러싼 논의가 더욱 세밀하게 개진될 것이다.

 

 

  경제성장

 

아담 스미스는 소득분배에 있어서의 정의의 문제에 주로 관심을 둔 것은 아니었으며, 이 같은 문제는 사회주의가 대두하기 전까지는 경제학자들의 주된 관심사도 아니었다. 아담 스미스는 경제성장과 더 높은 수준으로의 사회발전에 훨씬 큰 관심을 가졌다. 그는 경제성장과 사회발전을 개인의 심리 속에 내재한 인간의 동기로서 설명하였으며, 따라서 자유로운 사회에서는 자연적이고 불가피한 것으로 보았다.

 

아담 스미스에 따르면, 풍요함으로의 진보(progress of opulence)는 세 가지 요인, 즉 분업, 시장확대, 그리고 자본축적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이 삼자의 발전으로 생산성이 향상됨에 따라 일반적인 풍부함이 사회의 모든 계층에 퍼지게 된다. 

 

생산에 있어서의 특화(specialization)와 분업(division of labor)은 한 물건을 다른 것과 거래하고 교환하려는 본래적인 인간의 성향 에 의존한다. 단지 인간만이 이 같은 성향을 보인다. 개가 다른 개와 뼈다귀를 정당하고 교묘하게 교환하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게다가 사람들로 하여금 거래하게 만들고 그래서 특화를 일어나게 하는 똑같은 심리적인 성향은 또한 사람들을 서로 의존하게 만들고, 그로 인해 시장경제라는 복잡한 사회구조를 생기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낡은 견해이다. 현대 경제학자들은, 사람들은 특화를 함으로서 그들의 생산성과 소득이 증가하였기 때문에, 필요한 모든 것을 생산하려고 시도하기보다는 하나의 물건을 생산하는데 전문화한다고 주장한다.

 

교환이 특화와 분업을 생기게 한 이상, 이 같은 분업의 정도는 시장의 정도에 의해 항상 제한될 수밖에 없다고 아담 스미스는 말했다. 시장이 소규모일 때에는 어느 누구도 단지 하나만을 생산하는 데 전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시장이 확대될 때에는 그는 특화 하여, 효율성의 향상 이익을 취할 수 있다. 확대된 시장은 더 큰 특화와 더 높은 생산성 그리고 더 많은 부에 이르게 하고, 또한 복잡한 교환관계의 체계에서 물물교환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경주되어 마침내 화폐의 사용에 이르게 된다.

 

이 같은 경제성장은 저축으로부터 모아진, 그리고 생산성향상과 특화의 진전 및 시장의 확대를 촉진시키기 위해 사용되는 대규모의 자본 없이는 일어 날수 없다. 자본저축 (accumulation of capital)은 경제적 확대의 열쇠처럼 보였다. 그러나 전반적인 과정은 재산의 안전성에 의존하였다.

 

상당한 안전성이 있는 모든 나라에서는, 일반적인 상식을 가진 모든 사람은 현재의 즐거움이나 미래의 이익을 얻기 위해 그가 지배할 수 있는 물건이면 무엇이든 사용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상당한 안전성이 있는 곳인데도 그가 지배할 수 있는 모든 물건을 그것이 그 자신의 것이든 다른 사름으로부터 빌린 것이든 간에 사용하지 않는 사람은 완전히 미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사람들이 항상 그들의 윗사람을 두려워하는 그 같은 불행한 나라에서는, 사람들은 종종 그들의 물건의 상당부분을 묻어 두거나 감추어 둔다. 이것은 터키와 인도에서의 일반적인 관습이다. 그리고 그 밖의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도 그러리라고 나는 믿고 있다.

 

아담 스미스는 경제성장이 변화와 다양성을 가져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본이 축적됨에 따라, 풍부함의 자연스런 진보는 농업에서 제조업, 상업으로 진행하여, 풍요로운 사회는 이 세 분야에서 모두 번영을 보여준다. 발전하는 농업은 도회지의 성장을 낳게 하고 도회지의 성장이 이번에는 농업 생산물을 위한 커다란 시장을 제공한다. 그리고 발전된 도시와 농촌사회는 무역과 조선에 대해 더욱 증대된 기회를 제공한다. 확대된 무역은 수출을 위한 제조업 및 특화된 농업생산을 더욱 촉진한다. 생산성이 높아짐에 따라 더욱 폭넓은 시장의 확대를 촉진하고, 또한 더 많은 특화와 자본저축을 자극하면서 인구는 증가한다.

 

이 같은 과정에 의해 경제는 그와 더불어 전반적인 사회질서를 개선시키면서 더욱 더 높은 수준의 발전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면서 그것은 동시에 유효수요에 상응하는 생산유형을 끊임없이 지향하는 질서정연한 시장균형을 유지한다. 자연적 자유의 체계는 풍부함을 향해 항상 움직이는 세력의 균형을 가져온다.

 

 

  아담스미스의 업적

 

시장경제에 대한 아담 스미스의 분석은, 개인중의는 혼란이 아니라 질서를 낳는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비록 각 사람은 부와 이익을 위해 모든 사람들과 경쟁을 하지만 그들의 바로 이 경쟁이 국가의 부를 질서 정연하게 증대시키게 하는 시장통제력을 자유롭게 풀어놓았다는 것이다. 거래와 교환을 추구하는 자연적 경향과 함께 번영에 대한 열망이 특화와 자본투자와 안정적 경제성장에 이르게 하였다. 자유로운 경제는 각 개인들에게 봉사하였다. 그들의 필요와 욕망은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을 만들러 파는 생산들의 자연적인 성향에 의해 충족되었다. 사회의 후생은 이로 인해 극대화되었다.

 

이전의 저술가들의 도덕적 딜레마는 개인의 이익과 사회적 이익 사이에는 아무런 갈등도 없다는 아담 스미스의 분석에 의해 해결되었다. 전체적인 구조는 자유롭고 경쟁적인 개인의 이기심의 역할에 의존한다. 맨더빌(Mandeville, Bernard, 1670~1733)이 반세기 이전에 찬양했던 동기들은 아담 스미스에 의해 경제성장과 사회질서와 일반적인 복지의 근원임이 밝혀졌다. 우애에 이르는 길은-적어도 경제문제에 있어서는-경제적인 이기심을 통해서였다. 아담 스미스는 이렇게 사회철학자들과 윤리학자들에게, 헌 세기 동안 해결되지 않았었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였다.

 

이에 덧붙여, 아담 스미스는 미래의 경제학자들에게 경제학이라는 과학의 분석적 틀을 제공하였다. 성장의 길을 따라 풍요와 풍부함에 이르는 경쟁적인 시장균형에 대한 그의 견해는 그 후 경제학이 계속해서 씨름해온 문제의 성격을 분명히 해 주었다. 문제해결에 대한 그의 공식-자동 조절적 시장과 자본축적의 과정-은 그 후의 경제학자들이 풍부하게 다듬어온 복잡한 이론체계의 출발점이었다. 아담 스미스의 순수한 과학적 기여는 대단히 컸으며, 근본적인 구조에 있어서 그의 틀은 지금도 여전히 경제학의 핵심으로 남아 있다.

 

국부론이 어째서 서구문명이 낳은 가장 위대한 저서 중 하나인지 그 이유는 쉽게 알 수 있다. 한편으로 그것은 그 시대를 위해 쓰여졌고 또한 당시 존재하던 실행과 정부의 정책에 반하는 방향을 제시한 논쟁적 저서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인간사회의 질서와 혼란이라는 근본적 문제를 다룬 철학적 논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것은 경제체제의 작용원리를 분석한 과학적 논문이다. 이 세 가지 주제는 워낙 서로 밀접하게 얽혀 있어서 어떤 주장이 한 측면만이 견지되지 못하며 각 측면은 서로 보완적이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와 철학 그리고 과학적 분석을 한데 모은, 정말 매혹적인 혼합물이다.

                                         

   

 

 

■  자유방임론

 

 

 

사실 아담 스미스는 한 번도 자신을 경제학자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의 주된 관심은 도덕 철학이었다. 그를 유명인사로 만들어 준 것은 <도덕감정론>이란 책이었다. 그는 글래스고 대학에서 도덕철학을 가르쳤고, 프랑스 귀족 자제의 가정교사가 되고 나서도 도덕철학을 가르쳤다.

 

철학이 홀대 받는 요즘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18세기 당시에는 철학이 모든 학문의 '상위학문'이었다. 당시는 신() 중심적 세계관에서 인간 중심적 세계관으로의 거대한 전환이 이루어지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루소, 볼테르 등 수많은 철학자들이 위대한 족적을 남긴 시대가 바로 아담 스미스가 살던 18세기였다. 그렇다면 아담 스미스의 '자유방임론' 18세기의 시대적 배경 및 당시를 풍미하던 '철학'은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을까?

 

 

. 자유방임론의 시대적 배경

 

흔히 많은 사람들이 경제학설을 접하면서 범하기 쉬운 오류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학설과의 연관성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단편적 사실을 외우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축적된 지식은 한마디로 팥 없는 찐빵에 불과하다.

 

'자유방임론'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다. '자유방임론'은 말 그대로, 이기적인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경쟁적으로 추구하면 최대의 공공적 이익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스미스는 자신의 주장을 이렇게 피력하고 있다.

 

"우리가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양조장, 빵집 주인들의 자비 덕분이 아니라, 그들의 돈벌이에 대한 관심 덕분이다. 우리는 그들의 인간성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기심에 호소하는 것이다" "다른 수많은 경우에도 그렇듯이 (개인의 이기적인 행위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그가 전혀 의도하지 않는 목적을 달성하도록 유도된다."

 

이와 같은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개념은 현대의 보수주의자들이나 기업가들에 의해 더욱 아름답게 채색되고 윤색되어, 현대의 진보주의자들에게는 거북하고 껄끄러운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적어도 18세기 당시에 '자유방임론'은 매우 혁신적인 사상이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왜 그랬을까? 갈브레이스의 설명을 들어보자

 

"자신의 부를 쌓는 데 열중하는 사람은 그 때까지는 의심, 의혹, 불신의 표적이었다. 이러한 감정은 중세를 거쳐 성서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서 성서 자체가 그랬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이래 1천년 동안, 서양은 기본적으로 금욕주의적 신앙사회였다. 그래서 부유하도록 타고난 신분이 아닌 이상, 부를 추구하는 것은 타락한 수도승 혹은 '용서 받지 못 할' 유대인들이나 하는 짓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당시 카톨릭은 신학으로서 신분사회를 옹호하려 했다)

 

중세 농경사회에서는 이런 '금욕주의'가 사회질서를 유지시키는데 커다란 역할을 해냈다. 신앙심이 독실한 농민들은 대체로 계급질서에 반항하기보다 주어진 운명에 순응했고 말 그대로 '금욕적인'(가난한) 생활을 견뎌냈다. 그러나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부르주아들이 꾸준히 성장하면서 '금욕주의'는 불만의 표적이 되어갔다. 그 때에도 부르주아들은 부의 추구에 여념이 없었는데, 당시의 사회적 통념인 '금욕주의'가 사사건건 문제가 되었다.

 

많은 돈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돈에 눈이 먼 하층계급으로 인정되어 지주 귀족들에게 멸시를 당하기도 하고, 사익과는 무관한 '국익'을 위해 중상주의적인 국가의 통제와 지시를 강요 받아야 하는 등, 다양한 형태의 '금욕주의'는 부르주아를 속박시켰던 것이다. (중상주의=국부 축적 최우선주의)

 

그러나 아담 스미스의 '자유방임론', 부르주아들이 마지막 남은 정신적 제약마저 깨끗이 청산할 수 있도록 했다. 자신의 사리를 채움으로써 공공의 자선가가 될 수 있다니, 이제 마음껏 사적 욕망을 추구해도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효과는 과연 대단했다. 고삐 풀린 부르주아지의 축적 본능은 "불과 10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과거의 모든 시대를 합친 것 보다 더 많은 거대한 생산력을 창출했다"(마르크스, 공산당 선언 중에서)

 

1789년 프랑스 혁명을 통해 알 수 있듯 당시에는 부르주아들이 진보적 계급이었다. 그들은 신분사회를 철폐했고, '인권선언'을 낭독했으며, 언론과 결사의 자유를 선언했다. 아담 스미스의 '자유방임론'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현대적 시각에 아담 스미스와 '자유방임론'을 끼워 맞추다가는, 필경 그릇된 결론이 나기 십상이다. 특히 요즘 들어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면서, 아담 스미스의 자유방임론이 당시의 시대적 배경 및 현대의 시대적 정황과 무관한 항상적인 진리로서 인정받고 있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왜 그런지는 다음에서 논하도록 하겠다.

 

 

. 자유방임론의 철학적 배경

 

경제학설을 설명하면서 철학을 논한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뜬금없는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현대 경제학은 철학과는 무관한 독자적이고 배타적인 영역을 구축했다고 할 수 있다. 경제학만큼 철학에서 멀리 떨어져나간 학문도 없다.

 

그러나 경제학이 처음 태동하던 시기에, 경제학은 분명한 철학의 일부였다. 평생 자신을 도덕철학자로 여겼던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을 경제학 책이라기 보다는 철학 책으로 여겼음직하다. 실제로 <국부론>의 곳곳에는 철학적 고민의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방임론'의 철학적 배경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실 대부분의 경제학 서적들이 '자유방임론'의 시대적 배경을 간단히 언급하고는 있지만, 철학적 배경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다.

 

그렇다면 '자유방임론'의 철학적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바로 계몽주의 사상이다.

 

계몽주의는 아담 스미스가 살았던 18세기에 꽃을 피운 철학 사조이다. 서양의 18세기를 일컬어 '철학의 세기', '빛의 시대', '이성의 시대'라 부르기도 하는데, 그 중심에는 바로 계몽주의가 있었다. 여기서 '계몽'이란 "봉건적인 구습과 종교적 전통의 독단에 지배되어 바른 지식을 지니지 못한 인간을 '자연의 빛'인 이성에 비추어 밝게 깨우쳐 개명하는 일"을 뜻한다.

 

'칼 바르트'라는 철학자는 계몽주의를 "인간이 전능한 능력을 갖고 있다는 신념을 토대 삼아 세운 체계"라 정의했으며, "전통적인 권위와 교리를 의심하고 비판하며, 인류의 보편적 진보와 경험적인 과학방법을 강조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칸트는 계몽주의를 일컬어 "인간 스스로가 묶여있던 미성년 상태로부터의 해방...인간의 본래적 이성을 사용할 수 있는 용기"라 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계몽주의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희망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인간은 본디 자유롭고 행복하고 선량했으나, 자신이 만든 온갖 제도와 미신들 때문에 불행해지므로, 자연상태의 인간을 회복해야 한다는 루소의 주장을 떠올려보자. 계몽주의적 인간에게는 기독교의 '원죄설'과 같은 암울한 측면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홉스처럼 인간을 악하다고 생각한 사람도 결국 인간 스스로 타당한 질서를 찾아가게 된다고 보았다.

 

이제 독자들은 아담 스미스의 '자유 방임론' 역시 계몽주의 사상의 깊은 영향 아래, 인간의 능력에 대한 커다란 신뢰를 밑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담 스미스 그 자신이 계몽주의 진영에 속해 있었고, 볼테르나 에드워드 기번 등 저명한 인사들과도 가까운 사이였다)

 

인간은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이기적인 존재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기적인 개인의 사익 추구가 결국 사회의 공익을 향상시키게 된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인간의 능력인가. ()이 개입하지 않아도 인간들 스스로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조화로운 세상을 이루어나갈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낙관적인 전망인가.

 

특히 아담 스미스의 '자유방임론'에는 '자연법' 사상이 강하게 반영되어있다.'자연법' 사상이란 자연과 인간의 본성에는 인간의 의지와는 관계없는, 인지 가능한 가치 기준을 제공해주는 '합리적 질서'가 존재한다는 사상이다. 그로티우스에 따르면 "자연법이란 어느 행위가 이성적-사회적인 인간 본성에 합치하고 있는지를 기준으로 하고, 그 행위가 도덕적 기초나 필연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올바른 이성의 명령"이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은 경제행위에 대한 '자연법'이 무엇인지 탐구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쓰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유방임론'이나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기술은 '자연법' 사상과 놀랄 만큼 밀접하다. 그 밖에도 계몽주의 사상이 '자유방임론'에 미친 영향은 곳곳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 중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국가'에 대한 사상이다. 아담 스미스가 '국가'의 개입에 대해 날을 세우고 비판했다는 것은 전설 아닌 전설이 되어 있다.

 

 

그런데 아담 스미스만 당시 국가와 대립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많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당시 국가와 대립적인 관계였다. 볼테르는 프랑스 정부의 미움을 받아 바스티유 감옥에 두 번이나 갇혔다가 영국으로 망명해야 했고, 디드로는 '백과사전'을 펴냈다가 역시 감옥 행 마차에 탔고, 루소도 프랑스에서 스위스-영국으로 계속 도망 다녀야 했다.

 

당시의 국가가 어떤 국가였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18세기 유럽의 국가들은 모두 절대왕정 혹은 과두제 국가에 불과했다. 당시 가장 선진적인 민주주의 국가였던 영국에서 조차 보통선거권이 인정되는 것은 20세기 들어서의 일이니, 다른 나라들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런 형편이니 당시 계몽주의자들이 '국가' '종교'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유롭고 무한한 가능성을 억압하는 기제로 파악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담 스미스의 국가 개입 비판과 최소 국가설도 계몽주의의 국가 비판의 연장선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에 대한 대안을, 국가의 기능 축소와 시장의 기능 확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잖게 있었는데 아담 스미스도 비슷한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정희 정권이야말로 전형적인 중상주의(=국부 축적 최우선주의) 정부라고 할 수 있으니, 거슬러 올라가 18세기를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담 스미스가 왜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공공교육'을 주장하고, "수많은 백성이 가난하고 비참하게 사는 한 그 사회는 결코 행복하거나 번영하는 사회라고 할 수 없다"라고 말했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 자유방임론은 보편 타당한 진리인가?

 

이상의 고찰을 통해 우리는 '자유방임론' 18세기 격변기의 시대적 배경과 당대를 풍미한 계몽주의 사상의 철학적 배경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후 역사의 전개는 슬프게도, 계몽주의 사상의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만다. 정치적 자유에 대한 소중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여전히 차별, 빈곤, 전쟁의 위협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 위협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2차 세계대전은 무려 5,200 만 여명의 목숨을 앗아간다. 이성의 발견이 곧 사회의 발전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이에 따라 철학도 계속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게 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경제학은 아담 스미스 시대를 정점으로 철학의 흐름과는 거의 무관한 독자적 길을 걷기 시작한다. 물론, 필자는 경제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철학'과 무관하기 때문에 무용지물이라 주장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철학의 부재는 경제학에 많은 악영향을 낳았다고 생각한다.

 

간단히 예를 들어, 경제학 시험지에 '배부른 돼지보다는 고뇌하는 인간이 되겠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적는 학생이 있다면, 그는 아마 D F를 받을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보나마나 그는 온 학과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좀 더 현실적인 예를 들어보자. 경제학 수업시간에는 심심치 않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기업 총수의 비리 문제를 엄하게 조사하는 것은 기업을 위축시켜 국민 경제에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 온다" "기업주들에게 분배를 요구하면, 기업주들의 투자의욕이 위축되어 오히려 분배가 더 악화된다" "한국은 중국보다 더 사회주의적이다. 공동체 의식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강남과 인근 도시의 땅값이 수십 배 차이 난다고 왜들 난리인가. 미국처럼 몇 백배는 차이가 나야 제대로 된 자본주의다"

 

아찔할 정도의 극우적인 주장들이, 경제학 수업시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권위'를 가진 '정론'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는 현대 경제학에 철학의 공간, 사유의 공간이 부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경제계 인사들이 특히 보수적인 것은 이유가 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아담 스미스의 '자유 방임론'을 현재 우리의 경제활동에 적용하는 것도, 위와 같은 맥락에서 큰 문제를 안고 있다. '자유 방임론'은 오로지 계몽주의의 철학적 배경-, 인간의 능력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해야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경제학에서의 '자유방임론', 핵심적인 철학적 배경을 도외시한 채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위한 지침으로서만 기능하고 있다. 말 그대로 팥없는 찐빵-더 심하게 말하면 독이 든 찐빵이 된 셈이다.

 

계몽주의의 한계를 검토한다면, '자유방임론'의 한계도 명백하다. 현실 세계에서 '자유방임'이란 이름으로 치장된 인위적 '기업편의주의'가 제3세계의 거대한 빈곤, 제국주의적 전쟁, 천문학적 규모의 비리, 환경파괴, 소비자 건강 위협 등 수많은 해악적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는 점은 특히 주목해야 할 사실이다.

 

사실 자유방임론이 현실 경제에 그대로 적용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모든 나라들이 초기 산업성장단계에서 강력한 정부의 뒷받침을 받았고,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주류 경제학은 사실을 무시한다. 계몽주의적 '자유방임론'을 인위적 '기업편의주의'로 둔갑시킨 것은 놀라운 일이다. 아담 스미스가 비판한 18세기의 전제국가와 현대 민주주의 국가를 동급으로 취급하는 것 역시 놀라운 일이다.

 

아담 스미스는 법인기업이나 주식회사 제도에 반대하기도 했다. 심지어 그는 "(기업인들이)동업자끼리 모이는 경우는 드문데, 혹 오락이나 기분전환을 위해서 모였을 때조차도 대화는 반드시 사회공공에 대한 음모, 즉 가격을 끌어올리기 위한 어떤 술책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라고 이야기하기까지 했다. 종합적으로 고찰했을 때 '자유방임론'이 인위적 '기업편의주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자유방임론'은 분명 커다란 의의를 가지는 사상이다. '자유방임론'은 당시 종교적이고 금욕주의적인 억압에 대항해 부를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을 자유롭게 한 혁신적인 사상이었다. 그러나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주장이 나름의 가치를 인정받으면서도 보편 타당한 진리로서 숭배되지는 않듯이, 아담 스미스의 '자유방임론' 역시 '절대진리'로서 숭배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그러는 편이 '자유방임론'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아담스미스의 자유방임론 이해, - 한겨레, 서일

 

 

 

 

■  더하고 나눔의 지혜

 

  . + -

     우리들의 삶은 무엇인가를 서로 주고 받으며 쌓는 가운데,      더하고 빼기가 반복되며 시간이 흐르는 것이다.  살다 보면 남길 적도 많지만 모자람에 허덕일 때도 많다.  돈이 그렇고, 사랑이 그렇고, 기쁨과 슬픔 열정이나 분노도 그러하다.  아픔과 고통, 건강이며 생명도 그의 예외는 아닌 듯 하다. 

  희망이던 갈망이던, 때로는 바라는 만큼 많이 쌓이는 듯 여겨지지만,

  돌아보면 항상 빈 그릇, 텅 빈 허공과 그리고 아쉬움으로 채색되곤 한다.

 

. ⅹ ≒  대부분 사람들은 한 단계씩 더하거나 빼가며, 땀 흘린 만큼 벌어서 쓰고 살아 가지만  때로는 곱빼기 잇속을 챙길 때도 있고, 한 순간에 반 토막 난 턱없이 잘린 탓으로   마음 고생 할 때도 많다. 자산도 그렇고 명예도 그렇다. 매일 같이 달려가며 조깅으로   다져 온 건강을 어느날 갑자기 잃을 때도 더러는 있다.  

 

. ≤ ≥  누구 것이 더 크고 작은지, 누가 더 훌륭했다거나, 악하고 나쁘다는 등의 평가는 정해진  공식이나 정답을 기대하기 어렵다. 재 보려고 말하는 순간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얼만큼 가져야 (벌어야) 살 수 있을까? 그 최소한의 크기는 얼마나 될까?   항상 쉽지 않은 마음 속의 질문(갈등?)이 되곤 한다.  비록 돈만의 문제는 아니다. 삶의 언저리에 맺혀 지는 각종 허상들, 갈구하는 욕망들이   그렇다. 건강, 생명, 목숨까지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만수무강을 바라기 때문이다.

 

  사노라면 어느 정도는 먹어야 한다. 그래서 기본 생계비의 보장은 복지사회의 목표가 된다.

 

  우리나라 최저생계비 및 최저임금 제도의 현황을 본다.

  2009년 고시를 기준으로 최저수준의 생계비는 한 사람당 하루 16천원, 월간 약 50만원,

  최저임금은 시간당 4천원, 일급 3만2천원, 월간 약 83만원 선이다.

  의식주를 해결 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비용수준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기준이.

  최소한의 수준이란 사람마다 눈높이가 다르니 정하기 어렵다. 공출로 빼앗긴 곡물을

  대신하여 풀 죽을 쑤고, 생키(소나무 껍질)를 벗기던 대동아 전쟁 말기 어려운 시대의

  서민들이 생각하던 수준과도 적지 않은 차가 있을 수 있다. 때와 장소 또는 소득 수준에

  따라 생각하는 그 수준은 다르기 마련이다.

 

  아프리카 난민 지원단체의 지원자 신청광고를 보며 1달러란 가치의 커다란 모습을

  광고문안에서 접하기도 한다. 아프리카에서 사는 9 억 명 가운데 1 1불 미만의 돈으로

  생활하는 사람이 전체의 46%을 차지한다고 한다.

  그래서, 최저생계의 기준은 가치기준에 따라 극명하게 다른 내용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라면 한 그릇으로도 눈물 나도록 행복을 느낄 수 있는가 하면, 부드러운

  고깃발로 배 터지도록 뜯어 가면서도 부족하여 으르렁댈 수 있다. 입고 잠자는 장소, 의복이나

  주택은 먹거리 보다 그 차이가 더욱 커 질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씀씀이의 인식 차이만큼, 돈벌이 크기, 행복과 욕망에 관한 만족도 차이는 그 크기가

  사람마다, 지역마다, 시대마다 각각의 가치관에 따라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알고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천만금을 주먹에 쥐고서도 잔돈푼이 모자라

  발버둥 치는 모습은 주변이나 뉴스 속에서 접하곤 한다. 우리는 크고 작음을 알고 그것을

  수긍하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 xa √ ̄ y1/b            x≠ y1/b  벌고 쓰는 기술은 사람마다 다양하다. 현대사회는 농경시대의 자기농사를 짓는 것처럼   일한 만큼 수확하는 시대는 아니다. 기술과 기능을 발휘하고 타인의 힘을 빌어 천문학적인  크기를 얻기도 한다. 때로는 그리 날리는 경우도 많다.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사회구조   속에서 우리는 생활하고 있다. 생활양식이며, 사고방식, 가치기준도 마찬가지로 심하게   요동치는 가운데 살아가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축구의 본고장인 유럽의 명문 구단에서 지금 뛰고 있는 한국 선수가 있다. 년봉이 80억 수준으로   알려지고 있으니, 하루 일당을 환산하면 3천만원 선에 달 한다. 주식이나 부동산 시세차익으로 한 해에   수천 억 원씩 챙기는 부자도 적지 않다. 그들의 하루 벌이가 결국 수 억 원에 이르는 것인데, 그 분들이   보는 세상의 모습과, 최저생계비로 꾸려가는 저소득층 사람들이 보는 세상의 모습은 사뭇 다를 것만 같다.

  이질적인 생활양식에서 오는 서로 다른 가치관이 형성 될 수 밖에 없지만, 인간생활의 범주 내에서

  존재하는 것이지, 병노생사에 이르는 음양까지도 바뀌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크고 작아지는 속도가 일정하지 않음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인정 할 줄도 알아야 한다.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생명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젊은 나이에 너무 일찍 타계한   죽음을 두고 아쉬워함도 속도 인식에 관한 생각 차이로 말 할 수 있다. 단명하던 구시대의   수명에 비할 수 있다면 아쉬움은 덜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불과 십 여 년 사이에 매장과 화장의 비율이 급변하는 것을 보고, 수 백 년을 이어 오던   우리의 매장문화나 그와 관련된 가치기준들이 얼마나 급변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1980년대까지 10%대에 머물렀던 화장비율이 2008년 조사에서는 부산(79.9%), 인천(73.6%),   서울(70.2%) 순으로 치솟았고, 2020년에는 80%에 이를 것으로 복지부는 전망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 가치관의 변화속도에도 유사한 점은 있다고 본다.

 

. (x, y)

  누구와 주고 받을지에 관한 칸막이는 개인이나 조직 또는 사회의 역량에 따라 각각 달리 형성된다.  때로는 그 울타리를 전부로 알고 그 울타리의 벽에 대고 절대적으로 기대고 싶어 한다.

 

  그 울타리는 때로는 자신 스스로도 되고, 가정이나 조직, 종교나 사회, 국가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 울타리가 얼마나 부질없고 허망한 것인지를 ……  때로는, 그 굳건하게 둘러 쳐진 울타리를 알에서 깨어 나오듯 과감하게 허물고 스스로를   재조명 해 볼 줄 알아야 한다. 둘러 쳐진 가치의 기준 틀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돌아 볼 줄   알아야 한다. 행복과 불행, 근심과 걱정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 (x), (y)

  자신 스스로 울타리를 치며 홀로 살아 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삶이란 아리스토텔레스가 설파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과  차이가 있다. 우리 인간의 삶이란 동물의 혈연에 의한 단순 무리 진 형태와는 달리,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 되어, 그 삶을 결정짓는 공존공생의 삶의 형태를 가지는 특성이 있다.

 

. [{( . ) + ( . )} + ( . )] + ( . )

  사회란 나를 중심으로 한 가족으로부터 시작한 혈연, 그 삶의 터전인 직장이라는   작은 기초 조직으로 구성된다. 수렵이나 농경사회 때와는 달리, 현대사회는 복잡다단한   사회구조 때문에 직장의 형태는 매우 복잡하여 졌다. 학교와 같은 배움의 터가 있는가   하면 점포나 회사와 같은 돈벌이 수단의 장소도 있다. 경찰이나 군대와 같은 조직을   지키는 조직도 발생되었다. , 가족, 직장이 연계된 이웃도 있다. 지역과 지방 또는   국가 등도 내가 속한 사회의 한 모습이다. 

      

  . (x + y)n =  nk=0Σ nCk xk yn-k  이항정리의 컴비네이션(Combination) 조합의 한 구성요소처럼, 나는 지금의 이 세상 구성  요소의 한 부문일 것이다. 제 각각 지지고 볶아 가며 살아 가는, 뭇 인간의 삶들을 합한   모습이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이 곳의 사회 모습이다. 나의 모습, 그리고 내가 속한 조직의   모습 그 자체가 이 세상의 모습을 합한 것과도 같다. 내가 본 세상, 내가 생각한 세상이   너와 나, 전체를 합한 큰 세상과 크게 다를 바는 없을 수도 있다.

 

. (x2.3a + Y0.7b - ZC)

  사회의 구성원들 각각은 타고 난 저마다의 소질을 가지고 나름대로 잘 적응하며   열심으로 살아 가고 있다. 그러나 그 크기가 서로 같을 수도 없고, 항상 사회에 보탬만   될 수도 없다. 그렇기에 나보다 못하다고 얕잡아 봐서도 안되고, 개인의 성향이 다양함을  인정할 줄도 알아야 한다. 내가 속한 조직의 목표를 갉아 먹는 존재라도 인정 할 줄 아는   아량이 있어야 한다. 모두가 양의 부호만 가진다면 세상의 모습이 지금처럼 다양하고   아름답지 못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 (x + y)n

  사회는 나름대로 각각의 존재 목표가 있다. 때로는 크거나 길고 많은 것을 목표로 삼지만  짧고 작은 것 또는 적은 것이 목표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목표란 개체 조직으로서의  한가지 목표 일 뿐, 어느 한 쪽 방향의 목표만이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쉽게 생각나는 주제를 들어 생각하여 보자.   , (), 명예, 영토, 애정, 운동, 취미, 학문, 건강, 생명 ……  무조건 이들이 크고 길고 많다고 아름다운 사회가 이루어 질 수 있겠는가?  무조건 이들이 크고 길고 많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행복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골프 초심자들이 새벽 서너 시부터 휘두르기 시작하여 온 종일 몸살 약 먹어가며, 파스   냄새 풍겨가며 좋아라 필드 누비는 모습을 종종 본다. 카지노에서 땅기거나,   마사회 투전이나, 과음으로 낑낑대는 일도 적당함에서 벗어날 때 추하게 여겨진다.   돈도, 명예도, 사랑도, 긴 생명에 너무 연연함도 과할 때는 추하게 보인다.   추하게 보일 때, 존재의 목표 또는 진정한 존재 의미와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 크기의 적당함이란 개개인 스스로의 마음 한 쪽에 있을 뿐, 실체도 없고 그것을  잴 수도 없다. 때문에 옳고 그름을 말할 수도 없다는 특성이 있음을 우리는 인정 할 줄   알아야 한다.  

 

  . lim x0   lim xf(x) = c  때로는, 극한으로 수렴된 더 작은 세상의 모습이나, 무한으로 발산된 우주를 그려 봄도   생활의 지혜는 될 수 있다.  넉넉한 마음, 넉넉한 생활 자세의 밑거름으로 작용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각박한 세상살이에 얽매여 너무 허둥거린 적은 없는가?   그것이 돈이나 명예뿐 아니라, 희로애락, 생노병사의 어느 한 문턱 아래서 바둥댈 때,   더욱 그리 할 수 있다. 

 

  . lim xa  {f(x) + g(x)} = α + β  내가 너라면하는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 하려고 하는 자세도 필요하다.  포기하고 복종하고 아부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본다. 이해하고 보듬어 주려는 자세는  이 세상을 더욱 순화되고 부드럽고 아름다운 조직이나 사회의 바탕이 되리라.  나 스스로도 그 예외가 되지는 아니할 것이라고 믿어 본다. 

 

 . sin (900 θ) = cos θ,    tan(1800 θ) = tan θ  내 마음의 합계는 삼각도형의 1800와도 비슷하다. 내가 써먹을 수 있는 정, 인정의 합계는  언제나 180을 넘어 설 수는 없었던 것 같다. 때로는 나 혼자를 위해서 180 전부를 쓸 때  도 있었다. 작은 사랑에 눈 멀 때는 마음 먹고 크게 잘라 주고픈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나, 잘라서 준 만큼 다른 한 구석은 비워지고 있었음이 세월이 지난 지금에야 알게 되었다.

 

  좁쌀 가족, 작은 사람들의 우리가족 모임에서 노인 된 부모, 위를 보나, 귀엽던 자식들,   아래를 보나, 언제나 애쓰는 듯하던 처, 옆을 보나, 볼 때 마다 좀 더 주고 싶었지만 한정  된 것이 인정임을 알게 되었다. 더 주지 않으리, 더 주면 한 편이 모자라게 되니…… 하는   아쉬움이 언제나 있었다. 그리고 미안 했다.

 

  어디, 가족에게만 그리 하겠는가? 회사를 나오면 휘하의 아래 직원들이 그리 보였고, 업무  에 찌들어 헉헉대는 위의 상사들과, 경영목표 채우려는 경영주들이 그리 보였다. 더 보탬  이 되고는 싶었지만 재능의 한계는 항상 그러한 바램을 넘어서지 못하게 막곤 했다.   거리에 나서며 도움 청하는 많은 자선단체들을 대하면서도 그러했다. 국방이나 정치처럼  국가에 나 스스로가 큰 도움은 못 된 것 같다는 생각 들 때도 그러했다.

 

  그러나 쉽사리 자기합리화를 하며 쉽게 잊곤 한다.   삼각형 내각의 합은 1800, 내가 할 수 있는 역량이란, 나의 힘, 재능, 노력, 판단력 그리고  마음이나 인정, 정 까지도 있는 그대로, 지금 가진 그대로를 한정하고 싶었다.   자신에게는 관대한 관용으로, 그러나 타인에게는 깐깐하고 엄하게 대하는 정신자세의 문제  가 여기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내가 할 수 있는 한계는 1800, 나 말고 다른 이가 낼 수   있는 여력은 무한정인 듯 여겼던 것은 아닐까?  

 

 . dy / dx = ax,  y = ax dx + C =  a/2  x2  +  C   d2y / dx2 + 2 dy / dx + y = sin x,  y = (C1 + C2x) e-x cos x / 2    물리나 응용수학에서는 함수 ƒ(x)를 미분하여 얻은 함수인 도함수(導函數),   미분 연산자를 포함한 미분방정식 등이 많이 이용된다.  이들 응용공식들을 물끄러미   보면서 생각해 본다. 미적분이나 미분방정식이 수리, 물리, 응용과학 에서만 국한 되는   함수들이 아니라, 우리 일상에서 복잡하게 얽혀진 사고의 틀에서도 적용되지 않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 본다. 복잡한 사고나 생각만이 아니라, 우리 인체를 구성하는 생물학 측면의  구성요소에도 비슷한 미적분 구도를 엮어 볼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인체를 구성하는 각종 장기며 혈액 그리고 그것을 구성하는 세포며 면역체계 등이 서로   유기적으로 잘 작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다. 각각의 인체구성 요소  들의 기능과 함께 인체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존재의 이유들이 있다. 세포 또는 세포의   구성요소와 장기, 그리고 라고 하는 인격체의 모습을 보면서 미적분, 도함수. 미분  방정식의 관계가 떠 올려 진다.

 

  세포를 구성하는 주요항목 중 하나인 미토콘드리아(mitochondria)에 시선을 집중하여 본다.  체내의 60조 개 세포에는 세포 한 개당 1000~2000개의 미토콘드리아가 있고, 차지하는   부피도 15~25% 정도나 된다고 한다. 그런데 각각의 미토콘드리아는 독립된 DNA 구조를  가지고, 세포와는 별도로 번식하며, 박테리아처럼 숙주인 세포에 기생하며 별개 생명체로  서 세포와 공생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한다.

 

  세포 한 개 한 개가 이들 작은 생명체의 집합이다. 물리적 기능 외에 그들이 어떤 사고를  하고 있는지 까지 미분해 볼 수는 없다. 세포 내에서 번식과 성장 사멸이 별도로 진행   된다 함은 작은 외벽에 갇힌 또 다른 작은 세상이 그곳에 있는 것이다. 이를 두고 조선   말엽 한의학자 이제마는 인체를 소우주(小宇宙)라고 불렀다. 미분된 세포나, 세포를 이루  는 생명체를 알지는 못하지만 생명력이 이어지는 한, 개인은 그 우주를 이끌고 가는 주체  일 수도 있다.

 

  내가 아는 바는 그냥 나일 뿐, 더 큰 세상의 일이나, 더 작은 세상의 일에 대하여는 알 수가 없다.   하늘 위의 더 큰 우주도, 내 몸 속의 더 작은 우주도 알면서 살아간다고 쉽게 이야기할 수 없다.   그렇기에 채우고자 하는 크고 작은 욕망들이란 토막 난 한 조각의 부질없는 짓에 불과 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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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열심으로 살아가되,   부질없는 욕망에 끌려 허덕이는 때는 없도록 하자.  (), 명예, 영토, 애정, 운동, 취미, 건강, 생명 …… 

 

       2009. 6. 29.(월)

       오갑록 (K L Oh)

 

 

 (참고자료)

 

□  최저생계비와 최저임금

 

. 우리나라 헌법 32조에는 "국가는……적정임금의 보장에 노력해야 하며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최저임금제를 시행해야 한다" 라고 하여 근로자를 위하여 적정임금을 보장하고 최저임금제를 시행하도록 하고, 1986년 최저임금법이 제정되었다.

 

. 2009년도 최저생계비 (국민기초생활 보장법에 의한 보건복지가족부 고시)  . 1인 가족 기준: 491천원/ (16,361/),   . 5인 가족 기준: 1,572천원/ (52,401/)

 

. 2009년도 최저임금 (노동부 고시)  . 시급 4,000  . 일급(8시간기준) 32,000

 

  . 월급(40시간·월209시간기준 주휴수당 포함) 836,000    4대 보험료 차감 : -62,610    국민연금 37,620, 건강보험 21,230, 고용보험 3,760   . 월급(44시간·월226시간기준) 904,000

 

. 내년(2010년)  최저임금 :  시간당 4,110원, 인상율 2.75%                                     최저임금위원회 의결 (2009.6.30.)

 

□  최저생계비

                                                                                                          (

다음백과)

. 최저임금 결정을 위한 최저생계비  . 호주 연방재판소의 Harvester Standard (1906)  . '문화사회에서 생활하는 인간으로서 생각해야 할 평균노동자의 통상의 필요'를 고려하고     '합리적 오락'이 가능한 5인 가족의 미숙련노동에 소요되는 최저수준의 생계비를 기준

 

. 대표적 최저생계비 산출방식

 

. 엥겔 방식  . 독일 작센 지방 통계국장이었던 E. 엥겔이 사용한 방식  . 벨기에 노동자의 1853, 1891년의 생활수준을 비교하기 위해 최저생계비를 산출  . "가족이 빈곤할수록 총지출 중에서 더욱 많은 부분이 음식물의 구입에 쓰여진다"라는     '엥겔 법칙'을 도출  . 마이네르트의 영양학에 의해 중간 정도의 노동에 종사하는 성년 남자 가족의 식비를     계산하여 이것을 엥겔계수로 나누어 총생계비를 산출하는 방식을 사용함

 

. 론트리 방식  . 영국(1901), 실태생계비 분석 시 '빈곤선'이라는 일정 생활수준 결정을 위해 산출한 방식  . 식비와 기타 비용 품목을 조사하여 전생계비를 산출

 

. 앨런-바울리 방식  . 영국(1935) 실태생계비 분석을 위한 방식   . 가계지출의 각 비용 품목액은 총지출액이 증가함에 따라 증가하는 정도가 틀린 것을     이용한 방식  . 사치성 잡비용 품목을 영(0)이라고 하고 최저생계비 산출에 이용되어,    문화생활 비용이 배제되는 문제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