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심과 의문......眞/. 진리와 철학

진리주장 그리고 철학

오갑록 2014. 1. 17. 00:00

   초월과 신비...... 

  진리주장

 

   철학은

   인간이 지닌 궁극적인 문제를 문제 삼으면서도

   그것에 대한 답을 주려고 하지 않는다.

 

   영혼과 육체

   시간과 공간

   운명과 자유의지

   죽음과 사후에 관한 문제

   1원인의 아르케나 우어스토프에 관한 문제

   오묘한 인생

   광활한 우주의 생성과 소멸

   그리고 그 전개 ……

 

   그러나 종교는

   이러한 어떤 궁극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해결이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기독교는

   우주에 대하여

   신의 뜻에 의하여 이 우주가 시작됐으며

   이 우주를 최초로 움직인 자가 신,

   바로 그 분의 "말씀"이 있어서라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불교는

   우주의 시작에 대해 침묵하지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마음이 지은 것이다 면서

   천라만상을 가득 채우는

   인생과 우주의 모든 것이

   "마음"에서 시작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기독교가 이 세상 모든 것이 신의 뜻에서 시작했다고 한다면

   불교는 우리 마음에서 시작했다고 답하고 있다.

 

   이처럼

   철학에서 문제는 삼되 그 답을 아니하는

   인간이 지닌 “궁극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종교는 명확하게 선을 긋고

   “믿음”이라고 하는 전제를 달아서 답하고 있다.

 

       **

 

   소설 “광장”의 글 한 토막을 다시 읽어보면서

   종교계 어느 한 교수의 진리주장에서 본

   그러한 “믿음”의 범주가 새롭게 인식된다.

 

   말씀이나 마음에 “믿음”을 주는 덩치 큰 종교집단과

   봄 들판에 부유 하는 민들레 씨앗

   실 바람, 잔물결에 의미를 두는

   나 모양으로 째째한 작은 부류의 사람들과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철학자가 본다면 같은 답을 붙들고

   허공에 소리치는 같은 부류는 아닐까?

 

   우주의 시작과 끝

   영혼과 육체

   시간과 공간

   운명과 자유의지

   죽음과 사후에 관한 문제……

 

             ......

 

            사람들이 자기의 밀실로부터 광장으로 나오는 길목은

            저마다 다르다.

            광장에 이르는 골목은 무수히 많다.

 

            그곳에 이르는 길에서

            거상(巨象)의 자결을 목도 한 사람도 있고

            민들레 씨앗의 행방을 쫓으면서 온 사람도 있다.

            그가 밟아 온 길은 그처럼 갖가지다.

 

            어느 사람의 노정이 더 훌륭한가라느니 하는 소리는

            아주 당치 않다.

            거상(巨象)의 자결을 다만 덩치 큰 구경거리로 밖에는

            느끼지 못한 바보도 있을 것이며

 

            봄 들판에 부유 하는 민들레 씨앗 속에 영원을 본 사람도 있다.

                                                          (.인훈 “광장” 중에서)

 

      2005.5.6.

      오갑록 (K L Oh)

      “광장”을 읽으며......

 

 

 

■ 철학에서 문제 삼는 것들

        18세기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네 가지 물음에서 요약

 

     나는 무엇을 아는가? :

           (인식론의 주요 문제)

 

      . 외부의 사물()들은 어떻게 인식되는가?

      . 외부 사물은 실재하는가?

      . 인간의 지각 능력에 독립해서 존재하는 실재란 과연 있는가?

      . 있다면 인간의 인식은 어떻게 "거기 밖(out there)"에 있는 실재에 대응할 수 있는가?

      . 인식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 하나의 인식이 참이 될 수 있는 기준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 그리고 참인 인식으로부터 어떻게 지식을 획득할 수 있는가?

 

      한편 아래와 같은 형이상학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은

      대부분 인간의 인식 방법으로 해결이 불가능한 것들이다.

 

      . 신은 존재하는가?

      . 우주의 시작과 끝은 존재하는가?

      . 시간과 공간은 연속하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

         (윤리학 주요 문제)

 

      . 옳고 그른 것들 사이에 차이가 있는가?

      .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찌 증명할 수 있는가?

      . 실제 상황에서 우리는 옳고 그름에 대한 이론적 관념들을 어떻게 적용하는가?

 

     나는 무엇을 바라는가? :

          (미학의 주요 문제)

 

      . 예술은 인간에게 어떤 쾌를 주는가?

      .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 예술 작품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

         (사회 철학의 주요 문제)

 

      . 인간은 어떻게 해서 사회를 이루는가?

      . 국가는 어떻게 성립되고 또 어떻게 운영되는가?

                                                                                       자료 :    Fm 위키백과

 

 

 

   ‘존재하는 것’들의 ‘아르케’를 찾아서

               글쓴이 김., 경향신문 (2007.5.11) 중 일부발췌

 

 

□ 아르케란 무엇인가?

 

‘진정한 앎(sophia)’이란 ‘사물의 첫 번째 원인과 원리(arche)들에 관해’ 아는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아르케’란 무엇인가? ‘아르케’는 시간의 맨 처음을 뜻하며, 공간의 가장 앞 자리를 말한다.

……

따라서 아르케는 ‘지휘권’ ‘지도력’ ‘권력’을 뜻한다. 어떤 모둠을 이끌어가는 권력이 없는 상태를 아르케(arche)가 없는(an-) ‘아나르키아(anarchia; anarchy)’라고 부르며, 그런 상태의 모둠을 지향하는 태도를 ‘아나키즘(anarchism), 곧 ‘무정부주의’라 이른다. 반면, 권력(arche)이 한 사람(mono-)의 군주에게 집중되어 있을 때, ‘모나르키아(monarchia; monarchy), 곧 ‘군주정체’ 또는 ‘전제정치’라고 부른다.

 

 

 

□ 있는 것들이 비롯되는 아르케

 

그리스 최초의 철학자들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사유의 칼날로 쪼개고 쪼개,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어 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비롯되는 최초의 시작점, ‘아르케’는 과연 무엇일까? 이것이 그들이 풀고자 했던 문제였다.

……

첫째, 자르다 보면 어느 순간엔가 정말 끝내줄 정도로 작디작은 조각이 남으며, 그놈을 자르는 순간, 아무것도 남지 않고 사라져버릴 가능성이 있다.

……

둘째, 쪼개고 쪼개서 더 이상 쪼개지지(tomos) 않는(a-) 조각에 이르는 가능성이다. 분할은 어느 지점에서 멈추고, 그 지점에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아토모스(atomos; atom)’가 단단하게 서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있는 것들’이 비롯되는 기본요소, 즉 ‘아르케’다.

 

흔히 최초의 철학자라 불리는 탈레스는 그것을 ‘물’이라고 보았다. 종이를 쪼개면, 마지막에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아르케가 나타나는데, 그것이 종이의 조각이 아니라, 물이란다. 그 물 조각들을 추려 단단하게 꼭꼭 눌러 뭉치면 원래의 종이가 복원된단다. 싱싱한 나무도, 단단한 돌도, 하늘거리는 꽃도, 풍요로운 땅도 다 물 조각들의 독특한 결합, 신비로운 변신의 결과란다. 타오르는 모닥불도 물 조각들의 이글거리는 솟구침이란다. 탈레스는 사유의 힘을 가지고 눈에 보이는 현상 너머로, 그 현상을 있게끔 낳아준 최초의 근본요소, 아르케를 꿰뚫어본 것이다.

 

보이는 것은 보이는 대로만은 아니다. 그것을 있게 한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metaphysica)적인 요소, 강력한 리더십의 원리가 있다. 그것이 바로 ‘있는 모든 것’의 아르케다. 있는 것들의 시작점이며, 있는 것들을 이끌고 가는 원리다. 아낙시메네스가 공기라고 한 것도, 피타고라스가 수()라고 한 것도, 헤라클레이토스가 불이라고 한 것도 다 만물의 아르케에 대한 그들만의 철학적 통찰의 결과였다. 그들은 시간의 흐름과 현상의 변화무쌍함 너머로 모든 것을 낳고 움직이게 하는 영원하며 불변하고 근본적인 아르케를 찾으려 하였다. 그것은 시간을 넘어서 있으며, 생겨난 것도 소멸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우주는 시간적으로는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한 지속의 세계로 그려진다.

 

 

□ 시간이 비롯되는 아르케

 

내가 있다. 나를 낳아준 분은 나의 어머니, 아버지다. 그분들을 낳아준 분은 그분들의 어머니, 아버지다. 그렇게 계속 올라가고 또 올라간다면 어떻게 될까? 끝없이 계속 올라갈 수 있을까? 아니면 어떤 지점에서 멈추게 될까? 만약 어느 지점에서 멈춘다면, 그것은 ‘태초(太初), 곧 시간적 아르케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생겨나며 없어지는 ‘있는 모든 것’들이 시작되는 지점, 그것이 태초다.

 

그리스 시인 헤시오도스는 이렇게 노래했다. ‘태초(아르케)로부터, 있는 모든 것들 가운데 처음 태어난 것./맨 먼저 카오스가 태어났고, 그 뒤를 이어서/넓디넓은 가슴의 가이아가 태어났다.(‘신들의 계보’ 115~117)’ 그리고 땅의 여신 가이아가 만물을 낳는다. 그렇다면 가이아, 카오스가 태어나기 전, 즉 태초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당연히 아무것도 없다. 만약 무엇인가가 ‘태초’에 앞서 있다면, ‘태초’는 진정한 태초가 아니며, ‘태초’에 앞서 있던 것이 진정한 태초일 것이다. ‘아르케란 그것 자체가 반드시 다른 것 뒤에 오지 않아야 하며(그 앞에 아무 것도 없어야 하며), 본성상 그것 다음에 다른 것이 있거나 생겨야’ 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까? ‘말씀이신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기 전에는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 ‘천지가 창조되던 태초 이전에 무궁한 시간 동안 창조주는 홀로 있었을까?’ 그러나 이 질문은 엉터리다. 왜냐하면 아르케(태초) ‘이전(以前)에’ 무엇이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태초로부터 시간은 비로소 시작되며, 최초로 만물이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전’은 말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 아르케 ‘이전’이란 없으며, ‘없는 것을 사유하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조각글’ 6).

 

그리스 신화나 기독교의 세계관은 우주의 태초, 즉 아르케를 놓고 들어간다. ‘시간이 비롯되지만, 시간을 넘어서 있는 아르케’로부터 ‘시간 안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사라지는 것들’을 설명한다. 무한한 소급은 없다. 그리고 무한한 진행도 없다. 우주는 시작과 끝을 갖는다. ‘끝(teleute)이란 본성상 그것 자체가 그(아르케)와 정반대로, 다른 것 다음에 있어야 하며, 그것 다음에 다른 어떤 것도 없어야 한다.(‘시학’)’ 그 뒤에 뭐가 있다면 ‘끝’이 아니란 말이다. 여기서 ‘끝’은 모든 것이 끝장나는 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 ‘끝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모든 것들이 허무로 사라진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있는 모든 것들’이 신과 더불어 마침내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성을 완결하는 절대적 지점을 뜻한다. “신은 ‘있는 것’들의 아르케와 끝과 그 가운데를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플라톤, ‘법률’). 물론 시간의 흐름 속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허무로 쓰러지고 만다. ‘하지만 소망은 있다. 그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굴레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하리라는 소망이다.(‘로마서’)’ 허무를 넘어 완전한 존재성을 얻게 된다는 소망, 파멸로부터의 자유를 향한 희망의 말이다.

 

서구 사유의 근본적인 구조는 ‘있는 모든 것들’의 질료(質料)적인 아르케, 그리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의 시원(아르케)에 대한 열망에 의해 어느 정도는 이미 결정된 것은 아닐까?

 

                                                                

 

■ 종교와 초월

                                                                                                                              .정호

 

□ 종교체험의 구조와 본질

 

      프로이트(S. Freud)“종교는 인간의 나약함을 참을 수 있게 만들기 위한 필요성에서 생긴 것”이고 그 반응하는 행위 양태 또한 과거 상황에서 이미 경험적으로 배운 적절했던 방식을 현재상황에서 재연하는 것으로서 구체적으로는 유아기를 재연하는 것이다고 했다. 즉 종교는 유아기적 투사가 그 원형이다. 신을 공포와 존경과 자애로움을 수반하는 “완전한 타자”로 창조하고 그에 대한 확신과 의존을 통해 유아기의 안정감을 재연한다. 그러나 이러한 확신과 의존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무력성은 그대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종교는 이미 확신의 내용과 실제와의 연관성 자체를 근본적으로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프로이트에게 “종교”는 일종의 “환상”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종교는 인간의 사회적 부적응, 욕구 불만의 상황을 최소한 견딜만한 정도로 완화 시킴으로서 사회적 통제를 도와주는 것이고 이 측면에서 “많은 성취를 이루었다”고 하면서도 “인간의 유아성의 운명은 극복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 우주의 수수께끼를 풀고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여야 하는 종교적 사고는 대부분 근거가 없으며 진리성이 희박하기 때문이다”라고 프로이트는 말하고 있다.

 

“아무것도 없다”가 한계 상황에서 인간이 받아 들여야 할 종국의 해답이라고 하기에는 삶의 상태는 너무도 무기력 하다. “진리성이 희박한” 종교의 의미와 영향은 학문적 설명으로 단정 내리기에는 사회적으로, 역사적으로 너무도 깊고 넓으며 여전히 그 문제의 성격은 모호하고 복잡하다.

 

 주목할 점은 초월적 신성에 흔히들 결합되어 있다고 믿어지는 완전 선의 개념은 종교 체험에 관한 일련의 경험적 연구 성과에서 그렇게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토에 의하면 신성과 절대 선의 개념은 종교적 반응과 관련한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현세의 행위에 대한 내세에서의 응보와 관련되면서 줄 곧 혼동되어 온 것으로서 비록 그 과정에서 병립적인 결과도 빚긴 하였지만, 신성이란 원천적으로 윤리적인 개념에 중립적이거나 별개의 개념이다. 프로이트는 “일반적으로 인간이 현재보다 종교적 교리가 무한정 강했을 때 더 행복했다고 볼 수 없으며 더 도덕적이었다고 볼 수 없다.”고 했다.

 

 

□ 한계적 상황과, 초월적인 것에 대한 관심

 

종교는 권력의 분배나 통치에 관심을 두는 정치제도와도 다르고 성과 세대 또는 혈연 관계를 규정짓는 가족제도와도 다르다.

 

종교는 사회적 실재이면서도 이른바 “초월적인 것”에 대한 인간의 관심과 태도에 관한 것이다. 일상적이고 경험적인 것을 초월한 것에 대한 관심이 실제적인 사회적 삶의 현상들과 중대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은 매우 역설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초월적인 것” 에 대한 관심과 인간의 실제적. 사회적 삶이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를 해명하는 것이 종교에 대한 탐문의 핵심적인 과제임을 일깨워 준다. 왜 인간들은 “경험을 초월하는 어떤 것”을 필요로 하는가?

 

파슨스(T.Parsons), "경험을 초월하는” 어떤 것, 즉 “초월적 관계”를 인간은 왜 필요로 하는가?

왜 사회는 그것을 구현하고 유지할 그러한 신앙과 의식과 제도들을 필요로 하는가?

종교와 사회에 관한 기능주의적 관점에서는 그러한 욕구가 인간실존의 세가지 기능적 특성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보여 준다고 했다.

 

첫째, 인간은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살아간다. 달리 말하면 인간의 실존은 우연성에 의해 특정 지워진다. 운명은 변덕스럽고도 불확실한 여신에게 달려 있으며 “쥐나 인간이 세워 놓은 최선의 계획은 종종 수포로 돌아간다”는 말은 여전히 사실이다.

 

둘째, 삶의 조건들을 통제하는 인간의 능력은 비록 증대 되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한정되어 있다. 어느 면에서 인간의 상황은 그의 욕구와 환경 사이의 알력에 대해서 무력성으로 특징 지어질 수 있다. 무력성 또는 “불가능한 상황”은 인간이 욕망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 죽음, 고통, 강압 과 같은 “한계점”에 직면하게 된다.

 

셋째, 인간은 사회적 삶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좌절과 상실과 결핍의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 이 또한 인간 실존의 또 다른 기본적인 특징이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있고 지배와 피지배가 있다. 더욱이 지배를 위한 질서는 권위를 내포하고 권위는 복종을 요구하며 통제와 감독은 강압과 고통을 낳고, 항거와 저항은 종종 좌절과 절망을 낳는다. 우리의 진정하고도 의로운 소망은 왜 불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가? 왜 선하고 정직한 자가 불행하며, 악하고 탐욕스런 자가 행복을 누리는가? 경험적 현실세계에서 가르치고 요구되는 규범과 덕목들은 그러한 물음 앞에 거의 좌절하기 일쑤이다.

 

이러한 현세의 한계상황은 급기야 초월적인 것으로 다가 가게 하고, 인간은 그러한 의존적 연관을 통해 그 위기를 돌파하거나, 또는 초월자의 자애로운 섭리의 일부로 환원시키는 자기 적응 기제를 통해 현실의 의미를 순응적으로 회복한다.

 

산타야나(G. Santayama)가 말하듯, “우리의 지식은 길을 비춰 주는 연기 나는 소나무 횃불이다. 그러나 한 발짝 앞에는 신비와 불안의 공허가 덮여 있다.

 

 

□ 종교란 무엇인가?

 

. 궁극적인 것에 관한 신조 내지 신념 체계로 이해하는 관점에서 신앙의 요소로 인식하고 있다.

 

   . 스펜서(H.Spencer), “이 세계의 존재는 한 신비로서, 우리의 해석을 요구한다”

   . 뮐러(M.Muller), “인간으로 하여금 여러 가지 이름과 여러 가지 모양으로 무한 자를 인식할 수

      있게 하는 능력 혹은 성향이 곧 종교이다.

   . 케어드(E.Caird)는 “종교는, 우주에 대한 인간의 궁극적인 태도로서 사물에 대한 그의 전체적 의식의

      의미를 간취 하는 것이다.

 

. 종교를 궁극적인 것에 대한 지적 태도라기 보다는 정서적인 태도로 보는 관점이 존재한다.

 

   . 슐라이어마허(F.Scheiermacher)는 “종교는 절대 의존의 감정이다.

   . 톰슨(D.Thompson), “종교는 자연의 질서와 요청된 초자연자 사이에 있다고 보는 관계로부터

      일어나는 인간 정서의 집합이다.

   . 현대 종교사상에 영향을 준 오토(R.Otto), “종교란 본질적으로 무한 타자와의 접촉에서 생기는

      경의와 신비의 감정이다.

 

. 종교는 행동을 낳게 하는 태도와 목적을 형성하게 하는 것, 즉 단순히 어떤 인생관과 세계관을 지지

      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따라 실천하게 하는 것이다.

 

   . 칸트(I.Kant), “종교란, 우리의 모든 의무를 신의 명령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다.

   . 철학자 제임스(W. James), “그 무엇인가를 열성적으로 지지하는 기질이다.

 

. 종교란 인간의 의지를 신의 의지와 부합시키는 것이라는 견해이다. 이른바 높은 수준의 윤리적 당위와

      도덕적 의무를 종교와 관련시켜 강조하는 이론들의 기초에는 이 같은 관점이 전제되어 있다.

 

   . 로이스(Royce), “종교는 도덕법칙의 헌신을 강화시킨다.

 

. 그러나 종교에서의 초월자는 근본적으로 초월자인 한에서 경험세계의 윤리성 또한 넘어서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 초월자는 응보의 관념이라는 인간 본성을 통해 윤리를 담보하는 작용을 하지만

      형식적으로는 윤리에 대해 중립적이다.

 

. 종교를 사회적 가치의 추구 혹은 보존으로 이해하려는 입장이다. , 가치란 우리가 얻으면 보람 있는

      것이고, 그러므로 얻고 보존하고 증가시켜야 할 성질을 의미한다.

 

   . 헤이든(E. Haydon), "종교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생명에 만족을 줄 수 있는 가치를 포착하는

      것이다.

   . 에임스(E. Ames), "종교는 최고 가치의 보존이요, 최고 사회 가치에 대한 의식이다.

 

. 반 종교적인 관점, 즉 종교는 인간의 바람직한 삶을 위해 없어져야 할 것이라는 입장도 있다.

 

   . 2천 년 전 학자 루크레티우스(Lucretius), “종교는 모든 악의 원인이다.

   . 라이나흐(S. Reinach), “종교는 우리 기능의 자유로운 활동을 저해하는 양심의 망설임이다.

   . 브라운(L. Brown), “종교는 자아를 보호하려는 병리학적 표현이다.

   . 마르크스(K. Marx),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계급사회 내에서 인민 대중의 핍박과 무지를 결정적인 빌미로 삼아 사회적으로 출현한 것이다.

 

. 종교가 갖는 공통적인 핵심은 “자신의 가치가 초월적인 실재에 뿌리박고 있다는 확신에 의거하여

      이 경험 세계 내에서 인간이 믿고 행하고 느끼는 것이다.

 

   . 비어즐리(Beardsley), "종교란 인간의 본성 및 우주의 본성,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또 실재와 가치에 관한 진리를 추구하는 최선의 방법에 관한 일련의 상호 연관성 있는 신념들 또는

       그러한 신념들로 결정되는 태도 및 실천이다.

   . 프롬(E. Fromm), “개인에게 삶의 목표와 헌신의 대상을 부여해 주는 사상과 행동의 체계로서,

      한 사람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이 단체로서 받아 들일 수 있는 그 어떤 것이다.

 

 

  프랑스 대입 논술

           “프랑스 바칼로레아” 출제 문제 중에서

 

   . 역사가 심판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당한가 ?

   . 과거를 망각하면서 현재를 이해 할 수 있는가 ?

   . 법은 가끔 무시해야 하는가 ?

 

   . 행복은 모든 행동의 목적인가 ?

   .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의 경계선을 규정할 수 있는가 ?

   .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행복이 가능한가 ?

 

   . 지금의 나는 내 과거의 종합인가 ?

   . 사랑이 의무일 수 있는가 ?

   . 행복은 단지 한 순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인가 ?

 

   .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나 ?

   . 행복은 인간에게 도달 불가능한 것인가 ?

   . 철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

 

   . 역사가는 객관적일 수 있는가 ?

   . 역사는 인간에게 오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에 의해 오는 것인가 ?

 

   . 예술작품은 반드시 아름다운 것인가 ?

   . 예술 없이 아름다움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가 ?

   . 예술이 인간과 현실의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 ?

 

   . 우리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만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

   . 무의식에 대한 과학은 가능한가 ?

 

   . 자유는 주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싸워서 획득해야 하는 것인가 ?

   . 노동은 욕구 충족의 수단에 불과한가 ?

   . 자유를 두려워해야 하나 ?

 

   . 국가는 개인의 적인가 ?

   . 권력 남용은 불가피한 것인가 ?

   . 다름은 곧 불평등을 의미하는 것인가 ?

                                                             자료 : 조선.일보,  2005.7.16. (토) (A3)에서

 

 

□  프랑스바칼로레아철학 시험문제

                                                             1993 ~ 2002년 출제문제 중에서

                                                          프랑스 바칼로레아 관련 홈페이지

. 노동은 욕구 충족의 수단에 불과한가?

. 지식은 종교적인 것이든 비종교적인 것이든 일체의 믿음을 배제하는가?

. 생물학적 지식은 일체의 유기체를 기계로만 여기기를 요구하는가?

.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는가?

 

. 우리는 정념을 찬양할 수 있는가?

. 평화와 불의가 함께 갈 수 있나?

. 죽음은 인간에게서 일체의 존재 의미를 박탈해 가는가?

. 행복은 인간에게 도달 불가능한 것인가?

 

. 꿈은 필요한가?

. 행복은 단지 한 순간 스치고 지나가는 것에 불과한가?

. 철학자는 과학자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 역사가는 객관적일 수 있는가?

 

. 유토피아는 한낱 꿈일 뿐인가?

. 역사는 인간에게 오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에 의해 오는 것인가?

. 예술 작품은 반드시 아름다운가?

. 예술 작품 복제는 그 작품에 해를 끼치는 일인가?

 

. 우리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만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 계산, 그것은 사유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 오류는 진리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 자연을 모델로 삼는 것이 어느 분야에서 가장 적합한가?

 

. 여론이 정권을 이끌 수 있는가?

. 노동은 종속적일 따름인가?

. 의무를 다하지 않고도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가?

.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것에도 가치가 존재하는가?

 

. 정열은 우리의 의무 이행을 방해하는가?

.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행복이 가능한가?

. 진리가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할 때 진리 대신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환상을 좇아도 좋은가?

. 지금의 나는 내 과거의 총합인가?

 

. 감각을 믿을 수 있는가?

. 예술 작품은 모두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가?

. 법에 복종하지 않는 행동도 이성적인 행동일 수 있을까?

. 의무를 다하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 무엇을 비인간적인 행위라고 하는가?

. 어디에서 정신의 자유를 알아차릴 수 있나?

. 타인을 존경한다는 것은 일체의 열정을 배제한다는 것을 뜻하는가?

.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나?

 

. 철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 권력 남용은 불가피한 것인가?

. 자유는 주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싸워서 획득해야 하는 것인가?

. 예술 없이 아름다움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 권리를 수호한다는 것과 이익을 옹호한다는 것은 같은 뜻인가?

 

 

 

■ 영혼에 대한 현대철학의 해석

                 - 존 힉의 경우-                                               글쓴이  .상형,  Fm 선우 홈페이지에서 

                                                                                     일부 주요주제의 내용을  요약해 봄

 

 . 현대철학의 대답을 주기 위한 시도로 이루어진 논문임

   .  인간의 영혼은 사후에 존재하는가?

   .  그것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 존 힉은 영국 경험론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으며

   . 인간의 영혼은 사후세계에서 존재하며,

   . 현재의 종교신앙의 체험을 통해 알 수 있다는 입장을 보임

   . 그는 종교다원주의의 방법론을 통해 보려고 함

 

. 종교적 신앙 행태를 세 입장으로 설정하여 종교다원주의를 유도

   . 배타주의, 다른 입장을 배척

   . 포섭주의, 공통성을 인정

   . 종교다원주의, 자기 종교의 내용이 다른 종교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난다고 인정

 

. 죽음은 물리적 육신의 종말을 의미하나, 예술적이나 종교적 측면에서는 종국의 끝자락이 아니다.

   . 경험이 물리적인 영역을 제외하더라도 이런 사실이 우리에게 알려질 다른 영역은 있는가?

   . 육탈된 영혼은 저 혼자 존재하는가?

. 힉은 영혼에 대한 가설과 종교다원주의적 시각을 통한 시도를 함

   . 우리의 의식도 사후세계에서는 다양한 층위의 삶에로 연결된다고 봄

 

 

  인간은 종교적 동물이다.

 

. 인간은 영혼의 활동을 통해 비로소 인간으로서 자격을 갖추게 된다는 뜻

   . 과연 영혼은 존재하는가?

   . 만일 영혼이 존재한다면, 그 영혼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는가?

   . 그리고 그런 영혼의 존재를 우리는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

   . 또 어떤 영혼이 한 특정인의 영혼으로서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과 어떻게 결합되고 또 어떻게 분리되는가?

 

. 플라톤, 사람이 죽을 때 영혼은 소멸되지 않고 그의 육신과 분리되어 살아남는다

  유가,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 조차 의심

 

. 종교철학의 주제 중에서 영혼론에 해당하는 본 논문은

   . 구체적으로 현대의 종교철학자인 존 힉의 입장을 드러내는데 그 목적이 있음

. 힉은 자신의 사상적 배경인 기독교 신앙을,

   . "인간을 하나님께로 끌어 올리기 위해 하나님 자신이 인간이 된 사건에 대한 신앙"으로 묘사

 

. 복잡한 교리나 신학적 체계를 다루는 학자들이라면 몰라도, 외형상 신앙인들의 순수한 삶은

  심지어 모든 종교에서 거의 유사한 행태를 띠고 드러난다.

   . 힉은 이런 모습을 다민족 종교 교도들에게서 보고,

     영혼의 모든 종교활동은 경험적으로 동일한 것이라는 가설을 설정하게 되었음

 

. 그런데 종교다원주의는 두 가지의 상호 모순적인 전제를 함축하고 있음

    . 첫째, 각 종교는 진리에 있어서 대등한 위치를 갖는다는 것과,

    . 둘째, 모든 종교는 결국 같은 목적을 향하고 있다는 전제

 

. 이것이 가능 하려면 절대적 위치에 있는 어떤 초월적인 판단자가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요청되는데,

    . 힉은 그것을 도리어 드러난 종교생활의 체험으로 끌어내려 설명

    . 사실 영혼의 불멸은 우리가 쉽사리 증명해 보일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 육신의 오감을 통해 그 존재를 객관적으로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므로,

   . 그것은 영혼과 육신의 관련성이 변화를 일으키는 죽음의 사태를 분석해 봄으로써

   . 영혼의 존재와 속성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함

 

. 원래 이 논문은 죽음이라는 사태를 통해 영혼의 문제를 탐구하려는 시도로서

   . 죽음, 육탈된 영혼 및 부활 내지 환생에 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야 하나,

   . 육탈의 문제까지 만을 다룬 것

 

 

  방법론 : 다원주의

 

. 존 힉의 종교철학적 방법론은 다원주의이다.

    . 힉은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의 다원주의 입장을 받아들여 종교를 말함

 

. 기독교, 힌두교, 이슬람교, 불교 등이 있는데,

   . 각각은 내부의 신념 골격 체계를 갖고 특정한 종교적 삶의 형식의 틀을 제공하면서,

   . 다른 종교 및 세속 세계로부터 구별되는 두꺼운 외피 조직으로 싸여 있다.

   .  따라서 이들은 특정한 신조를 품고 있는 상반된 사회.종교적 실재들이며,

   . 각 개별 종교는 상호 배타적 집단의 일원으로 간주된다.

 

. 종교적 삶의 이해는 종교에 관해 어떤 방식으로 의문을 제기하도록 우리를 유도한다.

   . 즉 한 종교가 고백하는 신념들은 하나님이나 궁극 원인에 대한 신념이며,

   . 그 자체로서 인간구원이나 해방의 방법을 규정하고 따라서 영적 생사의 문제가 되기도 한다.   

   . 세상의 종교들은 다원적인 측면에서 볼 때

     우리에게는 구원의 진리를 소지하고 있다는 경쟁적 주장들로 주어진다.

   . 각 집단은 자기 자신의 복음이 진리이고, 다른 교리들은 자신들과 다른 만큼 거짓이라고 믿음

   . 각각은 자기가 증거하는 구원의 방식이 영원한 축복에 이르는 인증된 길이자,

     유일하게 확실한 길이라고 믿고 있음

 

. 이런 다양한 주장에 직면하여 제기되는 질문은, 어느 것이 참된 종교인가? 이다.

……

 

. 힉은 자신이 속한 기독교 입장에서 그 용어를 사용하여 세 가지 선택지를 기술하고 있음

 

. 배제주의 exclusivism

   . 자기의 종교 안에만 구원, 해방이 있는 것으로 한정하고, 다른 집단은 그런 가능성에서 배제하는 것

   . 소위, '기독교 밖에는 구원은 전혀 없다.'는 입장

 

. 포섭주의 inclusivism

 

   . 구원에 대한 인간 존재 개념의 변형

   . 그 핵심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집행은 모든 인간적 죄를 망라하였으므로,

     모든 인류는 이제 하나님의 자비에 열려 있고

     심지어 기독교의 그리스도를 들어본 일이 없고 또 십자가의 죽음을 몰라도 구원이 가능하다는 주장

 

. 다원주의 pluralism

   . 구원 혹은 해방 및 누적적인 종교 전통 사이에 대한 다원주의로서

   . 다원주의란 인간 존재의 자기 중심성으로부터 실재 중심성에로의 변형이 모든 위대한 종교 전통들의

     맥락 내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견해

……

 

. 철학적으로 진술된 다원론은 세계적 신앙이 실재 혹은 궁극원인의 상이한 지각과 개념들

   그에 대한 각각의 대응들을 다양한 주요 문화적 방법들 내에서 체현한다는 견해

   . 각각의 방법 내에서 인간 존재의 자기 중심성으로부터 실제 중심성에로의 변형이 일어나고 있다는,

   . 인간적 관찰에 관한 한 동일한 정도로 일어나고 있다는 견해

 

. 구체적으로 그것은 인간의 영혼의 활동에서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살펴 봄

 

 

□ 죽음이란 무엇인가?

 

. 죽음에 대해 자연주의적이거나 인간적인 수용이 틀림없이 있을 수 있음

   . 인문주의자들 사이에서 죽음에 대한 해석은 상이할 수 있으나

   . 대부분 생물학적 접근에 대해서는 합리적이라고 수용함

 

. 죽음이란 개인의 발전 과정의 필요한 부분이라 보여지며

   . 인간을 포함한 어느 종이라도 죽음을 통한 지속적 손실로 균형을 맞추는 이런 징발 없이 새로운

     구성원이 태어난다면, 지구는 곧 그들을 위한 공간과 자양분이 없어질 것이고,

   . 그 종들은 그 결과 넘쳐 나서 자멸하게 될 것임

   . 각 세대는 번갈아 가면서 다음 세대를 위해 제거되어야 하는 운명을 갖고 있음

   . 생명의 시초로부터 이러한 종의 새로운 개체 구성원들의 지속적인 계승이 있어왔음

 

. 종이 환경의 변화에 적응력을 증진하고 대응할 수 있게 된 것은

   . 각 세대에서 일어나는 작은 임의적 차이를 통해서 이며

   . 자연적 죽음은 변화하는 조건에 순응할 수 없는 개체군의 제거로 간주됨

. 재생산과 순응의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 낡고 비효율적인 것들은 자연사에 의해 제거되고,

   . 재생산과 적응에 효과적인 새로운 것들에 의해 대치됨

   ……

 

. 이런 암울한 현실을 고려할 때 우리는 모든 삶이 고()라고 하는 석가의 가르침을 부인하기 힘 듬

 

. 종교들이 인간적 성취의 본성(열반 등)에 대해 제공하는 관념에 도달해야 하는데

  힉이 보기에는 그런 성취가 단일한 세상의 삶에서는 도달되지 않는다는 것임

   . 예를 들어 석가가 보리수 아래에서 정각에 도달했을 때, 그에 앞서 이미 수십만의 삶이 있었다는 것

     , 한 사람의 세상 삶은 깨달음에 도달하는 데 충분치 않다는 것임

   . 서양의 기독교 전통에서도 인간 존재의 선한 목적을 인간의 잠재력의 실현으로 이해한다면,

     단순한 한 세상의 삶의 공간 내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것이 분명함

   . 하나의 삶 내에서 단지 몇 사람이 인간의 잠재력 성취를 향한 긴 여정을 가고,

   . 조금 진보하거나, 상당수가 거의 진보하지 않고, 어떤 이는 심지어 역행하기도 함

   . 일반적인 모습에서, 인간의 잠재력은 통상 이 현재의 삶에서 성취되는 것이 아님

 

. 에리히 프롬의 말대로, '삶은 계속적인 출생의 과정이며, 인간의 삶에서 비극이란 우리가 완전히

  태어나기 전에 죽는다는 것이다.'

   . 이런 관념의 차이와 그들 각각의 장점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 동서 양쪽의 종교들이 갖고 있는 공통적 시각임

. 인간의 잠재력이 개인 남녀의 삶에서 성취된다면,

   . 그들의 삶은 우리의 현존하는 육체의 존재 너머에까지 한계가 연장되어야 한다는 것임

   . 완성되어야 할 자아는 동물적 유기체의 간단하고도 불안전한 진전을 초월해야 한다는 것이며

   . 요컨대 계속되는 인간의 사후 세계라는 형식이 있어야 함

   . 그렇다면, 인간의 죽음 후 마음의 형태는 어떠할까?

 

 

□ 육탈(肉脫)된 마음의 생존

 

   . 육체가 없는 의식은 어떨까?

   . 그 경우 인간은 무엇을 의식할 수 있을까?

   . 다른 사람들은 각각 어떻게 식별될 것인가?

 

. 프라이스(H. Price) "육탈된 마음의 생존 개념"에 대한 3단계 이론

 

. 사후의 지각이 꿈에서의 지각과 똑같은 종류가 될 것을 시사

   . 사후 지각들은 마음에 의존되는 것으로, 육화 된 삶의 기간 동안 획득된 심리적 상들로부터 형성됨

   . 사후세계의 생존이 물리적 생존이기보다는 심리학적 생존일 것이므로,

      사후세계의 법칙들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심리학적인 것임

 

. 사후 세계는 이 삶 가운데 과외의 감각 지각으로 다른 마음과 상호작용 할 수 있다는 것

   . 직접적인 텔레파시 활동이 있어서 시청각 이미지를 산출하므로,

     나오는 체험은 다른 사람을 보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듣는 것과 매우 흡사할 수가 있고

     마찬가지로 촉각, 미각 및 후각적 이미지들도 있을 수 있음

   . 사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어 거주할 일관성 있는 삼차원적 세상이 있을지도 모름

     따라서 상이한 사후세계뿐 아니라, 도덕적이고 미적 관점에서 보면 보다 고차적이고 저차적인

     세계들이 있을 수 있음

 

 

. 다음 세계는 우리의 욕구의 힘에 의해 형성될 것임

   . 다가 올 세상의 가상적 거주자들에 대해 말하기를,

   . 그들의 기억과 욕망이 그들이 어떤 종류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가를 결정할 것이며,

        . 그런 세상의 질료 또는 재료가 결국 사람의 기억으로부터 오고,

        . 그것의 형식은 사람의 욕구로부터 올 것이라고 함

 

   . 그러나 소원 성취의 영역이 반드시 절대적으로 즐겁다고 가장하는 것은 반대한다.

      . 왜냐하면 이 꿈들은 오류 없는 정확성을 갖고 우리 욕구의 진정한 성격을 드러내기 때문

      . 욕구는 궁극적으로 채워져서 죽고, 우리의 개별적 인간의 삶은 그와 더불어 사라지고,

      . 열반의 초인적 상태로 몰입되어 들어가는 것이 가능할 것임

 

. 이리하여 물리적 생존과 구별되는 심리적 생존의 기본적인 가설 내에서, 두 가지 원리로 작업을 한다.

   . 첫째, 사후 세계의 심리 독립적 특성

   . 둘째, 인간적 욕망의 힘

 

. 이런 원리는 심리학적 생존의 가능 형식의 전 스펙트럼을 일으키며,

   . 유아론적 해석에서부터, 심리 물리적 인간의 부활 내지 재구성이라는

   . 전혀 상이한 개념에 경계를 이루는 모두를 망라하고 있다.

 

. 이론상 욕망의 힘에 의한 사후세계의 구성이라는 관념과,

   . 그런 세상은 많은 마음들 사이에서 텔레파시 연결을 통해 공통되어 있다는 관념 사이에 갈등이 있음

……

 

. 힉의 프라이스 해석을 통해 도달한 중요한 결론은

   . 우리가 육탈된 마음의 사후 존재를 지각하려고 시도하자마자,

   . 이것은 결국 참된 육탈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

   . 물리적 세계에 거주하는 물리적 몸이 전혀 없다면,

     마음은 꿈의 세계에 거주하는 자기 자신의 몸을 제공해야만 하는데,

     꿈은 꿈의 세계를 물리적 세계로 경험하는 자들에게는 실제적임

 

 

 

 

. 그는 종교 전통의 다양성을 관용하는 측면에서 배제주의나 포섭주의를 넘어서기를 권한다.

   . 왜냐하면 그것들로서는 세계 종교 전통의 다양성과 역사성을 무시하고,

   . 타종교의 존재를 거부하는 배타성만을 가질 수 있기 때문

 

. 비록 포섭주의를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한 종교의 상대적 절대화의 오류를 벗어나기는 어렵다.

   . 타종교의 신관 혹은 신앙관을 용해하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기 때문

. 포섭주의를 넘어설 경우, 종교에 대한 이해는 상대주의적 성격을 갖는 종교 다원주의를 수용할 수

  밖에 없다고 힉은 주장한다.

   . 그 이유는, 각 종교가 나름의 체계와 역사를 갖고 있으며

   . 그 나름대로 가치를 지닌 신념체계이기 때문

   . 이것 각각을 '전부 아니면 전무' 라는 교리를 통해 평가하는 것은 무리

 

. 죽음은 생물학적 측면에서는 인간 삶의 종국적 끝자락이다.

   . 그러나 인문학적으로 볼 때, 그것은 삶의 의미에 있어서 한 계기이지, 결코 끝은 아니다.

   . 더욱이 (종교다원주의를 통해 이해한다면), 인간의 자연사적 죽음은 결코 (종교적) 인간의 영혼의

      소멸을 의미하지 않음

   .  어떤 측면에서 보면, 죽음은 새로운 각성에 이르는 누적적인 과업의 과정임과 동시에,

   .  종교적 선업을 이룩하는 초월의 실현임

   .  자연적 죽음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꿰뚫는다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 죽음을 통과하는 사람이 만나는(만난다고 가정하는) 다음 단계가 육탈된 영혼이다.

   . 힉에 따르면, 육탈된 영혼의 사후세계의 형태에 관해서는

   . 개인 욕구의 소원이 성취된 모습과 자신의 순화된 변형 인격이 어느 차원에서 내용상 조합되느냐가

     철학의 과제

   . 우리가 가정하는 세계가 심리적 형태를 띠든, 수학적 형식을 갖든, 아니면 가상 공간의 모양을 갖든

     간에, 현재의 우리의 신분과 같으면서도, 다른 인간의 모습을 영혼은 갖고 있어야 하겠기 때문

 

. 힉의 다원주의적 영혼의 설명은

   . 많은 다른 역사와 형식을 갖고 있는 종교들로부터 발전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지만

   . 일정한 한계를 가진 듯이 보임

 

. 다음과 같은 질문을 통해 힉의 한계를 지적해 보는 것은 일면 타당할 것 같다는 생각임

    . 종교가 인성에 근거하여 이룩될 수 있는가?

    . 역사적 증거가 종교 교리의 우월성이나 평가의 기준이 될 수 있는가?

 

 

 

 

■ 동양철학과 현대과학이 만나는 곳 

                                                                                             원저   프리초프 카프라

 

   어떠한 길도 하나의 길에 불과한 것이며,

   너의 마음이 원치 않는다면 그 길을 버리는 것은

   너에게나 다른 이에게나 무례한 일이 아니다. ......

   모든 길을 가까이, 자세히 보아라.

   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몇 번이고 해 보아라.

   그리고 오직 너 자신에게만 한 가지를 물어보아라.

   이 길이 마음을 담았느냐? 그렇다면 그 길은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길은 소용 없는 길이다.

 

         카를로스 카스타네다 (Carlos Castaneda),

           돈 후앙의 가르침, The Teachings of Don Juan: A Yaqui Way of Knowledge, 1968

             페루 출신의 문화인류학자·작가. 멕시코 야키 인디언 주술사의 신비한 비밀에 관한 시리즈

 

 현대 물리학은 인류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 막중한 영향을 끼쳐 왔다. 그것은 자연 과학의 기반을 이루고 있으며, 자연 과학과 기술 공학의 결합은 행ㆍ불행 간에 지상의 생존 조건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오늘날 원자 물리학의 성과를 이용하지 않은 산업은 거의 없을 정도이며, 이것이 원자 무기에 이용됨으로써 전세계의 정치 구조에 끼친 영향력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현대 물리학의 영향권은 단순한 기술의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 그것은 사상과 문화의 영역에까지 확장되어서 우주에 대한, 우주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관념에 일대 수정을 하게끔 했다. 20세기에 있어서의 원자 (原子)와 아원자 (亞原子) 세계에 대한 탐구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던 고전적 이념의 한계를 드러나게 해 주었으며, 우리가 종래 지녀 왔던 기본 관념의 대부분에 걸쳐 근본적인 수정이 불가피하게 해 주었다.

 

예컨대 이원자 물리학에 있어서의 물질의 개념과 고전 물리학에 있어서의 전통적인 실체관은 전혀 다른 것이다. 공간, 시간, 인과율과 같은 개념도 마찬가지다. 이런 개념들은 우리가 이 세계를 바라보는 데 기본이 되는 것인데, 이의 급격한 변모에 따라 우리의 세계관도 함께 따라서 변해 온 것이다. 현대 물리학으로 인한 이러한 전환은 지난 수십 년 이래 많은 물리학자들과 철학자들에 의해서 폭 넓게 논의하여 왔지만 이런 변화들이 동양의 신비주의 속에 자리잡고 있는 관점과 매우 유사한 방향의 세계관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데 대해서 좀처럼 깨닫지 못하였던 것 같다.

 

현대 물리학의 제 개념들은 극동의 종교 철학에 표명된 여러 개념들과 놀라운 유사성을 보여 주고 있다. 비록 이러한 유사성이 아직까지는 광범위하게 논의되고 있지 않지만 인도와 중국, 일본 등지에 강연 여행을 다니면서 극동 문화에 접촉할 수 있었던 금세기의 몇몇 위대한 물리학자에 의해서 주목을 받아 왔다.

 

다음의 세 인용문은 그 적절한 예가 될 것이다.

 

    인지(人智)에 관한 일반적 관념 ……원자 물리학 분야에서의 여러 가지 발견에 의하여 설명되고 있는 이러한 것은 본질적으로 생소한 것이거나 전대 미문(前代未聞)의 것이거나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런 것은 우리의 문화사 속에서도 하나의 맥락을 가지고 찾을 수 있는 것이며, 불교나 힌두 사상 속에서는 더 중요한 중심적 위치를 점했던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옛 지혜의 예증이자 그것의 장려이며, 또한 그것을 한층 더 갈고 다듬는 일이다.

       - 로버트 오펜하이머 (Robert Oppenheimer.J.)

 

    원자 이론의 가르침에 대응하기 위해서는……거대한 존재의 드라마에 있어서 관객이며 연기자로서의 우리 입장을 조화시키려 한다면, '우리는' 부처나 노자(老子)와 같은 사상가들이 일찍이 부딪쳤던 인식론적 문제로 되돌아가야 할 것이다.

      -  닐스 보어 (Niels Bohr)

 

    지난 전쟁 이후 이론 물리학 분야에 끼친 일본의 지대한 공헌은 극동의 전통속에 담긴 철학적 이념과 양자 이론의 철학적 본질의 사이의 어떤 관계를 시사한 점일 것이다.

       -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Werner Heisenberg)

 

  이 글의 목적은 현대 물리학의 제 개념과 극동의 철학적, 종교적 전통 속에 들어 있는 기본 사상들 사이에 관계를 탐구하는 일이다.

 

20세기 물리학의 두 기반인 양자 이론과 상대성 이론이 어찌하여 힌두교도나 불교도, 도가(道家) 신도들이 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 세계를 보게끔 우리에게 강요하느냐, 또한 미시 세계의 현상, 즉 모든 물질을 생성하고 있는 아원자들의 속성과 그 상호 작용을 기술하기 위하여 두 이론을 결합하려는 최근의 시도를 살펴보면 이 유사성이 얼마나 더 뚜렷해지고 있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현대 물리학과 동양적 신비주의자 가운데 어느 쪽에서 한 말인지 모를 지경에까지 종종 이르게 될 것이다.

 

여기서 '동양적 신비주의'라고 지칭할 때 그것은 힌두교와 불교와 도교의 종교적 철학을 뜻한다. 그들은 정묘(精妙)하게 짜여진 수 많은 계율과 철학 체계를 포용하고 있지만 그들의 세계관의 기본 특성은 모두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관점은 동양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모든 신비적 성향을 가진 철학에서 어느 정도씩은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이 글의 논점을 대범하게 일반화하자면, 현대 물리학이야말로 이제까지 모든 시대와 전통의 신비주의자들이 지녀 왔던 관점과 매우 유사한 세계관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모든 종교 속에는 신비적 전통이 담겨 있으며 서양 철학의 많은 힌두교의 『베다경』이나 『역경(易經),『불경』에 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이나, 이븐 아라비의 수피 교()나 야키 마술사 돈 환(Don Juan)의 가르침 속에서도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신비주의가 서양에서는 언제나 방계적인 역할을 한 데 불과하지만 동양에 있어서는 철학적•종교적 사상의 주류를 이루어 왔다는 데 동•서양 신비주의의 차이점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편의상 '동양적 세계관'에 관해서 논할 것이며, 오직 특별한 경우에만 신비적 사상의 다른 원천을 언급할 것이다.

 

만약 오늘날 물리학이 본질적으로 신비적인 세계관으로 우리들을 이끌어 가고 있다면 그것은 어떤 점에서는 2,500년 전의 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되겠지만 서구 과학의 나선형식(螺線形式) 발달 자취를 따라 살펴보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이다. 그것은 초기 그리스의 신비적 철학에서부터 출발하여 주지주의적 사고의 인상적인 발전을 통해 융성하고 개화했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점차 그 신비적 근원으로부터 멀어지면서 극동의 세계관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서구 과학은 이러한 관점을 극복하고 다시 초기 그리스나 동양 철학의 관점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직관에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극도로 치밀하고 정교한 실험과 엄밀하고도 일관성 있는 수학적 형식주의 위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모든 서양 철학이 다 그런 것처럼 물리학도 그 근원은 기원전 6세기의 초기 그리스 철학, 곧 과학과 종교가 나누어지지 않았던 문화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오니아의 일레토스 학파의 현인(賢人)들은 이러한 구분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목적은 자신들이 '피지스(physis)'라고 불렀던 사물의 본질, 즉 진정한 구조를 밝히는 것이었다. '물리학(physics)'이란 용어도 이 그리스 이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그것은 원래 모든 사물의 본질을 보고자 하는 노력을 뜻했던 것이다.

 

이것은 또한 모든 신비주의자들의 중심 과제였던 것은 물론이지만, 특히 밀레토스 학파의 철학은 이런 신비주의적 경향을 실로 강하게 띠고 있었다. 그들은 생물과 무생물, 정신과 물질을 동일시하였기 때문에 후대의 그리스 인들은 밀레토스 학파를 '물활론자 (hylozoist, 物活論者)' '물질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사실 그들은 모든 존재의 양식을 생명과 영성(靈性)이 부여된 '피지스'의 구현으로 보았기 때문에 실제 물질에 해당하는 말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탈레스는 모든 물질은 신성(神性)으로 충만해 있다고 선언했으며, 아낙시만드로스는 인체가 공기에 의해 유지되듯이 우주는 우주의 숨결인 '프노이마(pneuma, 靈魂)'로 지탱되는 일종의 유기체라고 본 것이다.

 

밀레토스 학파의 일원론적, 유기론적 관점은 고대 인도나 중국의 철학과 극히 근사한 것이었으나 동양 사상과의 유사성이란 면에서 본다면 에페수스의 헤라클레이토스 철학에서 훨씬 더 뚜렷하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우주를 부단히 변화하고 영원히 '생성'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에게 있어서 정지한 존재란 거짓된 바탕 위에 놓여진 것이며, 그의 보편 원리는 만물의 부단한 활동과 변화를 상징하는 불이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세계내의 모든 변화는 대립자들의 역학적이며 주기적인 상호 작용으로부터 일어난다고 가르쳤으며, 대립자의 쌍을 하나의 통일체로 보았다. 이 대립하는 힘들은 내포하면서 초월하는 통일체를 그는 로고스(Logos)라고 불렀다.

 

이 통일체의 분열은 엘레아 학파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학파는 여러 신과 인간의 위에 신성한 원리가 있다고 간주했다. 이 원리는 처음에는 우주의 통일체와 동일시되었으나 후에 와서는 이 세계의 위에 군림해서 지배하는 지적이요 인간적인 선으로 보여지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끝내는 정신과 물질의 분열, 즉 서양 철학의 특성이 된 이원론으로 이끌어 간 사조가 시작된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에 세차게 맞선 엘레아의 파르메니데스는 이 방향으로 과감히 나아갔다. 그는 그의 기본 원리를 '존재'라고 부르고 그것을 유일 불변의 것으로 파악했다. 그는 변화란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이 세상에서 보는 듯한 변화란 단지 감각의 환상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이런 철학으로부터 모든 변화하는 속성의 주체로서 불멸의 실체라는 개념이 자라나게 됐으며, 이것이 곧 서양 사상의 기본 개념의 하나가 된 것이다.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의 심히 대척적 (對蹠的)인 관점을 극복고자 했다. 파르메니데스의 불변의 존재라는 이념과 헤라클레이토스의 영원한 생성 이념을 융화 시키기 위하여 불변의 실제를 갖는 어떠한 것 속에 '존재'가 나타난다고 보고 이것의 결합과 분리가 이 세계 내의 변화를 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의 철학에서 가장 명료하게 표현된 원자----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물질의 최소 단위의 개념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그리스의 원자론자들은 정신과 물질을 명확히 구분했으며, 물질은 몇 개의 '기본적 구성 재료'로 만들어져 있다고 보았다. 이것들은 진공 속에서 떠돌고 있는 완전히 피동적이며, 본질적으로 죽은 입자인 것이었다. 그 운동의 원인은 설명되지 않았으나 물질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정신적인 근원을 가진 것으로 간주되는 외부의 힘과 자주 연관되어 언급되곤 했다. 이러한 사고는 그 이후 서양 사상의 기본 요소가 되는 마음과 물질, 육체와 영혼이라는 이원론을 이루게 된다.

 

정신과 물질의 구분이란 생각에 일단 접하게 되자, 철학자들은 물질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세계, 즉 인간의 영혼과 윤리의 문제에 그들의 관심을 돌리게 된다. 이러한 문제들은 기원전 4, 5세기 그리스 과학과 문화의 전성 시기 이래 2천 년 간 이상이나 서양 사상을 사로잡는다.

 

고대의 과학적 지식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체계화되고 조직화되었는데 그는 그 이래 2천 년 동안이나 서구의 우주관의 기초가 된 한 체제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인간 영혼에 대한 문제와 신의 완전성에 대한 생각은 물질 세계보다 훨씬 값진 것이라고 믿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 모형이 그토록 오랫동안 도전을 받지 않고 내려온 것은 분명 물질 세계에 대한 흥미의 결여와 중세를 일관해서 그리스도 교회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교리를 강력히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서양의 과학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교회의 영향으로부터 인간이 스스로 해방하기 시작하고 자연에 대해서 새로운 관심을 보이게 된 르네상스에 와서야 비로소 더 발전하게 된다. 15세기 후기에 이르러 비로소 진정한 과학적 정신에 의한 자연의 연구에 접근하게 됐으며, 사변적인 개념들을 실증하기 위한 실험이 이루어 졌다. 이와 같은 발전은 수학에 대한 점증하는 관심과 병진했기 때문에 수학적 언어로 표현되고, 마침내 실험에 바탕을 둔 적정한 과학적 이론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갈릴레이는 실험적 지식을 수학과 결부시킨 최초의 사람이었으며, 바로 이 점에서 그는 근대 과학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것이다.

 

정신. 물질 이원론의 극단적인 공식화를 초래한 철학 사상의 발전이 근대 과학의 탄생을 선행하고 동반했다. 이 공식화는 17세기 르네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그 모습을 나타내는데, 그는 자연을 마음과 물질이란 두 개의 분할되고 독립적인 영역으로 구분하였다. '데카르트 적'인 분할은 물질을 죽은 것으로, 자신들과는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취급할 수 있게 하고, 물질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기계로 조립된 제각기 다른 객체의 모임으로 보도록 허용했다. 아이작 뉴턴은 이것을 기초로 해서 그의 기계론(적 역학)을 구축함으로써 고전 물리학의 기반을 다졌다. 뉴턴의 이 기계론적인 우주 모형은 17 세기 후반부터 19세기말까지 모든 과학 사상을 지배했다. 그것은 신성한 법을 펼쳐 천상에서부터 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전제적인 신의 이미지와 흡사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자연 과학자들이 탐구하는 자연의 기본 법칙은 이 세계를 지배하는 영원 불변한 신의 율법으로 보여진 것이다.

 

데카르트의 철학은 고전 물리학의 발전을 위해서도 중요한 몫을 다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의 이르기까지 서양의 일반적 사고 방식에 끼친 영향도 지배한 바가 있다. 데카르트의 저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은 서양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전체적 유기체로서가 아니라 그의 마음과 동일시하게 이끌었던 것이다. 이러한 데카르트적인 분할의 결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육체 속에 내재하는 고립된 자아로서 인식하게 되었다. 마음은 육체 속으로부터 떨어져 나왔으며 그 육체를 통제해야 한다는 속 빈 과업이 주어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의식적 의지와 무의식적 본능 사이에 갈등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개인은 그의 활동이나 재능, 감정, 신앙 등에 따라서 수없이 쪼개진 많은 분야로 더욱 분열돼 갔고, 이것은 한없는 갈등을 일으켜 형이상학적 혼란과 좌절을 끝없이 유발시키는 것이다.

 

이 인간의 내적 분열은 곧 '외부' 세계를 제각기 분열된 대상과 사건의 집합으로 보는 관점을 반영하는 것이다. 자연 환경은 제각기 다른 이해 집단에 의해 착취되는 따로 떨어진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취급된다. 이 조각난 관점은 나아가 사회에까지 확장되어 저마다 다른 국가, 인종, 종교, 정치 집단으로 분열된다.

 

이러한 분열―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환경이나 우리의 사회 속에 자리잡고 있는 분열― 이 정말 다른 조각들이라고 믿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일년의 사회적. 생태적. 문화적 위기의 근본 이유라고 여겨진다. 그것은 우리를 자연과 인류 동포로부터 소외시켰다. 그것은 자연 자원을 대단히 부당하게 분배 시켜 경제적 무질서를 야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폭력은 우발적이거나 제도화되어서 파도처럼 밀어닥치고 있으며, 추악하게 오염된 환경 속에서 생명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병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데카르트적인 분할과 기계론적인 세계관은 혜택이 된 동시에 유해한 것이었다. 그것들은 고전 물리학과 기술의 발달에는 극히 성공적이었지만 우리의 문명에 대해서는 많은 역작용을 초래했다. 데카르트적인 분할과 기계론적인 세계관에 그 기원을 두었으며 또 이러한 관점에서 만이 진실로 그 발전이 가능했던 과학이 20세기에 와서 이제 그 분열을 극복하고 초기 그리스와 동양 철학에 표명돼 전일 (全一)의 이데아로 다시금 이끌리고 있다는 것은 흥미진진한 일이다.

 

기계적인 서양적 관점과는 대조적인 동양의 세계관은 '유기적인' 것이다. 동양의 신비론에 있어서는 감각에 비치는 모든 사물과 사건은 상호 관련되고 연결되어 있으며 다 같은 궁극적인 실재의 다른 양상 내지 현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를 개별적이고 분리된 것으로 구분하고 이 세계 내에서 고립된 자아로서 우리 스스로를 체험해 보려는 경향은 우리들이 측정하고 분류하려는 심성에서부터 연유되는 환각이라고 보여지는 것이다. 그것은 불교 철학에서는 아비댜 (avidya), 즉 무지라고 불리며 극복해야 할 마음의 불안 상태로 간주되는 것이었다.

 

   마음이 흔들리면 잡다한 사물이 생기지만,

   마음이 고요하면 잡다한 사물이 사라진다.

 

      ― 아쉬바고샤 (Ashvaghosha,馬鳴)  : 

           (주) Ashvaghosha : 대승기신론으로 대승불교의 기반을 확립함

                “대승기신론은 마명보살이 중생들이 대승에 대한 신심을 일으키게 하려고 저술한 논서

                마명(馬鳴)은 범어(Sanskrit) 이름이 Ashvaghosha, 기원전 100~150년 경 활동한 것으로 추정됨

                브라만 출신 대학자로 당시 인도의 학문 중심지인 마가다 지방의 여러 도시에서 불교학자들과

                논쟁을 벌여 지고나서 불교에 귀의함

 

 

동양의 신비주의는 각각의 종파에 따라 세세한 면에서는 다른 점도 많지만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우주의 근본적인 전일성을 강조하며 이것이야말로 그들의 중심적 교의가 되는 것이다. 힌두교도 건, 불교도건, 도가의 신도이건 간에 그들의. 지상의 목적은 모든 사물의 전일성과 상호 연관성을 깨달아 고립된 개별아(個別我)라는 관념을 초극 하여 궁극적 실재와 합일 시키는 일이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은 것 ―개오(開悟)라고 부르는 ―은 지적 행위일 뿐만 아니라 전인적(全人的)인 체득이며 그 구경(究竟)에 있어서는 종교적인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대부분의 동양 철학들은 본질적으로 종교적 철학인 것이다.

 

그레서 동양적 관점에서는 자아를 쪼개진 대상으로 구분한다는 것은 본원적인 것이 아니며 어떠한 대상도 활동하고 무상하게 변전하는 성격을 가진다. 그러므로 동양의 세계관은 본질적으로 역동적이므로 시간과 변화를 본래부터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우주란 영겁토록 움직이고, 살아있고, 유기적이며, 정신적인 동시에 물질적인 하나의 불가분의 실재로서 보여지는 것이다.

 

운동과 변화가 사물의 근본적 속성이기 때문에 그 운동을 일으키는 힘은 고대 그리스의 관점에서처럼 객체의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물질의 근원적인 성질이다. 따라서 신성에 대한 동양의 이미지는 이 세계를 위에서부터 지배하는 통치자가 아니라 모든 사물을 그 내부에서 통제하는 하나의 원리인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 속에 깃들여 있으나,

   이 세상 모든 것과는 다르고,

   이 세상이 모든 것이 알아보지 못하나,

   그의 몸은 이 세상 만물,

   그 속에서 모든 것을 다스리는 ―

   그 네 영혼,

   안에 있는 불멸의 통치자.

 

      ― 브리하드-아라냐카 우피니샤드

                (Brihad-aranyaka Upanishad)

 

동양적 세계관의 기본적 요소는 현대 물리학에 나타나는 요소와 마찬가지이며 동양적 사상, 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신비적 사상이 현재의 과학 이론에 일관성 있고 적절한 철학적 배경을 마련해 준다. 이와 같은 세계 이념 속에서라야 인간의 여러 과학적 발견이 그 정신적 목적 및 종교적 믿음과 완전히 조화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개념의 두 가지 기본적인 주제는 모든 현상의 전일성 및 상호 연관성과 본질적인 역동적인 우주이다. 우리가 미지 세계에 더 깊이 들어갈수록, 우리는 어떻게 현대 물리학자들이 동양의 신비주의자처럼 이 세계를 불가분, 상호 작용, 부단한 운동의 구성 분자로써 이루어지는 한 체계 ― 인간 존재도 이 체계의 불가결한 한 부분이다 ―로 보게 되는가를 깨달 을 것이다.

 

동양 철학의 이 같은 유기적. 생태학적 세계관이야말로 동양 철학이 최근 서방에서, 특히 젊은이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끌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다. 아직도 기계론적인 분열된 세계관이 지배하고 있는 우리의 서양 문화권에서는 바로 그것을 우리 사회의 저변에 만연되고 있는 불만의 잠재 이유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들의 수가 점증하고 있으며,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동양적인 해방에의 길로 돌아서고 있는 것이다. 동양의 신비 사상의 이끌려서 『역경』을 탐색하거나 요가나 기타 명상법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이 대체로 반 과학적인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지만,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들은 과학, 특히 물리학을 현대의 기술 문명이 초래한 모든 사악함에 책임져야 할 상상력 없고 편협한 교조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동양적 지혜와 서양의 과학 사이에 본질적인 조화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과학에 대한 이미지는 개선될 것이다. 또한 현대 물리학이 기술의 차원을 훨씬 뛰어넘어 물리학의 길〔도()〕이 마음을 담는 길이 될 수 있으며, 영혼의 지식과 자기 실현의 도정(?)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프리초프 카프라  /

     1966년 비엔나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캘리포니아, 산타 크루즈, 파리 대학 등에서 이론 고에너지 물리학을 연구했다. 또한 현대 물리학과 동양의 신비주의와의 관계에 대한 일반 논문을 쓰면서 영국과 미국 등에서 강연도 하였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아렐리우스의 명상록 인생에 대하여” 중에서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인간은 모든 사물을 피상적으로 파악하고 어떤 시인 (플라톤)의 말처럼 "지하의 일을 기웃거리고",  자기 속에 있는 다이몬(diamon,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神性)을 충실히 섬기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남의 마음 속이나 들여다보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다이몬을 섬긴다는 것은 정념이나 무분별 그리고 신과 인간이 하는 일에 대한 불평불만을 삼가고 순수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신이 하는 일은 그 탁월성 때문에 우러러 받들 수 있고, 인간이 하는 일은 그가 우리의 동포이기 때문에 사랑해야 하며, 또 때로는 그들이 선과 악에 대해 무지(이것은 흑백을 분별하는 능력을 빼앗긴 것 못지않은 결함)하기 때문에 어느 의미에서는 측은히 여겨야 하는 것이다.

 

비록 당신이 3천년을 산다고 하더라도, 아니 3만년을 산다고 하더라도 누구를 막론하고 현재 살고 있는 삶 이외의 다른 삶을 잃고 있거나, 또 지금 잃어가고 있는 삶 이외의 다른 삶을 사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오래 산 삶도 짧게 산 삶과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현재라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같으며 따라서 우리가 잃는 것도 같기때문이다.

 

그러므로 잃어버리는 시간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무도 과거나 미래를 잃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자기가 갖고 있지 않는 것을 잃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첫째, 만물은 아득한 옛날부터 같은 형태를 갖고 갖은 주기를 반복하고 있다. 따라서 이 동일한 사물을 백 년 동안 또는 2백 년 동안, 아니 영원히 본다 하더라도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둘째, 가장 오래 사는 자든, 가장 짧게 사는 자든 잃는 것은 같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갖고 있는 것은 현재뿐이요, 어느 누구도 자기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잃어버릴 수는 없으니 인간이 잃는 것은 현재뿐이기 때문이다.

......

 

인간의 영혼이 자기 자신을 가장 해치는 것은

 

첫째로는 그것이 하나의 부스럼, 이를테면 우주의 종기(腫氣)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삼라만상은 자연의 일부이므로 어떤 일(재앙)이 일어나더라도 이에 대해 분통을 터뜨리는 것은 자연에 대한 이탈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인간의 영혼이 자기 자신을 해치는 예를 들면, 어떤 사람에 대하여 혐오감을 느끼거나 또는 성난 사람처럼 상대방에게 손상을 입히기 위해 덤벼드는 경우이다.

 

셋째로 인간의 영혼이 자기 자신을 해치는 것은 쾌락이나 고통에 압도되었을 경우이고 

넷째로는 가면을 쓰고 거짓으로 불성실하게 행동하거나 말했을 경우이며,

 

다섯째는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목적과 관련시켜 행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행동이나 충동을 어떤 일정한 목적을 이루는데 사용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무분별하게 힘을 기울였을 경우이다.

 

그렇다면 이성적 동물(인간)의 목적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가장 존중해야 할 도시와 국가 (여기서는 우주를 가리킴)의 이법과 법률에 따르는 것이다.

 

......

 

인생은 한 순간에 지나지 않고,

사람의 실질(우시아)은 흘러갈 뿐이며,

 

감각은 둔하고,

육체의 전체적인 조합은 부패하기 쉬우며,

영혼은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운명은 가늠하기 어려우며,

명성은 불확실 하다.

 

한마디로 말하면

육체에 관한 모든 것은 유랑이며,

영혼에 관한 모든 것은 꿈이자 연기다.

인생은 전쟁이자 잠자리며,

사후의 명성은 망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를 이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한 가지, , 한 가지는 철학이다. 

 

철학은 곧 다이몬을 지키고 손상되지 않게 하며, 또한 쾌락과 고통을 초월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무슨 일이든 목적 없이 행하지 않고 거짓이나 위선을 멀리하며, 다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든 개의치 않고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과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일은 자기 자신이 유래된 곳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며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평안한 마음으로 죽음을 기다리며 죽음은 각 생물을 구성하고 있는 원소가 분해하는 데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만일 개개의 사물이 끊임없이 다른 것으로 변화하는 것이 이들 원소 자체에게 조금도 두려운 일이 아니라면 어찌 우리가 만물의 변화와 해체를 두려워하겠는가?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자연스러운 일에는 악이 있을 수 없다.

 

                                     다뉴브강 오른쪽 기슭의 도시, 카르눈틈(지금의 헝가리 하임불크)에서

                                      AD170~174년 경 원정 길에 쓴 아렐리우스의 명상록

 

 

 

■ 철학의 기본개념들

 

                                                                  인용 :  .유원 강의록(홈피, "가을 풀로 엮은 집"에서)

                                                                    내용 중 일부를 요약 발췌한 것

 

     보편과 개체, 물질과 생명철학적 개념들을 접하다 보면 그것의 사용 범례가 우리의 일상적인 사용범례와 다른 까닭에 퍽 낯설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기본개념이란 특정한 사태를 지칭할 때는 이 용어를 사용하자는 일종의 약속이어서 그것을 지켜 줘야 상호간의 의사소통이 가능해 진다.

 

이를테면 '감각', '감정', '감성'을 각각 구별해 보자.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개념들이지만 아마 구분이 쉽지 않을 것이다. 이는 그만큼 대충대충 살고 있다는 증거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므로 무엇이든지 이성적으로 규정을 해 봐야 한다. 이것들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은 사전적 정의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다. 어떤 사유를 가지고 분석해 보고 해명할 것이냐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감각 (perception) "내가 대상을 느껴서 받아 들이는 것"이다.

주관과 객관 사이에 이뤄지는 interaction으로 이해 해야 한다. 감각은 객관세계로부터 주어지는 데이터들을 주관이 받아들여서 성립하는 것이다. 칸트의 구성설적 인식이론을 보면 대상의 데이터들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직관의 형식을 통해 재구성되어 감각이 형성 된다. 감각은 대상의 인식에 관해 논의하는 것이니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영역에서만 통용되는 술어이다. 인간의 행동의 규칙에 대해 논의하는 <실천이성비판>에서는 무의미하다.

 

도덕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나? 감정은 감각과 다르게 객관세계에서 데이터가 주어지지 않아도 있을 수 있다. 초감각적인 무엇이다. 즉 내가 어떤 대상을 겪지 않아도 감정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타고 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갓 태어난 아기는 아무것도 겪은 것이 없어도 운다. 즉 뭔가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니 순수주관이 가지는 것이다. 대상세계와는 무관하다. '순수'라는 단어는 칸트 철학에서 '경험과는 무관한'이란 뜻이다. 순수라는 말이 붙으면 주관과 관련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감정은 미학에 대해 다루는 <판단력 비판>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된다. 어쨌든 무언가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은 객관세계의 데이터가 주관으로 들어 온다는 것이라는 점에서 감정은 인식의 대상일 수 없으며 주관과 객관의 상호작용의 결과물이 아니다. 감성 (Sinnlichkeit)은 흔히 감수성과 혼동되기도 한다. <순수이성비판>을 보면 직관의 형식이 감각데이터를 만들어 내는 것을 감성 작용이다. 그러니 감수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런 식으로 철학적 용어는 명확하게 구분되어 사용된다.

 

특히 인식론에서는 감각, 감정, 감성 사이의 상호작용을 염두에 두고 논의해야 한다. 이는 순수사유의 영역에서만 일어나는 것이고 일상세계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이긴 하나 습관화 시켜 틀이 형성되면 논리적으로 엄격해진다.  "느낀 바 있다" 보다 "일련의 감각이 형성 되었다"고 얘기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철학은 자기가 알고 있는 바, 생각한 바를 언어를 통해 의사 소통하는 것이다. 때문에 정확한 언어를 합당한 규칙에 의거하여 쓰는 것이 철학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서양철학은 무엇보다도 공통의 의사소통을 갖추는 데에 노력해왔다.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의 가장 중요한 차이가 이것이다. 즉 공통의 의사소통에 필요한 수사학도 철학의 한 분과로서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키케로의 <수사학>에 대해 얘기할 생각이다. 논술도 수사학의 한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 이전에는 자신의 생각을 시라는 서사 형식을 통해서 표현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도 그렇고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봐도 그러하다. 하나의 철학적 서사양식으로서 플라톤의 대화편도 그렇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면 논술의 형식이 원시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니까 자신에 선행하는 철학의 논의들을 정리한 다음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식으로 논의를 전개해 나간다는 것이다. 로마 시대에는 그런 모든 것들을 취합하여 수사학이라는 하나의 엄격한 형식과 체계를 마련했다.

 

보편과 개체, 물질과 생명은 무척 난해하고 복잡하다. 먼저 분명하게 얘기하자면 내 인생에 별로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알아두면 재미있다.

 

감각, 감정,감성 같은 말들을 일상적인 차원에서 사용해도 사는 데 별 지장 없다. 그러나 규모 있고 체계적으로 말하면 정확하고 깔끔하다. 철학적 태도가 일상생활에서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상을 파악하는 하나의 이념형, 즉 궁극적 형태로서 쓸모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철학의 기본 개념들을 반복해서 읽어보고 이해해서 정리해 봐야 한다. 이렇게 하면 기본 개념들이 내 머리 속에 탑재되고 그에 따라 세상을 보는 필터가 생겨서 필요한 정보와 필요하지 않은 정보를 빠르게 걸러 낼 수 있다. 말이나 문장의 보이지 않는 행간을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존재 그 자체'의 탐구라고 하는 존재론의 출발 지평은 근대로 오면서 변화하게 된다. 신 중심의 세계에서 인간 중심의 세계로 이행함에 따라 철학적 사고도 '존재' '인간에 대한 존재'로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간을 완전히 떠난 존재라면, 즉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이 전혀 경험할 수 없는 존재라면, 그에 관한 논의 조차 무의미하고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에 대해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도 인간에 의해 경험되는 특수한 양식이 존재자의 고유한 존재 방식으로 파악된다. 근대 이후의 존재 개념이 고.중세의 존재개념과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존재가 인간에 의해 경험되는 방식은 무엇보다도 '인식'이므로 '존재의 경험에 관한 이론'으로서의 존재론은 인식론에 그 자리를 물려주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칸트의 철학이다. 칸트에 있어서 존재론은 직관의 형식과 오성의 범주가 경험을 통해 보증 할 수 있는 대상에 관계하는 한에 있어서, 오성의 범주와 직관의 형식으로써 성립되는 학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대상 자체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인식하는 인간의 인식 능력에 내재하는 선천적인 요소들이다. 즉 경험에 앞서서 transzendental 인식 주관에 주어진 일종의 규정작용의 법칙들이다. 따라서 주관에 속하는 이 선천적 법칙들이 객관의 경험과 합치하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나, 이로써 존재론은 선험철학 속으로 해소되어 인식론으로 변신했다고 할 수 있다. 존재론의 학적 성격이 이렇게 변화됨에 따라 칸트에 있어서 형이상학도 새로이 규정된다. 즉 그것은 인식 영역을 넘어서는 초감성적 세계를 문제 삼는 탐구로 규정된다.

 

"존재”는 더 이상의 유개념을 가지지 않으므로 가장 최상위의 유개념이다. 지구상의 모든 개별적인 것들은 각기 존재라는 속성을 갖는다. 중세에는 존재가 신의 영역에 속해서 인간이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던 것이 근대로 넘어오면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는 달리 말하면 신을 철학적 탐구의 영역에서 제외시킨다는 것이다. 궁극적 존재에 대한 탐구는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것에 대한 탐구로 한정된다.

 

결국 존재론이 인식론으로 전환하게 되는 것이다. 중세에서 궁극적 존재는 신이었다. 그런데 신은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대상이다. 그저 느껴야 한다. 중세에서 존재론의 주제는 신에 대한 탐구였다. 존재론이 다루는 대상이 신이었으니 그것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 있는 것이었고 따라서 인간의 탐구 대상이 아니었다. 근대에는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것은 탐구하지 않는다. 인간이 알 수 있는 것만이 궁극적인 존재이다. 인간이 알 수 있는 것만을 존재론의 영역으로 잡는다면 그것은 존재론이 아니라 인식론이 된다. 이것이 칸트의 업적이다.

 

칸트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인간이 알 수 없는 영역이었던 형이상학을 폐기하였다. 인간이 알 수 없는 것, 즉 물 자체는 학적인 인식에서는 성립할 수 없다. 우리의 감각 데이터에 들어오는 것만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중세에는 인간이 신을 인식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근대에는 그런 식의 논쟁은 의미가 없게 된다. 인간의 인식영역을 넘어서는 초감성적 세계를 문제 삼는 탐구가 형이상학인데, 이것은 인간의 인식능력으로는 탐구할 수 없는 주제이다. 그런 점에서 칸트는 전통적 형이상학을 폐기하고 새로운 형이상학을 세운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칸트의 새로운 형이상학이 과연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문제가 많다.

 

어쨌든 여기에서 핵심은 중세와 근대에서 인간이 궁극적으로 생각하는 존재는 무엇이냐, 그리고 칸트가 전통적 형이상학을 폐기하는 데 앞장섰다는 것이다. 어떤 일이 닥쳤을 때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말을 하곤 한다. 지나치게 단순화 할 우려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겪는 문제는 결국 죽느냐 사느냐로 귀결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규정성은 인간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랜 옛날부터 철학자들이 해결도 못하면서 천착한 문제가 있음과 없음의 문제이다. 왜 있는 건 있고 없는 건 없는 것인가 하는 문제 말이다. 또 다른 문제는 인식의 확실성을 어떻게 보증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가령 내가 종이라고 믿는 것이 있다. 그런데 그것이 진짜 종이일까? 만약 진짜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이 나타나서 우리가 걸레를 종이로 여겼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할까?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에서 고민한 문제가 이것이다. 데카르트는 사람을 속이는 악마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철없는 질문 같지만 일리가 있는 말이다. 대상에 대해 판단해서 얘기했을 때, 주관의 사유와 대상 사이의 관계문제. 이것이 철학에서 일급의 문제이다. 한편 우리는 각각의 개체들이 있는데 그로부터 도출되지 않는 상위개념 하나로 개체들을 뭉뚱그려 표현한다.

 

플라톤은 상위개념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 사물들의 원형이 있다고 생각했다. 현실세계의 모든 것은 그것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이것이 플라톤의 이데아론인데 보편과 개체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코에 뾰루지가 나 있다. 코에 뾰루지가 났다고 하여 본질이 변한 것은 아니고 우연적 변화이다. 그런데 뾰루지를 트집 잡아 계속 괴롭히면 성격이 변할 수 있는 본질적 변화가 될 수 있다. 이러한 변화 혹은 운동의 문제가 철학에서는 중요한 문제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네 가지의 문제들 즉,

“있음과 없음, 대상인식의 문제, 보편과 개체, 운동과 변화”는

 

철학에서는 일진급의 문제들이다. 먼저 운동의 문제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고대의 자연철학시대로부터 끊임없이 제기되고 논란 되어 온 근본문제 중의 하나는 운동과 변화, kinesis의 문제이었다. 헤라클레이토스처럼 만물을 끊임없는 유동 속에서 파악하려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파르메니데스는 생성 소멸을 의견 doxa이라 하여 운동을 부정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kinesis의 아포리아를 해결하기 위하여 가능적 존재의 개념을 도입하였다. 가능적 존재는 현실적 존재와 비존재()의 중간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단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없는 것이 아니라 가능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에 Kinesis의 수수께끼를 풀 열쇠가 들어 있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믿었다. 그에 의하면 Kinesis "가능적으로 존재 하는 것의 -- 그것이 가능적인 것인 한 -- 현실화이다. " 다시 말하면 Kinesis는 가능태로 부터 현실태로의 이행이며, 따라서 그것은 미완료적 현실태라고 한다. "운동의 문제는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에서 처음 제기되었다. 단순화 시켜 설명하자면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것이 운동이라고 주장하는 반면에, 파르메니데스는 운동 같은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운동이 이들에게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이유는 자아 정체성 때문이었다. 일단 운동이 있으면 자아 정체성이 성립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능적 존재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이를 보면 아리스토텔레스도 선행하는 철학자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답안을 내 놓았음을 알 수 있는데, 가능적 존재란 "현실적 존재와 비존재의 중간적인 것"이다. 여기서 현실적 존재는 눈 앞에 보이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존재는 가능적으로 인식할 수 있을 뿐이지 눈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말장난 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이는 어떤 사태를 설명해보는 것이다. 사람들이 수긍할만한 설명체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 철학의 과제이다. 이른바 정당화 논리를 개발하는 것이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fact를 놓고 실험적 방법에 의해서 판단하고 그것을 통해 한발 한발 전진하는 자연과학자에게는 말장난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철학적 설명이 있어서 덜 괴롭다. 누구나 보편적으로 수긍할만한 그럴싸 하고 설득력 있는 논리를 마련해 주니까 말이다. 보편과 개체에 대해 본격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다음 문단이다. "현실적 세계 속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결코 보편자가 아니라 개별자요 개체인 것이다. 모든 현실적인 것은 개체이다. 현실적 존재와 개체는 일단 일치한다. 현실적 세계 속에서 만나는 일체는 특수자요, 서로 다른 존재자와 구별되는 존재자인 것이다. 모든 현실적인 것과 상응하는 개체란 무엇인가? 개체 individuum는 불가분할의 기본존재를 의미한다.  in-dividuum은 분할 할 수 없는 존재란 뜻이다. 이 점에서는 원자 a-tom와 같다.

 

불가분할성은 적극적으로 통일성이다. 따라서 개체는 일자요,  자기 동일적인 것이다. 자기동일이라는 것은 다른 것과는 구별되나 자기자신과는 일치함을 말한다. 이리하여 개체에는 첫째로 유일성이라는 뜻이 있고, 둘째로 다른 것과 교환되거나 다른 것에로 회귀하지 않는 유일회성이라는 뜻이 있다. 개체는 '단독적 일자로서 있는 존재'이다. 현실적인 것은 개별자, 유일자, 유일회자이건만, 우리가 어떤 개념을 형성할 때에는 유개념, 종개념을 갖게 되는데, 이것은 이미 개체가 아닌 유와 종이다. 개념 속에서 개체는 사라지고 만다. 개념은 많은 개물에 공통되는 일련의 특징을 일반적인 것으로 추상화 한다. 개념이 현실적 타당성을 가지려면 그것이 사물의 질서 속에서도 보편적임이 인정되어야 한다.

 

"개별자, 개체, 현실적 존재, 존재자 모두 다른 말이 아니라 각각의 문맥에 맞춰서 쓰인 것이다. "모든 현실적인 것과 상응하는 개체란 무엇인가?" 는 표현은 쉽게 말하면 "현실에서 우리가 만나는 개체란 무엇인가?"로 바꿔 쓸 수 있을 것이다. 나눌 수 없기 때문에 통일되어 있는 것이라 말 할 수 있다. 그래서 일자- 하나 - 이다. 내 안에 내가 알 수 없는 것이 있지 않다. 정신이 나간 사람이 아니라면 그 사람의 행동은 그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다. 이렇게 분할 될 수 없는 단독적 존재가 개체인 것이다. 개물들은 보편으로 포섭되는데, 일단 포섭되고 나면 개물들의 특성은 사라진다. 이렇게 보면 보편은 범위는 넓으나 그 내용은 굉장히 공허하다. 이것이 보편자와 개별자에 관한 일반적인 논의이다. 라틴어 individuum은 개체 혹은 개인으로 번역된다.  Divium에서 divine이 파생되었다.  In '..에 반대되는'이라는 접두사니까, individuum을 문자 그대로 옮기면 '나눌 수 없는 것'이 되는 셈이다. 개인주의individualism는 개인과 개체, 즉 나눌 수 없는 존재를 단초로 삼는 정치사회적 주의주장을 말한다. 개인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존재이니까 모든 것이 여기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주장이 도출될 수 있다. 그러니까 그것 자체로 완성된, 분할할 수 없는 존재인 셈이다. 개인은 달리 말하면 원자atom이다. 원자적이라는 말과 개인적이라는 말은 같은 뜻이 된다. "보편자가 실재한다는 측을 보편실재론 realism이라 하는데 거기에는 두 견해가 있다. 하나는 그것이 객관적으로 개물에 선행해서 실재한다는 것이며 (플라톤, 안셀무스), 다른 하나는 그것이 개물들 가운데 공통하는 개념으로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명목론 nominalism은 보편자의 개념 내 실재성을 극단화 하여 보편은 개물 뒤에 있는 하나의 이름일 뿐이라고 한다 (스코투스, 오캄). 보편실재론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보편자(유나 종)는 우리의 의식과는 독립적으로 그 자체로서 실재하고 따라서 모든 개물에 선행한다고 한다.

 

플라톤은 개별적 특수자에 대하여 초월적이고 무시간적이며 이성에 의하여 파악되는 형상으로서의 이데아가 실재한다고 생각하였다. 그 이데아만이 참된 실재이고, 변화를 입는 경험계의 개별자는 준실재적이거나 실재의 모상이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편자는 특수자를 떠난 실재로서 현존하지 않지만, 다만 특수자들 사이에 공통하는 요소로서 현존한다고 한다. X라는 보편은 x에 공통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색깔 있는 대상'은 색깔 있는 존재에 공통적이지만, 이것은 다시 '붉은 대상''초록 빛 대상'이라는 종으로 분할된다. 보편은 개별적 사물 안에 실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이 중세로 넘어오자 보편의 문제는 기독교의 교리와 얽혀서 따른 격렬한 논쟁까지도 유발하게 되었다. 보편문제와 관련된 교리는 신존재의 보편성, 교회의 보편성, 원죄의 보편성 등이 있다. 명목론은 일반개념이 이름에 불과하고 참된 실재는 종을 구성하는 개물 가운데서 발견된다고 한다. 개념 실재론자에게 인간성은 하나의 실재이지만 명목론자에게는 실재하는 것은 개개의 인간들 뿐인 것이다. 따라서 보편자는 관념적 표상으로서 있는 사물집합의 기호에 불과하다. 그것은 개물의 실재성에서 본다면 한갓 바람소리요, 하나의 명사나 명목nomina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강의실에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다. 우리는 그것을 '인간'이란 이름nomina으로 한데 묶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 이름은 실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말 그대로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서양철학에서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입장이 두 가지로 갈린다. 하나는 이름이 실재한다고 주장하는 보편실재론이고, 다른 하나는 이름은 그저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유명론이다. 보편실재론은 크게 보아 초월적 실재론과 내재적 실재론으로 나눠진다. 이는 철학에서 주관과 객관의 문제와 연관된다. 철학에서 주관이라고 하면 '내 안에 있는 것'으로, 객관이라고 하면 '저 너머에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초월적 실재론은 보편자가 객관에 있다고 보는 반면에, 내재적 실재론은 주관에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하여 초월적 실재론은 보편자가 인간의 인식능력을 초월한 곳에 존재한다고 보지만, 내재적 실재론은 사물들 각자에 들어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전자의 대표적인 철학자가 플라톤이고, 후자의 대표적인 철학자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유명론은 보편자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 옛날의 장미는 이름뿐"이라는 <장미의 이름>의 한 구절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유명론에서 실재하는 것은 개체들 뿐이고 보편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의사소통을 위한 방편일 뿐이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윌리엄 오캄이 유명론의 대표적인 철학자이다.보편자는 초월적이고 무시간적이다. 그런데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초월적이지도 않고 무시간적이지도 못하다. 그런데 이러한 보편자는 인간의 이성에 의해 파악된다. 이렇게 보면 인간은 초월적이지도 무시간적이지도 못하지만, 인간 내부에 있는 이성은 초월적이고 무시간적인 보편자를 인식할 수 있으므로 같은 속성을 가질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단박에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신적인 연마가 필요하다. 그렇게 하여 대상을 탁월하게 취급할 수 있는 능력, 즉 지혜sophia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소수의 엘리트만이 가질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플라톤이 <국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국가는 그들에 의해 다스려져야 한다. 이와 같이 플라톤은 이성에 의해서 파악되는 형상인 이데아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데아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엘리트적 인간이다. 그러니 플라톤의 형이상학에서 궁극적 실체는 인간이라 하겠다. 이렇게 본다면 플라톤의 인식이론은 이성에 의해서 이데아를 파악하는 능력을 추적하는 것이다. 형이상학과 인식론이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색깔은 보편자이다. 이것은 노란색, 파란색, 빨간색 등으로 분화된다. 이것들 안에 색깔이라는 것이 들어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개념을 가지고 논의를 전개 시켜 나간다.이렇게 하여 개념의 구조가 대상의 구조라고 하는 독특한 이론을 만들어 낸다. 보편문제와 관련된 교리에는 신존재의 보편성, 교회의 보편성, 원죄의 보편성 등이 있다. 이것이 없으면 기독교 교리가 성립되지 않는다. 가톨릭 교리의 핵심은 구원의 매개자인 사제를 믿는 것이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소서"라고 기도할 때 우리는 마리아라는 매개자를 믿는다.

 

이와 달리 프로테스탄트는 신과 직접적으로 관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보편실재론과 유명론이 이 문제를 두고 갈등 한다. 이로부터 중세의 보편논쟁이 벌어진다. 보편실재론자들에게 인간성을 실제로 있는 참된 것이지만, 유명론자들에게 실제로 있는 것은 개개의 인간들에 불과하다.  "그 옛날의 장미는 이름뿐"이라는 구절에 장미 대신 신을 넣어보라.  "그 옛날의 신은 이름뿐". 신이 가진 참된 것으로서의 성격 자체가 빠져 나간다. 보편자란 사물집합을 통칭하는 기호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에서 논리적 실증주의가 나온다. 신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이들에게 전혀 논의할 가치가 없다. 칸트의 인식론에 따르면 객관세계의 감각 데이터가 우리의 감각경험으로 오지 않으면 인식이 성립되지 않는데, 인식되지 않는 것을 어떻게 논의할 것이냐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논의할 가치가 없는 무의미한 문제이다.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윌리엄 수도사가 윌리엄 오캄을 모델로 한 것이다. 이 소설의 배경이 1327년인데, 벌써 14세기부터 유명론이 유행한다. 보편실재론이 성립되어야 신에 대한 신앙이 정당화되는데 유명론에 의해서 균열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대에 유행했던 건축양식이 고딕이다. 모르는 사람은 고딕양식이 신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표현된 것이라 주장한다. 이미 신앙 자체가 균열이 일어난 판국에 무슨 강렬한 열망이 있었겠는가? 신앙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찼을 때의 건축양식은 로마네스크이다. 고딕은 신에 대한 불신이 가득 찼는데 그것을 어떻게 해서든 잠재우려 했던 인간의식의 산물로 이해해야 한다.

 

어쨌든 보편과 개체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룬 것이 보편실재론과 유명론이다. 이것은 여러 방식으로 변조되어 나타난다. "물질은 가장 큰 외연을 가지며 실재 세계의 최종적 토대가 되는 층으로,  '존재와 비존재로 합성된 것'(플라톤),  '단순한 잠세태'(아리스토텔레스),  '가장 어두운 최저급의 단자로 구성된 것'(라이프니쯔)으로 이해 되었다.

 

현대물리학은 물질을 질량의 담지자, 즉 관성을 가진 것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관성은 가속도에 대한 저항의 크기로 측정된다. 종래는 이 질량이 물질에 고유한 양으로 생각되었으나 상대성 이론에서는 운동하는 물체의 질량은 운동에너지의 증감에 따라 변화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물체가 '무엇'이냐는 물음을 놓고 볼 때, 기계론적인 입장에서 보면 물질은 입자이겠지만, 역동론적 입장에서 보면 물질은 파동이 될 것이다. 이 차이는 자연과학적인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생명은 물질을 '상층형성' 함으로써 존립하게 되는, 물질 다음으로 광범한 존재영역을 차지하는 존재 층이다.

 

생명의 본질에 관한 견해는 생기론적 입장과 기계론적 입장이 있다. 생명 층과 물질 층 간의 존재 원리상 구별을 인정하면 생기론, 복잡성의 차이만 인정하면 기계론에 이른다. 기계론적 생명 개념은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의 유물론에서 유래한다. 데모크리토스는 생명 현상도 원자의 형태와 운동의 현상으로 보았다. 물질과 정신을 각기 실체로 본 데카르트는 이 이원론적 입장에서 물질의 운동은 정신의 사고와는 달리 오직 기계적이라고 보았다. 인간을 제외한 생명체는 기계적 운동만을 하는 일종의 '자동기계'라는 것이며, 라메트리는 이를 인간에까지 적용해 <인간기계론>이라는 저술을 발표하였다. 기계론에 대립하는 생기론은 생명의 본질을 생명력에서, 또는 생명소라는 특수한 소재에서 찾으려는데서 출발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생체와 생명체의 구별을 영혼의 유무에서 찾았는데, 생명체를 생명체로 만들어 주는 영혼을 '영양의 영혼'(anima vegetativa)이라 하여 이것의 생명적 힘을 인정했다.

 

근세 이후 기계론적 인과관계에 의한 자연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생기론은 위축되었는데, 기계론적 생명관에 의거해 있다 하더라도, 생명체의 유기적 합목적성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나의 유기적 전체로서의 생명체의 모습은 물리화학적 요소의 집합으로 해소될 수 없는 형태체(Gestalt)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정신을 세계의 근원적 기초로 생각하게 되면 그 존재 근거를 실재 세계를 떠난 이념적 존재에서 찾게 되기 쉽고, 이념적 존재는 자연히 완전한 절대자로 표상 된다. 스콜라철학, 스피노자의 범신론, 헤겔의 절대정신의 철학 등이 그 대표적인 전형이다.

 

그런데 정신은 개인적인 측면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민족정신'이니 '시대정신'을 말하거니와, 이러한 '객관정신'은 개인정신과 별개의 것이 아니요, 정신자체의 다른 형식이다. 정신이 초개인적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본질상 시공적 제한을 벗어나는 존재적 특성을 갖기 때문이다. 정신의 본질은 이성적 사유에 있고 사유는 본성상 보편성을 지향하는 것이므로, 이성의 보편성이 정신의 초개별성을 정초해 준다 하겠다. 이 보편성과 영속성을 가능케 하는 매개는 언어다.

 

철학에서는 물질의 뜻은 '현실세계의 가장 저변에 놓여있는 것'을 말한다. 철학자들에게 물질은 다양하게 인식되어왔다. 탈레스에 의하면 만물은 물에 뿌리를 둔다. 이때의 물은 water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액체이면서도 끊임없이 흐르는 것을 뜻한다. 물이 '현실세계의 가장 저변에 놓여있는 것'이니 탈레스에게 있어서 이것이 물질이다. 형체를 가지면서도 뭐라 딱 부러지게 규정할 수 없는 것이 물질이다.

 

현대물리학에서는 물질을 질량의 담지자로만 파악한다. 그러니 질량을 어떤 방식으로 측정하느냐가 주요한 문제가 된다. 그 방법에 따라 물질에 대한 정의가 달라질 것이다. 자연 과학자들이 갖고 있는 편견은 자신들이 사용하는 개념들이 과학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오해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다. 하나의 약속일 뿐이다. 기계론에서 보는 것과 역동론에서 보는 입장이 다르며, 아인슈타인이 보는 것과 뉴턴이 보는 것이 다르다. 오로지 자연 과학적인 것은 아니다. 형이상학적인 측면도 존재한다.

 

의학에서 생명의 끊김을 설명할 때 통일된 의견이 없다. 어떤 이는 심장사(心臟死)라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뇌사라 주장하기도 한다. 생명의 개념이 생명을 어떤 것으로 볼 것인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누구는 죽음이란 없다고 말한다. 즉 죽음이란 육체라는 껍질을 벗는 것일 뿐이다. 이들에게 생명은 영원.불멸이다. 현대과학의 생명관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생명이란 개념도 엄밀하게 자연 과학적인 해명이 불가능하다. 특히 동물 같은 경우는 자아정체성을 확인할 수 없으나 인간은 가능하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자아정체성을 확보해 주는 핵심적인 요소는 무엇인가? 바로 정신이다. 인간은 정신을 통해 자아정체성을 확보한다. 그래서 생명이란 개념이 형이상학적인 개념이 된다.

 

정신(인간)--- 감각(동물)--- -유기물(식물)--- 무기물(물질)

물질과 식물, 동물과 식물, 인간과 동물 서로 다른 점은

 

무기물은 유기물의 직접적으로 바탕이 된다. 무기물이 땅이고 유기물이 식물이다. , 서로 상호 인과성의 관계에 있다.

그런데 물질과 식물과는 달리 식물과 동물은 서로 상호인과성의 관계에 놓여있지 않다.

 

동물에게는 감각이 있다.

그러므로 감각 없는 식물은 동물과 호환이 안 되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도 무기물로 호환이 되지 않는다. 인간의 육신은 썩을지 모르나 정신은 살아 남기 때문이다. 즉 자아정체성은 인간에게만 성립하는 것이고 그것의 토대는 정신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여러 많은 철학자들이 공감하는 존재의 구조이다.

 

정신은 미묘하다. 정신의 본질적인 특징은 자유인데, 이것은 달리 말하면 무규정적이라는 것이다. 정신은 특정한 개인에게만 성립하지 않는다. 나와 너는 공통적으로 뭔가를 가질 수 있다. 이 강의실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어떤 학구적 정신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혼자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것이니까 각각의 개인에게 속하지 않는 공통의 정신이다. 이를 객관적 정신이라 한다. 시대정신, 민족정신, 협동정신 같은 것이 여기에 속한다. 딱히 누가 가진 것은 아니지만

 

"정신은 개인적인 측면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민족정신'이니 '시대정신'을 말하거니와, 이러한 '객관정신'은 개인정신과 별개의 것이 아니요, 정신 자체의 다른 형식이다."

 

 

 

■ 보이는 세계는 진짜 세계인가?

                                                                                                                           .용현

 

□ 시각적 동물, 인간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은 감각을 통하여 외계의 정보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동물의 종류에 따라 주된 역할을 하는 감각기관을 서로 다르다. 대표적 감각기관으로서 시각, 청각, 후각 등을 들 수 있는데 새(특히 독수리와 같은 맹금류)나 파충류는 주로 시각에 의존하고 포유류의 경우는 주로 후각에 의존하며 박쥐의 경우 주로 청각에 의존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경우 주된 감각기관은 무엇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아마 대부분 동의하리라 생각하는데 바로 시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형이상학』(metaphysica) 서두에서 "모든 인간은 선천적으로 알려고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 증거로써 감각의 애호를 들 수 있다. 특히 그 가운데 가장 애호하는 것은 눈에 의한 것(즉 시각)이다. 그 이유는 본다는 것은 어떤 다른 감각보다도 우리들에게 사물을 가장 잘 인지할 수 있게 하고 그 각종의 차이를 명확히 해 주기 때문이다." 고 해서 이러한 상식을 대변하고 있다.

 

사실상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감각기관중에서 가장 본질적 변화를 겪은 것은 시각이며 반면 다른 감각기관은 퇴행하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러한 눈의 진화는 손의 진화와 함께 나무 위에서의 수상생활을 경과하는 과정에서 선택적으로 획득한 것으로 보아 진다. 수상생활은 지상생활에 비해서 외적의 침입에 대해 비교적 안전하다. 따라서 넓은 시야를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에 나무와 나무 사이를 자유자재로 건너 뛸 수 있기 위해서는 공간적 거리에 대한 정확한 지각이 요구된다. 이것에 대한 적응으로 눈이 얼굴의 전면으로 이동하고 (지상동물의 경우 눈이 얼굴의 측면에 있다. 이것은 넓은 시야의 확보를 위해서 필요하다. 말은 360, 개는 250, 고양이는 287도를 보지만 인간의 경우 180도이다) 두 눈이 동일 평면상에 놓이는 "양안시"(binocular vision)를 갖게 되었다. 이것을 통해 사물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입체시각의 최대 이점은 길이, 너비. 폭을 뚜렷이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애꾸눈의 경우 이 거리감각에 지장이 생긴다.) 이러한 특유의 시각작용이 손의 진화와 병행하면서 정교한 도구를 교묘히 다루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인간이 시각을 얼마나 중시하는가에 대한 단적인 예는 언어이다. 많은 단어들이 시각적 은유로서 형성되어 있으며 심지어는 비시각적 대상들 조차 시각적 표상으로 변형되어 있다. 예컨대 소리는 "크거나, 작거나" 하며, 생각은 "깊거나, 얕거나" 하며, 시간은 "흐르거나 멈추거나" 한다. 이 술어들은 소리나 생각이나 시간의 실재적 표상이 아니며 시각적 은유에 지나지 않는다.

 

베르그송은 대상을 공간적으로 표상하려고 하는 이 태도를 인간지성의 고유하면서도 특이한 경향으로 본다. 동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연장(extension)으로서 사물을 지각하지만 그 때 공간에 대한 관념은 조금도 갖고 있지 않다. 이러한 공간표상은 도구제작자로서 인간이 진화해 가는 과정에서 선택적으로 획득된 것이다. 이 논의가 맞다면 인간의 공간표상은 인간이 세계에 던지는 한 가설이며 실재라기 보다는 실재에 대한 시뮬레이션이라는 것이다. 베르그송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공간이란 등질의 허공이고, 무한하며 또한 무한히 분할 가능한 매체로서 이러한 종류의 매체는 결코 지각되지 않으며 다만 관념으로서 생각될 뿐이다. 지각되는 것은 색깔과 형태를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사물로서 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가 물질에 대한 우리의 능력, 즉 그것을 원하는 대로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능력을 표상할 때 우리는 그러한 가능한 모든 해체와 재구성을 통틀어 상상적인 확장의 배후에 투영하고 그 확장의 기초가 되는 공허하고 무차별한 공간의 형태를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이 공간은 무엇보다도 우선 우리 인간의 사물에 대한 가능한 행동의 도식인 것이다."(『창조적 진화』)

 

그러므로 공간적 표상은 실재 그 자체는 아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인간은 세계를 3차원상(즉 양안 시에 의한 입체시각)으로 표상하지만 세계는 어떠한 차원도 아니며 경우에 따라서는 어떠한 차원도 가능하다. 전자는 시각을 정보수용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아니하는 존재의 경우이며 후자는 인간과 다른 시각정보 처리시스템을 가진 존재의 경우이다. 요컨대 공간표상은 주관적이다.

 

일찍이 칸트는 공간의 실재성을 부인하고 (시간과 함께) 그것을 인간의 세계인식의 주관적 형식으로 보았다. 공간은 인간이 세계에 대한 정보를 수용하고 정리하는 틀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경험을 가질 때 는 이미 그 경험은 세계를 순수한 형태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의 주관에 의해 해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재의 인식은 불가능한데 칸트는 이것을 "물자체"(Ding An Sich) 라고 불렀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칸트의 추리에는 논리적 비약이 있다. 공간표상이 주관적이라는 전제에서 실재의 인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직접 귀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서 칸트의 전제에서는 실재를 시각적으로 표상하는 것 실재의 공간표상이 불가능하다는 것 만이 귀결될 뿐이다. 그러나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데 주로 시각에 의존하기는 하지만 꼭 시각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또 하나의 세계지각의 중요한 단서는 청각 즉 '소리'이다. 여기서 청각에 의한 실재의 인식가능성의 문제를 검토해 보자.

 

 

  또 하나의 세계, 들리는 세계

 

1905년 아인시타인이 플랑크의 "양자가설"을 도입, 빛을 입자(광자)로 보는 입장에서 광전효과를 설명하는데 성공한 이후 빛이 입자냐 파동이냐 하는 뉴턴 이래로 해묵은 논쟁이 다시 재연되었다. 그 후 드브로이는 "물질파"라는 혁신적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입자를 파동의 현상태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그 후 슈뢰딩거에 의해서 빛은 그 "본질에 있어서" 파동이지만 관찰자의 개입을 통해서 입자로 현상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증과학인 물리학의 입장에서 보면 양자는 서로 등가이다.)

 

이 슈뢰딩거의 해석은 좀더 일반적인 문제로 확장시킬 수 있다. 물질이 파동상으로 파악되는 한 세계의 근원적 실체(substance)는 없으며 입자상으로 파악될 때만 그것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슈뢰딩거의 해석이 함축하는 바는 근원적 실체는 없으며 단지 관찰이 근원적 실체가 현상(representation)할 것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때 현상하는 실체는 "실재"이라기 보다 인간에 의해 해석된 "가설"일 뿐이다. (물론 필자의 이 서술은 슈뢰딩거의 관점에 대한 너무 지나친 단순화다. 그러나 이 논의가 여기서의 주관심사가 아니므로 더 이상 들어가지 않겠다.)

 

칸트의 용어를 빌린다면 그 실체는 물자체가 아니라 현상이며, 인간이 '공간'이라는 인식의 틀 속에서 재구성한 (관찰한다는 것은 어떤 대상을 공간과 시간 속에 포착하는 것이므로) 실재의 시뮬레이션일 뿐이다.

 

그렇다면 실재의 인식은 불가능한가? "시각"의 인식의 틀 속에 갇혀 있는 이상 그렇다. 실재가 실체가 아니라 파동이라면 그것을 파동으로서 지각하는 감각기관만이 실재에 닿을 수 있다. (슈뢰딩거의 "파동"은 우리가 지각하는 바로 그 파동은 아니다. 그러나 그 둘이 동일한 파동방정식을 만족시킨다는 것은 그 둘 사이에 어떤 대응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각적 지각은 그렇지 않다.

 

시각적인 지각은 빛이 망막에 닿는 순간, 전기적인 성질과 화학적인 성질을 겸한 신호로 전환함으로써 얻어진다. 그 신호는 빛에 기인하여 발생하지만 이미 빛의 성질로서는 설명할 수 없다. 빛은 실제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망막의 후부에 있는 광수 용체에서 파동은 디지털신호로 바뀐 다음 뇌에 전달되고 뇌는 이 신호를 미리 짜여 진 프로그램에 따라 재구성해서 이미지의 형식으로 출력한다.

 

요컨대 시각적 지각은 실재의 재구성이지 실재 자체가 아니다. 여기에 반해 청각적 지각은 파동으로서의 실재를 파동으로서 수용한다는 점에서 실재의 "이미지"에 한층 접근해 있다. 청각적 지각은 실재와의 공명 (resonance) 즉 동조의 방식에 입각하고 있다. 좀 난폭하게 말하자면 재구성이 아니라 카피이다. 2대의 바이올린을 똑같이 조율하여 그 중 한 바이얼린의 G선을 켜면 다른 바이올린의 G선도 똑같이 울린다. 이 원리는 간단한데 첫 번째 바이올린에서 발생한 공기의 파동은 두 번째 바이올린에 가서 부딪힌다. 방출된 음과 똑같이 조율된 두 번째 바이올린의 선은 우선적으로 그 파동의 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파동의 진동수와 자신의 고유한 진동수가 같기 때문이다. 이러한 체계 즉 2개 이상의 동조된 진동자로 이루어진 체계를 공명체계라고 하는데 우리의 귀가 외계를 지각하는 방법은 원리적으로 이와 다를 바가 없다. 이것은 "보이는 세계"에 비해서 "들리는 세계"가 훨씬 실재의 본연의 그것에 닿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결론은 눈과 귀가 진화해온 경로를 추적함으로써 다시 확인할 수 있다.

 

 

  , , 그리고 정보의 차이

 

인간은 눈으로 빛을 지각하고, 귀로 소리를 지각하지만 빛이든 소리든 그 실재는 파동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물론 구체적 성질은 다르다.) 파동은 2가지 기능을 하는데 첫째는 에너지의 운반 통로이며 둘째는 정보의 운반 통로이다.

 

빛은 그것이 전달하는 에너지의 양은 엄청나지만 파장이 짧다. 그러므로 생명체는 그 구조상 그 파장에 동조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슈뢰딩거가 말했듯이 생명체는 열교란에 안정적일 수 있는 크기 이상이어야 한다. 더 이상 작으면 생명체의 형성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빛은 훨씬 작다.) 그러므로 원시적 생명체의 경우 (예컨대 박테리아나 유글레라와 같은 단세포 생명체) 빛 에너지는 이용되나 그 정보는 무용지물이다. 그러므로 최초의 눈 즉 안점은 에너지 흡수기관이었지 정보수용기관은 아니었다. 고등생물체의 진화와 더불어 빛이 주는 정보도 점차 이용되게 되었는데 짧은 파장, 즉 높은 진동수의 파동의 경우 불가능한 동조의 방식이 아닌 새로운 혁신적 방식이 채용 됨으로써 이다. 즉 연속적인 파동을 불연속적인 전기적 신호로 바꾸어서 공간이라는 가상적 장 속에 재구성하는 방식 즉 ""(image)으로써 출력하는 방식의 채용이다. 이 방식의 효율을 극대화함으로써 진정한 공간의 의미를 창출한 것이 인간의 "시각"이다.

 

이것은 동조의 방식에 비해 단위시간당 운반되는 정보의 량이 엄청나게 더 많다는 점에서 극히 효율적이다. (그러므로 다른 조건이 같다면 장님 보다는 귀머거리가 가혹한 생존환경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더 크다.) 그러나 이 때 얻어지는 정보는 실재의 시뮬레이션이지 실재 자체는 아니다.

 

여기에 비해 소리는 그것이 전달하는 에너지의 량은 미소하지만 대신에 빛에 비해 파장이 길며 그래서 생명체가 그 파장에 동조하기가 비교적 용이하다. 귀는 원시생물에서 최초의 평형기관으로 출현했지만 곧 소리를 수용하는 기관으로 진화했다. (귀의 더 원시적 형태는 모든 감각기관의 모체가 되는 피부이다.)

 

이러한 논의가 귀결하는 바가 무엇인가? 시각은 실재와 간접적으로 매개되어 있지만 청각은 실재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왔다는 것이다 .보이는 세계 보다 들리는 세계가 실재의 ""에 더 가깝다.

 

그러나 인간의 지성은 원래 시각적 사고이며 그래서 시각에 의존하는 인간의 존재파악은 여타 생명체에 비해 특히 간접적이다. 그 간접성으로 인해서 인간은 자연계에 특이한 존재가 되었고 자연이 부여한 원초적 탯줄을 끊을 수 있었다. 인간은 "세계 내 존재"이면서 세계를 초월할 수 있으며 그것으로 해서 세계의 의미를 묻는 존재이고, 필연성을 박차고 자유의지로서 도덕적 행위를 할 수 있는 존재이다. 세계의 초월은 물질의 영역에서는 도구제작자로서 나타나고 신을 닮은 "세계건설자"로서 나타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자신마저 초월할 수 있으며 그래서 자신을 골똘히 생각하는 자기의식적 존재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긍정적일 수 만은 없는데 결국 인간은 자신을 출현시킨 그 실재에서 분리된 존재임이 드러난다. 세계초월은 이념이지 현실이 아니다. 그러나 이 이념을 현실로 간주함으로써 자신을 실재에 대립시키는 "오만" (hubris)을 범하게 된다. 여기서 자신은 자신과 대립하고, 자아는 타아와 대립하며, 인간은 자연과 대립한다. 모든 것은 팽팽한 전쟁상태에 있으며 소외는 인간본질에 뿌리 박고 있는 심연이다.

 

실재와의 원초적 접촉을 회복시키는 것만이 인간의 존재조건에 주어진 괴리를 메우는 길이다. 실재와의 커뮤니케이션의 회복, 그러나 이것은 실재와 자신을 대립시키고 실재를 재구성함으로써 세계를 인식하려고 하는 시각적 지성으로서는 불가능하다. 실재에 동조하며 실재에 합일하는 그러한 인식이어야 하며 이것은 "들리는 세계"로 귀를 염으로써 시작되어야 한다.

 

 

  , 명상, 황홀경

 

듣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실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파동, 그 주파수에 자신을 동조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위대한 음악은 위대한 과학이나 철학 보다 훨씬 더 실재에 가까이 다가 있으며 실재의 보다 근사한 "그림"이다. 좋은 음악을 듣고 있으면 가끔씩 자신이 실재와 동조되고 있는 듯한 비일상적이고 범상치 않은 체험을 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연유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불행히도 인간의 귀는 실재가 현현하는 파동의 대부분을 수용하지 못한다. 파동의 극히 일부만이 소리의 형태로 받아들일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극복 불가능한 한계는 아니다. 인간은 실재의 한 편린이며 따라서 인간자체가 하나의 파동이다. 우주란 파동이 서로 동조하며(정보를 교환하며), 합주하고 있는 거대한 오케스트라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몸 자체가 우주의 파동에 대한 공명장치 즉 ""인 셈이다. 박테리아나 원생동물과 같은 단세포 동물은 따로 귀를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몸 전체로 공명한다. 진화의 과정에서 우리는 이러한 원초적 연결을 상실해 버렸다.

 

몸 전체를 우주의 율동 속에 동조시킴으로써 제한된 주파수에만 반응하는 청각의 기능을 넘어서서 실재와 동조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렇게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30억년 전 태초의 생명의 탯줄로 거슬러가는 구도의 과정이다. 몸 전체가 실재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잘 조율되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실재와의 조율을 위한 몸의 단련방식이 선이며, 명상이며, 요가가 아닐까? 동조를 통해서 자신을 실재에 합일시킨 상태가 "황홀경"(ecstatic state)이며, 이것을 일상의 습관으로 까지 끌어올린 것이 "", 즉 깨달음이 아닐까? 이러한 깨달음에 든 자들의 경우 하나같이 실체를 부인하며 개체를 하나의 환상, 미혹으로 간주한다. 그들은 언어를 거부한다. 언어로 표현되는 일체의 것은 실체의 미혹으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상은 사상사 속에서 "신비주의"의 이름으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주 출현해 왔다. 과학은 이것을 비합리주의며 몽매주의라고 매도한다. 그러나 엄밀히 검토해 보면 그 매도의 근거는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다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오늘날의 과학이 종래의 종교의 위치를 떠 맡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때 이 비난은 "그것은 이단이다!"고 외치는 종교재판의 냄새마저도 풍긴다.

 

과학은 분명 세계의 어떤 측면을 밝혀 주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세계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 나는 누구인가 ?

        .용현, “나는 누구이며, 왜 존재하는가?” 중에서 일부발췌

 ......

 

인간을 만든 자는 누구인가? 바로 악마이다.

제우스도 그것을 원치 않았으며 여호와도 그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그는 악마와 결탁하여 스스로를 만들었다.

이 악마는 과연 누구인가?

 

 

  메피스토펠레스

 

파우스트의 한탄에서 극의 첫 장면이 열린다.

 

   아아, 나는 여기서 철학도, 법학도, 의학도

   그만 두었으면 좋았으련만, 신학까지

   열심히 힘들여 연구를 마쳤다.

   그 결과가 이렇게 불쌍한 바보 꼴이라.

   전보다 조금도 똑똑해진 게 없다.

   ..

 

   그러나 지금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는 걸 깨닫고 있다.

   그걸 생각하면 이 가슴이 타버릴 것 같다.

   ..

 

   그는 자신이 신과 닮지 않았음을 한탄한다.

   신들과 나는 닮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나는 먼지 속에 꿈틀대는 벌레와 비슷하다.

   먼지를 먹고 살며, 길가는 사람에게 짓밟혀

   죽어가는 벌레다.

   그는 이제 모반의 준비가 되었다.

   불 수레가 가벼운 날개를 타고

   내게 너울너울 다가온다! 나는 새로운 궤도에 따라

   대기를 뚫고, 순수한 활동의 新天地로

   향해 가는 마음의 준비가 돼 있음을 느낀다.

   이 고상한 생활, 신들의 즐기는 듯한 환희!

   그대는 아직 벌레에 지나지 않는데, 이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가?

   좋다, 정다운 지상의 태양에 과감히 등을 돌려라!

   모두가 그 앞을 살금살금 지나는 문을

   대담하게 열어 젖혀라.

   남자의 위엄은 신들의 권위 앞에 주춤거리지 않고

   저 어두운 죽음의 동굴에도 겁내지 않고,

   좁은 입구를 둘러싸고 지옥의 불길이 타오르는

   저 통로를 향해 돌진하고,

   설사 허무 속으로 흘러가 버릴 위험이 따르더라도

   밝은 낯으로 이 첫걸음을 내딛는 결의를

   행위로써 증명할 때는 바로 지금이다!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접근한다. 악마는 자신을 소개한다.

 

   저는 항상 부정하는 정신입니다.

   생겨나는 모든 것은 소멸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들이 죄악이다, 파괴다 하는 것,

   간단히 말해 악이라 부르는 일체의 것이

   저의 본래의 성분입니다.

   ..

 

   저는 처음엔 일체였던 부분의 부분입니다.

   빛을 낳은 '어둠'의 일부분입니다.

   거만한 빛은 어머니인 어둠을 상대로

   낡은 지위와 공간을 다투고 있습니다만,

   잘 돼 갈리 없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봐도

   빛은 사로잡혀 물체에 달라붙어 있으니까요.

   빛은 물체로부터 흘러, 물체를 아름답게 하지만

   물체가 그 진로를 방해합니다.

   그래서 제가 보는 바로는 머지않아

   물체와 함께 빛은 망할 것입니다.

 

진리의 갈증에 허덕이던 파우스트는 세상의 모든 진리(권력과 함께)를 보여 주겠다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제의를 받아 들인다. 자신의 갈증이 해소되었다면 그는 이렇게 외칠 것이고 메피스토펠레스는 그의 영혼을 가질 것이다.

 

   그럼 이렇게 하자!

   내가 어떤 순간을 향해

   멈추어 다오, 그대는 정말로 아름답구나! 한다면

   자네는 날 꽁꽁 결박해도 좋다.

   그때 나는 기꺼이 멸망하겠다!

   그때는 弔鐘이 울려도 좋다.

   ..

 

   시계는 멈추고 바늘은 떨어져 나가라 하라.

   나의 시간은 끝인 것이다!

   진리의 욕구를 얻을 수 있다면 내 영혼 따위가 무엇이랴? 그는 외친다.

   어떤 위험한 생각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극도로 괴로운 향락도,

   사랑으로 인한 미움도, 속이 후련해지는 화풀이도,

   답답하게 지식욕을 채운 나의 가슴은,

   이제부터는 어떠한 고통이든 다 맞아 들여

   인간 전체가 받아들여야 할 것을

   이 내부에 있는 ''로 하여금 맛보게 하리라.

   이 정신으로 최고의 것과 가장 깊숙이 있는 것을 붙잡아,

   인류의 행복도 비애도 모두 이 가슴에 쌓아놓고

   이 자아를 인류의 자아로 넓혀

   인류 그 자체처럼, 마침내 나도 멸망하리라.

 

 

  -악마-인간  

 

신화의 기본패턴은 항상 3중 구도이다.

 

그리이스 신화는 제우스-프로메테우스-인간의 3중 구도이며, 성서는 여호아-사탄()-인간의 3중 구도이고, 파우스트는 신-메피스토펠레스-파우스트의 3중 구도이다. 심지어는 아서 클라크의 소설도 악마의 형상을 한 외계지성, 육으로서의 인간, 영적 인간의 3중 구도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인간의 악마 성을 은폐하기 위한 교묘한 은폐의 수사법이다. 인간을 2원화함으로써 인간 성 속의 그 부정적 특성을 은폐하고 전가하기 위한 구도로 설정된 것이 악마일 뿐이다.

 

성서 창세기 기사에서 뱀은 인간 아담을 유혹하는 악의 표상으로 나타나지만 뱀은 인간 아담 자신 외에 누구도 아니다. 역할의 2원화를 통해서 자신의 악마적 특성을 교묘하게 은폐하고 있을 뿐이다. 똑같은 것이 그리이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와 인간으로 2원화 되어 있고 파우스트 속에서는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로 2원화 되어 있다. 메피스트펠레스는 자신을 '처음에 일체였던 부분의 부분'이고,자신의 본질을 '부정하는 정신'이라고 소개한다. 이것은 바로 메피스토펠레스의 입을 빌린 -그래서 은폐하고 싶은-인간 자신에 대한 고백일 것이다. 고대신화에서 인간의 시작을 음울한 색조의 배반과 살해의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정신 속에 들어있는 어둠의 부분에 대한 통찰인 것이다.

 

신 즉 자연에 대한 반역은 인간의 원초적 운명 속에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처음에 일체였던 부분의 부분이지만 이제 그것과 맞서 있는 대립자-악마-로 등장한다. 그의 힘의 원천은 분열이다. 그것은 자연에 자신의 논리를 강요하고 그 논리에 따라 자연을 짜르고, 가르고, 분해한다. 그것의 악마적 본성은 자신의 모태에 반역하고, 그것을 자신의 확장을 위한 제물로 삼는다. 그것은 자연의 창조성의 극치이지만 결과적으로 자연에 밀어닥친 재난이다.

 

신은 신화에서 보듯이 인간의 창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은 인간의 창조가 은밀한 모반 속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알면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는다. 그의 모반을 통해서 비로소 신은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악마의 출현과 그 몰락을 통해서 신, 자연, 또는 이 우주는 자기의식을 획득한다. 괴테가 말했듯이 악마는 자신의 의도를 추구하지만 결국 신의 의도에 봉사할 뿐이다. 아서 클라크에서 그 악마의 형상을 한 지성적 존재는 영적 아이(우주의 자기의식)의 출현에 봉사할 뿐이다. (클라크와는 달리 나는 전자를 인간으로 후자를 신으로 해석한다)

 

그렇다면 더 깊은 차원에서 신과 악마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악마는 신의 자기인식의 과정일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신에 대한 원초적 반란은 신이 자기자신을 찾아가는 그 출발점이었음이 드러난다.

 

 

 

■  삶과 죽음

 

                                                  책자 :윤회의 비밀”, Gina Cerminara 저

                                                  부산.일보 (1989.02.08), 기사 중에서   

   우리 인간은 죽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육체의 죽음은 눈으로 확인이 가능하지만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는 수 천 년 동안 많은 사람들에 의해 생각되어 왔어도 완전한 결론을 얻지 못하고 있다.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함께 '죽음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물음도 철학의 중요한 문제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한 뼈저린 이해 없이는 삶의 깊이를 올바르게 인식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애써 죽음의 문제를 떠올리기를 싫어한다. 더욱이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오늘날에 있어서는 이 경향이 두드러진다.

 

일반적으로 종교에서는 육체의 죽음 뒤에도 영혼이 존재함을 전제로 한다. ……

만약 신앙으로서가 아니라 이성을 바탕을 한 과학으로서 육체와 분리된 영혼의 존재가 객관적으로 증명된다면 세상은 어떻게 달라질까? 학문의 세계에 대혁명이 일어날 것은 물론이요 가치관의 혼돈 속에 서 목표를 상실한 채 표류하고 있는 우리 인간들은 자기를 재발견하고 자기를 재인식 하여 流轉하는 인생에 동요함이 없는 자기를 확립할 수 있지 않을까?

 

현대의 발달된 물리학과 심리학의 첨단 과학자들은 과학의 한계를 넓혀가며 죽음과 내세에 대한 일반적 진리를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지나 서미나라 (Gina Cerminara) 박사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에드가 케이시라는 靈能者를 통해 죽은 뒤에도 영혼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영혼이 윤회한다는 원리를 입증하고 있다. 에드가 케이시는 자기최면의 상태에서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를 투시(透視)함으로써 오늘의 삶의 원인이 現生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훨씬 먼 前生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혔는데 '윤회의 비밀'은 이에 대한 지나 서미나라의 조사연구서이다. ……  

 

 

 

 

■  팡 세 (파스칼, 1670); Pensées=pensee=묵상

         철학자들

 

347

인간은 하나의 연약한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자연 중에서 가장 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그를 무찌르기 위해 전우주가 무장할 필요는 없다.

 

한 줄기의 증기, 한 방울의 물만으로도 그를 죽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우주가 그를 무찌른다 해도 인간은 자기를 죽이는 자보다 더 고귀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과 우주가 자기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알지만,

우주는 전혀 그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엄성은 그의 사고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고에 의해서 스스로 높여야 한다.

우리가 모두 채울 수 없는 공간이나 시간에 의해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잘 사고하기에 힘써야 한다. 이것이 바로 도덕의 근본이다.

 

348 

생각하는 갈대

 

내가 나의 존엄성을 구하려는 것은 공간에서가 아니라, 내 사고의 규제에서이다.

내가 아무리 많은 영토를 소유하더라도 그 이상의 것을 손에 넣었다고 할 수는 없다.

우주는 공간으로써 나를 포용하고, 하나의 점인 나를 삼켜버린다.

그러나 나는 사고로써 우주를 포용할 수 있다.

 

352

인간의 덕이란 그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일상에 의해서 측정되어야만 한다.

 

355

위대성을 느끼기 위해서는 떠나야 한다. 무엇이나 오래 계속되면 사람들은 불쾌해진다.

추위도 몸이 따뜻해져 가면 기분 좋은 것이다.

자연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순환에 의하여 움직인다.

자연은 가고 또 돌아온다. 다음에는 더욱 멀리 갔다가 두 배가 되어서 돌아오며,

그 다음에는 그전보다 더 멀리 가는 것처럼,

바다의 만조나 태양도 이와 마찬가지로 행해지는 듯하다.

 

357

미덕을 가장 완전한 미덕의 경지에까지 추구하려고 하면

악덕이 무한히 작은 곳으로부터 나타나서 은밀히 미덕 속으로 잠입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지극히 큰 곳에서부터 무리를 지어 나타나기 때문에

인간은 그 악덕 속에 빠져 자신을 잃어버리고 더 이상 미덕을 볼 수 없게 되어버린다.

사람은 완전한 덕 자체마저도 비난하는 것이다.

 

358

인간은 천사도 아니거니와 짐승도 아니다.

그런데 인간의 불행은 천사를 닮고 싶어 하면서도 짐승을 닮아가고 있는 데서부터 비롯된다.

 

359

우리가 미덕 속에 지탱하고 서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양편에서 부는 두 개의 바람 사이에 서 있는 것처럼 상반되는 두 개의 악덕이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 악덕 중의 하나를 없애 버리면 우리는 다른 악덕에 빠지게 되고 만다.

 

376

회의론자는 지지자에 의해서보다 반대자에 의해서 강화된다.

인간의 연약함은, 그것을 지각하고 있는 사람보다 지각하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

더욱 확실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377

겸손에 대한 논의도 오만한 사람에게는 오만의 재료가 되고,

겸허한 사람에게는 겸허한 재료가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회의론자에 대한 논의도 긍정론자에게는 긍정의 재료가 된다.

 

겸손에 대하여 겸손하게 말하는 사람은 적고,

정절에 대하여 순결하게 말하는 사람은 적으며,

회의론에 대하여 회의적으로 말하는 사람도 적다.

 

인간은 허위와 이중성의 모순에 가득 찬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감추기도 하고 꾸미기도 한다.

 

397

인간의 위대성은 자기의 비참을 인식하는데 있다. 나무는 자기의 비참을 모른다.

그러므로 자기의 비참을 깨닫는다는 것은 비참한 일이지만 위대한 일이기도 하다.

 

400

인간의 위대성

 

우리는 인간의 영혼이 위대하다고 생각하므로, 그것이 경멸을 당하거나

어떤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

인간의 모든 행복은 이 영혼에 대한 존경에 있다.

 

412

이성과 정욕 사이에 일어나는 내면적 투쟁. 만일 그에게 정욕은 없고 이성만이 있다면...

만일 그에게 이성은 없고 정욕만이 있다면...

그러나 인간은 양자를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에 투쟁을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싸우지 않고 화해할 수 없다.

이리하여 인간은 언제나 분열되어 자기 자신에 대항하여 반항한다.

 

414

인간은 모두 미치광이이기 때문에, 미치지 않은 사람도 다른 형태의 광증으로 보아 미치광이라고 볼 수 있다.

 

416

인간이 빛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인간의 위대함과 비참함을 더 잘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만이 확실할 뿐이다.

인간은 자신들이 비참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비참하다. 왜냐하면 실제로 인간은 비참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비참함을 알고 있으며, 인간은 지극히 위대한 것이다.

 

418

인간에게 그의 위대한 일면을 보여주지 않고, 그의 동물적인 면만을 지나치게 보여

주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그에게 그의 비천함을 전혀 보여주지 않고 그의 위대성만을 너무 많이 보여주는 것도

마찬가지로 위험한 일이다.

 

또한 그 두 가지 측면을 하나도 보여 주지 않고 방치해 두는 것은 더욱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양쪽을 보여 주는 것은 매우 유익하다.

인간은 자신을 동물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천사와 같다고 자만심을 가져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양쪽을 모두 알고 있어야만 한다.

 

421

나는 괴로움을 극복하면서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만을 인정할 것이다. 

                                                                     팡세: 파스칼(Pascal)

 

 

■ 고대 철학사

                                                                    자료 : 일본 ウィキペディア(Wikipedia),  일부 발췌

 

서양 철학은 탈레스의「만물의 아르케(arche, 원시)」를 찾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여겨진다.

 

탈레스를 시작으로 미레토스 학파(이오니아 자연학)로 불리는 철학자들은 만물의 아르케를 자연(physis)안에서 구했다. 철학의 시작은 「유물론」적인 사상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우선 탈레스는 만물의 궁극적 실체, 구성요소(stoikeia)를「물(하이드로)」에서 추구했다. 그 다음에, 아나크시만드로스는 궁극적 실체를 탈레스의「물」과 같은 현상계의 존재자가 아니고, 추상적인「한계가 없는 것(to apeiron)」「무규정(無規定)적인 것(to aoriston)」에서 추구했다. 그는 경험에 근거한 사고를 넘은 형이상학적인 추상적 사고 세계를 파악하려고 하는 인식에 이르고 있어 철학을 탈레스로부터 한 걸음 진행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아나크시메네스는 아르케를「공기(에어)」에서 추구했다. 이처럼 미레토스 학파는 만물의 아르케를 물질적인 것(질료적인 것)에서 추구했다(감각적 원리).

 

이에 대해, 피타고라스는 이 세계 안에 있는「무엇」이 아니라, 예를 들어 별자리가 그 위치를 바꾸어도 태양과의 거리가 변하지 않는 것처럼, 사물이 변화하더라도 수적인 관계는 변화하지 않는다고 하는 데서, 이「무엇」을 엮어서 질서를 이루고 있는 보다 보편적이며 추상적인「수」에서 아르케를 추구했다. , 감각적 원리에 대해 상징적(양적) 원리를 세웠다. 만물이 생성 변화 소멸을 하는데 대해 수는 항상 불변이며, 만물은 수의 모방이다고 생각했다. 이 피타고라스 파에 의해서「육체는 무덤이다」라고 하는 설(?, soma sema)이 주창 되었고, 이것은 후의 「정신」과「물질(육체)」의 2원화라고 하는 근대 철학으로 연결되는, 어려운 질문의 새싹을 여기서도 엿볼 수 있다.

 

드디어, 에레아(남 이탈리아)에서 파르메니데스가 말한

「존재란 무엇인가」를 문제 삼기 시작했다. 「존재론(ontologie)」의 시작이다.

 

이 세계의 다양성은 외관으로 단지 감각에 나타난 억측(doxa)에 지나지 않고,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 외관「현상」의 배후에 진정한 존재자 “일자(一者, to hen, 하나님)”만이「있다 」라는 것이다. 이것은 Platon의「이데아의 세계와 현상계」라는 이원론으로 계승된다. 그는「무()」의 부정에 의해 참된 존재는 불생(不生).불멸(不滅).불변(不變).부동(不動) 이라고 했다.

 

이런 에레아 학파의 사상에 비해, 에페소스(소아시아)의 헤라크레이트스는, 「만물은 유전(流轉)한다(panta rhei) 」라고 하는 사상을 펼친다. 에레아 학파에서는 세상은 유() 또는 비유(非有)의 어느 쪽에 있겠지만, 헤라크레이트스는 세상은 다름 아닌 그 양자라는 것이다. 무엇 하나 같은 곳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 없이 변화해 나가는 것을 세계의 본질로서 파악한 그의 사상은 변증법적 사고를 철학의 본질로 한 Hegel에 의해 높이 평가되고, 니체의 초인 사상이나 영겁 회귀 사상에 명백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운동이 세계를 성립되게 하는 원리며, 변화를 통한 지속과 통일로 세상의 본질이 있다고 보았다. 그는 피타고라스를 의식하여 그것을「보이지 않는 조화」라고 불러, 그것을 성립되게 하고 있는 것은「관계(로고스)」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러한「로고스」를 알기 위해서는 「말(로고스)」이 필요하다. 그는 지금까지 철학자들이 만물의 구성요소, 원물질(Urstoff)을 탐구해 온데 비해, 그 대신 “原力(Urkraft), , 만물을 움직이는 힘을 탐구하려고 했다. (슈베이그라「서양 철학사」)

 

그렇다면 이들 파르메니데스의 주장과 헤라크레이트스의 사상은 어떻게 하여 통합되는 것일까. 그것은 다음에 등장하는 다원론자들에 의해서 시도된다. , 하나를 버리고 여럿()을 취하여 그 여럿()을 불생.불멸하게 하는 것으로서, 그러한 분리와 결합에 의해서 세계를 종합적으로 설명하려고 했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일원적인 아르케에 의한 설명에 대하여, 복수의 아르케를 생각한 것은 시칠리아의 엔페드크레스가 처음이다. 그는 생성이 없으면 소멸도 없다고 한다.

 

있는 것은 단지 보편적인 여럿()이 되는 존재일 뿐이다. 그는 그 아르케를「땅과 물과 불과 바람」의 4개의 리조마타 (rizomata, 萬物의 根, 아르케와 같은 의미)로 나누어 그것들이「사랑(philotes)」과「미움(echthos)」에 의해서 분리.결합한다고 하고, 이 세계의 생성 소멸을 설명했다. , 에레아 학파와 같이 변화를 부정하지 않고, 헤라크레이트스와 같이 변화를 질료(質料)에 내재 하는 원리라고도 하지 않으면서, 질료와 함께 움직이는 힘에 두었던 것이다.

 

아나크사고라스(Anaxagoras, BC500 ? 428년 경)도 마찬가지로 불생.불멸의 여럿(()으로 되는 존재를 생각했지만, 이것을 무수한 존재로 보았다. 그는 무한하게 작고 무한하게 많은 존재를 생각하고 이것을「만물의 종자(spermata panton chrematon, 스페르마타)」ないし物 (chremata)라고 불렀다.

그는 스페르마타를 분리.결합하는 원리로서「이성(nous)」을 생각했다.

 

세상의 시작은 모든 스페르마타가 혼합해 무한하게 혼돈된 무질서 상태였지만, 이 원초적 우주의 한 점에 이성이 선회 운동을 일으키게 하는 것으로서 종자가 분리.결합해서 만물이 생성했다고 여겼다. , 이성은「동력인」으로 보았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동력인을 생각한 철학자의 효시가 아나크사고라스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관념적 원리를 철학에 반입한 것은 평가할 수 있지만, 단지 이러한 이성을 최초의 충격, 작동의 힘으로 밖에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역시 자연철학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정신은 아직 자연을 지배하는 진정한 힘, 자신만의 힘으로 형성하는 우주의 영혼으로서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데모크리토스(Demoklitos, BC460-370)는 참 존재로서「원자(atomon, 아톰)」와「허공간(虛空間, kenon, 케논)」을 생각했다. , 「없는 것은 있는 것 못지 않다」 라는 것으로서, 공허가 있기 때문에 원자는 운동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외부적.초월적 원리를 생각하지 않고, 원자 그 자체가 가지는 자발적인 힘에 의해서 원자는 허공간을 운동하며 서로 결합.분리한다고 보았다.

 

즉 엔페드크레스 등의 목적론적인 세계관과는 달리 기계론적인 세계관을 제시했다. 그리고 물질 자체에 속한 것은 단지 형태(shema), 크기(megethos), 무게(barytes), 딱딱함(skerotes) 뿐 이어서, 그 외의 성질 즉, 색이나 맛, 향기 등은 감각의 주관성에 대해 있는 인상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그는 영혼도 원자로부터 완성된다고 생각하여 종래의 물활론(物活論)적 일원론이나 혹은 이원론적인 설명과는 다른 새로운 일원론적 유물론 세계관이 주창되었다. 그의 원자론은 에피크로스파에 의해 부활되었고, 이것이 한층 더 합리적인 기계론적 자연관으로서 르네상스기에 재생되어 근대 과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세상의 다양성에 관한 설명을 요구하는 물음인 자연철학과는 대조적으로, 사람은 어떻게 사물을 인식하는지(인식론),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윤리학)하는 물음을 세운 것이 소크라테스이다.

 

여기서 정신은 우선 자기 자신에게, 자신의 본질로 향한다. 그가 인간에 관한 유일한 과제, 모든 철학적 사고의 출발점으로 간주한 것은 자기 인식, 즉「자기 자신을 알라(gnothi seauton)」이다.

 그는「문답법」에서 소피스트들의 무지를 폭로했으며 그러한 그의 방법은 「에이로네이야(eironeia, 아이러니)」라고 불린다.

그리고 그는「덕이란 무엇인가」「정의란 무엇인가 」라고 하는 것을, 예를 들어「노예의 덕」등이라고 한 구체적인 사례 중에서 거기에 공통되는「덕 그 자체」「정의 그 자체」를 꺼내어 생각하려고 했다. 그 방법은 「귀납법」이라고 불린다.

 

Platon에 의하면 현상의 세계에 대해 감각이 파악한 지식은「억측(doxa)」에 지나지 않고, 「진정한 지() (episteme, 지식)」란 이데아(idea)에 대한 지식이며, 이러한 이데아를 볼 수 있는 것은 단지 이성에 의한 사유(noesis)의 직감적인 기능 뿐이어서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 변증법(dialektike)인 것이다.

 

Platon은 초기에는, 개체가 진정한 존재인 이데아를 나누어 가진다(metechein)거나, 혹은 이데아가 개체에 들어 있다(臨在 parousia)고 했지만, 개체 중에 이데아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고 생각했다. 이데아의 세계는 이 세상의「밖」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 이 이데아를 개체가 나누어 가지는지, 이 의문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데아론에 대해 품게 된 의문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 후, 「제3 인간론」의 문제 등을 다루면서, 개체는 이데아의 모방이며 닮은 모습(eikon)이라고 하는 생각으로 바뀌어 간다. 즉 이데아와 개체와의 관계를 원범형(原範型, paradeigma)과 모형(模型)과의 관계로서 파악한 것이다. 개체는 그 개체의 이데아가 <장소>에 투영된 것에 의해서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따라 헤라크레이트스적인 유전(流轉)하는 세계와 절대적인 존재를 주장하는 에레아설의 양자 통합에 성공했다. 이 원범형(原範型)이 되는 이데아, 우리의 영원불멸의 영혼(psyche)은 그것이 이 신체에 들어오기 전에 경험했던 적이 있으며, 이 경험했던 이데아를 상기(想起, anamnesis)하는 것에 의해서 우리는 사물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Platon에 의하면 이데아 안의 이데아라고도 해야 할 여러 가지 이데아를 한층 더 메타적으로 통합하는 이데아가 있다. 그것이「선(, agaton)의 이데아」이다. 이것이 모든 <원인>이 되는 이데아인 것이다.

이 같이 이데아와 개체의 사이에는 단지 논리적 존재론적 관계 만이 아닌 목적론적 관계도 생각되고 있었다.

 

Platon까지의 시대에는 철학이라 하더라도 신화(비유)를 통해서 말해져서 실제 이데아론도 피타고라스적인 신비 사상의 잔향이 있다. 그에 비해 철저하게 경험에 의거 하여 자연을 Platon 처럼 직관이 아닌 논증적으로 로고스에 의해서 분석하며 말하려고 한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이다. Platon은 우선 이데아로부터 출발해 주어진 것 경험적인 것을 설명하려고 했는데 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주어진 사실 및 현상의 전체로부터 보편적인 명제나 격율(格率)을 이끌어낸다고 하는 방식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Platon의 이데아설에 대하여「형상」과「질료(質料)」의 결합되는 방법이 외적이고 우연적이며, 생성이나 운동의 원리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에 불만을 느꼈다. 거기서 그는 가능태(可能態)와 현실태(現實態)라고 하는 개념을 도입한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세계관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가능태」로부터「현실태」로 향하는 운동의 가운데에 있다. 그리고 이미 실현 되어야 할 어떠한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고, 최고도의 현실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순수 형상」인 것으로서, 이것은「신」이라고도 불린다. 아르스트테레스적 세계에 있어 모든 것은 이「순수 형상」을 목표로 하는 목적론적 운동의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이「순수 형상」은 그것 자신은 이미 운동할 것은 없는데 모든 것을 당신으로 향하여 움직이므로 「부동(不動)의 동자(動者)」라고 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신」의 존재 증명은「우주론적 증명」이라고 불려, 중세에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수용되었으나, 칸트에 의해서 부정되었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의 전통으로서,「감성」적인 인식은「억측」에 빠지게 하는 요인이라고 하여 거부되었다. 헤라크레이트스는 그러한 우리의 감성에서 표출되는「현상」을 질서 있게 하는 것을「로고스」라고 불렀고, 아나크사고라스는 만물을 질서 잡는「동력인」으로서「누스(이성, 정신, 마음, nous)」를 생각했고, 파르메니데스도 감성적 인식을 멀리했다. 이러한 전통을 계승하면서 Platon도 「억측」을 벗어나「지식」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감성이 아닌 이성을 중시했다. 그리고「이성」을 논증적인「로고스(logos)」와 직관적인「누스(nous)」를 구별하였으며, 특히 참 실재(實在)인「이데아」을 파악하기 위해서는「누스」을 중시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역시「누스」는 사물의 원리를 파악하였으며, 동시에 최고의 직관적 지성으로서「우리들 가운데의 신」도 있었다.

 

피타고라스의「수」, 파르메니데스의「하나 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 소크라테스-Platon의「선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한「순수 형상(부동의 동자)」로 계승 되어 온「(초자연적인) 진정한 존재」의 계보는 신플라톤 주의에서의 일자(一者, to hen, 하나님)로서, 그리고, 이 후의 중세 크리스트교 신학에서의「신」으로, 한층 더 근대 합리주의에 대해「이성」이라고 하는 모습으로 계승되어 가지만, 이것을「형이상학」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계보를 쫓아 가면 어떤 의미로는, 「서양 자연과학」조차도 이러한「형이상학」의 연장에 있다고는 말할 수 없을까. 자연과학이란, 헤라크레이트스의 logos와 같은” 만물을 움직이는 힘 우어크라프트(Urkraft)”로서의「물리 법칙」이고, 데모크리토스의 atomon과 같은 “만물을 구성하는 것”, 그리고 그 자체가 “불생.불멸(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인 우어스토프(Urstoff)로서의「소립자」”를 추구하는 시도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다양한 감각 세계의 배후에 있는 그러한 참의 실재를 추구하는 방법론의 원형은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에서 볼 수 있듯, 감각 세계에 나타나는 구체적인 사물로부터 보편적인 물건을 꺼내는「귀납법」에서 볼 수 있다. 다만 소크라테스-Platon,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말하도록 한다면, 현대의 자연과학은 “물(, 소마, soma)”적인 원인에만 한정해서“선()“ 원인을 소홀히 하고 있다고 하지는 않을까.

 

Edmund Husserl (오스트리아, 18591938, 현상학적 철학을 확립)은 이러한 감각 세계를「억측」이라고 하고, 그 배후에「참 실재(實在)」의 세계를 보는 과학의 태도를 지적하며, 이러한 태도를「자연주의적 태도」라고 부르면서, 그것은 「생활 세계의 은폐」라고 비판했다. 이러한「형이상학」의 특징(그것은 형이상학에 있어서 물음의 정립방법인「그것은 무엇으로 존재할까」에도 나타나고 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사실 존재」와「본질 존재」로 존재를 분리해 버리는 데에서 오는 것이라 한다.(그리고 그것은 그들이「만들어 낸」 존재 관에 기인 되고 있다). 이에 따른 귀결로서,「본질」을 정하는「정신」과, 존재를「실현」화 시키기 위한「물질」로 세상을 2분 시킨다. 이러한「형이상학」을 넘으려고 한 것이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 微分法 발명)이며, 다음에 쉐링, 키에르케고르, 쇼펜하우어, 니체, 그리고 하이데거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샤르트르는 철저하게「사실 존재」와「본질 존재」로 2분 한다. 단지, 그는 인간 존재에 대해「본질 존재」보다「사실 존재」가 앞선다고 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형이상학의 뛰어 넘기」를 시도한 인간으로서, 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을 들어도 괜찮을 것이다

 

      .  (우어스토프, Urstoff ) - 元素, げんそ, Element, Grundstoff, 原素材, 根本素材

      .  (소마, soma) - 베다(인도의 성전)등의 인도 신화에서 신들의 음료로 여겨지는 있는식물의 액즙.

                               또는 그 식물을 신격화 한 인도의 신. 달의 신

 

 

 

 

 

■ 존재와 소유, 그리고 철학의 방향

              김.형효 교수의 퇴임강연 전문

 

. 퇴임을 기념해 한국학중앙연구원측이 마련한 강연회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철학’이라는 주제로 강연,

이 자리에서 ‘해체적 사유와 구성적 사유’ ‘소유론적(존재자적) 사유와 존재론적 사유’라는 철학소(哲學素)로 철학사를 읽어내는 자신의 독법을 소개하며, 앞으로 철학은 해체적 사유로 나아가야 함을 역설했다. 아울러 불교야말로 해체적 사유의 전형이며, 철학의 미래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개념의 철학과 소유주의의 사상

 

철학은 인간과 그 인간이 사는 세상을 해석하는 학문이다. 하이데거(M. Heidegger)는 서양철학사에서 플라톤(Platon)에서부터 시작된 철학이 세상을 존재자적인 학문으로 해석하였기 때문에 인간과 그 세상을 잘못 읽게 되었다고 진단했다. 존재자적인 학문이 철학이라면, 그의 철학은 이제 철학이 아니고 ‘미래적 사유’(das kunftige Denken = fu ture thinking)로 불리기를 바랬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말한 ‘철학의 종말’(das Ende der Philosophie =the end of philosophy)이다. 재래의 존재자적인 형이상학(die ontische Metaphysik =ontic metaphysics)으로서의 철학은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과학이 그것들 이었기에 그런 철학을 대학에서 강의한다는 것은 과학이 탈각해서 버린 허물을 아직도 뒤집어 쓰고 발버둥치는 서글픈 형상에 비유된다 하겠다.

 

하이데거가 파괴하려고 했던 존재자적 철학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첫째로 형이상학적 자아의 의식학, 그리고 자아의 의식이 표상하는 대상을 존재자적으로 명사화해서 보는 인식론을 뜻한다. 둘째로 그것은 인간중심주의의 사상을 견지하고 있다. 여기서 중세적 신중심주의와 근대적 인간중심주의를 구태여 구분할 필요는 없다. 신은 인간의 개념을 상승시킨 인격의 신성화에 다름 아니므로 하이데거는 저 두 가지를 차이나게 읽지 않았다. 자아의 형이상학과 대상의 인식론, 그리고 인간중심주의의 도덕학은 다 존재자적 철학의 삼원체제라 말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자적인 철학에서 존재론적 사유(das ontologische Denken =ontological thinking)의 복귀를 주장했다. 복귀는 플라톤 이전의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의 사유로 되돌아 가자는 뜻을 담고 있다.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는 하이데거의 사유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은 새로운 미래적 사유와 재래 철학과의 본질적 차이를 나타낸다. 존재자(das Seiende =being)는 명사로 개념화되는 실체와 같은 것이지만, 존재(das Sein =Being)는 명사화가 불가능한 동사적 사건(Ereignis =event)의 뜻을 함의하고 있다. 즉 존재는 생멸의 부단한 사건을 지시하므로 하이데거는 그것을 자동사적 의미를 지니는 뜻으로 독일어로 ‘Seyn’이라고 표시하기도 하였다.

 

존재자는 의식이 개념화할 수 있기에 자의식이 소유하거나 장악할 수 있는 인식의 영역에 해당한다. 개념은 자의식이 관념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그런 소유가능성을 말한다. 그러나 개념화가 안되는 부단한 흐름으로서의 존재론적 현존은 없어지는 부재의 사라짐을 안고 있다. 모든 존재는 내면적으로 부단히 변화하며 외면적으로 다른 것과의 관계를 떠나서 태어나지 않는다. 존재는 일의성으로 정의되지 않고 이중성을 운명적으로 안고 있다. 흑판이라는 존재는 문자를 쓰고 지우기 위하여 존재하고, 분필의 존재와 연관되어 존재한다. 문자를 쓰고 지우는 사이에서 그 흑판은 서서히 낡아지고, 분필과 지우개가 없으면 그 흑판도 생기지 않았으리라. 내면적 이중성이나 외면적 이중성이나 다 같은 구조다. 하이데거는 이런 이중성(Zwiefaltigkeit =duplicity)을 차이(Unterschied =difference)가 나는 두가지가 서로 상대방에게 연결고리를 맺고 있다는 뜻에서 차연(差延, Unter-Schied =differance)이라고 불렀다.

 

-延은 差-異와 延-(또는 延-)라는 두 개의 다른 의미가 하나로 묶여 공존하고 있어서 의미의 초점이 선명하지 않다. 일종의 반()개념으로서 명석판명한 개념이 아니다. 이 차연의 용어는 프랑스의 데리다(J. Derrida)에 의하여 ‘la difference =differance’라는 조어로 더 보급되었으나, 하이데거가 데리다보다 더 앞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차연의 용어는 이미 원효(元曉)의 불교적 사유에서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나 융이이불일(融二而不一)의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것은 억지 춘향 격으로 견강부회하려는 것이 아니다. 차연의 사유방식이 이미 고대 철학사의 여명기에 동서의 울타리없이 공통적으로 세상의 이법을 읽는 방식으로 발견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데리다가 이미 이것을 직시했다. 하이데거가 소크라테스(Sokrates) 이전 고대 그리스의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의 존재론과 헤라클레토스(Herakleitos)의 생성론을 이율배반적으로 읽지 않고, ‘존재 즉 생성’의 이중성으로 보려는 시도도 역시 차연의 다른 이름에 해당한다 하겠다.

 

이런 단편적인 지적은 벌써 동서양을 막론하고 개념 철학과 차연 철학의 차이가 존재해 왔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데리다가 이미 그런 철학사의 두갈래를 지적하기도 하였다. 개념철학과 차연철학의 두갈래는 하이데거적으로는 ‘존재자의 철학(Philosophie des Seienden =philosophy of beings)/존재의 사유(Denken des Seins =thinking of Being)’로, 프랑스의 20세기의 가톨릭 사상가인 마르셀(G. Marcel)의 철학용어로는 ‘소유론(la pensee de lavoir =thought of having)/존재론(la pensee de letre =thought of being)’으로, 데리다의 분류에 따라 ‘말중심주의(le logocentrisme=logocentrism) / 문자학(표지학)(la grammatologie =gram- matology)’으로, 불교철학의 용어로는 ‘自我의 알음알이/無我의 지혜’로, 老子의 도가적 용어로서는 ‘能爲/無爲’로 각각 나누어진다 하겠다. 여기서 생소한 용어들이 등장해도 조금도 개의할 필요는 없다. 그것들은 단지 이 글의 성격적 위상을 미리 추상적으로 도표화하기 위한 안내표지에 불과할 뿐이다. 물론 나는 후자의 입장에 서 있다. 철학사적으로 전자와 후자의 계열은 용어상의 표현적 차이를 넘어서 내용상으로 서로서로 뭉쳐진다 하겠다.

 

 

인간이 세상에 살면서 가장 먼저 지각하는 것은 이 세상에 인간을 포함한 삼라만상이 있다는 것이다. 이 삼라만상의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것들을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 보고 있는가? 이것이 철학적 사유의 시작이다. 이런 삼라만상의 이해방식과 보는 방식이 앞에서 거론된 ‘개념철학/차연철학’의 구분을 낳았다. 개념철학에 따르면 삼라만상은 자아의 의식 앞에 나타난 대상이고, 나는 그 대상을 알지 못하므로 객관적으로 인식하기 위하여 개념적으로 그것을 장악하고 파악해야 한다. 여기서 자아는 주관이고, 대상은 나의 주관 앞에 선 문제(le probleme =problem)로서의 객관이 된다. ‘문제’는 마르셀 철학의 중요개념인데, 그냥 단순한 어휘로 내가 쓴 것이 아니다. 그 대상은 단독 명사로 분류되어야 하고, 고유한 뜻을 품고 있어야 한다. 즉 철학적으로 실체와 자기 고유성이 의미론상으로 설정된다. 은연중에 개념철학은 자아의식을 중심으로 삼고 삼라만상의 현상을 내 앞에 판단하기 위하여 내 세운다. 이것이 ‘문제’의 개념이다. 대상을 판단하는 것은 곧 대상을 개념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소유의식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마르셀이 ‘문제’를 해결하는 판단철학과 소유론과의 사이에 하나의 깊은 유대가 암암리에 맺어져 있다고 지적했다. 이것은 탁견이다. 개념철학은 현상을 소유의 대상으로 여긴다. 그리고 그 현상을 非我의 대상으로 간주하여 현상을 단독적인 존재자로서, 명석판명한 명사로서 의식이 규정한다. 명사로서 작명이 안된 대상은 아직 자아의 의식에 정리가 안된 미해결의 문제로 남아 있게 된다. 명사가 실체적인 존재방식의 완성으로서의 自家性인 자기 고유성의 정립으로 고착된다. 이것이 지식의 정의다. 명사로서의 현상은 개념이고, 그것은 곧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자에 다름 아니다. 존재자는 삼라만상을 개별적 고유성으로 보는 방식과 같다. 그리고 그 개별적 고유성은 형이상과 형이하로 분류된다.

 

현상에 대한 형이하적 장악은 경제실리적 소유법과 통하고, 형이상적 장악은 도덕명분적 소유법을 도입한다. 즉 형이하적 문제는 사회생활에서 경제실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편리’라는 진리의 길을 부르고, 형이상적 문제는 인간사회의 정신적 갈등과 소외의 문제와 직결되는데 도덕명분적으로 ‘정의’라는 진리의 길을 요청한다.

 

편리(便利)와 정의(正義), 이 두 가지가 재래의 개념 철학의 영역에서 가장 크게 주목받았던 진리의 대명사라고 보여진다. 그리고 그 두 가지의 진리는 다 현상을 의식의 문제와 대상으로 여겼던 소유론적 사고방식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경제실리주의는 세상의 현상을 물질적으로 장악하여 편리를 제공하려는 인간이성의 지능적 측면과 연계되어 있고, 도덕명분주의는 세상의 현상을 정신적으로 장악하여 정의를 실현하려는 의지적 측면과 유관하다. 그래서 다 소유주의적 존재자의 철학이라고 우리가 부른다. 왜냐하면 그것은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다 개념상의 문제를 야기하는 불편과 부정의를 극복하고 해결하려는 지능과 의지를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개념 철학은 두 가지로 요악된다. 그 하나는 자아의 판단하는 의식을 중심에 두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대상의 문제를 경제실리적으로 그리고 도덕명분적으로 해결하려는 소유적 진리관이다.

 

경제실리적 편리의 진리를 가치로 여기는 자아의 판단은 쉽게 이기배타적인 충돌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그 진리는 이해관계에 사람들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이익을 쟁취하는 자연적 본능의 소리에 쉽게 기울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산장수의 이익은 얼음장수의 손해와 같이 가기 때문에 두 직업의 사람들이 서로 이익에서 충돌한다. 경제실리주의는 이기배타적 속성을 지닌다. 경제실리주의도 인류의 보편적 편리를 위한 보편주의의 성향을 지니기도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 그러나 그 보편주의적 시각도 인간중심주의적인 이익을 위하여 비인간적인 자연적 존재자들을 일방적으로 희생시키려는 사고방식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이기배타의 구조를 떠난 것은 아니겠다.

 

그렇다면 도덕명분주의가 설파하는 정의의 진리는 이기배타적 속성을 지우는 것 아닌가? 도덕명분주의는 선의지의 사회적 실현을 목표로 삼기 때문에 강력한 보편주의의 명분을 띠고 있다. 그러나 보편적 선의지가 무엇인가? 모든 이가 동의하는 그런 선의지가 실질적으로 가능한가? 도덕적 선의지를 설파한 유가의 공자를 통하여 역설적으로 보편적 선의지의 실재가 선명하게 설정될 수 없음을 우리가 알 수 있다.

 

공자가 《논어》의 ‘양화편(陽貨篇)’에서 말하였다. ‘인을 좋아하되(好仁) 배우기를 싫어하면 그 폐단은 어리석음()이 되고, 안다는 것을 좋아하되(好知) 배우기를 싫어하면 그 폐단은 큰 소리만 탕탕치는 허풍()이 되고, 신의를 좋아하되(好信) 배우기를 싫어하면 그 폐단은 나와 남을 해치게() 되고, 곧기를 좋아하되(好直) 배우기를 싫어하면 그 폐단은 가혹하리만큼 여유가 없고(), 용기를 좋아하되(好勇) 배우기를 싫어하면 그 폐단은 난폭해지고(), 굳세기를 좋아하되(好剛) 배우기를 싫어하면 그 폐단은 광기()가 된다.’ 이것을 유명한 공자의 ‘육언폐단(六言六蔽)’이라고 부른다. 공자는 여기서 모든 가치가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폐단을 언급하면서 학문의 공부를 통하여 그 폐단이 극복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견지한 것으로 보인다. 즉 도덕적 선의지가 학문적 공부의 성취를 통하여 자신의 어둠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밝히는 공자에 비하여 노자는 전혀 다른 사상을 펼친다.

 

말하자면 노자는 도덕적 선의지가 이미 그 자체 어둠의 요소를 필연적으로 회임하고 있기 때문에 학문의 공부와 이성의 판단을 통하여 그 어둠이 극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선은 이미 불선을, 그리고 덕은 악덕의 어둠을 자신의 이면에 감추고 있는 것이 이 우주의 도()의 필연성이기 때문이다.

노자의 《도덕경》의 2장에 나오는 말이다. ‘천하가 다 미()를 미라고 여기면 그것은 악()이고, ()을 선이라고 여기면 그것은 불선(不善)이다. 고로 유무(有無)가 상생하고, 난이(難易)가 상성하고, 장단(長短)이 상형하고, 고하(高下)가 상경하고, 음성(音聲)이 상화하고, 전후(前後)가 상수한다. 27장은 더 직설적이다. ‘고로 선인은 불선인의 스승이고, 불선인은 선인의 자산이다.(故善人不善人之師 不善人善人之資)’ 노자는 선의지가 순진하게 자기 뜻대로 세상을 정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불선의 어둠이 무의지적으로 생기하여 선의지적 도덕명분주의를 퇴색시킨다고 본다. 그러므로 선의지가 비록 도덕명분주의의 이념에 의하여 사회를 정의롭게 만들려 하나, 그런 능위적 작업이 생각대로 되지 않으려니와, 또 세상이 그렇게 선의지에 의하여 소유되지 않음을 노자는 갈파하였다.

 

그동안 인류는 이런 선의지의 능위(能爲)로 세상을 새로 만들려는 그런 의지의 도덕학과 형이상학을 수 없이 펼쳤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구악이 일소되면 거기에 반드시 신악이 등장하여 선의지에 의한 세상의 소유를 불가능하게 하였다. 이제 인류는 이런 낭만적 이상의 꿈에서 깨어나야 할 때에 이르렀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명분주의의 실천철학도 자아의 관점에 따라 다른 차이를 노정하게 된다. 내가 제시하는 선이 보편적으로 만인에 의하여 동의되지 않고 반드시 반대의견에 부딪치면서 사회적 이견의 갈등을 불러 일으키고, 이것이 사회적 투쟁의 변증법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왜냐하면 내가 확신하는 선은 타자에 의하여 그 선의 이면에 깃들어 있는 불선의 요소로 인지되어 내가 주장하는 선에 대립하게 된다. 그래서 도덕명분주의는 결국 불교의 유식학적인 용어인 의사식(意思食)의 싸움으로 치닫게 된다. 의사식은 자기의 의사를 진리로 확신하여 타인의 의사와 싸워 그 타인의 의사를 먹어치우려는 승리의 집념을 말한다. 경제실리주의가 식욕의 단식(段食)과 성욕의 촉식(觸食)을 위주로 삼는다면, 도덕명분주의는 의사식(意思食)의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겠다.

 

 

  소유론적 의식철학과 논리적 의식일반의 허구성

 

다 소유주의는 자의식을 버리지 않는다. 그런데 철학적 자의식일수록 그 자의식은 보편적이라고 명명된다. 왜냐하면 이기적 자아의 얼굴을 수정없이 내미는 철학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제실리적 자아나 도덕명분적 자아나 다 보편적 논리의 기치를 한시라도 놓아 본 적이 없다. 경제과학적 지식이나 도덕실천적 의지는 모두 의식일반(consciousness in general)의 성역을 신주모시듯 한다. 의식일반은 보편적 가치를 낳는 기반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보편적 가치는 개인적 심리적 호오(好惡)를 넘어서는 보편적 진리의지나 선의지가 있다는 신념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그래서 개념철학은 그동안 논리적 의식일반이 개인적 심리적 호오의 편파심을 넘어선 가치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허구적이다. 자아의 의식은 보편적이고 도덕적인 가치를 띄우면서 사회적으로 장식을 해나가지만, 다급하게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 개인의 자아가 위기를 당하면 자아는 자기가 살기 위하여 생존의 본능과 하나가 된다. 도덕명분적인 선의지로 사회적 공동선을 말하던 사람이 자신의 본능적 이해관계에 직결되는 상황을 만나게 되면, 그는 대뜸 이기적 작태로 돌변한다. 도덕명분주의가 아무리 反본능적 사회적 공동선을 설교하더라도 개인적 무의식에 도사리고 있는 본능의 이기적 생존욕망을 저버리지 못한다.

 

경제실리주의는 본디 개인적 이기주의의 모판을 실질적으로 향유하고 있으면서 철학적으로는 인류의 공동 이익과 편리, 경제적 부의 증진에 기여하는 소유론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누구나 부인하지 못할 확실한 소유론의 철학이다. 그런데 그 소유론이 인류의 복리증진에 이바지한다고 이기주의의 틀을 벗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국가간 빈부의 격차가 부국의 이기주의에 기인한다는 소론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한 사회 안에서의 빈부의 격차도 부자계급의 무한 탐욕에 기인한다는 사회정의론의 주장이 전혀 허구로서만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경제실리주의의 소유론이 결과적으로 범인류의 이익을 증진하게 된다는 주장도 있다. 이기주의를 인류의 차원으로 확장한 결과다. 그러나 그것은 위에서 우리가 지적했듯이 인간중심주의가 자신의 이익을 사냥하기 위하여 인간 이외의 중생을 순전히 인간 이익의 도구로 희생시켜도 좋다는 발상을 정당화시켜 준다. 과학기술주의의 의식일반이 이렇게 경제실리주의의 이기심으로 이어진다.

 

도덕명분주의의 反이기심과 反본능론이 경제실리론의 이기심과 과학기술론의 인간중심주의를 이겨 낼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도덕명분론의 정의론과 의() 사상이 이기적 이익을 탐욕하는 인간의 본능적 욕망의 심리를 성공적으로 씻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조금 전에 역설적인 공자의 육언육폐(六言六蔽)를 음미했다. 모든 도덕적 가치는 필연적으로 야누스적 얼굴의 이중성을 띠고 있다. 그래서 정의의 의()가 필연적으로 그 가치를 추종해야 한다는 당위성 때문에 남과 자기의 마음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해치게 되는 ‘賊’과, 가치에의 굳센 신념이 무의지적으로 낳는 경직된 정신적 ‘교’살(‘絞’殺)의 분위기와, ()의 실천이 초래하는 ‘난폭한()’ 심리와 정의감이 수반하는 ‘광()적’인 ‘추상의 정신(lesprit dabstraction =spirit of abs- traction))’등이 일어나게 된다. ‘추상의 정신’은 마르셀의 철학이 설파한 가르침이다. 그는 《인간적인 것을 거슬리는 인간들(Les hommes contre lhumain)》에서 추상 명사로 불리워지는 도덕적 정신의 가치가 종종 구체적인 현실의 모습들을 고려하지 않고 공허한 구호로 둔갑하여 정신을 단세포화시키는 결과를 ‘추상의 정신’이라 불렀다. 그래서 이 구호에 현혹되면 인간의 정신은 격정적 광기로 변하게 된다는 것을 그는 역설하였다. 도덕명분론이 본의 아니게 독선과 위선으로 흐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선의지의 확신적 신념이 그런 결과를 낳는다. 확신의 의지가 없으면 새 사회를 만들 수 없다. 그러나 새 사회를 만들려는 의지는 부지불식간에 고집으로 변한다. 그 고집이 유식학에서 말하는 의사식에 해당한다는 것을 우리가 앞에서 보았다.

 

신념의 고집은 마치 경제실리주의가 의존하고 있는 이기심과 역설적으로 닮았다. 자기 것이 옳고 타인의 것이 그르다는 판단이 그런 고집을 낳는다. 이것은 이기적 개인의 호오 감정과 무엇이 다를까? 이기적 개인의 호오감정은 물질적 이익뿐만 아니라, 정신적 지배의지도 관계한다. 진리의지와 권력의지는 다른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융(C.G. Jung)의 통찰을 받아들인다. 그는 모든 논리적 보편성과 그 주장의 무의식에는 심리적 호오의 경향이 깊이 숨어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래서 심리가 논리보다 앞선다고 그는 보았다. 이 말은 자아의 의식이 모든 생각의 흐름에 동반하고 있는 한에서 인간의 생각은 아상(我相)과 아애(我愛)와 아견(我見)의 편파적인 틀을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자아의 지성은 부분적(partial)이고, 자아의 의지는 편파적(partial)이다. 그래서 사회생활에서 늘 타인들의 것과 부딪치고 장애를 일으킨다. 융의 소견은 우리로 하여금 불교적 유식학의 길로 접어들게 한다. 유식학의 견지에서 보면 인간은 무시이래로 아상·아견·아애 등이 형성하는 아치(我癡)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것이 업감연기설(業感緣起說)과 유사하다.

 

인간은 사회생활의 업을 통하여 늘 이기적 아상중심적 본능을 키워 왔었다. 사회생활은 곧 언어생활인데, 언어생활은 늘 사회적으로 남으로부터 인정과 승인을 받으려는 그런 욕망의 소유욕과 다르지 않다. 헤겔(Hegel)은 이 사회적 인정의 욕망을 잘 읽었다. 그래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그가 통찰하였다. 부모나 주위로부터 말을 배움에서 인간은 부모와 주위로부터 사회적인 인정을 겨냥하는 아상의 욕망을 무의식의 종자로 갖게 된다. 이것이 불생불멸인 제8식인 무의식(un-conscious)의 아알라야식(laya vijnana)에 저장되고 업종자가 되면서, 이것이 다시 제7식인 마나스식(manas vijnana)에 전식(轉識)되고, 이 마나스식이 제6식인 모든 의식의 활동에 前의식(pre-conscious)으로 영향을 미치는 심상(心象)이 된다. 이 아상중심의 심상이 의식의 표상 활동에 그림자처럼 동반하기에 어떤 의식의 표상도 아중심의 심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이기적이다. 그래서 그가 세상의 삼라만상을 표상해도 늘 이기적 소유의식을 지우지 못한다. 그러므로 언어학적으로 봐도 인간은 그에게 무의식으로 형성된 아상중심의 욕망의 ‘체(sieve)’를 벗어나서 현상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언어의 체’라고 언어학자 트루베츠꼬이(Troubetskoy)는 말했다. 그래서 아무리 이성적 대화를 통하여 사회적 의사소통의 이상적 담론을 추구하려 해도 그것은 이상주의자의 꿈꾸는 낭만이지 실제로 그런 이성에 의한 이상적 일치의 사회는 도래하지 않는다. 저런 하버마스(Habermas)의 소견은 실현되지 않는 이성적 계몽주의자의 꿈이고 낭만일 뿐이다.

 

의식의 이성은 무의식의 아상을 이기지 못한다. 인간은 그가 무의식적으로 형성해 놓은 언어적 체를 통하여 타인의 대화를 듣기 때문에 그 체에 걸리는 것은 무의식의 심상이 통과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만인은 그가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이것을 프랑스의 구조주의적 정신분석학자인 라깡(J. Lacan)이 이미 밝혔고, 라깡에 영향을 끼친 하이데거가 그의 《이정표(Wegmarken)》에서 세상은 ‘마음에 속하는(daseinsgehorig)’ 것으로서 ‘매번마다 마음(현존재)이 작성하는 것의 전체(die jeweilige Ganzheit des Umwillen eines Daseins)’를 세상이라 묘사했다. 이 말은 각자의 마음의 관심의 수준만큼 세상이 형성된다는 것이겠다. 하이데거의 말은 하버마스의 계몽적 이성주의를 희롱한다. 따라서 의식의 이성이 아무리 공정성을 주장하고 불편부당을 역설해도, 그 이성은 자의식의 보편성이라는 명분 아래에 늘 아만과 아애와 아견의 집착을 버리지 못한다. 아애가 아집(我執)을 키운다면, 아견은 법집(法執)을 낳는다. 아집과 법집은 늘 사회적 명분으로 자신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찾는다. 개념의 철학이 자의식의 철학과 함께 간다는 것을 우리가 성찰했다. 그리고 자의식의 논리적 보편성의 명분도 기실 아상이라는 심리적 중심을 장식하기 위한 꾸밈과 같다는 것도 우리가 보았다. 경제실리주의가 이기주의에 축을 밖고 있는 것은 자명하다. 그런데 도덕명분주의도 反이기주의적 선의지의 명분을 떠난 것이 아닌 한에서, 모든 도덕주의의 철학도 我相의 영향 아래에 감추어진 아애와 아견의 아집과 법집을 굳세게 견지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도덕명분주의도 경제실리주의에 못지 않게 소유론의 철학, 존재자의 개념론이라 생각한다.

 

이와 함께 사회생활의 이기적 본능의 치료를 도덕명분주의에 맡기는 것은 별로 실효성이 없는 공염불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사회생활에서 인간들의 소유론적 이기적 본능의 이기배타적 욕망을 치유하기 위하여 인류는 오랜 세월동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도덕명분주의의 가치론에 맡겨 도덕적 세상을 창출해주기를 기대했었다. 그러나 그동안 인류가 쏟아 부어 넣은 노력에 비하여 그 결과가 허망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경제실리주의는 본능의 자연적인 이기심에 바탕하여 마음의 자발적인 흐름의 성향과 일치하는 대목을 지녔지만, 도덕명분주의는 마음의 자연적 이기심의 성향을 거슬리는 방향으로 역진하는 운동을 요구함으로써 무위적 마음의 흐름을 존종하지 않는 강력한 당위의 의지로 무장할 것을 요청한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은 자연적이고 자발적인 흐름을 좋아하지 능위적인 작용을 가하여 마음이 자연성의 생리와 어긋나는 어떤 역추진을 달가와 하지 않는다. 인간은 사회생활을 영위하더라도 자연적인 마음의 기호에 따라 사회생활하기를 좋아한다. 본능은 자연적 마음의 성향이다. 본능적 마음은 이기적인데, 이 이기심이 이기배타적인 길을 가기 때문에 反사회적 작태를 낳는다. 이것이 문제다. 이런 이기심의 반사회적 작태를 교정하기 위하여 도덕명분주의가 등장하여 반사회적 이기심을 당위적으로 숨죽이거나 뿌리 뽑으려 했다. 그러나 능위적 당위성은 자연적 무위성을 결코 이기지 못한다. 이것을 차연의 철학이 다시 깨달았다.

 

맹자는 선의 의미를 애매모호하게 읽었다. 이것은 맹자의 사유가 참으로 깊은 통찰력으로 세상을 보았다는 것을 뜻한다. 맹자에 의하면 선은 좋은 것이기도 하고 또 의로운 것이도 하다. 전자는 자연적 기호의 의미로 선을 읽은 것이고, 후자는 도덕적 당위의 뜻으로 선을 해석했다. 전자의 경향은 양명학으로 흐르는 계기를 주었고, 후자의 것은 주자학을 탄생시켰다. 선을 자연적 기호의 의미로 읽어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래야만 선이 재미있고 즐겁고, 그러면서 배타적인 反사회성을 낳지도 않으면서 자리이타적인 자연성으로 마음에 이익이 되는 그런 경지로서 사랑을 받게된다. 도덕성과 예술적 놀이성이 이율배반적이지 않는 그런 마음의 자연성과 자발성을 우리가 보게 된다. 인간은 재미있는 삶을 자연적으로 갈구한다. 재미있지 않으면 인간은 즐겁게 하려 하지 않는다. 사회생활도 도덕생활도 직업생활도 철학공부도 다 재미있어야 한다. 이 재미를 본능과 본성이 다 요구한다. 그러나 본능이 요구하는 재미는 소유론적 재미이나, 본성이 그리워하는 재미는 존재론적 재미다. 본능과 본성은 다 마음의 자연적 자발성의 힘이다. 본능은 아상의 만족을 추구하나, 본성은 아상을 버릴수록 그 기쁨이 더 커진다. 스피노자(B, Spinoza)는 《윤리학(Ethique)》에서 ‘인간은 선이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기 때문에 선이라 여긴다’라는 명제를 제시했다. 중요한 언명이다. 인간은 좋음을 찾는 마음, 즉 이익을 좋아하는 마음이다.

 

 

   色卽是空 空卽是色의 해석

 

미래적 사유의 본질은 마음이 본능적이며 소유론적 마음의 재미와 좋아하는 기호(嗜好)의 추구에서부터 본성적이며 존재론적 마음의 재미와 좋아하는 기호에로 회심하도록 길을 닦아야 하는데 있다고 본다. 양명학이 지행합일(知行合一)을 말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이해되어 왔듯이 아는 것은 행동으로 동시에 이행되어야 한다는 지식과 실천의 당위적 합일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자연적 마음인 양지현성(良知現成)의 상태에서 보면 지행합일은 바로 무위적으로 좋은 색을 좋아하고 나쁜 냄새를 싫어하듯이 그렇게 즉각 이루어진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겠다.

 

소유론적 기호에서 존재론적 기호에로 마음을 회심시키는 마음의 길닦기는 불교의 《반야심경》에 나오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사유에서 가장 확실하게 정립 되어지는 것 같다. 색즉시공은 모든 색상을 띤 현상이 그 본체에서 공성임을 말하고, 공즉시색은 모든 공성이 다 색상을 지닌 현상임을 알려준다. 말하자면 현상()과 본성()과의 상관성을 입론한 구절이라 하겠다. 감각적으로 가시적인 현상이 다 그 본질에서 공성임을 모르면, 인간은 덧없는 소유적 탐욕의 노예가 되어 존재자적인 색상의 현상을 다 소유하려는 덧없는 몽상을 하게 된다는 것을 첫 구절이 함의하고 있다 하겠다. 즉 존재자로서의 현상을 실체로 간주하여 그것을 소유하고 지배하려는 욕망의 만족을 얻으려는 것이 곧 좋은 것을 먹으려고 하는 식욕의 변형이다. 그 식욕은 지배욕과 권력욕과 지식욕을 다 함의한 소유욕에 다름 아니다.

 

이런 소유욕이 허망함을 일깨워주는 것이 색즉시공의 의미라고 여겨진다. 색즉시공의 의미는 소유되지 않는 것을 소유하려고 하는 유루법(有漏法)의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는데 있다. 다 새버리는 것을 끝까지 안으려고 애쓰는 것이 유루법의 헛 농사다. 유루법의 헛 농사를 짓지 않도록 불교는 몸의 더러움과 감각의 고통스러움과 마음의 무상함과 내 것이 안되는 만법의 존재방식을 사념처(四念處)로서 바로 보게 한다. 색즉시공은 소유론의 대부정을 일구면서 소유론적 현상(現相)은 결국 환상(幻相)임을 알게 해준다. 만물을 환상으로 보게 하면서 색즉시공은 공즉시색이라는 존재론의 대긍정을 위하여 길을 열어 놓는다.

 

공증시색은 모든 만물의 생멸과 존재방식은 무한대의 허공의 ‘무본지본(無本之本)’에서 자동사적으로 솟은 공()의 현상임을 알려준다. 이 ‘무본지본’은 원효가 《금강삼매경론소》에서 말한 허공의 의미로서 ‘얻을 수 없고 얻을 수 없는 것도 아닌(不可得非不可得)’ 허공의 의미를 일컫는 뜻인데, 이 표현은 하이데거가 무(, Nichts =nothing)를 탈근거(Ab-grund = groundless ground)로 본 것과 상통한다 하겠다. 말하자면 삼라만성으로서의 두두물물은 다 허공의 법계에서 솟은 공의 시여(施與)와 같고, 공의 보시(布施)에 다름 아니다. 허공의 공에서 어떻게 만물이 생기하고 또 소멸하나? 원효에 의하면 이 무본지본으로서의 허공법계는 일심(一心)의 다른 이름과 같다. 허공법계는 텅 비어 있으나 죽은 공허한 빈 공간이 아니라, 고갈되지 않는 무한대의 원력이 끝없이 넘쳐 흐르는 마음과 같다. 원력은 소유론적 욕망과 같은 이기배타적 탐욕이 아니라, 자신을 증여하여 많은 이타행을 하고 싶어 하는 그런 존재론적 욕망의 다른 이름이다. 하이데거는 존재를 ‘Es gibt =It gives =There is’라고 언명했다. 저 구절은 ‘있다’라는 부사구이지만, 여기서는 특별히 ‘그것이 준다’라는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고 읽어야 할 것 같다.

 

‘그것(Es)’이 무엇인가? 원효식으로 옮기면, ‘그것’은 일심이고, ‘주다(gibt =geben)’는 일심의 원력이 현상화하려는 즉 존재에로 나타나려는 일심의 원기(元氣)를 뜻한다고 여겨진다. 이 일심의 원기를 하이데거는 존재론적 ‘종용(從容)(das Sein-lassen =letting-be)의 뜻으로서 읽었는데, 이것은 만물을 만물로서 존재케 하는 탈근거인 無의 힘과 다른 것이 아니겠다. ‘그것’의 삼인칭 대명사를 서산대사가 임종 직전의 선구(禪句)에서도 표현했다. 80년 전에는 그것()이 나()였는데, 80년 후에는 내가 그것이도다.(八十年前 渠是我 八十年後 我是渠(, 도랑)) 이 공성의 일심을 서산대사가 ‘그것’이라고 표명한 것은 그 일심이 전혀 인격적 자아의 일인칭이 아니고, 무인격적인 삼인칭으로서 여래의 법에 다름 아님을 뜻한다고 하겠다. 《금강경》에도 여래를 ‘제법여의(諸法如義)’라고 세존은 설파했다. 모든 여래의 법은 자연의 여여한 모습과 같다는 의미겠다. ()을 절대적 인격으로서의 완전한 자아로 보면, 자아가 남아 있는 한에서 그 신은 편파적 아상을 지울 수 없다고 보았기에 14세기 독일의 신비적 신학 사상가인 마이스터 에카르트(Meister Eckhart)는 신을 공(Leere =voidness)과 無로서 읽었다. 그리고 그런 신을 그는 또 ‘그것’이라고 번역됨직한 것으로 해석했다. 그런 ‘그것’으로서의 神은 스스로 만물 속에 자신을 나누어주고 싶은 사랑의 시여에 다름 아니므로 만물 속에 신의 씨앗이 다 깃들어 있다고 여겼다. 이것이 그의 창조론이다. 창조는 절대적이고 인격적 존재자가 세상을 무로부터 타동사적으로 창조한 것이 아니라, 무한대의 공성의 원력이 스스로 만물 속으로 다양화되는 것을 일컫는다. 에카르트의 사상은 범신론적인 경향을 띠고 있고, 이것이 불교적 우주관과 아주 닮았다. 공성이 일심의 원력을 나타내므로 그 일심의 원력이 하느님이기도 하고 부처님이기도 하다. 하느님과 부처님은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삼인칭의 법이 공성이고, 그것이 또한 일심이다. 그러므로 이 일심은 단지 인간의 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 마음’(le Mental cosmique =cosmic mind)이라고 읽어야 한다. 프랑스의 불교학자인 랭쎈(R. Linssen)이 《禪(Le Zen)》에서 일심을 그렇게 옮겼다. 올바른 통찰이라고 여겨진다. 일심은 자아가 중심을 자리잡고 있는 자아의 마음이 아니다. 일심은 무아의 마음과 같다. 무아의 마음은 자아의 마음처럼 편파적으로 세상을 보지 않고 아주 공정하고 무사심으로 세상을 본다. 노자가 말한 ‘천도무친(天道無親)(79)이 그런 무아의 마음을 상징한다 하겠다. 인간의 마음도 무아의 경지에 가까이 접근하면 할수록 그 마음이 표출하는 모든 현상은 자성이 스스로 분비하는 즐거움으로 나타나고, 이것이 곧 이타행을 하는 이익의 마음이 된다. 우리가 무아의 경지에서 공부하는 순간의 마음은 무심이지만, 그 순간의 무심은 매우 온유하고 고요해서 흥분된 번뇌의 물결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 순간의 마음은 무심지심(無心之心)으로 자리(自利)의 고요가 곧 이타(利他)의 보시로 이어진다. 자리와 이타가 다르지 않다. 자아의 아상은 외부로부터 오는 온갖 사회적 이기심과 배타심의 끄달림으로 인하여 번뇌에 시달리고 괴로워하게 된다. 그리고 자존심이 상해서 그는 아파하는 자아를 짊어지고 괴로워한다. 무아의 마음은 공성이 스스로 자발적으로 솟아나는 원력이므로 다함이 없고 고갈되지 않는 무한대의 힘을 정시한다. 그 힘이 원기다. 무아의 일심이 현상으로 나타나려는 존재의 원력은 기쁨의 즐거움을 베풀려는 자비와 다르지 않다.

 

그 元氣는 베르크손(H. Bergson)이 《창조적 진화(LEvolution creatrce)》에서 갈파한 ‘생명의 비약’(lelan vita l=vital spring)과 다른 것이 아니겠다. 소는 뿔이 있어서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받으려는 생명의 원력이 하도 강렬하여 뿔이 생겼다고 읽어야 하겠다. 이것이 베르크손의 통찰력이다. 마찬가지다. 벚꽃은 장렬하게 산화하려는 마음이 있었기에 함께 피고 함께 휘날린다고 봐야 하리라. 경허스님의 짧은 선시의 한토막이다. ‘문 앞 복사꽃 오얏꽃이 일이 많아서, 만떨기 마다 옛부처의 마음을 붉게 뿜어대누나.’ 어찌 생명이 있는 것에만 일심의 공성을 말하겠는가? 노자에게 계곡()과 웅덩이()는 불가의 허공처럼 비어 있으면서도 만물을 다 받아 청탁(淸濁)으로 편가르지 않고, 다 고요히 진정시켜 만물을 다 이롭게 해 주는 그런 ‘화광동진(和光同塵)(42)의 상징이다. 화광동진은 빛과 화합하고 먼지와도 동거하는 그런 원효적 ‘화쟁’의 다른 이름이다.

 

일심은 자신의 마음을 보시하여 세상을 근기 따라 이롭게 하고 즐겁게 하려는 허공의 마음과 같다. 허공의 마음은 자기 생각으로 가득차 있지 않고, 자유로운 마음이고, 바쁘지 않고 시간이 있고 여유로운 그런 마음의 태도를 뜻한다. 마르셀은 그런 마음의 존재를 ‘점령되어 있지 않음’(la disponibilite =disposability)이라 불렀다. 이 용어는 번역하기 어렵다. 전에는 이 용어를 나는 일본어 번역에 따라 ‘수의성(隨意性)’이라고 옮겼다. ‘수의성’은 부름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영혼의 본성을 뜻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보다 더 단어 자체의 뜻을 직역하는 의미에서 비어 있고 자유스럽고 섬길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런 영혼의 존재방식을 가리키는 뜻에서 ‘점령되어 있지 않음’이라고 번역했다. 자아의 생각으로 가득차 있거나 소유의 탐욕에 집착된 영혼은 이미 가득 점령당한 상태를 가리킨다. 《성경》(누가, 10:30-37)에 길에서 강도를 만나 반 죽은 사람을 지체 높은 제사장도 못본척하고, 같은 이스라엘 동족의 한 부족인 레위인도 역시 지나쳤다. 오직 이방인인 사마리아인이 거의 반 죽은 자를 돌본다. 이 사마리아인의 존재양식이 곧 마르셀이 말하는 ‘점령되어 있지 않는’ 상태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무척 바쁜 사람으로 여유가 없거나 자기 개인적 욕심으로 온갖 신경이 다 채워진 그런 마음이 아니다. 그는 여유롭고 분주하지 않고 자기 것으로 마음이 가득 채워지지 아니한 비어있고 자유로운 허공적 마음을 지녔다. 이것이 무아다. 의상대사의 〈일승법계도〉의 한 구절이다.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비의 보배가 허공에 가득 찼는데, 중생들은 각기 그릇 따라 이익을 얻는도다. 雨寶益生滿虛空 衆生隨器得利益.)’은 인연따라 만나는 모든 존재자들에게 이웃으로서 이익을 주는 마음이다. 이것이 무아의 공심이고 일심이다. 이것이 또한 착한 사마리아인의 마음이다.

 

모든 중생은 이미 공성의 일심을 분여받은 그런 만물이다. 모든 만물은 다 일심의 존재방식인 어떤 성취의 원력을 다 띠고 있다. 이것이 불교를 범신론적 사상으로 읽게 하는 까닭이 된다. 일체 만물이 다 그 존재양식에서 불성을 지닌다. 이것은 또 양명학에서 모든 이가 다 성인이라고 부른 연유와 닮았다. 금의 함량이 많은 금괴나 아주 적은 잡석이나 다 금이 아닌 것은 아니다. 다만 금의 순도가 다를 뿐이다. 이래서 ‘만물일체’라고 양명학은 말한다. 무아의 마음에서 세상을 보면, 세상을 도덕적 선악으로 판단하기 보다 오히려 모두가 모두에게 이익을 주는 무아의 공심이 더 중요해진다. 이 공심이 존재론적 사유다. 이것은 또 예수님이 갈파한 ‘이웃’의 마음이다. 존재론적 사유는 자아가 중심이 된 소유론적 지능과 의지가 아니다. 존재론적 사유는 일심으로서의 공성을 닮으려는 사유다. 공성을 닮으려는 마음이 없으면 존재론적 사유는 곧 존재자적인 실체론적 철학으로 미끄러진다.

 

노자가 有를 無의 욕망으로 보고, 마명(馬鳴, Ashvaghosha)이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 ‘법신이 색상의 본체이므로 색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본래부터 마음과 색상이 둘이 아니다’(法身是色體故 能現於色. 所謂從本以來 色心不二)라고 언명했다. 이것은 무와 법신의 허공을 본성으로 함유하지 않으면, 유와 색이 필연적으로 소유론적 실체로 전락함을 암시한다.

 

색즉시공은 색상을 환상으로 보게 하고, 공즉시색은 색상을 실상으로 보게 한다. 모든 색상이 개념적인 일의성을 지닌 존재자적 실체라고 여기고, 색상을 택일적 판단에 의한 취사가 적용되는 대상으로 여기는 한에서, 세상의 모든 색상은 곧 환상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색상을 개념적 사고방식과 그 철학에 의하여 가치판단을 행한다. 그래서 가치판단과 개념철학은 같이 간다. ‘진()/()’의 구분이 인식론의 대본을 이루듯이, ‘선()/()’의 구별은 도덕학의 생명이 된다. 그래서 개념의 형이상학은 전자의 성역을 확보하기 위하여 후자를 제거해야 한다고 믿는다. 인식론의 가치가 정립되기 위하여 의식일반의 보편성이 요청되고, 도덕학의 가치가 굳건히 설립되기 위하여 도덕적 자의식의 보편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가치론은 어떤 명분으로 장식되든 기본적으로 의식철학의 판단을 떠나지 않는다. 의식철학은 유식학적으로 마나스식(manas vijnana)과 같은 제7식인 前의식의 심상의 영향을 생리적으로 벗어날 수 없다. 의식일반이든 보편적 자의식이든 모두 다 마나스식의 아상 아래에 있다. 선이 오직 선으로서만 존립하고 악과 무관한 것인가? 선의 고유성이 악의 고유성처럼 독립적으로 성립하는가? 선이 오로지 선이라고 주장되는 그 순간에 그 선은 이미 악으로 전환되는 역사상의 무수한 사실들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진디는 인간에게 피부병을 옮기기도 하고, 동시에 그것은 인간의 몸에서 떨어진 죽은 세포를 먹어 치워 방 공기를 정화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고 한다. 진디는 선인가, 악인가?

 

 

   마음의 기호의 이중성인 본능과 본성

 

불교와 노장사상에서 ‘선/악’은 ‘진/위’와 같은 상관적 타자로서 서로 서로 연계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런 상관적 대립(pertinent opposition)은 변증법적 투쟁의 관계와 다르다. 왜냐하면 후자는 하나에로 종합해 나가기 위한 투쟁이 필수적이지만, 전자는 이원론의 방치도, 일원론에로의 귀일도 아닌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의 이중성을 한 묶음으로 엮는 그런 차연의 사유와 만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사유에서 비진리는 흔히 생각되는 인식론적 허위가 아니다. 종래의 진리개념은 인간의 이성과 바깥의 사물과의 일치여부에서 </>가 판가름난다. 하이데거의 사유는 이런 양자택일의 진리개념을 이미 넘어서 있다. 그는 존재의 진리가 현시되는 측면을 진리(Wahrheit =truth)라고 불렀고, 존재의 진리가 은적되는 측면을 非-진리(Un-wahrheit =un-truth)라고 명명했다. 그에게 존재는 명사적 개념이 아니고 자동사적인 무의 현상화로서 무로부터 생기하는 사건이다. 그것은 마치 바다가 바람에 의한 외적 영향으로 흔들리어 파도가 생기는 그런 번뇌가 아니고, 바다가 스스로 금빛 찬란한 존재의 현상을 나타내 보이는 바다의 자기 증여와 같은 파도다. 바다가 무라면, 파도는 그 무의 자기 증여와 같다. 비유컨대 존재의 파도가 다시 무의 바다에로 사라지는 것을 하이데거가 은적(Verborgenheit  =concealment)의 ‘非-진리’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이 세상에 재래의 의미와 같은 그런 인식론적 허위로서의 비진리가 존재론적으로 존재하지 않음을 천명하는 말이겠다.

 

비진리로서의 은적은 진리로서의 비은적인 현시가 소유론적 존재자의 개념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주는 약과 같다. 《성경》의 〈요한복음〉(16-7)에서 예수님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고 일렀다. 예수님의 은적은 진리의 현전이 소유로 이해되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은적은 진리의 현시(revelation)의 조건이다. 은적은 진리가 소유론적 전시(exhibition)의 뜻으로 전락하는 것을 방지한다. 은적이 없는 현시는 오로지 소유를 전시하려는 의미로 읽혀진다. 전시는 존재론적 현시와 달라 소유론적이고, 언젠가는 고갈된다.

 

무는 죽음으로 상징된다. 꽃이 떨어지고 인간이 죽음으로 되돌아 가는 것과 같은 것은 결국 존재한다는 현상이 소유로서 설명되지 않고 소유의 의지와 탐욕에서 필연적으로 도망가는 자연의 이법을 알려준다. 모든 소유적 기도가 다 허망하게 끝나기에 소유법은 유루법이다. 이런 소유론적 유루법을 하이데거는 마음의 탈존양식(Ek-sistenz)이 ‘집착하는’(insistent) 방식으로 미끄러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집착하는 탈존은 곧 아상을 떠나지 않는 자아식의 탈존과 다르지 않다.

 

은적의 非진리는 소유론적 장악의 기도가 다 허망하다는 것을 알리는 존재론적 사유에의 초대와 같다. 왜냐하면 존재론적 사유는 무의 허공을 본성으로 하는 무진장한 에너지()가 끊임없이 등장하고 퇴장하는 생멸의 현상을 여여하게 보는 방식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원효나 하이데거가 각각 말한 무의 ‘무본지본’이나 ‘탈근거’에서 솟은 생기로서의 존재는 존재자적인 실체로 둔갑하지 않는다. (존재)의 현상은 이미 본질적으로 무의 본성을 함의하고 있기에 ‘유/무’는 ‘생/사’처럼 한쌍으로 읽지 않으면 안된다. 유는 존재하면서 무를 이면으로 품고 있고, 삶은 살면서 이면으로 죽어간다. 그래서 ‘유/무’와 ‘생/사’는 별개의 개념이 아니고, 하나의 차연적 존재방식의 두 얼굴이다. 무의 죽음을 삶의 유와 별개의 실체적 존재자로 보지 않고, 모든 무는 유에의 욕망을 회임하고 있고, 또 유는 무에로의 은적을 필연적으로 안고 살아간다고 읽어야 하겠다. 그래서 생유(生有)는 사무(死無)와 다르나 동시에 그것의 연기(延期)며 연장(延長)이고, 그 역의 방향도 역시 그러하다. ‘유/무’와 ‘생/사’는 개념으로 잡히지 않는 차연(differance)이다. 서로 한 쌍의 상관적 대립의 상호교환이다.

 

마찬가지로 ‘선/악’의 이중성도 이원론적 대립이 아니라, 하나의 상관적 차이나 대립의 이중성을 뜻하는 차연이 아닌가? ‘미/추’와 ‘성/속’도 그러하지 않겠는가? 예컨대 선악의 차연만 여기서 언급한다. 선은 악의 차연이고 악도 선의 차연이다. 서로가 상관적 대립의 입장을 띠면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서로 상대방이 없으면 자기의 존재도 성립하지 않는다. ‘선/악’은 각기 자기 고유성을 지닌 실체가 아니므로 각각 타자의 타자로서 존립하는 타자의 흔적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선/악’의 이중긍정은 비선비악(非善非惡)의 이정부정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선/악’은 각각 자기 것이라고 우길만한 자가성을 띠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산마루의 주름이 산의 양 기슭을 형성하였듯이, 사이의 차이가 ‘선/악’의 이름을 양면성으로 나누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 양면성은 사실상 마음의 양면성에 불과한 것이다. 마음은 욕망이고 그 욕망을 하이데거는 세상에로의 나아감인 ‘탈존’(Ek-sistenz =ec-sistence)이나 ‘관심’(Sorge =concern)이라고 불렀다. 이 관심을 불교적으로 옮기면 반연심(攀緣心)에 해당한다 하겠다. 마음은 자기를 벗어나서 세상에로 향한다. 나아가되 소유론적으로 향하든지 존재론적으로 향하든지 둘 중의 하나다. 전자의 탈존을 하이데거는 ‘집착’(Insistenz =insistence)이라 불렀는데, 그것은 소유론적 자의식의 탈존과 유사하다. 소유론적 탈존이든 존재론적 탈존이든 마음은 탈존의 이중적 방식과 같다.

 

‘선/악’과 ‘미/추’와 ‘성/속’도 다 저런 이중성의 차연관계로서 이해되어야 하겠다. 악은 마음의 선의 상관적 대대법으로서 또 선도 마음의 악의 상관적 대대법으로서 읽어야 하겠다. 그 선이 그런 악을 이면으로 띠고 있고, 그 악이 그런 선을 또한 이면으로 함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의 마음은 이중적이다. 그래서 누구나 인간은 스티븐슨(R. Stevenson)의 소설처럼 선량한 의사 지킬(Dr. Jekyll)과 괴물 하이드 씨(Mr. Hyde)로서 존재한다. 지킬과 하이드가 같은 마음의 이중성이다. 인간의 마음이 고요하여 흔들리지 않으면 그는 지킬이 되고, 어떤 충동에 흔들려 망상의 파도가 일어나면 그는 하이드가 된다. 앞에서 우리는 노자의 화광동진(和光同塵)을 보았다. 이 구절은 노자가 세상을 계곡()이나 웅덩이()처럼 봤다는 것을 말한다. 계곡과 웅덩이는 모든 청탁(淸濁)의 물들을 다 수용한다. 이것은 모든 세상의 휘에표폄(毁譽表貶)의 업들을 다 받아드리는 제8식인 아알라야식처럼 세상을 노자가 읽었다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 세상을 그렇게 그리고, 또 세상이 마음을 그렇게 주형한다. 이것이 유식학이 말하는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의 출현이고, 현행춘종자(現行熏種子)의 훈습과 다르지 않다. 마음은 선/악의 종자와 청/탁의 물을 다 지니는 그런 흔적들의 업이다. 선업은 악업이 없이 일어나지 않고 그 반대도 그러하다. 그 세상에 피어난 선업과 악업은 나의 마음에 깃들어 있는 선업과 악업의 두 모습의 현행이다. 그 선업과 악업은 동전의 양면처럼 차이 속에서 동거한다 

                          * 훼예포폄(毁譽褒貶): 칭찬(稱讚)하고 비방(誹謗)하는 말과 행동(行動)

 

그런 이중성을 데리다는 ‘비동시성의 동시성’(la simultaneite des non-simutanes =simultaneity of the non-simultaneous)이라 불렀고, 하이데거는 로고스의 이중성으로서 모음(Sammlung =collection)과 갈라짐(Riß =split)으로 표시했다. 이런 이중성을 원효는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나 일심이문지법(一心二門之法)이라 명명했다. 번뇌의 마음이 보리의 마음과 차연의 상관성을 띠고 있고, 번뇌를 모르면 보리의 요구가 일어나지 않고, 보리의 지혜는 무명의 번뇌를 잠재운다. 그래서 노자는 ‘선인은 불선인의 스승이고, 불선인은 선인의 자산’(善人不善人之師 不善人善人之資)이라고 《도덕경》 27장에서 천명했다. 불선인을 칭찬하는 것으로 저 구절을 오해해서는 안된다. 불선인은 내 마음의 선인의 이면으로 그 불선인의 흔적이 나로 하여금 선인의 길을 가는 자본을 대준다. 이것이 노자의 도고, 이 도는 개념의 철학으로 설명되지 않고, 차연의 사유로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악을 나의 선과 대립적인 변증법적 타자로서 여겨 공격해서도 안되고, 그렇게 해서 악이 이 세상에 지워지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선의 결의가 있는 곳에 악이 늘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의 악을 지우려는 선은 새로운 악으로 돌변한다.

 

마음은 욕망이다. 그 욕망을 소유론적 욕망과 존재론적 욕망으로 대별케 하는 이중성도 마음의 작용이다. 마음이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이 이익을 좋아하는 기호와 같다는 것을 뜻한다. 마음은 이익을 좋아한다. 선과 불선도 다 이익을 좋아하는 마음의 기호가 갖는 경향의 차이에 기인할 뿐이다. 그 경향의 이중성을 갈라놓게 하는 것이 곧 본능과 본성이다. 본능적 마음은 자아가 소유론적 만족을 취득하기 위하여 바깥에서 타동사적으로 남들과 싸워서 그 이익을 쟁취하려는 이기배타적 욕망이다. 이 욕망을 탐욕이라 부르기도 한다. 본성적 마음은 자아가 지워지면서 마음이 스스로 분비하는 기쁨이 솟아나면서 타인들에게 이익을 증여하는 자리이타적 욕망이다. 이 욕망을 원력이라 부르기도 한다. 무아의 마음이 자리이타적 욕망을 분비한다는 것은 마치 허공의 공이나 무가 무한한 존재의 생멸을 용출하고 수용케 하는 그런 종용(letting-be)의 길과 다르지 않으리라. 하이데거의 말처럼 종용의 사유론은 세상을 심판하고 판결하려는 마음의 거부와 다를 것이 없다. 선종의 3조인 승찬대사가 《信心銘》에서 ‘지극한 道는 어렵지 않으나 오직 간택함을 싫어할 뿐이다. 다만 미워하고 사랑하는 것을 놓으면 통연히 명백하리라’(至道無難唯嫌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라고 말한 사상이 하이데거의 저 종용의 사유와 어찌 다르다고 할 것인가?

 

소유론적 본능과 존재론적 본성은 같은 마음의 자리에 동거하고 있다. 다만 전자는 이기배타적이고 후자는 자리이타적인 그런 기호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런 마음의 기호의 차이를 짓게하는 척도가 자아와 무아의 구분이라 본다. 마음이 무아의 무심에 접근하면 할수록 세상의 사실은 차연의 법칙으로 보이고, 자아의 아상이 중심을 이루면 세상은 자기중심으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호오를 놓지 않게 된다. 차연의 법칙은 장악의법칙처럼 주관적 의식과 객관적 대상으로 갈라 놓지 않고, 연기법적 얽힘처럼 또는 수사학적 교차배어법(chiasmus)의 상관성인 卍자의 문자학적 교호작용처럼 그렇게 직물짜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세상의 현상을 본다. 이런 세상보기를 불교에서 여여한 사실의 正見이라 말한다. 문자학적(grammatologique =grammatological)이라는 용어를 앞에서 우리가 등장시켰는데, 이제 데리다가 사용한 그 뜻을 우리가 풀이한다. 그것은 도장의 양각과 음각처럼 불일이불이의 그런 상관적 대립을 지니는 현상을 말한다. 왜냐하면 소리나 말은 개념처럼 일의적으로 흘러 가지만, 문자(lecriture=writing)나 표지(lindice=token)는 일의적인 개념이 아니고 두가지 현상을 동시에 차이나게 하지만 상관적으로 연관시키는 그런 이중성의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도장의 음각과 양각의 이중성을 연상하면, 그것이 문자학의 뜻이다. 노자가 《도덕경》 2장에서 설파한 ‘유무상생(有無相生), 난이상성(難易相成), 장단상형(長短相形), 고하상경(高下相頃), 음성성화(音聲相和), 전후상수(前後相隨)’ 등이 문자학적 사유인 상관적 대대법(pertinent opposition)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마음도 소유와 존재, 본능과 본성의 문자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마음이 무아의 고요에 머물 때에 마음은 본성의 기호를 나타내고, 마음이 자아를 의식하는 감정의 파도에 휩싸일 때에 마음은 본능의 기호를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본성과 무아에로 가는 ‘마음의 길닦기’

 

마음이 본성의 상태에 놓여 있으면, 그 마음은 무심의 경지와 같다. 사심없이 일하기에 매진하는 상태가 바로 일심의 무념상태와 같다. 이것은 어떤 소유적 목적의식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다. 일하기의 사상은 본성으로서의 자성이 좋아하는 바를 스스로 실현하려는 자성의 자기 꽃피우기와 다르지 않겠다. 그러므로 자성이 일하는 마음은 어떤 것에 의하여 점령당한 마음의 부자유와 다르다. 본성이 일하는 마음은 자기의 이익을 쟁취하기 위한 노동이 아니라, 일하기가 놀이와 구분되지 않는 재미있는 자기 실현이다. 본성인 자성은 스스로 좋은 것을 구체화하려는 욕망을 갖는다. 자성은 자의식을 느끼지 않는 공성과 같으므로 그것은 마음의 무념과 무아의 상태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 무념상태는 멍청한 혼침의 상태가 아니다. 자성의 일하기에 일념으로 마음을 쏟아 부은 상태이기에 무념무상은 성성적적의 상태와 유사하다 하겠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말한 미래적 사유요, 불교가 말하는 의식이 쉬는 사유이겠다. 이 무념무아의 상태만이 가장 무위적 자연성의 상태에 이르도록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본능과 본성은 다 마음의 자연적 기호를 따른다. 그러나 본능적 기호는 사회생활에서 타동사적으로 타인들과의 싸움을 통하여 이익을 쟁취하기 때문에 교묘한 지능과 강인한 의지력의 도움으로 소기의 성과를 얻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본능의 경제실리적 이익이나 또는 정반대로 反본능의 도덕명분적 정의나 다 능위적 소유주의의 성격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본능적 기호는 무위적이나 그 실현방식은 대단히 유위적이다. 오직 본성의 존재론적 사유만이 온전히 자연적 무위성을 이루어 나간다. 왜냐하면 본성은 스스로 자동사적으로 마음의 기호에 따른 이익을 분비하여 그것을 타인들에게 저절로 시여해주는 이타행을 실시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그것(Es)’의 시여(Gabe)로서 존재를 이해한 것은 자성의 증여와 다르지 않다. 자성은 자아처럼 일인칭의 인격이 아니라, 삼인칭의 우주적 一心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겠다. 서산대사가 읊은 ‘그것()’은 자성의 자연성이요, 우주적 마음으로서의 공성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그러므로 철학의 종말과 함께 등장하는 미래적 사유는 자아의 보편철학에서 무아에로 가는 ‘마음의 길닦기’와 같다고 본다. 하이데거가 사유를 ‘마음의 길닦기’의 뜻으로 번역됨직한 ‘Beweg-ung’이란 조어를 만든 것은 우연이 아니고 깊은 뜻을 함의하고 있는 것 같다.

 

‘마음의 길닦기’는 자아에서 무아에로의 길을 닦음이요, 이 길닦음은 의식의 개념철학을 떠나 공성의 거울에 비친 차연의 실상을 정견하게끔 ‘사유장소(Denksort =thinking site)’의 변화를 실행하게 한다. 그래서 그 사유는 자아가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자성이 사유하는 것이 된다. 무아의 공성이 허무가 아니므로 그 곳에 본성인 자성이 고요히 나타나 자성이 사유하고, 자성이 노래하고, 자성이 말하고, 자성이 부른다. 그러므로 본능의 사유는 자아가 이기적 동기에서 계산하고 사량하는 것이라면, 본성의 사유는 마치 허공에서 모든 존재가 생기하듯이 무아에서 자발적으로 솟아나는 찬란한 빛의 조명과 같다. 그 사유를 우리는 자아의 소유론적 사유와 다른 존재론적 사유라고 부른다. 그런데 인간의 본능은 다른 동물의 본능과 달라서 본능의 단독적 힘으로 생존해 나갈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의 본능은 지능의 도움을 요구한다. 그 순간에 무위적 본능은 유위적인 지능의 간섭을 받는다. 그와 함께 인간은 본능의 무위성을 버리고 계산의 사량적 유위성으로 들어간다.

 

비록 인간이 지능의 유위적 간섭을 받는 생활양식을 추종하더라도, 지능의 생활은 본능의 무위적 이기심을 모방하기 위한 우회의 전략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무위적 본성의 사유는 무위적 본능의 사유와 전혀 다른 곳에 있지 않다. 둘 다 이익을 좋아하는 사유다. 그렇다면 중생의 이기심이 발동하는 그 자리가 바로 여래의 자리심이 일어나는 자리가 아닌가? 지눌은 《원돈성불론》에서 “중생상(衆生相)이 여래상(如來相)이요, 중생어(衆生語)가 곧 여래어(如來語), 중생심(衆生心)이 곧 여래심(如來心)”라고 설파했다. 그렇다면 중생의 성격이 곧 여래의 불성의 한 조각이 될 수 있는 셈이다. 중생의 개성은 사회생활에서 서로 충돌하는 장애요인이 되지만, 그 중생의 개성이 여래성으로 회심하면 그 개성은 다른 개성과 충돌하거나 방해를 일으키지 않고 불심을 원만하게 이루는 원음의 한 요소로서의 일음으로 탈바꿈한다.

 

중생의 업은 장애가 되어서 중생의 마음에 큰 짐으로 작용하지만, 그 중생의 업정이 회심하여 무아의 마음으로 방향을 되돌리게 되면, 그 업이 오히려 해탈의 경지를 열어놓는 계기가 되지 않겠는가? 업즉장애(業卽障碍)가 업즉해탈(業卽解脫)로 치환한다. 본능의 이기배타적 이익이 본성의 자리이타적 이익으로 치환하면서 인간은 사회생활의 고통과 번뇌를 보리와 열반의 계기로 변환시킨다. 고통의 번뇌가 곧 열반의 보리를 증득케 한다. 본능과 본성이 차연의 이중성이듯이, 번뇌의 업과 열반의 원()도 동정의 양면과 같이 이중적이다. 업의 개성은 그가 이기적 행각을 자행하는 악의 축이기도 되지만, 그것은 또한 직업을 통하여 개성의 기호를 자리이타적으로 펼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사회생할에서 무수한 직종은 다 자연생활에서의 다양한 품종과 다를 것이 없지 않는가? 자연이 무수한 품종의 차이를 서로 의타기적인 그물망으로 형성하듯이, 사회도 무수한 직종을 역시 연기법적인 직물짜기의 교직으로 엮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불국토는 사회의 다종한 직업이 자연의 다양한 품종처럼 서로 걸리지 않고 방해를 일으키지 않으면서 자리이타의 공업을 이루어 원융무애하게 회통하는 사회를 의미하지 않겠는가? 직업은 개성의 기호를 펼치는 방편이다. 그 방편은 동시에 마음 속에 이미 깃들어 있는 본성즉개성(本性卽個性)이 다양하게 구체화되는 도의 ‘길닦기’와 같으리라.

 

각 직업의 달인이나 명장(virtuoso)은 무아의 무심에서만 가능한 자리(自利)의 성공이고, 그 성공은 사회적으로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괴로운 이들의 이웃으로서 이타행을 실시한다. 왜냐하면 그 성공은 개인적 탐욕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여래장 씨앗의 사회적 실현을 뜻하기 때문이다. 직업의 달인과 명장은 여래장 씨앗의 꽃핌이다. 그래서 그 성공은 사회적 보살도의 출발이 된다. 소유의 탐욕을 존재의 원력으로 치환시키는 길닦기가 21세기의 사유로서의 제삼의 길이겠다. 이런 길닦기를 또 하나의 새로운 이상주의적 기획투사라고 보면 안된다. 이상주의적 기획투사는 당위적 이상의 설계도를 사회에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길닦기는 이미 그리고 늘 마음 속에 있어 온 자성을 짓눌려 왔던 소유의식, 자아의식, 가치의식을 걷어내는 것이다.

 

그런 마음의 길닦기는 경제실리와 도덕명분의 두 대립된 길을 다 융섭하는 존재론적 사유의 길이라고 여겨진다. 존재론적 사유의 길은 본능과 反본능의 변증법적인 개념의 대립을 다 지양하는 차연의 사유를 펼친다. 그래서 차연의 사유는 세상에서 본능의 소유에 대한 상관적 대대법으로서의 본성의 존재, 이기배타적 이익에 대한 자리이타적 이익, 개성의 업즉장애에 대한 개성의 업즉해탈을 보게한다. 그러므로 존재론적 사유는 본능의 소유론과 이기배타론, 그리고 개성의 업장을 다 무시하거나 없애야 한다는 혁명적 투사의 열정을 갖기 보다 오히려 마음이 소유론적 본능에서부터 회심하려는 마음의 전회를 아주 중요시한다. 그래서 존재론은 마음의 길닦기로서의 수행을 미래적 사유와 공부로서 생각한다. 수행이 없이는 마음이 중생의 소유론적 습관으로 다시 미끄러진다.

 

그 수행이 무아의 길닦기고, 21세기적 사유의 본질이다. 그 사유가 또 무아적 본성의 존재론을 떠나 자아적 의식철학의 고착된 관념에 또 사로잡히면, 마음은 다시 도덕적 존재자의 소유론적 형이상학으로 전락한다. 그래서 무아의 존재론은 이중부정의 길을 이중긍정의 길보다 더 높인다. 차연의 이중긍정은 세상을 여실하게 보게 하는 실상을 가르쳐주면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게 하는 지혜를 일깨워 준다. 그러나 이중긍정은 마음으로 하여금 세속제에만 머물게 할 우려가 있다. 무를 배제한 유(존재)가 존재자의 실체로 전락하듯이. 이중부정의 진여제를 안 본 세속제는 죽음의 초탈을 모른다. 그래서 비색비공(非色非空), 비유비무(非有非無), 비선비악(非善非惡)의 이중부정의 마음은 죽음을 동요없이 마중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진여제는 죽음을 대자유의 길이라 알려준다. 죽음이 마음으로 하여금 도덕적 사유를 넘어서 존재론적 사유를 생활케 하는 약이 된다. 이중부정의 사유가 무애한 자유의 길로 안내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절대무로서의 공이 색의 체성이라고 보는 사유와 같다. 모든 존재론적 사유는 인간만이 영위하는 사회생활을 자연생활과 유사하게 닮도록 마음의 길을 닦도록 인도하는 사유다. 그러기 위하여 존재론은 인간이 자연을 단순히 감상적, 낭만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구체적인 상생과 상극의 차연으로 정걸하도록 요구한다. 상생과 상극이라는 자연의 상관적 대대법은 ‘생/사’, ‘약/독’이 서로 분리된 별개의 실체가 아님을 염두에 두는 것과 같다. 사회철학과 자연철학이 분리되면 자연도 황폐화되고, 사회도 지옥도를 벗어나지 못한다.

 

. .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

서울대 철학과 졸업. 벨지움 루벵대학교 철학최고연구원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음

공군사관학교, 서강대, 정신문화연구원, 루벵대 철학최고연구원 등의 교수를 역임함

"데리다의 해체철학" "노장사상의 해체적 독법" 등의 저서와 논문 다수

   . 자기철학을 하는 몇 안 되는 국내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철학종교연구) 정년퇴임

   . 동서고금의 철학을 넘나드는 철학함의 자유로움으로 유명

 

 

 

 

■  철학적 인간학이란? 그 이해와 방법 

                                                                                                            박.병준, 서강대 교수

                                                                                                            글 중에서, 일부 발췌

        부버(Martin Buber 18781965)는 인간의 정신사를 인간이 거할 집이 있는 시대와 그렇지 못한 시대로 나누고 집 없는 시대는 인간학적 사상이 깊어진다고 간파한바 있다. 오늘날 인간학적 사상이 세인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아마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 단순해 보이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지난 세기 동안 여러 철학자들이 노력을 경주한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이러한 상황은 부버의 예언자적 식견처럼 풍부한 정보에도 불구하고 혼란스럽기만 한 현대의 다원주의적이며 개인주의적인 시대 정신이 잘 대변해 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날 인간은 여러 학문 분야에서 그 어느 때도 누려보지 못한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자유분방한 정신적 발전을 누리고 있다. 학문의 놀라운 발전만큼이나 여러 방면에서 인간의 자기 이해 또한 상응한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생물학, 심리학, 의학, 생리학 등의 발전과 더불어 인간에 대한 자연 과학적 이해의 폭은 분명 깊어진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렇게 학문의 발전과 더불어 인간이 스스로 자기 이해의 폭을 넓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이 시대를 자주 인간 상실의 시대에 비유하곤 한다.

 

놀라운 속도로 발전을 거듭하는 과학 기술과 복잡하고 다원화하는 사회 문명 안에서 오히려 인간은 냉철하게 자기를 들여다보는 자기 반성의 시간과 기회를 잃어버리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심각하게는 자기 정체성의 상실을 맛보기까지 한다. 오늘날 우리는 부버의 말처럼 정신사적으로 함께 공유하고 자신의 정신을 편안하게 거주시킬 터를 잃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정처 없이 떠도는 인간이 자기가 거할 집만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 가운데 가야 할 방향까지도 상실해 버린 인간성의 총체적 상실의 시대가 현대라고 표현한다면 너무 지나친 생각일까?

 

인간의 자기 정체성의 상실은 오늘날 인간의 인간다움의 상실로 나타나곤 한다. 인간의 인간다움의 상실은 특별히 인간의 비윤리적인 모습을 부추긴다. 세계의 도처에서 들려오는 거부와 배타와 소외, 그리고 파괴와 무질서의 소식은 인간의 자기 상실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러한 절망적 소식을 들을 때마다 인간

인 우리 자신이 참다운 자기 본래의 모습을 이미 상실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강한 의구심마저 들곤 한다. 참된 인간, 본래의 자기를 상실한 듯한 참담한 시대 상황 안에서인간이란 무엇인가?”의 물음을 주도하는 철학적 인간학의 의미를 재조명해 봄은 학문적으로 인간의 자기 규명에 도움을 줄뿐만 아니라 실천적으로 인간 정체성에 대한 자기 반성적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  철학적 인간학이란?

 

“철학적 인간학이란 무엇인가?” 언뜻 대답하기 간단해 보이는 이 물음은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만큼이나 명쾌하게 정의하기가 어려운 포괄적인 철학적 물음 가운데 하나이다. 그 이유는 우선 인간학 자체가 정신 과학뿐만 아니라 실증 과학의 여러 학문 분야에서 다의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요, 다음은 철학적 인간학이 정의 내리기 까다로운 철학의 방법을 자기 고유의 방법론으로 삼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철학이라는 학문 중심에 암시적으로나 혹은 명백하게 인간 자신이 어느 때는 규명하고자 하는 대상으로서, 또 어느 때는 기점(출발점)으로서, 또 어느 때는 지평과도 같은 토대로서 항상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만큼 그렇게 포착하기 힘든 심연(Abgrund)처럼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인간 자신을 주제적으로 삼는 철학적 인간학을 인간 자신이 언제나 문제시 되어 왔던 철학 그 자체로부터 구분하여 하나의 고유한 철학 분과 학문으로 규정하는 일은 그래서 간단한 일만은 아니다. 그럼에도 필히 자기가 가야 할 길을 찾아 나서야만 하는 학문의 소명의 특성상 기존하는 철학 분과 학문으로서의 철학적 인간학을 학문적으로 정의하고 그 고유한 학문적 방법()을 모색하는 일은 오늘날 간과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이러한 일은 특히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와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처럼 한 분과 학문으로서의 철학적 인간학의 학문적 고유성을 비판하는 입장이 상존하는 한 더욱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인간의 실존을 그들 철학의 중심에로 옮겨 놓았음에도 인간 이해의 불가해성을 특별히 강조하여 철학적 인간학이라는 학문 분야 자체를 비판적 시각으로 보았던 하이데거나 야스퍼스의 주장과는 무관하게 오늘날 철학적 인간학은 철학의 한 고유 분과 학문으로서 그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계속하여 인간 전체의 본질 규명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가운데 자기 고유의 학문적 길을 모색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다른 철학 분과 학문과 구분하여 철학적 인간학을 어떻게 규정해 왔는가? 주제적이든 비주제적이든 항상 인간이 문제시 되어 왔던 철학의 속성을 고려할 때 특수 학문으로서의 철학적 인간학의 학문적 고유성은 어디서 확보되며 그 특성은 무엇인가? 특히 오늘날 인간이 여러 개별 과학 분야에서 다양하게 연구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철학적 인간학은 어떻게 새롭게 규정될 수가 있는 것일까?

 

오늘날인간학이라 번역되는 ‘Anthropologia’ [‘Anthropologie’(독어) 혹은 ‘anthropology’(영어)]의 어원은 그리 멀리까지 소급되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어, 특히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324)

니코마코스 윤리학 에서 이와 유사한 단어 ‘ ν ρωπολ γο ’가 발견되지만 그것은 내용에 있어서 오늘날 일반적으로인간에 대한 학문’, 즉 ‘Anthropo-logos’의 의미를 갖는 인간학의 개념과는 전혀 다른 뜻으로 쓰이고 있다. 마아크봐르트(O. Marquard)에 따르면인간학’(anthropologia)이란 용어의 등장은 16세기 이후 스콜라 철학의 강단 철학의 전통 안에서 신, 천사, 인간, 동물들의 원리를 다루는 형이상학적 심리학 가운데 특히인간의 본성론’(doctrina humanae naturae)으로서의 인간의 심리학 부분을 따로 분리하여 표현하면서부터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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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철학적 인간학을 정의할 때 그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말은 아마도 철학적 인간학이 주제적으로 던지는 물음인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자체일 것이다. 아마도 그 어떤 학문도 인간 그 자체를 이렇게 직접적으로 주제적이며 주도적으로 질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철학적 인간학이 던지는 인간에 대한 물음은 역시 인간을 문제 삼는 경험적이며 실증적인 개별 과학이 던지는 그런 질문과는 사뭇 다르다. 개별 과학에서 주제로 삼는 인간의 이해는 각각의 개별 과학이 목표하고 설정한 제약된 조건 속에서 부분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철학적 인간학은 그렇지 않다

 

철학적 인간학이 던지는 인간에 대한 물음은 인간 전체의 보편적이며 근원적 본질에 관한 물음이다. 철학적 인간학이 주제적으로 던지는인간이란 무엇인가?”의 물음은 한 인간의 개별적 문제나 혹은 인간의 특수한 문제에 한정된 물음이 결코 아니다. 그런데 이때의 물음은 그 대상이 물음을 던지는 자 바로 그 자신에 걸려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인간학적 물음은 인간 자신이 물음을 던지는 자이면서도 동시에 물어지고 있는 자로서 그런 물음 자체가 현존재로서의 구체적인 자기 실존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그래서 인간학적 물음은 물음 자체가 항상 직접 자신을 겨냥하는 실존적 물음의 특성을 함께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부버는 진정으로 인간학적 물음을 던진 최초의 철학자로서 중세의 교부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430)를 든다.7) 아우구스티누스야말로 신 앞에 서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누구인가를 3인칭이 아닌 1인칭의 탁월한 방식으로 물은 사상가였기 때문이다.

 

철학적 인간학은 방법적으로 인간이 무엇인가를철학적으로 물음으로써 그것이 단순히 인간에 대한 실증적인 경험 과학의 총체적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 철학이 늘 그래왔듯이 철학적 인간학적 탐구는 험난하고 까다로운 사색의 길을 요구한다. 험난하고 까다로운 사색의 길을 걷는 것은 철학의 본질이기도 하다. 이는 인간의 정신사 안에서 난해한 문제와 씨름하여온 철학 문제사가 잘 대변해 준다. 철학적 사유는험난하고도 비좁은 막다른 골목에 들어섬에 비유될 수 있다. 경험 과학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이해의 막다른 골목 앞에서 철학적 사유는 자주 자기 고유의 학문적 길을 모색하여 왔다. 철학적 인간학 역시 예외일 수 없다.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의 표현처럼 미소하면서도 우주를 자신에 담을 수 있는 인간은 그 자체로 이해의 깊이와 폭에 있어서어두운 심연과 같은 불가해한 존재와 같다. 인간의 이런불가해성’(不可解性)이 생물학적 고찰이나 화학적 성분을 분석하고 물리적 구조를 분석한다고 해소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인간의 이런 불가해성으로 인하여 우리는 인간 이해를 위한 또 다른 길을 모색하게 된다. 그리고 심리학이나 사회학이 보여주듯 어떤 고정된 이론의 틀에 맞추어 인간을 정형적으로 해석하려 드는 것을 조심하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이런 개별 과학의 연구 결과물들이 인간을 구명하는데 전혀 쓸모 없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인간을 구명함에 있어서 많은 문제들이 그 자체로 이미 개별 경험 과학의 영역을 넘어서 있다는 것을 말하려 하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 영혼과 육체, 자아와 인격, 자유와 의지와 책임, 인간의 삶과 의미 문제들은 자주 우리를 경험 과학적 이해의 경계 밖으로 내몰곤 한다. 이런 주제들은 비록 그것이 개별 경험 과학의 영역을 넘어서 있다 하더라도 인간 구명에 있어서 그 어떤 것보다도 본질적인 것들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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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철학적 인간학이란 무엇인가? 셸러는 인간과 역사(Mensch und Geschichte)에서 철학적 인간학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나는 인간의 본질과 그 본질 구조에 관한 하나의 기초 학문을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만물의 근거에 대한 인간의 관계처럼 자연의 제 영역들(무기물, 식물, 동물)에 대한 인간의 관계, 세계 안에서의 인간의 신체적, 심리적, 정신적 시원과 같은 형이상학적 본질 기원, 인간을 움직이고 또 인간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힘과 세력, 인간의 생물학적, 심리적, 정신사적, 사회적 발전과 그 발전의 주요한 가능성과 실현의 근본 방향과 근본 법칙, 이 모든 것에 관한 기초 학문을 의미한다. 정신 물리적인 심신 문제와 사유-생명적(noetisch-vital) 문제가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오로지 이런 인간학만이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학문, 즉 자연 과학, 의학, 선사학, 인종학, 역사학, 사회학과 성격학과 같은 규범 심리학과 발달 심리학에 철학적 본성의 최종 근거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들 연구의 명확하고 확실한 목표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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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현대 인간학은 실로 다양한 분야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한편에서는 현대의 새로운 방법론인 현상학이나 해석학의 도움을 받아 인간의 형이상학적 본질을 규명하려 시도하거나 다른 한편에서는 생물학, 행동 연구, 진화론, 심리학, 사회학, 언어학, 유전학, 신경 생리학, 심지어 인공 지능의 컴퓨터 공학과 같은 개별 경험 과학을 빌어 인간의 자연 과학적 이해를 시도하기도 한다.

 

인간학을 구명함에 있어서 이렇듯 상이한 출발점과 관점과 방법이 있지만 철학적 인간학은 무엇보다도 총체적인 인간의 근원적인 본질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여기에는 개별 경험 과학이 문제 삼지 않는 세계 안에서의 인간의 지위와 삶에 대한 최종 의미와 최종 근거를 묻는 세계관적이며 형이상학적인 물음이 함께 내포되어 있다. 우리는 이미 철학사를 통하여 인간에 대한 구명이 그 본질이나 의미 물음을 통하여 자주 근원적 정초 문제에까지 소급되어 올라가는 것을 보아 왔다.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처럼 절대적 인격신인 창조주 안에서, 혹은 아리스토텔레스처럼 궁극 원인으로서의사유의 사유부동의 원동자안에서, 혹은 스콜라 철학의 전통처럼 모든 존재 사물의 근거로서의존재 자체’(esse ipsum) 안에서 철학자들은 인간의 근본적인 본질과 의미를 찾곤 하여왔다. 이런 물음은 비록 현대 철학적 인간학이 탈 형이상학적이며 신학적인 배경 아래서 등장하였음에도 궁극 의미를 찾아나서는 인간에게 자기 해명을 위해서 여전히 유효한 물음이기도 하다.

 

철학적 인간학은 인간이 그 안에 사는 직접성으로의자연과 반성을 통하여 매개되고 구성된세계’, 그리고 최종적이며 궁극적인 의미 물음 앞에 놓여 있는 초자연적인 절대적 존재인하느님이라는 주제들 아래서인간을 인간으로서있게 하는 인간의 근본 본질을 구명하는 인간에 대한 탐구와 이해의 학문이라 정의할 수 있다.

 

철학적 인간학은 무엇보다도 이런 근본적이며 전체적인 물음을 통하여 자기 안에 철학의 전 영역을 흡수하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듯 주제와 관련하여종합혹은총체학문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철학적 인간학의 특성 앞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인간에 대한 철학적 물음의 지평이 제한되어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 연속성 안에서 철학적 인간학의 철학사적 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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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이 이데아론에 입각하여 인간의 이상을 비물질적인 정신적인 것으로부터 찾았다면 이에 반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질료형상론(質料形相論, hylemorphism)에 근거하여 인간 안에서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통합을 시도한다. 형이상학, 영혼론, 니코마코스 윤리학 에서 포착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에 대한 이해는 근본적으로 체계적인 형이상학적 틀 위에 기초하고 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성적 동물로서 질료-형상, 현실-가능태의 원리라는 자연의 형이상학적 질서 안에 놓여 있는 존재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에서 인간의 궁극적 행복을 최고선인사유의 사유안에서 발견하고, 인간을 이러한 자기 고유의 본래적 기능을 최고도로 완성해 가는 합목적적, 윤리적 존재로서 규정한다.

 

철학의 보다 근원적이며 기초적인 형이상학적 통찰로부터 인간의 근본 본질을 이해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 이해는 형이상학적 인간학의 한 전형적인 예에 속한다. 형이상학적 사유에 기초하여 인간의 본질을 근원으로부터 구명하려는 시도는 일련의 현대 철학자들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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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적 인간학의 패러다임과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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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지식의 변천과 발전이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항상 축척된 지식에 근거한 귀납적 결과에 의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무관하게 비축척적인 패러다임의 혁명적 대체에 의존되어 있는 측면도 상당히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비록 패러다임 명제가 여전히 철학적 문제로 남아 있으며, 우리가 이 명제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더라도 분명 의식의 혁명적 특성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정확하게 정의하는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패러다임은 여러 구성 요소를 가지고 있다 하겠다.

 

우리가 철학적 인간학의 패러다임과 관련하여 주목할 점은 지식의 변천과 발전에 영향을 미치는 패러다임의 구조가 우리의 삶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으며 실로 다양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철학적 인간학의 패러다임을 언급할 경우 실험과 검증을 토대로 하고 있는 자연 과학 분야와는 달리 이것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들로서 이 학문 분야의 방향을 제시하는 형이상학적 원리, 이 연구 방향을 제시하는 논리나 합리성이나 체계성과 같은 일종의 가치관, 동시대 혹은 동사회의 공유된 정신 혹은 관습 혹은 개념 등이 보다 중요한 요소로 작동한다.

 

패러다임 이론의 테두리 안에서 인간 이해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는 그 안에서 어렵지 않게이성’, ‘’, ‘자연이라는 인간학의 패러다임을 구성하는 중요한 세 개념을 만난다. 인간에 대한 지식은 시대를 달리하면서 어느 때에는 동시대에 또 어느 때에는 시대를 넘어서 크게 이 세 개념을 중심으로 인간 중심의 인간관, 신 중심의 인간관, 자연 중심의 인간관이라는 뚜렷한 인간학의 패러다임을 형성하여 왔다.

 

따라서 우리가 고찰하고자 하는 인간학의 패러다임은 시간 혹은 역사의 제약성 안에서 형성된 패러다임이기보다는 시대를 넘어서 형성되어 있는 인간 정신사 안에서의 개방된 인간학적 패러다임이다.

 

먼저 이성 중심의 인간관은 인간 중심의 인간관이라 명명할 수가 있는데 이 패러다임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성은 고대 희랍인들의 정신적 유산으로서 오래 전부터 인간을 이해하는 중심적이며 핵심적인 개념으로 자리 잡아 왔다. 나아가서 이성은 고전적으로 인간 이해의 출발점이요 그 자체로 방법이기도 하였다. 고대 희랍인들에게 이성은 여타 자연의 생명 현상에로 환원될 수 없는 고유한 생명의 원리로서 인간의 근본 본질에 속하는 것이었다.

 

현대의 이성 중심의 인간관 역시 이러한 사유의 연장선 안에 있다. 이성은 인간의 생명 현상의 중심 원리요 그 자체로 자연적인 생물학적 진화의 일부에로 환원될 수 없는 인간의 근본 본질에 해당한다. 이러한 이해는 곧바로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는 고전적 정식을 낳았을 뿐만 아니라 이성적 인간이 세계의 중심에 서는 인간 중심적 세계관을 낳기도 하였다.

 

이때 이성 자체는 인간의 본질 구명뿐 아니라 자기 실현 및 자기 구현과도 직결된다. 이성 중심의 인간학의 패러다임의 중심에 서 있는 철학자로서 우리는 단연 아리스토텔레스를 꼽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을 크게 비생명체(물질)와 생명체()로 구분하고 인간의 본질의 근본 특성을 특별히이성혼이라 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됨의 본질은 이성적 활동으로서의 생명 현상이다. 그의 이런 인간 이해의 방법에는 자연 과학의 귀납적 방법보다는 형이상학적 사유가 기초하고 있다. 인간의 이성혼은 자연학의 대상물이라기보다는 형이상학의 대상이다. 이성 중심의 인간관의 패러다임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공통된 특성은 오늘날 자연 과학이 탐구하는 일반적 방법, 즉 이성을 단지 뇌의 물리적이며 생리적이며 화학적인 현상에로 환원시키는 것을 철저하게 거부 한다는 점이다. 이성은 그 어떤 것에로 환원될 수 없는 비물질적인 것이다. 이성이 비물질적인 것, 특히 형이상학적 실체로서 경험 과학의 실증적 대상이 될 수 없는 한 그것의 탐구는 자연스럽게 형이상학적일 수밖에 없다. 물론 우리는 이성을 인간의 정신적 행위로부터현상적으로 탐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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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인간학의 또 다른 중요한 패러다임은 신 중심적 인간관이다. 이 패러다임은 일반적으로종교적 인간관혹은신학적 인간학의 유형을 띠고 있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인간에 관한 가장 오래된 지식이 종교에 내포되어 있듯이 신은 인간의 자기 성찰과 이해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고대 희랍적 사유에 반하여 유대-그리스도교적 사유의 전통에 따르면 인간은 그 기원과 본질에 있어서 철저하게 신에 의존되어 있는 존재이다. 이 전통에 따르면 인간은 신으로부터 창조되었으며, 자유로운 정신과 영혼불멸을 통하여 완전하지는 않지만 부분적으로 신의 본성에 참여한다. 인간은 하느님의 창조의 궁극 목적이요, 피조물 가운데 유일무이하게하느님의 모상”(Imago Dei)으로 창조된 존재이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자연 안에서 특별한 지위를 부여 받은 존재일 뿐 아니라 자신의 본질에 있어서, 그리고 자기실현과 완성에 있어서 하느님과 필연적으로 관계하는 존재가 된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느님께 정향 된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이 피조물이라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신과 인간의 간격을 분명하게 만든다. 인간은순수 현실인 신과 달리유한한 존재로서 자기를 끊임없이 완성해 가야만 하는 존재요, 규정된 자기를 끊임없이 넘어서는 존재이다. 이것은 현대에 들어서 이 패러다임의 중요한 통찰 가운데 하나인 인간은 곧초월혹은초월의 존재라는 구명에로 이어진다.

 

철학적 인간학의 중요한 셋 패러다임 가운데 마지막은 자연생물학적 인간관이다. 고대부터 사람들은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이해하여 왔다. 그러나 이런 일반적인 이해를 넘어서 이 패러다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인간을 철저하게 생물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고 인간의 본질을 구명함에 있어서 자연 과학적이며 실증주의적인 태도로 접근한다는 점이다. 이 패러다임은 무엇보다도 진화론과 더불어 현대의 생물학의 발전과 함께새로운 인간상을 표방하며 등장한 현대의 생물학적 인간학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이 패러다임의 기본 통찰은 인간과 동물은 생물학적으로 그 간격에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가 없을 뿐 아니라 완전하게 구별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정도의 차이, 좀 더 구체적으로 생물학적 분화나 진화 등에 있어서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또한 이런 차이가 인간에게 항상 생물학적으로 우월적 지위를 부여해 주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그 차이가 사실 동물과 비교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 안에서 특수성 혹은 특별한 지위를 갖게끔 하는 계기로 작동한다. 인간이 비록 신체 기관의 전문성에서 다른 동물보다 비교 우위에 있지 못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그런 열등함이 인간으로 하여금 특별한 능력을 가능하게 하는 계기가 됨을 현대의 여러 인간학자들은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생물학적 인간관이 그 방법에 있어서 인간을 순수하게 생물학적으로 고찰한다 하더라도 그 또한 인간이 발생,발달 초기에부터 이미 인간학적인 과정을 밟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며, 그럼으로써 인간의 고유한 존재 양식의 특수성을 밝혀내고자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가 자신을 어떻게 구명하든인간으로서의 일정한 자기 이해의 지평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 철학적 인간학의 새로운 출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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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생명 과학의 다양한 분야에서 이루어진 성과를 바탕으로 인간 생명의 발생 초기부터 형성되고 나타나는 인간적인 것의 고유성을 존재론적으로 규정하는 작업이 생물학적 인간학 안에서 진행되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결코 전통적인 존재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생물학적 차원에서 고유한 인간성의 존재 질서를 구명하는 것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물론 분명한 것은심연그 자체인 인간을 탐구함에 있어서 현대 자연 과학의 눈부신 성과를 결코 간과하지 않는 일이다. 그럼에도 인간을 전체적이며 총체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파악하는 일은 인간에 관한 개별 과학과 그 고유한 과학적 탐구 방법에 있기보다는 근본 학문인 철학의 고유한 방법에 있다 할 수 있다. 여기서 인간에 대한 전체적이며, 총체적이며, 근본적인 탐구를 위한 철학적 인간학의 새로운 출발점의 가능성에 대한 물음이 제기된다.

 

철학적 인간학의 출발점에 대한 문제는 방법론의 문제이기도 하다. 모든 학문이 그렇듯 방법의 문제는 각 개별 과학이 문제 삼고 있는 바의 그것 자체에 의하여 규정되어 질 수밖에 없다. 인간학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인간학과 관련된 각 개별 경험 과학들이 인간 연구와 관련하여 부분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다면 철학적 인간학은 이와는 달리 인간 연구에 있어서 보다 근본적이면서 총체적으로 인간 전체성에 대한 인간 이해의 기초를 정초하는 일에 관여한다. 따라서 인간 전체성의 파악을 위한 방법론적 정초 문제는 철학적 인간학의 우선적 과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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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인간학의 출발점과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다른 것은 그것으로써 우리가 인간임을 드러내는 인간 현상 그 자체이다. 현상학이 태동한 이후 현상학적 방법은 철학적 통찰을 위한 주요 방법론으로 자리매김을 한지 오래다. 미리 정형화 되고 고착된 인간의 본질 규정의 성급한 판단을 중지하고 인간 현상을 그 자체로 어떤 편견 없이 고찰하는 일은 그 깊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심연이기도 한 인간을 탐구하는데 있어서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이다. 가능한 한 세계 안에서의 인간 현존재의 전체 현상을 주시하면서 그것을 관통하고 있는 인간 현상의 근본 요소와 구조를 밝히고 또 거기로부터 인간 현존재의 본질 직관을 이루는 일은 오늘날 철학적 인간학의 탐구의 중심 과제 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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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과학 안에서 인간 일반을 문제 삼는 학문이 있다면 그것은 우선 생물학이다. 현대 철학적 인간학은 생물학의 도움을 받아 해부 형태학, 개체 발생학, 생태학 등의 다양한 관점으로부터 여타 동물들과 비교 되는 생물학적 특성으로서의 인간의 고유성을 확보하는데 일정한 성과를 거두어 왔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러한 특성이 필연적으로 인간의 근본 본질과 연결되는 것도, 그럼으로써 생물학이 곧 인간 본질 탐구의 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질과 그 최종 의미는 동물의 차원을 넘어선 보다 넓은 차원(지평) 위에서 규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철학적 인간학의 가장 근본 출발점이 될 수 있는 차원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그 차원이란 인간 전체를 포괄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의미와 최종 의미를 포섭함으로써 거기로부터 인간 전체에 대한 의미 물음이 제기되고 또한 그 의미 내용이 드러나는 그런 차원을 의미한다. 즉 철학적 인간학의 물음뿐만 아니라 모든 물음이 거기로부터 제기되는 무조건적인 출발점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하여 헤프너는 인간의 본질 탐구에 대한 가장 적절한 물음은존재론적 차원”(die ontologische Ebene)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코레트가 인간 주체의 물음을 형이상학의 기초 세움을 위한 출발점으로 삼아 무조건적이며 무경계적인 절대적인 존재 지평을 정립하고 거기로부터 인간의 본질을 구명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 이런 관점에서 철학적 인간학은 그 출발에서 형이상학, 특히 존재론과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체적이며 총체적인 인간 해명을 위한 출발점에 가장 보편적이며 기초가 되는 학문으로서 형이상학, 특히 존재론이 놓여 있다. 철학적 인간학은 인간을 구명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동물이나 혹은 다른 무엇이 아닌 인간존재’(Menschensein)로서, 인간으로서있음의 존재론적 의미를 밝힐 필요가 있다.

 

. 나가는 말

 

철학적 인간학의 물음은 철학의 역사와 같이 한다. 이는 철학이 주제적이든 비주제적이든 항상 물음의 주체인 인간 자신의 문제를 주요 문제로 삼아 왔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이미 칸트도 지적한바 있듯이 철학의 모든 물음이 최종적으로 철학적 인간학에로 모아 질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철학이 우주와 자연과 세계를 문제 삼고, 모든 것의 근거와 원리를 찾아 나서지만 이 모든 물음은 결코 인간을 떠나 이루어질 수 없다. 하늘 아래 모든 것이 매개된 직접성이라는 헤겔의 통찰처럼 이 세상에 인간의 정신에 의해서 매개되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만큼 철학의 궁극적 통찰은 시작부터 인간학적 관점을 담보하고 있다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 안에서 철학적 인간학이 차지하는 비중과 그 의미는 크다 할 것이다. 인간을 탐구함에 있어서 인간의 자기 이해와 해명이 시대를 달리하며 다양한 관점과 패러다임 아래서 이루어져 왔음을 고려하더라도 철학적 인간학이 방법적으로 견지하여야 할 점은 직접성으로 다가와 있는 우리의 삶 자체로부터 드러나는 인간의 전체 현상을 바탕으로 어떤 편견 없이 그것의 의미 본질을 반성적으로 매개하는 일이다.

 

여기서 우리가 눈 여겨 볼 점은 항상 총체적인 인간상의 정립과 보편적이며 근본적인 인간 본질 구명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일이다. 이러한 탐구를 위하여 오늘날 특히 현상학과 해석학 그리고 형이상학 혹은 존재론은 철학적 인간학의 적절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을 해명함에 있어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인간이 이미 정립된 존재이기보다는 정립해 가는 존재, 되어짐의 존재(Werdensein)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결코 완성된 존재도, 사변적 본질로서의 존재도 아니다. 오히려 끊임없이 자기를 기획하고 그것을 현실로 투사하는 가운데 자신의 현존재를 확인하고 정립하는 지금 여기에 있음으로서의 실존적 존재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현사실성과 인간 심부의 내면성을 강조하는 실존론적 인간 탐구는 오늘날 새롭게 모색될 필요가 있다. 또한 인간이 앞서 정해진 바에 따라서 자신을 규정하기보다는 자유로운 개방된 존재로서 자신을 규정해간다는 사실은 인간학적 탐구가 본질 탐구에 머물지 않고 나아가 인간의 자기 실현과 자기 완성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인간학적 과제를 안고 있음을 시사한다.       (김선희, 박남희, 박병준, 박준상, 서동은)

 

 

 

■ 전통철학의 진리관에 대한 니체의 결론

                                                                                                      글 :  구.승회 교수 글 중에서

 

니체는 객관적 진리에 근거한 전통철학의 확실성 전반에 의문을 제기했다.

 

      . 그렇다면 진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변하기 쉬운 일련의 은유, 환유, 의인화 한 마디로, 과장되고, 전치되고, 시적. 수사학적으로 미화되어 온, 그리고 오래 사용하고 나면 사람들이 보기에 견고하고, 규범적이고, 의무인 것처럼 여겨지게 되는 인간 관계의 총체일 뿐이다. 진리란 (...) 환상이며, 닳아 빠져서 감각적인 힘을 잃은 은유이며, 표면의 그림이 닳아서 그냥 쇳조각으로만 취급되는 동전과 같은 것이다. (Nietzsche, 1973, 374~375)

 

진리의 확실성 문제를 다루지 않고 있는 니체의 주관적. 언어적 상대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 “오직 사실만이 존재한다고 하면서 현상에서 멈추어 버리는 실증주의에 맞서서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아니다. 사실이야말로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해석만이 존재한다. 우리는 어떠한 사실도 그 자체로서확정할 수 없다. (...) “모든 것은 주관적이라고 당신은 말한다. 하지만 이것조차 해석이다. (...) 해석의 배후에 해석자가 존재한다고 상정하여야 할 필요가 있는가? 이 조차 하나의 고안이자 가설이다. (Nietzsche, Wille zur Macht)

 

'진리' '언어적 전통'으로, '사실' '해석'으로 환원함으로써, 니체는 화려한 문체와 선동적인 문구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게 진리와 사실을 주관화하고 어떤 객관적인 역사 개념도 거부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했다. 그에게 역사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지리멸렬하고, 변덕스럽고, 떠도는 이야기 모음에 불과하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똑같은 해체와 파괴의 전략으로 과학, 이성, 주관, 사회이론에 적용하여, 모든 것을 개인적인 창조물로 치부해 버린다.

 

니체는 인간과 이성을 무참하게 매도하면서 "영리한 동물들이 지식을 발명한 하찮은 별"에 관한 우화를 들려준다. 우화는 니체의 표현대로 자연 속에 비쳐진 인간의 지성이 얼마나 초라하고 덧없고 경박한지, 얼마나 목표가 없고 변덕스러운지를 그려내고 있다:

 

      .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에도 영원은 존재했으며 인간이 다시 사라진다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 자연 안에서는 아무리 비루하고 하찮은 것이라도 이 지식의 힘을 살짝 불어 넣기만 하면 당장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Nietzsche, 1973, 372)

 

영국뿐 아니라 독일에까지 속물주의를 감염시킨 후기 빅토리아조 시대에 비판을 퍼붓는 그의 저작은 무모한 자화자찬을 제외하면 그야말로 활력이 넘치는 것이었다. 물결치는 듯한 은유와 가차없는 언어의 화려함은 읽는 이로 하여금 넋을 잃게 만든다.

 

 

 

■ 칸트 인식론 고찰

                                                                                                학생발표 논문 중에서 일부 발췌

 

     독일 철학자 칸트의 독창적인 사고체계로서 정리한 그의 비판철학, 특히 인식론 분야인 선험적 감성론과 선험적 분석론을 그의 대표적인 저술인 '순수 이성 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 등의 저술을 통해 살펴보는 주제의 논문

 

 

□  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도 품었던 의문이며,

 

소크라테스(Socrates)는 대화에서

"파이드로스여, 그를 지혜 있는 자(sophon)라 부르는 것은, 내가 보기엔 너무 높이 올라간 것 같고, 그런 말은 신에게나 적용하면 적절한 것 같네. 그러나 지혜를 사랑하는 자(philosophon)혹은 그 비슷한 말로 부른다면, 그 자신도 차라리 동의 할 것이고, 보다 더 합당할 것 같네."(platon, 『파이드로스』, 278d)

 

데카르트는 그의 저서에서

철학을 "전 철학을 하나의 나무로 비유 한다면, 그것의 뿌리는 형이상학이요, 줄기는 물리학(자연학)이며, 가지들은 의학, 역학, 윤리학과 같은 여타 학들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렇게 철학을 일반 학문의 총칭으로 생각 한 것은 라이프니츠(Leibniz)와 뉴톤(Newton)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17세기 이후에 있게 된 근대적 의미에 있어서의 과학의 등장과 더불어 과학은 '분과학'(分科學)으로서 총체학(總體) 혹은 근본학(根本學)인 철학에 의해 파생되어 나온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의문은 어떤 것을 철학이라 하며 무엇을 과학이라 칭하는가라고 하는 학적 구분의 물음이었다.

 

 

□  진리개념

 

서양철학의 맥락은 진리론에서 그 중심 과제를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과연 무엇이 진리 일까? ' '우리는 보편 타당한 진리의 개념을 얻을 수 있을까? '

 

19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사이에 영국의 철학자들은 진리에 대한 두 가지 이론이 지속적으로 논쟁의 대상이 되였다. 하나는 진리에 대한 '정합론'이었고, 다른 하나는 보다 전통적인 '진리 대응론' 이였다. 전자의 경우는 논리 실증주의의 대두와 함께 활발하게 일어나게 된 주장이었는데,

 

"한 판단의 진리성이란 그 판단 체계 안에서의 그 정합성에 있다."고 하는 정합론은 직접적인 관찰이나 검증이 복잡한 과학이론에서는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 이론이었다. 하지만 판단의 정합성을 판단할 최초의 원리적 판단에 있어서는 그 타당성의 근원을 대응에서 구할 수 밖에 없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는 이론 이었다. 이에 비해 좀 더 전통적인 '진리 대응설'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지성과 사물의 일치"(adaequatio intellectus et rei)라고 하는 스콜라 학파의 신념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에서 부터 시작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토대를 확실히 했으며 아비케나를 통해 토마스가 받아 들임으로서 스콜라의 전통이 된 이 말은 뒤에 데까르트,스피노자 그리고 칸트를 거치면서 정통적인 것으로 정착 되었다.

 

진리대응설의 입장을 취한다고 했을 때에 갖게 되는 진리에 대한 의혹이다. 어떤 사람이 "눈은 희다"고 말한다면 그가 인식한 것을 우리는 어떻게 확인 할 수 있을 지가 의문인 것이다. 인식이 실재와 합치 하는가? 눈이 과연 실제로 흰가? 등의 질문을 하게 된다면 대답하는 우리는 분명 인식에 대한 어려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내가 인식하고 있는 대상에 대해 가지는 이러한 질문은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에게도 있었다. 그는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였으며 오히려 이러한 사물과 대상 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사물과 대상자체가 되는지에 대한 물음을 하고 이것의 근거를 찾는 것이 지성이 해야 할 가장 처음의 일이라고 생각 했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철학의 중심적인 주제를 이루고 있다.

 

 

 

□  진리 인식의 과정 (칸트 이전까지)

 

인식과 대상의 합치라고 하는 진리론의 중심과제에 대한 많은 철학자들의 관심은 지대하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하기를

"인식되는 사물의 형식은 인식하는 자 안에 있다. "(『신학 대전』고 밝히고 있는데 그는 여기서 인식된 실재는 그것이 인식 되어진 한에 있어서는 인식하는 자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가리켜 '실재론'이라 칭한다. 토마스의 사상과 유사한 철학자는 데카르트의 경우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자연의 체계가 수의 형식을 띄고 있으며 우리의 지성이 이를 인식 함에 있어서 그의 사고 법칙인 수의 법칙에 따라 인식 한다면 이러한 작용은 자연의 실재방식과 합치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러한 실재론에 대해서 인식하는 자를 오로지 인간 의식이라고 보는 칸트의 초월철학(超越哲學 Tranzendental philosophie)을 흔히 관념론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관념론이라고 하는 것은 실재 세계가 어떠한 특정 주관에 의해 마음대로 조작하거나 자의적으로 구성한다는 것이 아니라, 실재 세계란 보편적인 이른바 '학적' 인식에 의해서 파악되는 세계이며, 이러한 학적 인식이 보편적인 까닭은 보편적인 인식 주관에 의해 수행되기 때문임을 뜻한다는 것으로 이해될 것이다. 다시 말해 관념론이라고 하는 것은 "객관적 실재도 의식에서 규정된다"는 견해를 펴고 있는 것이다.

 

 

 

□  순수 이성 비판의 길

 

이제까지 살펴본 지성과 사물의 합치라고 하는 진리론의 중요한 문제를 칸트가 어떠한 방식으로 이해 했으며 어떻게 이성을 규정지었는지 알아보도록 한다.

 

흔히 그의 순수 이성 비판을 인식론의 하나로 파악 하려는 경향이 있어 온 것은 아무래도 여기서 제기되는 인간 인식의 문제를 그가 정밀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 된다. 하지만 그의 철학을 단순히 인식이론으로만 이해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특히 신 칸트 학파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그에 대한 관심의 증대가 인식론적으로만 그를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인 것은 커다란 실수였다. 이에 대해 다른 한 부류의 사람들은 그의 비판이론이 형이상학을 부인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비난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생각들은 모두 그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그가 형이상학에 대해 가지는 생각은 흄이 지니는 그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도 밝히고 있듯이 그는 자신의 철학의 최종목표를 형이상학의 확실한 정초를 두는 데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형이상학의 건립을 위해서는 순수 이성 비판으로서 형이상학의 학으로서의 여부를 결정 해야만 하는 임무가 주어지게 된다. 이러한 뜻에서 그는 그의 철학적 작업을 계획하고 이를 다루고 있다.

 

이성과 사실이 일치 한다고 보아 온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이것의 분리란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성과 사물의 일치란 하나의 객관으로서 확실한 것이었다, 사물은 객체로 있고 우리는 이를 알 수 있다는 견해였었다. 칸트는 여기에 도전을 하는 것이고 흄의 영향을 이어 받아 (이른바 '독단의 선잠'에서 깨어난 이후) 우리는 사물 그 자체는 이해 할 수 없고 오직 사물의 현상에서 비롯된 것들만을 알 수 있다는 주장을 하게 된 것이다. 그에 의하면 현상은 물자체를 가리는 것이요 실재는 감춰져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어떤 사물도 그 자체로는 인식 할 수 없고, 오직 나에 대해서 인식 될 수 있는 사태만을 인식 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직관의 작용 방식이 나로 하여금 사물 그 자체는 인식 할 수 없고, 현상 만을 인식하도록 규정한다. 나는 사태가 나에게, 현상하는 방식 그대로 인식한다." 이제 그는 이러한 근거에서 '이성'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이성에 대한 새로운 파악을 시도하고 있다.

 

책 제목에 사용된 이성(Vernunft)이라는 말은 이를 사용할 때에는 어떤 천부적인 재능이나 '능력'을 뜻 하는 것으로 이해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이성이라 함은 사고의 수행, 작용, 운동 등의 총체로서 파악해야 할 것이다. 이성은 의성(二義性)이 보여지듯 마지막에 가서는 자신과의 대화의 일을 통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이성이란 비판을 주관하는 재판부이면서 동시에 비판 받는 사고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순수 이성'에서 '순수'라고 하는 형용사는 이성이 모든 경험에 앞서서 (, 선험적으로)인식하는 이성이며 이 이성은 자기 자신의 원천에서 유래하며 경험적 표상이 섞여 있지 않는 개념만을 이용해서 움직인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  순수 이성의 길을 따라 칸트가 행하고자 한 것을 요약하면,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은 단지 하나의 뜻만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단순히 '학문 이론적'으로 파악하느냐, 혹은 인식 비판인가? 형이 상학을 없애버리려는 것인가? 아니면 일종의 새로운 형이상학을 새우려는 시도인가? 등의 많은 해석이 있을 수 있다.

여기서는 그가 어떻게 인식 비판으로 해서 진리의 앎을 파악 하려 했는지 살펴본다.

 

그에게 있어서 지금까지의 철학에서 지니는 문제점이라고 하는 것은 독단론과 회의론의 갈등이었다. 이러한 문제와 아울러 또 한가지의 숙제로 남아 있던 것은 형이상학을 긍정하는 쪽과 부정하는 것 사이의 대립이었다. 여기서 그가 더욱 관심을 가진 물음은 형이상학의 가능성에 대한 문제였다. 일찍 그에게 영향을 준 흄의 경우에서처럼 그가 형이상학에 대한 강한 거부를 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형이상학이 지니는 학적인 엄밀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흄은 일찍 형이상학에 대한 강한 거부반응을 하고 있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일 우리들이 '손의 신성함'이나 또는 강단 형이상학(school metaphysics)에 관한 책을 들고 있다면, 예컨대 다음과 같이 물어보기로 하자. 그러한 책은 양(quantity)이나 수에 관한 어떤 추상적인 추론(推論)을 포함하고 있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책은 불태워버리자. 왜냐하면 그것은 궤변과 혼란만을 포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흄의 강한 비판을 칸트가 따른 것은 아니지만 그에게 있어서 우리는 형이상학의 독단론에 빠져서도 안되며 회의론자처럼 그것에 무관심해 버려서도 안 된다. 그가 형이상학을 문제 삼은 것은 형이상학이 다루고 있는 업적에 관한 의문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것에는 칸트가 지니는 학문의 현황이 나타나있다. 그는 어떤 학문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학문이라면 먼저 그 분야에서 연구하는 사람들이, 쟁론의 상태에서 출발해서 합치의 상태에 이를 수 있는 어떠한 공동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 학문분야의 역사적인 전개에서 연속성을 유지시키고, 그래서 후배는 선배가 이뤄놓은 토대 위에서 지속적인 작업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여기서 정치의 비유를 들어 이를 설명하고 있다. 즉 국가라고 하는 것은 어떤 새로운 영토들을 지속적으로 영입하여야 하고 그러한 모습이 없을 때 그 국가는 국가로서 정당한 능력이 없는 것이라고 그는 보았다. 수학과 물리학의 경우는 이러한 방법을 충실히 따라갔고 그래서 확실한 학적 체계를 구성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형이상학의 경우는 지금까지의 경우에서는 이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형이상학은 계획을 세우고 미래를 대비하는 한 국가의 건립자로서 등장한 것이 아니고, 유목민들처럼 이리 저리로 방랑하면서 우연히 제공되는 먹이만을 가지고 생활했으며 어떠한 채계적인 경지정리나 토지 계획을 세우지도 못한 상태에 있다고 그는 비난한다. 그리하여 형이상학은 하나의 기사가 단지 거울을 보면서 싸움을 연마하고 있는 것으로서, 실재로는 어떠한 검사도 싸움을 통하여 한 치의 땅도 얻지 못한 경우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유가 형이상학이 원래 그릇 되었기 때문에 일어 난 것은 아니다. 이것의 원인은 이성이 자신의 본성에 따랐기 때문으로 이는 일종의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그는 제1판 서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간의 이성은, 이성 그 자체의 본성이기 때문에 거부할 수 없으며 이성의 모든 능력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답을 알 수 없는 문제들로 인해 고통 받아야 하는 특별한 종류의 운명을 지니고 있다."여기서 분명히 해 두어야 하는 것은 그가 형이상학적 인식이 경험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타당하다고 하는 것이 확실하다고 하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순수 이성 비판은 형이상학을 없애버리려는 의도에서 비롯 된 것이 아니라 학적으로서 형이상학을 정초 하려는 시도에서 시작된 것이다. 바로 여기에 순수 이성의 본래적 목표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을 수행해 나가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이뤄져야 하는 것은 선험적 종합 판단의 가능성을 살피는 것이다. "순수 이성의 우선적인 과제는 어떻게 선험적 종합 판단이 가능한가? 라고 하는 문제에 포함되어 있다." 그럼, 그에게 있어서 선험적 종합 판단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  선험적 종합 판단과 시간 공간론

 

그에게 있어서 분석 판단과 종합 판단과의 구분은 중요한 것이었다. 주어와 술어의 관계에 있는 모든 문장에 있어서 이 관계들은 두 가지 다른 방법으로 구성된다. 판단에 있어 하나는 B라고 하는 술어가 A라고 하는 주어의 개념 속에 속해 있는 경우를 생각 할 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술어 B가 주어 A와 관계 맺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A의 의미에 속해 있지 않는 판단의 경우를 생각 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를 분석 판단이라 명명하고 후자의 경우를 종합 판단이라 명명한다. 예를 들어 '모든 물체는 연장이 있다.'고 하는 것은 분석 판단이다. 왜냐하면 물체가 연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 위해 그 개념을 벗어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물체는 무게가 있다.'라고 말한다면 그때의 술어는 일반적으로 물체의 개념 속에서 생각 되어질 수 있는 것과는 매우 다른 그 무엇인가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종합판단이 되는 것이다. 칸트는 형이상학은 분석 판단만을 제공해 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분석 판단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는 꼭 필요 하고 보편적이고 타당하나 이것은 단지 설명을 하면서 개념을 분석하는데 지나지 않을 뿐이지 진리의 확장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그러한 종류의 판단이다. 그렇기 때문에 분석 판단은 일종의 '설명 판단'이고 이것에 대해서 종합 판단은 '확장 판단'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지식의 확장은 이와 같은 확장 판단인 종합판단에 의해 이루어지고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이 종합판단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여기서 판단이 선험적인 것이냐, 아니면 경험에 의존한 것이냐를 가지고 '선험적' '후험적'이라는 구분이 생기게 된다. 선험적인 판단은 모든 경험이나 감각적인 판단에 독립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판단은 네 가지로 구분될 수 있게 된다. , 후험적 종합 판단, 후험적 분석 판단, 선험적 종합 판단, 선험적 분석 판단, 그런데 이중에서 사실상 후험적 분석 판단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판단의 종류는 세가지로 줄게 된다. 여기서 칸트는 선험적 종합 판단이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그것의 실 예들을 제시함으로 말미암아 이것의 타당성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회의론자들에게 있어서 선험적 종합 판단이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 져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형이상학은 설 자리가 없었던 것처럼 보인 것이다. 칸트는 그렇기 때문에 형이상학을 구해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선험적 종합 판단이 가능한지를 밝혀야 하는 일이 남았던 것이다.

 

그가 생각한 객관적인 근거로서 제시될 예들이 실재에 있어서 선험적 종합 판단이라고 하는 것이냐의 물음은 여기서 다룰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그에게 있어 선험적 종합 판단의 예는 기하학의 경우에서 볼 수 있다고 생각 한다. 예를 들어 '두 점 사이를 잇는 최단 거리는 직선이다.'라는 명제를 생각 할 때 여기서 이는 '직선'이라는 개념이 다른 개념인 '최단 거리'라고 하는 것과 논리적으로 결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다루고 있는 공간 역시 물리적인 의미로서가 아닌 순수 형식적인 공간이다. 대수학에 있어서 유명한 예인 '7+5=12'라는 명제는 그가 지금까지의 생각에 반기를 든 새로운 주장이었다. 이러한 수학의 경우에 있어서는 이를 하나의 분석 판단이라고 보았었지만 12라는 개념에는 '5+7'이라는 개념이 들어 있지 않음을 들어 이것을 하나의 종합 판단이라고 파악했다. 아울러 그는 물리학의 근본 명제들이 선험적 종합 판단이라고 생각하며 형이상학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의 선험적 종합 판단에 대한 생각들 전체를 인정하는 사람은 드물다.) 이렇게 해서 그는 선험적 종합 판단의 기초 위에서 하나의 선험적인 계기를 이끌어 내려고 시도 하게 된다. 그는 우리 자신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본성적으로 제공해주는 선험적인 요소를 위해 '형식'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 형식들이란 각각 '선험적 감성론'에서는 공간과 시간이었고, 선험적 분석론에서는 '사고의 형식' 즉 범주이고 마지막으로 '선험적 범주론'에서는 범주와 비슷한 것인 이념으로 제시된다. 그런데 이 형식을 시, 공간과 범주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은 인간이 무엇을 인식하는 근거를 그가 감성과 지성으로 파악 했기 때문이다. 칸트는 여기서 이러한 선험적인 형식들이 모든 인식의 밑바탕에 깔려서 그의 '초월 철학' (Tranzendental philosophy)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그의 초월 철학을 통해 그의 인식에 대한 생각들을 알아보도록 하자.

 

선험적 감성론(die tranzendental Ästhetik)에서 칸트는 감성적으로 직관할 수 있는 두 가지 선험적인 형식들로서 공간과 시간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공간과 시간은 서로 곁 하여, 서로 위 아래로, 아니면 서로 잇달아 등의 '관계'로서 시간적 선후나 동시성 등을 표상한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지게 되는 것이고 이것이 없을 때 우리는 어떤 것을 어떠한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지 미궁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조사의 과정에 있어서 감각적 직관에는 두 가지 순수한 형식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형식은 선험적 지식의 원리로서 제공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공간과 시간이다."  공간과 시간은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기 이전에 미리 주어진 형식으로서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간과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들이 실제로 있으며 그것들만이 실재의 대상들을 결정하고 그것들과 관계하는가? 그는 여기서 공간과 시간의 선험성을 증명하기 위한 네 가지의 증명을 열거 하고 있다.

 

.  공간은 외부적 경험에서 파생 된 경험적 개념이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대상이 내 밖에 있는 어떤 것에게로 언급되고 그리고 내가 그것을 밖에 있는 어떤 것으로서 표상하려고 하기 위해서는 대상과 나의 감각이 달라야 할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위치에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공간에 대한 표상이 먼저 주어져 있어야 함이 분명하다. 공간의 표상이라고 하는 것은 외부 사물들의 관계로부터 경험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  공간은 모든 외부적 직관들의 기초가 되는 필연적으로 선험적인 표상이다. 우리는 공간의 부재를 표상할 수 없다.

 

.  공간은 추론적인(discursive)이 아니라 순수한 직관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순전히 한 공간만을 표상할 수 있고 그리고 이공간은 하나의 전체로 감싸 안은 공간에 앞서서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 공간은 무한히 주어진 크기로서 표상된다.

 

결과적으로 공간의 근본적인 표상은 선험적 직관이지 하나의 개념이 아니다. 그러므로 공간은 대상 자체의 어떠한 속성을 표상하지도 않으며, 오직 외부 감각의 전체 모습일 뿐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게 된다. "감각의 진정한 상호 관계인 물자체는 이러한 표상에 의해서는 알 수 없으며 알려질 수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전체 직관은 오직 현상에 대한 표상일 뿐이다. 우리는 대상들을 있는 그대로 직관하는 것이 아니다. ……공간과 시간에 있는 대상과의 모든 구성과 전체 관계들은 사라질 것이다. 현상으로서 그들은 그것 자체 내에서는 존재 할 수 없고 단지 우리 안에서만 존재 할 수 있을 뿐이다."

 

 

 

□  선험적 분석론 (범주)

 

선험적 감성론이 감각의 혼돈에서 감각의 지각이 이뤄질 수 있는 타당한 직관의 형식을 제공하려는 의도였다고 한다면 이제 이와 마찬가지로 그는 감성에 이어서 감각적인 지각들을 인식하는 사고의 형식을 구성하는 문제를 풀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시간과 공간의 형식을 통해 나타난 경험의 내용이 지식이 되려면 판단중의 개념이 그것에 포착 되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한 사고의 형식에 대해서 그는 설명하기를 '순수한 사고의 행위이고 이 사고를 통해 대상을 완전히 선험적으로 생각 하며 지성은 그것을 통해 표상들을 만들어 내는 그러한 사고인 것이다.'라고 표현한다. 감성이라고 하는 것은 표상들을 받아들이는 능력으로서 지성 자체는 이 사고형식 안에서 표상을 만들어내고 자발적으로 활동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고 형식은 선험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감성이나 경험에 뒤섞이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지성능력 자체에 대한 분석을 하고 순수 지성의 영역전체를 포괄하는 완전한 일람표를 작성하려 한다.

 

지금까지의 과정에서 우리는 단순히 직관에 의해서 인식하는 것이 아니요, 그렇다고 개념에 의해서만 인식을 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우리는 이 둘을 종합할 경우에만 진정한 인식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대변하는 그의 유명한 언급은 칸트의 사상의 핵심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감각 없이는 어떠한 대상도 우리에게 제공될 수 없으며, 지성 없이는 어떠한 대상도 우리에게 사유될 수 없다. 내용이 없는 사상은 공허하고, 개념이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그는 이제 이러한 계획을 선험적 분석론(tranzendental analytik)에서 다루고 있다. 그는 여기서 자신의 사고를 범주라는 틀로서 설명한다. 그에게 있어서 이 같은 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와 깊이 연결 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들이란 「자연학」(1 7, 190 a34)에서 알 수 있듯이 진술의 형식들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들은 존재의 형식이었다는 점에서 칸트의 범주와 구분된다.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직까지 그의 형이상학에 대한 가능성을 포기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칸트는 판단의 모든 형태들은 그의 범주들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밝히고 있다. 칸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단순히 이것 저것을 끄집어서 하나의 체계를 만든 것과는 달리 자신의 범주를 원리들로부터 이끌어 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을 위해서 수행되는 판단은 여러 가지 것들이 뭉쳐 있는 것으로서 종합이다. 그렇게 해서 범주는 사고들에 결합에 대한 완전한 일람표가 되는 것이다.

 

선험적 분석에서 그가 시도한 것은 범주에 대한 두 가지 논변 이였다. 그 첫째는 형이상학적 연역 이였고 둘째는 선험적 논변 이였다. 전자는 이미 있어왔던 일반적인 논리학의 범주를 실마리로 해서 범주의 존재를 주장한 논변이고 후자는 이러한 범주가 경험을 가능케 하는 필요 조건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 둘은 서로 상호 의존적이지만 우리가 어떤 범주나 원리를 찾아야만 하는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형이상학적 연역에 의존해야 할 것이다.

 

일반 논리학의 판단표는 4가지 중심은 가지고 있으며 각각은 3가지의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이들을 구성하면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 ( Quantity) :

     전칭(全稱 Universal) 특칭(特稱 Particular) 단칭(單稱 Singular)

. ( Quality) :

     긍정(Affirmative) 부정(Negative) 무한(Infinite)

. 관계(Relation) :

     정언(定言 Categorical) 가언(假言 Hypothetical) 선언(選言 Disjunctive)

. 양태(樣態 Modality) :

     미정(未定 Problematic) 확정(確定 Assertoric) 명증(明證 Apodeictic)

 

그런데 칸트는 일반 논리학에서 다루는 판단을 초월론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자신의 범주들을 완벽하게 열거하기 위한 실마리를 얻는다. 예를 들어 일반 논리학에서 전칭 판단과 특칭 판단은 서로 구별되는데 이것을 칸트는 초월론적 관점에서 판단에서의 이 차이는 사고의 상이한 기능들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통찰한다. 그래서 전칭 판단에서는 판단의 술어가 언표되는 개개 모두에게, 그리고 특칭 판단에서는 단지 여럿에게 결합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 속에서의 판단형식의 술어적 형식을 체계적으로 설명한다면 기본개념의 체계가 성립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이러한 것에 바탕을 두고 자신의 범주표를 완성한다.

 

 

. ( Quantity)

     하 나, 여 럿, 모 두

. ( Quality)

     실 재 성, 부 정 성, 제 한 성

. 관계(Relation)

     실체(와 속성), 원인(과 결과), 상호(작용)

. 양태(樣態 Modality)

     가능-불가능, 현존-부재, 필연-우연

 

이 범주라고 하는 것은 선험적인 순수 직관에 주어지는 다양을 통일 작용에서 결합하는 여러 가지 근원적인 방식이다. 지성은 이 범주를 통해서 개념의 통일 작용을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범주는 주관으로 하여금 사고 하도록 작동시켜 자발적인 능력으로 종합작용을 수행토록 하는 형식인 것이다. 내가 초록색을 보고 있던지, 빨간색을 보고 있던지 간에 보는 대상을 내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감각의 형식으로 내게 주어지고 나는 다시 이것을 자기능력의 종합 작용에 의해서 초록색 혹은 빨간색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칸트에게는 나의 지성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감각적 소여(data)들의 내용을 자의적으로 변경 시킬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아니면 어떤 외부적인 힘에 의해서 정당하다고 생각 되는 인식을 그릇되게 인식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범주가 객관적으로 타당한지를 입증해야 하는 것이 과제로 떠오르게 된다. 사실 인식의 객관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로는 로크의 경우에 있어서도 발견할 수 있다. 초월 철학자로서 이것의 해결은 시급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초월 철학은 선험적 종합을 말하면서 지성이 보편 타당하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범주의 초월 연역이라고 하는 분야에서 권리의 문제(quid iuris)를 제기한다. 이것을 해결할 모양으로 그가 제시한 의식을 활동을 그는 순수 통각(統覺)이라고 명명했다. 이 순수하고 근원적인 통각은 객관적인 표상을 겪으면서 매개 되는 자기의식이다. 이것은 다양함을 통일하는 데에 그 기능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통일성은 나로 하여금 의식의 전 과정에 있어서 자신의 의식이 어떠한 인식에 있어서의 혼란함을 방지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여러 색깔로의 서로 다른 자기'라고 하는 위험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 신은 죽었다

                                                                                                             Fm  :  일속 블로그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말은 옳다.
종교는 제도와 교리로 신을 죽였고
신학자들은 학문으로 신을 죽였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이
지금 이 순간 춤추고 있을 때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신은 살아있는 것이다.
 
신학자들이 신을 증명하려고 애쓸 때,
신은 죽고 만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질 때
신은 즐거움에 고동치고 열광할 것이다.
 
꽃을 존재로 받아들이고 즐기고 느낄 때 신은 살아있다.
그러나 꽃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신은 죽었다.
 
별을 쳐다보면서
이 우주의 신비와 하나가 될 때,
그 때에 신은 살아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인생으로 존재하는 것이 감사해서 기뻐 노래 부를 때.
아무 의미도 없는 허밍일지라도
그 기쁨의 표현 안에 신은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이다.
 
존재 안에 살아있을 때 신은 살아있는 것이다.
존재 안에 살아있지 않다면
신이 어떻게 살아있을 수 있겠는가?
 
경전 안에 있는 신은 죽은 것이다.
교리 안에 있는 신은 죽은 신이다.
소유 안에 있다면 신은 죽은 것이다.
 
소유한 신은 그대가 죽으면 그대의 신도 죽는다.
 
지금 이 순간
감사하라
기뻐하라
신이 함께 할 것이다.

                            (일속)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Fm  :  일속 블로그

 

□ 진리를 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나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라

                         (요한일서1:1-2)
 
오래도록 차라투스트라는 잠을 잤다. 여명도 그의 얼굴 위로 지나가고, 오전도 지나갔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의 눈이 열렸다: 경이롭게, 차라투스트라는 숲속을 보았고 정적(靜寂)을 보았다. 경이롭게, 자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벌떡 일어났다, 번뜩 뭍을 본 뱃사람처럼, 탄성을 질렀다: 그는 새로운 진리를 보았던 것이다.

 

   (짜라투스트라의 서두) 9 중에서
 
새로운 진리를 보았다? 진리라는 것은, 흔한 언어 습관대로라면, 우리가 인식하는 것, 아는 것, 혹은 깨닫는 것이다. 그런데도 니체는 굳이 “보다”는 동사를 썼다. 보았다는 것은 체험했다는 말이다. 진리를 보았다는 말은 진리를 체험해서 자기의 것이 되었다는 뜻이다.
 
불경에서도 “보다”는 낱말은 깨달음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선불교에서도 깨달은 자리를 두고 “견처(見處)”라는 낱말을 쓴다.
 
오쇼 라즈니쉬의 표현을 빌면, 니체는 “붓다적인 요소와 조르바적인 요소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의 불행은 그가 서양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동양이라면 불교의 영향 아래 禪이나 명상을 통해 니체가 숨 쉴 만한 공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서양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니체 당시의 유럽에서는 불교라는 이름 아래 우파니샤드나 인도 잠언 등이 이제 갓 번역되기 시작한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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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세상에 알려진 가장 위대한 철학자일 것이다. 니체는 타고난 신비주의자이며 또한 많은 철학자들이 전혀 알지 못했던 다른 차원에 있어서도 위대함을 발휘했다.
 
그의 철학은 단순히 정신적인 것뿐만 아니라 가슴 속 깊숙이 뿌리내린 심오한 철학이다. 그 뿌리의 일부는 존재의 심층부에까지 이른다.
 
그에 관해 아쉬움이 있다면, 그가 서양에서 태어났다는 점이다. 그런 까닭에 그에게는 어떠한 신비주의자와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그는 깊이 있게 사유했지만 명상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의 사유는 때때로 명상가의 심오함을 가지기도 하고, 붓다의 경지에 이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당연한 일인 것처럼 보인다.
 
그는 존재의 중심에 이르는 깨달음의 도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이러한 무지는 그의 존재에 엄청난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별만큼 높은 경지를 꿈꾸었으나 그의 삶은 여전히 매우 일상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다. ? 그의 삶에는 명상이 가져다 주는 번뜩거리는 뭔가가 없었으며 그의 사상은 피가 되어 뼈 속까지 스며들지 못했다.
 
니체는 매우 함축적인 문체를 사용하였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한 권의 책에 쓸 것을 그는 단 한 문장으로 썼으며 그렇기에 문장 하나하나가 더욱 의미심장하다.
 
만약 주의를 기울여 듣지 않는다면 그대는 니체가 말하는 것을 놓치고 말 것이다. 니체의 이 책은 소설처럼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우파니샤드의 경전들과 거의 비슷하다. 각각의 격언들이 엄청난 의미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나는 그대의 오해를 막기 위하여 숨은 암시들을 낱낱이 파헤치고자 한다. 니체는 세상에서 가장 오해 받기 쉬운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것은 그가 너무나 함축적인 문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암시들에 대하여 결코 구구한 설명을 달지 않았다.
 
그는 매우 상징적인 사람이다. 그가 그토록 상징적이 이유는, 설명할 만큼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는 새로운 통찰력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많은 것을 나누어 주려고 했고 그러기에는 삶이 너무나 짧다고 생각했기에 논문을 쓸 수가 없었다.
 
그의 저작은 너무나 의미심장하고 응축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설령 그들이 ‘이해’했다 하더라도 그들의 이해는 오해에 불과하다. 그들은 도저히 니체를 읽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그들은 모든 것이 설명되기를 원한다.
 
니체는 어린아이를 위하여 쓰지 않았다. 그는 성숙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썼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매우 드물다. 사람들의 평균적인 정신연령은 열 네 살을 넘지 못한다. 이런 정신 연령으로는 니체를 놓치고 말 것이다. 니체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니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니체의 추종자들 역시 니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의 정신연령은 똑같은 수준이다.
 
    (손민규 - 오쇼의 짜라투스트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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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위대한 점은
 

인간의 위대한 점은 인간은 하나의 다리이지 목표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나 짜라투스트라는 군중을 바라보고 이상히 여겼다. 그리하여 그가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매어진 하나의 밧줄이다. 심연 위에 걸쳐 매어진 하나의 밧줄이다.
 
그 위를 뛰어넘는 것은 위험하고, 저쪽으로 건너가기도 위험하고, 가는 중에도 위험하고, 떨며 멈추어 있는 것도 위험하고 돌아보는 것도 위험하다. 인간의 위대한 점은 인간은 다리이지 목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인간이 가진 사랑 받을 수 있는 점은, 그 하나의 이행(移行)이며 또한 몰락이라는 점이다. 나는 사랑한다. 몰락하는 자로서 밖에 살아갈 줄 모르는 자를, 그들은 저편으로 이행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저쪽으로 건너가는 사람인 까닭에. 나는 위대한 몰락자를 사랑한다.
 
나는 사랑한다. 몹시 경멸하는 자를, 그들은 위대한 숭배자이자 피안을 향한 동경의 화살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한다. 몰락하여 희생되어야 할 이유를, 우선 별나라의 배후에서 찾지 앞으로 초인의 세상이 이루어지도록 세상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자를 사랑한다.
 
나는 사랑한다. 깨닫기 위해서는 사는 자를, 그리하여 장차 초인이 나타날 것을 깨달으려는 자를 나는 사랑한다. 그러하면 그는 스스로 몰락을 갈구한다.
 
나는 사랑한다. 초인을 위하여 집을 지으며 그를 위해서 세상과 짐승과 식물을 마련하려고 일하며 발견하는 자를 사랑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몰락을 갈구하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한다. 자신의 덕성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한다. 덕성이란 몰락에의 의지이며 또한 동경의 화살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한다. 자신을 위해서는 조금도 정신을 아끼지 않고 오히려 정신을 온통 자신의 덕의 정신으로 하고자 하는 자를 사랑한다. 그럼으로 그는 정신의 다리를 건너갔다.
 
나는 사랑한다. 자신의 덕을 스스로의 성품과 운명으로 이끄는 자를 사랑한다. 이렇게 하면 그는 스스로의 덕을 위하여 그는 즐거이 다리를 지나간다.
 
너무 많은 덕을 가지려 하지 않는 사람을 나는 사랑한다. 한 개의 덕이 두 개보다 더한 덕이니, 그것은 운명이 매달릴 수 있는, 더한 매듭인 까닭이다. 감사를 받으려고도 되돌려 주려고도 하지 않는, 영혼을 탕진하는 사람을 나는 사랑한다, 그는 항시 남에게 선사하며 스스로 간직하려 하지 않는 까닭이다.
 
주사위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던져졌을 때 부끄러워하고 그리고서<난 도대체가 사기 도박꾼인가?> 하고 묻는 사람을 나는 사랑한다, 그는 파멸하길 원하는 까닭이다. 자신의 행동에 앞서 황금의 말들을 던지고 그리고 언제나 자신이 약속했던 것 이상을 행하는 사람을 나는 사랑한다. 그는 자신의 몰락을 원하는 까닭이다.
 
미래에 올 사람들을 정당화 시키고 지나간 과거의 사람들을 구제하는 사람을 나는 사랑한다.
 
그는 현재의 사람들로 하여 파멸하고자 하는 까닭이다. 자신이 자신의 신을 사랑하는 까닭에 자신의 신을 징벌하는 사람을 나는 사랑한다, 그는 자신의 신의 분노로 하여 파멸하고자 하는 까닭이다. 상처 받는 일에 있어서도 영혼이 깊은 사람을, 그리고 조그마한 체험에도 파멸될 수 있는 사람을 나는 사랑한다.
 
그렇게 그는 즐거이 다리를 건너가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서 모든 것들이 자기 내부에 들어올 수 있도록 영혼이 넘쳐흐르는 사람을 나는 사랑한다. 그렇게 하여 모든 것이 그의 몰락이 되는 것이다.
 
나는 사랑한다. 영혼이 넘쳐흘러 자신을 망각하면서 모든 것을 스스로 내면에 포용한 자를 사랑한다. 그리하여 모든 것은 그 자신의 몰락이 되게 한다.
 
나는 사랑한다. 자유로운 정신과 자유로운 마음을 가진 자를 사랑한다. 그리하여 그의 머리는 단지 마음의 내면이지만 그의 마음은 그를 몰락으로 이끌어간다.
 
나는 사랑한다. 인류 위해 걸쳐진 먹구름으로부터 뚝 뚝 떨어지는 무거운 빗방울과 같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한다. 그들은 번개가 치는 것을 예언하며 예언자로서 멸망하여 간다.
 
보라 나는 번개의 예언자이며 구름으로부터 떨어지는 무거운 빗방울이다. 그리고 이 번개야 말로 초인이라 부른다.

……

 

 

□ 광대
 

짜라투스트라가 숲에 잇대어 있는 가장 가까운 도시에 이르러 보니, 바로 그곳 장터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한 광대가 줄타기를 한다는 것이 약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짜라투스트라는 군중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희에게 초인(超人)을 가르치노라! 인간은 초극 되어야만 할 그 무엇이다. 너희는 인간을 초극하기 위하여 무었을 하였는가?
 
이제까지 모든 존재는 자신을 능가하는 무엇인가를 창조해왔다. 너희는 그 위대한 조수(潮水)의 썰물이 되길 원하며, 인간을 초극하기보다 오히려 짐승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가?
 
인간에겐 원숭이란 어떤 것인가? 하나의 웃음거리이거나 또는 비참하기 그지없는 수치스러운 존재이다. 그리고 초인에겐 인간과 똑같이 하나의 웃음거리이거나 또는 비참하기 그지없는 수치스러운 존재이다. 너희는 벌레로부터 인간으로 이르는 길을 걸어왔으되, 아직도 너희 내부에 많은 것들이 여전히 벌레이다. 예전에 너희는 원숭이였고 지금도 너희는 여전히 어느 원숭이보다 더한 원숭이인 것이다.
 
그리고 너희들 중 가장 현명한 자, 그도 또한 식물과 유령의 분열이며 잡종에 지나지 않는다. 허나 내가 너희들에게 식물과 유령으로 되라고 명령하겠는가? 보라, 나는 너희들에게 초인을 가르친다! 초인은 세상의 의미이다. 너희의 의지는 말해야만 한다.
 
초인이란 세상의 의미이어야만 한다고! 나의 형제들아 내 너희에게 간청 하노니,<세상에 충실하라>, 그리고 너희에게 천상(天上)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자들을 믿지 말라. 그들은 스스로 알든 모르든 간에 독(毒)을 섞는 자들이다. 그들은 삶의 경멸자이고, 쇠잔해 가는 자들이며, 스스로 독을 먹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에게 세상은 지쳐버렸다. 그러므로 그들은 없어져버려도 좋다! 예전엔 신에 대한 모독이 가장 큰 모독이었으되, 그러나 신은 죽었고 그와 더불어 신의 모독자들도 또한 죽었다. 세상을 모독하는 것이 지금은 가장 가공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불가사의한 것의 내면을 세상의 의미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것이 되었다.
 
예전엔 영혼은 육체를 경멸적으로 보았고 그리고 그 당시엔 그러한 경멸이 최고의 것이었다. 영혼은 육체가 야위고 끔찍해지고 굶주리기를 바랐다. 그렇게 하여 영혼은 육체와 세상으로부터 벗어날 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 그 영혼 자신이 야위고 끔찍해지고 굶주리게 되었고, 그리고 잔혹함이 이 영혼의 기쁨은 잔인함이었다.
 
그러나 나에게 말해다오, 나의 형제들이여. 너의 육체는 너희의 영혼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지를. 너희의 영혼은 가난이며 더러움이며 가련한 안락이 아니던가? 실로 인간이란 하나의 더러운 강물이다. 스스로 더러워짐 없이 더러운 강물을 받아들일 수 있기 위해 인간은 참으로 바다가 되지 않으며 안 된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초인을 가르친다. 초인은 바다이고, 그 속에서 너희의 커다란 경멸은 가라앉을 수 있다.
 
너희가 살아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커다란 경멸의 시각이다. 너희의 행복도 ,또한 너희의 이성과 너희의 덕도 혐오스러워지게 되는 시각이다. 그 시각에 너희는 말하리라.<나의 행복이 무슨 소용인가? 그것은 가난이며 더러움이며 가련한 안락이다. 하지만 나의 행복은 살아 있음 자체를 정당화 시키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시각에 너희는 말하리라.<나의 이성이 무슨 소용인가? 나의 이성은 사자가 먹이를 갈구하듯 지식을 갈구하는가? 나의 이성은 가난이며 더러움이며 가련한 안락이다!>
 
그 시각에 너희는 말하리라.<나의 덕(德)이 무슨 소용인가? 그것은 아직껏 나를 미치게 만든 적이 없었다. 나는 나의 선과 나의 악에 얼마나 지쳐있는지! 그 모두 가난이며 더러움이며 가련한 안락이다 !>
 
그 시각에 너희는 말하리라.<나의 정의가 무슨 소용인가? 나는 내가 이글이글 타는 불이며 숯불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하지만 정의로운 인간이란 이글이글 타는 불이며 숯불인 것을 !>그 시각에 너희는 말하리라.<나의 동정이 무슨 소용인가? 동정이란 인간을 사랑하는 자가 못 박히는 십자가가 아닌가? 하지만 나의 동정은 결코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는가? 너희가 이렇게 외친 적이 있던가? 아, 내가 너희가 이렇게 외치는 것을 들었더라면! 그러나 하늘을 향해 외쳤던 것은 너희의 죄가 아니라 너희의 안일이다. 그대들의 죄악 속에까지 깃든 그대들의 인색이 하늘을 향해 외치고 있다.
 
그런데 불 꽃의 혀로 너희를 핥아 줄 번개는 어디에 있는가? 너희에게 접목되어야만 할 광기는 어디 있는가? 보라, 나는 너희에게 초인을 가르친다. 그가 바로 이 번개이며, 바로 그 광기이다!
 
짜라투스트라가 이렇게 말했을 때, 사람들 중 하나가 말했다.<우리는 광대에 대해서는 이제 충분히 들었으니, 이젠 광대의 모습도 보여다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짜라투스트라를 비웃었다. 그러나 그 말이 자기를 가리켜 한 말인 줄로만 믿은 광대는 줄타기를 시작하였다.
……

 

 

□ 길동무

 
 ……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한 줄기 빛이 내게 떠올랐다. 길동무를 나는 필요로 한다, 그것도 죽은 길동무나 시체가 아닌 살아 있는 길동무가. 죽은 길동무나 시체는 내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내 자신이 메고 가야 하는 것이다. 그와는 달리 나는 살아있는 길동무를 필요로 한다, 자기 자신이 따라가고 싶은 까닭에 나를 따라가는, 그것도 내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나를 따라가는 살아 있는 길동무를. 한 줄기 빛이 내게 떠올랐다. 짜라투스트라는 군중이 아니라 길동무에게 말해야 한다.
 
짜라투스트라는 짐승 떼에 딸린 목자(牧者)나 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짐승의 무리 중에서 많은 짐승들을 꾀어내기 위해 그러기 위해 나는 왔다. 군중과 짐승의 무리들은 내게 화를 내리라. 목자들에겐 짜라투스트라는 강도라고 불리우리라. 나는 목자들이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자신을 선한 자 의로운 자들이고 부른다. 나는 목자들이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을 올바른 신앙을 가진 신도들이라고 부른다. 보라, 저 선한 자들을 ! 그들이 가장 미워하는 것은 누구인가? 그것은 그들의 가치 표(表)를 부수는 자, 파괴자, 범죄자이다. 허나 그는 창조하는 자인 것이다.
 
보라, 온갖 신앙을 가진 신도들을! 그들이 가장 미워하는 것은 누구인가? 그것은 그들의 가치표(表)를 부수는 자, 파괴자, 범죄자이다. 허나 그는 창조하는 자인 것이다. 창조하는 자는 길동무를 구한다. 시체를 구하는 게 아니고 또한 짐승의 무리나 신도들을 구하는 것도 아니다. 창조하는 자는 새로운 표(表)에 새로운 가치를 써 넣을, 함께 창조하는 자를 구한다.
 
창조하는 자는 길동무를, 그리고 함께 수락하는 자를 구한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수확을 위해 무르익어 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백 개의 낫이 없으니, 그래서 그는 곡식 이삭들을 떼내며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창조하는 자는 길동무를, 그것도 자기 낫을 갈 줄 아는 그러한 사람들을 구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을 사람들은 파괴자, 선악을 경멸하는 자라고 부르리라. 그러나 그들은 수확하는 사람들이며 찬미하는 자들인 것이다. 함께 창조하는 자를 짜라투스트라는 찾는다. 함께 수확하는 자, 함께 찬미하는 자를 짜라투스트라는 찾는다. 그가 짐승의 무리, 목자들, 송장들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 그리고 너, 나의 최초의 길동무여, 잘 있거라 ! 속이 빈 그 나무속에 내 너를 잘 묻어두었다. 늑대들로부터 내 너를 잘 숨겨 놓았다. 그리고 나는 너로부터 떠난다. 때가 되었다.
 
아침놀과 아침놀 사이에 새로운 진리가 내게 왔던 것이다. 나는 목자나 무덤 파는 사람이 되지는 않으리라. 내가 죽은 자와 이야기한 것도 이것으로 마지막이었다. 창조하는 자, 수확하는 자, 찬미하는 자와 나는 한 패가 되리라. 나는 그들에게 무지개를, 그리고 초인으로 올라가는 계단들을 모두 보여 주리라. 흔히 있는 은둔자나 둘이 있는 은둔자에게 나는 나의 노래를 불러 주리라. 그리고 일찍이 들어보지도 못했던 것에 귀 기울이는 자, 그들의 심장을 나는 나의 행복으로 무겁게 채워주리라. 나의 목적을 향해 나는 나아가고, 나는 나의 길을 간다.
 
주저하는 자들, 게으른 자들을 나는 뛰어넘으리라. 그리하여 나의 가는 길이 그들의 몰락의 길이 되도록 ! 짜라투스트라가 마음 속으로 그렇게 말했을 때, 태양은 정오에 멈춰 있었다. 그때 그는 의아스럽게 눈을 깜박거리며 창공 속을 바라보았다. 머리 위에서 한 새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그러자 보라 ! 한 마리의 독수리가 허공을 헤치며 넓은 원을 그리고 있었고, 한 마리의 뱀이 먹이가 아니라 친구처럼 그 독수리에게 매달려 있었다. 뱀이 독수리의 목에 감겨 몸을 가누고 있었던 것이다. <저것은 나의 짐승들이다!> 짜라투스트라는 그렇게 말하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태양 아래서 가장 긍지 있는 짐승과, 태양 아래서 가장 영리한 짐승 저것들이 정찰을 하러 왔구나. 저것들은 짜라투스트라가 아직 살아 있는지 살펴보려는 것이다. 나의 짐승들이여 ! 나를 인도해 다오!>
 
이렇게 말했을 때 짜라투스트라는 숲속의 그 성자의 말이 생각나, 한숨을 쉬며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보다 영리해지고 싶다 ! 나의 뱀처럼 철저히 영리하고 싶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을 나는 바라고 있다. 그러므로 나의 긍지가 항시 영리함과 더불어 나아가기를 나는 바란다. 그리고 어느 날 나의 영리함이 나를 떠나 버린다면 아, 영리함이란 달아나버리길 좋아한다!
 
그래도 나의 긍지는 나의 우둔함과 함께라도 날아가기를 !
이리하여 짜라투스트라의 몰락은 시작되었다.
                                                                                (서문 끝)

 

 

■  OM


Om Bhur Bhuvah Swah              옴 부흐 부바흐 스바흐
Tat Savitur Varenyam                 타트 사비트르 바레니얌
Bhargo Devasya Dheemahi         바르고 데바샤 디마히
Dhiyo Yo Nah Prachodayat         디요 요나 프라초다얏

              - RV Ⅲ, 62, 10 -


"옴, 물질과 마음과 영혼의 존재의 근원인
지고의 신성한 실재이신 사비트르의 광휘에 경배하나이다.
빛나는 신의 영광에 명상하나니
우리의 지성을 밝혀 주소서.”

 

  (산스크리트어 의미 :  OM)

   . 옴(OM) 
      . a-u-m의 3가지 소리로 이루어진 '옴'이라는 음절은 
      . 하늘· 땅· 대기의 삼계(三界), 
        힌두의 삼신(三神)인 브라마· 비슈누· 시바, 
        베다 삼전(三典)인 리그·  야주르· 사마 등,
        3가지 중요한 것들을 의미 함
        (산스크리트에서 모음 a와 u가 합쳐져서 o가 됨)

      . 힌두인들은 기도·찬송·명상할 때,
        시작과 끝에서 이 음절을 외며, 
        불교도나 자이나교도들도 의례에서 이것을 자유롭게 사용함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Fm  :  황.문수 역 / 문예출판사 

서양 철학사의 거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의 철학서.


10년간 산 속에서 고독한 생활을 보내던 짜라투스트라는 40세가 되어 산에서 내려온다. 그는 인간 세계로 돌아와 주로 <얼룩소>라는 이름의 도시에서 초인의 이상을 설교하지만 세상 사람들의 이해를 받지 못해 다시 산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산중의 고독한 생활로 돌아간 짜라투스트라는 인간 세계에서 그의 가르침이 왜곡되고 있음을 알고 다시 하산하는데...
부제: <만인을 위한 그리고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비유와 상징을 주 무기삼아 짜라투스트라의 초인과 영원 회귀의 사상을 전하고 있다.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

 

철학 분야뿐만 아니라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된, 현대의 사회·문화 전 분야에 걸쳐 혁명적 영향을 끼친 서양 철학사의 거인.
니체는 사유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노래하는 시인이 되기를 원했다. 그는 필요에 따라서 자유주의자로서의, 심리학자로서의, 모럴리스트로서의, 예언자로서의, 그리고 익살꾼으로서의 역할을 선택했다. 그의 사상은 실존적이다. 왜냐하면 그의 사상이 직접 자기 자신의 삶의 구성에 관계하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은 또한 모든 인식론적인 전통과 도덕적 전통을 시험대에 올리기 때문에 실험적이다. 허무주의의 문제점에 대한 대답에 나타나는 그의 사상은 모범적이기도 하다. 1844년 독일 뢰켄에서 프로테스탄트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니체는 독실한 기독교 가정 출신답게 어릴 때부터 신학에 능통했지만, 본 대학 입학 후 문헌학적으로 성서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갖게 되면서 신학 공부를 포기하고 고전문헌학을 전공하기에 이르렀다.

저명한 문헌학자 리츨 교수의 수제자가 된 니체는 24세라는 약관의 나이에 스위스 바젤 대학의 교수로 임명받았으나, 그 즈음 심취하게 된 쇼펜하우어 철학과 바그너 음악의 영향으로 리츨 교수와 심한 의견차를 나타내기도 했다.

 

1900년 8월 25일 바이마르에서 고독한 생을 마쳤다.

 

『비극의 탄생』(1872),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1878), 『아침놀』(1881), 『즐거운 지혜』(1882),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5), 『선악의 피안』(1886), 『도덕의 계보』(1887), 『안티크리스트』(1888), 『우상의 황혼』(1889), 『이 사람을 보라』(1889) 등 그가 남긴 저작들은 19세기에 쓰여졌지만, 그의 사상이 가장 위험한 주제를 다루는 현대의 실험실이었던 만큼 그의 저작들은 끊임없이 읽히며 고전의 반열에 올라 있다. 

 

 

 

■ 물자체 개념과 이성 영역의 구분

                                                              

 □ 물자체 (物自體, Ding an sich)

                                                                                                         (철학 용어)   fm : Daum백과

. 칸트 철학의 기본개념.

   기본적으로는 인간의 의식 밖에 인간의 인식과 독립해서 존재하며,

   지각과 사유를 통해 인식에 주어지는 방식과는 구별됨. 그 자체로서의 사물이나 객관적 실재를 가리킴

 

. 칸트에 따르면

   우리는 물자체를 인식할 수 없고 다만 현상의 세계만을 알 뿐임

   물자체는 감관과 오성, 경험과 사유를 거쳐 오로지 현상으로만 주어지기 때문임

 

   "우리에게 사물은 우리 밖에 존재하며 우리 감각의 대상으로 주어지지만,

   우리는 그 사물 자체가 무엇인지에 관해 전혀 알지 못하며 단지 그 사물의 현상만을 알 뿐이다"  

    (순수이성비판 Kritik der reinen Vernunft)

 

. 칸트는

   물자체를 의식 밖에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한다는 점에서 유물론의 경향을 보임

   물자체를 인식 불가능한 것으로 보고 인식 가능한 영역을 현상에만 국한시킨다는 점에서는 불가지론 

   이나 주관적 관념론으로 기울고 있음

   즉, 관념론과 유물론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음

 

. 물자체 개념과 그 문제점

   칸트가 17.18세기의 수학적 자연과학의 인식개념을 인식론의 기초로 삼고 절대화하는 데서 비롯된 것

   수학적·기계적 자연인식에 따르면, 생물학에서 유기체의 발전과 같은 것은 인식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게 됨

   즉, 칸트는 당시 인식의 이상을 절대화함으로써 물자체와 현상을 비()변증법적으로 대립시킨 것임

 

 

 □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회(轉回)

   칸트가 지동설을 발견한 코페르니쿠스의 이름을 따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회란 철학적인 용어를 만듬

   사전적 의미는 어떠한 사건과 상황에 급변하게 변하는 뜻

   일반적인 의미는 반대방향으로 급선회한다는 뜻

 

 

 

■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와 이성의 이질성 문제

                                                               부산대 철학과  .종식 교수,  논문 중에서 일부 발췌 

 

 

 □ 요 약

 

. 인식 영역의 구분 :  현상과 물자체

 

칸트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통해서 인식 가능한 영역과 인식 불가능한 영역을 즉 현상과 물자체의 영역을 구분한다.

 물자체는 인식 주관주의라는 입장을 천명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는 사고실험의 필연적 결과이다. 전회는 인간 이성의 무한성을 주장하는 전통적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겸허한 인정이다.

 

칸트는 전회라는 이성실험을 통해서 인식의 영역에 한계를 그음으로써 도덕과 종교 및 미학의 영역을 보호할 수 있게 된다.

만약 모든 것이 인식의 대상이 된다면, 오직 하나의 담론 영역, 즉 참과 거짓의 담론 영역만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자유의 영역은 존재할 수 없다. 사실상 논리 실증주의의 테제인 검증 가능성이라는 기준은 결국 도덕과 종교와 미학의 영역을 무의미한 영역으로 몰아내고 과학을 최고의 심급으로 인정한다.

 

칸트는 총체적 이성주의의 이와 같은 귀결을 예상한 것처럼 이미 이성의 영역 구분을 분명하게 제시했다. 이러한 칸트의 이성 능력의 상이한 영역 구분으로부터 자신의 철학적 모티브를 제공받은 이가 료따르이다. 료따르는 포스트모던적 조건 에서 각 담론 영역의 다양성과 이질성을 강조하면서 과학 담론의 최고 심급으로서의 역할을 부정한다. 과학이 근거하고 있는 메타 이론이 정당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과학도 더 이상 최고 심급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과학적 담론이 이제까지 다른 다양한 담론에 가해온 억압은 더 이상 정당화될 수 없으며 각 담론 영역의 독자성과 공약 불가능성을 인지하고 활성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료따르는 이와 같이 칸트의 이성 구분인 이론 이성, 실천 이성, 판단력의 각 담론 영역인 과학 도덕 미학은 그 자체로 다른 영역에 의해서 평가될 수 없으며 이에 대한 침해는 곧 테러 행위와 같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여기서 칸트 철학이 지닌 포스트모던적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칸트는 이성 영역들 사이의 상호 이행 가능성을 주장함으로써 여전히 근대적 이성주의에 그리고 주관적인 합목적성에 근거해서 두 영역을 연결시키고자 함으로써 주체 중심주의의 사고 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 받는다.

 

칸트가 수행한 담론(담화하고 논의함) 영역의 구분과 이질성에 대한 인정은 전체성과 획일성이 과학기술과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지배하는 오늘날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둔다.

 

 

 □ 머리말

 

. 칸트 : 물자체의 구분

 

칸트 철학에서 핵심적이면서도 논쟁이 끊이지 않는 것이 물자체(Ding an sich)개념이다. 물자체는 현상과 대비를 이루는 개념이며 물자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kopernikanische Wendung), 선험적 관념론 및 이율배반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물자체 개념은 칸트가 자연과학의 정초와 실천적 자유라는 두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서 도입할 수 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개념이다.

 

그것은 이미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는 사고실험(Gedanken experiment)을 통해서 도입될 수 밖에 없다. 전회라는 사고실험의 결과 현상과 물자체의 구분은 피할 수 없게 된다. 칸트는 이 구분을 통해 자신의 인식론적 입장을 선험적 관념론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이율배반 에서는 물자체를 소극적으로 해석하여 자유가 자연필연성과 모순되지 않음을 밝힌다. 또한 행위의 도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실천이성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인정한다. 그런데 오늘날 과학주의적 사고가 지배적인 흐름이 되면서 모든 것을 과학적 합리성이라는 기준으로 평가하고 재단하는 경향이 있다. 과학적 담론 영역만이 올바른 담론 영역이며 나머지 영역들은 잘못되거나 최소한 질 낮은 영역으로 간주한다. 다양한 담론의 영역들이 오직 참 거짓이라는 기준에 의해서 평가되며 각 영역의 자율성과 독립성은 철저히 과학에 의해 억압 당하고 있다.

 

칸트는 이런 오성적 과학주의에 대해서 분명하게 비판하고 그 한계를 긋고 있다. 그러나 후기 산업사회에서는 여전히 과학적 합리성만을 이성의 전형으로 간주하고 다른 종류의 합리성에 대해서는 예를 들면 윤리적 합리성이나 미학적 합리성에 대해서는 합리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양화 가능한 것 정보가 될 수 있는 지식을 생산하는 영역만을 중시하는 도구적 계산적 이성의 전체주의적 태도는 바로 근대적 이성이 낳은 필연적인 결과이다.

 

. 칸트 : 이성의 구분

 

그러나 칸트는 이미 다양한 이성과 그에 합당한 영역을 인정하고 있다. 칸트는 이성의 구분을 통해서 근대의 전체화와 총체화의 폐해를 극복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우리의 삶은 참 거짓의 담론 영역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정의를 둘러싼 담론의 영역, 아름다움을 둘러싼 담론의 영역 등 여러 가지 담론의 영역들이 있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에도 다양성과 이질성을 부정하고 통일성만을 지향하는 하나의 이성이라는 신화를 칸트의 사유방식을 통해서 극복할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칸트는 각 이성 영역의 분열을 조화시키기 위해서 판단력을 도입한다.

 

 

. 판단력 비판 :  자연과 자유 사이의 심연

 

판단력 비판 은 자연과 자유 사이의 심연을 메우고자 하는 시도이다. 자연은 자연인과율에 의해 지배되며 자유는 인간의 궁극적 목적이다. 자연은 오성 개념에 의해서 파악되며 자유는 이성 개념에 의해서 파악된다. 자연은 기계론에 지배되며 자유는 목적론에 지배된다. 이렇게 자연과 자유 사이에는 연속성이 아니라 단절이 존재한다. 분열된 오성과 이성의 영역의 화해가 각 영역의 이질성을 침해하거나 억압해서는 안 된다. 그런 화해는 각 영역의 독자성과 이질성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 이성 능력들 간의 이질성

 

료따르는 칸트의 이성 능력들 간의 이질성으로부터 자신의 철학적 주장을 근거 지운다. 칸트는 경험이냐 이성이냐 하는 흑백논리를 거부하고 제 3의 길인 경험과 이성의 결합을 주장한다. 칸트는 감성과 오성의 결합을 통해서만 인식을 제대로 성립될 수 있는 것이지 로크나 라이프니쯔처럼 모든 것을 감성화하거나 지성화해서는 인간의 인식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고 한다. 또한 그는 하나의 이성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론 이성과 실천 이성 판단력이라는 세가지로 나누어진다고 한다. 료따르는 이성 능력들 사이의 넘을 수 없는 간격, 각 영역들간의 고유성 각 영역들은 다른 한 영역으로 환원될 수 없는 불가 공약성을 예리하게 파악하여 자신의 철학적 근거로 삼는다. 바로 이런 점에서, 료따르는 칸트를 포스트모던의 선구자로 간주한다. 료따르는 이성의 각 영역들 사이를 연결할 수 있는 다리가 없다고 칸트 철학을 해석한다.

 

본 논문은 칸트의 이성 비판과 료따르의 이질성 철학을 연결하고자 시도한다. 이를 위해 우선 칸트 철학에서 이성 능력의 구분 근거가 되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와 그 산물인 물자체의 문제를 개괄적으로 전개하고 이에 대한 료따르의 해석을 다룰 것이다.

 

 

 

 □ 칸트의 비판 철학과 이성의 구분

 

칸트는 순수이성비판 서문에서

신앙에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지식을 제한했다고 말한다.

 이는 곧 모든 것을 과학적 지식으로 환원하기를 원했던 당시의 지적 풍토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다.

 

. 환원주의, 일원론 비판 : 도덕과 인간의 자유

 

모든 것이 하나의 원리로 환원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원리가 과학적 이성의 원리라면 세계의 모든 것은 과학적 이성으로 다 설명될 수 있다. 이런 주장은 우리의 형이상학적 요구를 충족시켜 주지만 동시에 인간에게 많은 것을 빼앗아간다. 만약 유일한 과학적인 원리가 도덕 미학 정치 문화 경제 사회 역사를 다 설명할 수 있다면, 겉으로는 다양하게 보이는 세계의 현상들이 하나의 이성적 원리로 설명될 수 있다면,

 

결국 다양한 현상들은 동일한 것이라는 주장이 가능하다. 따라서 모든 것은 사실은 하나이며 하나는 모든 것이 된다. 이는 세계의 모든 것을 하나의 원리로 설명할 때 나타나는 필연적인 귀결이다.

 

이러한 일원론은 도덕의 영역조차 과학의 원리를 통해 설명하려는 시도이며 일원론을 받아들이는 한 우리의 도덕은 사실상 성립 불가능하다. 겉으로는 도덕의 형식을 띠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자유를 부정한 도덕이란 형용 모순이다. 도덕이란 최소한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를 전제해야만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유로운 행위가 전제되지 않은 도덕이란 로봇의 도덕이나 마찬가지다.

 

. 자연과학의 한계 설정 : 자유에 근거한 도덕 영역설정

 

그렇다면 과학적 지식의 영역을 세계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할 것이 아니라 한계를 긋는다면 인식의 영역과 도덕의 영역을 동시에 정립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칸트는 생각한다. 칸트는 인간 기계론까지 주장하는 상황에서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할 수 있는 절대적 기준으로서 자유에 근거한 도덕을 주장한다. 이것은 과학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도덕을 구제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도덕만을 인정할 수도 과학만을 인정 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양자를 동시에 구제할 수 있는 길은 과학의 한계를 미리 설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과학의 독단적 지배가 문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 물자체 개념도입의 의의

 

물자체 개념은 칸트가 자연과학의 정초와 실천적 자유라는 두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서 도입할 수 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개념이다. 물자체는 이미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는 사고실험을 통해서 도입될 수 밖에 없다. 전회의 결과 현상과 물자체의 구분은 피할 수 없게 된다. 칸트는 이율배반 에서는 물자체를 소극적으로 해석하여 자유가 자연 필연성과 모순되지 않음을 밝힌다. 또한 실천이성비판 에서는 행위의 도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실천적 자유를 적극적으로 인정한다. 칸트는 이미 다양한 이성과 그에 합당한 영역을 인정하고 있다. 그는 모든 것을 인식할 수 있다는 근대적 이성의 월권을 방지하기 위해서 담론 영역들의 다양성과 그 영역들 사이의 이질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한다.

 

우리는 칸트에게서 통일성과 총체성을 지향하는 하나의 이성이라는 근대의 신화를 극복할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하고자 한다.

 

 

 □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와 사고실험

 

. 근대철학의 한계

 

칸트 당시 형이상학의 주된 흐름인 독단론과 회의론의 극단적 주장 때문에 사람들은 형이상학에 대해서 비난하거나 완전히 무관심해졌다. 철학은 언제나 암중모색(Herumtappen)만 하고 확실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 이성 만능만을 외치며 공허한 독단의 체계만을 세우는 독단론과 경험만이 인식의 원천임을 주장하는 편협한 경험론의 지루한 싸움은 아무런 결실도 없었다.

 

영국 경험론자들은 자연과학의 성공의 원인을 경험과 관찰 실험에 근거한 실증성에서 찾았다. 실증성을 진리의 기준으로 간주하는 이런 흐름은 현대 과학철학에도 여전히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많은 대중들의 상식적 과학관으로 자리잡고 있다.

 

모든 것을 검증가능성 반증가능성의 기준을 통해서, 그 의미와 진위를 평가하려는 태도는 사실상 영국 경험론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그러나 경험론의 극단인 흄(David Hume)의 회의론은 전통 형이상학은 물론 심지어 자연의 인과율까지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형이상학의 가능성과 인과율의 객관성을 믿고 있던 칸트로서는 흄의 결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흄의 비판 때문에 이제 더 이상 낚은 전통 형이상학과 라이프니쯔 볼프의 독단론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자연에 관한 형이상학의 운명에서 흄이 행한 형이상학 공격보다 더 결정적인 사건은 일찍이 없었다. 칸트는 흄의 비판을 통해서 전통 형이상학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새로운 형이상학을 탄생시킬 수 있는 결정적 전기를 마련했다.

 

. 칸트 전회의 의의

 

즉, 칸트는 흄의 비판에 충격을 받고 독단의 선잠에서 깨어나서 사변철학 분야의 연구에 전혀 다른 방향을 취하게 되었다.  칸트는 전통 형이상학을 버리고 전혀 다른 종류의 형이상학 즉 인식 형이상학과 도덕 형이상학을 세우는 것이다. 칸트는 형이상학에 대한 무관심은 오히려 형이상학을 올바로 세우고자 하는 갈망의 표현이며 비판의 길로 들어가도록 하는 전주곡이라고 한다. 이 비판은 이성능력 일반에 대한 비판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성이 모든 경험에서 독립하여 추구할 수 있는 모든 인식에 대한 비판을 의미한다

 

……

 

그는 독단론과 경험론 및 회의론을 거부하고 인식의 필연성과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새로운 인식 설명방식을 찾고자 한다. 이 과정이 사고실험이며,

사고실험을 통해서 인식의 필연성과 객관성을 잘 설명할 수 있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 사고실험의 결과를 받아들일 것이다.

만약 새 방법론을 통한 사고실험이 성공하지 못하면 이 방법론은 폐기된다.

 

철학에서 이러한 전환은 천문학에서 코페르니쿠스가 행한 사고방식의 전환과 비교되는 혁명적 사건이다. 진리에 대한 평가 기준을 대상 중심에서 인간의 주관 중심으로 사고 방식을 전환한 것이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회 이다.

 

칸트의 위대성은 사고실험을 통해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수행한 것이다. 이러한 전회는 인식에서 학문의 필수 요소인 보편성과 필연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경험적 우연적 요소를 제거하고 선천적 필연적인 요소를 획득하는 것이 순수이성비판 의 과제이다.

 

……

 

칸트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통해서 흄이 실패한 경험과학의 필연성과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다. 칸트는 기존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과 새 형이상학의 올바른 방향 설정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수행한다. 당시 형이상학의 혼란은 이성의 능력에 대한 비판 없이 이성을 무조건 신뢰하여 그 한계를 긋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 칸트 : 이성 능력의 한계를 설정

 

이성이 어느 정도까지 인식할 수 있는가를 미리 반성해야 한다. 이성 능력의 한계를 고려하지 않은 채 이념을 인식의 대상으로 간주한 것이 잘못이다. 이성의 한계를 넘어선 영역에 대한 공허한 주장을 펼쳐서는 안 된다. 영혼불멸 자유 신의 존재에 관한 형이상학적 문제는 이성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까지, 이성 추리를 진행했기 때문에 생긴다. 그런 문제들은 이성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므로 이성은 그 문제에 대답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따라서 우선 우리는 이성 능력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작업이 바로 전통적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이자 새로운 형이상학을 위한 예비단계이며 인식 형이상학이다. 이것은 소극적 측면에서 형이상학을 비판하는 것이다.

 

……

 

칸트는 대상 중심의 모사론으로는 진리의 보편성과 필연성을 확보할 수 없다고 보았다. 반면 수학 물리학은 바로 학문의 보편성과 필연성의 본보기이다. 그 학문들은 대상에 준거한 것이 아니라 우리 인식주관을 기준으로 해서 대상을 파악하는 방법을 도입했다. 형이상학에 이 학문들의 방법론을 도입하려는 실험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이다. 인식주관에 준거한 대상 인식의 방법론을 도입할 경우에 어떻게 될 것인가를 사고실험해서 만족스런 결과가 산출될 수 있었기 때문에 새 방법론을 수용한다. 대상의 직관에 관한 한 형이상학에 있어서도 우리는 코페르니쿠스와 같은 방식의 기도를 할 수 있다. 직관이 대상의 성질에 준거해야 한다면, 어떻게 해서 대상의 성질에 관한 내용을 선천적으로 알 수 있느냐 하는 것을 나는 아는 바가 없다. 그러나 감관의 객체인 대상이 인간의 직관 능력에 준거한다면 대상의 성질을 선천적으로 알 수 있음을 잘 깨달을 수 있다.

 

이런 측면이 바로 칸트 철학에 독특한 사고실험이라는 방식이다.

……

 

. 인간 중심의 인식론 : 인식 범위와 한계

 

 우리의 인식방식과 독립해서 존재하는 사물 그 자체 란 개념은 성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식은 언제나 우리의 인식형식이라는 틀을 통해서만 성립되기 때문에 이런 인식 틀이 없이는 인식이 성립될 수 없다. 우리의 인식방식에서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물자체 개념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칸트의 전회 이후로 사물 그 자체를 인식할 수 있다는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 인식은 언제나 인간의 인식이며 인간의 특정한 인식형식을 통해서만 성립되기 때문이다. 이제 인간의 인식능력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동적 역할이 아니라 감성의 형식과 오성의 범주를 통해 대상을 구성하는 자발적 능동적 활동을 한다. 이런 감성과 오성의 형식이 없다면 인식은 성립할 수 없다.

……

이러한 인간 중심의 인식론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의 필연적 산물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감성과 오성의 형식이라는 인식의 보편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런 구조 때문에 인식의 보편성과 필연성을 확보할 수 있다.

……

인간의 인식능력의 범위와 한계를 제대로 설정했더라면 원리적으로 인식할 수 없는 영역을 인식 하고자 하는 헛된 망상을 품지 않았을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는 사고실험을 통해서 현상과 물자체가 필연적으로 구분되며 물자체 영역을 인식하고자 하는 월권행위에 대한 경고할 수 있게 된다.

 

 

 

 □ 물자체 개념과 이성 영역의 구분

 

. 자연 인과율 : 인간 인식의 한계

 

이제 모든 현상은 자연인과율의 지배를 받게 되고 자연인과율을 벗어난 현상이란 불가능하게 된다. 자연 현상은 오직 인과율을 통해서만 인식된다. 모든 현상에 대한 인식은 인과율 범주의 규정을 벗어날 수 없다.

 

인과율은 자연현상을 인식하기 위해서 필수적이지만 인간 인식의 한계를 넘어선 영역에 대해서는 인과율을 적용할 수 없기에 인간의 형이상학적 욕구를 제한한다. 또한 현상 중의 인간 행위도 인과율을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은 행위에서도 자유를 기대할 수 없고 인간의 윤리는 헛된 망상에 불과하게 된다.

 

그러나 칸트는 자연은 인과성에 의해서 규정되지만 자유는 자연인과 성에 의해서 규정될 수 없다고 말한다. 전통 형이상학은 자연과 자유의 영역을 동일한 영역으로 오해하여 동일한 방식으로 다룬다. 인간 이성의 무한성과 절대성에 대한 신뢰 때문에 이성의 한계를 규정할 수 없었다. 따라서 물자체 영역을 부정하고 세계에 대한 완전한 인식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인간 이성의 절대적 능력을 믿는 근대의 계몽적 사고이다. 그러나 칸트는 인간 이성의 유한성과 한계를 선언한다. 인간에게 감성적 직관에 주어지는 대상에 대해서만 우리는 인식을 할 수 있을 뿐 감성적 직관에 주어지지 않은, 대상에 대해서는 원리적으로 전혀 인식할 수 없다는 선언을 한다.

 

이런 선언은 바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의 또 다른 측면이다. 인간 이성의 유한성에 대한 인정은 필연적으로 물자체의 영역을 남긴다.

 

. 물자체 영역 : 인간 이성의 유한성 인정

 

칸트의 출발점은 인간 이성의 절대성에 반대하는 이성의 유한성이며 이 유한성이 인간에게 지식 자유와 신앙의 영역을 확보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칸트는 인간의 자유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인식의 한계를 긋는다. 즉 신앙에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지식을 제한한다. 칸트는 과학적 인식의 영역인 현상과 과학적 인식의 한계를 넘어선 영역인 물자체를 분명하게 구분한다. 과학적 인식이 물자체 영역에까지 확장되면 필연적으로 선험적 가상이 생긴다. 이론 이성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영역 안에서만 인식활동을 수행해야 하며 그 영역 안에서 인식 합리성을 확립해야 한다. 그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끊임없는 이성의 본성을 늘 통제해야 한다. 물자체 개념은 구성적으로 사용해서는 안되고 통제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칸트는 이율배반에서 정립과 반정립의 대립을 통해서 인과율과 자유의 양립가능성을 논리적으로 모순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물론 선험적 자유의 가능성이 모순이 아니지만 동시에 자유의 현실성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 논리적 모순이 아님을 주장한다.

 

. 인간행위 고찰 :  자연현상과 물자체

 

여기에서 칸트는 인간의 행위를 현상과 물자체라는 이중적 관점에서 고찰한다. 자연 현상은 자연인과성에 종속된다. 반면 인간 행위는 현상의 측면과 물자체 측면에서 고찰될 수 있다. 즉 인간의 행위는 자연인과성에 규정되는 측면과 자연인과성으로 규정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인간은 한편으로는 현상계에 다른 한편으로는 가상계에 속한다. 인간은 이중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연법칙의 규정을 받으면서도 자연법칙에서 독립하여 행위 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져 있다. 현상계에서 인간 행위는 자연인과성의 규정을 벗어날 수 없다. 이 때 인간의 행위는 사물과 다르게 취급되지 않고 인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가상계에 속하는 인간의 행위는 자연인과성으로 규정할 수 없다. 가상계는 오성의 범주가 적용될 수 없는 영역이며 오성의 인식 한계를 넘어선 영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행위를 어떤 측면에서 고찰하는가에 따라서 자연인과율에 규정되는가 자연인과율을 벗어난 어떤 것에 의해서 규정되는가 하는 영역 구분을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

 

만약 사람들이 죽음의 위협 앞에서 죄 없는 의인에 대한 거짓 증언을 하면 살려주겠다는 제안을 받는다면, 그래서 그런 증언은 하고 풀려났다고 하면, 사람들은 그 사람의 불가피한 상황을 충분히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 자신 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거짓 증언 행위에 대해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하고 부끄러워 할 수 있다. 또한 성장 배경이나 주위 환경 낮은 교육 나쁜 친구들과의 교제 때문에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려고 악의에 찬 거짓말을 한 사람에 대해서 우리는 그 행위를 충분히 인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람의 행위를 비난한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도 거짓말을 했다고 비난할 수 있다. 그 근거는 무엇일까 우리는 실제로 행해진 것에 대해서 다르게 행해질 수도 있었다는 이유를 제시한다. 즉 실제로 행해진 것과는 다른 행위가 가능하다는 것은 자연 현상에서는 불가능하다. 모든 것이 자연인과율에 의해서 규정되기 때문에 실제로 일어난 것과는 다른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이 자연인과율이 의미하는 바이다. 그럼에도 실제로 일어난 행위와는 다른 행위가 가능하며 실제와는 다른 행위를 수행해야만 했다고 비난하는 것은 최소한 인간이 스스로 다르게 행위 할 수 있는 능력 즉 자유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자연인과율에 따라 발생한 사건을 비난하는 것처럼 무의미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바로 자유의 능력을 가진 인간 행위의 가상적 측면이 도덕을 위해서는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 인간은 이중적 존재 : 자연과 자유가 만나는 곳

 

결국 자연과 자유가 만나는 곳이 인간이며 인간의 행위이다.

이런 측면에서 인간은 이중적 존재이다.

 

자연 인과율에 의해서 규정되면서도 자연 인과율의 규정을 자발적으로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갖추어져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의 자유는 자연 인과성으로부터 구제될 수 없을 것이며 인간 존재는 자연 인과율에 의해서 규정되는 하나의 로봇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겉으로는 자유로운 행위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행위 모두가 자연 인과성에 의해서 결정되고 마는 존재로 남게 된다. 이 경우 인간의 자유와 도덕은 단지 자연 인과성에 의해서 이미 결정된 인간 행위를 다만 자유니 도덕이니 하고 부르는 공허한 이름에 불과하게 된다. 자유나 도덕이 불가능 한데도 마치 자유와 도덕이 인간에게 가능한 것처럼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런 측면에서 자유를 구제할 수 없다면 자연에서 인간의 특권적 지위는 사라지며 인간과 동물의 차이도 사라진다. 자유야말로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시켜 주는 본질적 차이이기 때문이다. 칸트는 인간의 자유를 구제하기 위해서 물자체 영역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게 된다. 전통 형이상학의 잘못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는 동일한 대상을 한편으로는 감관과 오성의 대상으로 고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고의 대상으로, 즉, 경험의 한계를 넘으려고 애쓰는 이성의 대상으로 고찰해야 한다.

 

. 인간 이성의 이중성과 인식능력 한계설정

 

이처럼 이중적 입장에서 볼 때 사물과 순수이성의 원리가 일치한다. 반면 일원적 입장에서 볼 때는 이성의 자가당착이 생긴다. 따라서 이원적 입장이 정당하다.

 

즉, 선천적인 이성의 인식은 현상에만 관계하고 물자체에는 관계할 수 없다.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형이상학의 본질적 관심은 이성의 인식능력을 넘어선 것이다. 이런 한계를 긋는 것이 바로 형이상학 고유의 영역을 확보해 준다. 한계를 규정하는 것이 형이상학의 영역을 좁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형이상학의 영역을 제대로 확보하는 것이다. 형이상학의 본질은 우리로 하여금 필연적으로 모든 현상의 한계를 넘어서도록 만드는 무제약자에 관한 탐구이다.

 

이성은 제약자의 계열의 완결을 추구하지만 그것은 현상에서는 얻어질 수 없고 물자체에서 구할 수 밖에 없다. 물자체는 인식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생각할 수는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현상을 가능하도록 하는 근거인 물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데도 그 결과인 현상은 존재한다는 불합리한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을 현상과 물자체의 영역으로 구분하지 않으면 자유의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지만, 구분하면 자유의지의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에 칸트는 인간학적 전회를 하게 된다.

 

즉, 인간의 유한성을 전제하고 논의를 전개하는 것이다. 인과성의 원칙은 오직 경험의 대상인 한의 사물, 즉 현상에만 적용되고 물자체는 인과성의 원칙에 종속해 있지 않다면, 동일한 의지가 현상에서는 자연법칙에 종속되고 이럴 경우 자유가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 물자체 그것에 속하는 것은 자연법칙에 종속해 있지 않고 따라서 자유이다.  이런 생각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

 

. 한계설정 이성실험의 결과

 

자유의지라는 도덕현상에 있어서의 모순을 현상과 물자체의 구분을 통하여 정합적으로 해결하고, 또 영혼, 불멸과 신이라는 무제약자의 문제 등 형이상학적 난제들을 이성 실험을 통해 해결하여 형이상학의 안전한 길을 발견한다. 칸트는 이러한 방식으로 독단과 무관심으로 얼룩진 형이상학을 새롭게 수립하고자 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칸트는 과학철학자로서의 임무와 도덕철학자로서의 임무를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인식의 영역과 도덕의 영역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에 두 영역의 문제 해결을 동일한 차원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수행된다면 실천이성비판 은 불필요하다. 인식할 수 있는 영역과 인식할 수 없는 영역의 한계를 긋지 않은 것이 전통적 형이상학의 범주 착오였다. 칸트는 인식과 요청이라는 개념을 통해 두 영역의 차이를 밝힌다. 한 대상을 직관과 오성의 대상으로서의 현상의 영역과 경험의 영역을 넘어서서 단지 생각할 수만 있는 물자체의 영역으로 구분하면 인식과 도덕이 둘 다 구제될 수 있다. 즉 동일한 대상을 현상과 물자체의 영역으로 나눈다. 하나의 입장만 인정하면 경험의 한계와 그 한계 바깥에 대해 이성이 동시에 모순된 주장을 하는 것이 되지만 두 입장을 인정하면 경험의 한계 내에서의 인식 영역과 경험의 한계 밖의 사유 영역은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 따라서 이성실험은 대상들의 두가지 구별이 정당했음을 결정할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자유의지의 문제는 해결된다.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 있는 초월적 영역의 세계는 새로운 형이상학의 방법론을 통해서 새로운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칸트 철학의 체계상 물자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식 형식에 들어오지 않는 그 무엇의 정체에 대해서 우리는 늘 문제로 삼기 때문이다. 만약 물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인식이란 곧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우리의 감각기관으로 또는 이성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주장이 된다.

 

그러나 경험론과 독단론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 칸트는 인식이란 단지 표상에 대한 인식으로 간주한다. 표상 너머의 사물 그 자체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인식할 수는 없다. 이것은 단순히 형이상학적 실재론이 아니다. 형이상학적 실재론은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우리의 인식 능력 너머에 있는 존재를 가정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 수가 없다고 한다. 인식 능력을 넘어서 있는 대상은 더 이상 인식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대상에 대한 언급은 신적인 관점을 전제하며 칸트는 이런 관점을 부정한다.

 

. 칸트의 인식론 : 감성과 이성의 이원론적 입장

 

칸트는 또한 대상에 대한 감각적 인식과 이성적 인식 중 한 가지만 인정하는 관점도 부정한다. 경험론이나 독단론은 인식의 문제를 감각 또는 이성이라는 오직 한 가지 능력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다른 한 가지 능력을 무시한다. 그러나 칸트는 인식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감성과 이성이라는 두 가지 능력이 모두 필요하다고 한다. 칸트는 인식기능의 일원론에서 이원론으로 이행한다. 우리는 경험을 넘어선 영역 인식의 한계 바깥의 영역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할 수 없다. 물자체 개념은 경험의 가능한 한계를 설정하는 한계 개념일 따름이다. 순수이성비판 에서는 물자체를 인식할 수 없지만 실천이성비판에서는 물자체를 영혼불멸 자유 신으로서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은 칸트철학에 대한 오해이다. 물자체는 인식의 한계를 넘어선 영역이기에 결코 인식될 수 없다. 다만 물자체의 영역을 실천적으로 요청할 뿐이다.

 

칸트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수행하여

첫째 부문의 형이상학 즉 선험적 분석론에 대해서 학의 안전한 길을 약속하고 있다.

둘째 부문의 형이상학 즉 선험적 변증론에서는 선험적 분석론의 결과에 입각해 볼 때 인식하는 선천적 능력인 오성은 가능한 경험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

 

오성의 인식은 현상에만 상관하고 물자체 그것을 확실히 그것만으로 실재시키기는 하되, 우리에게는 인식되지는 않을 것으로 실재시킨다고 하는 것이 선천적인 이성인식이 내린 평가이다. 이론이성은 물자체를 인식할 수는 없고 오직 물자체가 있다고 생각할 수만 있다. 그 이상으로 물자체에 관해서 알 수 없다. 인식할 수 없는 물자체가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만 우리에게 알려질 뿐이다.

 

순수이성비판 은 사변이성이 가능한 경험의 한계를 넘지 않도록 경고하는 소극적인 효용을 가진다. 즉 사변이성에 제한을 가하는 한에서는 소극적이다.

그러나 이성의 실천적 사용을 제한할 수는 없다.

 

……

 

형이상학의 독단론 즉 순수이성의 비판 없이 형이상학에서 성공을 거두려 하는 편견은 도덕성에 대립되는 모든 불신의 진정한 원천이다. 도덕과 대립되는 이런 불신은 전적으로 독단적이다. 인식의 영역과 도덕의 영역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두 영역은 바로 동일한 차원에서 해결될 수 없다. 인식과 요청이라는 말로써 칸트는 그 차이를 밝히고 있다. 인식은 이론적 학문이고 도덕과 종교는 실천적 요구에 의해서 성립하는 학문이다.

 

. 칸트 : 이성의 이론적 측면과 실천적 측면

 

칸트는 실천이성비판 머리말에서

하나님, 영혼(Vorrede)불멸이라는 이념은 순수 이성의 실천적 사용을 위한 조건들이며, 두 이념은 도덕적 의지를 최고선에 적용하기 위한 조건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이념의 가능성을 실천적인 관점에서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 영혼불멸의 이념은 자유 개념을 매개로 해서 객관적 실재성이 주어진다. 즉 이론이성의 영역에서는 자유, 하나님, 영혼불멸의 단지 가능성으로서 주어져 있었지만, 이성의 실천적 사용에서는 그 이념들이 현실성이 주어질 수 있다.

 

따라서 이성의 실천적 사용이 이성의 이론적 사용의 요소들과 조화하게 된다. 이런 점을 순수이성비판 에서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이성의 이론적 측면과 이성의 실천적 측면의 역할이 확연하게 구분된다는 점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비록 실천이성의 우위를 주장하지만 그것은 이론 이성의 측면을 분명히 인정한 후의 일이며, 이론 이성의 역할을 부정하는 곳에서는 실천이성은 존재 할 수 없다. 우주론적 이념의 정립에서는 실천적 관심이 나타나며 이는 도덕과 종교의 초석이 된다. 반면 반정립은 이성의 실천적 관심이 없으며 도덕과 종교의 영향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경험론자는 결코 원인을 자연의 외부에서 추구하고자 하지 않기에 자연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른다. 이성이 경험적 탐구를 선험적 이념과 결합시키지만, 이 이념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면, 이런 측면에서 경험론자들의 원칙은 정당한 것이다. 이 경우에는 실천적 관심을 위한 이러한 지성적 전제와 신앙(intellektuelle Voraussetzung und Glaube)은 즉 이념은 여전히 우리에게 보존될 수 있다. 단지 이런 이념을 과학의 이름으로 사용할 수 없을 뿐이다. 그러나 경험론이 이성의 영역 너머에 있는 이념에 관해서 대담하게 부정한다면 경험론은 월권과 불손함의 오류를 범한 것이며 경험론은 이념에 관해서 독단적으로 된다. 이런 오류는 이성의 실천적 관심을 부정하는 것이므로 비난 받아 마땅하다. 인식할 수는 없지만 실천적으로 요청되는 영역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유의지에 의한 영혼불멸과 신에 대한 존재요청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지식의 영역과 실천 또는 신앙의 영역을 명확히 구별할 필요가 있다.

 

나는 신앙에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지식을 제한했다는 이 말은 칸트의 윤리 이론을 가능하게 하는 표어이다. 이 문장은 이율배반을 수반하는 독단론을 채택함이 없이도 제 2의 이율배반의 합리주의적 정립을 그가 수용할 수 있게끔 했기 때문이다. 이율배반의 정립은 자유의 인과성이 있다는 것이고 반정립은 자연의 인과성만이 있다는 것이다. 이 논쟁을 올바로 해결하지 않았다면 자유의 인과성이 구제되지 않았을 것이며 물리학의 충족 이유율이 형이상학에 침투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칸트는 말한다.

 

. 칸트 : 형이상학의 구분

 

형이상학과 물리학을 예리하게 구분하는 이론이 수립되지 않으면 형이상학은 물리학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형이상학적 인과율은 기계론적 인과율일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경험론과 합리론이 일치하고 있는 공리를 찾아내어 거부함으로써 경험론과 합리론의 연합, 즉 오직 하나의 인식 원천만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깨뜨릴 수 있었다.

 

칸트는 형이상학을 순수이성의 사변적 사용의 형이상학과, 실천적 사용의 형이상학으로 나눈다. 즉 자연의 형이상학과 도덕의 형이상학으로 나눈다.

 

전자는 만물의 이론적 인식에 관한 이성의 모든 순수한 원리를 포함한다. 후자는 행위를 선천적으로 규정하고 필연화하는 원리를 포함한다. 그런데 도덕성이란 전혀 선천적으로 원리에서 도출시킬 수 있는 행위의 유일한 합법칙성이 다사변적 이성의 형이상학은 협의의 형이상학이다. 존재하는 한의 모든 것을 선천적인 개념으로부터 고찰하는 것이 자연 형이상학이다. 칸트는 비판의 과정을 통해서 형이상학이 종교의 기초일 수는 없지만, 항상 종교를 방어하는 보호벽으로 존속해야 한다 고 하면서 인간(Schutzwehr) 이성은 그 본성상 변증적이기 때문에 형이상학을 결여할 수 없다고 본다. 형이상학은 인간의 이성을 제어하고 형이상학이 없을 경우에는 생길 수 있는 무법칙의 사변이성이 도덕과 종교에서 반드시 일으키는 황폐를 막는다고 한다.

 

 그는 신앙에 자리를 주기 위해 인식을 제한한다, 종교를 방어 보호하기 위해서 형이상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종교는 자신의 올바른 자리를 찾지 못하고 인식과 종교의 혼동, 종교에 대한 이론적 증명 등으로 혼란이 생긴다. 이것을 막기 위해서 형이상학과 종교의 구분이 형이상학의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연과 도덕 종교의 영역을 구분하는 것만이 서로를 침범하는 월권을 막을 수 있다. 이런 귀결을 위해 칸트는 자신의 논증을 이미 이율배반과 이율배반에서 제시했다. 이에 자연의 형이상학, 도덕의 형이상학, 또 이것들에 예비적으로 선행하는 비판, 즉 자기 자신의 날개로 날기를 모험하는 이성의 비판만이,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형성한다.

 

결론적으로 칸트는 경험론과 합리론의 양쪽이 결국 환원주의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두 가지 주장이 가지고 있는 공통원리인 한 가지 인식 능력 이라는 것을 비판한다. 그는 경험론과 합리론의 주장의 근거인 한 가지 인식 능력이라는 생각을 붕괴시키기 위하여 두 가지 인식 능력 이론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런 자신의 이론이 증명되면 당연히 그 두 이론은 거짓이라는 것이 드러난다고 생각했다.

 

……

 

그는 경험론과 합리론을 극복하고 제 3의 길인 반환원주의를 제시한다. 그것이 비판주의이다. 칸트는 감성과 이성을 구분하고 이성을 오성 이성 판단력으로 세분한다. 판단력을 규정적 판단력과 반성적 판단력으로 구분하여 미학의 기초를 확보한다. 이렇게 우리의 인식 능력에 대한 고찰을 통해서, 각 학문 영역의 존재 근거를 밝힌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잘못된 인식 일원주의를 붕괴시키고, 새로운 학문영역들의 근거, 즉, 도덕 형이상학과 미학의 근거를 제시한다. 칸트의 학문영역의 구분에서 차이와 이질성을 주목한 철학자가 료따르이다.

 

 

 □ 칸트 미학에 대한 료따르의 해석

 

……

 

 

 

■ 철학개론 요약

 

정.진일 「철학개론」요약”, 이.은옥 글 중에서

 

□ 인도철학

 

 

브라흐만 사상

 

. 베다(Veda)

. 삼명(리그베다, 사마베다, 야주르베다) + 아타르바베다

. 브라흐마나, 아라냐카, 우파니샤드(베단타)

 

 

.”브라흐마나”- 제식만능주의, 베다 천계주의, 브라흐만 지상주의

. 초창기 최고신, 삼계(하늘,,공간)와 그를 지배하는 태양신, 불신, 바람신을 만들고 카스트제도를 만듦

. 최고신, 영원히 불변, 부동, 이것이 운동함으로써 만물을 생성

. 인의 중심 생명, 생명의 근원이며 모든 활동의 중심체

 

 

. 아트만이 브라흐만과 융합 - 우파니샤드의범아일여세계관과 인생관에 기초가 됨

. “아라냐카”- 5원소 설 (, , , 공기, 허공)

. 우피니샤드에 이르는 중간적인 것

. “우파니샤드” -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

 

 

. 초월하여 영원불멸의 아트만(大我)에 살려고 하는 것

업의 울타리를 벗어나기 위해서 모든 욕망을 털어버리고 윤회전생의 고통으로부터 해탈해야 함

 

 

 

반 브라흐만 – “노력하는 사람”, 62종 중 유력한 지도자육사외도

 

. 푸라나 - 선악은 사회적 관습에 의한 일시적인 것, 인과응보 ×

. 파쿠다 - 개체는 4원소(, , , 공기)와 괴로움(), 즐거움(), 생명으로 이루어져 있음,

사람을 죽인다 하여도 7요소 사이를 지나는 것일 뿐 죽이는 이도 죽는 이도 없다.

. 마칼리 - 12원소 설(영혼, , , , 공기, 허공, 본성, 실체, 괴로움, 즐거움, , 죽음),

모든 생물은 오직 운명과 환경과 천성에 의해 변하는 것일 뿐, 숙명론, 무인론

. 아지타 - 4원소(, , , 공기)가 허공에 독립적 상주, 죽음은 소멸일 뿐 현세와 내세 및 선악도 없다.

. 산자야 - 불가지론, 판단 중지, 명확한 판단이나 지식은 고집일 뿐 고집은 해탈에 방해가 됨

. 니간타 - 자이나교의 창시자, 카스트제도 반대,

상대주의(≠석가의 중도설), 고행주의(≠고행부정), 요소실재설(≠무아설)

 

 

 

육파철학

 

 

. 상키야 - 카필라 창시, 판차쉬카 체계화, 순수정신 푸르샤와 물질적 근본원질인 푸라크르티를 상정,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법(dharma)을 행해야 하며, 밖에 있는 물질적 욕심을 버리고

안에 있는 푸르샤를 순수 청정하게 해야 한다.

. 요 가 - 파탄잘리 창시, 한적한 곳에서 욕망을 억제하고 정신을 집중하는 요가를 통하여 세계의 지배자

인 최고신과 합일하여 황홀한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음

. 미맘사 - 자이미니 개조, 언어는 단지 음성에 불과한 것이 아닌 실재하는 것으로서 상주하는 것,

그러나 진정한 지식은 베다 속에만 있다. “베다에 절대 복종할 것을 강조

. 베단타 - 바다라야나 창시, “우파니샤드를 연구 실행하는 학파, 5원소가 만물을 이룸, 개별적 아트만은

      브라흐만에서 비롯된것으로 윤회하고 있음, 해탈하기 위한 것이 인생의 목적으로 요가를 통해 이루어짐

 

. 바이세시카 - 카나다 창시, 6개 원리가 결합 혹은 분리로 만유가 성립됨, 언어는 단지 인간의 약속이나

습관일 뿐(≠미맘사), 지식은 경험적인 것으로 베다는 상대적으로 이긴 것에 지나지 않음

. 니냐야 - 고타마 창시, 상주불멸하는 원소들이 결합하여 세계를 형성, 괴로움은 무지에서 오는 것,

따라서 무지로부터 벗어나면 고뇌로부터 해탈하며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됨, 이러한 경지는

계율준수, 요가수행으로 얻어짐

 

- 삼대학파 : 상키아, 요가, 베단타

- 힌두교 : 브라흐만을 정상으로 하는 카스트제도, 영혼불멸, 세계의 순환(창조, 존속, 파괴),

      실천적 요가 및 종교적 행위를 중요시, 기본적으로 브라흐마(창조신), 비슈누(유지신), 시바(파괴신)

      숭배하지만 다른 모든 신도 존경한다.

 

 

 

불교

 

석가에 의해 창시된 불교는 BC 3세기 마우리 왕조의 아소카 왕의 보호 하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다. 이후 보수적인 상좌부와 진보적인 대중부로 분열되고 나중에는 20여 부파로 분열되었다. 전자에서 가장 유력한 설일체유부는 소승불교로 이어지며 후에 이를 배척하는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났다.

 

용수, 미륵, 무착, 세친, 마명 등이 그 주요 인물들이다. 그 중에서도 용수의 중관파와 세친의 유식파가 대승불교의 2대 학파로 발전하였다.

 

 

석가

 

. 사법인 삼법인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 + 열반적정

 

. 제행(끊임없이 변화하는 정신적 물질적 모든 현상)과 무상(상주하는 것은 없다)은 모든 사물은 인연에

의해 일시적 현상을 가지나 부단히 변화하면서 소멸해 간다는 것이다.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

 

. 제법(원래 진리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정신적 물질적 현상을 의미)과 무아(항구불변의 실체는 없다)

시간적으로 볼 때 무상한 것과 같이 공간적으로 볼 때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완전한 무는 아니므로참다운 공은 묘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 현실세계의 모든것이 고통이라는 것, 인간이 원래 공한 것임을 철저히 깨달아 아의 집착을 없애야 한다.

 

 . 열반은 니르바나(불어서 끈다)를 음역한 것으로,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불길이 사라져 버린 상태 즉, 고

()가 소멸된 상태를 말한다. 2가지의 열반(오온 1) 을 그대로 지닌 채로 경험하는 불완전한 열반과

오온이 해체된 뒤에 이르는 완전한 열반)이 있다. 적정(고요한 마음의 상태)은 열반과 같은 의미이다.

열반적정의 상태에 이른 사람을 아라한 혹은 부처라 한다.

 

. 연기론 - 연기란 모든 현상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 생겨난다는 말로 모든 존재는 서로 상관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만물은 인과 연의 상호관계에 의해 끊임없이 생멸하므로 영구불변의 독자적 본성(自性)을 가진 존재는 없다. 12 연기설(무명-의지-의식-심신-여섯 가지 기관-접촉-감각-욕망-집착-존재-출생-괴로움) 즉 앞의 원인이 뒤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으로 결국인생의 고통의 원인을 밝힌 것이다.

 

. 사성제 - 사성이란 인생의 괴로움의 원인인 고집멸도(苦集滅道)이며 이것을 벗어나기 위한 중도의 길 팔정도를 제시한다. , , 정 곧 삼학을 닦아나가면 열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 교단과 윤리 - 사부중(비구/비구니, 우파새/우파리), 탁발걸식, 남자는 5(살생, 도둑질, 음행, 거짓말, ) 여자는 8, 인간은 모두 평등(세속의 신분계급이나 남녀의 차별을 인정하지 않음), 교단 서열은 출가 후의 수행 연수에 따른다.

 

. 불국정토(극락정토) - 자기 해탈을 넘어서 종국적 목적은 세속세계를 청정한 부처의 나라로 만드는 것, “마음이 청정하여 육신에 대한 티끌만큼의 집착이나 헛된 현상에 대한 걸림이 없다면 가는 곳마다 불국정토로 현세를 떠나 따로 있지 않으며 이에 도달하기 위해선 공()을 실천해야 한다. (성불, 견성)

 

 

 

용수

 

. 진공묘유 - 연기설에 따라 고정불변의 존재는 없다. 참다운 존재인 공이란 중도의 묘한 존재 곧 진공묘유이다.

 

. 팔불설 - 불생불멸(不生不滅), 불상불단(不常不斷), 불일불이(不一不異), 불래불거(不來不去) 즉 모든 존재의 실상은 일체의 상대적 인식관념을 초월하고 이것을 부정하는 곳에 나타난다. 팔불 곧 중도의 인식에 의하여 드러난다는 것이다.

 

. 진제와 속제 - 두 진리 관계에 의해 현상을 관찰하는 중도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다. “모든 만물의 본성이 공인 것을 인식하는 것이 참다운 진리다. 그러나 세속의 진리를 떠나서는 참다운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일상적인 관념들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교설이기에 참다운 진리를 깨닫기 이전까진 세속의 진리를 방편으로 삼아야 한다. 또한 참다운 진리를 깨닫고 난 후에도 설명과 교화를 위해서 세속 진리가 필요하다. 중도의 입장에서 보면 참다운 진리가 곧 세속의 진리이며 세속의 진리가 곧 참다운 진리이다. 따라서열반과 세간은 분별이 없다

 

 

 

 

세친

 

. 유식무경설 - 무친의 팔식설을 계승하여 체계화 하였다. 육근(여섯 가지 감각기관), 육경(육근의 인식대상), 육식(감각 기관에 의해 대상을 인식함으로써 얻게 된 의식)으로 18계를 들었다. 육식에 말라식(=사량식, 생각하고 헤아리는 의식)과 아뢰야식(=근본식=종자식=장식=이숙식=과보식, 잠재의식)을 더하여 팔식을 제시한다. 야뢰야식은 윤회의 주체이며 현상세계의 근원으로써 석가가 부정했던 영적인 자아를 인정한 것이다. 객관적 존재는 마음에 나타난 표상으로 존재하는 것은 오직 우리의 의식, 마음뿐이다. 실재하는 대상이 없는데 대상에 대한 관념이 일어나는 것이다.(주관적 관념론)

 

. 삼자성설 - 사물을 바라보는 3가지 각도, 1단계 변계소집성(감각으로 지각한 현상을 독자적 본성을 가진 객관적 실재로 망상하여 거기에 집착하는 것), 2단계 의타기성(모든 현상은 인연에 의하여 생긴다는 것을 아는 것), 3단계 원성실성(주관과 객관의 분별과 대립을 초월한 참다운 존재, 곧 진여 그 자체를 보는 것)으로 구별하였다. 모든 현상은 본성이 없이 공한 것이기 때문에 글이나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것이 삼무자성이며, 삼자성설은 모든 현상을 긍정적인 면에서 있다는 것을 밝힌 것이고, 삼무자성설은 부정적인 면에서 없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중국철학

 

 

인도철학이 내세적이고 종교적 색채가 강한 데 반해 중국철학은 현실적이고 윤리적 경향을 강하게 띠고 있다.

 

기원전 6세기 이후, 춘추전국시대에는 제자백가가 출현하여 황금기를 이루어 진시황의 분서갱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후 한나라에서는 유가가, 불교가 수입된 후 수.당 때는 불교도 번창하였다. 송 대에는 리()를 중심으로 한 리학이 후에는 주희에 반대하는 심학이 명나라 말엽까지 성행하였다. 명이 망하고 청 때에는 실사구시의 실학이 일어났으며 이것은 기()를 중요시하였다. 청의 멸망 후 신문화운동과 더불어 마르크스주의가 전통사상을 압도하였다.

 

 

. 선진철학

. 사마담의 제자백가 분류 중 육가 : 음양가, 유가, 묵가, 명가, 법가, 도가 (사마천 사기에 기록)

. 유흠의 칠략에선 종횡가, 잡가, 농가, 소설가를 추가하여 십가로 분류

 

. 유가 - 공교, 공자교, 공학, 공맹철학

. 공자 - 모든 덕의 총칭으로써의 인() 중시

극기와 복례가 필요하다.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면 인에 이를 수 있다.’

군자는 누구나 노력하면 이룰 수 있다.

덕목 : 효제, 충서,

 

. 맹자 - 외면적 실천원리로써 의() 중시

하늘

측은지심(), 수은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 4단서

선을 알고 행하는 능력 양지와 양능을 가지고 있다.

본래의 마음을 보존하여(存心) 선한 본성을 따르면 누구나 성인(군자)이 될 수 있다.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러야 한다.

4(인의예지), 오륜(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

 

. 순자 - 마땅히 지켜야 할 법도의 근본으로써 예() 중시

사람의 본성은 악하며 그것이 선하게 된 것은 인위에 의해서이다.

본성은 악하지만 개조해 나가며 덕을 쌓으면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

예는 이성에 호소하여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법도로, 음악은 감정에 호소하여 서로 화합하게

한다.(기우제도 단지 예로서 마음의 꾸밈을 위한 것이다)

 

. 도가 - 노장철학, 황노학

. 노자 - 우주 본체로서의 도()

비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우주 안에 가득 차 있는 존재로서 만물의 근원,

스스로 영원히 움직이고 변화하면서 존재한다.

도는 마음을 통해서 즉 직관을 통해서만 인식 가능, 마음을 비우고 정관함으로써만 가능하다.

부정 : 언어, 일상적 지식, 인의(仁義)와 예(), () 모두를 부정하였다.

인간의 덕 곧 본래의 바탕은 순박하다. 무극과 질박함으로의 복귀 이것은 곧 도와 하나가 되는

경지이다.

실천한다는 것은 마음을 비우고 욕망을 버려 무위 자연을 실천하는 것이다.

무위의 덕이란 사사로움과 욕망을 적게 하는 것, 자애로움과 겸허함 즉 겸허의 덕,

부드럽고 연약함의 덕, 다투지 않음의 덕이다.

 

. 장자

형체가 없으므로 감각으론 인식할 수 없으나 모든 만물 속에 존재하므로 없는 곳이 없다.

도는 심재(마음을 비움) 좌망(고스란히 잊음)을 통해서만 인식할 수 있다.

(통발로서의 언어-도구적 언어), 일상적 지식의 부정

가치 : 도추(지도리-도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것)와 양행(양편-시비를 초월한 물아일체의 경지

에 이르는 것)의 관점에서 본 지혜가 참다운 지혜이다. “이것 역시 저것이고, 저것 역시 이것

이다만물은 하나이며 평등하다.

 

인간이 존재하는 것도 자연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아감 : 전성사상(全性思想-본성을 온전히 하는 것), 안명론(安命論-명에 따라 사는 것) 등 주장

지극한 즐거움의 경지인 소요유를 강조, 이것은 어떤 것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로운 삶이다. 심재

와 좌망을 통한 소요유의 경지 즉 세속을 초월하여 우주 대 자연 속에서 자유자재로 왕래하

는 경지로 자연의 즐거움(天樂)이다.

 

 

 

한당철학

 

. 한대의 경학

유방의 한나라(BC 206, 전한) AD 8년에 망하고, 유수가 재건한 후한(AD 25) 220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시기에 유교경전에 대한 연구가 활발했다. 공자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유교는 한나라의 통치이념이었다. 「시경」「서경」「춘추」를 연구하며 크게 발전한 유교를 노학이라 한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인해 학자들의 기억에 의존하여 예서로 경전을 기록하였는데 이들의 경학을 금문학이라 한다.

 

. 왕충

. 주의 본체인 원기를 상정 땅의 기가 위로 올라가고, 하늘의 기가 아래로 내려와서 중간에서 만물이

   저절로 생겨난다.

. 그는 사실을 과장하거나 확대하는 풍토를 지적하며 유교 특히 공자를 비판하였다. 우리의 앎은 감각이 사물과 접촉함으로써 비롯된다. 그러나 반드시 마음의 사유를 통해서 검토되어야 하므로 마음을

    통한 전정(詮訂, 이해 비교검토)이 필요하다.

. 사람의 성에는 선천적으로 상중하의 3가지 품급이 있다. 중인의 성을 가진 사람은 교화가 가능하다.

 

. 위진남북조의 현학

 

경학이 쇠퇴하고 청담(학문의 방법)이 유행한 시기이다. 유교의 형식주의를 반대하고 자연을 존중하는 노장의 입장을 취하며 「주역」을 참고하였으므로 삼현학 혹은 현학이라고 하였다.

 

초기 현론파인 하안과 왕필은 같은 자연주의 입장에서 유학자들을 반대하였으며 하안은 성인의 희노애락을 없다고 한 반면 왕필은 감정은 다름없으나 얽매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후 점차 변질되어 예법마저도 부정하며 방탕으로 빠져들어 광달파라고도 하였는데 완적, 혜강, 산도, 왕융, 향수, 유령, 완함을 들어 죽림칠현이라고 한다.

 

. 왕필

. 모든 만물은 도 곧 무에서 생겨났다. 형체가 없고 이름이 없는 것이 만물의 근본이다. 무는 움직임이

없는 것으로 머무름이 움직임의 근본이다.

. 일상적 언어로 참다운 도 곧 무를 드러낼 수 없다. 언어는 도구에 불과하기에 뜻을 얻으면 곧 잊어버

려야 한다. 통발은 물고기를 잡기 위한 것으로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을 잊는 것과 같다.(≒장자)

. 통제함 : 성인은 신명을 가지고 있어서 무에 통하므로 성으로써 감정에 끌리지 않는다.

. 물의 근원인 무를 본받아 마음을 비우고 무위자연을 실천해야 한다. 자연스러움 즉 자연에 순응하여

행해야 한다.

 

. 수.당의 불교

 

수.당 때는 왕실의 보호와 장려로 인해 다양한 종교가 발전되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불교는 천태종, 성실종, 법상종, 화엄종, 구사종, 율종, 밀종, 정토종, 선종 등의 많은 종파가 생겨났다.

 

. 법장

. 법계 곧 모든 사물은 청정한 마음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일시적으로 생겨났다가 소멸하는 것으로 객

관적 사물은 마음에 의해 발생하는 환상의 세계에 불과하다. 대상은 마음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 시간과 공간상의 모든 사물은 일념의 마음에 의해서 생겨난 것으로 크고 작음, 앞과 뒤, 많고 적음,

   현상과 본체 등은 서로 의존 관계에 있는 상대적인 것이다.

. 세계는 질서와 조화를 이루는 4개의 법계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세계를 바라보는 4가지 단계적

인식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사법계(현상계에 집착), 리법계(리 곧 공만을 사물의 본체로 보는 것),

리사무애법계(리와 사의 관계를 통해 보는 것으로 서로 융통하여 걸림이 없다), 사사무애법계(비록

차별이 있을지라도 모든 개체들은 동일한 본체에서 생겨난 것이므로 서로 융화 포섭되는 것으로 보

는 것, 상호의존 관계)

 

. 혜능

. 萬法: 마음은 모든 만물을 포용하고 있으므로 마음이 만물의 근원이다. 모든 사람은 청정한 본심

   곧 불성을 가지고 있다.

. 傳心: 교외별전(진리는 마음으로만 전달 가능 즉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서 진리를 찾아야 한다,

경전을 멀리한다), 불립문자(언어나 문자로 참다운 진리를 나타낼 수도 전달할 수도 없으므로 방편

으로는 사용하나 구애되어서는 안 된다)

. 成佛: 직지인심(본성을 아는 것)은 삼무(무상, 무주, 무념)을 통해 깨닫는다. 마음을 아는 것이 불

성을 보는 것이므로 직지인심과 견성성불(불성을 보는 것이 곧 부처가 되는 것)은 같은 것이 된다.

 

 

 

송 명리학

 

당이 망하고(907), 송이 일어나 나라가 안정되었다. 이 시기에 전통인 유교를 회복시키려는 운동으로 송학 곧 리학이 발흥하였다. 정이는 리기 이원론을 최초로 주장하였으며 주자는 주리적 리기론을 수립하고 육구연은 이를 반대하여 심즉리설을 주장하였다.

 

. 송대 리()

 

송의 천하통일 후 나라가 안정되자 학문을 장려하였다. 주돈이는 유교를 바탕으로 도교와 불교 이론을 받아들여 태극론을 주장하였으며 장재는 태허 곧 기가 모이고 흩어짐으로 만물을 생성 소멸한다고 하였다. 정호는 건원의 기가 음과 양을, 음과 양의 화합으로 만물이 생성된다고 하였으며 정이는 리와 기로 만물이 생성된다는 리기이원론을 최초로 주장하였다. 남송의 주희 곧 주자는 주리적 리기론을 수립하였고 육구연은 주리적 리기론을 반대하고 정호의 리기혼연일체설을 채용하여 마음이 곧 리’” 즉 심즉리설을 주장하였다. 그의 사상은 왕수인에게 계승되어 심학 곧 양명학으로 발전하였다.

 

. 주돈이

. 만물의 근원은 무극이면서 태극이다. 태극은 움직여 양을 낳고 움직임을 다하여 음을 낳는다.

이 두 기가 순환 화합하여 오행을 낳고 음양오행이 교묘히 화합하여 만물을 생성한다.

. 미발지중(未發之中, 발하기 전인 인간의 본성은 성실함)이므로 본성을 그대로 드러내기만 하면

인간은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

. 선한 인간의 본성이 사물과 접촉할 때 악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마음의 움직임을 삼가고 고요해야

한다(主靜). 그러기 위해선 무욕해야 한다.(cf 맹자의 과욕)

 

. 장재

. 태허의 기가 모여 만물이 되고 만물이 흩어져 태허가 된다. 이러한 운동질서 곧 존재의 법칙을

도 혹은 리라고 한다.

. 사물이 있음으로 감각기관이 인식할 수 있고 감각기관이 있음으로써 사물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무궁무진한 사물을 모두 인식할 수 없는 감각기관의 한계 때문에 마음의 사유가 필요하다.

견문을 통해 얻은 것(견문의 지식, 見聞小知)을 궁리함으로써 사물의 본성 곧 천리(덕성의 지식,

天德良知)를 알 수 있다.

. 태허()로부터 만물이 생겨나기 때문에 기가 곧 성이다. 사람이나 사물이나 그 본성이 모두 같다.

. 예를 다함: 본래의 마음을 보존하는 근본은 하늘의 덕을 명백하게 아는 데 있으며, 하늘의 덕은

곧 텅 빈 마음이다. 또한 예를 천지의 덕이라 하여 그것을 지킴으로써 본성을 보존해야 한다. 예를

지킬 수 있으면 도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 주희

. 생성의 원리로서의 리: 주돈이의 태극설과 정이의 리기론을 받아들여 체계화하였다. 형이상자

(=), 형이하자()의 이원론으로 수립하였다. 리는 만물을 생성하는 근본이며 기는 만물을 생성하는 재료이다.

. 생성자로서의 기: 기는 천지간에 가득 차 있으며 생의(生意, 생성의 의지)를 가지고 있어 모이고

조작한다. 기가 움직여 음과 양을 낳고 음양이 화합하여 오행의 질(기의 탁한 것)을 낳고 이러한

음양의 기와 오행의 질에 의해 만물이 생성된다.

. 리기의 문제: 리가 먼저 있었고 그 후 기가 있고 기의 유행으로 만물이 생겨났다.

 

. 기질의 성

- 심통성정론(心統性情論): 사람 혹은 마음도 리와 기가 합하여 이루어졌다. 마음에 있는 리가 성이다. 이는 하늘로부터 부여 받은 리이다.(마음의 본체) 마음이 사물과 접촉하여 움직인 상태를 정이라 한다. 인의예지는 성이며 측은, 수오, 사양, 시비의 마음은 정이다. 사단(측은, 수오, 사양, 시비)은 리 가 드러난 것이고 칠정(, , , , , , )은 기가 드러난 것이다.

 

- 본연의 성과 기질의 성: 리로부터 타고난 성인 본연의 성은 오직 선하며, 기와 리가 섞인 기질의 성에 따라 악이 드러나므로 악은 기에서부터 기인한다.

 

- 덕의 근원으로서의 인: 생성의 리가 인간의 본래의 마음속에 구체화된 것이 인이다. 인은 천지가 만물을 생성하는 마음이다. 천지의 생의는 원, , , 정으로 발전한다.

 

- 인심과 도심: 사물에 접촉해 감정이 일어날 때 마음이 움직여 본연의 성에 따르는 것이 도심이며, 욕망 곧 기질의 성에 이끌리는 마음이 인심이다. 인심은 선악이 있으며 도심은 오직 선하다. 또한 도심은 인심 속에 있다.

 

- 거경(공경하는 마음을 간직함): 내적인 공부

 

- 궁리(격물과 치지): 사물의 리를 철저히 탐구하는 외적인 공부이다. 격물(사물의 리를 탐구하는 것)과 치지(앎의 극치에 이르자는 것)로 바꿔 말할 수 있다. 궁극의 목적은 명덕을 밝히는 데 있다.

 

- 알아야 행할 수 있으며 확실하게 알면 행하지 않을 수 없다. 앎의 목적이 행함에 있으므로 행함이 앎보다 중요하다.

 

 

 

원명대의 심학

 

유교가 활기를 띠던 원대를 지나 명대 중엽에는 주자학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면서 육구연의 심학이 점차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 왕수인

. 주희의주리적 리기론을 반대하고 육구연의심즉리설(마음이 곧 리)’을 받아들여 유심론체계를

수립하였다.

. 음이 곧 성이요, 성이 곧 리이다. 맹자의양지를 받아들여 양지는 천리를 밝고 신령스럽게 깨닫는 곳이라고 하였다. 또한 양지는 선악을 아는 능력이며 천리를 깨달을 수 도 있다. 또한 양지는 우주 만물의 근원적 존재이다. 그의 양지설은 이, , , 성의 혼연일체설에서 온 결과이다.

 

. 양지에 이르기 위해선 사욕의 가리움을 제거하여 천리로서의 양지를 따라야 한다. 그에게 격물(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은 치지와 동일한 것으로 즉 양지에 이르는 것이다. 양지를 깨달아 그것을 발휘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그는 선지후행설을 비판하고 치양지설을 바탕으로 지행합일설을 주장하였다.

 

 

 

청대철학

 

. 고증학풍과 기학

 

. 왕부지

. 정주의 리학과 육왕의 심학을 반대하고, 장재의 기론을 받아들였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의 기뿐이요, 그 밖에 다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물이 없으면 도도 없다. 기에서 떨어진 리의 개념을 부정하고리일분수(理一分殊)’도 반대하였다. 장재의 태허설을 계승하면서도 기의 본성으로 머무름이 아닌움직임을 들었다. 따라서 만물은 끊임없이 생성되고 영원히 움직이고 변화한다. ‘지금 흐르는 물은 옛날의 물이 아니다

 

. 감각과 마음과 사물이 만나 지각이 생겨난다. 격물(감성적 견문)을 거치지 않고는 치지(이성적 사유)가 일어나지 않는다. 마음은 천리가 보존되어 있는 곳이며 사물의 리가 갖추어져 있는 곳으로 마음 즉 이성적 사유를 통해 천리의 인식이 가능하다.

 

. 격물보단 치지 즉 이성이 더 고차원적이며 격물은 치지의 기초가 되는 것이므로 행함이 앎보다 더 근본적이다. 주희의선지후행설과 왕수인의지행합일설모두 행함을 소홀히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비판하였다. 서경의앎은 어렵지 않고 행함이 어렵다는 견해를 받아들여 행함은 앎을 겸하지만 앎은 행함을 겸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가 말하는 행함이란 인식을 위한 견문 행위로 앎과 행함을 확연히 구분한 것은 아니다.

 

. 사람의 성은 날마다 생성되고 날마다 완성되어 가는 것으로 영원히 고정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수양은 적자지심(赤子之心)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개선해 나가는 것이다.

 

. 합치하도록 함: 사람도 우주 만물과 마찬가지로 기로부터 생성된 것으로 하늘이 부여해 준 덕인 천도(천리)에 따라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인과 의(천도)가 있어서 가능하다. ‘일생일성이므로 성을 완성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 대진

. 왕부지와 마찬가지로 장재의 기론을 받아들였으나도는 곧 리라는 왕부지와 의견을 달리하여도는 기이면서 리라고 하였다. 천지간에 기가 변화하고 유행하여 끊임없이 생성하는 것이 천도이며, 인간의 일상에서도 변화와 유행이 그치지 않는데 그것을 인도라 한다. 정주의리일분수를 반대하고 낱낱의 리만을 인정하였다.

 

. 마음 가운데 리가 있다고 한 심학자들을 부정하고 마음은 단지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일 뿐이며 리는 객관적 사물 가운데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사물이 먼저 존재하므로 성인이라 할지라도 자세히 관찰 분석하지 않으면 그 실체를 규명하지 못하며 시비와 선악조차 판별하기 어렵다. 그러나 감각만으론 알 수 없고 마음을 통해서 인식 가능하다.

 

. 사람의 신명함은 중정(中正)한 마음에서 나오므로 사람은 지극히 성대한 존재이며 천지의 완전한 덕에 통하는 빼어난 존재이다. 오직 기질의 성만이 진정한 성이다. 즉 타고난 모든 것이 성으로 이를 둘로 구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욕망도 혈기와 심지를 가진 사람이 타고난 자연스런 본능으로 악한 것이 아니다.

 

. 욕망은 천리에 따라 조절되도록 되어있다. 그러나 사사로움으로 말미암아 욕망을 조절하지 못하면 악하게 되므로 사사로움을 없애야 하는데 이것이 인이다. 인을 실현하는 소극적 방법이 충서(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동정하는 것)이고, 적극적인 방법이 혈도의 도(자신의 마음을 척도로 삼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도록 헤아리는 것)이다.

 

 

 

공양학과 모택동 사상

 

청대 후기 아편전쟁(1840-42)과 태평천국의 난(1855-64) 등의 혼란으로 학문에 대한 비판이 생기고 경세치용의 학문인 공양학이 등장한다. 공양학자들은 하휴의「공양전주소」에 주목하였다. 그에 의하면 공자는 춘추시대를 쇠란기, 승평기, 태평기로 나누어 태평기가 되면 모든 인류가 서로 화합한다는 것이다. 공양학은 장존여가 일으켜 유봉록에 전해지는데 「공양전」의 해석을 중시한다. 후에 강유위에게 계승된다. 그는 실현하기 어려운 대동의 세계 대신에 입헌군주제를 실시하는 것을 현실적으로 보아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후계자 양계초가 경세적인 학풍으로 개혁을 전개하였으나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

 

1901년 청조가 서양학술을 진흥함으로써 유교는 침체하고 1911년 강유위, 양계초의 개혁사상을 이어 손문이 신해혁명으로 청조를 무너뜨리고 민국정부를 세운다. 손문의 국민당을 이어 장개석이 국민당정부를 수립했으나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과의 싸움에서 지고 공산당정부가 천하를 차지하여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모택동 사상만이 남는다.

 

 

 

 

한국철학

 

. 삼국 고려시대의 불교

 

. 원효

. 일심사상 : 모든 존재의 근원은 하나의 마음, 주관적 의식이 아닌우주적인 마음즉 대승으로서의 일심이다.

 

. 화쟁론 : 일심은 일체의 대상 분별을 초월하므로 생각할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진여이다. 각자의 내면적 체험에 호소 함으로서만 전달될 수 있다. 마명의 「기신론」에 의하면 진여에 접근하는 방법은 부정의 길인공의 길과 긍정의 길인불공의 길이 있다. 그는 중관철학과 유식철학을 비판하고 마명의 일심사상에 입각하여 대립의 차이를 넘는 동일성의 원리에 접근함으로써 종합 지양시켰다. 이것이 화쟁(和諍)사상이다.

 

. 지관의 문 : 수행하는 데 필요한 5개의 문 가운데 깨닫는 방법으로 중요시되고 있는 문으로 지(모든 분별상을 끊어버리는 것)의 문, (사물의 본질적 의미)의 문으로 나누어 다루기도 한다. 지의 구체적 수행 방법으로는 조신(調身, 단정히 앉아 있는 것)과 조심(調心, 뜻을 바르게 하는 것)을 들었다.

 

. 지눌

. 진심사상: 우주의 근본 실재는 진심 곧 참 마음(무도 유도 아닌 현모한 것)이다. 근본은 마음이요 만물은 마음의 작용이다. 「보살계」의 심지, 「반야경」의 보리, 「화엄경」의 법계, 「금강경」의 여래, 「열반경」의 열반, 「금광명경」의 여여, 「정명경」의 법신, 「기신론」의 진여 등이 모두 진심의 다른 이름이다.

 

. 반조의 논리: 인식의 기준은 마음이다. 따라서 사람이 진리를 밖에서 찾으려는 것은 잘못이다. 내 마음이 참다운 부처이며 본성이 참다운 진리이다.

 

. 돈오점수: 돈오(마음이 곧 부처임을 깨치는 것, 깨우침)와 점수(교리의 힘으로 훈수하는 것, 수행)는 서로 끊을 수 없는 수레의 양 바퀴와 같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 정혜쌍수 : 점수 곧 돈오한 후의 수행에는 선정과 지혜의 문이 있다. 연을 멈추어 마음이 고요하고 변함없는 상태가 정이고, 관조를 쌓아 지려의 분별이 없음이 혜이다. 정은 본체이고 혜는 작용으로 이 둘은 서로 뗄 수 없는 불가분리의 것이다. 단순히 자신만 오염되지 않는 것이 아닌 적극적 이타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조선시대의 성리학

 

주자학자들의 후원을 받아 창건된 조선이기에 이성계는 억불숭유정책을 썼으며 유교가 장려되었다. 권근은 주희의 리기이원론을 리와 기, 심과 성, 사단과 칠정으로 완전히 이분하여 리기설과 사단칠정론의 단초를 열었다. 김시습은 주자학을 반대하고태극이 곧 기라고 하여 주기파의 선구가 되었다. 서경덕은 리기이원론에 반대하여 기일원론을 제창하였고, 이언적은 주리파의 선구가 되었다. 리발과 기발에 대한 견해 차이로 이황과 기대승의퇴고논쟁에서 성혼과 이이의율우논쟁’으로 이어지는 대립은 리발을 지지하는 이황의 주리파(영남학파)와 기발을 지지하는 이이의 주기파(기호학파)로 계속 이어진다.

 

. 이황

. 주리적 리기론: 주희의주리적 리기론을 받아들여 이에 배치되는 학설은 모두 비판하였다. 특히 서경덕의기일원론을 철저히 배격하였다. 그에게 리는 객관적 사물의 법칙이 아닌 만물을 낳고 주재하는 하나의 실체이다. 리는 항구불변하며 기는 생멸, 시종이 있다. 시초의 기를일원의 기라 한다. 주돈이의 태극론을 받아들여 리가 움직이면 기가 따라 생긴다고 하였다. 그러나 리가 움직인다는 개념의 혼란 때문에 체용론(리의 본체에 있어선 무작위 하나 작용면에선 작위의 성질을 갖는다)을 적용하였다.

 

. 사단칠정론: 주희와 의견을 같이하여 마음의 본체를 성, 마음의 작용을 정이라 하였으며 본연의 성과 기질의 성으로 나누었다. 선의 근본은 리에 있으며, 악의 근본은 기에 있다. 정에는 순전히 선한 사단과 선 혹은 악이 될 수 있는 칠정이 있다. 사단은 반드시 리에서 발동하며 칠정은 기에서 발동한다.(리기호발설) 기대승은 이에 반대하여 칠정과 사단의 구별 없이 다만 칠정 가운데 선한 부분을 사단이라 하였다.

 

. 격물과 치지: 리는 사물에 내재하는 것으로 사물에 접하여 리를 찾아야 한다. 감성적 단계에서 지와 행은 합일이지만 이성적 단계에선 지와 행이 함께 나아간다는 지행호진설(知行互進設)을 개진하였다.

 

. 존심양성과 경의협지 : 존심양성이란 미발지중의 마음(발동하기 이전의 마음)을 기르는 것이다. 수기의 강조는 내면적 수양을 중시하는 퇴계학풍을 낳게 하였다. 경의협지는 공경함과 의로움으로써 양쪽에서 지탱한다는 뜻으로 도학에서 수신의 주요한 방법으로 채택되어 온 것이다.

 

. 이이

. 기발리승일도설 : 발동하는 것은 기고 발동하는 까닭은 리이다. 그러나 리와 기는 하나이면서 둘, 둘이면서 하나라는 것으로 주리설과 주기설의 절충적 입장이다. 또한 리는 통하고 기는 국한한다는 뜻에서 리통기국설(물과 공기, 그릇과 병에 비유)을 주장하였다.

 

 . 사단칠정론 : 사단칠정에 대한 견해 차이는 이황과 기대승의퇴고논쟁에서 성혼과 이이의율우논쟁으로 이어졌다. 그도 이황처럼 본연의 성과 기질의 성을 구별하였지만 사단과 칠정에 대해선 기발리승의 입장에서 반대하였다. 사단()은 칠정을 겸할 수 없으나 칠정(+)은 사단을 겸할 수 있다. 즉 사단칠정도 리기공발(理氣共發)이다.

 

. 입지(立志)와 면지면행(勉知勉行) : 범인과 성인의 차이는 뜻을 세워 물러나지 않음과 힘써서 알고 힘써서 행함을 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

 

  

 

조선후기 실학

 

내란 이후 제기된 주자학의 현실 타계 능력의 한계에 이어 양명학과 고증학의 도입으로 점차 실용적인 것을 추구하는 실학의 기운이 일어났다. 이수광, 유형원 이익 등은 경세치용을 내걸고 중농주의적 경향을 띠었으며 18세기 후반의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은 이용후생과 중상주의 경향을 띠었다. 정약용은 이를 종합 집대성하였다. 그는 공리공담으로 흐른 유교를 실천실학으로 개조하였으나 현실 정치에 대한 비판으로 조정의 탄압을 받았다. 이후 현실 참여보단 학문적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학풍이 일어났으며 김정희는 실사구시를 강조하고, 최한기는 유기론적 철학체계를 수립하고 경험주의적 인식론을 주장하여 실학의 철학적 기틀을 확립하였다.

 

. 정약용

. 주기론적 우주론: 만물의 근원은 태극이며 이 태극을 물질적인 기로 해석하여 주희의 입장(태극=)을 반대하였다. 천지 만물의 리는 각각 만물 자체에 있을 따름이다.

  

. 도의의 성: 만물을 주재하는 신묘한 인격적 주재자를 상제천이라 부르며 인간의 길흉화복도 상제천의 의지로 보았다. 이것은 도심의 형태로 존재한다. 사람은 잉태됨과 동시에 상제천으로부터 성을 부여 받으며 이 성은 기질의 성(오장의 마음, 선악존재)과 도의의 성(영명한 마음, 순선무악)으로 구분된다. 인간만이 양면의 성을 가지며 동등하게 부여되는 것으로 성인과 범인의 차이는 있을 수 없다. 다만 후천적 차이로 성인이 된다.

 

. 목민론: 평등관계의 윤리를 강조하며 특히 아랫사람에 대한 자애의 윤리를 강조하는데 백성들을 다스리는 군목은 백성들을 사랑하고 존중하라는 뜻의 목민사상을 펼쳤다. 그리하여 비실용적인 관념의 유학자들을 비판하고 정치 경제 등의 실제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민본, 민생, 민문의 삼민주의를 내세운 그의 정치 이념은 맹자의 민본정치 사상과 일맥상통한다.

 

 

 

 

■ 철학의 학문적 범주 (대학교 철학 교과목을 중심으로)

                                                                                         D 대학교 철학과 교과목 중에서 발췌

□  1

 

. 고대 철학의 존재론 (Ontology of the Ancient Philosophy)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의 철학을 ‘있음’ (또는 ‘있는 것') 및 ‘있음' 의 성격에 관한 탐구로 보고 이에 대한 다양한 철학적 견해들을 연구

 

. 근세 이성론 (Modern Rationalism)

데카르트는 존재를 개인의 주관적인 의식을 통해서 밝히려 했다는 점에서 근세철학의 아버지라고 부름. 데카르트 철학은 여전히 중세까지의 고전철학의 영향이 많이 남아 있음. 데카르트 철학의 다양한 면을 탐구

 

. 사회의 철학 (Seminar in Philosophy of Society)

사회적 존재인 인간이 자신의 사회적 삶을 통해 그 사회적 조건을 능동적으로 파악하고 철학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보다 바람직한 삶의 전망을 제시한 이론적 경험들을 역사적으로 반성 함. 고대 공동체 정치이론, 현대 초의 유토피아론을 출발점으로 시민사회 이론에서 비롯된 각종 현대 사회철학, 그리고 최근의 탈 현대사회, 정보화 사회 및 후기 현대 사회이론 등을 탐구

 

. 언어철학 (Philosophy of Language)

의미와 지칭의 문제를 탐구함. 논리적 원자론, 논리적 실증주의, 일상 언어분석 철학, 행동주의 등의 의미론을 이름, 기술(description), 명제태도, 문장태도, 지칭 등과 관련하여 고찰

 

. 종교철학 (Philosophy of Religion)

절대적인 정신으로서의 존재를 인정하는 종교와 그렇지 않은 종교의 근본적인 특징을 연구하며, 나아가 종교 및 종교적 심성이 인간의 삶에 있어 왜 근본적인 요소인가를 탐구

 

. 선진철학 (Philosophy of Pre-Ch'in)

중국철학의 맹아로부터 제자백가 철학의 형성까지를 맹아기 제자백가 이전 철학. 제자백가 철학으로 구분하여 주요 관념들과 주요 인물들의 철학사상을 연구.

맹아기 철학은 上帝 및 天命觀, 陰陽五行, 天人關係를 중심으로 연구하고, 제자백가 이전 철학은 無神論 경향의 철학들, 예를 들면 백양보, 사백, 관중, 의화, 자산, 안영, 사묵 등의 철학에 관해 연구

 

. 유교경전 연구 (Seminar in Confucian Classics)

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 논어, 맹자, 대학, 중용 등. 유가 經書들 古典을 직접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을 높임.

 

 

. 동양 사상 속의 수양과 깨달음 (Cultivation and Awareness in Oriental Thoughts)

유불도 사상이 가지고 있는 수양론 체계와 깨달음의 내용을 비교 연구

 

. 한국철학사 연구 (Seminar in History of Korean Philosophy)

한국철학의 특성이 될 수 있는 제 문제를 시대별, 인물별, 학파별로 분류하여 연구함으로써 한국철학사의 맥락을 재구성. 한국철학사의 중심적 인물들의 철학을 연구

 

 

□  2

 

. 플라톤의 철학 (Plato's Philosophy)

플라톤의 사상, 특히 그의 전기와 중기 사상을 주로 『메논』,『파이돈』,『국가』를 통해 다룸

 

. 현대인식론 (Contemporary Theory of Knowledge)

러셀과 무어 이후의 20세기 인식론, 특히 인식 정당성의 문제를 다룸

기초주의, 정합주의, 신뢰주의(reliablism), 내재주의, 외재주의 사이의 갈등을 고찰하고, 콰인의 자연화의 인식론을 검토

 

. 현상학과 실존철학 (Phenomenology and Existentialism)

의식에 주어진, 나타난 현상만을 통해서 사물 및 사태의 본직을 파악하고자 하는 현상학과, 인간의 실존을 통해서 인간의 근본적 조건을 인식하고자 하는 실존철학은 20세기 전반에 독일, 프랑스에서 시작하여 전세계로 퍼져 나간 철학 사조임. 인간의 주관적인 의식, 체험을 중시하면서도 객관적이며 보편적인 인식을 정초하고자 하는 두 철학 사조를 연구

 

. 이론윤리학 (Seminar in Theoretical Ethics)

윤리학의 가장 기초적 문제인 도덕판단의 합리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도덕 판단에 일반적으로 동원되는 옳음/그름, 좋음/나쁨의 범주를 비롯해, 도덕적 정당화의 방식에 대한 치밀한 인식을 도모

이와 아울러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칸트, 무어 등의 윤리이론를 거쳐 헤어, 스티븐스 등의 분석윤리 및 하버마스, 아펠 등의 논변윤리(Diskursethik) 등을 검토

 

. 과학철학 (Philosophy of Science)

과학적 탐구의 본질을 고찰. 과학적 법칙, 설명 및 발전의 문제를 귀납주의, 오류주의 (falsification), 환원주의, 과학적 실재론, 도구주의, (Kuhn)의 패러다임, 귀납법의 정당화 등과 관련하여 고찰

 

. 한당철학 (Han-Tang Dynasty's Philosophy)

한대 철학과 수.당대 불교철학을 연구. 황노학, 우주생성론, 元氣說, 形神論 등과 동중서.왕충.유종원.유우석.한유.이고 등의 철학, 여씨춘추 등의 철학, 천태종.화엄종.선종의 철학 등을 연구. 또 유불도 융섭과 대립 등의 문제도 다룸

 

. 중국 근.현대철학 (Modern and Contemporary Chinese Philosophy)

아편 전쟁 이후부터 1950년대 철학까지를 주요 인물과 논쟁들을 중심으로 탐구.

 

. 동양의 생명사상 (Oriental View of Life)

동양 사상의 生死觀을 연구. 특히 죽음을 도덕적 완성의 계기로 보아 ‘편안함’으로 받아 들였던 유가사상과 죽음의 문제를 실용적으로 처리하였던 묵가사상, 자연으로의 復歸로 여겼던 도가사상, 초월.해탈로 본 불교사상 등을 비교 연구.

 

. 한국유학철학 (Korean Confucianism)

한국유학의 원류와 발전에 대해 연구. 성리학 수용 이전의 한국유학과 성리학 수용 이후의 한국유학으로 대별하여 그 특성 및 한국철학에서의 위상 등을 탐색

 

 

□  3

 

.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Aristotle's Philosophy)

그의 사상을 논리학에 관한 저작물들을 중심으로 다루면서 학문적 방법론에 관한 그의 견해에 주목

 

. 심리철학 (Philosophy of Psychology)

마음 혹은 심적 현상의 본질을 탐구. 행동주의, 기능주의, 물리주의, 인지주의 등의 심적 현상에 대한 규명을 고찰하고, 지향성, 심적내용, 의식, 심적표상, 인공지능, 계산주의, 연결주의 등의 문제를 다룸

 

. 독일관념론 (German Idealism)

칸트 철학에 바탕을 두고 1780년경부터 1850년 경까지 독일에서 풍미한 철학 사조. 칸트철학과 더불어 피히테, 쉘링, 헤겔의 철학을 탐구.

 

. 사회철학 방법론 (Seminar in Methodology of Social Philosophy)

현대 사회에서 사회에 대한 전체적 인식의 가장 중요한 매개체는 사회과학과 언론. 생활세계를 넘어 사회전체의 전달통로인 이런 인식매체에 대한 비판적인 접근이 없으면 복잡성이 가중되는 현대 사회에서 삶의 정확한 입지를 확보할 수 없음. 사회철학 및 사회과학들의 기본 개념들인 가치중립성, 객관성, 진리인식, 방법론 등을 추적.

 

. 페미니즘 철학 (Seminar in Feminist Philosophy)

‘여성‘이라는 범주는 이제 더 이상 남성과 이질적인 존립방식을 가진 인간의 한 종()이 아니라 ‘인간’이 어디까지 인간 자신을 평등한 존재로 만들 수 있는가를 판가름 하는 표준현장으로 부각되었음. 여성의 억압과 차별은 곧 인간 자체의 억압이라는 견지에서 양성관계(gender relation)의 역사적 전개와 그 비판적 반성의 궤적을 추적.

 

. 송명철학 (Song-Ming Dynasty's Philosophy)

송명 철학은 理學을 특징으로 함. 理學의 형성과 전개, 발전을 주요 인물들의 철학을 통하여 연구.

 

. 중국의 전쟁 철학 (Chinese Philosophy of War and Peace)

춘추전국이라는 전쟁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각기 다른 길이었다는 관점에서 제자백가철학을 재구성하여 거기에 깔려있는 인간관.자연관.사회관 등을 탐구. 전쟁과 평화의 문제는 또 권력과 문화의 관계 문제라고도 할 수 있음. 제자백가 철학이 이러한 문제에 끼친 영향을 연구.

 

. 동양사상 속의 이상사회론 (Theory of Utopia in Oriental Thoughts)

仁政과 井田制를 중심으로 한 왕도정치를 강조하는 유가사상 계열과 無爲.無欲.無私를 강조하는 도가사상 계열의 이상사회론.실현방법론 등을 비교 분석하고, 불교사상 계열의 淨土사상 등에서 나타나고 있는 社會觀을 연구.

 

. 한국 근.현대 철학 쟁점 분석 (Issues in Modern and Contemporary Korean Philosophy)

위정척사파 사상과 개화파 사상의 대립, 성리학적 세계관과 서구 사조들의 교섭, 한국 고유사상 재조명 등, 19세기 한국철학의 여러 쟁점들을 분석하고 서양철학의 본격 수용 이후에 나타난 제 문제를 연구.

 

 

□  4

 

.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 (Augustin and Thomas Aquinas)

플라톤의 철학에 근거한 사상가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근거한 사상가가 기독교 사상 체계를 세워나가는 방식을 검토.

 

. 고급논리학 (Advanced Logic)

러셀 이후의 논리학의 주요 사상을 고찰. 문장논리, 양화논리, 양상(modal)논리, 다치(many-valued)논리의 기본사상과 법칙을 이해.

 

. 근세 경험론 (Modern Empiricism)

어느 의미에서는 근세철학의 참다운 발단은 데카르트 철학이라기보다는 경험론이라고 할 수 있음. 특히 로크, 버클리, 흄의 철학을 연구함으로써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를 알아봄.

 

. 실천윤리학 (Seminar in Practical Ethics)

실질적인 인간문제에 대해 윤리학이 도덕적 대응을 옹호하지 못하면 아무런 쓸모가 없음. 인간관계에서 실제로 도덕적인 태도를 요구하는 첨예한 문제들로는 인종적.성적 차별의 문제, 환경 및 생명에 대한 존중의 한계, 임신중절이나 안락사의 정당성, 빈부 차별의 문제 등을 들 수 있음. 이런 문제들에 대한 현실적인 대안과 행위양식을 추적.

 

. 미학 (Seminar in Aesthetics)

넓게는 아름다움의 탐구라고 할 수 있는 미학은 ‘감성’뿐만 아니라 표현에 대한 인간의 욕구 및 그 담지자인 매체와 행위를 광범하게 연구. 예술의 구조와 그 추동력에 대한 탐구에서부터 시작된 미학의 현대적 발전은 이제 문화 현상 일반을 그 연구대상으로 삼고 잇음. 칸트에서 비롯된 현대 미학의 단초에서부터 최근의 대중문화이론을 학습.

 

. 제자백가 철학 (Seminar in Hundred School's Philosophy)

유가철학과 도가철학을 제외한 제자백가 철학, 예를 들자면 묵가, 명가, 법가, 음양가, 병가 등의 철학을 연구

 

. 청대 철학 (Ch'ing Dynasty's Philosophy)

황종희, 왕부지, 고염무 등 이른바 명말 遺老들의 경세치용학으로부터 중기의 고증학. 기철학까지 역사적 맥락을 중심으로 연구.

 

. 성리학과 양명학 (Seminar in Chu-shi and Wang-yangming's Philosophy)

주희의 철학과 왕수인의 철학을 비교 연구. 결국 理學과 心學의 비교 연구.

 

. 한국 문화 상징들의 철학적 분석 (Philosophical Analysis of Korean Cultural Symbols)

단군신화를 비롯한 한국고대 신화들, 풍수도참설 등 한국적 세계관이 반영되어는 여러 문화 상징을 뽑아 거기에 내재되어 있는 철학을 연구.

 

 

 

□  22

 

. 플라톤의 존재론 연구 (Studies in Plato's ontology)

특히 그의 후기 사상을『파르메니데스』,『소피스테스』,『테아이테토스』,『티마오스』등을 통해 연구.

 

. 고급논리학 (Advanced Logic)

이후의 논리학의 주요 사상을 고찰. 문장논리, 양화논리, 양상(modal)논리, 다치(many-valued)논리의 기본사상과 법칙을 이해.

 

. 데카르트 철학 연구 (Studies in Descartes' Philosophy)

데카르트는 자아의식 개념을 통해 근세철학의 장을 열어 놓은 철학자로서 중요성을 지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의 심리철학, 근대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물질문명 세계관과의 관계에서도 여전히 중요성을 지니고 있음. 데카르트 철학을 다양한 측면에서 연구.

 

. 비판이론 (Studies in Critical Theory)

사회철학 성립에서 규정적인 것은 비판의 전통. 비판의 전통은 구성(Konstruktion)의 전통과 더불어 현대 사회를 보는 철학의 입지점을 확보하는데 지대하게 기여. 루소의 문명비판에서부터 맑스의 역사적 유물론, 그리고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마르쿠제, 하버마스에 이르는 사회비판의 전통, 유토피아 사상과 민주주의의 개혁적 보강 등을 철학적으로 반성.

 

. 동서비교철학 (Comparative seminar in Oriental Philosophy and Western Philosophy)

동양과 서양, 철학과 자연과학 및 학문들간의 관계가 점차 밀접해짐. 동양과 서양의 주요사상을 통해 그들간의 차이 및 유사점을 연구하며, 나아가 인간 정신의 보편성을 탐구.

 

. 중국철학 인식론 문제 연구 (Epistemological Issues in Classical Chinese Philosophy)

선진시기 名辨 사조 및 名實 논쟁, 墨辯의 논리학과 추리론, 순자의 正名論과 虛壹而靜論, 근세의 격물치지론 등 중국 철학 고전들에 나타나 있는 명실관과 진리관에 대해 연구.

 

. 주역철학 연구 (Studies in I-Ching)

"주역"의 철학 및 易學史에 관해 연구. 

 

. 한국 불교철학 연구 (Studies in Korean Buddhism)

원효'의상'지눌의 철학에 대해 연구, 조선조의 儒佛對論에 대해서도 탐구. 

 

. 한국철학 예학 연구 (Studies in Korean Ritual Philosophy)

한국 유학사를 예학 이론들을 중심으로 개괄. 특히 '주자가례' 시행 이후 예학의 분기를 가져온 철학적 입장의 차이를 연구하고, 조선조 후기에 발생한 주자가례 중심의 예학에 대한 문제제기가 어떠한 철학적 입장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연구.

 

□  2'단위

 

.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 연구 (Studies in Aristotle's ontology)

그의 존재론을 주로 『퓌지카』및 『메타퓌지카』를 통해 연구.

 

. 흄 철학 연구 (Studies in Hume's Philosophy)

근세 철학자 중에서 중세 철학의 전통을 완전히 벗어나 철학의 문제를 구석까지 몰고 간 철학자를 든다면 그것은 흄임. 흄이 어떠한 면에서 그 이후의 철학에 기여하였는지를 탐구.

 

. 생태(生態)철학 (Studies in Ecological Philosophy)

생태학은 이제 단순히 환경이론의 차원을 넘어 인간의 생존이라는 전지구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연과 인간, 그리고 우주를 포괄하는 인간 삶의 새로운 형상을 구상하는 학문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줌. 생물학적 생태론에서부터 최근의 가이야 이론에 이르는 생명이론의 발전 등 생태학의 성과를 철학적으로 검토하는 가운데 인류의 우주적 공동체를 구상함.

 

. 인지심리학 (Cognitive Psychology)

심적현상, 의식, 지향성, 의미, 지칭 등에 대한 심리철학과 인공지능의 이론을 대비함. 특히 브렌타노, 치즘(Chisholm), (Searle) 등의 지향성 주의와 포도어의 계산주의, 연결주의를 통하여 고찰.

 

. 수리논리연구 (Studies in Mathematical Logic)

‘수학의 기초’  이론을 중심으로 칸토어(Cantor), 프레게(Frege), 러셀(Russell), 브라우스(Brouwer), 힐버트(Hilbert), 괴델(Godel), 타르스키(Tarski) 등의 사상을 연구.

 

. 노장철학 연구 (Studies in Lao-tzu and Chang-tzus Philosophy)

노자와 장자 철학을 '도덕경' '장자'의 분석을 통하여 연구.

 

. 공맹순 철학 연구 (Comparative Studies in Pre-Ch'in's Confucianism)

'논어'. '맹자'. '순자'에 나타나 있는 철학적 문제들을 선별하여 비교 분석.

 

. 중국철학 인간론 문제 연구 (Issues in Chinese Philosophical Anthropology)

중국철학의 인성론, 심성론, 형신론 등에 대해 연구.

 

 

□  23

 

. 서양 고중세 논리학 연구 (Studies in Ancient-Medieval!! Logic)

메가라 학파 및 스토아 학파의 논리학을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대비하면서 다루고, 아벨라르의 전통에 선 중세 논리학의 발전 역사를 검토.

 

. 근세 이성론과 칸트 철학 (Modern Rationalism and Kant's Philosophy)

칸트는 근세 이성론과 경험론을 종합한 철학자라고 회자되지만, 이 양자가 칸트에서 같은 비중을 지니는 것은 아님. 칸트철학 전반으로 볼 때 칸트는 이성론의 지반 위에서 있음. 칸트철학을 통해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를 탐구.

 

. 심신론 (Mind-Body Problem)

행동주의, 심신동일론, 환원적 및 비환원적 물리주의, 기능주의, 심적 인과성, 심신수반(supervenience) 등의 문제를 라일(Ryle), 암스트롱(Armstrong), 퍼트남, 루이스(D. Lewis), 데이비드슨(D. Davidson), 김재권 등의 사상을 통하여 고찰.

 

. 영미 사회철학 (Studies in Anglo-American Social Philosophy)

현대 세계를 주도하는 국가로서 미국 사회에 대한 이해는 앞으로 지구상의 모든 사회의 향방에 결정적으로 중요. 벤담과 밀의 자유주의-공리주의, 허버트 미드, 챨스 퍼스와 존 듀이의 실용주의 및 최근의 정보화 사회론과 신자유주의에 이르기까지 미국 사회를 풍미한 사회철학들 을 집중 탐구.

 

. 과학철학 (Philosophy of Science)

과학적 탐구의 본질을 고찰. 과학적 법칙, 설명 및 발전의 문제를 귀납주의, 오류주의 (falsification), 환원주의, 과학적 실재론, 도구주의, (Kuhn)의 패러다임, 귀납법의 정당화 등과 관련하여 고찰.

 

. 도교철학 (Philosophy of Taoism)

한국과 중국의 도교철학을 연구.‘영원한 것’을 둘러싼 도교철학의 토론을 살펴보고 그 이론들을 연구.

 

. 경학연구 방법론 연구 (Studies in Chinese Philology)

'설문해자주' 연구를 통하여 경학연구의 제 방법에 관해 탐구.

 

. 성리학 연구 (Issues in Neo-confucianism)

...민 학파의 형성.전개 과정에서 일어났던 철학적 논쟁들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정주학의 주요 개념들을 심층적으로 연구하고, 주희에 의한 집대성 이후 理學의 전개과정에 대해 연구.

 

. 한국 실학사상 연구 (Studies in Korean "Sil-hak")

한국 실학사상을 철학적 특성을 탐구. 실학이 조선의 문화적 주체성을 정당화한 논리, 성리학적 세계관으로부터의 이탈양상 등 실학의 주요 쟁점 연구.

 

 

□  24

 

. 헬레니즘 철학 연구 (Studies in Hellenistic Philosophy)

에피쿠로스 학파, 스토아 학파 및 회의주의 학파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연구.

 

. 칸트와 헤겔 (Kant and Hegel)

독일관념론의 토대를 마련해 준 칸트와, 독일관념론의 정점에 서 있는 헤겔은 독일 근세철학의 커다란 근간. 그들의 철학을 탐구.

 

. 러셀, 비트겐슈타인, 콰인 (Russell, Wittgenstein, Quine)

분석철학의 대표적 철학자인 러셀, 비트겐슈타인, 콰인 등의 사상,

 

. 현대 문화철학 (Studies in Modern Cultural Philosophy)

각 사회에서 문화는 ‘인간됨’의 가장 바람직한 상태를 표출하고, 기본적인 표현 욕구를 배출함으로써 인간 완성과 인간 향유의 각종 역량과 방식을 집결시킴. 현대에서 문화는 시장과 상호교착하면서 최대의 이익을 주는 경제영역임과 동시에 가장 대중적인 미학 영역이 되었음. 엘리아스의 문명이론, 하우저의 예술사 이론, 들뢰즈나 가타리의 탈 현대문화 이론 등을 집중 검토. 

 

. 생의(生醫)윤리학 (Studies in Bio- and Medical Ethics)

“생명”은 이제 더 이상 천부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제조되고 조작되는 공학적 가공 및 선택의 대상. 탄생, 신체, 죽음, 낙태, 유전자 조작 및 복제, 장기 이식 등은 단 한번 교체불가능하게 주어진 신체를 기반으로 하는 인간 존엄성의 관념을 동요시킴. 인간의 생명과 신체를 다루는 의학 분야와 연관시켜 최근의 논의들을 추적.

 

. 위진 철학 연구 (Issues in Wei-Ch'en's Philosophy)

위진 현학의 철학 문제들, 예를 들면 有無論, 名敎自然論, 言意論, 神滅不滅論 등에 대해 연구.

 

. 퇴율철학 연구 (Studies in Philosophy of Yi-hwang and Yi-yi)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철학을 비교 연구. 퇴계와 고봉 사이의 사단칠정 논쟁, 율곡과 우계 사이의 인심도심 논쟁의 주요 쟁점과 그 영향을 연구.

 

. 현대신유학 연구 (Philosophical Issues in New-confucianism)

웅십력, 방동미, 모종삼, 당군의, 서복관 등이 제기한 유학현대화 논의에 내재해 있는 철학 문제들에 대해 연구. 유교문화권에 대한 서구 학자들의 논의들을 소개하고 그 이론을 연구.

 

. 동양 미학 연구 (Studies in Oriental Aesthetics)

동양 미학의 일반적 특징을 통하여 동양 문화 정신을 탐구하고 서화론, 문체론 등의 바탕을 이루는 철학 이론들에 대해 연구. 

 

 

□  25

 

. 토미즘 연구 (Studies in Thomistic Philosophy)

아퀴나스의 사상이 현대에 이르기까지 ‘토미즘’이라는 이름 아래 어떤 모습으로 발전해왔는지를 연구.

 

. 역사철학 (Studies in Philosophy of History)

현대의 초기는 역사의식에 대한 강렬한 자각을 경험함. 하지만 현재 역사의식의 인식론적 가치는 물론 역사현상 그 자체의 종언이 거론됨. 그러나 역사는 우리 삶의 사회적 유의미성과 자기정체성의 규명에 아직도 요구된다는 인식. 칸트와 헤겔의 역사철학을 필두로 사회주의 붕괴 이후 역사종언담론들을 추적하고 건강한 역사관의 수립을 모색.

 

. 쉘링과 낭만주의 철학 (Schelling and the Romantic Philosophy)

독일관념론과 낭만주의 철학은 시대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밀접한 관계. 독일관념론자들 중에서도 특히 쉘링은 낭만주의 철학에 많은 영향을 미침. 쉘링의 철학과 낭만주의 철학, 그리고 이들간의 관계를 탐구.

 

. 인식기초론 (Epistemic Justification)

인식정당성에 대한 게티어(Gettier), 치즘(Chisholm), 레러(Lehrer), 봉주르(BonJour), 골드만(Goldman), 콰인(Quine)의 입장들을 비교 고찰.

 

. 가치론 연구 (Studies in Theories of Value)

인간이 행위를 거부할 수 없는 한 어떤 행위를 할 것인가를 놓고 선택하는 일은 피할 수 없다고 할 인간은 가치의 문제를 진지하게 숙고함. 가치관이 각 문화권 내지 사회마다 달리 형성된 “가치체계”에 상당 정도 의존. 우선 “가치”란 무엇인가라는 기본문제부터, 가치 형성의 사회역사적 과정 및 문화현상으로서의 가치, 가치정당화의 논리를 탐구.

 

. 氣철학 연구 (Studies in Ki Philosophy)

기 철학의 형성과 발전에 대해 연구. 

 

. 양명학 연구 (Issues in Yang-ming Philosophy)

심학의 형성과 전개를 연구. 이학에 대비되는 심학의 특징들을 분석. 

 

. 중국현대철학 연구 (Studies in Contemporary Chinese Philosophy)

중국 현대의 여러 철학 사조들에 대해 연구. 외래 철학사조들의 중국 철학화에 대해 탐구.

 

. 한국현대철학 연구 (Studies in Contemporary Korean Philosophy)

한국 현대의 여러 철학 사조들에 대해 연구. 외래 철학사조들의 한국 철학화에 대해 탐구.

 

 

□  26

 

. 형이상학 연구 (Studies in Metaphysics)

‘형이상학’의 성격을 논의하면서 형이상학적 주제들을 다룸. 

 

. 논리실증주의 (Logical Positivism)

쉴릭(Schilick)으로부터 카르납(Carnap)을 거쳐서 헴펠(Hempel)에 이르는 논리실증주의의 존재론, 인식론, 의미론, 과학론과 그 이후의 철학에 대한 영향을 고찰.

 

. 사회윤리학 (Studies in Social Ethics)

현재 윤리적 사고의 범위는 개인 영역을 넘어 사회의 각종 관심집단, 정부기관을 비롯한 공공조직 차원뿐만 아니라 다양한 국제기구, 비정부기구(NGO), 궁극적으로는 인류 전체까지 포괄하는 행위양식까지 확대됨. 이런 관점에서 요나스를 비롯한 생태론자들의 책임윤리, 민주주의 정치구조를 둘러싼 영미 공동체주의 윤리, 롤스의 정의론 등을 집중 탐구.

 

. 해석학 (Hermeneutics)

하이데거, 가다머, 하버마스 등의 해석학을 통해 해석학이 무엇을 의미하며, 해석학이 현대 사회에서 어떠한 중요성을 지니는지 연구.

 

. 프랑스 철학 연구 (Studies in French Philosophy)

16세기 이후의 계몽주의 철학과 18세기의 유물론에 이르는 과학중심주의적인 철학적 발상법은 베르그송의 생명론뿐만 아니라 바슐라르, 캉길렘, 알뛰쎄, 푸코에까지 흐르는 프랑스 철학의 전통. 앵글로-아메리칸 전통의 논리주의적 접근법이나 독일의 사변적 관념론 및 해석학 전통과 그 바탕을 달리하는 프랑스 철학이 과학이론과 밀접하게 맺는 내적 연관을 고찰.

 

. 중국철학 본체론 연구 (Studies in Chinese Metaphysics)

중국철학의 우주생성변화론, 구조론, 理氣論 등을 탐구하고 인간론과의 관계를 연구.

 

. 동양 종교사상 연구 (Studies in Oriental Religious Thoughts)

유불도 등 체계화된 종교를 비롯하여 역사상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 신종교 및 원시종교에 내포되어 있는 동양 사상의 원형들을 연구.

 

. 유학 관리 사상 연구 (Studies in Confucian Administrative Theory)

유학 경세 사상을 현대적 관점에서 재구성하려는 여러 시도들에 내재해 있는 이론들에 대하여 연구.

 

. 일본 사상 연구 (Studies in Japanese Thoughts)

일본의 고유사상, 유불도 등 외래사상의 일본화 과정, 근현대 일본의 탈아시아적 논리 등에 대해 연구.

 

 

 

 

■ 철학고전 텍스트 목록

             snu 철학과                                                                              philosophy.snu.ac

 

. 한국철학

  원측: 해심밀경소

원효: 대승기신론소

원효: 금강삼매경론

의상: 화엄일승법계도기

지눌: 수심결

지눌: 간화결의론

태고: 태고화상어록

용운: 조선불교유신론

정도전: 불씨잡변

권근: 입학도설

서경덕: 화담집

이황: 퇴계집

이황: 성학십도

조식: 남명집

이이: 율곡전서

이이: 성학집요

이이: 격몽요결

송시열: 송자대전

박세당: 사변록

윤휴: 백호전서

임성주: 녹문집

이익: 성호전집

정약용: 논어고금주

정약용: 맹자요의

최한기: 기측체의

최한기: 기학

 

. 중국철학

 주역

공자: 논어

맹자: 맹자

대학

중용

노자: 노자

장자: 장자

관자: 관자

묵자: 묵자

순자: 순자

상앙: 상군서

한비자: 한비자

동중서: 춘추번로

왕충: 논형

왕필: 노자주

양웅: 태현경

주돈이: 통서

장재: 정몽

소옹: 황극경세서

정호, 정이: 이정유서

호굉: 지언

주희: 주자어류

주희: 주희집

육구연: 육구연집

왕수인: 전습록

왕정상: 왕정상집

이지: 분서

유종주: 유자전서

왕부지: 장자정몽주

황종희: 명이대방록

대진: 맹자자의소증

담사동: 인학

강유위: 대동서

양계초: 신민설

양계초: 변법통의

호적: 호적문존

웅십력: 체용론

웅십력: 신유식론

양수명: 동서문화급기철학

양수명: 중국문화요의

풍우란: 신원도

승조: 조론

지의: 마하지관

지의: 법화현의

길장: 삼론현의

현장: 성유식론

법장: 화엄오교장

혜능: 육조단경

종밀: 원인론

종밀: 선원제전집도서

극근: 벽암록

의현: 임제록

대혜: 서장

 

. 인도철학

우파니샤드

바가바드기타

이슈바라크리슈나: 상키야카리카

파탄잘리: 요가수트라

카나다: 바이셰시카수트라

가우타마: 니야야수트라

법구경

열반경

수타니파타

대념처경

붓다고사: 청정도론

밀린다팡하

바수반드: 구사론

바수반드: 유식삼십송

나가르주나: 중론

보성론

 

. 서양고대철학

탈레스: 단편들

아낙시만드로스: 단편들

아낙시메네스: 단편들

피타고라스: 단편들

헤라클레이토스: 단편들

파르메니데스: 단편들

엠페도클레스: 단편들

아낙사고라스: 단편들

프로타고라스: 단편들

고르기아스: 단편들

데모크리토스: 단편들

플라톤: 국가

플라톤: 향연

플라톤: 티마이오스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플라톤: 파이드로스

플라톤: 법률

플라톤: 고르기아스

플라톤: 메논

플라톤: 프로타고라스

플라톤: 소피스테스

아리스토텔레스: 범주론

아리스토텔레스: 분석론전서

아리스토텔레스: 분석론후서

아리스토텔레스: 위치론

아리스토텔레스: 소피스트적 논박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아리스토텔레스: 영혼론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에픽테토스: 담화록

플로티노스: 엔네아데스

 

. 서양중세철학

보에티우스: 철학의 위안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아우구스티누스: 자유의지론

아우구스티누스: 참된 종교

아우구스티누스: 신국론

아우구스티누스: 삼위일체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누스: 독백

안젤무스: 모놀로기온과 프로슬로기온

대 알베르투스: 선의 본성에 대하여

아퀴나스: 신학대전

아퀴나스: 대이교도대전

보나벤투라: 6일간의 세계 창조에 대한 강의

보나벤투라: 신에게 이르는 정신의 여정

에리우게나: 자연의 구분에 대하여

둔스 스코투스: 제일원리

오컴: 논리학 대전

 

. 서양근대철학문헌

데카르트: 방법서설

데카르트: 성찰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

데카르트: 정념론

스피노자: 에티카

스피노자: 정치학적 논고

스피노자: 지성개선론

라이프니츠: 단자론

라이프니츠: 변신론

라이프니츠: 형이상학 논고

라이프니츠: 신인간지성론

루소: 사회계약론

홉스: 리바이어던

베이컨: 진보

베이컨: 신기관

로크: 통치론

로크: 인간지성론

버클리: 인간지식의 원리에 대한 논고

: 인간지성에 대한 탐구

: 인성론

칸트: 순수이성비판

칸트: 실천이성비판

칸트: 판단력비판

칸트: 윤리형이상학 정초

칸트: 윤리형이상학

칸트: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칸트: 형이상학서설

칸트: 자연학의 형이상학적 기초

칸트: 감성계와 예지계의 형식과 원리

칸트: 영구평화론

피히테: 지식론개념

피히테: 지식학의 기초

셸링: 초월적 관념론의 체계

셸링: 철학의 원리로서의 자아

셸링: 인간 자유의 본질에 관하여

셸링: 자연철학의 이념

헤겔: 정신현상학

헤겔: 논리의 학

헤겔: 법철학

헤겔: 역사철학강의

헤겔: 철학요강

헤겔: 미학강의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벤담: 도덕 및 입법의 원리서설

: 공리주의

: 자유론

 

. 서양현대철학문헌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유고

니체: 도덕의 계보학

니체: 선악의 저편

니체: 비극의 탄생

니체: 우상의 황혼

야스퍼스: 철학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하이데거: 숲길

하이데거: 강연 및 논설

하이데거: 이정표

하이데거: 형이상학입문

하이데거: 철학에의 기여

하이데거: 언어로의 도상

후설: 현상학의 이념

후설: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

후설: 내적 시간의식의 현상학을 위해

후설: 엄밀학으로서의 철학

가다머: 진리와 방법

마르크스: 자본론

마르크스: 경제학, 철학 수고

마르크스: 독일 이데올로기

마르크스: 공산당 선언

엥겔스: 반뒤링론

베버: 경제와 사회

베버: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루카치: 역사와 계급의식

만하임: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

호르크하이머: 계몽의 변증법

아도르노: 부정변증법

아도르노: 미학이론

마르쿠제: 에로스와 문명

마르쿠제: 일차원적 인간

하버마스: 소통행위론

하버마스: 인식과 관심

알튀세: 자본론 읽기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베르그송: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메를로-퐁티: 지각의 현상학

리꾀르: 시간과 서사

리꾀르: 악의 상징

리꾀르: 해석학과 구조주의

라캉: 에끄리

데리다: 문자학

들뢰즈: 앙띠외디푸스

들뢰즈: 차이와 반복

제임스: 실용주의

프레게: 개념표기

프레게: 산수의 기초

프레게: 산술의 법칙

프레게: 철학저술들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 과학혁명의 구조

시드위크: 윤리학의 방법

무어: 윤리학원리

러셀: 수학원리

러셀: 논리적 원자론의 철학

러셀: 논리와 지식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포퍼: 과학적 발견의 논리

듀앙: 물리이론의 목적과 구조

파이어아벤트: 방법에의 도전

굳맨: 세계 구성의 방법들

굳맨: 사실, 허구 그리고 예측

콰인: 낱말과 대상

콰인: 논리적 관점에서

로티: 철학과 자연의 거울

듀이: 경험과 자연

롤즈: 정의론

맥킨타이어: 덕 이후

카르납: 세계의 논리적 구조

카르납: 의미와 필연성

에이어: 언어, 진리, 논리

라일: 마음의 개념

셀라스: 과학, 지각, 실재

퍼트남: 이성, 진리, 역사

데이비드슨: 진리와 해석에 대한 물음들

크립키: 이름과 필연

맥도웰: 마음과 세계

오스틴: 감각과 감각체

오스틴: 낱말들로 행위하는 방법

: 지향성

: 언어행위

스트로슨: 개체들

헤어: 도덕의 언어

노직: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로

더미트: 진리와 여타의 수수께끼들

 

 

  철학자 목록

                                                          출처: http://www.masilga.co.kr

1. 소크라테스(Socrates, av. 470-399)의 철학

2. 플라톤 (Platon: 427-347 av. J.-C.)

3. 플라톤 (428-348 BC), 사랑(Eros, La banque, Droz)

4. 플라톤의 "공화국(politeia)" 편의 얼게

5. 플라톤의 존재론과 인식론: (Caratini)

6.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 (Platon ; Demiourge, Timee, DROZ Genvieve)

7. 플라톤의 퇴트신화(Platon, Theuth, Phedre, DROZ Genevieve)

8. 플라톤의 예술철학, 그리고 현재적 의미

9.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 384-322 av. J.-C.)

10. 에피큐로스(Epicure, 341-270 av. J.-C.)

11. 스토아 학파(Stoicisme)

12.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 354-430)

13. 히파티아(Hypatie, en gr. Hupatia, 370-415)

14. 아벨라르두스(Abelard, 1079-1142)와 보편논쟁(les Unviversaux)

15. 아퀴나스(Thomas d'Aquin, 1227-1274)

16. 스코투스(Jean Duns Scot, 1265-1308)

17. 마키아벨리(Nicola Machiavel, 1469-1527)

18. 몽떼뉴(Michel Eyquem de Montaigne, 1533-1592)

19.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

20. 프란시스베이컨(Fancis Bacon, 1561-1626):우상론

21. 홉스(Thomas Hobbes, 1588-1679)의 사상

22. 데카르트(Descartes, 1596-1650)//방법서설//의의

23. 빠스칼(Blaise Pascal, 1623-1662)

24.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

25. 스피노자 (1632-1677) (Spinoza, MOREAU )

26. 스피노자 2

27. 스피노자와 스피노자주의 (Spinoza et le spinozisme)

28. 왜 스피노자 르네상스인가?

29. 스피노자 철학에서 정치적-종교적 함의

30. 로크 (John Locke, 1632-1704)의 사상

31. 라이프니쯔(Gottfrid Leibniz, 1646-1716)

32. 라이프니쯔(1646-1716) (Leibniz, BOUVERESSE)

33. 버클리(George Berkeley, 1685-1753)의 사상

34. 몽테스키외(Charles Louis de Secondat,Baron de Brede et de Montesquieu, 1689-1755)

35. 볼테르(Voltaire: Fran ois-Marie Arouet, 1694-1778)

36.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의 사상

37. 루소//연표

38. 칸트 (1724-1804) (La Philosophie critique de Kant: Doctrines des facultes), 들뢰즈

39. 칸트와 칸트주의 (Kant et Kantisme) 라크르와

40. 쇼펜하우어(Artur Schopenhauer, 1788-1860)

41. 꽁트(Auguste Comte, 1798-1857)

42. 꾸르노(Antoine Augustin Cournot, 1801-1877)

43. 마르크스(Marx 1818-1883), 그라프 //연표

44. 마르크스사상 (Le marxisme), 르페브르

45. 마르크스의『루이 보나파르트의 안개 달 18일』에 관하여

46. 스펜서 자서전(Spencer, 1819-1903)

47. 스펜서와 학적체계

48.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

49. 니체의 사상 //연표

50. 프로이드 (Freud, 1856 ?1939) GRAF Alain

51. 베르그송 전기 (1859-1941) (슐레즈와 보름스)

52. 바슐라르(Gaston Bachlard, 1884-1962)

53. 비트겐슈타인(1889-1951) Graf.

54. 비트겐슈타인의 사상

55. 비트겐슈타인 (히틀러와 스탈린사이의 관계, Delacampagne)

56. 스트라우스(Leo Strauss, 1899-1973)

57. 1900년 이후 출생 철학자들

58. 라깡(Jaques Lacan, 1901-1981)

59.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

60.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 )

61.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 Graf.

62. 레비-스트로스 (Levi-Strauss 1908- ) Graf.

63. 롤즈(John Rawls 1921-2002)

64. 들뢰즈(1921-1995) 구조주의를 어떤 기준으로 재인식해야 할까?(1967)

65. 들뢰즈 (1921-1995) : "차이와 반복" 의 영문판 서문에 관하여 // 참조1 // 참조2 //참조3 //평가

66. 푸꼬 (1926-1984) : 4. Genealogies et strategies, DESCAMPS Christian

67. 브루디외(Pierre Broudieu, 1930-2002)//생애

68.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 )

 

 

  철학서 목록

 

1. 물 [수(水)] : 수질(水質)을 높이자. (ms 22/03/04)

2. 여성 사상가에 대하여 (ms 25/06/02)

3. 데카르트의『성찰(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 1641)』해제

4. 스피노자(1632-1677)는 한 신비주의자 이다.(ms 23/11/00)

5. 스피노자에서 신비주의 (ms 30/11/00)

6. 모로(Moreau)의 『스피노자(1975)』에서 등장 인물들 (ms 21/12/00)

7. 스피노자: 모든 고귀한 것은 힘들뿐만 아니라 드물다.(ms 28/09/01)

8. 스피노자는 사과나무를 심었는가? (ms 20/07/01)

9. 볼테르(1694-1778) 유감 (ms 11/02/01)

10. 볼테르: 관용론(Trait de la tol rence, 1763)//참고

11. 루소(1712-1788)와 볼테르: 불의 본성과 물의 지성 (ms 15/04/01)

12. 루소: 『학문과 예술론(Discours sur les sciences et les arts, 1750)』

13. 루소: 『인간 불평등 기원론(Discours sur l'origine et les fondements de l'inégalité parmi les hommes, 1754)』

14. 루소:『인간 불평등 기원론, 1754』의 얼게와 요약 (ms 31/04/04)

15. 루소: 『인간 불평등 기원론, 1754』해제

16. 루소: 『인간불평등기원론, 1754』에 나오는 인물들

17. 루소: 『사회 계약론(Du contrat social, 1758-1761)』// 얼게

18. 루소: 『에밀(Emile, De l'education, 1762)』의 얼게

19. 루소: 『에밀(Emile, De l' ducation, 1762)』해제

20. 루소: 『사브와 지방 부사제의 신앙선언(La Profession de foi du vicaire savoyard)』

21. 루소: 『언어 기원론(Essai sur l'origine des langues, 1781)』

22. 로베스삐에르(Maximilien de Robespierre, 1758-1794) :「최고존재에 관하여(Sur l'Etre suprême, 1794)」

23. 칸트의 『순수이성비판(1781, 1787)』의 간추림

24. 맑스의 세 근원과 네 스승

25. 스펜서(Spencer)『심리학의 원리(Principles of psychology, 1855)』

26. 니체: 『비극의 탄생(La naissance de la trag die, 1872)』// 자평

27. 니체: 『비극의 탄생(1872)』 발췌

28. 니체: 『도덕의 계보(La genealogie de la morale, 1887)』//평가//자평

29. 니체: 『도덕의 계보』서문//제 1 논문//제 2 논문//제 3 논문

30.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기표와 기의 (Signifiant et signifi?) (ms 04/08/03)

31. 까뮈(Camus, 1913-1960)의 부조리와 보상금의 부조리 (ms 20/02/03)

32. 베르그송: 19세기 전환기를 넘어서려는 새로운 철학의 태동(ms 25/02/03)

33.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 1907-2003) (ms 25/05/02)

34. 그랑제(Gills Gaston Granger, 1920- ) (ms 19/07/04)

35. 들뢰즈의 생성론과 의미논리 (ms 20/09/01)

36. 들뢰즈 『차이와 반복(Différence et répétition, 1968)』

37. 들뢰즈 『차이와 반복, 1968)』의 얼게

38. 들뢰즈 『의미의 논리(Logique du sens, 19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