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다움..........美/2. 아름다움 (美)

아름다움 (美)

오갑록 2011. 4. 16. 17:57

멋진 ...... 

 

삶의 목적을 별도로 정의 할 수 있을까? 

만일 정의를 내린다고 한다면,

그 주제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일까?

아니면, 무엇인가를 "남기기 위해서" 일까?

그도 아니라면, "삶의 과정" 자체가 더 중요한 것은 아닐까? 

만일, 그 과정이 중하다면 그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

 

보내고 있는 "시간"을 자각 하며,

"참다운 것, 선한 것, 아름다운 것들"을 느끼는 데 중요함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름다움, 미감(美感) 에 관한 용어의 정의와 이에 관한 철학적 개념들을 살펴 본다.

중첩되고 난해하지만 일반상식을 보충하는 내용 정도로 생각하며 정리해 본다.

   

 

■ 이성(理性)과 아름다움

 

   기쁨, 슬픔, 분노, 욕망, 불안 등의 정념(情念)은 어둡고 비합리적인 힘으로서 우리 내부에서 폭발하곤 한다. 이것을 이성적 의지로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면 정신의 자율성을 지킬 수 없다. 여기서 이성에 의한 정념(情念) 지배라고 하는 도덕적 문제가 발생한다.

 

성리학에서 인성(人性)과 사람의 감정을 47정으로 설명하는데 맹자는 인. . . 지의 실마리가 되는 4단을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으로 말하고, 예기(禮記)에서 칠정을 희(), (), (), (), (), (), ()으로 나눈다.

 

칸트에 따르면 본능이나 감성적 욕망에 기초한 행동에 반해서 의무 또는 당위 의식에 의해 결정되는 행위는 '이성적'이라고 했다. 우리들에게는 자율적으로 자기의 의지를 결정하는 이성적인 능력이 있어 그것에 의해 도덕적 행위가 가능해진다. 이것이 이론이성과 구별되는 실천이성이다.

 

감성이 감수성의 능력인 데 대해 이성은 자발성의 능력으로 여겨지는데, 이러한 경우 이성과 오성(悟性)은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성은 흔히 오성과 대립하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일찍이 개념적, 논증적 인식능력으로서 이성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실재를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보다 고차원적인 인식능력을 오성 또는 지성이라 불렀다.

그에 따르면 오성은 감각의 다양성을 개념적 통일로 이끄는 피제약적(被制約)인 인식 능력인 데 대해, 이성은 판단의 일반적 제약을 끝없이 추구하는 무제약적(無制約)인 인식능력이다.

 

이성(理性, reason)은 사물을 판단하는 힘을 말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일련의 전 단계가 요구된다. , 오감을 통한 인지 과정과, 인지된 지식을 저장(기억)하는 과정, 이것을 때 맞춰 골라 내거나, 넣고 빼며 조합하는 과정을 거쳐서 판단에 이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사물의 판단이란 무엇일까? 이성은 참과 거짓, 선과 악을 식별하거나 아름다움과 추함을 식별하는 능력을 의미하며 이를 통해서 인간이 인간답게 되고, 동물과 구별 짓게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참과 선함 그리고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있음과 없음을 구분 짓는 “참” 의 실체를 찾아 철학과 종교의 역사가 오랫동안 어우러져 왔지만 또렷한 해답을 기대한다는 것이 우스꽝스럽게 생각들 때가 많다. “선”함의 의미도 배부르고 따스하며 안락한 정도로 밖에 여겨지지 아니함은, 나 스스로가 배부른 돼지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이 “아름다움”인가? 에 대한 답 또한 쉽지는 않다. 이성의 힘으로 판단 되는 참과 선 그리고 아름다움, 진선미는 서로 상호 연관되어 서로가 엮어 진 듯 하다.

 

 

□ 감각과 아름다움

 

. 감각의 형태

 

감각(感覺)이란 외부자극으로 의식에 변화가 생기는 것을 의미하고, 각 감각기관은 외부자극을 활동 전위로 바꾸면, 머리로 신경을 통해 전달 되고, 의식에 변화가 생기게 된다. 외부자극은 물리적 (, 화학, 기계, 온도, 전기 등) 형태로 받게 된다고 한다.

 

생물은 몸 안팎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감지하고 그에 대해 적절히 반응함으로써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나간다. 환경의 변화에 대한 정보를 자극이라 하고 우리의 뇌는 이러한 자극을 빛, 소리, 온도, 냄새, 맛 등으로 해석한다. 이러한 자극을 감지하는 생물체의 능력을 감각이라고 한다.

 

 . 시각은 광 자극을 전기적 신호로 (크기, 모양, , 원근, 양감, 질감)

 . 청각은 공기의 압력 변화(소리)를 전기적 신호로, (균형과 속도도 감지)

 . 촉각은 피부의 압력 변화를 전기적 신호로

 . 미각은 침 또는 수용액에 녹아 있는 화학 물질에 따라 전기적 신호로

 . 후각은 공기 중의 화학 물질에 따라 전기적 신호로 하여 정보를 뇌로 흘리며

 . 그 외에도, 평형감각, 내장감각, 성감 등의 감각기관도 특색 있는 정보를 흘린다.

 

. 지각

 

지각은 감각기관을 통해 알게 되는 외부자극의 차이를 인식하는 것으로 몇몇 특성을 가지고 있다.

 

. 비교에 의한 지각기능

지각의 거의 모든 경우는 절대적이라기보다는 상대적인 것이다. 정확한 지각은 항상 관계의 지각이다. 서로 다른 대상간의 크기 비교나 음의 높이, 시각적 밝기, 색상 등도 정밀한 판단은 어떤 기준과의 비교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멜로디나 하모니도 음계 사이의 관계에 기초한다.

 

. 무의식적 변별

변별이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는 거의 전적으로 의식의 정의에 의존한다. 그러나 정확한 변별이었다 하더라도 그 일에 관한 기억의 흔적을 남기지 못해 몇 분 후 또는 몇 초 후에 지각이 일어났는지 또는 무엇을 지각했는지를 피험자 자신이 말할 수 없는 경우, 통상 그 변별은 무의식적이라고 간주한다. 일상적이고 습관화된 변별은 모든 급속한 변별과 더불어 이런 종류의 변별이다.

 

. 감각과 아름다움의 관계

 

감각기관을 통하여 들어 온 외부 환경변화에 대한 이성(理性, reason)의 결과가 나의 몸 또는 나의 몸과 가까운 (친숙하다고 생각 되는) 쪽으로 선()한 방향이라고 판단 될 때, 또는 감성이 선()한 방향이라고 판단될 때 이것을 아름답다고 하거나, 미적(美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통념에 준해서, 감각기관별 주제를 구분해서 그 요소들을 엮어 본다.

 

   . 시각   미술, 건축, 조각, 자연

   . 청각   음악, 운동, 자연

   . 촉각   피부, 자연

   . 미각   먹거리

   . 후각   냄새, 향기

   . 지각   , 문학, 종합예술 등 (각 감각기관의 상호간 연상효과)

   . 기타   평형감각 균형, 내장감각 포만감 등, 성감 성감만족 등

  

아름다움은 서로 다른 감각기관이 긍정적으로 수용한다는 전제 아래에서만 지각되고 인정된다고 보인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배가 고프면 허기라는 고통(악함)으로 인해 자연의 아름다움을 인지 할 수 없게 된다는 말이다. 여성의 아름다움을 말한다면 이는 시각적인 것 외에도 성감, 촉감, 여성다움 등 다른 감각기관의 연상효과가 모두 선()한 방향일 경우라고 생각된다. 시나 소설 문학의 장르에서도 여러 가지 감각의 연상효과에 따라 아름다움이 표현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넓은 의미에서 아름다움의 근원은 의식주 충족과 씨 불리는데 좋은(선한) 방향으로 갈 수 있는, 생체(동물) 근성에 뿌리를 둔다고도 생각 할 수 있다. 먹고 마시고 싸고 성장하며 씨 불리기 좋은 방향으로 향할 때 이를 두고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시각, 청각 등 오감을 통한 아름다움들은 직접 또는 연상에 의한 간접 방식으로 삶을 선한 곳으로 이끄는 것들이라고 판단된다. 아름다운 음악이 그렇고, 아름다운 미술품이 그러하며, 멋진 음식이 그렇다. 자연, 인체, 건축예술, 연극처럼 몇 가지 감각의 복합요소가 적용되는 것들도 기본은 비슷하다.

 

사회활동, 경제활동, 심지어 문화나 군사 등에서도 같은 맥락의 아름다움이 통용 된다. 그 때의 의미는 나 또는 내가 속한 사회에 선한 방향으로 일이 진행 됨을 의미한다. 사회활동에서의 아름다움은 봉사나 덕행으로 내가 속한 곳을 보호함이며, 경제활동에서의 아름다움은 커다란 이득을 통한 사회 공헌이고, 전쟁터에서의 아름다움은 내가 속한 편이 승리로 이끌도록 공헌 할 때를 의미할 것이다. 나를 구심점으로 나의 가족, 나의 이웃, 나의 종족, 내가 속한 인류에 선()한 방향으로 향하는 사물 또는 행위들을 두고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종교에서 “아름다움”이란, 그 종교가 지향하는 이상향과 가치 기준들이 한 방향일 경우를 선()하다고 여기게 될 것이므로, 교리에 따라 자신을 억제하고 참아야 하는 것이 개인과 종교 각 주관에 따라 항상 선()하다고 할 수 있을까 하는데 의문점이 남는다.

 

사상, 철학, 종교에 등장하는 초월과 신비 그리고 미지에 관한 형이상학적인 아름다움은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오감을 통한 감각으로 받아 들일 수 있는 크기는 유한하지만 형이상학적인 면에서의 크기는 무한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더 큰 아름다움을 느낄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해 본다.

 

 

형이상학적인 곳에 뿌리를 둔, 사상, 철학, 신앙 등에서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초월과 신비에서의 선함(악함)은 무엇이고, 아름다움(추함)은 무엇일까?

 

느끼고 생각하면서, 근심에 대한 보상을 얻거나 기쁨을 누릴 수 있을 때 그것은 “아름다움”이며, 느끼고 생각하면서, 지난 일 또는 미래에 대한 근심이나 두려움이 더해 진다면 그것은 “추함” 일 것이다내가 (또는 우리) 선한 방향으로 될 수 있을 때, 그것을 아름다움이라고 정의한다면, 그 답이 어려운 일은 아닌 듯 하다.

 

 

□  아름다움과 시간의 연계성

 

밥상 위의 맛난 반찬을 “밥도둑” 이라고도 말 한다. 사랑하는 이들의 시간은 덧없이 흐르고, 번창하는 사업가는 잇속 챙기기에 일년이 하루 같다.

 

아름다움은 삶의 “시간 도둑”이 아닐까?

뭇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느끼는 황홀경 속에서는 

"나의 시간"들이 언제나 짧게만 느껴지니……

 

   2008. 1. 1.

   오갑록 (K. L. Oh)

 

 

 

 ■ 아름다움 ()

 

                                                                                             ウィキペディア(Wikipedia)중에서 

                                                   미() “아름다운 일, 또는 아름다이며, 자연의 사물 등에 대한 감각적으로 소박한 인상, 예술 작품에서 받는 감동적인 감정, 혹은 인간의 행위의 윤리적 가치에 대한 평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미로서 해석될 수 있다. ()는 일반적으로좋은 일이다, 따라서 철학적인 표현으로는()”과 어떤 무엇인가가 관련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보기 좋게 핀 장미 꽃을아름답다라고 표현하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모나리자 미소를 아름답다고 평가한다. 고대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는미녀로 유명하고, 수학자들은 추상수학인 리군(Lie group)이나 이데알(ideal) 이론에 나오는 정리를 아름답다고 말한다. 모차르트나 포레의 음악은 섬세한 아름다움을 갖는다고 말하고, 헤르만 헤세는 작품에청춘은 아름다워라는 제목을 붙였다. 모습이 아니고 아름다운 마음의 소유자”라는 표현도 있다.

 

이러한 말이 쓰이는 것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아름다운 일, ()”, 무엇인가 좋은 일이거나 기분 좋은 것이면서도, 그것은뛰어난 것이며, 또한 사람들에게감동을 주는 그 무엇이라는 것이다.

 

 

□   미()의 구체적인 종류

 

()를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곤란하며, 그 정의를 내리기 위해 미학이라는 하나의 학문이 성립될 정도이다. ()의 종류 또는 범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 자연미;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 자연의 조형 (그랜드캐년 등)

  . 조형미; 건축 구조물의 아름다움 (궁전, 성당, 피라미드)

  . 예술적 미; 모나리자, David의 상, 인상파의 회화

  . 기능미; 수공예품, 도자기, 파이프, 유리 제품

 

. ()의 이미지

 

사람에게 있어서 미()란 개념적으로도 생각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이미지로서도 생각할 수도 있고,, 때로는 그것들이 중첩되어 상상될 수도 있다.

  . 영화; 마릴린 몬로, Brigitte Bardot

  . ; 이사도라 던컨

  . 회화 : 비너스의 탄생, 모나리자, 고야의 나체의 마하

 

철학에서 미()의 개념에 대해서는 이미 훌륭한 설명들이 있다. 이는 철학에서 미()에 관한 사상이나 이론, 광의로는 "미학"에서, 미의 개념의 역사로서 정리된다는 생각이 된다.

 

 

□   철학에서의 미()

 

()란 가치관념, 가치인식의 한가지인 것이다. 인간에 있어서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관념에 따른 표상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문화와 개인의 주관 테두리를 넘어 초월적인 개념지정을 하려고 할 때는 명확히 규정하기 곤란하다. 그러므로 아름다움, ()의 보편적인 정의란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미()는 감성적 대상 파악에 있어서 초월론적으로 인간 정신에 각인되는 보편적 개념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는 측면도 있다. ()의 정의는 다양하지만 미()의 현상과 경험은 이 세상에 널리 존재한다는 사실이 성립된다.

 

여기서는 주로 고대 그리스 로마 등의 서구철학 전통의 "()"의 본질 탐구와 인식론적인 개념으로서의()"에 대한 여러 가지를 고찰하여 본다.

 

. ()라는 단어의 다양성

 

철학에서의 " ()"의 개념과, 그것이 어떠한 것인지 등의 논의는 " ()""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는 " ()""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 범위" 등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파악되어 있음을 전제로 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어의 " (kalon)"라는 단어는 우리의 일반적인 말의 " ()"의 의미와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라틴어의 ", 아름다운 것 (pulchrum) " 또한 그리스어의 "카론 ()"과는 또 다른 의미 범위를 가지고 있다. 다른 언어 사이에서 동일한 의미를 가진 단어는 원래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플라톤이 "()"에 대해 뭔가를 논의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어의 "카론"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와 관련된 개념으로 "()"이라는 가치 개념이 플라톤에 의해 논의되고 있다. ""에 해당되는 고대 그리스어 "아레테"는 우리의 ""에 없는 특별한 의미가 있고, 그것은 영어 virtue에도 또한 없는 것이다. 그러나 라틴어 virtus는 그리스어 "아레테" 의 넓은 의미와 거의 동일한 의미 범위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언어에서 같은 의미를 갖는 단어란 없다고 본다면, 서로 다른 언어로 " ()""에 해당하는 단어에 대하여 사색과 토론을 하는 데는 위험성이 따르게 된다.

 

. ()"의 개념추정

 

따라서 "()"라는 개념은 그것이 사용되는 언어에 따라서 의미가 다르고 같은 언어라 하더라도 시대와 사용 지역이 다르면 의미에 차이가 발생한다. 무엇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인지는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 기준이 없는 것이 미()의 개념이다, 문화와 언어를 뛰어넘는 미()에 해당하는 낱말 자체의 보편성이란 없다.

 

그러나 철학에서는 "() (보편적인) 개념"이 존재한다는 전제하에 추정하는 것이다. " ()"의 개념에 대한 바탕으로는 고대 그리스에서 논의된 미(), 로마 시대의 미()의 관념, 중세에서의 미()의 개념, 그리고 근대와 현대 철학의 "()"의 개념을 가지고 개괄적인 가정을 하기도 한다. 혹은 의미나 보편적인 "형상()"에 대해 고찰 하기도 한다.

 

"소녀가 아름답다 (he parthenos kale)"라는 설명에서 "아름다운 (kale)"은 어디 까지나 술어인 형용사이고, "아름다운" "아름다운 것, " 사이에는 분명히 큰 거리가 있다. 이런 거리를 이해하려면, 고대 그리스에서는 형용사 중성형을 특성 추상 명사로 간주하여, 존재(on)의 부류로서 생각하는 관습에서 온 것이다. 그 전형이 플라톤의 이데아 설이다.

 

이 때문에 고대 그리스에서의 미() (kalon)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사물이 진정 어찌 아름다운 것인지 그 근거가 되는 "존재"로서의 개념이 규정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름다운 사물, 사람"에 대한 논쟁은 역사적으로 이 세상의 문화로서 존재하지만, "아름답다는 것"의 근거인 "()"에 대한 사색이나, " ()의 개념" 규정은 고대 그리스를 시초로 한다.

 

 

□  ()의 형이상학

 

. 존재론적 파악

 

()의 개념은 이 세상에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사물, 또는 표면에 나타나는 현상(事象)으로서의 "아름다운 물건, 아름다운 것 (독일어 : Das Schoene)”과 필연적인 관계를 가진다. 그러나 이 " ()의 개념 (존재)"이란 무엇인가? 사람이 경험하고 때로는 감동하는 " ()"의 본질에 대해서는 철학사에 있어서 서로 다른 해석들이 뒤 따른다.

 

두 가지의 대표적인 사고 방식이 있는데,

  . 첫째는 미()의 존재는 사물이나 표상(事象)이 가진 고유의 성질이라고 하는 "존재론적 파악"

  . 둘째는 미()의 존재는 사물에 귀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각하고 인식하는 인간 주관이

    사물이나 사건에 부여하는 성격이라고 하는 "인식론적 파악"이 있다.

전자는 고대 그리스 철학부터 우세하던 견해이고, 후자는 근대 이후에 등장하는 철학적 견해이다.

 

존재론적 파악의 대표적인 주장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플로티노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프리드리히 셸링 등이다. 더 말하자면, 전자는 미()의 본질을 부분의 균형(均整, 고루 가지런함) 속에서 구하는데 비해, 후자는 부분을 부정하고 전체적인 것(총화, )을 가지고 미()의 근본을 규정하는 방향이라는 완전히 대립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미()가 결코 인식과 떨어져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플라톤에서 미()는 사랑, 즉 인식의 욕구적 능력의 지향적 대상으로서 파악되고 있다 (“향연”). 또한 미()의 성격을 균형(均整,) 또는 총화()에서 찾는다는 이론도, 인식에의 적합성에 많은 논거를 두고 있다. 토마스는 미()는 궁극적으로 신에게 귀착되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시각으로 기분 좋게 파악되는 것을 미()라 부른다"(“大全)라고 하여, 그 인간적 인식능력과의 연관성을 부정하고 있지 않다.

 

예술가 미학이라고 불리는 화가나 문인의 미론(美論)도 대개 이러한 방향에 의한 경우가 많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따르자면 예술가는 자연의 기하학적 구조를 미()라고 말하는 가장 이상적인 상태에서 재현하는 능력을 가진 기하학자이고, 그것이 그를 대상보다 정확하게 파악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호가스(William Hogarth)의 미() 이론은 선과 그 인상을 추구 함으로서, 소묘의 미적 효과에 대해 연구하고 미() 그 자체의 성질을 형상에서 설명하려고 했다.

 

게다가 이러한 존재 그 자체의 성격으로서의 미()를 파악하는 방향은 많은 다른 가치개념과 미()가 공통  또는 동일하다는 이론에 귀착된다. 셸링은 미()를 객관적 절대성과 근본적으로 선() ()를 동일한 것으로 보았다.

 

. 인식론적 파악

 

근대에 들어서면서 미()가 존재를 뜻하는 용어가 아닌 인간 인식의 구조에서 설명코자 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는 심리학적 파악과 협의의 인식론적 파악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영국 경험론과 대륙 합리주의 철학의 영향하에 발달한 학설이지만, 나중에는 실증적 심리학의 영향을 받아 현대에 있어서 미()에 관한 파악의 한 조류를 이루고 있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에드먼드 버크, 이마누엘 칸트 등이 있다.

 

18 세기 영국 미학에서는 심리학적인 미()를 파악해 보려고 했다. 버크는 존 로크의 영향을 받아 미()를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본능적인 욕망에서 설명하려고 했다. 한편 독일에서는 합리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고, 라이프니츠의 표상 이론을 계승하는 인식론적 미론이 전개된다. 알렉산더 바움가르텐의미학에서 미() "감성적 인식의 완전성"이라는 등식이 도출된다. 이러한 근대의 인식론적 파악의 정점에 있는 곳이 이마누엘 칸트이다.

 

칸트에서의 미()는 네 가지의 징표를 주고 있다. 그 인식 근거는 감성이나 오성(悟性)의 선험적(先驗的) 제약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미()는 지극히 주관적이다. ()는 일반 감각기관에 따라 판단의 보편 타당성을 요구하더라도, 그 자체가 대상의 본질이 아니라 "구상력(構想力)과 오성(悟性)의 자유로운 장난 (das freie Spiel der Einbildungskraft und des Verstands) "으로 귀착된다. 이 인식 능력의 자유로운 장난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름다운 것으로 꼽힌다. 그리고 미()는 지적 능력의 조화, 즉 고급 인식 능력의 이상적인 조화의 실현으로서, 도덕성의 상징인 것이다 (“판단력 비판” 1 ).

 

 

□  ()라는 개념의 측정

 

()라는 가치 영역에 이르는 이론에는 크게 두 가지 방향이 있다. 하나는 다른 가치 영역, 즉 진(), ()과의 관계이다. 또 하나는 미()라는 가치 영역 자체의 세분화이다.

 

. 다른 가치 영역과 미()의 관계

 

()가 좋은 것이라는 것으로만 한정하려고 한다면, 다른 좋은 것들과의 관계가 문제로 제기된다. 고대부터, 이것은 미와 진 혹은 선과의 연관성, 혹은 미와 쾌 이를 테면 무엇인가 좋은 것에 의해 야기되는 감각과의 연관성으로서 문제화 되는 것이다.

 

. 카로카가티아 (kalokagathia)

 

고대에는 가치 영역의 자율은 자명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각 가치 영역의 공통성이 추구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어원으로 "아름다운"을 나타내는 단어는 종종 "좋은"과 공통점이 있었고, 현대에서도 많은 언어에서 "아름다운"을 나타내는 단어는 일상 언어에서는 종종 "좋다" "기분 좋은"이 포함된 의미(含意)로 사용된다. 전반적으로 이러한 가치기준으로 전체 미()는 선과 관련된 경우가 많으며, 도덕적인 면에서 갖는좋음의 한가지로서 생각된다.

 

서양 철학의 발상지인 그리스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아름다운 사람"(ho kalos)은 외모의 미() 보다는 사회적 지위나 능력, 태생의 우월함을 가리는 말이었다. "아름다운 사람"이란 폴리스의 시민으로서 윤리규범을 잘 따르는훌륭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 ()"의 지극히 윤리적인 색채를 잘 표현하는 개념이 "善美"(kalokagathia 카로카가티아)이다. 선을 나타내는 단어와 미()를 나타내는 말에서 만들어낸 이 단어는 그리스적 인간의 실현을 위한 이상형으로서 제시되고 있다.

 

헤시오도스의 반도라 신화에서는 이 여성의 외모는 여신처럼 아름답고 마음은 개 같이 야비하여 그 때문에 세상은 재난과 악 (kakia)으로 가득했다.(“일과 나날”). 즉 미()가 감각적으로는 안락하여 어느 정도되면 선 (agathon)으로 되는 게 아니라 죄악과 재앙으로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미()는 덕과는 거리가 먼, 이른바 kalokagathia가 일반적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외모가 아닌 덕의 미(), 정신의 미()를 생각할 수 있다 ( "추악함이나 허물 없이 죽는 것이야말로 아름답다"(아이스큐로스). 만일 이 덕 (arete)으로서의 미()를 플라톤에 뿌리를 두고 구한다면, () (kalon)와 선 (agathon)은 하나가 되고 카로카가티아 (kalokagathia)로 되는 개념이 성립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 단어는 쿠세노본에서 유래한 것이며, 플라톤에서는 kalos kagathos라는 관용구가 많이 사용되고 있다.

 

. 진리와의 관계

 

또한 미()는 진리와도 자주 언급되고 있다. 플라톤이나 플로티노스에서 미()는 때로 철학자가 알고자 하는 최고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맥락 아래, ()는 진()과 동일시 되고 있다. ()를 아는 것이 진리에의 지식의 중추가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 경우, 선과 앎()도 본질적으로는 동일하다고 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서 미()는 독립된 가치 영역이 아니라 선()과 진()에 종속적인 것이며, 여기에서 거꾸로 선이나 진을 표현하기 위해 미를 이용한다고 하는 발상이 나온 것이다. 종교 예술이나 왕족의 권력을 시현하기 위한 장식 등은 이러한 미()를 이용했다고 할 수 있다.

 

. ()의 자율성

 

()에서 독자적 미를 느끼는 것은 감성적인 것에 의해 직접 관련되기 때문에, 미가 선이나 진과는 다른 영역에 있음을 고대로부터 의식하고 있었다. 플라톤은 시가 주는 외견상의 기쁨과 참된 좋음의 구별에 대한 논의가 되고 있다(“국가”). 인간의 이성적 능력의 분류는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수행되고 있지만 (“니코마코스 윤리학”, 거기에서 진리를 아는 능력으로서의 지(), 윤리적 실천을 행하는 능력으로서의 사려(思慮), 물건을 만드는 능력으로서의 기술적인 지혜와는 구별된다 (하지만 여기서는 기술적인 지혜는 특히 아름다운 것들에만 관련된 능력이 아니라 제작 일반의 능력이다).

 

()가 고유의 능력이라고 하는 입장의 확립은 감성에 독자적 존엄을 주고자 하는 시도와 병행되고 있다. 알프레드 보이무라는 17 세기를 "감성의 시대"라고 불렀으며, 이 시대의 감각론이나 취미론에 추가하여 미적 자율성의 파악의 계기를 보게 된다. (?)

 

칸트에 의해 미의 자율성 (Autonomie)이 확립된다. 칸트는 미()와 도덕의 관계를 주장했지만, 그러나 각 영역의 자율성의 확립이 전통적인 가치 영역이 갖는 흐릿한 교류를 갈라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프리드리히 쉴러는 이러한 칸트의 엄격주의에 반감을 가지고 미()와 윤리의 긍정적인 관계를 주장했다 (“미적 교육 이론). 미학자 쿠노 피셔는 쉴러의 시도를 "인간론적 미학"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미()의 자율성을 주장하고 옹호하는 운동이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주류가 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다양한 미()를 표현하는 가능성이 예술가와 관련된 것으로서, 그 표현이 시대에 따라서는 받아들여진다는 부산물을 동반한다. 그 반향으로서 현대 예술에서는 다시 사회와 예술의 접근이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가 궁금하여 지고 있다.

 

. 미적 범주

 

특히 근세 이후, 서구에서는 미()를 세분화하고 각각 독자적인 정의를 제시함과 동시에 상호 관계를 공식화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이러한 세분화된 미적인 것의 영역을 미적 범주라고 부른다.

 

미적 범주의 실질내용은 시대나 학자에 따라 다르지만 대표적인 미적 범주는 미() 외에도 뛰어나게 아름다움(優美), 존엄하고 고상함(崇高), 추함(), 해학(滑稽) 풍자 등이 있다. 다도(茶道), 음악, 국악 등의 예도론(芸道論)도 미적 범주의 일종이다. 추함은 전통적으로 미()의 대립 개념이다. 이는 미()가 결여된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추함을 예술로서 표현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에는 추함도 적극적인 가치를 지닌 미적 범주의 하나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예술에 추함을 표현하는 시도도 등장했다.

 

 

□  한자에서 "()"의 의미

 

"()"라는 한자는 중국에서 2000 년 이전부터 쓰인 것이다. "()"라는 한자는 의()나 선()과 같은 모양으로 일종의 요소를 합성하여 만든 문자이다. 각각 상단은 "자가 있다.

 

()는 양()과 대() 자가 합쳐서 된 것이고, ()는 양()과 아() 자가 합쳐서 된 것이다. 공자의 논어에 의하면, ""은 종교의식에서 제물로 이용되는 동물로서, "희생의 동물"이라는 의미가 있다. 때문에 ""을 부수로 한 이 합성 한자에는 "희생"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또는 "희생"의 의미를 갖는 개념을 표현하기 위하여, 이 한자가 합성되어 만들어 진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 "우리가 책임질 수 있는 희생"이라는 의미가 있으며, "()" "제단에 쌓을 수 있을 만큼의 희생"이라는 의미가 있으며, "()" "위대한 희생"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 경우 희생이란 "자기 희생"을 통해서, 다시 말해 공동체의 운명을 위해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희생, 즉 스스로의 목숨을 바쳐 대상을 숭고하게 한다는 함축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환언하면, 인간의 도덕윤리에 있어서 최고의 숭고한 행위가 "()"에 있다는 것이다.     

 

 

 

 

■ 미학 (美學, Aesthetics)

 

. 미와 예술을 대상 영역으로 삼고 있는 학문.

   . 예술이란 인간의 많은 활동 가운데 사물의 창조와 같은 특수한 활동을 지시하는 개념

   . 미는 진, 선과 더불어 인간이 추구하는 많은 가치 가운데 하나를 지시하는 개념

   . 미가 진이나 선과 구별되며, 예술은 과학이나 도덕과 구별되는 고유한 가치의 활동

   . 인간의 활동 (, 음악, 회화, 조각, 건축 등)과 미와의 관계를 정립

   . 미가 예술만을 통해서 실현되는 가치는 아님

 

. 미학이란 무엇인가?

                                                                                     

플라톤이 영원불변의 이데아 (..) 사상과 병행하여 예술역할에 대해 자신의 사상을 전개한 것처럼, 철학은 그 기원부터 미학적 부류이며, 이론과 사유에 결부되어 있었던 것이다. 예술이 철학의 지대한 관심사의 한 축으로서, 철학의 관심은 언제나 예술과 관련되어 있었다. 본래 과학, 논리학, 수학, 물리학 등의 특수 학문들이 서서히 철학과 형이상학으로부터 분리되기 이전에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미학도 오랫동안 철학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프랑크푸르트 철학 교수인 A.G. 바움가르텐(Alexaner Gottlieb Baumgarten, 1714~1762)은 새로운 철학 분야에 대해 정의 내린 바 있다. "인식과 감각적 표출 양식의 학문을 미학이라고 한다. 만약 그것의 목표가 사고와 감각적 담론을 최하위로 치부한다면 그것은 수사학이며, 만약 그것에 대한 보다 큰 완성을 목표로 한다면 그것은 보편적 시학이다." 그러므로 미학은 감성의 학설로서, '하등'하다고 평가되지는 않았다. 바움가르텐은 '명석하고 분명한 관념'의 논리학 분야와, 감성.직관.상상의 다소 불분명하고 혼돈스러운 막연한 영역 사이의 관례적인 구분을 확실하게 하려고 했다.

 

 

□  미와 미론의 역사적인 흐름

 

미는 우리 마음에 즐거움과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서, 고대인들은 아름다운 사물이나 아름다운 색, 아름다운 음만이 아니라 아름다운 사고나 아름다운 제도라는 말을 썼으며, 플라톤은 미의 사례들로서 아름다운 성격이나 아름다운 법, 미의 이념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또한 플로티노스는 아름다운 과학, 아름다운 덕을 말하고 있다.

 

고대인들은 시각과 청각에 국한되는 좁은 의미의 미의 개념을 지니고 있지 않았으며, 청각적인 미에 해당하는 것에 대해서는 화음(harmonia), 시각적인 미에 해당하는 것에 대해서는 비례(symmetria)라는 말을 사용했다.

 

피타고라스의 음악론은 비례의 이론을 낳게 했고 건축, 조각, 회화에 까지 영향을 미쳤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시각, 지각에 기초하여 미의 개념을 정립했다. 미는 수와 척도와 비례에 있다는 이론을 발전시키게 되었고, 이것이 모든 미 이론의 기초가 되고 있다. (서구미학의 대이론(great theory of beauty)이라고 함) 이 이론은 미의 이성적 본질, 형이상학적 기초, 객관성 및 가치 등에 관련되면서 많은 명제들을 낳고 있다.

 

참된 미는 감각이나 상상이 아니라 이성 혹은 마음에 의해 파악된다는 미의 이성적 본질에 대한 주장은 비례에 기초한 미의 개념과 아주 자연스럽게 결합되는 것이었다.

 

미의 형이상학적 기초란 피타고라스에게는 수적 본질의 우주론, 플라톤에게는 이원론적 이데아론이었으며, 플로티노스에게는 일원론적 일자론이었고, 중세를 통해서는 신학이론이었다. 이와 같은 형이상학적 기초의 차이에 따라 이념으로서 완전한 정신적인 미와 불완전한 감각적 미를 구분하게 되었고, 플로티노스의 사상은 그대로 중세의 미론으로 이어지면서 미는 비례뿐 아니라 빛에 있다는 이론이 나타났다. 결과적으로 유출설은 비례를 미의 한 요소로 상대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미의 객관성에 관한 주장이란 미가 아름다운 사물들의 객관적 성질, 즉 비례에 있다는 주장으로서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에 즐거운 것이라는 객관주의적 사고는 미로부터 일체의 상대성의 요소를 배제하고 있다.

 

이 밖에도 고전적인 대이론은 여러 형태로 발전, 예컨대 다양의 통일이나 완전성, 적합성으로 변형되기도 했고, 내용으로서의 이념과 형식으로서의 비례가 결합되는 형태로 발전되었다.

객관적인 미의 개념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속에 일어난 하나의 관념"(F. 허치슨)을 지시하는 말이라는 의미, 즉 미란 불을 쬘 때 불과는 유사함이 없는 따스함의 관념을 얻는 것처럼 비례와 같은 형식적 성질을 지각할 때 그에 반응해서 일어나는 즐거움의 관념을 말한다. 마음 속에 활기 띤 즐거움이 객관적 미의 개념에 있어서 처럼 수반되는 성질이 아니라 정의적인 성질로 전환되고 있다는 점이다.

 

미의 관념, 곧 주관적인 즐거움을 구성하는 한 요소일 뿐 미 자체는 아니게 되었다. 이 경우 미의 경험은 대상으로부터 그러한 미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상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내적 감관으로서의 취미(taste)라는 새로운 개념이 미학사에 도입되었다. 그러나 모든 즐거움이 미일 수는 없다. '이해가 동기 되어 있지 않은' 순수한 무관심적 심리상태에서 갖게 되는 즐거움이라는 특징이 부여되고 있다.

 

그 결과 숭고한 것(the sublime), 풍려한 것(the picturesque)과 같은 새로운 미적 범주가 등장하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객관주의적이었던 미의 대이론은 새로운 취미론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것은 이론 역시 '주관화한' 방향으로 선회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미가 이처럼 미적 가치범주의 하나로 전락할 수 밖에 없는 식으로 미학이론이 발전되었다면 이는 이제 미학이론의 축이 될 수 없다.

 

미와 함께 숭고, 풍려 등과 같은 여러 즐거움을 묶는 통합적 개념이 필요해졌다. 미의 즐거움이나 숭고의 즐거움이 모두 취미라는 내적 기관에 의해 환기되는 무관심적 즐거움의 한 방식들로 정당화한 것이고 보면, 20세기에 크게 유행한 미적 태도론은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나타났다.

 

결과적으로 미 이론은 고전적 고대의 미의 대이론에서 18세기 취미론으로, 그리고 칸트를 분수령으로 해서 미적 태도론으로 대체된다.

 

 

 

 

□ 미학개요

                                                                     .유진 리포트 중에서 발췌

미학이란 철학의 한 분파로서 아름다움에 대한 학문

‘아름다움’의 구조를 분석하고 연구하는 체계를 세우는 학문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미학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A.G.바움가르텐

그 이전은, 이성적 인식의 학문인 논리학과, 감성적 인식으로 구분됨

()란 곧 감성적 인식을 의미하는 철학의 한 분야였음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미적 가치와 기준, 미적 체험, 아름다움의 근거, 예술철학 등의 개념 정립 필요

 

예술철학은 예술작품에서 문제되는 개념과 문제들만을 취급

미학은 자연에 대한 미적 대상이나 체험, 예술에 대한 근본과 존재에 대한 문제들을 다룸

 

예술비평은 예술작품 자체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

미학은 이와 반대로 비판적 판단 안에 포함되어 있는 개념들을 해명하는 것

미학이 미적 가치를 명백히 밝히고 난 다음에야 그 개념들을 사용해서 예술작품을 비평할 수 있다는 순서상의 특성이 있음

 

. 플라톤의 미학개념

 

플라톤은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만들거나 행하는 온갖 것들을 포함하는 기술(Technie)이며

기술은 획득적 기술과 생산적 기술로 나뉘는데 생산적 기술은 다시 신이 만든 계획이나 요소와 같은 현실적 대상의 생산과 인간이 만든 원형에 대한 모사인 이미지(Idea)의 생산으로 분류

 

, 이데아계라는 진리세계가 있고 현실세계는 이데아의 그림자, 혹은 모방이라고 하는 것

 

모든 창조된 사물은 영원한 원형이거나 또는 형상의 모방이므로 이러한 모사물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 역시 가장 낮은 단계의 추측에 의해서 판단된다는 것

예술은 현상의 모방의 모방으로서 이데아계를 실재하는 참다운 것으로 보고, 현실 세계는 이데아계의 그림자로 보았음

 

. 칸트의 저서 중 미학에 관한 저서 ”판단력 비판”에서

 

아름다움의 개념은 기호의 판단에 의해서 형성됨

대상이 언제, 어떻게 아름답다고 언급될 수 있는지 알기 위해서 기호의 판단 분석이 필요하다고 보았음. 기호판단은 직관(이미지)이 다양을 결합하는 구상력의 자유로운 유희와 표상을 하나의 개념으로 통일하는 오성의 자유로운 유희를 바탕에 둠

 

자연, 연역을 통한 간접적 이용과, 구상력, 상상력을 동원한 유희는 오성의 합법칙성 일반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데, 상상력이 자유롭게 만들어낸 표상들, 즉 미적 이념은 특정 개념으로 담아낼 수 없는 풍부함을 지니게 된다고 함

 

.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판단

 

"(Qualitat)에 따라서 ‘아무런 이해 관계없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름답다. 이러한 이유에서 아름다움은 유쾌함과 선이라는 또 다른 만족들로부터 구분된다. 유쾌함은 나의 감각적 욕구의 대상이고, 나는 내 안의 도덕법칙으로 인하여 선을 추구하는데 비하여 아름다움은 아무런 관심 없이도 마음에 드는 것이다. 질에 따른 조화는 쾌감으로 오성의 판단은 ‘질’이 직접 관계되어 상상력을 동원하게 되기 때문이다.

(Quantitat)에 따라서 개념 없이 보편적으로 마음에 드는 것은 아름답다. 만일 내가 어떤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발견하면 다른 것에 관해서도 동일한 것을 기대한다. 관계(Relation)에 따라서 아름다운 것은 목적에 대한 표상 없이 형식에 의하여 합목적적으로 여겨진다."

 

칸트는 여기에서 자유로운 아름다움과 종속적 아름다움을 구분하는데 자유로운 아름다움은 대상이 당연히 어떠하여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개념도 전제하지 않는다. 본질에 관한 아무런 개념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식능력의 형식과 대상형식의 조화를 기초로 삼는 것이다. 종속적 아름다움은 개념을 전제로 하는 대상에서 발견되는데 대상과 개념의 일치가 전제되어야만 성립한다는 것이다.

또한 "양태(Modalitat)에 따라서 개념 없이 필연적으로 만족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름답다. 여기에서의 필연성은 감정에 의해서 규정 가능한 공통 감각을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라고 정의한다.

 

칸트는 숭고함이란 그 자체로 마음에 들기 때문에 아름다움과 일치하는 면이 있으면서도 한편으로 구분 된다고 보고 있다. 숭고함의 개념을 수학적인 것과 역학적인 것으로 구분하는 크게 아름다움은 질에 크게 좌우되지만 숭고함은 양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이다.

숭고함은 "위대한(커다란) 바로 그것" (schlechthin groß)이다. 이 위대함은 "절대적이며, 비교할 수 있는 크기가 아니며 (absolute, non comparative magnum)” 숭고함은 "감각의 모든 기준을 넘어서는 게뮈트의 능력(ein Verm?gen des Gem?ts)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만으로도 숭고하다." 라고 적고 있다.

 

이렇게 칸트가 미에 대한 판단으로부터 숭고함에 대한 판단으로 넘어가는 것은 숭고함이 이성의 이데아와 상관이 있다고 보기 때문인데, 칸트는 "큰 것"이 자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인간의 위대성과 관계되는 문제로 천재에 대한 담론을 하고 있다. 윤리적이고 절대적 능력을 지닌 천재.

 

칸트의 입장은 미적 실제론이 아니라 오히려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규정 근거를 영혼에서 발견하는 미적 관념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미적인 것을 윤리적으로 선한 것의 상징으로 보고, 따라서 판단력 비판은 미학과 윤리학이 만나는 장소를 목적론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미학의 가장 관념적인 체계를 대변하는 철학자는 헤겔로서 변증법적 발전의 최고단계에 있는 이념(Idea)은 예술에서 정신적인 것으로 될 때 진리가 드러나며 동시에 감상자의 소생이 실현된다고 했다.

낭만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예술을 예술가 개인의 정서의 본질적인 표현이라고 보고 그의 작품에 시인과 그의 인격이 드러나게 된다고 보았다. 또한 상상력을 진리에 대한 직접적인 통찰력으로 여겼으며, 따라서 상상력은 예술가의 타고난 재능이고 그것은 자연을 창조하고 드러내며 자연의 배후에 있는 것도 나타나게 한다고 했다.

 

쇼펜하우어는 낭만적 염세주의와 아울러 직관주의 입장이 강하게 나타나는 저술로서 기본사상은 칸트 철학을 바탕으로 삼으면서도 그것을 변형시키고 있는데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현상계의 대상은 플라톤적 이데아의 구체화이며, 이 이데아는 예술적 직관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진다는 것이다. 니체는 낭만주의 예술은 도피주의자의 예술이라고 비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미학은 근본적으로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오늘날에는 미적 현상의 해명에 사회학적 방법을 적용시키려는 ‘사회학적 미학’이나 분석철학의 언어분석 방법을 미학에 적용하려고 하는 ‘분석미학’ 등 다채로운 연구분야도 개척되고 있다.

 

 

 

□ 생태학적 자연미학

                                                             생태학의 철학적 변용 (일부 발췌)

                                                             .승회 교수, 월간미술세계 1999.4.

……

철학의 역사는 이성인간의 역사, '이성사의 한 부분'으로서 지배와 해방의 변증법적 과정이었다. 생태학적 철학의 주된 과제는 주관철학, 인식철학을 비판하고, '이성중심적 자연형이상학을 파괴하고, 이성사의 한 부분으로서가 아니라, ''의 해방을 통해 전체로서의 자연 속에 ''를 자리잡게 하는 것이다.

 

. 자연에 대한 과학적 태도로서의 환경미학

 

…… 생태미학, 자연미학, 환경미학, 경관미학 등 다양한 표현들 중에서 '환경미학'이라는 개념을 자연의 '아름다움', '생생함', '숭고함' 등 자연환경의 미적 체험을 문제 삼는데, 이는 결국 실천적인 문제로 '환경보호', '자연보호'의 논거로 이용된다.

 

환경미학은 자연 대상물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그리스 철학 대부분은 미를 사고의 대상과 연관시켰지, 물질적인 대상과 연관시키지 않았다. 자연에 대한 사랑이 자연에 대한 과학적 태도와 양립 가능한 전통 위에 있다고 하더라도, 암암리에 과학과 예술의 공존가능성이라는 원칙을 깔고 있다. 예를 들면 19세기에 미국 사람들이 옐로스톤이나 요세미티 지역을 국립공원으로 만들었던 이유는 단순히 그 지역 자연경관의 '숭고. 장엄함', '흥미로움',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동물보호의 유용성, 생물. 생태학적 정당성, 지질학적 관심 따위가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 '몸의 선험성'과 생태학적 자연미학

 

'생태학적 자연미학'은 자연의 감성적 인식가능 근거를 문제 삼는다는 점에서 '환경미학'과는 전혀 다른 문제영역이다.

……

예술이론으로서의 미학은 대상세계의 미적 본질을 물을 것이 아니라, '자연이란 무엇인가?'라는 자연철학 본래의 물음과 더불어 '생태학적 자연미'의 자기규정으로 돌아와야 한다.

 

예술철학은 몸을 가진 인간이 자연을 이해함에 있어서 마치 몸(Leib)이 없는, 정신(이성)으로만 마주 대하고 싶어한다. 예술은 그러므로 '인공자연'을 문제 삼는다. 이름하여 '자연으로부터 몸의 이탈!', 즉 자연해석에서 '몸의 탈루현상'은 근대 세계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자연이해에 기술이 개입하기 때문일 것이다. 생태미학은 자연인식에서 "몸의 선험성"을 선취하는 것이다. 외적 자연이해의 눈부신 진보에도 불구하고, 내적 자연으로서 우리의 몸에 대한 이해는 '감성적 인식'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

 

과학으로서의 철학으로 자연에 접근하면, '인식'을 매개로 한 '자연철학'으로 나아가게 하는 반면에, 자연에 대한 감성적 수용으로서 예술을 가지고 '자연'에 접근하는 길은 몸의 선험성을 매개로 한 생태학적 자연미학이 될 것이다. 자연에 감성적 인식원리가 이성적 인식원리를 대신하는 곳에서, 우리는 새로운 '자연과의 연대성'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생태학적 자연미학의 선결 과제

 

……

인간은 자연세계에 속하면서도 어떻게 우주 안에서 고유한 특별한 지위를 누리는가?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다. 그러나 동시에 오직 인간만이 자연의 원리를 통찰할 수 있는 존재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자연을 초월하는 "자연의 타자"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자연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좋은 자연에 주목함으로써 인간의 고유한 지위는 확보될 것이다. 결국 생태학적 자연미학은 자연의 도덕화로 귀결될 것이다.

……

자연은 주체성 안에 자신의 근거를 가지고 있지만, 이 주체성은 자연으로부터 산출된 우리의 주체성이 아니라, 절대적이며, 이상적인 주체성이라는 사실이 인식되기에 이른다. 이런 주체성은 자연의 본질이며 그러므로 자연은 유기체적이며, 정신적인 세계로 자신을 순화시킬 수 있으며, 그래야 한다.

 

이렇게 자연을 형이상학적으로 평가함으로써 칸트 윤리학에 대한 중요한 수정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것은 자연 역시 윤리적 의무의 대상이라는 사실이다. 이 결론은 자연은 이념적 구조에 관여한다는 사실에서 도출된다. 즉 자연은 가치를 실현하며, 이 가치는 불가피한 경우가 아닌 한, 파괴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 육체적 참여를 통한 ''의 해방

 

하이데거는 근세철학사를 존재사의 관점에서 오직 '주체의-자아-강화-과정'이었다고 해석한 바 있다. 근세철학사는 존재론, 목적론이라는 형이상학에 주어져 있던 "존재망각"이 극단적으로 강화되던 시기였다. 존재는 지고하고, 가장 확실한 존재자에 고정됨으로써 자신을 망각하게 된다. 현실-역사적으로 근대는 자연지배에의 노력, 인간의 교육, 삶의 방식의 합리화, 그리고 사회의 국가화라고 규정될 수 있다. 한마디로 통제와 지배를 위한 전략의 시대였다.

 

불안을 만들어내는 억측들, 생존을 위협하는 욕망, 현실을 왜곡하는 환상, 그리고 제한된 자연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필연성 때문에 이성적 인간의 생산은 불가피하다. 이성과 다른 것은 모조리 '비합리화'함으로써 이성인간의 생산비용을 치른다. 이 비합리화는 부분적으로는 순전히 이성의 성취로써 주어지지만, 더러는 '타자'를 배제하고, 오해함으로써 주어진다. 이런 억압에 대해 역으로 초이성적인 것으로서의 자연, 육체, 감정, 환상에 대해 올바른 길이 밝혀지려면, 늘 그래왔던 것처럼 이성이 '이성과 다른 것', '타자에 대한 산파 역할'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서는 안되고, 이성 자신이 스스로를 인식하는 것이다.

……

 

칸트에 의해 시작된 이성에 의한 이성비판은 이 두 사람에 의해 더욱 철저히 되었다. 기술에 의한 자연의 왜곡을 돌이키기 위한 우리의 절박한 과제는 철학 안에서 이런 유형의 반성을 완성하는 일이다. 이로써 사고 그 자체뿐만 아니라, 사고에 관한 사고를 바꾸는 것이다.

 

이성은 소여가 아니라, 성취되는, 필연적으로 성취되어야 하는 무엇이다. 이는 결코 최종적으로 충만 되지 않으며, 충만 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른바 '철학의 무한 과제'이다.

 

이성의 완성은 자율적인 이성인간이라는 이상으로부터, 자연이 우리의 오성 활동에 적합하도록 설치되고 구성되어 있다는 가정으로부터의 전향을 의미한다. 이리하여 이제 이성은 무의식, 육체, 자연으로부터 고립된 궁지에서 해방된다. 이성의 해방이 곧 ''의 해방이며, 육체적인 내가 해방됨은 동시에 '자연의 해방'이다.

……

 

. 우주론적 자연에서 생리학적 자연으로

 

생태학적 자연미학은 자연을 거대하고, 무한한, 다시 말하면 우주론적인 것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생리학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인간은 우주의 무한함에 견주어서 자연을 대했지만, 오늘날의 생태계 위기에 직면하여 유한하고, 일회적인 자연관에로 회귀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주론적으로 이해된 자연관으로 인해 무한정한 행위가능성을 믿었으며, 무한히 확대될 수 있다는 유혹에 빠져, 무한한 우주에서 결핍과 유한한 것이란 있을 수 없으며, 이런 우주 내에서 인간의 모든 기술-고착적인 행위의 부작용들은 언제든 추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인간이 사는 생명의 공간(생태계)은 너무나 비좁다. 유기체인 인간은 생리학이나 실제적인 신진대사를 통해서만 생존 가능하다. 동시에 우리는 공상과학의 우물 속에 앉아 혹성, 혹은 은하계 왕국이라는 거대 공간의 정복자인 양 의욕 해 볼 수도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우리는 여전히 아주 제한적인 조건에 구속되어 있는 유기체라는 사실을 벗어버리지 못한다.

……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자연의 변화도 아니고, 자연관의 변화도 아니다. 필요한 것은 '인간의 자연에 대한 관계의 변화'라고 소박하게 말할 수 있겠다. 이를 생태학적 자연미학이라 이름 붙이고자 한다. 

 

 

 

□ 미적 경험의 역사

                                                                                   (퍼온글)

ㅡ 초기

. 피타고라스에서 시작: 관람자 개념 (미적 태도를 취하는 사람)

 

ㅡ 감성적 인식 cognitio aesthetica

. 비움가르텐

   . 지성적 인식 cognitio intellective / 감각적 인식 cognitio aesthetica

   . 감각적 인식을 미의 인식과 동일시

   . cognitio aesthetica를 줄여서 aesthetica란 이름 붙임

   . 명사 ‘미학 aesthetics' / 형용사 ’미적인 aesthetic‘이 됨

   . 칸트>> 헤겔...'미학 aesthetics'가 논리학, 윤리학과 더불어 철학의 주요분야가 됨

. 미적 경험의 영역

   . "미에 대한 경험(the experience of beauty), 예술에 대한 경험" 이란 개념의 영역과 다름

   . 미학의 세 가지 커다란 범주 / , 예술, 미적 경험 /

     아름다운 것, 예술적인 것, 미적인 것은 나름의 특별한 영역이 있음

 

ㅡ 집중

   . 미의 지각은 한 감각, 나아가 여러 감각들의 집중을 요함

   . 미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감각에서 유래

 

ㅡ 매혹 (아리스토텔레스)

   . 강렬한 쾌감의 경험

   . 의지가 중단되게끔 함

   . 인간만이 누리는 것

   . 감각에서 유래하나 감각의 예민함에 의존하는 것은 아님

   . 강렬함이 때로 지나치기도 함 (경험의 과잉이 불쾌하지는 않음)

   . 감각 자체에서 비롯 (연상이 아니라)

 

ㅡ 이데아 (플라톤)

   . 대상이 아니라 대상에서 진정한 미 추구

   . 이상적인 미를 지각하기 위해 영혼의 특별한 능력 / 정신의 능력 강조

 

ㅡ 영혼의 감각 (중세)

. 에리게나

   . 인간이 미를 지각할 수 있게끔 하는 독특한 기능>>영혼의 내적 감각

   . 플라톤 전통에서 유래

   . 미적, 관조적 태도와 실천적 태도 대립 / 즐거움과 탐욕 상치

 

ㅡ 순종 (르네상스)

   . 중세의 미적 경험을 위해서는 특별한 정신적 기능이 필요하다는 신념 유지

      . 적극적인 방식: 자신의 마음 속에 미의 관념을 가져야 함

      . 수동적 방식: 미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영혼의 순종밖에 없다(알베르티)

   . 플라톤적 (미를 지배하는 관념) 개념과

     아리스토텔레스적 (아름다운 대상들의 작용에 대한 순종만을 요구)개념 혼합

 

ㅡ 황홀경

. 그라비나 <시적 이성, 1708>

   . 미와 예술에 대한 반응은 마음을 빼앗아서 광희(狂喜)의 상태로

     고양시키고 비이성적인 감정들로 특징 지워 짐>>황홀경

   . 예술의 본질은 광기(마니아)라고 한 플라톤 이론 재생 /

     근본적 차이는 / 미의 수용자 포함

 

ㅡ 권태의 구제

. 뒤보스 <시와 회화에 대한 비판적 성찰, 1719>

   . 인간의 욕구들 중 하나는 마음을 무언가에 사로잡히고자 하는 것

   . 그렇지 않으면 지루하고 불행하기 때문 / 권태를 피하기 위함

 

 

□  계몽주의 시대

 

. 취미 개념 (gusto)

   . 전적으로 미의 지각만을 위해 일하는 특정 능력

   . 미를 추한 것과 구별해내는 능력

   . 칸트 /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결정짓는 기능인 미적 공통감으로 규정

. 미감 (sense of beauty)

   . 영국의 철학자

   . 미의 파악과 인지를 위한 특정 기능

. 연상작용

   . 어떤 사물들은 미적 만족의 감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음

   . , 하틀리 등

. 미적 경험의 주관성

   . 미는 대상의 객관적 성질 (샤프츠베리)

   . 미는 감각의 주관적 반응 (허치슨)

   . 극단적 미적 주관주의 ()

. 미적 경험의 분열

   . , 숭고, 진기함, 장엄 등의 감각이 생겨남

 

. 독일의 비움가르텐

   . 미적 경험이란 하나의 인지

   . 완전히 감각적인 것 / 열등한 종류의 인지

 

ㅡ 칸트

   . 영국의 개념과 독일의 개념 종합

   . 취미판단은 인식판단도 아니고, 논리적이 아니라 미감적

   . 미감적이라 함은 주관적일 수 밖에 없는 판단

   . 미적 경험 전체는 인식작용은 아니나 단순한 쾌 이상

   . 보편성을 요하는 것 (칸트의 미적 경험의 특수성)

   . 칸트의 또 다른 특수성

      . 미적 경험은 쾌를 주는 이미지이기 때문에 대상의 실제 존재와는

        상관없이 일어남 / 무관심적(도덕적 태도와 다른 점)

      . 미적 경험은 비개념적 (인지적 태도와 구별)

      . 오로지 대상의 형식에 만 관계 (일상적인 감각적 쾌와 구별)

      . 감각뿐 아니라 상상력과 판단력에도 근거를 두고 있는 쾌 / 심의(心意) 전체의 쾌

        미적 쾌는 대상의 형체와 인간 마음간의 상응관계로부터 비롯

      . 어떤 대상이 쾌감을 주는지를 결정하는 보편적 법칙은 없음

        하지만 미적 판단에는 보편성이라는 특징이 있음

 

ㅡ 관조이론, 쇼펜하우어

   . 관념론적 체계의 시대

   . <의지의 표상으로서의 세계, 1818>

   . 미적 경험은 단순히 관조

   . 대상에 대한 수동적인 순종=관조, 미감적 쾌, 미감적 태도

   . 피타고라스의 ‘관람자’ 태도 계승

 

. 쾌의 이론

   . 미적 경험이 다름아닌 쾌의 감정이라 주장

. 일단의 인지이론들

   . 미적 경험이 일종의 인지라고 주장

. 환영주의

   . 인지이론과 반대

   . 실재의 세계를 버리고 환영, 허상, 상상력 등의 세계에서 작용

      . 미적 경험은 의식적 환영

      . 미적 경험은 그것에 관여되는 감정들의 의사(擬似)라는 사실

      . 감정이 아니라 판단과 재현에서 의사성과 허구성을 발견하는 것

      . 미적 경험을 일종의 게임으로 간주

 

. 미적 경험의 적극적 본질에 관한 이론 혹은 감정이입 일론

   . 미적 경험은 주관이 자신의 활동을 대상에게

     이전시킬 때에만 생겨난다는 것

   . 객관화된 자기 향수

. 관조이론

   . 감정이입이론과 정반대

   . 대상에게 순응하고 대상의 미를 흡수 / 대상으로부터 쾌를 끌어냄

   . 본질은 수동성 / 외부대상에 대한 집중

 

. 관조이론에 따른 추론들

   . 고립이론

      . 대상의 고립과 주관의 분리가 미적 경험의 첫 번째 조건

   . 심적 거리 이론

      . 관조는 한 가지 대상에 집중할 것을 요구함

      . 한 가지 수준의 주목상태

      . 자신의 의식을 상실할 것을 요구

   . 무관심성 이론

   . 미적 경험이 우리가 실제적으로 관심을 갖는 모든 문제

     , 당장 중요성이 있는 실리적인 개인적 문제를 잠시 동안

     의식으로부터 제거한다고 주장

   . 형태(gestalt)심리학

      . 전체는 부분보다 일차적인 것

      . 전체, 윤곽, 전체 체계

      . 시각예술작품은 지각하기 쉬운 강한 형식을 갖추고 있을 때

        관람자에게 영향을 미침

 

ㅡ 경험의 여러 주제

   . 미적 태도의 이론

      . 피타고라스 / 관람자

      . 플라톤 / 미적 경험에 필요한 정신적 기능에 관한 최초, 최고의 이론

      . 쇼펜하우어 / 관조적 미학

      . 칸트 / 판단력 기능

   . 미적 경험의 과정

      . 감정이입

   . 경험의 대상

      . 브레몽 / 신비한 실재 강조

      . 하만 / 경험의 조건

      . 심적 거리 이론

   . 부정적 조건

      . 아브라모브스키 / 지적 요소의 제거

   . 미적 경험의 요소

      . 미적 쾌락주의

   . 경험에 꼭 필요한 기능

      . 상상적 재현 이론

   . 미적 태도 개념

      . 1900년대 심리학적 미학의 근본 개념.

 

ㅡ 역사로 보는 미의 주제(motif)

 

. 피타고라스

   . 미가 척도, , 조화 (= 심메트리아)에 의해 결정.

. 소피스트 VS 플라톤

   . 미의 상대성과 주관성...소피스트

   . 미의 영원한 이데아...플라톤

. 고전기의 조화

   . 소크라테스 / 예술에 있어서 실재의 이상화

   . 아리스토텔레스 / 예술을 통한 실재의 모방

   . 스토아 학파 / 사물의 미를 목적에 대한 적합성으로 해석

. 부정적 성격의 주제

   . 키레네 철학 / 미와 예술의 무가치성

   . 소피스트 / 미의 주관성과 예술의 상대성

   . 고르기아스 / 미와 예술행위의 원천은 환영, 환영론

   . 에피쿠로스 / 생활의 필요에 미와 예술 예속

   . 회의주의적 주제 / 미와 예술의 일반이론 정립은 불가능

. 헬레니즘

   . 포세도니오스 / 예술에서 내용과 형식 구별

   . 칼리스트라토스 / 예술의 기반으로서 영감.

   . 비트루비우스 / 조화있는 리듬에 관한.

   . 디온 / 시와 시각예술의 이원성

   . 키케로 / 예술의 다원성

   . 수사학자 / 예술의 여러 종류와 단계 구별

   . 플로티누스 / 미란 단순한 성질, 배열과 비례 아님

. 기독교 시대

   . 성 바질 / 미를 주관과 객관의 관계로 해석

   . -디오니시우스 / 미를 빛으로 정의

   . 아우구스티누스 / 미를 질서로 개념화

. 중세

   . 에리게나 / 무관심적 태도

   . 끌레르보, 베르나르 / 내면적 미의 우월성

   . 알베르투스 / 사물의 미를 사물의 개념적 형상으로부터 도출

 

 

 

□ 미적 경험

                                                       글 尹自貞 (학위논문,1995, 초록의 요지)

 

      A. N.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철학을 통해 미적 경험의 존재론적 특성을 살피고자 한 논문임

 

화이트헤드는 철학은 근본적으로 경험에 대한 기술(記述)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우주론’의 체계를 배경으로 하여 인간경험을 적절히 설명하고자 전력을 기울였다.

 

그는 경험은 곧 실재(reality)라고 했다. 그러한 실재론자로서의 그에게 있어서 세계는 단순한 주관적인 관념(표상)이 아니라 ‘실재적으로 있는’ 본질로써, 이 계기들은 동시에 존재 전체의 총체와도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다른 것들을 ‘느끼고 있다.’ 계속해서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일종의 역동적인 통일체인 것이다. 그래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동시에 ‘살아 있는’ 유기체이다. ‘살아 있기’ 때문에 그것은 정지해 있지 않고 움직인다. ‘과정’(process)인 것이다.

 

그는 구체적인 사실로서의 이 실재가 동시에 끊임없이 ‘가치’를 구현하고 있다고 보며, 나아가 그 말의 가장 근원적인 의미에 있어서 ‘미’는 ‘가치’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다. 결국 ‘실재’가 곧 ‘가치’이고 ‘가치’는 또 동시에 ‘미’이므로 ‘실재’는 곧 ‘미’가 된다. 그리고 ‘실재’의 자리에 ‘경험’이 대입되어도 같은 얘기가 성립한다. 굳이 도식화해 본다면 이는 <‘실재’(혹은 ‘경험’)=‘가치’=‘미’>의 관계가 된다.

 

결국 그에게 있어서 세계의 현실적 사실들은 곧 미적인 사실들임을 보게 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유미주의’라고 규정한다든지 그의 철학체계 자체가 곧 미학이라는 얘기는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화이트헤드 미학사상의 특징은

 

첫째, 모든 사물들이 상호 연결되어 있음을 깊이 확신하면서 그 모든 개별적인 사건들이 거기에 의해 해석되고 이해되는 바의 관념들의 어떤 포괄적인 체계(, 궁극적인 일반성)를 구성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믿었던 그에게 있어서, 세계의 기반은 ‘미적 경험’에서 찾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로, 미적 경험은 경험 일반과 질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달리 말하면 그에게 있어서는 어떠한 경험도 그것이 발생하기 위해선 반드시 충족되어야 하는 보편적인 조건들(범주적 제약들 categoreal obligations)이 있는데, 이 조건들은 일반적으로 미학자들이 미적 경험을 특별히 설명코자 할 때 호소하게 되는 바로 그 조건들과 똑같은 유형이며, 그래서 그가 말하는 범주적 제약들의 목록이 경험을 해석하는 데 알맞고 또 경험과 일치하는 한에서 그는 미적 경험의 보편적인 속성을 동시에 특성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결국 미적 경험에 대한 고찰은 곧 경험일반에 대한 고찰에 근거하는 것이자 연속되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면서 필자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미적 경험의 문제를 다루는데, 그 하나는 가치경험으로서의 미적 경험이 어떻게 철학적 탐구의 정당한 토픽으로서 역할 하는지 그리고 인간 경험의 이 측면이 어떻게 그의 우주론적 체계와 조응하는지를 알아보는 측면이다. 여기서는 그의 우주론의 전체 틀 속에서 미적 경험이 차지하는 위상과 더불어 특히 그가 ‘미적 경험’이라고 할 때의 이 ‘미적’의 의미를 그가 말하는 ‘패턴’ 혹은 ‘구조’의 개념과 관련하여 살펴진다. 

 

다른 한편으로 현대철학에서 강조되어온 의식적인 감각지각의 우선성에 반하여 모든 경험의 근본으로 그가 생각한 가치경험을 대표하는 미적 경험이 과연 그의 경험론의 주도 개념이랄 수 있는 두 가지 지각양식(인과적 효능성 및 표상적 지시성) 및 이의 상징적 지시성 개념과 어떻게 조응하는지를 검토한다. 내용적으로 이는 후자의 개념들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미적 경험의 특성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어떤 기여를 하는지를 고찰해보는 일이 될 것이다. 덧붙여서 필자는 그의 이러한 미적 경험론이 예술의 본질을 어떻게 규정하는지를 확인한다. 

이 모든 고찰을 통해 미적 경험은 인간의 고유한 경험양식이면서 동시에 그 경험의 속성은 우주 전체의 어떤 보편적 속성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증명해 보이고자 한다.

 

 

 

□ 칸트와 바움가르텐의 미학

                                                          .영선 (일부 관심내용의 개요)

 

□ 칸트 미학

 

오늘날 예술가들은 세계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도구로써 예술을 사용하지 않는다. 작품이란 예술가 자신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며, 그리고 자신의 소우주를 내보이는 행위가 바로 예술이 된다. 이러한 주관성의 극대화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예술의 이론적 근원은 칸트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형이상학적 이념이나 종교적 / 도덕적 신념의 전달수단이었던 미술을 미술 그 자체("예술을 위한 예술")의 영역으로 독립시키게 된 이론적 배경에는 바로 이와 같은 미적 자율성 확립에의 노력이 있었다.

 

. 미적 주체성의 탄생

 

기원전 5세기부터 17세기까지의 美에 대한 생각은, 대우주 속에(우리의 주관 밖에) 미에 대한 객관적이고 실체적인 어떤 기준 (조화/통일/균형/비례 등의 수학적 기준, 즉 이성의 기준)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서면 미란 감성에 의해 주관적으로 파악되는 "마음의 구성물"이라고 달리 보게 된다. 그리고 미란 주관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객관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본다.

 

미의 객관적 이성적 성격을 주관적 감성적 성격("취미taste")으로 전환하고, 이에 보편적 기준을 찾으려는 노력은 18세기 영국의 경험론자들의 취미론 주장에서 두드러지고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흄이다. 특히 흄은, 보편적 지식(과학 명제)이 경험에 의해서는 논증될 수가 없고, 이는 우리 의식 습관의 산물에 불과하다고 회의함으로써 오성 능력에 제한을 가한 바 있다.

 

과학 명제의 경험론적 한계를 선험적인 방법(시공/범주의 순수형식)으로 극복한 것은 바로 칸트의 인식론이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는 일부의 제한된 경험만으로도 (현상에 대한) 법칙적 인식에 도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지각된 제현상을 (//관계/양태 별로) 분별하도록 우리의 의식이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이 본래적 의식의 틀을 그는 "범주(순수 오성)"라고 했다

 

진리 인식의 방법이 추상과 개념화의 오성 능력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은 라이프니츠와 볼프에게로 이어져 바움가르텐의 감성적 인식론("미학")에 이르게 된다. 이들에 의하면 감성은 "유사 이성"으로서 오성보다는 "저급한 인식 능력"이지만, 오성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주는 인식의 또 다른 원천이다.

 

 바움가르텐의 “미학”

 

바움가르텐은 감성을 이성과 유사한 것("유사 이성")으로서, 인식에 기여하는 바가 분명히 있는 것으로 평가한다. 그에게 영향을 준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인식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는데, 명석하고도 판명한 인식의 대표적인 예는 논리학(수학)이고, 명석하지만 판명하지는 않은(혼연한) 인식의 예가 바로 미적 인식의 경우이다.

 

바움가르텐의 미학("감성적 인식의학")이 독창적인 것은 바로 이 오성과 감성의 상보적인 관계 설정에 있다. 전통의 인식론에서처럼 아예 감성을 학적 진리의 장애물로 상정해서 배제하지 않고(대표적인 예가 플라톤), 적극적으로 오성을 보완하는 것("유사이성")으로 취급해서 진리인식의 한 계기로 끌어올린 것이 그것이다. , 오성에 의한 (인식)표상의 구체성 상실을 감성이 보완해주기 때문에, 우리는 보다 참된 인식("완전성")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를 판단하는 감성적 인식은 진리를 인식하는 학적 계기가 될 수 있고 따라서 '감성적 인식의 학'으로서의 '미학'이 될 수 있다고 그는 본 것이다. 이로서 합리성은 오성적 (개념적/추상적)인 동시에 감성적(미적/구체적)인 성격을 같이 띄게 된다.

 

그에 의하면 감성의 인식 기능은 아래와 같다. 감성으로서 사물의 동일성과 차별성을 알 수 있는 '감성능력' '예민성', 느낌으로 어떤 대상을 재인식할 수 있고 또 기대할 수 있는 '감성기억력' '기대능력', 그리고 표시를 통해 동일성을 나타낼 수 있는 '표식화의 능력'과 일종의 취미 판단인 "판단력', 마지막으로 상상적 단편을 통일적으로 구성해내는 ' 상상력' 등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감성의 인식능력으로 인해서 우리는 대상의 완전성을 감성적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미적 합리성이란 그래서 "[대상 혹은 세계의] 완전성을 감성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것"이고, 대상의 완전함과 불완전함을 판단하는 주관의 능력이 바로 취미 판단"이며, 따라서 "미란 감성으로 인식할 수 있는 완전성"이 된다.

 

그러나 미적 인식의 정당성은 감성이라는 미적 합리성의 정당화 작업만으로는 부족하고 이에는 형이상학적 작업이 뒤따라야 한다고 바움가르텐은 생각했다. , 우리의 감성능력에 의해 파악된 우주의 아름다움은 바로 우주의 질서를 반영하는 것이며, 따라서 훌륭한 예술작품은 바로 그 우주의 목적론적 아름다움을 모방한 것이라는 거다. "현재 세계는 신이 창조할 수 있는 한에서, 가장 완전한 세계"라는 말로써 그는 미적 인식의 형이상학적 근거를 제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은 우리의 인식의 궁극근거를 의식주체(인간)에 두는 근대철학의 노력을 뒤엎고, 다시 초월자(이데아, )를 상정하는 고전철학에로 회귀하는 것이라는 비판을 받게 된다. 감성을 인식의 독자적 기능으로서 높이 평가하였지만 여전히 그는 라이프니츠에 가까운 합리론자였던 것이다.

 

 

□ 칸트와 가다머에서

                                                               인용 :  .정식 사색의 자유 중에서

 

 판단

 

판단은 우리가 어떠한 대상 및 사태를 지각할 때 우리의 마음 속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작용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지각과 판단은 별 구별 없이 사용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감각적인 지각과 생각의 과정인 판단을 흔히 같은 작용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좁은 의미의) 지각의 현상은 우리 마음의 ‘직접적인’ 의식이지만 판단은 우리 마음의 ‘간접적인’ 의식이다. 판단은 두 개 이상의 생각을 연결하는 과정이다. 여기에서는 순수 논리적인 판단 작용은 제외하고, 사물 및 사태에 대한 판단 작용에만 논의를 한정할 때, 그러한 판단 작용은 개별적인 사물, 사태를 보편적인 개념 및 법칙에 연결하는 과정에서 결과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이 참된 판단이건 잘못된 판단이건 간에, 위에서 언급한 판단은 모두 규정적 판단으로서, 개별적인 경우를 보편적인 법칙에 귀속시킴으로써 생긴다. 이때 보편적 개념 및 보편적 법칙은 이미 알려진 것으로서, 개별적인 경우를 통해서 그러한 보편적 개념 및 법칙은 확증된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의 모든 현상들에 대한 보편적 법칙을 다 인식하고 있는 것도 아니며, 또 유 및 종에 있어 다를 때, 개별적인 경우를 각기 다른 보편적인 법칙에 속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데, 그렇게 볼 때 이 자연은 여러 가지의 서로 상이한 법칙들의 세계가 될 것이다.

……

우리는 자연이 전체적인 통일성에 따라 전개될 때, 만족감()을 느끼는 데 비해, 개별적인 사태가 보편적인 법칙에 통합될 수 없을 것 같은 것을 예감할 때 불만을 느낀다고 말한다. 무엇이 아름답다고 느낄 때의 판단은 물론 대상 인식 판단과 다르지만, 자연의 통일성을 전제한다는 점에서는 양자의 판단에서 같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무엇이 아름답다고 판단할 때, 우리가 동시에 기분 좋음을 느끼는 것은, ‘아름다운 것’은 자연의 통일성(조화) 및 합목적성의 이념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아름답다고 느낄 때 우리가 기분 좋음을 느끼는 근거를 칸트는 또 다른 측면에서 추적한다. 그것은 지성(오성)과 상상력 간의 관계를 통해서이다. 지성과 상상력의 능력은 대상 인식의 경우에도 필수적인 요소인데, 아름다움을 느끼는 취미 판단의 경우에도 이 두 능력은 근본적인 역할을 한다. ……

 

 

□  미적 판단

 

칸트가 미적 감정()을 인간의 다른 능력들, 즉 대상 인식 능력()과 실천 의지 능력()과 구분하여 이 분야의 문제를 제 3비판서인 "판단력비판"에서 다루었을 때, 그는 이미 인간의 심적 능력 속에서 미적 감정의 문제가 독특한 분야라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체계화한 것이다. 그는 『판단력비판』에서 미적 감정의 독특성은 바로 상상력과 지성간의 자유로운놀이’에 의해서 펼쳐진다고 보며, 놀이’와의 관계에서 취미, 공통감, 판단력, 무관심, 천재, 자연미, 예술미 등의 개념이 중요하게 논의된다.

 

어떤 것이 아름다운가 아름답지 않은가를 판별하는 것을 칸트는 취미 판단이라고 하며, 앞에서 논의했듯이, 취미 판단이 대상 인식 판단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취미 판단은 개인의 주관적 감정과 결부된 판단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취미 판단이 순전히 주관적인 판단이라면 아름다움의 문제는 단지 주관적 문제일 뿐, 보편적인 판단, 나아가 그것을 토대로 해서 보편적인 학문인 미학 및 예술철학이 성립할 수 없다. 칸트는 취미 판단이 주관적 감정의 문제이면서도 동시에 보편성을 띠는 판단이라고 하며, 그렇게 해서 그는 미학 및 예술철학의 토대를 마련한다.

 

우리는 무엇이 아름답다고 생각할 때, 동시에 기분좋음, 만족감을 느낀다. 그런데 이때의 만족감은 다른 종류의 만족감과 구별된다. 칸트는 우리가 만족감을 느끼는 경우를 "판단력비판"에서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는데, 첫째, 각자의 감각에 만족을 주는 경우, 둘째, 선한 행위 문제와의 관계에서 느끼는 만족감, 셋째는 아름다운 대상에서 느끼는 만족감이 그것이다. ……

 

취미 판단이 주관적 판단이지만 사람들 간에 보편적인 찬동을 요구할 수 있는 근거로서 칸트는 공통감을 제시하고 있다. 취미 판단이 객관적인 개념에 의한 판단이 아니고 ‘감정’에 따른 판단이면서도, 그것이 일종의 보편성을 띨 수 있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공통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 공통감에 의해 상상력과 지성간의 자유로운 놀이(유희)가 마치 보편적인 법칙인 듯이 결과하는 것이다. 그리고 공통감이 있기 때문에 취미판단은 보편적으로 전달될 수 있다.

 

 

 천재, 예술가, 예술 감상자의 ‘놀이’

 

칸트는 이론철학(순수이성비판)과 실천철학(실천이성비판)에서도 독창적인 철학 체계를 정초했지만, 미학 및 예술철학 분야에서도 그 이후의 철학에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우리가 무엇이 아름답다고 느낄 때, 우리 마음 속에서 활동하는 주요 능력은 상상력이다. 이 경우의 상상력은 물체 지각의 경우에 기능하는 상상력과 다르다. 물체 지각의 경우에 우리는 이미 우리가 갖고 있는 물체의 상을 통해서 사물을 지각(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비록 완전히 새로이 대하게 되는 물체의 경우라 할지라도, 그것을 어떠한 크기, 어떠한 형태의 무엇으로만 우리는 지각할 수 있다), 물체 지각의 경우에도 넓은 의미의 ‘상을 생각하는 능력’인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대상이 아름답다고 느낄 때 활동하는 상상력은 분명히 대상을 객관적으로 지각하는 경우의 상상력과 구별된다. 물론 이 경우의 상상력도 넓은 의미로는 ‘상을 생각하는 능력’에 속한다. 하지만 ‘상을 생각하되’, 어떤 일정한 개념에 따라 대상을 ‘한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이’, ‘무한히’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상상력이다.

 

상상의 나래를 무한히 펼칠 수 있는 자유를 지닌 상상력은 예술작품을 창조하는 경우(천재, 예술가)와 감상하는 경우(감상자)에 모두 해당한다. 상상의 날개를 ‘자유로이’ 펼치되, 대다수의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느끼게끔 할 수 있는 예술작품을 만들 수 있는 선험적 근거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러한 예술작품을 아름답다고 평가할 수 있는 선험적 근거는 무엇인가?

……

 

예술작품을 창작하고 그것을 감상하는 데에는 개별적 대상 인식 능력 내지 실천적 의지와는 다른 능력(상상력과 지성의 자유로운 놀이)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칸트는 "판단력비판"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천재 개념을 통해서 더욱 뚜렷이 부각될 수 있다.

 

칸트는 천재의 명칭을 학문적 이론을 세우는 자가 아니라, 독창적인 예술가에게만 부여한다. 천재는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채 독창적인 이념을 산물에 부여하여 예술의 범형을 만들어내지만, 스스로도 그것을 의식,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작품의 규칙을 상세히 설명할 수 없다. 천재는 ‘자연’으로서, 자연의 이념이 그를 통해서 드러나는 자이다. 천재는 자신의 주관 안의 자연 및 그 주관의 능력들(상상력과 지성)의 조화에 의해 예술에 대해 규칙을 부여한다. 이때 상상력과 지성의 조화는 이 두 능력간의 ‘자유로운 놀이’에 의해 가능하다.

 

결국 칸트 미학의 독창성은 상상력과 지성간의 ‘자유로운 놀이’ 개념에 의해 특징 지울 수 있겠다. 칸트 자신의 학문 체계 - 이론철학, 실천철학, 미학 - 안에서뿐 아니라, 다른 미학 이론가들과의 관계에서도, 이 두 인식 능력의 자유로운 놀이 개념은 아름다움의 문제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  인간 감정을 이해하는 첫번째 관념 (미학)

 

                                                                                                 이.해완, 글 중에서, 부분발췌

. 예술에서의 ‘표현’ 개념은 일반적으로 창조하는 사람의 정서와 내면을 드러내는 행위나 현상을 가리킨다. 그러나 표현은 예술의 궁극적인 문제, 즉 예술의 ‘본질’과 ‘가치’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미학의 중요 개념이다.

 

.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시도 일종의 모방으로 규정하기 이전의 고대 그리스인들은 시란 신(뮤즈)이 가져다 주는 영감의 산물이기 때문에 인간이 규칙을 배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여겼다. 이에 비해서, 그들은 그림은 규칙에 의한 인간적인 제작이라고 생각했다. 시가 플라톤에게 비난이 대상이 된 것도 시의 본질이 이러한 통제 불능의 영감이라는 비합리적 성격 때문이었다. 이러한 영감론의 기본 구조에서, 과거 영감의 원천이라고 여겨졌던 뮤즈의 역할을 예술가 자신의 천재성과 상상력으로 대체한 것이 낭만주의적 표현 개념의 일부라고 본다면, 내적인 것을 밖으로 끄집어낸다는 의미로서의 표현을 예술과 연관 지어 생각하는 것은 아주 오랜 것이다.

 

. 예술 작품의 창작, 감상, 평가와 관련된 맥락에서 표현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정확히 무엇을 의도하며 어떠한 행위나 현상을 지칭하기 위해 이 말을 쓰는 것인가? 이것이 예술에 대한 이론적이고 개념적인 접근을 주업으로 삼는 미학이 표현에 대하여 갖는 일차적 관심이다.

 

. 창작자들의 고민이 오로지 무엇을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그들의 미적 감수성에 더 적절할까에 모아지더라도 이상할 것은 없다. 하지만 창작자이건 비평가이건 감상자이건, “그런데 대체 표현한다는 것이 무엇이지”를 묻는 순간이 있다면, 그 순간 그는 철학적인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 예술철학자들이 표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가 예술에 대해 갖는 가장 궁극적인 두 가지 문제에 표현이 밀접하게 연관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 하나는 예술은 무엇인가, 즉 예술의 본질을 묻는 질문이다.

 

. 다른 하나의 중요한 질문은 예술의 가치에 관한 것이다. 이 경우에도 표현이 마치 하나의 가능한 답변처럼 보인다면 이 역시 표현의 개념을 확실히 함으로써 과연 그런지 검토를 시작할 수 있다.

 

 

□  정서적 체험을 전제한 상식적 예술 표현론

 

. 어떤 것이 표현이기만 하면 예술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얼굴의 홍조는 부끄러움이나 당황함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붉어진 얼굴이 예술 작품은 아니니까 말이다. 하지만 상식적인 표현론은 표현이 최소한 예술을 위해 꼭 필요한 조건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표현인가? 반 고호의 〈해바라기〉가 ‘생명감을 표현하고 있다’거나 ‘사랑의 표현으로 장미 꽃다발을 보냈다’고 할 때처럼, 우리가 표현이라는 말을 쓰는 경우는 대부분 표현하는 이의 내적 상태, 즉 감정, 정서, 느낌, 욕망 등과 관련된 맥락이라는 점에 우선 주목하자. 예술에 대한 표현론의 설명이 재현론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되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감정과의 연계 때문이다.

 

〈해바라기〉 같이 명백히 재현적인 작품에도 결국은 다루어진 대상을 보는 작가의 감정, 태도, 관점 등이 포함되어 있고, 따라서 그것들도 재현뿐만 아니라 표현도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많은 경우 타당하기 때문이다.

 

. 상식적인 표현론의 주된 관심은 감정의 표현이다. 낭만주의 시인 워즈워스의 “시는 격렬한 감정이 스스로 우러나 넘쳐흐르는 것”이라는 구절은 이런 식의 표현론의 특징을 보여 준다. 나아가 감정의 표현은 흔히 작가가 가졌던 슬픔이나 환희 같은 감정이 작품을 매개로 감상자에게까지 ‘전달’된다(혹은 ‘환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 톨스토이(Leo Tolstoy)는 1898년의 《예술이란 무엇인가?》에서 “자신이 예전에 경험했던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움직임, 선, 색, 소리, 단어를 수단으로 해서 그 감정을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경험하도록 전달하는 것”이 예술 활동이라고 주장한다. 예술에서의 표현이란

    . 전달하려는 것이 있고 (예술가의 정서적 체험),

    . 그것을 매개하는 것이 있으며 (그러한 정서가 구현된 선·형태·색 등등으로 된 작품,

 . 그 전달이 성공한 상황 (예술가가 체험했던 감정과 같은 것을 체험하게 되는 감상자)이

    있을 때 이루어진다

 

. 이에 대한 비판

 

. 어떤 감정의 분출이나 표현으로 인정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감정의 분출이 매우 통제된 활동이지 폭발하는 것이 아니다.

감정의 분출이 대개 그러한 감정이 막연하다는 것이다.

 

. 예술가의 정서적 체험이 예술 작품에 선행해야 한다는 주장은 타당한가?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을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표현한 작품을 모두 가치 없다고 해야 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것은 예술의 가치에 있어 상상력을 중시하는 우리의 상식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 전달로서 표현론의 근본적인 두 번째 문제는 이것이 감상자를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전달에 있어서 감상자의 문제로 인해 주어진 작품이 예술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 정서를 매개로 한 감상자와 작가의 관계가, 감상자가 그 정서를 ‘느낌’으로서만 맺어질 필요는 없다. 어쩌면 감상자가 작품을 보고 공감하는 것은 표현된 정서를 ‘이해’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 감정의 전달에 중심을 둔 예술적 표현의 이해가 과연 적절한 것인지 의심하게 한다.

 

전달로서의 예술표현론에 대한 반론으로, 무언가 전달하려는 것을 애초부터 거부한 예술 작품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초현실주의나 다다의 그림들은 감정을 명료히 하는 것을 일부러 반대한다. 모든 창작 과정을 우연에 맡겨 버리는 작품들도 이제는 낯설지 않다. 에셔의 퍼즐 같은 그림들은 어떤가? 그것들이 정말 감정의 전달과 관련이 있을까? 

 

예술의 가치를 설명하는 측면에서도 상식적 표현론은 결점을 보인다. 결국, 톨스토이가 말하는 식의 감정의 전달로서의 표현이 왜 가치 있다는 것인가? 여기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표현 자체의 내재적 가치다. 어떠한 감정이든지 전달되기만 하면, 즉 표현되기만 하면 그 자체로서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   크로체-콜링우드의 관념철학적 표현론

 

. 상식적으로 이해한 표현이라는 개념이 사실은 앞뒤가 맞지 않는 생각들이지만, 1902년 크로체가 《미학》에서 개진한 예술표현론은 이러한 상식적 견해와는 다른 방향에서 접근한다.

 

크로체에 따르면 표현은 직관(intuition)의 다른 이름이다. 크로체의 전문 용어라고 할 직관이란 우리에게 인식이 일어나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을 말하는 것으로, 세계에 대한 인간 최초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이 강물, 이 호숫물, 이 시냇물, 이 빗물, 이 컵의 물” 같은 개별적 사물에 대하여 얻게 되는 이미지다. 이것은 지각을 통해 얻게 될 수도 있고 또 상상력을 통해 얻을 수도 있다.

 

크로체는 “내가 글을 쓰고 있는 방, 내 앞에 놓인 잉크병과 종이, 내가 쓰고 있는 펜, 내가 감촉하고 도구로 쓰고 있는… 사물들에 대한 지각, 이 모두는 직관이다. 그러나 그 순간 내 뇌리를 스쳐 가는 이미지, 즉 다른 종이와 펜과 잉크를 가지고 다른 도시의 다른 방에서 글을 쓰고 있는 내 모습을 떠올리는 것, 그것 역시 직관”이라고 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개별적인 직관이 보편적인 개념을 갖기 위해 논리적으로 선행하는 단계라는 것이다.

 

. 개념은 직관에 의존해서만 가능하다. 이 점은 우리의 인식체계 전체가 직관을 그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진다는 것으로, 직관(곧 표현)과 상상력의 가치에 대한 유례가 없는 긍정적인 평가다.

 

그렇다면 이러한 직관이 왜 하필이면 표현인가? 크로체의 생각으로는 직관되기 이전의 것이란 우리의 정신에 의해 파악되기 전단계의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그저 혼연하고 수동적인 인상(impression) 일 뿐이다.

 

여기에 우리의 정신이 능동적으로 개입하여 그것을 명료하게 객관화하는 것이 직관이므로, 그것을 우리 정신의 적극적인 활동 측면에서 부를 때 표현(expression)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이 바로 예술의 본질이라는 것이 그의 예술표현론이다.

 

. 콜링우드는 어떤 것이든 정서 유발과 같은 목적을 위해 봉사하는 수단이 된다면 그것은 기술이나 기능이며, 따라서 오락이나 주술은 될 수 있어도 예술은 아니다. 예술은 상상력에 의한 자발적인 내적 이미지의 생성 그 자체다.

 

이런 식의 직관 - 표현 활동은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아니 인식 행위를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활동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예술가인가? 이에 대한 크로체의 답변은 “본질적으로는 그렇다”이다.

 

“풍자시가 예술이라면 간단한 단어 하나도 예술이고, 소설이 예술이라면 기자의 뉴스 원고도 예술이며, 풍경화가 예술이라면 지형학적 스케치도 예술이다…. 예술의 뿌리는 인간의 본질에까지 뻗쳐 있음에도 그것을 일상의 정신적 삶과 유리 시켜 특수 기능이나 귀족 애호물의 한 종류로 만들어 버렸던 까닭에 이제껏 미학이나 예술학이 예술의 참된 본질을 드러내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거기에 양적인 차이는 있다.

 

그는 예술가란 “영혼의 어떤 복잡한 상태를 온전하게 표현해 내는 재주나 기질이 남다르게 뛰어난 사람”이라고 한다. 즉 베토벤이나 미켈란젤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풍부하고 복잡한 직관을 명확히 직관-표현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일상 생활에 필요한 훨씬 빈약하고 작은 직관-표현들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질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우리의 빈약한 표현과 위대한 예술가의 풍부한 표현이 만들어지는 방식에서는 다르지 않다.

 

. 예술은 예술가가 직관을 갖는 그 순간 그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실제로 크로체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물리적인 매체를 통한 예술가의 작품 제작 활동은 전혀 표현이 아니고, 다만 기억의 편의나 전달을 목적으로 한 외적 구현(externalization)이라고 한다. 외적 구현은 예술을 위해 전혀 필요하지 않은 과정이다.

 

그러나 이것은 예술 작품, 특히 미술이나 조각 작품의 존재론에 대한 매우 반(反)직관적인 결론으로, 많은 사람이 크로체-콜링우드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 표현은 여전히 예술에서 중요한 요소이며, 궁금한 부분이다. 비록 예술의 본질이 표현이라는 식의 예술론은 잠잠해졌더라도 표현의 개념 자체를 명확히 이해하려는 시도는 다각도로 진행중이다.

 

 

 

■ 문학적 미의 유형 

                                                          From : 글나라 넷

                                                              인천학익여고 자료 (.은철, 신문학의 이해, 우리문학사)

□  숭고 미

 

      숭고미는 롱기누스(Longinus) [숭고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그는 우리의 이성이나 판단력과 관계없이 우리의 정신을 황홀케 하는 글을 숭고하다고 말하고 또한 이런 숭고미를 강하게 자극하는 글일수록 위대하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산타야나(G. Santayana) [미의식(The Sense of Beauty)]이란 글에서 숭고미의 특징으로 정열성과 종교성을 들고 있다. 우리는 [찬기파랑가]에서 기파랑의 모습에서보다 달, 구름, 잣가지가 환기하는 기파랑의 기상에 내면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더욱 감동하는데, 이것은 숭고가 갖고 있는 신비적인 정열성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원왕생가], [제망매가]의 경우와 같이 시 속에 ''인 시적 자아가 높고 신비적인 힘의 대상인 '미타' '관음'에 대하여 행하는 서정적인 표출이 장중한 찬양 또는 엄숙한 감동으로 나타나는 것이 종교시의 좋은 예이다.

 

숭고미는 주로 우아미와 대비된다. 숭고미는 내면적인 참여를 통하여 부각되므로 위압적이고 엄숙한 속성을 드러내며, 우아미는 외면적인 효과를 환기하므로 경쾌하고 감미로움을 나타낸다.

 

 

□  우아 미

 

      쉴러(F. Schiller) [우아미와 위엄에 관하여( ber Anmut und W rde)]에서 미를 '구조의 미(Sch nheit des Bause)' '유희의 미(Sch nheit des Spiele)'로 분류하고, 전자를 자연의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형성된 숭고미라고 하고, 후자를 인간의 자유로운 조건에 따른 동적인 미로서 이를 우아미라고 하였다. 우아미의 특성은 이성과 감성, 의무와의 완전한 조화인 아름다운 영혼의 현상 표현으로써, 남성에게 결여된 여성적 덕의 표출이라고 정의 내리고 있다.

 

우아미는 경쾌하고 감미로운 것을 주는 청조하고 매력적인 미이다. 여기에서는 생경하고 예민하거나, 조야(粗野)한 성질을 찾을 수 없다. 현실의 긍정적 수용에서 얻어지는 살아있는 미이고 현실적인 미이다.

 

우아미는 어떠한 기존 사상과도 깊이 관련되지 않고 생활 자체에 바탕을 두고 있다. 즉 생활에 있어서 자유스럽고 자기발전의 순조로움에서 발견되는 미이다. [정읍사] [가시리], 그리고 민요 등에서 보이는 이성 아닌 감성에 의하여 일종의 강인성이 여성적으로 나타난 것에서 우아미의 특질을 볼 수 있다.

 

 

□  비장 미

 

      데소아르는 숭고미와 우아미를 양감정(Qduantit tsgef hl), 비장미와 희극미를 혼합감정 (Mischgef hl)으로 구분했다. 비장미와 희극미를 슬픔과 기쁨으로 대치해 놓고 보면 이러한 특성은 쉽사리 드러난다. 이별(슬픔) 속에 내재한 만남(기쁨)의 기대라든지 커다란 기쁨 뒤에 오는 허전함, 아픈 과거의 회상이 달콤한 감정을 동반한 것 등이 이러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이 두 개의 미적 범주는 상호보족적인 일원적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한편 데소아르는 이들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규명하고 있다. 즉 비장미는 객체인 현실이 우위에 서서 자아를 지배하는 경우에 나타나고, 희극미는 주체가 객체인 현실을 지배할 경우에 나타난다고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주체인 자아가 현실보다 우위에서 현실을 인식하면 대부분의 경우 희극미로 나타나고, 반대로 객체인 현실이 주체인 자아보다 우위에 서서 행동과 운명을 결정하면 대체로 비장미가 된다는 것이다.

 

폴켈트(J. Volkelt) [비극의 미학( sthetik des Tragischen)]에서, 인간적 위대성이 몰락해 가는 과정에서 비극미가 일어난다고 보고 있다. 즉 어떤 위대한 인물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파멸되는 것을 보거나, 어떤 적극적이고 절대적인 가치가 침해되어 붕괴하는 과정을 보면서 생기는 고뇌와 동정의 미감이 비장미인 것이다.

 

이러한 비장미가 순수하게 나타나는 현상은 전설, 특히 영웅전설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임진록]이나 [임경업전]에서 김덕령과 임장군의 최후, [오이디프스왕]에서 보여 준 비극적 아이러니에 의한 왕의 비참한 종말 등은 그 좋은 예이다. 이처럼 비장미는 인간적인 것의 한계를 넘어 초인적인 것에까지도 생성되고 있는 점에서 숭고미와도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  희극 미

 

      전술한 바와 같이 희극미는 상호보족적인 일원적 양면성을 지닌 혼합감정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비극미와 자주 대비된다. 희극미는 왜소하고 비천한 것, 그리고 때로는 왜곡된 것에 웃음을 터뜨려 부정에 의하여 고양되는 혼합감정이다.

 

하르트만(N. Hartmann) [미학( sthetik)]에서 희극미는 숭고미에 대한 비숭고미이며 추악한 것과 왜곡된 것을 우리에게 주기 때문에 불쾌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위대하지 않은 것이 위대함을 가장하고 나타날 때 형식유희(型式遊戱)에서 오는 웃음과 전도현상(顚倒現象)이 다시 본래적인 방향으로 환원되는 기쁨이 희극미의 핵심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호프만(P. Hofmann)은 비장미가 중압감과 존경, 공포감의 느낌을 주고 있음에 반하여 희극미는 마음의 경쾌화, 중압으로부터의 해방, 정신의 자유성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비장미에 있어서는 가치 있는 것이 부정되는 것에 대하여 내면적인 반항감이 일어나 인간의 중요한 가치의 진정함을 한층 더 깊게 체험하게 되지만 희극미에 있어서 부정은 예기치 않은 돌발성에 의하여 경악하게 되며, 가치추구의 공허함을 명확히 체험케 한다고 설명했다.

 

희극미는 주로 고통과 좌절을 강요하는 일상의 규범을 파괴함으로써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긍정할 때 나타나는 미적 가치이다. 이를 위해 풍자, 기지, 반어, 유우머와 같은 표상과정을 문체로 활용하기도 한다. 가면극, 판소리, 사설시조와 같은 조선 후기의 평민문학이나 한문단편 등은 그 좋은 예이다.

 

 

 

 

■  미인이 되는 길

                                                                                                          인용 :  전.시륜 글 중에서 

 

       누구나 미남 미녀가 되고 싶어한다. 그러나 우리는 부모를 선택할 자유가 없이 태어났기 때문에, 강아지를 고를 때처럼, 스스로가 복스러운 얼굴이나 늘씬한 몸매를 원하는 대로 미리 추릴 수 없었다. 모든 생물체는 유전 인자(gene)의 노예다. 인체 속에 있는 100,000여 개의 유전 인자가 미리 각본을 짜고 너는 난쟁이가 되라, 너는 꺽다리가 되라, 너는 납작코가 되라, 하고 개별적인 작업 명령을 내리면, 우리는 각본대로 연기할 수 밖에 없다.

 

잘 먹으면 키가 좀 클 수도 있고, 수술을 하면 쌍꺼풀도 만들 수 있고 화장을 잘 하면 혈색을 높일 수도 있지만 이런 기교에는 모두 한도가 있다. 유전 인자학이 발달하여 50년 후에는 내가 디자인한 아들 딸을 주문할 수 있는 시대가 와서 아들은 마이클 조단의 팔다리를, 딸은 오드리 헵번의 눈을 갖춘 아이들로 주문할 수 있는 날이 온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혜택을 받지 못한다. 새치기를 해서 미남 미녀가 될 수 없을까? 미남 미녀가 되는 과학적인 길이 있다.

 

□  미와 종족 번식

 

미는 무엇일까? ‘미는 외부의 물건이 눈을 통해서 우리의 뇌에게 주는 즐거움'이라고 나는 정의를 내린다. 이것은 시적 또는 철학적인 정의가 아니라 과학적인 정의다. 말을 바꾸면 미의 성격은 외부에 존재하는 물건, 눈의 구조, 뇌의 정보 처리 방법에 의존한다는 뜻이다. 물건, , 뇌의 3자 회담의 결과가 즐거움을 줄 때 우리는 이를 ‘미'라고 부르고 불쾌감을 줄 때 우리는 이를 ‘추'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서 설명해보자.

 

바위와 꽃과 새의 경우를 분석해보자. 바위의 모양이 사람이나 짐승의 얼굴과 닮아 보이면 우리는 그 돌이 신기하고 아름답다고 한다. 사각형의 돌은 대부분 사람에게 심미감을 주지 않지만 벽돌장사에게는 한없이 아름다울 수도 있다. 심미감은 개인의 이해 관계와 결부되어 있다. 꽃의 경우 너도 나도 꽃을 좋아한다고 한다. 그러나 "호박꽃도 꽃인가?”라는 속담이 있는 것으로 보아 모든 꽃이 균등하게 사랑을 받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세 남자가 장미는 요염해서 좋다, 라일락은 향기로워서 좋다, 코스모스는 수수해서 좋다, 하고 의견이 다를 때 우리는 그 남자들의 성향을 간파할 수 있다. 아내가 화장하는 것을 좋아하는 남자는 장미를 사랑하고, 화장하지 않는 아내를 더 예쁘게 보는 사람은 코스모스를 좋아하고, 아내가 너무도 착해서 업어 주고 싶어 죽겠다는 남자는 라일락을 찬송할 수 있다.

 

그런데 왜 꽃은 대체로 돌보다 더 아름답게 보일까? 그 이유는 꽃은 식물의 생식기관이고 인간은 꽃처럼 성적인 생물이고 꽃과 인간은 대체로 똑같은 유전 인자를 소유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이를테면 꽃은 인간의 먼 친척이다. 돌이 고종 팔촌이라면 꽃은 사촌이다. 이래서 꽃이 더 아름답게 보인다. 그러나 꽃의 미는 중매자인 벌을 위한 것이지, 3자인 사람을 위해서 발전된 것은 아니다. 이런 이유에서 벌은 사람보다도 꽃에 대한 심미감이 훨씬 더 발달되어서 사람의 눈은 파장이 4천 내지 7천 옹스트롬(1억 분의 1센티)으로 한정된 사물만 볼 수 있지만 벌은 3천 옹스트롬으로 자외선 밖의 물건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 눈에 똑같아 보이는 꽃이 벌에게는 다르게 보인다. 벌은 붉은색을 볼 수 없지만 파장 제한으로 우리에게 흰색으로 보이는 물건이 벌에게는 다채롭게 보일 수 있다. 꽃이 사람보다도 벌에게 더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공작새 수놈이 유달리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는 한편으로 공작새 암놈의 심미감이 고도로 발달되었다는 것을 증언하는 반면 사람과 공작새는 수많은 유전인자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밖에 수놈 날개는 빛깔을 통해 그의 건강 상태를 말해준다. 선 보는 자리에서 상대방의 혈색이나 피부색이 좋지 않을 때, 우리는 상대방의 건강을 우려하고 혼인을 꺼려 한다. 마찬가지로 수놈 공작새 날개의 빛깔은 그의 건강 진단서로서 수놈은 이를 제시함으로써 암놈에게 배필 선택의 자유를 준다. 물론 암놈은 항상 얼굴이 잘난 수놈보다도 날개가 화려한 수놈을 택한다. 안경쟁이나 책벌레보다도 운동선수가 여학생에게 더 큰 매력을 주는 이유도 이런 생리적인 근거에서 비롯된다.

 

다음으로 우리 눈의 구조를 살펴보자. 사람의 눈은 크게 말해서 각막(comea), 렌즈(lens), 망막(retina)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가 물건을 볼 수 있는 것은 물건에서 반사된 광선이 각막과 렌즈를 통해 영상을 비치게 하는 데서 비롯된다. 각막은 광선을 굽히고 렌즈는 굽힌 광선을 집중시키며 망막은 이를 정보화한다. 각막과 렌즈는 카메라 작용을 하지만 망막은 사진 원판의 저장소가 아니라 정보 분석의 임무를 맡고 있다.

해부학이나 생리학적으로 보아 망막은 눈의 일부가 아니라 뇌의 일부다. 망막에는 막대기같이 생긴 간상체(rod)라는 세포와 원추형의 세포(cone)가 있어서 이들이 들어오는 빛의 강도에 따라 외부의 사물을 구분한다. 빛이 약할 때는 rod, 빛이 밝을 때는 cone이 사물을 본다. Cone 속에는 적색, 녹색, 청색의 색소가 담겨 있어서 이 색소들이 색깔을 구별한다. 망막의 rod cone은 신경 세포(neuron)를 통하여 뇌에게 관측 보고를 한다.

 

그러나 망막이 뇌에게 전달하는 것은 카메라의 영상이 아니라 상황 분석 보고서다. 그 내용은 청와대가 받는 브리핑처럼 상황 분석 이외에 처리 대책 자문이 포함되어 있다. 눈은 생명 유지의 신성한 업무를 맡고 있는 뇌의 전방 관측소의 역할을 한다. 이 사실은 미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물론 인간의 생사에 매우 중요하다.

 

뇌의 임무를 생각해 보자. 뇌는 대통령 같은 역할을 한다. 그의 의무는 헌법을 준수함으로써 국민의 복지를 도모하는 데 있다. 그러나 누가 헌법을 썼나? 헌법을 쓴 장본인은 다름 아닌 유전인자이고 유전인자를 달성하려는 궁극적인 목적은 종족 보존이다. 그러나 이 목적 달성에는 엄청난 장애물이 있다. 종족을 번성시키자면 사람이 밥을 먹어야 되고 남녀가 성관계를 가져야 하는데 인간이 귀찮다고 먹기를 거절하고 짝을 맺지 않겠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런 장애를 극복하고 자기의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해서 유전인자는 즐거움(쾌락이라는 것)이라는 뇌물을 주어 사람을 매수한다. 밥을 먹게 하자면 먹는 것이 즐거워야 되고 짝을 짓게 하자면 성관계 또한 즐거워야 된다. 이런 쾌락 원칙에 따르면 대체로 몸에 필요한 음식은 맛있고 몸에 해로운 음식은 맛이 없게 되어 있다. 똥 냄새가 고약한 이유는 똥을 먹으면 사람이 죽으니까 똥을 먹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똥을 먹어도 죽지 않는 개에게는 똥 냄새가 구수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상하고 썩은 음식은 인체에 해롭기 때문에 악취를 낸다.

임신부가 임신 초기에 겪는 입덧도 같은 이유에서다. 어른의 몸에는 해롭지 않지만 태아의 기관 형성에 해를 끼치는 음식이 들어오면 유전인자가 어머니에게 구토증을 유발시켜 이를 거부하게 만든다. 성관계도 마찬가지다. 자연은 성의 대상을 미화시킨다. 철학자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가 지적했다시피 남자에게 잘 생긴 노파보다도 못생긴 젊은 여자가 더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는 유전인자가 애를 낳을 수 없는 여인은 무용지물이라고 낙인을 찍었기 때문이다.

 

라틴의 격언에 "온갖 동물은 성관계가 끝나면 슬픔을 느낀다(Post coitum omne Animal triste)”는 말이 있다. 일단 성관계가 끝난 사람에게 쾌락의 뇌물을 바친다는 것은 낭비라고 유전인자가 속삭이기 때문이다. 뇌는 눈, , , 피부, , 심장 같은 기관에서 접수된 정보를 행정자치부, 외교통상부, 국방부, 보건복지부 등 각 부서에서 대통령에게 들어온 정보처럼 검토하고 이들에 대한 반응 수습책을 선포하고 지시한다. 이런 과정을 우리는 ‘생각'이라고 한다. 뇌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뇌가 생각하는 과정은 컴퓨터의 작동 과정과 비슷하다. 우리가 컴퓨터에 집어넣는 입력은 단순한 신호에 불과하다. 이를테면 호랑이가 덤벼드는 사진 원판 같은 일련의 그림이다. 이 신호를 정보화시키기 위해서는 마이크로 프로세서가 필요하고, 마이크로 프로세서는 정보를 어떤 양식으로 처리하라는 명령을 특정 임무를 맡은 소프트웨어로부터 받는다. 예를 들면 ‘위험 방지' 소프트웨어가 덤벼드는 호랑이 그림을 마이크로 프로세서에 보내면 마이크로 프로세서는 도망 수습책을 강구해 달라고 뇌에게 부탁하고 뇌는 대통령이 수재민의 구제를 위해 헬리콥터를 급송하듯이, 사람의 다리에게 줄행랑을 치라고 지시한다. 핑커(Steven Pinker)는 그의 저서 <마음이 생각하는 과정How the Mind Works>에서 "마음이란 우리 조상들이 먹을 것을 찾아서 헤매던 시절에 처했던 생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자연 도태의 원칙에 의해서 설계된 계산 기관의 체제”라고 정의했다. 이 정의에 의하면 마음이란 배고파 우는 사고 과정이 된다.

 

인간의 뇌는 현대의 전자 계산기처럼 계산을 빨리 할 수 없다. 반면에 뇌는 융통성이 있다. 지금 나는 한글 워드프로세서를 컴퓨터에 집어넣고서 이 글을 쓰고 있지만 내가 세금 계산을 하려면 다른 소프트웨어를 집어넣어야 된다. 그러나 뇌는 융통성이 있어서 내가 밥을 먹을 때, 길을 걸을 때, 잠을 잘 때마다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요구하지 않는다. 설악산을 찾아가는 데 걷기보다는 지프차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지만 비선대나 울산바위를 답사할 때는 뭐니뭐니 해도 두 다리가 최고다. 우리 사정을 잘 아는 뇌는 우리가 윈도우즈를 쳐다보기 전에 비선대, 울산바위 소프트웨어를 끼워준다. 자연은 IBM보다도 위대한 엔지니어다. 그러나 대통령이 헌법을 준수해야 되다시피 뇌는 유전인자가 제작된 소프트웨어를 꼭 써야 된다. 이것이 삶의 명령 체계다.

 

뇌의 정보 분석 과정에 대한 설명이 복잡해서 혼란을 끼친 것 같다. 요는 불교의 말씀처럼 사람은 사물을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고, 마음은 인체 보전, 종족 번식의 입장에서 사물을 본다는 이야기다. 우리에게 관심이 있는 일은 재미있게 보이고 우리가 원하는 것은 중요하게 보인다. 스피노자는 우리는 어떤 것이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를 구하지 않고, 그것을 원하기 때문에 그것이 좋다고 생각된다고 말했다.

 

□  미는 욕망이다.

 

미는 욕망이다. 그러나 사물은 반드시 실용적이고 이해 타산에 얽혀야만 아름답고 추하게 보이는 것 같지는 않다. 악어 핸드백을 애용하는 여자라고 악어를 좋아한다는 법은 없다. 이유는 모르지만 나는 하마나 악어가 잘 생겼다고 생각하지 않고 내가 악어로 태어나서 진종일 강기슭에 누워 물속을 들락날락하거나 그런 악어를 쳐다보아야 할 팔자를 타고 나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사가 제노폰(Xenophon)에 의하면 미남 대회에 참석했던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당선자보다도 더 아름답기 때문에 상을 탔어야 했다며 익살을 떨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미는 실용성에 있다. 내 눈은 개구리 눈같이 튀어나왔기 때문에 남보다 더 잘 볼 수 있고, 코는 말코여서 숨도 잘 쉬고 냄새도 잘 맡을 뿐만 아니라, 입은 메기같이 넓어서 밥도 잘 먹고 키스도 멋지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나야말로 천하의 미남이다.

 

조리가 정연한 논리지만 미는 논리가 아니다.

호랑이는 우리에게 위험을 주지만 아름답게 보이고 코끼리는 코가 너무도 길어서 사랑스럽게 보인다. 미는 균형, 조화라고도 한다. 순수한 실용철학적인 면에서 볼 때 사람은 대체로 왼손보다도 오른손을 더 많이 쓰니까 오른쪽은 팔도 더 길고 손도 더 크고 손가락도 여섯 개나 일곱 개쯤 되면 좋으련만, 이런 사람은 결혼을 할 수 없어서 문제다. 그러면서도 대체로 원하는 것이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미인이 되는 길은 원하는 사람이 되는 데 있다. 흔히 느끼는 경험이지만 어떤 여자는 첫눈에 어쩌면 그리도 예쁜지 눈알이 소크라테스의 개구리 눈같이 튀어나오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그 여자가 깍쟁이고 욕심쟁이면 우리는 곧 그녀에 대해 싫증을 느끼고 그녀는 미를 잃어버린다.

 

□  착하면 누구나 미인이다.

 

반면에 주님이 낮잠을 자다가 깨어나서 눈을 비비면서 메주콩에 눈, , 입을 박아놓은 것같이 아무렇게나 만든 여자도 순하고 착하면 그녀의 얼굴 모양은 나날이 달라진다. 일주일 전의 추녀가 오늘은 복 덩어리가 되고 내일에는 미인이 되고 천사가 된다. 그 이유는 눈이 그녀의 외형을 보지 않고 인품을 보고 그녀의 인품이 우리 마음에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성격이 숙명이라는 말은 이런 뜻에서 비롯된다. 철학자 산타야나(George Santayana)는 그의 저서 <미감 The Sense of Beauty>을 아래와 같이 결론 짓는다.

 

"미는 영혼과 자연의 일치성을 보증하고, 결과적으로 선의 절대성을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해준다.

 

착하면 누구나 미인이 될 수 있다는 소리다.

착함으로써 미인이 되는 길은 쉽고 경제적이어서 좋다. 화장품을 살 필요도 없고 성형 수술을 할 필요도 없다. 대학에 입학하여 책을 많이 읽고 골머리를 앓을 필요도 없다. 목마른 나그네에게 물을 한 그릇 떠다 주고 노인에게 전철 좌석을 양보해 주면 된다. 미는 보는 사람의 눈에 달렸다고 한다. 눈은 마음이요, 마음은 즐거움을 바라고, 즐거움은 선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미인이 되는 첩경이다.

 

****

 

  □  제목  “어느 무명철학자의 유쾌한 행복론”

           (도서출판 명상, 2000 10월 초판, 저자 전시륜)

아래 구혼 광고는 저자 전시륜이 신문에 냈던 구혼 광고문,

유고(遺稿)인 이 수필집 중의 1957 <마산일보>에 낸 광고내용

 

이름: 전시륜, 나이:25세, 본적: 충청북도 중원군 주덕면

직업: 마산육군 군의학교 하사관,  재산사항: 내 이름 앞으로 논8백평, 3백평 있음.

생활전망: 미국으로 가서 철학을 공부하고 돌아올 계획을 가지고 있음.

돌아온 뒤 철학을 해서 밥벌이를 하기 힘들다면 영..불어 세 과목에 고등학교 준교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으므로 시골 고등학교에서 교사직을 얻을 수 있음.

응모자격: 19세 이상,30세 미만의 대한민국 처녀 및 미망인.

선택기준: 가문, 학벌, 재산, 용모보다는 성격을 중요시함.

연락방법: 군의학교 면회소 또는 2주일동안 일요일 오후 2부터 오후 4 사이에

마산 어느 다방 구석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임. 또는 편지에 원하는 장소를 적어 보내도 됨.

 

 

 

■  산타야나(G. Santayana)의 美論

              -『美感』에 나타난 '객관화된 快'를 중심으로 -

                                                                                                               .은정 글, 중 일부 발췌

   ……

'자연주의적'이면서 동시에 '주관 관념론적', 즉 절충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지니는 산타야나 특유의 치밀한 기술적 심리학의 논의 방식이, 실제로 美를 경험하는 우리의 의식을 세밀하고 설득력 있게 설명해낸다. …… 美의 경험은 쾌이며 긍정적이며 고유한 가치로서, 이 쾌는 다른 감각들과 마찬가지로 정신에 의해서 사물의 성질로 변형될 수 있으므로 '객관화된 것'이며, '객관화된 쾌'로서의 美의 의미와 성질에서 더 나아가 '객관화된 쾌'를 산출하는 인간의 심리적이며 생리적인 세 요소들, 즉 재료(물질?), 형식, 표현을 구분한다.

   ……

 

□  美論의 형성과 그 특징

 

……

산타야나의 전체 철학 체계에서 볼 때 비교적 초기 사상에 해당되며, 그의 최초의 미학 저서인 『美感』에서 그는 보다 더 완전한 미적인 것에 관한 이론을 진술하고자 시도했으며, 실제로 이 책은 미의식의 심리학적 기원과 미적 경험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결실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이 책에서 무엇보다도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美의 감각이 실제로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유한다는 점이다. 그는 美의 감각의 중요성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우리는 인간의 감각 그 자체와 우리의 미의식에 대한 무의식적인 동기를 찾아야 한다. ... 美를 '느끼는 것'은 우리가 美를 어떻게 느끼는가를 이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상상력과 취미를 가지는 것, 최선의 것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자연의 관조를 통해 理想 속에서 생생한 신념으로 수행되는 것 등은 우리가 과학에 희망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있는 것들이다.

 

『美感』에 나타난 산타야나의 美論은 미적 판단들이 '마음의 현상들, 그리고 정신의 전개 evolution의 산물'로서 간주되는 심리학적 탐구로 특징 지워 진다. 구체적으로 비평적 판단에 대한 실제적 훈련과 다양한 예술 형식들의 전개에 대한 역사적 연구를 구별하기 위한 탐구로 진행된다. 그는 이러한 탐구는 특히 형이상학적 논점들과 도덕적 의식에 대한 관심과는 독립적으로 실행되어야 함을 강조했으며, 자연 과학과 특히 진화론에 따른 생물학에 의해서 사유되는 인간 본성 속에서 미적 경험의 토대를 명료하게 형성해야 함을 강조했다. 따라서 『美感』은 어떤 대상들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또 다른 대상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에 대한 심리학적이며 생리학적인 설명들에 관해 서술되어 있다.

 

따라서 『美感』은 미적 경험에 대한 자연주의적이며 실제적인 고찰로 전개된다. 그러나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책에 나타난 그의 미적 이론이 '완전히' 자연주의적인 것은 아니며, 또한 그렇게 되고자 의도적으로 시도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자연주의적 미학에는 해결해야 할 두 가지 과제가 있는데, ①첫째는 美가 무엇인가를 설명해야 하는 것이며, ②둘째는 美가 어디서, 혹은 언제 발생하는가를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주의는 이러한 첫번째 과제에 대해서 美 그 자체를 정의하고자 시도한다. 그리고 두 번째 과제에 대해서는 美의 발생 조건을 나타내기 위해 미적 경험의 발생 근거와 그 범위를 규정하고자 시도한다. ......

 

 

□   美의 본성으로서의 '객관화된 쾌'

 

산타야나는 美의 본성을 규정하기 위해 우선 그에 따른 부적절한 요소를 배제해 나간다. 그는 이러한 각각의 배제를 통해 자신이 추구하는 규정에 도달할 때까지 인간 경험의 영역을 축소한다. 이 때 최종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경험이 객관화된 쾌의 경험이다. 우선 이러한 분석을 위해 지적이며 도덕적인 판단이나 가치를, 미적인 내재적이며 직접적인 판단이나 가치로부터 분리한다. 그리고 나서 지각의 또 다른 유형을 분석한다. '가치'의 문제에서 이러한 가치보다 더 적은 유형의 문제인 ''의 문제로 넘어가는 것이다.

 

첫째로 '' '가치'의 문제를 살펴보자. 우선 산타야나에 의하면 美의 哲學은 비평 이상의 것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대상은 단순히 어떤 규준들을 비교하거나 신중하게 판단하는 대상이라기 보다 오히려 느끼고 향유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美가 일종의 가치이며, 이러한 가치의 의미와 조건은 우선적으로 숙고 되어야 할 사항임을 강조한다.

……

그는 美의 本性을 규정하기 위해서 도덕적 판단과 분명히 구분되는 미적 판단에 관해서 기술한다. 그는 미적 판단과 도덕적 판단의 관계는 서로 밀접한 관련성을 지님과 동시에 분명히 구별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먼저 이 두 판단의 연관성을 살펴보면, 미적 판단과 도덕적 판단은 지적인 판단과는 대비되어 분류된다. 다시 말해서 미적 판단과 도덕적 판단은 모두가 가치 판단인 반면에, 지적 판단은 사실 판단이다. 다음으로 그는 미적 판단과 도덕적 판단의 차이를 세가지로 분류한다.

 

첫째, 미적 판단은 충동의 직접적인 반응에서 발원하고, 인간 본성의 비합리적인 부분으로부터 발생하는 가치를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도덕적 판단이나 사실에 대한 합리적 판단인 지적 판단과는 구별된다. 둘째, 미적 판단은 주로 긍정적인 성질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반대로 도덕적 판단은 주로 부정적인 성질을 지니고 있다. 셋째, 美의 지각에서의 판단은 내재적이며 직접적인 경험에 근거하고 있고, 결코 의식적으로 대상의 궁극적인 유용성의 관념을 토대로 하지 않는다. 반면에 도덕적 가치 판단은 그것이 긍정적일 때 객체의 효용이 포함된 의식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그 둘을 구분해 볼 수 있다.

 

둘째로 '' ''의 문제를 살펴보자. 산타야나에 의하면 모든 쾌는 우리의 지각에 의해 산출되며, 본질적으로 가치 있는 것이라고 언급한다. 그렇지만 그는 모든 쾌가 美의 지각은 아니며, 쾌 중에서 어떤 것은 미적인 것 그 자체가 식별될 수 있기 이전에 배제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그가 '물리적 쾌' 혹은 '신체적 쾌'라고 부르는 것이다. 즉 미적 쾌와는 달리 신체적인 쾌를 느낄 때 가장 두드러지게 되는 대상은 그 쾌가 발생하는 기관이다. 그러나 그가 언급하는 물리적이거나 신체적인 쾌는 어떤 신체적이거나 물리적인 '조건'을 지니는 쾌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미적 쾌는 눈과 귀 그리고 기억과 뇌의 관념작용의 기능들의 활동에 의존한다. ...

 

미적 쾌가 관련된 관념은 그것의 신체의 원인에 대한 관념이 아니다." 그리고 신체적 쾌는 우리 자신의 신체의 어떤 부분에로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이다. 즉 물리적 쾌는 우리의 주의를 신체 기관 그 자체에로 집중시킨다. 반면에 "미적 쾌를 위한 신체 기관들과 물리적 조건들은 곧 투명성이며, 외적 대상으로 집중하는 우리의 주의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의를 외적 대상에 직접 이르게 한다." 그리고 그는 미적 쾌의 특성인 육체적 쾌의 이탈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육체에서 이탈된 환영은 매우 유쾌한 반면에, 육체로 몰입하는 것과 어떤 기관에 국한하는 것은 우리 의식에 이기적인 상태를 부여한다." 요컨대, 긍정적이고 직접적인 미적 쾌는 신체적인 쾌와는 달리 신체의 기관에 속박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미적 특질을 지닌다. 따라서 미적 쾌는 우리에게 '비실체성 immateriality'이라는 환영과 정신적인 자유를 제공한다.

……

그에 의하면 美의 경험은 쾌이며, 긍정적이며 고유한 가치이다. 그리고 이 쾌는 다른 감각들과 마찬가지로 정신에 의해서 사물의 성질로 변형될 수 있다. 따라서 이 쾌는 '객관화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만약 우리가 보는 美를 다른 사람들도 보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러한 美가 색깔, 비례 혹은 크기와 마찬가지로 대상 속에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판단은 어떤 외부의 존재,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실재적인 탁월함에 대한 지각과 발견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근본적으로 불합리하고 모순적이다. 왜냐하면 美는 오로지 우리의 지각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각되지 않는 美는 느껴지지 않는 쾌와 같으며, 모순된 것이다.

 

여기에서 그의 중심 입장이 나온다. 즉 美는 우리의 지각을 통해 형성되는 어떤 사물의 특성으로 간주되는 쾌이다. 다시 말해서 '객관화된 쾌'이다.

 

그리고 산타야나에 의하면 미적 가치는 악의 지각이 아닌 善의 현존에 대한 의미이며 부정적인 가치와 대비되는 긍정적인 가치이다. 또한 그는 미적 악은 미적 선에 다만 상대적일 뿐임을 강조한다. "악은 단지 선의 결여에 불과하며, 따라서 미적 선의 결여는 도덕적 악이 된다." 그리고 美는 궁극적인 善이며, 미적 가치와 대비되는 도덕적 가치들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산타야나는 도덕성은 악의 회피와 善의 추구에 관련되어 있고, 美學은 단지 향유와 관련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美의 감정 그 자체는 아무것도 구성하지 않으며, 어디에도 기여 하지 않는다.

 

"美의 感情 그 자체는 즐거움과 안전, 고통, , 순수한 쾌에 관한 정신의 영향"이다. 따라서 "美 역시 우리가 느끼는 것이며 형용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美는 우리 본성의 공통적인 원리에 대한 본질적이며, 때때로 최상의 표현이다.

 

 

□   '객관화된 쾌'를 산출하는 세 요소

 

산타야나는 이와 같이 美의 본성이 '객관화된 쾌'임을 밝히고, 이러한 '객관화된 쾌'를 산출하는 세 요소들을 규정한다. 즉 그 요소란 재료 materials와 형식과 표현이다. 특히 이러한 세 요소들 중 재료와 형식은 美에 직접적으로 기여하며, 표현은 다른 두 요소들과 결합하여 단지 간접적으로만 美에 기여하게 된다.

 

ㅡ 재료 materials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산타야나가 의미하는 美는 '객관화된 쾌'이고 근본적으로 대상을 지각하는 주관의 반응이기 때문에, 이러한 쾌를 산출하는 美의 재료 역시 어떤 외부적인 실체가 아니라 대상을 지각하는 주관의 심리적, 생리적 기능들의 결과이다. 우선, 그는 美의 재료를 설명하면서 그것이 주로 인간의 신체적 기능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 때 신체적 기능 자체는 인간의 마음이 직접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일종의 자연적 요소로 존재하며, 그것이 美의 재료가 된다. 이 지점에서 그의 논의는 자연주의적 경향을 띤다. 그에 의하면 인간 본성의 근본적인 모든 기능들은 미적 효과를 산출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기능들이 모두 동일한 미적 효과를 산출하는 것은 아니다. 즉 미의 감각에 대한 직접성과 중요성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다. 구체적으로 '객관화된 쾌'를 산출하는 '재료'는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생동적 vital 기능'과 그 영향으로 산출되는 '상상력과 기억', '性的 본능', 그리고 '시각, 청각 등의 감각'으로 구성된다.

 

우선 생동적 기능은 여러 감각 작용들 중에서도 근본적이며 중심이 되는 것으로서 인간 신체의 動因이 되는 기능이다. 이러한 생동적 기능의 영향으로 인해 인간의 마음의 모든 기질과 상태, 열정에 대한 힘, 습성의 파악과 연관성, 주의력, 상상력, 기억, 공상, 감정의 활기 등이 산출된다. 그리고 "이러한 생동적 기능들은 순수한 쾌를 포함하는 활력을 구성하며 추진력을 결정하고 놀이와 예술과 사색으로 소모되는 잔여분의 에너지를 제공한다." 이러한 기능들은 특별한 기관이 없는, 자유로우며 인간의 신체 속에 내재되고 감추어진 것이다. 또한 우리의 의식 속에서 구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어떤 대상에 흥미를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흥미와 美에 적합한 매력을 산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생동적 기능들은 우리의 美의 감각을 증진시킬 수 있다.

 

또한 그는 이러한 생동적 기능들의 미적 가치는 그것의 생리학적 수반물들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관념작용에 적합한 수반물들의 경우에는 관조의 쾌를 더욱 증진할 수 있게 되며, 따라서 美의 감각과 사고의 흥미를 더욱 강화시킬 수 있게 된다. 반면에 생동적 기능들의 생리학적 수반물들은 그것의 생리학적 원인으로 인해서 관념작용을 억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경우에는 미적 활동에 그다지 적합하지 않게 된다.

……

산타야나는 순수하고 상쾌한 공기에서 야기되는 상쾌한 기분 역시 우리의 감상에 현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언급한다. 특히 이러한 상쾌한 기분은 대체로 오전의 美에서 느낄 수 있으며, 오후에는 이와는 전혀 또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모든 기능들의 상반된 상태는 외견적으로 유사한 상황에서의 상반된 정서이며, 이와 같은 상반된 정서로 인해 매우 다른 각각의 美를 산출하게 되는 것이다. 덧붙여 산타야나는 이러한 상황에서 야기되는 쾌를 비롯하여 인간의 가장 높고 초월적인 이상과 관련된 열망의 쾌는 무수히 많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순간의 쾌는 절묘함과 숨막힘 그리고 敬畏를 수반하며, 직접적인 인상을 주는 목과 폐를 통한 실제적인 감각 작용의 순환의 영향으로 산출된다.

 

그리고 우리의 근본적인 유기체의 기능인 性的인 본능도 우리가 美를 지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즉 인간은 이 세계의 서로 다른 다양한 양상들에 대해 민감하기 때문에, 상반된 성에 관해서 끊임없이 반응하고 갈망하게 되므로 성적 본능 그 자체는 근본적인 것이며 미적 경험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적인 본능에 의해 산출되는 '사랑의 열정'으로 인해 인간은 모든 사물들에 대해서도 부드러움과 관심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해서 산타야나는 주로 감상적인 인간의 미적 감정의 많은 부분이 성적인 본능에서 대체로 기인한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만약 인간에게 남성과 여성이라는 性의 구분 -차별성-이 존재하지 않고, 性的인 본능으로 인한 '재생 reproduction'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인간의 삶의 정서는 현재와는 급격하게 달라질 것이다. 즉 산타야나는 이러한 상황을 매우 부정적으로 간주하고 있다. 왜냐 하면 서로 다른 性에 대한 관심으로 산출되는 쾌는 단순한 생물학적 욕망을 넘어서서 미적인 것으로 승화될 수 있으며, 따라서 애초에 자신과 상반된 性을 지니고 있는 대상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사랑의 열정은 확산되어 주변적인 것, 혹은 모든 사물에까지 널리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이다.

 

한편 청각을 통한 소리의 세계에는 인간의 감각을 계발시키는 무한한 다양성이 존재하고, 이로 인해 감각의 무한한 확장이 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소리의 세계는 물질 세계 못지않게 인간에게 흥미로움과 정서를 자극하는 힘을 제공할 수 있다. 나아가 그는 시각을 '탁월한 par excellence 지각'으로 본다. 왜냐하면 인간은 무엇보다도 시각적 매체와 시각적 사항을 통해서 대상을 가장 쉽게 인식할 수 있으며, 이 때문에 시각은 우리에게 쾌를 가져다 주며, 우리는 이 쾌로부터 美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의 효과는 대상의 殘餘物이라기 보다 오히려 대상에 대한 우리의 지각 속에 포함되는 것이므로 즉시 美의 요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후각과 미각은 본질적으로 청각과 마찬가지로 공간적인 spatial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볼 때 큰 불리함을 지니게 된다. 따라서 후각과 미각은 자연의 표상을 제공하는 데에는 적합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자연의 표상은 그 자체를 단지 '공간적 사항 terms'으로서만 정확하게 사유하도록 허용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후각과 미각은 소리처럼 동일한 구성에 도달하지 못한다. 소리는 본질적인 공간적 특성이 없는 하위의 감각들로 나누어져 있다. 따라서 소리는 당연히 추상화된 외부 세계의 한 요소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소리의 음률에는 탁월하고 연속적인 단계적 변화가 있으며, 그것의 음량에는 측정 가능한 연관성이 있다. 따라서 소리는 공간적 특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측정할 수 있는 것인 반면에, 다른 비공간적인 감각작용들은 대체로 측정할 수 없다. 그리고 물론 소리는 그 자체의 범주 속에서만 측정 가능하다. 즉 소리는 비교될 수 있는 음률과 지속성을 지닌다. 반면에 후각과 미각은 인간에게 매우 흥미롭게 음악과 견줄만한 어떠한 주관적인 감각 작용의 역할도 제공해 줄 수 없다. 음악의 형식은 그것의 영속성과 복잡성에 의해 객관화되며, 이 형식은 단어들처럼 사회적 매체 속에서 존재하며, 공간적으로 존재하지 않더라도 미적일 수 있다. 그러나 미각은 이처럼 정확하게, 그리고 보편적으로 분류되거나 구분될 수 없다. 즉 이러한 감각작용의 매개는 귀에서 행해지는 것과 같은 훌륭하고 안정된 구별을 행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하위의 감각들도 연상을 불러일으키는 재료와 같이 상상력을 제공함으로써 미적 대상의 쾌에 포함될 수도 있다.

 

요컨대, 그는 인간의 생명 유지에 반드시 필요한 '생동적 기능'과 그것의 영향으로 인해 산출되는 '상상력, 기억, 감정의 활기 등'과 인간의 더욱 근본적인 유기체의 기능, '성적인 본능' '시각, 청각'은 우리의 미의 경험에 크게 기여하는 '美의 재료들'이라고 언급한다. 그리고 이러한 美의 재료는 우리에게 쾌를 가져다 주며, 우리는 이 쾌로부터 美를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美의 재료는 우리의 미의 경험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니지만 가장 근본적인 요소이며, 또한 '美의 형식'에 대한 토대가 된다.

 

ㅡ 형식

 

산타야나는 그의 전체 哲學에서, 특히 형식의 문제를 매우 관심 있게 다루고 있다. 그에 의하면 美學에서 가장 특징적이며 주목되는 문제가 바로 '형식'의 美에 대한 문제이며, 인간의 미적 경험의 가장 중요한 요소 역시 '재료' 자체가 아니라 '재료의 배열 및 그것의 방식'이다. 이것이 곧 형식이다. 그리고 '다양성의 통일'로서의 형식은 서로 별개의 구성 요소처럼 보이는 감각적인 성질들의 집합 aggregation 혹은 종합이다. 형식의 美는 재료가 그 토대를 이루며, 표현과도 결합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형식에는 재료와 표현의 미적 효과와는 다른 그 자체의 독특한 성질이 있다 즉 재료와 구별되는 형식의 독특한 성질 중의 하나는 그것이 재료를 근원적인 감각적 요소 이상의 어떤 것으로 형성하는, 즉 재료의 방식 및 배열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형식은 어떤 연상이나 외부의 대상과의 관련성과는 거리가 먼 미적 가치를 지닌다는 점에서 표현과도 구별된다. 그는 형식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요소 elements와 표현 사이에는 보다 더 신비스러운 '매개적 효과'가 있으며 보다 독특한 美의 효과가 있다. 이러한 효과는 그 자체로서는 무관심한 감각적인 요소들이, 결합된 쾌 -주체와 객관적인 대상이 서로 결합된 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서로 결합될 때 발견된다.

 

이러한 '매개적 효과'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 바로 '형식'이다. 그리고 그에 의하면, 우선 형식의 美를 요소의 美로 환원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요소의 美를 통해 산출되는 단조로운 효과는 형식의 美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효과와는 구분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가장 단순한 선들 -요소-의 관계를 변화시킴으로써 야기되는 효과의 창조성과 다양성은 단조로우며 너무나 쉽게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요소의 미가 주는 효과의 창조성과 다양성은 예컨대 모든 대리석 -요소-으로 만든 집들은 똑같이 아름답다는 통속적인 안일함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흔히 요소의 경우와는 달리 형식의 美를 표현에 귀속시키는 것을 타당한 것처럼 느낄 수 있다고 언급한다. 예컨대 만약 의미 없는 짧은 선들을 택하여 주어진 방식 내에서 그 선들을 배열함으로써 인간의 얼굴을 표현하고자 시도한다면, 거기에는 즉시 현저하게 다른 미적 가치가 나타난다.

……

산타야나는 이러한 형식의 독특한 가치 중의 하나는 눈과 귀와 같은 지각 기관에서의 근육 기능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언급한다. 예를 들어 인간의 눈은 그 신체적 구조 때문에 우아하고 흐르는 듯한 곡선을 -다른 선들에서 보다 더 쉽고 편안하게- 따라간다. 따라서 곡선은 대체로 다른 선들 보다 -직선의 단조로움 없이- 훨씬 더 아름다운 것으로 간주된다. 그는 인간에게 존재하는 어떤 크기, 리듬, 그리고 量을 관찰하는 '생리학적 과정'을 통해서 '本有的이거나 자연스러운 쾌'를 느끼게 된다고 암시한다. 따라서 일정한 음악의 양식과 리듬, 선과 색의 배열 등은 그 자체로서 즐거운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감각 기관은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매우 유쾌하게 자극 받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기본 입장을 가지고 생리학적 과정을 통한 '공간 지각' '곡선의 효과'를 설명한다.

 

그는 이러한 생리학적 원리들에 대한 중요한 범례를 대칭 symmetry의 매력에서 찾을 수 있다고 언급한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간에 우리의 눈이 문이나 창문이 열려있는 지점, 제단과 무대, 또는 벽난로 등의 어떤 한 지점에 습관적으로 향하게 될 때, 반드시 정면을 바라볼 필요성을 느끼지 않게 되고 그에 따라 혼란스럽고 주의가 산만하게 된다. 만약 이 때 대상이 우리 눈의 伸張力이 균형 잡힐 수 있도록 정돈되어 있지 않다면, 시각의 중심은 그 시각의 범위 내에 위치해 있는 어떤 한 지점에 머무르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대상에서 左右同形의 대칭이 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상하 관계의 수직적 대칭은 크게 요구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인간의 눈과 머리는 주로 사물을 좌우면으로 훑어보는 것이 일반적이지 상하로 훑어보는 경우는 좀처럼 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하면의 불균형은 움직임의 동일성, 즉 동일한 활동성을 산출하지 않는 반면에, 우리의 정면에 있는 대상의 좌우면의 불균형은 동일한 활동성을 산출한다. 그러므로 眼 근육의 균형으로 인해 산출되는 편안함과 효율성은 대칭의 가치를 형성하는 근원이 된다. "이러한 대칭의 장점은 우리에게 어떠한 자극도 없이 즐거움을 주며, 온갖 종류의 무절제에 뒤따르는 지쳐버린 감각을 환기시키는, 다시 말해서 馴化된 내면적 평화의 세계로 되돌려 놓는 완전성에 기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대칭에서 산출되는 靜的인 美의 내면성 inwardness과 견고성은 그것을 구성하는 쾌의 본질적인 특성으로부터 산출된다."

 

산타야나는 형식의 문제를 다루면서, 특히 미적 향유에 그다지 적합하지 못한 두 가지 유형에 관해서 지적한다. '불명료한 구성' '과도하게 명료한 구성'이 그것이다. 여기서 불명료한 구성은 불완전하며, 과도하게 명료한 구성은 지나치게 추론적이다. 즉 불명료한 구성은 지나치게 재료에 의존하며, 과도하게 명료한 구성은 표현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다. 불명료하게 구성된 대상들은 막연하고 일관성이 없으며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 것을 의미한다.

……

산타야나는 '불명료한 구성' '과도하게 명료한 구성'의 대비를 통해서 다양한 구성요소의 조화로운 통일 속에서 형식의 美를 발견한다.

 

 ㅡ 표현

 

마지막으로 美의 재료와 형식 이외에 美의 표현도 예술의 가치를 고양시키는 데에 기여한다. 그는 이 표현의 요소를 재료와 형식의 요소와 명료하게 구분한다. 그리고 때때로 재료와 형식의 요소를 "직접적"이거나 "드러난 bare" 지각의 양상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산타야나에 의하면 이러한 재료나 형식과는 달리 표현은 직접적이지 않으며, 특히 감각적이지도 않다. 표현은 주관의 경험의 인식 양상, 즉 주관의 경험에 의한 신념과 해석의 양상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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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재료와 형식의 美에서는 직접적인 지각의 과정과 관련된 어떤 쾌의 객관화가 있었다. 이러한 쾌의 객관화는 어떤 경우의 -주관의- 감각 작용이나 -대상의- 성질, 또는 또 다른 경우의 감각 작용들이나 성질들의 종합에 대한 구성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의식은 명료한 한계와 명확한 심상으로 이루어진, 즉 명확하게 추론 되거나 철저히 지각되는 매우 분명한 거울 같은 반영이 아니라고 언급한다.

 

구체적으로, 우리의 관념들 중 일부는 생동적 감정과 擴散된 감각의 불명료한 연속체로부터 잠시 동안 나타나며, 실제로 우리의 주의를 변경하거나 새로운 관계들을 지각함으로써 다른 대상들의 관념들 속에서 변화하거나 변형되기 이전에는 거의 고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와 같은 마음의 유동성을 면밀하게 숙고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

즉 표현은 대상 속에 우리가 과거에 경험했거나 지각했던 心象, 즉 우리의 마음 속에 남아있던 心象을 재 투사한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과거에 구름을 보고 '솜털처럼 부드럽다'라는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면, 다시 구름을 보거나 구름과 유사한 것을 보게 될 경우, 즉 우리가 그 '구름'이라는 대상에 직면했을 때, 과거에 보았던 구름이 연상되고 이러한 연상을 통해 '솜털처럼 부드럽다' 등의 심상이 산출된다. 따라서 이러한 과거의 심상들을 연상함으로써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구름의 심상만이 아니라 과거에 보았던 구름의 심상이 복합됨으로써- 대상에 대한 우리의 현재 반응이 변화된다. 따라서 그는 우리의 '연상의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러한 연상은 우리를 외부로부터의, 그리고 외부의 관계 속으로, 즉 사실과 사건의 세계 속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리고 그에 따르면 이와 같이 표현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지각되는 재료나 형식과는 달리, 반드시 '주관' '주관에 의해 지각된 대상'과의 상호작용을 통한 연상에 의해서만 美를 지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美에 단지 간접적으로 기여한다'고 언급한다.

 

요컨대, '재료'에서 우리는 생동적 기능이나 정서, 시각, 청각 등의 감각을 통해 대상을 직접 바라봄으로써 '객관화된 쾌'로서의 美를 느끼게 되며, 그리고 '형식'에서, 우리는 자신의 의식 속에서 이러한 재료를 배열하거나 통일함으로써 또한 美를 느끼게 되므로 의식의 이 두 요소, '재료' '형식'은 美에 직접적으로 기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표현'은 직접적으로 주관에 의해 대상에 투여된 것이 아니다. 표현은 이미 우리의 마음 속에 들어있는 표상을 통해서 대상을 다시 바라보는 것이며, 우리의 마음 속에 내재되어 있던 심상이 대상과 접촉함으로써 다시 그 대상에 재 투사된 것, 즉 주관이 다시 객관에 재 투사된 것을 의미하므로 재료나 형식에 비해서 간접적으로 나타난다.

……

산타야나는 이러한 표현의 상황에 관계하는 두 사항 terms을 지적한다. "우리는 모든 표현 속에서 두 가지 사항을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첫째는 실제로 제시되는 대상, 즉 낱말, 심상 등의 표현하는 것 expressive thing이며, 둘째는 암시되는 대상, 즉 더 진전된 생각, 정서, 혹은 환기된 심상 등의 표현된 것 thing expressed이다." 그에 의하면 표현은 표현성과 달리 이러한 두 사항이 '우리의 마음 속에 함께 존재'하고, 첫 번째 사항인 '표현하는 것'과 두 번째 사항인 '표현된 것'이 조화롭게 결합할 때 발생한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두 사항 중 한 사항만을, 즉 전적으로 첫 번째 사항만을, 혹은 두 번째 사항만을 가치로운 것으로 파악한다면 우리는 표현의 美를 지닐 수 없을 것이다. 결국 표현은 두 사항들의 조화로운 결합에 의해서 더욱 명료해진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의 마음 속에 들어있지 않은 것을 제시할 수 없다. 따라서 모든 것에 대한 표현성은 관찰자의 풍부한 知性으로 인해 더욱 증가될 수 있다. 요컨대, 표현의 가치가 산출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경우는 두 사항들이 본래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조화롭게 되었을 때이다. 그리고 표현의 쾌는 이 두 사항들이 서로 관련되어 나타나는 활동을 통해서 산출된다.

 

 

  산타야나 미학 이론의 意義  (맺음말)

 

산타야나의 초기 미학 이론의 핵심은 '객관화된 쾌'로서의 美를 강조하고 이러한 美의 구현과 관련해서 예술을 설명하는 것이다. 특히 본 고에서는『美感』을 중심으로 한 그의 초기 미학 사상을 '자연주의적'이며 '관념론적'인 철학 체계와 연관시켜 이해하고자 했다. 따라서 '객관화된 쾌'로서의 美의 의미와 그 성질을 고찰하는 가운데 그의 초기 미학 사상이 '자연주의적'인 견해와 '관념론적'인 견해 모두를 포괄하는 절충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내포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산타야나의 미학 이론을 '자연주의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는 그가 '우리에게 美感을 불러 일으키는 대상은 우리의 주관 바깥에 존재한다'고 간주한다는 점에서이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그의 이론은 또한 '유물론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자연주의적 입장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왜냐 하면 그가 더욱 관심을 가진 것은 '주관이 대상과 접했을 때 주관이 그 대상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기술적 심리학의 방식으로 탐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美感을 부여하는 근원으로서의 대상은 우리의 주관 바깥에 객관적으로 존재하지만 우리가 그 대상과 접해서 美感을 느끼는 것은 각각의 주관에 따라서, 그리고 동일한 주관이 처해있는 상황에 따라서 달리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이론은 '주관 관념론'적 경향을 강하게 띤다.

 

이처럼 우리가 미적 대상을 경험하고 그것이 인간의 의식에 드러나는 그대로를 기술하는 것이 그의 초기 입장에서 나타나는 '기술적 심리학'의 방식이며, 이것은 미적 대상이 주관을 벗어나서 실제로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보는 '자연주의적 입장'과 기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입장은 美를 느끼는 데에서 주관의 의식 작용에 대한 분석에 치중하던 초기의 입장으로부터 벗어나, 후기에서 주관이 대상에서 어떠한 美感을 느끼게 된다 하더라도 '' 자체는 불변적이며 본질적인 것이라는 것, 그리고 대상들 속에서 변하지 않는 美의 본성이 있다고 보며 그것을 추구하게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토대가 된다.

 

그리고 산타야나는 '객관화된 쾌'로서의 美의 의미와 성질에서 더 나아가 '객관화된 쾌'를 산출하는 인간의 심리적이며 생리적인 세 요소들, 즉 재료, 형식, 표현을 구분하는데, 이를 설명하는 그의 견해에도 역시 '자연주의적'이며, '관념론적'인 경향 모두를 발견할 수 있다. 우선, 그는 美의 재료를 설명하면서 그것이 주로 인간의 신체적 기능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라고 본다. , 그는 이 신체적 기능 자체는 인간의 마음이 직접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일종의 자연적 요소로 존재하며, 그것이 미의 재료가 된다고 본다는 점에서 자연주의적 경향을 띤다.

 

다음으로 산타야나가 제시하고 있는 美의 형식에는 인간의 '마음'이 본질적으로 신체보다 가치 있다고 파악하는 '관념론적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그가 형식을 구성하는 종합은 우리의 '마음의 활동'임을 표명했을 때 가장 잘 나타난다. 그리고 그는 형식을 '다양성의 통일'로서 정의한다. 다양성의 통일로서의 형식은 서로 별개의 구성 요소처럼 보이는 감각적인 성질들의 집합 혹은 종합이다. 이 때 통일은 의식, 또는 정신에 의해 산출되며 -이 지점에서 또 다시 그는 관념론적 경향으로 기울고 있다- 개별적으로 지각되는 감각적 요소들의 연관성을 통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끝으로 美의 표현을 설명하는 데에서 산타야나의 관념론적 경향은 더욱 뚜렷이 부각된다. 그는 '표현'의 요소를 재료와 형식의 요소와 명료하게 구분한다. 그는 때때로 재료와 형식의 요소를 '직접적이거나 드러난 지각의 양상'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러한 재료나 형식과는 달리 표현은 직접적이지 않으며, 특히 감각적이지도 않다. 표현은 주관의 경험의 인식 양상, 즉 주관의 경험에 의한 신념과 해석의 양상에 속한다. 표현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지각되는 재료나 형식과는 달리, 반드시 주관과 주관에 의해 지각된 대상과의 상호작용을 통한 '연상'에 의해서만 美를 지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美에 단지 간접적으로 기여한다'.

 

우리는 '재료'에서 생동적 기능이나 정서, 시각, 청각 등의 감각을 통해 대상을 직접 바라봄으로써 美를 느끼게 되며, 그리고 '형식'에서 우리는 자신의 의식 속에서 이러한 재료를 배열하거나 통일함으로써 또한 美를 느끼게 되므로, 의식의 이 두 요소, '재료' '형식'은 美에 직접적으로 기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표현'은 직접적으로 주관에 의해 대상에 투여된 것, 다시 말해서 우리 주관이 대상에 직접적으로 반응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표현은 이미 우리의 마음 속에 들어있는 표상을 통해서 대상을 다시 바라보는 것이며, 우리의 마음 속에 내재되어 있던 심상이 대상과 접촉함으로써 다시 그 대상에 재 투사된 것, 즉 주관이 다시 객관에 재 투사된 것을 의미하므로 재료나 형식에 비해서 간접적으로 나타난다. ......

 

 

산타야나는 자연주의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인간의 정신적 차원과 그 차원이 어떠한 개념 속에서나, 혹은 완전한 도덕적 성취의 실제적 발생 속에서 필연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적절하게 그리고 동시에 설득력 있게 강조했다. ......

정신적 삶, 이상에 대한 전망, 미적 선호는 '보는 인간 men-who-see' '행하는 인간 men-who-do'이 있는 한, 또는 모든 인간이 동시에 관찰자이자 행위자인 한, 도덕적 삶에서 중요한 특징이 될 수 있다.

 

 

요컨대, 세계를 미적으로 포착한다는 것은 단순히 美가 물질적 대상에 연루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정신적 차원에 포함되며, 따라서 궁극적으로 세계를 완전성으로 포착하는 것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세계의 미적 전유는 이상적인 것을 바라고 추구하는 것처럼 인간의 도덕적 삶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 산타야나가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미학 이론을 이처럼 단순히 인간의 도덕 의식을 고양하는 것으로 제한해 버린다면 산타야나 미학에서의 장점과 가치는 드러나지 않는다. 산타야나 미학 이론에서의 탁월성은 무엇보다도 그가 미적 대상에 반응하는 인간의 주관적 의식을 경험 심리학의 방식으로 세밀하고 치밀하게 기술해 내는 데 있었으며, 이러한 사실은 그가 美를 인간의 일상적 생활에 국한시키고 사회성, 역사성 등으로부터 제거해 버린 결점이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의 미학이론을 단순히 내던져 버릴 수 없는, 많은 가치를 함유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

 

* 죠지 산타야나 (George Santayana, 1863 - 1952),, 미국 철학자

     『美感 The Sense of Beauty (1896)

     『理性의 生活 Life of Reason (1905-1906)

     『회의론과 동물적 신념 Scepticism and Animal Faith (1923)

     『존재의 여러 영역 Realms of Being (1927 - 1940)

 

 

 

 

■ 체념과 초월의 경계

          (여자, 위험한 도구)

                                                                          : 이거룡, 동국대 연구교수(인도철학), 2004.6.

 

  우리가 보통 말하는 아름다움이란 우리의 마음을 잡아 끄는 속성을 지닌 대상에 대한 느낌이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그 속에 우리를 유혹하는 어떤 속성이 들어있지 않는 한, 우리는 그것을 아름답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도종교, 특히 사문(沙門)전통에서는 이런 차원에서의 아름다움은 오히려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것이며 따라서 참다운 실재를 추구하는 길에 장애가 된다고 본다.

 

  이런 이유로 불교나 자이나교 전통에서는 아름다움이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현저했다. 붓다는 자신의 법이 아름다운 말과 훌륭한 글귀로 표현되는 것을 금했다. 일생 동안 사원에 살면서도 자신의 눈이 감각적인 아름다움에 닿지 않게 하기 위하여 설사 붓다의 일생을 그린 것이라도 아름다운 물감으로 채색된 그림을 피했다는 칫타굿타(Chitagutta) 비구 이야기도 있다.

 

  흔히 아름다운 여자가 위험한 대상으로 간주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여자는 아름답기 때문에 위험하며 두려운 대상이다. 아름다운 여자는 우리의 마음을 헛갈리게 만들고 결국에는 샛길로 빠지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것이다.

 

  특히 기원전 6세기경의 인도에서 성행했던 금욕적인 관념들은 여성에 의하여 야기되는 유혹을 강조하였으며, 여성은 모든 죄악의 원천이며 해탈에 가장 중대한 장애로 간주되었다. 푸라나(Purana) 경전에서는 말한다.

 

  세 가지 술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독한 술은 여자다. 일곱 가지 독약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해로운 독약은 여자다.”

 

  여자가 아름다움과 두려움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되고 있다는 것은 인도 신화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여신들은 아름다움과 공포라는 두 가지 뚜렷한 특징을 지닌다. 두르가(Durga) 여신은 적()인 악신도 매혹될 정도로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는가 하면, 인간의 생피를 요구하는 짜문다(Camunda) 여신은 피골이 상접한 추악한 모습으로 섬뜩한 느낌이 들게 한다. 극단적인 대조를 보인다.

 

  인도 사람들에게 가장 널리 섬겨지는 칼리(Kali) 여신의 외모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시무시하다. 한 손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사람의 머리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그 머리에서 떨어지는 피를 받는 두개골 잔을 들고 있다. 목에는 잘라낸 사람의 머리를 꿰서 만든 목걸이를 걸고, 허리에는 잘라낸 손들을 엮어서 만든 치마를 입고 있다. 입가에는 붉은 피가 묻어있고 길고 붉은 혀를 내밀고 있다. 도무지 우리가 여성, 혹은 여신에 대하여 갖는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두렵고 섬뜩한 모습이다.

 

  인도사상에서 여자에 대한 기본 개념은 쁘라끄리띠(Prakrti)이다. 쁘라끄리띠는 모든 세계가 전개되어 나오는 근본 물질이며, 모든 변화와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는 에너지의 원천이다. 그러나 쁘라끄리띠는 의식이 없다. 이에 비하여 남자는 뿌루샤(Purusa)이다. 순수 정신을 의미하는 뿌루샤는 의식적이어서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그 자체로는 움직임이 없다. 조용히 관조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푸루샤는 앉은뱅이다. 앉은뱅이는 혼자 힘으로 걸을 수는 없지만 어떤 길이 바른 길이고 어떤 길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에 비하여 쁘라끄리띠는 성한 다리를 가진 소경처럼, 어디든 갈 수 있는 힘을 지니지만 앞을 볼 수 없기 때문에 혼자 길을 가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자칫하면 벼랑 아래로 떨어질 수도 있고, 엉뚱한 사람을 다치게 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이 여자가 위험한 존재로 인식될 때, 있을 수 있는 반응은 세 가지다. 하나는 무조건 피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철저하게 통제하여 복종시키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딛고 일어서는 것이다. 자이나교나 불교와 같은 인도 종교에서는 피하고 금지하는 경향이 강하다면, 바라문교 입장은 여자는 철저하게 남자에게 복종해야 하는 존재로 규정한다. 이에 비하여 후기 탄트라 전통에서는 피하거나 복종시키는 대신에 여자는 남자의 해탈에 긍정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입장이다.

 

  붓다는 한동안 여자가 승단에 가입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결국 아난다의 간청으로 여자의 출가가 인정되었지만, 그때 붓다는천년 간 이어질 정법이 5백 년 밖에 이어지지 않게 되었다고 말한다. 당시의 인도에서 여성의 출가를 인정했던 것은 상당한 혁신이라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기본 입장은 여자란 위험한 존재이며 따라서 멀리해야 한다는 것임은 분명하다. 이것은 붓다와 그의 제자 아난다의 대화에서도 분명히 볼 수 있다.

 

  여자를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보지도 말아라.”

 

  부득이 보아야 할 경우에는요?”

  말을 걸지 말아라.”

  말을 꼭 해야 할 경우가 있지 않겠습니까?”

  꼭 그래야 한다면 마음을 다잡고 흔들리지 않게 하여라.”

 

  정통 힌두교에서 여자는 남자에게 종속된다. 뿌루샤의 통제를 받지 않는 쁘라끄리띠는 위험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남자의 통제 밖에 있는 여자는 위험하다. 여자는 어려서 아버지를 따르고, 출가해서는 남편을 따르며, 늙어서는 자식을 따른다는 삼종지도(三從之道)는 이미 2천년 전 인도의 종교 문헌에서 볼 수 있다. 여자는 결코 독립에 적합하지 않으며,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므로 언제나 남자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 거듭 강조된다.

 

  여자는 일방적으로 종속되고 천한 신분을 지닌다. 여자의 의존성과 순종은 결혼한 여자가 부모의 집을 떠나 남편의 집으로 간다는 사실에서 의심할 나위 없이 분명해진다. 사실 여자는 종교적으로 슈드라에 해당한다. 정통 힌두교에서 여자는 죄인, 슈드라, 아웃카스트와 마찬가지로 베다를 들을 자격이 없으며, 따라서 해탈할 수 없는 존재다. 여자는 남자로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해탈할 수 없다고 명시하는 경우도 있다.

 

  지금도 정통 힌두교 가정에서 남편은 아내와 함께 식사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설사 아내가 바라문 태생이라도 마찬가지다. 남편이 남긴 밥을 먹는 것은 특히 아름다운 미덕으로 간주된다. 아내는 남편과 함께 나란히 걸어갈 수 없으며, 반드시 한 두 걸음 뒤따라가야 한다. ‘마누법전에서는 여자를 죽이는 것은 마치 술을 마시는 것처럼 경미한 죄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여자가 글을 읽을 줄 아는 것은 탐탁치 않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죄악으로 여겼다. 여자가 손에 책을 잡으면 가정에 재앙이 든다는 믿음도 널리 유포되어 있었다. 슈드라를 카스트 제도로 꼭꼭 묶어두듯이, 여자는 옥죄고 또 옥죄는 대상이었다.

 

  후기 힌두교에서 탄트라 전통이 성행하면서 여성의 중요성을 부각된다. 여자는 단지 눈 먼 쁘라끄리띠가 아니라, 여성적인 활동원리 샥띠(Sakti)의 화신이다. 샥띠는 만유가 생겨나게 하는 힘, 성력, 신적인 창조력으로 간주되며, 남성적인 원리와 동등한 지위 혹은 그 이상의 지위를 지닌다. 샥띠는 남신의 여성적인 배우자로 간주되며, 샥띠 여신에 대한 숭배가 중요한 신앙 형태로 자리잡는다.

 

  탄트라의 기본 입장은 '내 자신을 넘어뜨리는 상대를 이용하여 일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적나라한 삶으로부터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 느낌, 인간으로서의 상황 그대로의 전부를 될 수 있는 한 전면적으로 수용하려는 자세로 돌아선 것이다. 우리를 얽매고 있는 욕망 또한 해탈에 이르는 디딤돌이 될 수 있다. 자연스런 성적인 욕구를 부정하지 않기 때문에 몸의 중요성이 강조되지 않을 수 없다.

 

  우파니샤드의 고행관은 탄트리즘에 이르러 수정된다. 탄트라 전통은 인도정신사에서 일찍이 유래가 없는 인체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신성은 육체에서만 실현될 수 있으며, 육체는 고통의 근원이 아니라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도구다. 여자는 걸림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해탈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도구로 떠오른다.

 

  이와 같이 탄트라 전통에서 여신 샥띠가 숭배되고 여성의 중요성이 부각된 것은 사실이지만, 육체를 지닌 여성 자체에 대한 지위 상승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다시 말하여 여자가 중요한 것은 육체가 중요하기 때문일 뿐이다. 여자는 육체와 동일시되며, 단지 도구일 뿐이다. 여자가 단지 하나의 도구로 전락됨으로써, 오히려 남자가 여자의 육체를 탐하는 것이 보다 노골적으로 이루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자가 기본적으로 도구성에서 이해된다는 사실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풍만한 가슴과 힙이 여성의 이상적인 몸매의 핵심으로 거론되고 있다는 사실로 증명된다. 고대인도 경전에서 여성의 이상적인 몸매는 굵고 튼튼한 허벅지, 펑퍼짐한 둔부, 가는 허리, 큰 유방이었다. 후기 힌두교 사원의 부조에서 보는 여신상은 하나같이 풍만한 가슴과 둔부가 강조된다.

 

  여자의 가슴과 힙이 지니는 도구성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서 다소 변했다. 고대에는 주로 그것이 다산과 풍요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진 반면에 탄트라 전통이 성행하면서부터 그것은 단지 에로티시즘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자가 하나의 도구로 이해되었다는 점에는 변화가 없다. 이것은 여성의 본질이 지나치게 기능이라는 측면에서 파악된 결과다.

 

  물건이라면 또 모를까, 적어도 사람은 기능만으로 파악될 수는 없다. 쟁기는 밭을 가는 것이기 때문에 쟁기일 수 있다. 그러나 여자는 아이를 낳기 때문에 혹은 남자의 성적인 대상으로 쓰일 수 있기 때문에 여자일 수는 없는 것이다. 도구는 주인일 수 없다. 다만 누구의 도구일 뿐이다. 따라서 철저하게 종속적이며 이용될 뿐이다.

 

  이제 시대가 달라져서 누가 강요하는 것도 아니지만, 여자들은 여전히 볼륨 있는 가슴과 힙에 매달려있다. 심지어는 밑으로 아이를 낳는 여성들이 드물어지고 모유를 먹고 자라는 아이들이 거의 없어진 것이 요즘 세태인데도 여전히 가슴과 힙의 크기에 집착한다.

 

  체중을 파괴하자고 야단들이면서도 이와 함께 늘 따라붙는 단서 조항은 볼륨 있는 가슴과 힙이다. 줄이고 또 줄여야 하는 것이 체중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과 힙은 오히려 커져야 한다는 것이 요즘 여성들의 몸매 관리의 기본 개념인 셈이다.

 

  이것은 여성 자신들이 자기의 도구성을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노예이기를 자처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성 자신들이 스스로 도구성에 매달리는 한, 여성으로서 자기 본래의 정체성을 회복하기는 요원할 수밖에 없다. 여성들의 화장이 짙어지고 몸치장이 요란해질수록, 그럴수록 여성들은 '남자의 여자'가 될 가능성이 농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