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덕과 윤리.........善/2. 도덕과 윤리

윤리학

오갑록 2011. 4. 17.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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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하고 친근한 ......

■ 도덕의 목표

 

      우리나라 중학교 도덕과의 7차 교육과정 목표”에서의 서술 내용을 보면, 우리사회가 지향하는 도덕교육의 목표를 잘 가름 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한국인으로서 바람직한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 생활 습관과 예절 및 도덕 규범을 익히고, 일상 생활 속에서 부딪치는 도덕적 문제를 바람직하고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판단 능력을 기르며, 올바른 시민 의식과 국가민족의식, 그리고 세계 평화와 인류 공영 의식을 함양하고, 삶의 이상과 원리를 체계화하며 실천할 수 있는 도덕적 성향을 기른다”

 

 

■ 윤리학의 개요 (倫理學, ethics)

                                                                                                                  Daum백과 중에서

□  덕과 윤리

 

. 덕의 필요성과 윤리학의 목적   . 인간이 지칠 줄 모르고 자기를 확장함으로써 상호부정에 빠지는 일을 예방하기 위함   . 윤리학은 인간관계와 성격의 향상을 목적으로 하며   . 필요한 가치로서 선을 중심으로 한 덕을 성찰하는 학문

 

. 동물과 인간의 근본적인 차이   . 항상 상대적이지만, 인간적 판단은 선악의 경계를 헤매게 되나,   . 동물은 본능적으로 직선적인 확실한 행동을 함

 

. 자연을 대신한 기계기술로 인간관계 사이에 다음 문제를 야기함   . 새로운 환경에서는 그에 맞는 윤리규정이 필요   . 기술이 행위의 규모를 크게 한 결과 대면의 윤리가 상실됨        . 측은지정(惻隱之情)이 인()의 심정에서 벗어나게 됨        . 성이나 결혼의 윤리 등의 사례   . 윤리학의 미래 과제는 개인의 자유와 인류의 생존에 관한 문제        . 과거에는 필연과 자유의 대립이 윤리학의 과제였지만,        . 앞으로는 개개 사회가 아닌 인류의 운명이 윤리학의 사명임

 

□  동서양의 윤리사상

 

- 서양. 개인적 인격개념의 형성

인간존재라는 사실은 이성과 의지를 갖춘 개인적 주체로서의 인격(persona)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 행위의 개별주체인 인격에 착안

인격개념이 확립된 후, 2천 년이 지나서 그로부터 연역되는 덕()으로서 책임이 도출된다.

 

- 동양. 인간의 자기반성에 관해 숭앙된 개념은 ()”'관계가 계기를 규정한다'는 일종의 장()의 이론이 인륜의 기초가 된다. 인·의()·예()·지()·신()이라는 덕목은 4번째 ''를 제외하고 모두 대인관계 이다.

 

''과 함께 중시된 '()'는 현대식으로 번역하면 '책임'에 해당한다.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고 인간사회에 대한 명예는 소실된다.

거기에는 이미 인간이 살아 있는 게 아니라 동물이 호흡하고 있는 셈으로 곧 인생의 의미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양의 역사에서는 때때로 책임을 다하지 못 했다는 것을 이유로 자살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자살은 인간의 내적 존엄과 외적 명예를 혼동하는 데서 발생하는데 혼동의 이유는 사회적 관계로서의 일면에만 치우친 대인적 존재로서의 인간 파악뿐 인간의 기본적 존재로서의 개인적 인격이라는 의식이 적었기 때문이다.

 

 맹자  

                                                   공손추편(公孫丑篇)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

부끄러운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

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어짐의 극치이고,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은 옳음의 극치이고,

사양하는 마음은 예절의 극치이고,

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은 지혜의 극치이다

 

      無惻隱之心 非人也 無羞惡之心 非人也 無辭讓之心 非人也 無是非之心 非人也.

      惻隱之心 仁之端也 羞惡之心 義之端也 辭讓之心 禮之端也 是非之心 智之端也

 

 

□  서양 윤리학설의 전개과정

 

- “구약성서의 윤리사상

신이 낙원을 창조하고 사람을 거기에 두었을 때 "낙원 한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 돋아나게 하셨다"(창세 29)라는 것은 인간의 생명이 선악을 빼고는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의 상징이다.

 

- 고대 그리스

그리스의 윤리사상은 철저히 인간적이며 범인류적이었다. 호메로스의 전장의 윤리, 헤시오도스의 평화의 윤리를 적은 일리아스일과 나날을 배경으로 비극시인의 인간성에 대한 통찰을 살려 최초의 본격적인 윤리학설을 내놓은 사람은 플라톤이다.

 

소크라테스의 도덕적 박력이 플라톤의 전 생애를 관통한다. 그들의 특색은 덕은 지()이다라는 명제로 결정된다. 곧 명확한 이해와 자각으로 뒷받침된 덕이 아니면 덕의 이름 값을 할 수 없다.

 

플라톤의 윤리사상은 개인윤리의 단계에 머물지 않고 사회윤리로서의 국가학 또는 정치학에 귀결한다. 인간의 영혼이 이성과 의지의 정욕으로 나눠 지듯이 국가를 구성하는 계급도 이성에 해당하는 지배계급, 의지에 해당하는 방위계급, 정욕에 해당하는 직능계급으로 나누어진다. 이들 각자에 해당하는 덕이 지혜·용기·절제이다(“국가”).

 

3가지가 조화를 이루었을 때 정의가 실현된다. 가장 중대한 국가적 사업은 교육이다. 그러므로 플라톤의 윤리학설이란 개인윤리와 동시대에 대한 사회윤리로서의 정치학, 바람직한 사회에 대한 윤리학으로서의 교육학이라는 3가지를 포함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진정한 의미에서 체계적인 덕 이론을 처음으로 세운 사람이다.

덕에는 교육으로 습득할 수 있는 '지성적 덕'과 습관으로 성립하는 '습득적 덕'이라는 2종류가 있다. 후자는 모두 윤리적 덕이라고 불리는 것인데 이들은 모두 인간에게 본성적으로 부여된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해서 본성을 배반하는 것도 아니다.

 

- “신약성서의 윤리사상

종래의 세계관은 이(), ()욕과 같은 세속의 원리에 지배된 반면,

신약성서는 인간의 윤리적 태도로서 자기를 정당하게 자랑하기보다는 신 앞에 죄인으로서 스스로를 낮추는 태도이며, 이것이 새로운 가르침으로서 주장된다.

 

이들 윤리사상의 공통점은

   . 모두 인간의 행위가 내적인 의지에 의존하고,    . 인간은 서로 도와야 할 관계라는 점 그리고   . 서로 돕는 방법은 사회적으로 타당한 이성의 결정에 따라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 고대 로마의 윤리학설

특히 스토아 학파 (창립자는 그리스의 제논)의 윤리사상이 중요하다.

자연법을 존중하고 인간이 의지로 자연법칙과 도덕법칙을 합치시키는 삶의 방식을 이상으로 삼는다.

자연적인 생명에는 평온한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 이상이므로,

즐겁고 괴로움에 따라 마음의 평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을 것과,

부도 명예도 사치도 물리칠 것을 권유하고 있다.

 

- 그리스도교 윤리학

토마스 아퀴나스는 저서 은총과 자유의지에 관해서에서

신에 대한 덕으로서 신앙· 희망· 사랑의 3가지를 주장하면서,

"신은 정의이므로 악에 대해 악으로 갚는데, 이것이 벌이다.

다음으로 신은 선하므로 악에 대해 선을 베푸는 일도 있지만 이것은 불의에 대한 은총이다.

또 신은 선이고 정의이므로 선에 대해서는 선으로 갚는데 이것이야말로 은총에 대한 은총이다"라 했다.

 

- 근대 공리주의

자기애를 인간의 본능적인 이기애로 환원해 일체를 이해로 찾음으로써 공리주의의 원조가 된 사람은 정신론 De I'esprit”을 쓴 엘베시우스이다.

 

제러미 벤담은 공리주의야말로 행위의 경향성이라고 보고,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제창했고 윤리학·사회학·정치학의 연결을 더욱 구체화했다.

오귀스트 콩트는 실증과학인 사회학을 윤리학 또는 도덕철학의 기초로 삼을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 관념론의 윤리학

이마누엘 칸트의 윤리학은 도덕적 명령이란 "너의 준칙이 보편적 법률로 될 수 있는 것처럼 준칙에 따라 행동하라" (실천이성비판)고 했다.

 

G.헤겔은 칸트가 자유의 개인적 실현에 머무른 데 비해 법철학요강에서 도덕성 위에 인륜의 단계를 세우고 그 최고 실현 형태로서 국가를 상정했다.

정신의 본질은 자유이며 민족정신은 각 민족의 자유에 관한 의식이므로

세계사는 탁월한 민족을 세계정신의 담당자로 삼아 변증법적으로 진전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세계사를 자유의식의 전개로 본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개인의 역할은 어떤 것일까?

윤리학의 기본문제로서의 인격의 자유는 사회학에서 말하는 권리로 치환된다.

 

- 인격의 자유F.셸링은자연과 정신이 대립하는 시대는 가고, 이제 더 높은 또는 오히려 진정한 대립이, 즉 필연과 자유의 대립이 나타나야 할 시대이다""그 자체로는 자유이고 형식적으로는 필연이다, 절대적 필연성만이 절대적 자유이다" 로부터 동일성의 결여가 인간에게 악의 가능성을 만든다고 제시했다.

 

그렇다면 선은 그 화합인 절대자에게만 완전하다.

따라서 인격의 자유인 이념으로서의 선을 동경하는 윤리학은 종교로 보완되어야만 했다.

 

이를 공격한 사람은 프리드리히 니체였다.

그는 "그런 신은 인간의 작위이며 광태였다"(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고 말하고 "선과 악 모든 것의 이름은 비유이다", 그런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너의 의지가 사랑하는 사람의 의지로서 만물에 명령해야 한다고 바랄 때 여기에 네 도덕의 근원이 존재한다. 이 새로운 도덕 그것이 힘이다"라고 말했다.

 

- 20세기의 윤리학. 베르그송은 전쟁이나 거대산업의 위험에 대해   기계학이 부른 신비학에 의해 더욱 강화된 정신이 맞설 것을 예언했다.

 

현대 윤리학 가운데 특기할 것은 방법론적 자각이 강해졌다는 것이다.

윤리학을 학문적으로 기초 짓고자 할 때 문제가 되는 것 중 하나는 이 학문이 실천에 관계되기 때문에

논리와 윤리의 대립을 존재와 가치의 문제로 환원해서 방법적으로 해결하려 한다.

 

. 조지 에드워드 무어는 "과학적이라고 부를 만한 미래의 윤리학에 대한 서론"(윤리학 원론, 서문)에서  "선은 정의할 수 없다"고 말했고 윤리학의 기본원리에 관해, 그것이 선이라는 판단은 직관으로 파악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는 윤리적 명제가 '증명 불가능한 것'을 의미하며 윤리적 직관이라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리고 바른 직관을 행하는 방법은 선인가 아닌가를 조사하고 싶은 대상을 다른 사상관련에서 절대적으로 떼어놓는 것으로써 해당 대상을 유기적 전체 속에서 부여된 의미로부터 고립시킬 수밖에 없다.

 

. 하이데거는 인간의 양심은 내용 없는 부름에 불과하다고 보는데 그 무 내용성은 부담이라는 불안을 매개로 죽음에의 선구적 결의성을 가져온다”(존재와 시간).

때문에 그런 부름이야말로 실존의 윤리적 자각 자체이다. 결국 가치의 다양성을 따라 분열된 현재의 상황에서는 선의 구체적인 지표가 보편적 차원에서는 상실되었음을 보여 준다.

 

□  현대 윤리학의 과제

 

. 인간의 행동과 행위는 구별해야 한다.   . 같은 방향, 속도, 모양으로 달리는 두 사람이 있을 때 양자의 행동은 같지만   . 달아나는 도둑과 쫓는 경관일 때, 전자는 도망행위 후자는 추적행위

 

. 현대 윤리학의 과제는 목적정립의 자유를 둘러싼, 초월과 책임의 회복 가능여부에 있다.   . 기계적 관리체제의 법적 규제력으로 인간의 내면이 압축된다면,   . 행위의 세계로부터 초월과 책임이 박탈되면, 윤리학의 위기를 야기하고   . 인간이 행위의 목적을 수단적 기술로 받드는 한 인간의 존엄성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윤리학

 

                                                      (엔하위키)

윤리학(倫理學 Ethics), 도덕 철학(moral philosophy)이라고도 불리는 철학의 한 분과.

 

 

 인류로 태어나는 이상은 어떤 개인이든 간에 사회의 일원으로 태어나게 된다. 각각의 사회에는 저마다 고유한 생활 방식과 질서가 있고, 개인은 자의로든 타의로든 이를 따를 수밖에 없다. 이처럼 한 사람을 제약하고 통제하는 것을 도덕, 법률 등으로 부르며 개인은 이를 일회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따라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습성(習性, manners)을 의미하는 그리스어가 바로 'ethics'이며 이를 윤리, 또는 윤리학으로 번역한다.

 

 

 

. 윤리학의 역사

 

 

 윤리에 관한 문제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였다.

17세기 이후에 와서는 도덕, 법률, 정치적 의무 등 모든 종류의 사람이 져야 할 의무에 관한 학문이 여기에 속한다.

 

 

 몇몇 논의를 제외하고, 윤리학의 역사는 대부분 규범 윤리학에 대한 논의이다. 규범 윤리학이란 상식적으로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배웠던 학설들을 떠올리면 되는 것으로서, 현대에 생겼다고 할 수 있는 메타 윤리학, 서술 윤리학과는 달리 윤리의 내용이나 그 정당화를 연구한다.

 

 

 고대 윤리학에서 규범 윤리학의 대표자는 아리스토텔레스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목적론을 기본으로 둔다. 이 목적은 사람이 가장 사람으로서 기능하는 것에서 행복을 얻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중요한 것은 행복을 얻는 것이 윤리의 목적이라는 것으로서, 이는 좋음와 옳음의 구별이 상대적으로 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도 있고, 혹은 잘 사는 사람에게는 당연히 행복이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반영된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이에 따르면 좋은 습관으로 적절하게 판단해서 사회의 규칙을 잘 따르면서 지적으로 관조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윤리적인 삶이다.

 

 

 근대 규범 윤리학의 논의는 이와는 사뭇 다른 여러 가지 학파들이 생겨난다. 이를 나누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직각론자, 감정론자, 자연법학자, 독일 학파로 나누면 많은 사람들이 논의의 틀 안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옳음과 좋음의 구별이나, 윤리학과 형이상학을 더 떨어져 있다는 점에서 고대와 차이점을 보인다.

 

 

 짧게나마 각각을 서술하자면, 직각론자는 대표적으로 프라이스가 있고, 윤리의 기본적인 규칙들이 모두에게 있어서 직각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르면 몇몇 윤리적 규칙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자체로 맞는 형태로 있다. 그리고 어떤 근거도 없어도 이 규칙들은 따라야만 하는 규칙들이다. 감정론자들은 흄, 아담 스미스와 같은 사람들이 있고, 도덕이 타인과의 공감과 같은 감정에 의해서 새겨나며, 이에 따라서 사회적인 규약의 형태로 도덕이 굳어지게 된다고 설명한다.

 

 

 자연법학자들은 홉스, 루소, 로크와 같은 사람이 유명하다. 이들에 따르면 인류에게는 어떤 원초적인 상황이 있었고, 그 상황에 따라서 사람들은 합의하였으며(혹은 합의하였을 것이라고 가정하며) 그에 따라서 사회가 구성되고 그 규칙이 정해진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독일 학파는 라이프니츠-칸트-헤겔로 이어지는 주로 관념적이고 이성을 중시하는 학파이다. 이들은 관념적이고 이성을 중시한다는 점은 공통되지만 모두들 나름의 고유한 특징이 뚜렷하기에, 각 사람의 체계에 대해서 각 사람의 항목에서 이해돼야 할 필요가 있다.

 

 

 현대 윤리학에서는 프레게, 비트겐슈타인 이후의 언어적 전회에서 나타난 메타 윤리학이 나타났다. 이것을 시작한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G.E.무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기존의 규범윤리학이 일반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를 연구하는 것과는 달리 적어도 초기에는 '', '좋음', '옳음'이라는 말은 무엇인가? '의지 자유'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와 같은 질문들을 가졌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평가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있는데,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없다고 한다.)

 

 

메타 윤리학의 등장으로 대표되는 현대 윤리학의 특징은 윤리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질문들을 던진다는 것이다. 윤리에 대한 질문이 '우리에게 옳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라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윤리가 가능한가?' '그것은 객관적인가?'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존재할 수 있는가?'와 같은, 말하자면 회의적인 질문까지 포함한다는 것. 사실 윤리가 상대적인데 우리가 절대적으로 착각하며 산다는 것으로 충분히 대답될 수 있다. 하기야 옛날에는 여행도 없고 문화인류학적 저술도 없으니 윤리가 객관적인 게 가정되어도 문제가 없었지만 요즘에서 그런 굳건한 윤리적 신앙을 가지긴 쉬운 일이 아니긴 하다.

 

 

 현대 윤리학에서 다른 방향으로 중요한 것은 문화인류학이 발달하면서 나온 서술 윤리학이다. 이것은 윤리에 해당하는 말이 다른 문화의 사회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그 낱말이 사용되는지를 서술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상식적인 생각으로는 윤리학이 전혀 아닌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따라서 윤리학의 큰 줄기는 규범 윤리학(일반적인), 메타 윤리학(최근엔 예전 같지 않다고 한다.), 서술 윤리학, 그리고 응용윤리학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규범 윤리학의 방계라 할 수 있는 논의로 최근 반짝했던 매킨타이어를 필두로 하는 덕 윤리와 그 부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즉 행위를 중심으로 보기 보다는 인격을 중심으로 보는 일상적인 의미와 현명함을 요구하는 덕 윤리가 중요하다는 것인데, 어디까지나 이것은 직계 윤리학은 아니라고 한다.

 

 

 이것은 연구되는 사람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덕 윤리에 속하는 사람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 , 니체, 레비나스 등이 있다. 그리고 칸트, 밀과 같은 요즘 사람들은 이에 상당히 반대되는 주장을 폈다.

 

 

 

. 동양에서의 윤리학

 

 

동양사상, 특히 중국의 핵심 사상인 유교사상은 사실상 윤리에서 출발해서 윤리에서 끝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가에서의 윤리학은 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메타적 질문보다는 어떻게 선을 행해야 하는가라고 하는 방법론에 가까우며 이를 실행하는 방식인 예()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성질은 종교계의 최종보스 불교의 등장과 이후 도학이라고까지 불리었을 정도로 이질적이었던 성리학이 등장할 때까지 유교의 주된 논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테제로써 출발한 도가와 법가가 일견 반도덕적으로 보이는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이후 성리학과 양명학이 심성론으로 기울게 되면서 초기 유교가 가졌던 사회윤리에 대한 실천의 측면은 상당히 퇴색되었다.

 

 

 그러나 유교의 출발 그 자체가 행위에 대한 방법론이자 실천성을 중시하였으므로 오늘날의 논의에 뒤떨어지는 감이 있다. 말하자면 공자님이 착하게 살아 라고 했을 때 왜 착하게 살아야 하는데? 라고 되묻는다면 사실 별 할 말이 없어진다. 일례로 공자의 한 제자가 삼년상은 너무 길기에 일년상으로 하자(그의 근거는 삼 년 동안이나 일을 쉬게 되면 생계가 곤란해진다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본다면 아주 타당한 내용이다) 공자는 그에게 부모가 죽은 지 일 년 밖에 안되었는데 배부르고 등 따시게 살면 네 마음은 편안하냐고 반박하자, 그는 쿨 하게 편안합니다라고 대답했고 공자는 그럼 니 맘대로 해라고 하고 말았다. 공자의 입장에서는 부모가 죽었는데 자식 입장에서는 슬프니까 당연히 곡하는 것이고 상도 치르는 것인데 제자는 그렇지 않다고 하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쉽게 말해 마음은 일종의 정언명령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부정당하면 기본적인 논제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후대로 가면서 너는 임금님께서 붕어하셨는데 곡도 안해? 슬픈 마음이 없는 게로구나! 라는 식의 교조적인 성리학으로 변질되어 버렸고 그 결과는 북쪽의 붕어한 2대 독재자의 장례식 사례에서 매우 잘 나타난다. 도가에서 비판한 것이 이러한 부분이기도 했다. 이후 성리학이 대두하면서 인간에게 도덕적 행위를 하도록 만드는 마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었고 그 결과 사단칠정이니 이기론이니 하는 것들이 나오게 되었다. 백가사상, 동양윤리 별도

 

 

 

. 철학의 마지막 보루

 

 

 최근에는 과학에 의하여 인간의 마음에 대한 비밀이 하나씩 풀리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심리학에 의해서도 그 고유영역을 조금 뺏겼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에 대한 강한 반대 이론 역시 존재한다. 이는 흄, 프라이스 등에 의해서 제기된 사실과 당위의 구분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으로서, 심리학, 과학 등이 아무리 우리의 '사실'을 증명해 준다고 하더라도 윤리학이 다루는 '당위'의 측면에는 접근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 즉 과학이 "경험하고 관찰한 사실"에 대한 분석과 설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윤리학은 "가치 그 자체에 대한 올바름과 그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애초에 인간행위의 본질적 특성에 대한 "가치중립적 설명"을 추구하는 경제학이나 심리학(특히 진화심리학)의 경우 "우리는 이러한 인간행위가 옳고 그른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않는다."고 아예 선을 그어 놓고 출발한다. 반면 윤리학은 옳고 그름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룬다.

 

 

 따라서 윤리학이야말로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에 뼈도 살도 다 내준 철학이 사실상 거의 유일하게 고수하고 있는 자신만의 온전한 연구분야라고 보는 철학자들도 상당수 존재한다(전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다른 분야에 철학이 개입하면 손사래를 치는 과학자들도 윤리학이 철학의 고유한 영역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인정하는 편. 그보다 과학자들은 대체로 윤리학에는 별 관심이 없지만.

 

 

 

. 윤리학의 분야

 

 

 

. 메타 윤리학

일반적으로 메타라는 말이 붙은 것은 그 학문에 대한 학문이라는 특성을 가진다. 메타 비평이라고 하면 비평에 대한 비평을 가리키는 식. 메타 윤리는 분석 윤리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윤리학에서 쓰는 용어들을 치열하게 분석하는 것이다. , 행동, 행위, 인식, 의지 등의 용어의 의미를 분석하고 더욱 파고드는 방식의 영역이다.

. 이론 윤리학. 응용 윤리학

 

 

 

■  "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 

                                                                                   .명옥 (mmsarah)의 서평 게시글 중에서

 □  니코마코스 윤리학,  이창우 외 옮김 ( 니코마스 倫理學, Ethika Nikomacheia)

      

.   저자, 아리스토텔레스 (BC384 마케도니아 ~ BC322 그리스)

 

일반적으로 니코마코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년에 얻은 아들인 니코마코스에게 주는 철학적 잠언격인 품성에 관한 도덕적인 논의들로 보면 무난할 것 같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전 10권으로 1권의 좋음과 목적을 시작으로 10즐거움이라는 행복에 대한 성찰과 정리로 끝맺음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통해 그리스 문명이 지닌 도덕적 세계관을 폴리스공동체적인 관점에서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윤리나 도덕은 이론이 아니라 개인 삶의 실천 덕목이면서 공동체적 삶에 이로운 것이어야 하며 특별히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더욱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품성을 가꾸어야 한다고 지적한 부분들을 특별히 눈 여겨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가장 두드러진 삶의 유형은 향락적인 삶, 정치적인 삶, 관조적인 삶이다. 많은 사람들이 짐승의 삶을 선택함으로 노예와 다름없는 삶의 모습을 보이지만, 교양 있는 사람이나 실천적인 사람은 명예를 선택한다. 하지만 명예는 우리가 추구하기에는 너무 피상적인 것 같다. 명예는 수여하는 사람에게 더 의존하는 것으로 보이는 반면, 좋음은 고유한 어떤 것으로 우리에게서 떼어낼 수 없는 것이라는 예감 때문이다. 어쨌든 그들은 실천적인 지혜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 또 그들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또 그들의 탁월성을 근거로 명예를 얻고자 한다. 따라서 적어도 이들에게는 탁월성이 명예 보다 더 나은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  철학적 순교자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

                                                                                      .명관 역, “니코마스 윤리학” 중에서

젊은이들을 망치고 신을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독배를 받은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라는 유명한 말과 함께 세상을 떠난 것이 기원전 399년의 일로 전해진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이어받은 사람이 플라톤이고, 플라톤의 가장 탁월한 제자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순교로부터 정확하게 76년 뒤인 기원전 323년 아리스토텔레스는 동일한 죄목으로 피소 당한다. 하지만 그의 죄는 사실상 그가 아테네인이 아니었다는 데에 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스승이기도 했던 그의 고향이 당시의 강국이었던 마케도니아였던 것이다. 그러니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아테네인들의 기소는 곧 마케도니아로부터 당한 핍박에 대한 앙갚음이었던 셈이다. 그는 "아테네인들이 철학에 두 번 죄를 짓지 않도록 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아테네를 떠났다고 한다. 아테네 시민들의 기소에 대한 의사결정에서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선택은 비록 달랐지만, 플라톤을 포함한 이 세 사람의 사상에는 큰 줄기에서 뚜렷한 일관성을 발견할 수 있다. 죽음을 앞둔 소크라테스가 남긴, "잘(eu) 아름답게(kalos) 바르게(dikaion) 사는 것이 중요하다" 말은 바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전개하는 사상의 핵심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신의 이성적 부분을 다시 둘로 나누어 지적인 덕에 대한 논의를 전개한다. 그가 이 둘을 구분하는 근거로 삼는 것은 정신의 각 부분이 어떤 대상의 인식과 관련을 맺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런 발상은 고대 그리스 철학 전반에서 발견되는 것으로서 인식되는 대상들의 성격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각기 다른 이 대상들을 인식하는 인간의 정신도 성격을 달리하는 부분들로 나뉘어져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런 생각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래와 같이 전한다.

 

영혼 안에는 행위와 진리를 지배하는 것 세 가지, 즉 감각과 지성과 욕구가 있다. 이 중에서 감각은 어떤 행위의 원리도 아니다. 이는 동물들도 감각은 가지고 있지만 행위에는 참여하지 못한다는 사실로 분명해진다. … 성격적 덕이 합리적 선택과 관련한 품성이고, 또 합리적 선택은 숙고적 욕구이므로, 합리적 선택이 신실한 것 이려면 이성(logos)도 참이고 욕구도 올바른 것이어야만 하며, 동일한 것을 두고 이성은 긍정하되 욕구는 추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실천적 사유이며 실천적 참이다. 그러나 이론적일 뿐 실천적이거나 제작적이지 않은 사유에 있어서 그것의 잘함과 못함이 참과 거짓이다. 반면에 실천적이며 사유적인 것의 (기능은) 올바른 욕구와 합치하는 참이다. 행위의 원리는 합리적 선택이지만 … 합리적 선택의 원리는 욕구 및 어떤 목적을 지향하는 이성이다. 이런 까닭에 합리적 선택은 지성이나 사유 없이 생기지 않고, 또 성격적 품성 상태 없이도 생기지 않는 것이다. 잘 행위 한다는 것과 행위에 있어서 그 반대는 사유나 품성 없이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인용문을 통해 이제 우리는 성격적 덕이 지적인 덕에 기초하며, 이 둘이 상호 매우 밀접한 보완적 관계에 있다는 점은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성격적 덕의 실천에 바탕을 이루는 것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하는 지적인 덕은 구체적으로 . 학문적 인식(episteme), . 기예(techne), . 실천적 지혜(phronesis), . 직관적 이성(nous), . 철학적 지혜(sophia), 이렇게 모두 다섯 가지이다. 우리의 정신활동에서 비롯되는 이 다섯 가지의 덕목은 다시금 두 가지의 용어로서 정리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지식과 지혜라는 개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덕에 관하여 밝히고자 하는 것은, 요컨대 행복에 이르는 조건으로서 덕이란 좋은 품성과 좋은 정신능력의 적절한 조화로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바른 지식과 실천적 지혜에 기초한 좋은 품성의 실천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  연구 보고자료 "니코마코스 윤리학" 중에서               『철학.사상』별책 제39호 김.남두 외, 2004

                                                                               관심 있는 부문들을 일부 발췌하여 봄

 

□  최고선으로서의 행복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 기예나 탐구합리적 선택은 어떤 선

(좋음)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모든 행위와 선

택을, 그것이 그에게 좋은 것이라고 혹은 좋은 것과 연관되는 것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행한다. 좋음은 인간 행위가 추구하는 목적이 되며, 이런 점에서 ‘좋음’ 개념과 ‘목적’ 개념은 그 내포에 있어서 동일하다. 인간의 행위를 이해하는데 그것이 추구하는 목적을 일차적인 조회점으로 놓는다는 점, 즉 무엇을 위해서 그런 행위를 하는가를 묻는다는 점에서 그의 윤리학은 보통 목적론적 윤리학의 대표격으로 이해된다.

 

. 선과 좋음

 

이 말은 일반적으로 사물에도 적용되어 ‘좋다’는 의미와 의지를 가진 존재에게 적용되는 ‘선하다’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국어의 경우 ‘좋음’과 ‘선’은 서로 다른 적용 영역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한 사물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성질을 잘 갖추고 있을 경우 ‘좋음’ 계열의 말을 쓰지만 ‘선’ 계열의 말을 쓰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좋은’ 컴퓨터나 ‘좋은’ 의자라고는 얘기해도 ‘선한’ 컴퓨터나 ‘선한’ 의자라는 말을 쓰지는 않는다. 선하다는 말은 의지를 가진 존재자 혹은 그것과의 관계에서 주로 쓰이는 것으로 보인다.

 

□  통념적 쾌락

 

      사람들은 좋음과 행복을 자신의 삶의 방식에서 파악해 내는 것처럼 보이는데, 여기에는 그럴 만한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대중들 특히 지극히 통속적인 사람들은 좋음과 행복을 쾌락으로서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즐기는 삶을 좋아하는 것이다.

 

사실상 가장 두드러진 삶의 방식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방금 말한 삶, 정치적 삶, 그리고 셋째로 관조적 삶이 그것이다. 그래서 대중들은 짐승들에 알맞은 삶을 선택함으로써 완전히 노예와  다름없는 삶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들의 견해가 그럴 법한 것은, 권력의 지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사르다나팔로스가 느끼는 것과 같은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원문)

 

아리스토텔레스는 최고선으로 이해된 행복의 내용을 검토하면서 삶의 방식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사람들이 행복을 무엇으로 생각하는지는 단순히 그의 얘기에서가 아니라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에서 주어진다는 얘기로 들린다. 윤리학의 명제들은 주장하는 말로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어떻게 행위 하는가에서 확인된다는 그의 주장처럼 행복을 무엇으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검토하면서 세 가지 두드러진 삶의 방식을 전면에 등장시키는 것이다.

 

좋음이란 우리 자신에게 고유한 어떤 것이며 그리고 우리에게서 떼어 내기 어려운 것이라고 예감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람들은 자신 들이 선하다는 확신을 얻기 위하여 명예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하튼 그들은 실천적 지혜를 가진 사람에 의해서, 또 그들을 아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리고 덕을 근거로 존경 받기를 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그들에게는 덕이 명예보다 더 나은 것이란 것은 분명하다.

 

 

□  통념적 행복과 부

 

      돈을 버는 삶은 강제된 삶이다. 그러나 부는 우리가 추구하는 좋음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해서만 유용한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앞에서 말한 것들을 목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을 수도 있을 것이다. 것들은 그것들 자체로 소중히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 조차도 목적인 것 같지는 않다.(원문)

 

아리스토텔레스는 돈을 버는 삶은 강제된 삶이라고 규정한다. 부는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해서만 유용하다는 단순한 이유로 행복의 후보에서 배제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더 나아가 부가 봉사하는 목적 자체가 다시 행복일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암시를 주지만, 부는 아무리 해도 그 자체 목적이 될 수 없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진정한 행복의 자격을 가지지 않았다고 논증한다.

 

□  행복의 정의

 

      최상의 좋음이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일반적으로 동의될 것이기에 우리에게는 여전히 최상의 좋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좀 더 분명한 설명이 필요하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인간의 기능을 파악한다면 우리는 이것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피리 부는 사람, 조각가 그리고 모든 기술자에 대해서 그리고 일반적으로 어떤 기능과 해야 할 행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그의 좋음 및 ‘잘됨’은 그 기능 안에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마찬가지로 만일 인간이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인간의 좋음은 인간의 기능 안에 있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원문)

 

여러 탁월 함들 중에서 최상의 그리고 가장 완전한 탁월함’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를 놓고 전문가들 사이에 심각한 의견 대립이 있다. 일부는 ‘관조’(theoria) 혹은 ‘이론적 이성’을 이것의 후보로 내세우며, 이를 근거로 관조적 삶이 인간의 최고선이라 주장한다. 흔히 ‘주지주의적(intellectualist) 견해’라 불리는 이 의견에 따르면관조적 내지 이론적 삶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이다. 주지주의자에 따르면 관조만이 행복을 구성하거나, 관조만이 행복의 중심 축이 된다.

 

□  행복의 구성 요소와 덕

 

      덕들은 인간 삶의 본질적 가치들이다. 우리는 이것들 각각을 우리 삶의 행복의 부분으로서 욕구한다. 이것들 각각이 그 자체로 좋은 것이라는 이유로 그리고 동시에 이것들이 모여 하나의 완전한 목적 혹은 완전한 좋음이 구성된다는 이유로 우리는 이것들 각각을 욕구한다. 행복이라는 목적이 가장 큰 선(), 즉 최고(最高善)이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이것이 가장 큰 선이 되는 방식은 저것들을 배제한 채 홀로서 (가장 큰) 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저 선들 모두와 함께 그리고 오직 함께 함을 통해서만 그러하다.

 

다시 말해 명예, 즐거움, 지성 그리고 덕은 행복이라는 완전한 선을 구성해 준다는 의미에서, 이것들은 행복을 ‘위한’ 것이. 다른 것들이 아니라 오직 이것들이 있어야만 행복은 완성된다는 의미에서, 혹은 더 정확히 표현하면, 이런 것들로 행복은 이루어  진다는 의미에서, 이것들은 행복을 위해 ‘필요하며’ 그리고이런 의미에서 이것들은 행복의 수단이 된다.

 

 

□  인간의 사회적 본성과 덕

 

     인간의 삶이 행복에 도달했다면, 그 삶은 완전하면서도 자족적인 방식으로 좋은 것이다. 이 때 조심해서 새겨야 할 것은, 행복한 삶이 자족적이라고 할 때 그 삶은 ‘홀로된’ 삶은 아니라는 것이.

 인간의 행복은 자족적이지만, 이것은 “부모, 자식, 아내, 그리고 일반적으로 친구들과 동료 시민들과의 결합 속에서 살아가는” 삶의 형식을 통해서 구현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연적으로 폴리스적 동물, 즉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 자신의 진정한 본성과 인간다움을 그가 몸담고 있는 사회적 관계틀 및 맥락 내에서 깨닫고 실현하기 때문이다.

행복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 사회적 본성을 떠나 성립할 수 없으며 따라서 행복이 이 본성적인 사회성의 탁월한 발휘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한, 덕은 행복의 필수적인 구성 요소일 수 밖에 없다.

 

□  품성의 덕

 

ㅡ 행복과 덕

행복은 완전한 덕에 따르는 어떤 종류의 영혼의 활동이므로, 우리는 덕에 관하여 검토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아마도 그것이 행복에 관하여 우리가 더욱 잘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원문)

 

ㅡ 덕의 유형

덕도 영혼의 이러한 차이에 따라서 구별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덕들 가운데 어떤 것을 사유의 덕들이라 부르고, 다른 어떤 것들을 품성의 덕들이라고 부른다. 철학적 지혜(sophia), 이해(synesis), 실천적 지혜

(phronesis)는 사유의 덕들이라 부르고, 관후함과 절제는 품성의 덕들

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사람의 품성에 관해서 말할 때, 우리는 그는 지혜롭다거나 혹은 이해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 않고, 그는 온화하다거나 혹은 절제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현(sophos)를 그의 [영혼의] 품성 상태(hexis)에 따라서 칭찬한다. 성 상태들 중 칭찬받을 만한 것을 우리는 덕들이라고 부른다.(원문).

 

ㅡ 품성의 덕과 습관

품성의 덕은 그 어떠한 것도 본성적[자연적]으로 우리에게 생기는 것이 아님은 또한 분명하다. 왜냐하면 본성적으로 있는 어떤 것들도 습관에 의해 [본래의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달리 될 수 없기 때문이

. 예를 들어, 돌은 본성적으로 아래로 움직이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습관에 의하여 그것을 위로 올라가도록 만들 수 없으며, 아무리 그것을 천 번이나 위로 던짐으로써 [위로 움직이게끔] 그것을 습관화하게 하려 해도 그렇게는 도저히 할 수 없다. 또한 불을 아래로 움직여 가게끔 습관화시킬 수도 없고, 또 본성적으로 어떤 한 상태로 있는 다른 어떤 것을 다른 상태로 있도록 습관화시킬 수도 없다. 그러고 보면, 들은 본성적으로 생기는 것도 아니고, 본성에 반하여 생기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본성적으로 그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또 그것들은 습관(ethos)을 통하여 완전하게 되는 것이다.

(원문)

 

ㅡ 행위와 습관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이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습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자연적으로 주어진 능력과 우리에 의해 얻어진 능력 각각에 있어서 능력과 그로부터 나오는 활동의 선후 관계를 지적한다. 우리는 자연적으로  들을 수 있는 능력을 타고 났다. 우리가 본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 능력의 경우 우리는 먼저 그것들의 능력을 얻고 나중에 그 활동을, 예를 들어 실제로 듣는 활동을 하게 된다. 우리는 감각들을 자주 보거나 혹은 자주 들음으로써 획득하는 것이 아니고, 이런 감각을 사용하기 이전에 감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들을 사용함으로써 그것들을 가지게 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덕은 옳은 행위들을 함으로써 올바른 사람이 되고, 절제 있는 행위를 함으로써 절제 있는 사람이 되며, 용감한 행위를 함으로써 용감하게 된다는 것이다.

 

ㅡ 품성의 덕의 정의

우리는 덕이란 무엇인가를 검토해야만 한다. 영혼 속에 생겨난 것들은 세 가지인데, 즉 겪음(pathos) 능력(dynamis) 성 상태(hexis)이기 때문에, 덕은 이것들 중의 하나이어야만 한다. 가 말하는 겪음이란, 욕구, 분노, 두려움, 태연(泰然), 질투, 기쁨, 사랑, 미움, 갈망, 경쟁심, 연민인데, 일반적으로 쾌락이나 고통을 동반하는 것들이다.

 

내가 의미하는 능력이란, 그것에 의하여 우리가 이러한 겪음들을 겪을 수 있게 된다고 말하는 것, 예를 들면, 노여워하거나 혹은 괴로워하거나 혹은 연민을 느끼거나 할 수 있게 되는 그것이다. 내가 의미하는 품성 상태란, 그것에 의하여 우리가 겪음에 대한 관계에서 잘 처신하거나 혹은 잘못 처신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분노와의 관계에, 만일 우리의 겪음이 너무 지나치다거나 혹은 너무 미적지근하다면 우리는 잘못 처신하고 있는 것이고, 만일 우리가 중도적(中道的)이라면 우리는 잘 처신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원문)

 

ㅡ 품성적 덕과 중용

중용은 품성의 덕을 다른 품성 상태로부터 구별해 주는 종차에 해당한다. 모든 품성 상태가 덕인 것은 아니고 중용을 갖춘 혹은 중용적인 품성 상태가 품성적 덕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을 연속적이고 분리할 수 있는 모든 양에서 얘기되는 중간으로부터  규정해 나아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1) 대상에서의 중간

(2) 우리와의 관계에서의 중간을 규정한 다음,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우리와의 관계에서의 중간이라는 점을 명확히 밝힌다. 결국 이것은 ‘균등’을 목표로 하는 것인데, 균등은 ‘지나침과 모자람의 어떤 중간’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성품은 세 가지 ‘성향’ 혹은 ‘상태’를 가지는데그 중의 둘은 악덕이고, 다른 나머지 하나는 ‘중용’으로서 ‘덕’이라고 규정한다그것들 각각의 것은 어떤 방식으로 다른 각각의 것에 대하여 반대된다. 가령, ‘용감’이라는 상태에 대하여 ‘비겁’과 ‘무모’라는 악의 상태가 있고, 비겁과 무모의 양 끝에 대하여 중간인 상태인 ‘용감’이라는 중용이 있다는 것이다. 용감이라는 중간인 상태는 ‘용감의 지나침과 모자람의 어떤 중간’으로서 중용인 품성의 덕이다.

 

품성적 덕의 정의

그러므로 덕은 우리와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중용 안에 있는, 합리적 선택을 하는 품성 상태이다. 이 중용은 실천적 지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것에 의해 중용을 규정할 그런 이성(logos)에 의해 규정된다. 그것은 두 악덕, 즉 지나침으로 말미암은 악덕과 다른 하나의 악덕, 즉 모자람으로 말미암은 악덕들 사이의 중용이다.(원문)

 

□  덕과 관련된 것들

 

ㅡ 용기

겪음에 관련된 것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검토하는 두 개의 덕은 용기와 절제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두려움과 태연함 혹은 대담함과 관련해서 용기가 그 중용이라고 설명한다.

 

ㅡ 절제

쾌락과 고통이라는 겪음과 관련해서는 절제라는 중용이 발견된. 모든 쾌락이 말하자면 이성의 통제를 받아야 할 것들은 아니다. 배움이나 희망, 기억에 동반하는 쾌락들은 말하자면 절제의 대상으로  보통 지적되는 육체적인 쾌락이 아니기 때문이다.

 

ㅡ 관후

외적인 좋음과 관련된 덕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검토하는 것은 둘이다. 그 중 하나는 돈과 관련된 덕으로 관후가 중용의 덕이며, 다른 하나는 명예와 관련된 덕으로 포부가 중용의 덕이다. 지금 검토하고 있는 관후의 경우 중용과 양 극단이 잘 드러난다. 언제나 마땅히 써야 할 것 이상으로 쓰는 것은 흥청댐 혹은 낭비이며, 마땅히 써야 할 것 이하로만 쓰는 것은 인색이다. 그러니까 관후는 돈과 관련해서 지나치게 많이 쓰거나 지나치게 조금 쓰는 악덕 사이에 성립하는 중용의 덕이다.

 

ㅡ 포부

명예와 불명예에 관하여, 그 중용은 ‘포부가 큰 것’(megalopsychia)이고, 그 지나침은 어떤 종류의 허영심이라 불리는 것이며, 그 모자람은 ‘포부가 작은 것’(mikopsychia)이다.(원문) 

 

ㅡ 온화

아리스토텔레스는 성냄(orge)과 관련해서 양 극단에는 거의 이름이 없다고 하지만 중간의 사람을 ‘온화한 사람’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것이 중간적인 품성 상태임을 보여주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원래 이름이 없는 양 극단에 대해 이름을 제안한. 필요 이상으로 너무 화를 잘 내는 사람도 있고, 마땅히 화를내야 하는 것보다 혹은 의당 분노를 느껴야 하는 것보다 훨씬 못 미치게 화를 내지 않는 사람도 있다. 온화라는 덕은 이 양 극단의 중간이라는 것이다.

 

ㅡ 진실성

그래서 참에 관련해서, 중간적인 사람을 어떤 종류의 ‘진실된 사람’

(alethes)이라고 부르고, 그 중용은 ‘참됨’(aletheia)이라 부르도록

하자. 한편 크게 떠벌리는 것을 허풍이라 하고, 그것을 지니고 있는 사람을 허풍선이라 부르고, 또 지나치게 말이 적은 것을 시치미 뗌

(eironeia)이라 하고, 그것을 지니고 있는 사람을 ‘시치미를 떼는 사람’

이라 부르도록 하자.(원문)

 

ㅡ 재치

재미를 북돋아 주는 일에서의 유쾌함에 관련해서, 그 중간인 사람은 재치 있는 사람이요, 그 성향은 재치 혹은 기지(奇智)이다. 그 지나침은 익살이요, 그것을 지닌 자는 익살꾼이라 부르자. 그리고 이런 면에서 모자라는 사람은 일종의 촌놈(agroikos)이며, 그 상태는 촌스러움이다.(원문)

 

ㅡ 필리아(philia)

일상적 삶에서 찾아지는 나머지 즐거운 일들에 관련해서, 마땅한 방식으로 즐거운 사람은 우애가 있는 사람이요, 그 중용은 필리아(philia). 이에 반하여 이런 면에서 지나친 사람은, 만일 아무 목적이 없으면 비굴한 사람이고, 만일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으면 아첨꾼이다. 그리고 이 방면에서 모자라서 어떤 상황에서나 불쾌한 사람은 일종의 싸움꾼이요, 심보가 고약한 사람(dyskolos)이다.(원문)

 

□  합리적 선택

  

ㅡ 욕구와 격정

합리적 선택을 욕구 혹은 격정 혹은 바람(所願) 혹은 어떤 종류의 의견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올바르게 말한 것 같이 여겨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합리적 선택은 이성이 없는 것들과는 공유할 수 없는 것이지, 욕구나 격정은 그것들과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욕구는 합리적  선택에 반대되지만, 욕구가 욕구에 대하여 반대되지는 않는다. 다가, 욕구는 즐거운 것과 괴로운 것에 관계하지만, 합리적 선택은 괴로운  것과 즐거운 것 어느 것에도 관계하지 않는다. 즉 즐거움과 괴로움은 욕구의 대상이지만, 합리적 선택의 대상은 아니다. 격정(thymos) [욕구보다도] 한층 더 합리적 선택과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격정

때문에 행해진 행위들은 가장 합리적 선택에 따르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원문)

 

ㅡ 바람(소원)

아리스토텔레스가 합리적 선택과 비교하는 두 번째 자발성의 영역은 바람(boulesis)이다. 이 비교는 주로 대상 차원에서 이루어 진다. 말하자면 바람의 대상과 합리적 선택의 대상이 어떻게 차이나는지를 밝히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불가능한 것이나 자신의 노력으로 이룰 수 없는 것들을 바랄 수는 있지만 합리적으로  선택할 수는 없다 

 

ㅡ 믿음(doxa)

아리스토텔레스의 믿음 혹은 견해는 영원한 것들이나 불가능한 것들에 대해서도 가질 수 있다는 지적

은 앞서 보아 왔던 것과 큰 차이가 없다. 큰 차이는 믿음들이 참과 거짓을 기준으로 나눠지는데 반해 합리적 선택의 경우 좋음과 나쁨을 기준으로 나눠진다는 것, 또 어떤 합리적 선택을 하느냐의 문제는 어떤 믿음 혹은 견해를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와는 달리 한 인간의 도덕적 성질에 직접적인 관련을 갖는다는 것이다. 믿음은 주로 진리가 문제되는 영역이라면 합리적 선택은 좋고 나쁨과 같은 윤리적 영역에 속한다는 지적으로 보인다.

 

□  쾌락

 

ㅡ 쾌락의 정의

쾌락과 고통이 인간 행동의 근저에 깊이 박혀 있는 요소라는 사실그것을 키 삼아 쾌락에 대한 탐구의 필요성을 주장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쾌락이 선인가 아닌가라는 문제에 대한 선대의 의견을 검토하기

 시작한다. 이 선대 의견의 검토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것은 쾌락을  갈증이나 허기와 같이 신체의 ‘채워지지 않은 상태’가 원래의 채워진 상태로 갈 때 생기는 것으로 파악한 플라톤의 입장, 즉 쾌락을 본성의 회복으로 가는 운동 과정으로 이해하는 입장이다.

 

이렇게 쾌락을 이해할 경우 그 반대의 운동 방향, 즉 본성이 부족을 경험하는, 비워짐의 경험은 고통이 될 것이다. 이러한 모델은 쾌락과 고통의 대칭성(symmetry)을 전제하는 듯이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

는 이러한 모델이 육체적 쾌락의 경우에 잘 맞을지 모르지만 또 사람들이 그러한 육체적 쾌락이 쾌락의 전부인 양 생각하는 것이 이유가 있다고 지적하지만, 진정한 쾌락에 대한 이해로서는 부족 하다고 지적한다.

 

쾌락은 그러한 운동 모델이 얘기하는 하나의생성(genesis)이 아니라 본성에 따른 품성 상태의 활동

(energeia)이다. 음악가가 좋은 음악을 연주할 때 느끼는 기쁨이

, 좋은 예술 작품을 볼 때 감상자가 갖는 즐거움, 혹은 이성을 가진 인간이 이성의 활동을 통해 무언가를 탐구해 나아가면서 혹은 무언가를 깨달았을 때 느끼는 희열 등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엄밀한 의미의’ 쾌락의 전형적인 예들이다. 그래서 그는 쾌락을 ‘인간 본성으로부터 나온 품성 상태의 활동’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ㅡ 본성과 쾌락

각각의 동물이 그 자신의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또한 그 자신의 고유한 쾌락을 가진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 고유한 쾌락은 그 활동에 따르는 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각각의 종을 살펴보면, 이것은 분명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말과 개 그리고 인간은 각각 다른 쾌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말 하고 있는 것처럼, 나귀는 황금보다도 여물을 선택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귀들은 황금보다 더 쾌락을 주는 먹는 것을 찾을 것이기 때문이.(원본)

 

ㅡ 육체적인 쾌락

   . 지나침을 허용

   . 욕구와 고통을 동반

   . 격렬성

 

그런데 육체적인 여러 좋음 들에는 지나침이 있다. 또 나쁜 사람은 지나침을 추구함으로써 나쁜 것이지, 필수적인 쾌락들을 추구함으로써 나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는 맛있는 음식과

, 성교를 즐기지만, 누군가 다 알맞게 즐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원본)

 

육체적인 쾌락의 두 번째 특징은 그것이 욕구와 고통을 동반 하는 쾌락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육체적인 쾌락으로 대표되는 이차적인 의미의 쾌락 이해가 쾌락과 고통의 대칭성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으로부터 잘 설명된다. 잘 먹었을 때 느끼는 즐거움이 비워졌던 본성의 회복에서 오는 쾌락으로 설명한다면 허기졌을 때 느끼는  괴로움은 본성이 원래 있어야 할 채워진 상태로부터 멀어 지기  때문에 생기는 고통이라고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쾌락에 대한 갈망을 그 대상에 따라 갈증이나 식욕, 수면욕, 성욕과 같이 보통 욕구라 부르고 있으니 이러한 모델에 따르면 육체적 쾌락들이 욕구와 고통을 동반하는 쾌락이라는 점은 쉽게 이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것에 대비해서 제시하는 배움에 있어서의 즐거움이나 좋은 추억이나 희망에서 오는 즐거움은 그것이 없어서 느끼는 괴로움 혹은 고통을 얘기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욕구나 고통을 동반하는 쾌락이 아니다.

 

게다가, 육체적인 쾌락은 격렬한 것이므로, 다른 쾌락들에서 기쁨을 맛볼 수 없는 사람들에 의해서 추구된다. 하여튼, 이런 사람들은 어떤 종류의 갈증을 스스로 일으키고 있다. 그런데 이 갈증이 해가 없을 경

우에는 그것을 해소하는 것이 나무랄 만한 것이 못되지만, 해가 될 경우에는 나쁜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그 밖의 다른 것에서는 전혀 기쁨을 맛볼 수가 없으며 또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 본성으로 말미암아 이것도 저것도 아닌, 즉 쾌락도 고통도 아닌 중립적 상태가 고통스럽기 때문이다.(원문)

 

□  쾌락과 선(좋음)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에서 쾌락과 고통이 문제되는 큰 맥락은 그것이 행복과 갖는 연관성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이 쾌락을 수반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품성적 덕 혹은 악덕이 고통과 쾌락에 대한 적절한 습성화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ㅡ 쾌락의 선악과 행복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에 관한 통념들을 검토하면서 한 유력한 후보로 쾌락을 추구하는 삶을 제시 했었다. 대중들 특히 지극히 통속적인  사람들은 즐기는 삶을 좋아 한다고 지적하면서 권력의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보여 주는 쾌락에의 경도가 이러한 삶이 행복한 삶이라는 견해를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삶이 사실 짐승들에 알맞은 삶이며 노예와 다름없는 삶이라고 지적하면서 쾌락을 추구하는 삶을 진정한 행복의 후보가 아니라고 배척했었다.

 이제 그렇게 이해된 쾌락이 육체적 쾌락의 모델에 입각한 것이었음을 지적하고 제대로 된 쾌락의 이해를 활동의 완성 차원에서 이해하는 방식을 제시한 후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시 쾌락과 행복의 관계를 논의한다.

 

쾌락과 행복을 연결하는 고리는 장애를 받지 않는 활동이라는 점이다. 그 어떤 장애도 없이 자신의 고유한 활동을 온전히 발휘하는 것이 가장 선택할 만한 것이며 행복의 내용이라면, 그리고 쾌락이 바로 이 장애를 받지 않는 활동이라면 행복과 쾌락은 적어도 이 관점에서 내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  정의 (正義)

 

      아리스토텔레스는 용기나 절제 등 모든 덕이 넓은 의미의 사회적 규범이며, 용기나 절제를 포함하여 어떤 것이 건 덕을 지닌다는 것은 규범으로서 법(nomos)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희랍어 원어 노모스(nomos)는 사람들에게 지켜지기를 요구하며 nomos가 지켜진다는 것은 그 nomos가 포함하는 덕들이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nomos는 좁은 의미의 법이라기보다는 법을 포함하여 넓은 의미에서 사회 규범 일반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사회적 규범으로서의

nomos를 지키는 사람을 우리는 올바른 사람, 정의로운 사람이라

고 이른다. 이런 점에서 법, 규범을 지키는 것을 정의롭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전체적 덕으로서의 정의를 말하는 요지이다.

 

ㅡ 중용과 정의

아리스토텔레스는 배분적 정의로서의 공정함을 중용 개념과 연결 시키고 있다. 배분적 정의에서 공정함이란 지나치게 많음과 지나치게 적음의 중간이다. 품성의 덕을 논의하며 도입된 중용 개념이 개별적 덕으로서의 정의 개념을 논의하면서 주제 개념으로 다시 부각된 것이다.

 

 ㅡ 지각( aisthesis)

지각은 참과 거짓의 판단에서 결코 빠질 수 없지만 고유한 인간 행위의 원리 혹은 단초일 수는 없다. 짐승들도 지각은 갖지만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는 그러한 ‘행위’는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지각을 행위의 원리에서 배제하는 이유이다.

 

ㅡ 지성(nous)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 안에서 행위와 참을 다스리는 셋 중의 하나로 지성(nous)를 들고 있지만 이 때의 지성은 이후에 구별될 여러 사유의 덕 중의 하나로 보기보다 사유의 덕 일반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 관심의 초점은 품성적 덕의 정의에 들어간 지적인 요소, 즉 ‘올바른 이성’의 영혼 안에 있는 사유의 덕 중 어느 부분에 속하느냐는 문제라기 보다, 만약 행위의 분석에 핵심적인 요소로서 사유와 욕구를 들 수 있다면 양자의 관계가 어떻게 되느냐는 것이다.

 

ㅡ 욕구(orexis)

욕구는 숙고의 계기를 받아들일 경우 숙고하는 욕구 혹은 숙고적 욕구가 된다. 바로 이 숙고적 욕구가 사유와 욕구의 접합지점 이다. 품성적 덕이 합리적 선택에서 생겨난 품성 상태라는 사실은 이미 앞에서 검토되었으며 이제 그 합리적 선택이 숙고적 욕구라면 문제는 그 안에 들어있는 ‘숙고적’ 요소, 즉 지적이며 사유적인 요소가 어떻게 욕구와 결합되어 있는지 분석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동일한 것에 대해 사유는 긍정하고 욕구는 추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실천 혹은 행위(praxis)와 관계된 참은 기본적으로 사유의 기능이지만, 행위가 아닌 제작의 경우에 관련된 참이 아니며 동시에 실천과 상관없는 이론적인 앎과 관련된 참이 아니라는 점에서 자신의 고유성을 갖는다.

 

     . 정의(사전적  의미) :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바른 도리.

 

□  사유의 덕

 

      영혼이 그것에 의해 긍정하고 부정함으로써 참에 이르는 상태는 수적으로 다섯이 있다고 하자.

이것들은 기예(techne), 학문적 인식

(episteme), 실천적 지혜(phronesis), 철학적 지혜(sophia), 직관적 지

(nous) 이다. 왜냐하면 추측과 믿음은 우리를 속일 수 있기 때문이.(원본)

 

ㅡ 학문적 인식(episteme)

학문적 인식의 대상은 필연적이며 따라서 영원한 것들이다. 문적 인식은 물론 그것의 원리가 다르게 있을 수 없는 것들을 대상으로 이성적 부분에 속한다. 주목할 것은 이 앎은 우리의 경험적 관찰과 무관하게 성립한다는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수학적 원리 자체에 대한 앎을 제외한 모든 수학적 앎이 학문적 인식에 속할 것이다.

 

ㅡ 기예(techne)

만듦과 행위가 다른 것이라면 그를 담당하는 영혼의 이성적 부분도 다를 것이다. 즉 실천적 행위를 인도할 올바른 이성이라는 사유의 덕과는 다른, 제작을 인도할 사유의 덕이 나와야 할 것이다.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예라고 부르고 있으니, 무엇인가를 잘 만들 때 발휘되는 사유의 덕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ㅡ 직관적 지성(nous)

      학문적 인식은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것들에 관한 [참인] 판단

(hypolepsis)이다. 논증할 수 있는 것들과 모든 학문적 인식에는 원리

들이 있다. 왜냐하면 학문적 인식은 이성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학문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의 원리는 학문적 인식일 수도 없고, 기예일 수도 없고, 또한 실천적 지혜일 수도 없다. 왜냐하면 학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은 논증될 수 있는 것이지만, 기예나 실천적 지혜는 달리 있을 수 있는 것들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원리들은 철학적 지혜와 관련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것들에 대해서 논증을 가지는 것은 철학적으로 지혜로운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기 때문이. (원문)

 

ㅡ 철학적 지혜(sophia)

     철학적 지혜는 학문적 인식의 대상과 지성적 직관이 관계하는 대상에 걸쳐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학문의 원리로부터 나온 것이 곧 논증될 수 있는 것들이니 학문적 인식의 대상일 것이며 그 원리 자체에 대한 것이 지성적 직관이 대상이니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과 물고기라는 서로 다른 생물학적 종에서 실천적 지혜는 다를 것이지만 철학적 지혜는 동일할 것이라는 쉽지 않은 말을 하고 있다.

 

좋은 것과 건강한 것이 각각의 생물학적 종에서 다르게 얘기되지만 그가 얘기하는 ‘가장 영예로운 것들’의 영역에서는 그 차이가 없어질 것이라는 주장으로 들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주로 형이상학적 탐구에서 성립하는 ‘철학적 지혜’는 각각의 생물학적 종에 고유한 ‘실천적 지혜’와의 내적 연관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  필리아

 

ㅡ 필리아와 행복

       행복한 사람에게 친구가 필요한가라는 문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이 자족성 개념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다른 모든 좋은 것을 다 가졌다 하더라도 아무도 친구 없는 삶을 선택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더 이상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는 상태로 정의된 행복에서 인간이 다시 친구를 추가적으로 필요로 한다면 그것은 그렇게 정의된 행복의 자족성에 모순을 일으킬 것이요, 친구가 필요하지 않다면 상식과 충돌하는 이상한 일(atopon)이 될 것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기본적인 설명틀 내에서 행복한 사람에게 친구가 필요한 이유는 주로 덕과 행복의 연결에서 주어진. 행복을 외적인 좋음의 소유로 정의하지 않고 활동으로 정의 했으므로 외적인 좋음으로서의 친구가 아니라 그 자체 관조의 즐거움을 주는 좋은 활동으로서의 친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행복은 일종의 활동이며 행복하다는 것이 삶과 활동 속에서 존재하는 것 이라면, 또 좋은 사람의 활동은 그 자체 진지하고 즐거운 것이라면, 또 다른 자아인 친구의 행동을 바라보는 것(theorein) 역시 즐거운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자신보다 가까운 사람들을 더 잘 볼 수 있으며 우리 자신의 행동보다는 그들의 행동을 더 잘 감상할 수 있다. 따라서 훌륭하고 고유한 행동들을― 이 고유한 행동에는 친구인 좋은 사람의 행동도 포함된다― 관조하는 삶을 선택하는 한 신적으로 행복한 사람(makarios)은 그런 친구들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학 중에서

 

                                                                    (박병준)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학은 근본적으로 형이상학적 토대 위에 기초를 두고 있다. 질료와 형상의 복합체로서의 인간은 사실 육체의 형상으로서의 영혼을 지향한다. 그것은 가능태의 현실태로의 끊임 없는 이행, 즉 역동적 움직임과 변화를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물은 순수 현실의 최종 목적에 원인적으로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윤리학의 문제를 -소크라테스나 플라톤과는 달리- 지식이나 앎의 탐구가 아닌 실천적 문제, 행위의 문제로 국한하여 “덕이 무엇인가?”라는 질문보다는 “어떻게 덕스럽게 되는가?”에 관심을 두면서도 1장과 10장에서 인간 행위의 정점으로서의 최고선을 행복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인간의 고유한 기능과 연결시켜 그 절정을 순수 관조에 발견하고자 함은 그의 인간학적 사유의 형이상학적 관점을 짐작하게 한다. 그런데 인간의 형이상학적 특성, 즉 인간이 내적인 운동 법칙의 질서 안에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일 철학이 갖고 있는 딜레마이기도 하다.

 

 

 

능동적 이성을 향유한 인간은 한편으로 현실적 존재이면서도 가능 존재일 수밖에 없다. 능동적 이성의 측면에서 가능 존재인 인간은 그 본성에 있어서 부단히 신에게로 발전적인 운동을 할 수밖에 없다. 소위 이것이 윤리적인 측면에서 최고선을 향유하는 행복이며 형이상학적으로는 최종적인 목적 원인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 인간은 육체·영혼의 존재이다. 인간의 사유 역시 감각적인 소여성(所與性)을 무시할 수 없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체계에 있어서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다. 이러한 사상은 행복을 논함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외부적인 선(육체적 쾌락)과 최고선 사이의 긴장으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육체적으로 불행하더라도 이성의 품위를 지킴으로써 참다운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그가 여전히 스승 플라톤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학은 형이상학적 원리인 형상과 질료, 현실태와 가능태에 상응하여 영혼과 육체를 설명한다.

 

 

 

이런 의미에서 영혼과 육체는 엄밀한 의미로 형이상학적 개념이기도 하다. 인간은 그것으로써 전체를 이루는 한 실체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인간을 본질적으로 구성하는 두 가지 상이한 요소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물질 자체는 결코 비물질적인 것 에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영혼과 육체는 단순히 순수한 개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실제로 구성하는 형이상학적 요소이다. 인간은 이러한 구성적 조건 아래서 자신을 형상화하려 하고 자신의 본질을 현실화하려 한다. 이 때 자신의 가능적 본질을 인식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본질 탐구로서의 인간학은 인간의 내면적 구조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종종 인간의 실존적 사실성을 도외시할 수 있다. 인간은 분명 자기의 내적 본질에 입각하여 자신을 실현할 뿐만 아니라 현실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자기를 규정하고 실현하기도 한다. 본질 탐구로서의 인간학은 인간의 확고부동한 형이상학적 본질에 근거하여 인간 이해에 대한 확실한 탐구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방법적 특성상 구체적인 내 자신의 ‘상황에 처해 있음’의 현실을 등한시할 위험을 다분히 안고 있다 하겠다.

 

 

 

인간의 인식론적 근거는 인간의 자기 이해의 실마리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인식의 출발점은 감각적으로 소여 되어 있는 경험 세계에 국한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은 이성의 추상 능력을 통하여 감각적으로 소여 된 경험 세계의 직접성을 넘어 창조된 개념의 세계를 매개한다. 이 매개성 안에서 인간은 새로운 정신 세계를 창출한다. 인간이 정치적 존재요, 사회적 존재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근거한다. 그 안에서 인간은 탁월한 능력인 정신 문화를 창출한다. 인식론적 출발점을 세계의 경험 사실로부터 찾는다면 인간의 자기 이해의 장은 당연히 세계 자체일 것이다. 세계는 인간이 거기로부터 자신을 경험하고 실현하는 유일한 장이다. 따라서 인간의 경험 세계의 구성 원리가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일은 인간의 자기 해명을 위해서 인간학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하겠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학적 관점에서 인간의 인간됨의 근거가 이성이나 지성이나 정신의 특성으로서 드러나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영혼의 기능에 있다면, 이제 이러한 정신의 본질을 체계적으로 규명하는 일 또한 인간학의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정신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정신은 물질이 보여주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 원리인지, 아니면 정신을 물질의 작용에로 환원할 수 있는 것인지가 현대의 인간학의 발전과 함께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인간학 안에서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 선.윤리.실천

  http://cafe.daum.net/scheler

   이.을상 철학교실 중에서

□ (good)이란?

 

(사례)

“멀리 항해를 떠나던 여객선이 거센 풍랑을 만나 파선했다. 사람들은 앞 다투어 구명보트로 옮겨 탔다. 어느 작은 구명보트에는 8명의 사람들이 타고 있는데, 이 구명보트조차 너무 작아 침몰할 위기에 몰렸다. 이 구명보트가 침몰하지 않기 위해서는 적어도 한 사람을 희생시켜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8명 모두가 생명을 잃게 된다. 이런 경우라면 8명 중에서 누구를 희생시켜야 할까?”

 

문제의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하기 위해 이 구명보트에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타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즉 임신한 여인, 목사, 기업체의 재벌사장, 파선한 배의 선원, 정년퇴직 한 늙은 교수, 간호사, 배가 파선할 때 한쪽 다리에 골절상을 입은 경찰관, 살인죄로 20년 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 특사로 석방된 전과자가 그들이다.

. 유용성(능숙성) . 옳음 . 배려 . 합목적성 . 희생 . 권리 . 가치

 

□  윤리란?

 

. 도덕적 딜렘마 . 현대인들은 도덕적 딜렘마 속에서 살아간다; 장기이식, 환경의 문제. 윤리학은 문제가 발생할 때를 대비하여 해결방안을 준비해 두어야 한다 . 윤리학은사회적 결의론이다.

 

. 현대사회의 윤리적 성격 . 탈 종교적 세속성 (공리주의적) . 시장경제(자유주의적) . 다수결의 원리(민주주의적)

 

. 현대 윤리학의 근본성격 . 규범적(prescriptive: 윤리, 관습, ). 기술적(記述的, descriptive: 과학)

 

           기술적 윤리학(descriptive ethics) . 자율적내면적(윤리). 타율적외양적(관습: 에티켓, 예의, 태도)

 

. 비도덕적(immoral) / 무도덕적(non-moral) . 윤리 / . 생명윤리법, 공직자윤리법

 

. 윤리학의 분류 . 규범윤리학(normative ethics) . 이론규범윤리학          목적론적 윤리학           의무론적 윤리학           정의론적 윤리학           가치론적 윤리학     . 응용규범윤리학        생명의료윤리학         기업윤리         환경윤리         정보윤리

 

   . 메타윤리학(metaethics)         주로 도덕언어의 논리적·의미론적 측면을 분석함으로써         도덕개념과 판단의 본성을 규정하는 데 관심을 갖는 윤리학의 한 분야      윤리적 자연주의    윤리적 비자연주의(직각주의)

비인지주의(non-cognitivism)

일상언어학파(ordinary linguistic school)

 

. 우리는 어떻게 윤리적으로 판단하는가?

 

   (사례)

“한적한 도로에 횡단보도가 있고, 횡단보도에는 파란 신호등이 켜져 있다. 지금은 밤늦은 시간이라 건널목을 건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때 내가 만일 이 길을 차로 달리고 있다면 교통신호를 지킬 것인가, 말 것인가?”

. 목적론적 윤리설과 의무론적 윤리설

 

   (사례)

“어떤 한 도둑놈이 도둑질을 하기 위해 부잣집 담장을 넘어 몰래 침입했다. 안방에 들어서니 마침 그때 안방에는 임산부가 진통이 와서 신음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위험을 알아챈 도둑놈은 자기가 도둑질을 하려 들어왔다는 사실도 잊고, 임산부를 병원으로 이송하여 무사히 출산을 하게 하였다. 이 경우라면, 도둑놈은 나쁜 놈인가, 착한 사람인가?”

. 심정 윤리학과 결과 윤리학

 

. 목적론적 윤리학설

인간의 행위는 언제나합목적적으로 일어난다(목적의 계열).

선이란 목적에 합당한 수단의 선택

최고선: 쾌락, 행복

 

쾌락주의:ataraxia, 쾌락의 극대화

금욕주의:apatheia, 욕구의 억제

행복주의: eudaimonia, 덕의 실천

 

    행복이란잘 사는 것    잘 사는 것:     덕의 실천방법: 중용

 

(참고) 중용이란?    . 치우침과 모자람이 없는 상태(성품, hexis, pathos)    . 아리스토텔레스      용기() = 비겁(악덕: 모자람)과 만용(악덕:치우침)의 중간      중용이란 논리적 개념이 아니라 시의 적절하게(kairos) 행위를 선택하기 위한 기준       마땅한 때에 마땅한 정도로, 마땅한 방법으로, 마땅한 사람에게     반복과 습관화(ethos) ⇒ phronesis

 

. 유교: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천명: 사단(仁義禮智), 未發(中庸)      旣發: 칠정(喜怒哀樂愛惡懼), 忠恕      盡己之謂忠, 推己之謂恕

 

. 불교: 一體皆苦 涅槃寂靜      8정도(: 정견, 정사유, : 정어, 정업, 정명, : 정정진, 정념, 정정)      3  = + , : 중도(쾌락과 고통의 중간)

 

 

.  의무론적 윤리학설

 

. 선의지

“이 세상 안에도, 이 세상 밖에도 무조건적으로 선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오로지 선의지 밖에 없다.”

  경향성과 의무(“~해야만 한다”)   정언명법과 가언명법

 

“네 마음속의 준칙이 보편적인 법칙이 되게끔 준칙을 통해 동시에 의욕 할 수 있는

그러한 준칙에 따라서만 행동하라.”

  도덕법칙(실천원리)            의지의 법칙            목적의 왕국            보편적 입법자   의무와 권리

 

. 공리주의 . 쾌락주의

 

“자연은 인류를 쾌락과 고통이라는 두 군주의 지배 아래 두었다. 우리가 무엇을 하게 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지시하는 것도 오직 이 두 군주에게 달려 있다.”

 유용성,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행복 또는 쾌락의 계산        강렬도, 지속도, 확실도, 신속도, 다산도, 순수도, 확장범위

 

 품위감

 

“만족한 돼지이기보다는 불만을 품은 인간인 편이 더 낫고, 만족한 바보이기보다는 불만을 품은 소크라테스가 더 낫다.”

 

예수 그리스도의황금률

“너 자신이 그렇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을 또한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해주라.”

 

. 자연주의 윤리학(진화윤리학)

 

    (사례)

“어느 철도 길에 고장 난 기차가 달려오고 있다. 마침 철길 변환기 앞에 역무원이 서 있다. 한쪽 길에는 5인의 인부가 철길 공사를 하고 있고, 다른 쪽 길에는 한 사람이 일을 하고 있다. 만일 내가 역무원이라면 어떤 조치를 취했을까? 고장 난 기차를 다섯 사람이 일하는 쪽으로 돌렸을까, 한 사람이 일하는 쪽으로 돌렸을까?”

 선 = 이타성  혈연선택과 포괄적 적응도  죄수의 딜렘마

 

.  윤리적 상대주의: 윤리란 존재하는가?  문화와자문화 중심주의 문화인류학과 문명의 충돌  도덕법칙은 민족과 문화, 지리적-시간적 간격에 따라 현저한 차이가 난다.

 

에스키모 인들의 도덕규범과 조선시대의 도덕규범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윤리적 상대주의는 근본적으로 윤리의 객관성과 보편성에 대한 불신   (윤리의 본질과 규범의 다양성을 인식하지 못함)

 

유전무죄 무전유죄, 허위의식

윤리란 인간 존엄의 근거,       윤리를 떠나서 우리는 어디서도 절대로 인간적 대우를 받지 못한다.

 

 

 

 

■  이익의 도덕과 감정의 도덕 

 

                                                                                     블로그, 북극성옆… ,  글 중에서, 일부발췌

도덕적 요구를 인간의 본성에 의해서 설명

  . 이상이나 가치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며,

  . 실재로 존재하는 것을 근거로 하여 이상이나 가치를 확립하려는 것임  

정당화 방식

. 도덕성의 본성을 간접적으로 설명

. 자발적으로 선을 행하려는 감정이나 성향 때문에 도덕적 행동을 한다고 설명

 

 

도덕적 삶은

   . 계산을 매개로 해서 본성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 본성의 직접적 표현일 것

  

□  이익의 도덕

 

. 에피큐로스적 도덕

 

에피큐로스(341-270 BC)는 도덕을 이익과 쾌락에 대한 단순한 관심에 따라서 간접적으로 정당화하려고 노력하였다. 쾌락은 꾸밈이 없는 생물적인 사실이다. "모든 쾌락의 근원은 배(le ventre)의 쾌락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쾌락은 "고통의 부재"이다. 인위적인 쾌락에는 동요가 있어서 고통의 계기가 된다. 현자는 자연적인 동시에 꼭 필요한, 최소한의, 쾌락에 만족한다. 결국 적게 욕구하는 것이 쾌락을 극대화한다는 쾌락의 파라독스가 나온다. 에피큐로스의 도덕은 쾌락의 숭배 위에 세워진 근엄하고 금욕적인 도덕이다.

 

. 영국의 공리론

 

이익의 도덕은 18세기 영국의 법학자 벤담(Bentham, 1748-1832)에 의해 창안되었다. 이는 당시 영국의 상업적 번영과 관계 있는 도덕이지만, 에피큐로스의 도덕을 좀더 발전시켜 재처리 한 것이다.

 

    . 쾌락은 계산하는 산술

정직한 사람은 행동하기 전에 자신의 이익을 반성하고, 계산한다. (지성적 즉 도구적 인간) 정직한 사람은 쾌락계산의 대가이다. 벤덤은 쾌락 계산을 통하여 전통적인 미덕들이 악덕들보다 더 순수하고, 더 오래가고 더 풍요하고, 더 넓은 쾌락을 제공한다는 것을 쉽게 증명한다.

 

이런 계산을 기초로 "행복은 실존 전체에서 최소한의 고통의 총체를 빼고 남는 최대한의 쾌락의 총계이다." (이것은 자본의 이익 논리를 바꾸어 표현한 것이다.) 문제는 쾌락과 행복이 동질적인 재료도 아니고, 비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대단히 불행하면서도 한잔의 포도주를 마시며 쾌락을 느낄 수 있고, 나는 많은 쾌락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다. 쾌락으로 기분전환하고 쾌락 속으로 도피하는 사람 중에는 절망한 사람들이 많다.

 

    . 이익들의 조정

쾌락의 계산에도 난점이 있다. 르 센느(Le Senne, 1882-1954): "만일 사람마다 자신의 이익을 잘 이해하여 계산할 줄 안다면, 각자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추구하게 될 것인가? 19세기 공리주의자는 "이익들은 자연스럽게 재조정된다."고 대답한다. 아담 스미스를 비롯한 자유주의자는 상인의 이익은 구매자의 이익과 동일하다고 하였다. (상품 거래에서는 분배적 비례가 성립한다 - 자본주의 발전은 계산의 밝음에 있다. 그 원인이 되는 상품의 생산에 종사한 노동자에게 분배적 비례가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 사이에 누가 갈취하였는가?) 이 낙관론은 부의 편중과 노동자의 빈곤을 낳았다.

 

벤담은 상과 벌이 잘 조직화된 체계를 통해서 외부로부터 인위적으로 이익들을 조정할 수 있다. 자연적으로는 너의 이익은 너의 지갑을 잘 간수하는 것이고, 나의 이익은 너의 지갑을 훔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잘 조직화된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법률가가 계산으로 국가의 상벌체계를 만든다는 것은 총칼을 감추고 법으로 약탈하는 것이다. 정의, 도덕 인간의 행복을 법률가에 맡기는 것은 권력에게 인민의 삶을 약탈하게 허용하는 것이다. - 괜히 육사 출신과 법대 출신이 군부독재를 이끌었겠는가?)

 

    . 공리론의 실패

이런 체계가 도덕의 기초가 될 수 없다. 벤담의 원칙에서 보면, 사기나 절도를 능숙하게 은폐하는 악인을 비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벤담의 도덕은 도덕을 희화한 풍자일 뿐이다.

 

라 로슈푸꼬(La Rochefoucauld, 1613-1680)가 "덕을 부정하려 할 때에만 덕을 이익으로 귀착시킨다"고 생각한 것은 벤담이 "강물이 바다 속으로 사라지듯이 덕이 이익 속으로 사라지는 것"보다 더 정당하다.

 

 

. 프로이트 관점

 

프로이트는 도덕을 쾌락의 원리와 실재의 원리의 타협이라고 본다. 이타주의는 이기주의로부터 나온다는 것, 이기주의는 무의식적 과정을 거치면서 나온다는 것이다.

 

아이가 부모에 순종하는 것은 삶에 필수 불가결한 부모의 사랑을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사랑의 이점을 간직하려고 금지 사항을 받아들이고, 금지 사항을 "자신의 내부로 투사한다." 이 금지들은 나의 인격의 내부에서 "초자아"가 된다. 이 초자아의 형성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해소되는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머니를 차지하려는 바람에서 아버지를 증오한다. 그러나 벌을 받는 것이 두려워서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포기하고 아버지에 대한 동일화로 대체 시킨다. "어머니는 자신이 가지고 싶은 것이며 아버지는 자신이 그렇게 되고 싶은 것이다."

 

프로이트는 "초자아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상속자이다"라고 단언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기주의는 도덕과 사랑의 기초이다. 결국 도덕의 내용은 순전히 인위적인 것이다. 도둑질을 찬양하는 분위기에서 성장하여 도둑이 된 아이는 자신의 초자아 속에 도둑의 격률을 가지게 되며, 이 격률을 지키지 않으면, 죄의식을 느끼게 된다. 블로크(Marc-Andre Bloch) "만일 아버지를 닮는 것이 본능들의 희생이나 억압을 요구한다면, 그래서 만일 악랄한 깡패인 아버지가 자식에게 아버지로서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면, 악랄한 깡패의 아이도 아버지의 모습을 본받아 초자아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바룩(Baruk)의 말과 같이 초자아라는 "정의 없는 능력"은 참다운 도덕적 의식을 풍자한 것이다.

 

 

□  감정(sentiment)의 도덕

 

벤담의 도덕체계가 붕괴되었다면, 이번에는 벤담의 심리학적 공준 자체에 이론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추가로 밝혀내야 할 것이다.

 

. 유아론(Solipsisme)과 무도덕론(Amoralisme)

 

절대적인 무도덕론은 다른 사람의 행복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이론이며, 의식들간의 소통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근본적인 유아론과 관계 있는 이론이다.

 

사드 후작(marquis de Sade, 1740-1814)의 작품의 인물은 잔인하다기보다 이기적이다. 그의 작품 “쥐스틴느(Justine, 1797)”에서 "전대미문의 흉악한 악을 조작하여 가장 작은 즐거움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왜 그것을 하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즐거움은 나를 만족시키고 나의 내부에 있지만, 범죄의 결과는 나를 건드리지 않으며, 나의 외부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지성적 오만은 전쟁에서 나만이 죽지 않는다면 람보처럼 온갖 짓거리를 다 자행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자기배제의 원리에 속하는 논리는 전쟁의 논리이다) (플라톤 “국가”제2권에서, 인간이 목동 기게스(Gyges)처럼 자기 마음대로 자기를 보이지 않게 할 수 있는 마법의 반지를 가졌다고 상상해보라고 말한다. 여기서 도덕의 정당성을 평가할 수 있는 시금석인 기준이 있다. 도덕성이 참되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기적인 이익을 계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덕은 이익이 기초를 두는 것이 아니다.)

 

. 쇼펜하우어(Schopenhauer, 1788-1860)의 연민(pitie)

 

. 비극의 기초로서 감정의 윤리를 전개한다. 다양한 개인들은 세계의 “살려는 의지”가 여러 가지 현상으로 나타난 현상적인 표현들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맹목적 삶의 의지는 불합리하다. 이 맹목적 삶의 의지가 전체라고 생각하고 삶의 재산을 얻으려고 서로 찢고 싸운다. 쇼펜아우어는 연민을 이러한 비참함을 치료하는 위대한 치료제라 생각한다. 서로의 고통을 생각하는 연민은 도덕적인 동시에 형이상학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는 감정이다. 이 감정은 모든 존재의 심오한 통일성을 나타낸다. 그러나 부도덕성(immoralite)은 개인적 단독성의 환상과 결합되어있다.

 

  . 도덕과 인생

감정적 도덕론자는 도덕적 가치들의 근거를 인간 본성의 자발적인 성향에서 찾는다. 기요(Guyau, 1854-1888)는 삶과 자발적인 약동은 이타성이라고 한다. 그는 "이기주의자는 환자이며, 생명력이 없는 사람", 힘이 적어서 힘을 밖으로 낼 수 없는 사람, 자기에게 남아 있는 작은 힘을 자기구원에만 사용하는 사람이다. (즉 지성의 분할적 성격은 타자와 관계를 단절하고 계산함으로서 자신의 고립으로 만족한다. 이것은 자신이 타인의 보호(봉사)를 받고 있을 경우에만 가능하다. 그래서 유아적, 청소년, 성년적(계몽기적) 의식이란 베르그송은 한탄한다.) 삶은 그 자체로 개방이며, 관용이며, 희생이기 때문에, 기요의 도덕은 의무도 상벌도 없는 도덕이다. 그에 따르면, 도덕은 "나의 자연적인 감정 속에 내재하며, 삶의 약동 속에 내재한다."

 

  . 베르그송(Bergson, 1859-1941)의 도덕

베르그송은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1932)”에서 공통적이고 일상적인 도덕은 집단적 습관 전체로 환원된다. 이런 사회적 도덕은 초월적 의무가 아니라, 사회적 필요이다. 중요한 것은 "사회라는 거대한 조직체 자체의 생물적 조절이 있다." 잘 교육된 시민들에게 공공도덕은 의무가 아니라 습관이다. (이 습관은 개인이 아니라 사회를 보전하기 위해서이다.)

 

참된 도덕은 영웅이나 성자의 행위에서 구현되는 도덕이다. 이들은 집단의 관습을 끊고서 "약동 속에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선구자들이다." 고전 심리학이 감동(emotion)을 혼란이며, 무질서이며, 마음의 표상으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에 가치파괴라고 생각했지만, 베르그송에서는 첫째, 감동은 결과가 아니라 원천이다. 둘째, 감동은 질서 파괴자가 아니라 가치를 촉진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영웅과 성자의 생명력인 감동은 "창조적 감동"이다. 감동은 가치를 창조할 뿐만 아니라, 가치를 널리 보급시키기도 한다. 왜냐하면 영웅과 성자의 열정은 감화력이 크기 때문이다. 관습의 강제에 매인 대중에게 영웅의 호소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견인)이다. 이 호소는 닫혀있는 도덕을 무너뜨려 열린 도덕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 실례는 소크라테스와 예수 등이다.

 

두 개의 도덕은 서로 다른 도덕이 아니다. (이것은 이 책 저자의 해석이다. 우리는 두 개의 도덕이 한 원천의 두 개의 속성, 즉 두 개의 다른 성질(본성, 자연질서)에서 나왔다고 본다. 그래서 두 개 사이에는 외연적 또는 내포적 관계가 없다고 본다.) "닫힌 도덕은 과거의 위대한 도덕적 혁명들이 냉각되고 응고되어서 요약되고 정리된 결과"이다. 이에 비해 영웅과 성자의 도덕은 분출하는 원천을 가진 도덕적 약동이며, 기존 규칙에 순응하면서 잠잘 우려가 있는 심장을 깨우는 약동이다.

 

  . 감정은 도덕의 기초가 될 수 없다.

도덕 교육에 감정이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확실하다 그러나 자연적인 감정을 기초로 하여 도덕적인 가치를 확립한다는 것을 철학적으로 인정하기 어렵다. 자발적인 감정이 도덕적 삶의 가치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 자발성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에서는 가능하다.) 저자는 가치판단의 대상인 자연적 충동이 가치판단의 원리가 될 수 없다고 한다. (가치 판단의 원리는 행동 다음 즉 다음(미래)에 있다.)

 

  . 쇼펜하우어와 니체(Nietzsche, 1844-1900)

기요와 베르그송이 생의 도약을 말하지만, 생의 도약에는 양의성이 있다. 이들은 삶을 감정적이고 고결한 도약이라 본다. 그러나 니체의 경우에는 생의 도약이란 권력과 지배에의 의지이며 승리한 이기주의이다. 연민은 생명의 활력을 빼앗아 가는 고통의 전염병이다. 사랑은 약한 자를 인위적으로 생존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을 거스르는 것이다. 이처럼 자연적 충동의 기초 위에는 선을 세울 수도 있고 악도 세울 수 있다. 그래서 생의 도약은 도덕적 원리가 될 수 없고, 생의 도약이 도덕의 원리가 될 수 있는 것은 가치 판단하는 힘 때문이다. 니체와 쇼펜하우어는 둘 다 생존이 강제적이고 이기적이며, 잔혹한 삶의 의지라고 한다. 쇼펜하우어는 살려는 의지(동물적 의지)를 비난하고 연민의 감정에 우선권을 부여한 반면, 니체는 살려는 의지(권능의 의지)를 인정하고 행동의 원리로서 확립 시켰다.

 

  . 양심의 가책의 모호성

더구나 감정을 참으로 도덕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경우에도, 감정이란 반드시 확실한 안내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감정은 주관적이며 경우에 따라서 달라진다. (이 도덕감(연민, 사랑, 은총, 미감)은 소자아의 감정이 아니라 대자아의 권능이다.)

 

양심의 가책(remords)은 전형적인 도덕 감정이다. (우리는 전혀 달리 생각한다. - 왜 양심의 가책인가? 도덕 감정이 아니라, 공동체에서 이탈이기 때문이다. - 정치적 조폭(깡패)의 세계를 보라. 공동체의 이탈이 얼마나 큰 양심을 선언(가책)을 말할 수 있게 하는가?)

 

양심의 가책은 악을 행한 다음에 오는 것이기 때문에 의미 없는 세심증이다. 그래서 쟝겔레비치(Jankelevitch)는 이것을 "계단의 도덕의식"이라고 한다. (일이 끝나고 난 다음에 했어야 할 일이 생각나는 사후지혜를 계단의 정신이라 한다. 스피노자는 양심의 가책에 사로잡힌 사람을 두 번 무능한 사람이라 말한다. 첫 번째 무능력은 과오를 범한 것이고, 두 번째 무능력은 절망하는 것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양심의 가책은 상대적이고 불안전하여 변하기 쉽다. 소심한 사람의 경우에는, 의사 에나르(Hesnard)가 말하듯이, 불순한 생각들 때문에 대단히 괴로워한다. 그래서 내면적 잘못을 비도덕적 행동보다 더 많은 가책을 느낀다. 그러나 진짜 악인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악을 행하는 습관은 악을 행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냉혹하게 한다. (우리는 민주인사를 고문한 이근안과 이에 가담한 정형근에서도 볼 수 있다.) 라신(Racine, 1639-1699)의 “아탈리(Athalie, 1691)”에 등장하는 마탕(Mathan)은 "범행의 힘을 빌려서 나에게서 양심의 가책을 모두 없어지게 하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 정신과 도덕

                                                                        “철학의 주요개념” (서울대, 편집 .종현 교수 외)

                                                                         일부 발췌하여, 강의노트로 정리하여 봄

 

 □  정신(精神. spiritus. Geist)의 유래

 

.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정신(精神)’이라는 낱말은 187080년대 일본인들이 ‘spirit, Geist’ 등을

  ‘精神’으로 번역한 것을 받아 쓰기 시작한 데서 연유한 것

 

. 중국 고전에서 ‘정()’은 ‘곡식의 알맹이’, ‘순수함’, ‘정액(精液), ‘정세(精細)함’  ‘만물 생성의 영기

. ‘신()’은 오늘날은 거의 ‘하느님’과 동일한 말로 사용되고 있지만, 옛적에는 ‘천신(天神), ‘신령(神靈),

  ‘혼령(魂靈)’이라는 뜻과 함께 ‘의식(意識)’, ‘정신(精神)’이라는 뜻을 가짐

 

 □  유대와 초기 기독교 고전에서 ‘정신’

 

. 우리말 ‘정신’에 상응하는 말로 구약성서에서 헤브라이어 ‘루아(ruah)’, 본디 숨결, 바람 등을 뜻함

  (예) 입김(시편 33 : 6), [입김](욥기 19 : 17), 생명숨결[바람](예레미아 10 : 14)

         선들바람(창세기 3 : 8)과 폭풍[세찬 해풍](출애굽기 10 : 19) 등이 언급됨

 

. 이 모든 것이 생명을 만들어 내는 힘들에 대한 고대 유대적 표상들임

  고대 이스라엘의 야훼 신앙은 이 사념들을 창조 신앙과 결합하고, 그래서 신의 숨 내지 신의 입김으로

  서 “야훼의 숨결”(ruah jahve)이 모든 피조물의 생명의 생리적 효력이 됨

 

인간과 동물의 세계는 동일한 생명력에 의해 존재하게 된 것이다,(시편 104 : 30, “숨을 거두어 들이시면 죽어서 먼지로 돌아가지만, 당신께서 입김을 불어 넣으시면 다시 소생하고 땅의 모습은 새로워 집니다.) 숨결은 생명의 숨(창세기 6 : 17)이며, 모든 피조물의 생명 정신이 야훼에 의해 소환되면, 모든 피조물은 죽음에 든다.(창세기 6 : 7 참조) 생명의 비밀은 숨 속에 들어있다. 숨은 다름 아닌 ‘목숨’인 것이다. 야훼의 숨은 창조신의 절대적인,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생명을 만드는 권력이다. 예언자시대에 야훼의 생명 숨결은 야훼의 말씀과 결합되고, 그래서 시편은 “야훼의 말씀으로 하늘이 펼쳐지고, 그의 입김으로 별들[모든 무리, 군대]이 돋아났다”(시편, 33 : 6)고 읊고 있다. ……

 

신약성서에서도 정신을 지칭하는 말로 ‘루아’에 대응해서 그리스어 ‘프네우마(pneuma)’가 사용됨

이 ‘프네우마’ 역시 근원적으로는 “공기, 바람, 숨의 힘이 충전된 운동”을 뜻하며, 그러니까 생리적-물질적 의미를 지닌다. 이 말은 의미의 변경 없이 “성령”을 일컬을 때에도 쓰이고, 때로는 악령을 지시할 때도 쓰인다.

 

 □  고대 그리스-로마 고전에서 ‘정신’

 

. ‘정신’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그리스어  ‘프네우마’(pneuma)는  ‘호흡하다’(pneo[πγέω])에서 유래

. 그러니까 ‘프네우마’는 원래 ‘움직이는 공기’, ‘호흡된 공기’, ‘호흡’[] 정도를 의미

   ‘호흡 작용’(숨을 쉼)을 뜻한 것은 아니고, 단지 질료적 의미

 

고대 그리스 초기부터 이 말은 의학과 철학에서 사용되었다. 우주와 인간의 생리 작용에서 공기와 ‘정신’은 중요한 기능을 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살아 있는 숨은 피와 함께 혈관을 돌면서 생물학적 작용들의 근원을 이룬다. 정신의 중심부는 뇌에 위치하고 있으며, 거기서 인간의 전 신체 조직을 주재한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고, 또 어떤 사람은 정신은 심장에 위치하며 거기서 피와 함께 전 신체를 관통한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이렇게 생각한 사람 중의 하나다.

 

스토아 철학에서 ‘정신’은 포괄적인 의미를 가졌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개별 영혼의 실체나 내적 신성(神性)의 실체를 지시하는 말로 쓰였다. 예컨대, “따뜻한 정신은 영혼이다.” “이성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신체에 깃 들은 신적 정신의 한 부분이다.

 

정신은 만물을 관통하고 우주의 통일성과 우주 안에 함유되어 있는 개별 존재자들의 통일성을 보증한다. 우주는 커다란 유기체이고 살아 있는 것으로서, 그것의 부분들은 모두 서로 화합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개개 영혼이 육체에게 그렇게 하듯이, 우주 유기체에게 내부로부터 혼을 넣어 주는 것은 생명의 호흡인 신성(神性)이다. “그러니까, 세계가 신적인 정신과 연관을 이루고 있는 정신에 의해 통합돼 있지 않다면, 세계의 모든 부분들이 서로 화합하는 일이란 정말로 일어날 수 없을 터이다. 만물은 신의 정신으로부터 생긴다. 그것은 우주의 질서 잡힌 실재를 자신으로부터 산출하는 창조적인 불이다. 그렇기에 우주의 생성은 개개 생물의 생성과 똑 같은 것으로 관찰된다. ……

 

 

신플라톤학파 철학에서 정신은 무엇보다도 비물질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사이의 중간자로서 간주된다. 정신이란 영혼을 둘러싸고 있으면서, 영혼의 육체와의 오염된 접촉을 방지하는 어떤 것을 뜻한다. 이것은 인식 작용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영혼은 물질적인 대상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하지 않고, 사물들의 모상들을 영혼의 정신적 보자기에 싼다. 인간과 신성(神性) 사이의 직접적인 접촉은 배제되어 있다. 예언과 황홀은 신적 정신을 매개로 일어나는바, 신적 정신에 의해 영혼은 빛나고 정화되며, 그렇게 해서 인간은 보다 높은 인식에 이를 수 있고, 그의 자연적인 가능성들을 뛰어넘는 활동을 펼칠 수 있다. ……

 

 □  근대 ‘정신’ 개념

 

 ‘정신’ 개념이 철학적 논의의 핵심에 등장한 것은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마음-, 정신(mens)-물체(corpus)라는 두 실체론을 폄으로써였다.

 

. ‘실체’란 “그것이 존재하는 데 다른 어떠한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을 말함     그러니까 실체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임     그리고 이 규정대로라면 절대자인 ‘신’만을 실체라 할 터임

 

. 그러나 데카르트는, 의식[생각]이라는 본성을 가진 정신과 연장성[공간적 크기]이라는 본성을 가진      물체는 상호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그러므로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res)이라는 뜻에서 각각 실체라고 말함

 

이 제한적 의미에서의 실체 이원론을 인간의 존재 구조 설명을 위한 이론으로 원용 하면서 ‘심신 이원론’과 함께 ‘심신 상호 작용설’이 나왔고, 이로부터 현대 심리철학의 제 문제는 발단한다. 데카르트는 “나란 정확히 말해 다름 아니라 생각하는 것(rescogitans)”이며, ‘생각하는 것’이란 곧정신’영혼’‘지성’이성’이라고 풀이하고, ‘[자아]=생각[의식]하는 것=정신[마음]’이라고 규정하는 한편, 이것과는 다른 ‘물질적인 것’(res materialis) 또한 “존재”한다고 말한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생각함을 본성으로 갖는 ‘나’라는 실체는 “존재하기 위해 아무런 장소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어떠한 물질적인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이 나는, 곧 나를 나이게끔 하는 정신은 신체[물체]와는 완전히 구별되며, 설령 신체가 없다 하더라도 그것인 바 그대로 온전히 존재하기를 그치지 않는다.(같은 곳) 더 나아가, “완전한 존재자로서 신이 [] 존재한다는 것은 기하학의 어떤 논증보다도 더 확실”하고, 세계 내의 모든 “물체들”, “지성적인 것들”, 기타 “자연물들” 모두가 “그것의 존재를” 이 완전한 자의 “힘에 의지하고 있고, 이것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다.

 

데카르트의 이 문맥에서, ‘나’라는 정신이나, 모든 것들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다는 완전한 ‘존재자’로서 신이나 공간상의 어느 지점에 존재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심지어 데카르트는 그것은 공간적인 존재자가 없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 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것으로서 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그것은 곧, 의심하고, 통찰하고, 긍정하고, 부정하고, 의욕하고, 의욕 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상상하고, 감각하는 것이다.”고 대답한다. 정신 실체로서 ‘나’의 적어도 한 가지 활동은 ‘감각함’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란 신체에 대해 독립적인 것이고, 공간상의 장소를 차지하고 있지 않은 것이라 했다. 대체 이때 신체 없는 내가 ‘감각한다’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데카르트는 실체로서의 ‘정신’을 내세우면서도 부지불식간에 그것이 적어도 지각 활동에서는 신체 의존적임을, 그러니까 더 이상 실체가 아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

 

‘물체’라는 실체는 종국에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모르는 것이라는 점 때문에 그 정체야 장막에 가려져 있기는 하지만, 관념들의 귀속처, 갖가지 현상적 성질들의 담지자로서 물리적 사물들의 동일성의 기반이고, 실재적 인식[진리]의 척도이자 ‘실재하는 사물’의 근거가 된다. 반면에 ‘(유한한) 정신’이라는 실체는,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한 식물, 한 동물, 동물로서의 한 사람의 동일성의 근거인 “같은 생명”의 담지자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자아나 인격, 그러므로 나아가서는, ‘마음’ 의 동일성의 토대는 아니라 하니, 이것의 토대가 되는 이른바 ‘자기 의식’은 누구의 의식이라는 말인가? 그게 아니고, ‘물체’라는 실체가 물리적 사물의 동일성을 담보하듯이, ‘정신’이라는 실체가 자아의 동일성을 담보하는 것이라면, 물체와는 달리 정신이라는 실체는 ‘자기 의식’을 통해 자기에게 알려진다는 말인가? 그러니까, ‘정신’이라는 실체는 ‘우리가 모르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알려지는 것이라는 말인가? 여기서 ‘정신’ 실체는 그 정체가 의혹에 싸인다.

 

 □  ‘정신’ 실체

 

. 흄 (D. Hume, 17111776)

    . 경험적 확실성의 보증 아래에서만 논의를 진행시키고자 함

    . ‘마음’의 실체성, 그러니까 자아 내지 인격의 동일성 자체를 인정할 근거가 없다고 주장

    . 흄에 따르면, 우리가 갖는 일체 개념의 원천은 경험적 지각, 곧 경험적 인상과 관념들임

      ‘나’의 실체성 곧 고정불변성은 결코 경험적으로 확인될 수 없음을 강조함

 

     . “한 순간이라도 변함 없이 같은 것으로 머물러 있는, 단 하나의 영혼 능력도 없다. 마음은 일종의 극장이다. 여기에서 여러 지각들은 잇따라서 나타나고, 즉 지나가고, 다시 지나가고, 어느덧 사라지고, 무한히 잡다한 사태와 상황 속에서 뒤섞인다. 마음에는 당연히 한 시점에서라도 단일성은 없으며, 서로 다른 시점에서 동일성도 없다. 우리가 그 단일성과 동일성을 상상하는 어떤 자연적 성향을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 “마음을 구성하는 것은 단지 잇따르는 지각들일 뿐이다. 또한 우리는 이 장면들이 표상되는 장소 또는 이 장소를 이루고 있는 재료들에 관한 아주 어렴풋한 개념조차도 갖고 있지 않다.(같은 곳) 그러니까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마음은 극장과 같은 공연 장면들이 펼쳐지는 장소라기보다는, 차라리 잇따르는 장면들의 모임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관계들에 의해 함께 통일된, 그리고는, 잘못되게도, 완전한 단순성과 동일성을 부여 받은 것으로 가정된, 서로 다른 지각들의 더미 내지는 집합일 따름이다.”  ……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들로 하여금 이렇게 잇따르는 지각들에 동일성을 부여하고, 우리 자신을 우리의 전 삶의 과정을 통해 불변적이고 부단한 존재를 갖는 것으로 생각하게끔 하는가? 흄에 따르면, 그것은 순전히 상상력과 기억 작용이 하는 일이다. 서로 잇따르는 지각들의 더미 사이에는 기껏 유사성이 있을 뿐인데, 우리는 “상상에 따라, 이들 서로 다른 연관돼 있는 대상들이, 단절적이고 변형적임에도, 결과적으로는 같은 것이라고 대담하게 주장한다. 그리고는 [] 단절성을 제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감관의 지각들의 지속적인 존재를 꾸며 내고, 변형성을 감추기 위해서 영혼, 자아, 실체 따위의 개념 속으로 뛰어든다. “기억은 동일성을 발견할 뿐만 아니라, 지각들 사이의 유사 관계를 낳음으로써 동일성 산출에 기여한다.…… 그러나 이 같은 흄의 경험적으로 건전하고 정밀한 논구의 도정은 도대체 ‘기억 작용’을 누가 하는가 라는 물음 앞에서 길이 끊긴다. ……

 

□  개념 또는 이념으로서 ‘정신’

 

    데카르트의 ‘정신’-‘물체’ 두 실체론은 인간과 자연 세계의 관계 설명 방식의 단초가 되어, 로크에서는 ‘마음’과 ‘실재하는 사물’이라는 두 실체론으로 전이되고, 버클리(G. Berkely, 16851753)에서는 이른바 ‘실재하는 사물’이 “존재는 지각된 것”이라는 그의 대상 현상론에 의해 마음 안의 관념들의 집합으로 해체되고, 흄에 이르러서는 ‘마음’마저 ‘지각들의 다발’로 규정되어 그 실체성이 부정되었다. 이 같은 ‘실체’ 사상의 변천은 더욱더 경험주의 원칙에 충실해 간 근대인들의 사고의 반영이고, 현대 물리주의의 출발점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사고 노선은 대답되어야 할 새로운 문제를 야기한다. 예컨대, ‘나’는 그리고 ‘우리’는 자연 세계 전체가 또는 그 안의 갖가지 사물들이 변화하고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는데, 이 대상의 변화를 ‘고정 불변성’이나 ‘동일성’ 개념 없이, 바꿔 말해 ‘실체-우유성(偶有性)’ 개념 없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 이 같은 문제들을 의식한 칸트(I. Kant, 17241804), 우리 인간으로서는 결코 실증할 수 없는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실체적 물체’와 ‘영원불멸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적 영혼[정신]’ 대신에 대상 인식을 수행하는 주관으로서의 ‘의식’과 그 의식의 기능 형식인 순수 지성 개념으로서 ‘실체’ 개념을 도입하여, 문제들을 풀어간다. ……

 

‘내가 무엇인가를 의식한다’는 대상 의식에는 ‘나’와 ‘의식함’과 ‘의식되는 것’의 세 요소가 있다. ‘나’는 의식의 주체이고 대상을 의식하는 주관이다. ‘의식함’이란 이 주체의 대상 지향 활동이고, ‘의식되는 것’은 바로 그 지향된 대상이다. 만약 우리가 감각 경험의 의존 여부에 따라 ‘경험적임’/‘순수함’이라는 말을 구별해 쓴다면, ‘나’는 예컨대 수학적 대상을 의식할 때처럼 순수하게 기능하기도 하고, 자연적 대상을 의식할 때처럼 경험적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내가 무엇인가를 의식한다’에 수반하는 자기 의식의 ‘나’는 언제나 순수하게 기능한다. 자기 의식은 어떤 감각 기관의 기능도 아니니 말이다.

 

대상 의식에 수반하여 대상 통일 기능을 수행토록 하는 이 순수한 자기 의식은 대상 의식이 기능하는 데에 일정한 틀[형식]을 제공한다. 이른바 “순수한 지성 개념들”, 바꿔 말해 사고의 “범주들”이 바로 그것이다. 인식 주체 곧 의식이 갖추고 있는 이 같은 일정한 인식의 틀은 인식 작용을 가능하게 하고, 인식 작용이 있는 곳에 비로소 인식되는 것, 다시 말해 우리에게 존재하는 사물, 대상이 나타난다. 이런 사태 연관을 고려하여 칸트는 우리 인간에게 경험되는 사물은 모두 “현상”이라고 일컫는다. 그러니까 이런 의미에서 인식하는 의식의 특정한 성격은 경험에 선행하고, 그래서 경험되는 것 곧 현상에 선행하고, 바꿔 말해 “선험적”(a priori)이고, 그래서 “모든 경험에 선행하면서도 (선험적이면서도), 오직 경험 인식을 가능토록 하는 데에만 쓰이도록 정해져 있는 어떤 것”을 “초월적”이라고 술어화한다면, 선험적인 의식 기능은 경험적 인식에서 초월적이다.

 

경험적 인식과 초월적 인식이 구별되는 이 대목에서 우리는 ‘경험적 나[자아]’와 ‘초월적 나[자아]’를 구별해 말할 수 있다. ...... 한 관점에서 ‘나’는 자연적 존재자이다. 자연적 존재자로서 ‘나’는 당연히 자연, 곧 신체를 떠나서는 생각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방식으로든 신체들에 구별이 있는 한에서, ‘나들’도 구별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나들’ 가운데 하나인 ‘나’가 영원히 존재하느냐[불멸적이냐] 그리고 자기 동일적이냐는 오로지 경험 과학적으로 확정될 수밖에는 없다. 이 같은 맥락에서의 ‘나’의 나임에 대한 탐구는 생리-심리학적 또는 사회학적으로만 가능할 것이며, 로크나 흄이 자기 의식이나 기억을 통해서나 ‘나의 동일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도 암암리에 이 ‘나’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의 ‘나임’의 근거를 영혼[정신]으로 보고, 영혼은 실체[비물질성]이고, 그 자체로 단순[불멸성]하고, 자기 동일적[인격성]이고, 영원한 생명성[불사성]이라고 주장하는 이른바 “이성적 영혼론은 학문으로서는 전혀 성립할 수 없다”고 비판하면서, ‘나’에 대한 지식체계로서는 오로지 “일종의 생리학인 경험적 심리학”이 있을 뿐이라고 칸트가 결론 지었을 때, 그 역시 이런 ‘나’를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관점에서 ‘나’는 그 ‘나’가 누구이든 ‘나’라는 점에서는 동일하고, 또 ‘나’인 한에서 항상 자기 동일적이다. 그러니까 이런 의미에서의 ‘나’는 자연적인 존재자가 아니다. 아니, 우리가 만약 존재자를 시간공간상의 어떤 것을 지시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런 것은 도대체가 ‘존재자’가 아니다. 그것은 ‘나’를 ‘나’이게끔 하는 형식적 규정일 따름이다. 그것은 도대체가 ‘나’라는 개념이 가능하도록 해 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일체의 ‘경험적인 나들’을 동일하게 ‘나’이게끔 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초월적인 나’다. 그리고 이 ‘형식적’ 나는 문자 그대로 하나의 개념 내지는 이념이다.

 

 □  실천하는 인격의 이념성

 

    사람의 의식 활동은 인식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도 한다. ‘실천’(praxis)이란 존재자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인식과는 달리, 의지적으로 존재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다. 존재에 영향을 미친다 함은 존재에 변화를 일으키고 생성 소멸케 함을 뜻한다. 존재에 영향을 미치는 일은 일반적으로 자연 내의 사물들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그러나 그런 것을 우리는 실천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의지적으로 기투(企投)하는 행위만이 실천이라 일컬어 질 수 있다. 이런 실천 행위에는 노동과 도덕적 행위가 있다. 노동은 자연을 변화시킨다. 그러나 노동은 자연의 법칙의 범위 내에서 수행된다. 반면에 도덕적 행위는 자연의 제약을 넘어선다. 그래서 칸트는 이런 도덕 행위의 주체를 ‘순수한 실천 이성’이라고 부른다.

 

실천 이성이 “어떤 법칙의 표상에 따라서 행위를 규정하는 능력”이라면, 순수한 실천 이성은 이성 자신이 제시한 법칙의 표상에 준거해서 행위를 규정하는 능력이라 볼 수 있다. 이성은 원리의 능력이고, 순수한 이성은 원리 자체이니, 순수한 실천 이성은, 자신이 제시한 원리에 따라 행위를 하는 능력, 즉 자율적 능력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유로운 의지이기도 하다.

 

순수한 실천 이성은 인간이 마땅히 행해야 할 법도를 제시하는 바, 그 법도가 도덕 법칙이다. 도덕 법칙은 언제나 당위의 법칙이다. 당위의 법칙은 무엇이 어떠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적 필연성이나, 무엇이 어떻게 존재하며 생겨나는가를 반영하는 사실적 필연성이 아니라, 무엇이 존재해야만 하며 생겨나야만 하는가를 규정하는 당위적 필연성의 표현이다. 도덕적 규범은 사실 내지 존재의 규칙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은 보통 이러이러하게 행동 하게 마련이라든지, 그러저러하게 행위 한다면 개인이나 사회를 위해서 유익할 것이라는 따위의 사실 보고나 이해 타산에 의거한 권유, 훈계가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무조건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다할 것을 명령한다. 그것이 명령하는 ‘인간다운’ 행위 내용은 사실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이상(理想)에 근거해서 정해지는 것이다. 이 이상은 선()이라는 선험적 가치의 표현이고, 도덕 규범은 그러니까 선험적 행위 원칙이다.

 

이 같은 선험적 도덕 규범에 따른 행위만을 선행이라 할 수 있고, 이런 행위의 주체가 인격(人格, Person)이다. 도덕적 행위 주체로서 인격은 무엇과의 비교에 따라 가치를 얻는, 즉 수단으로서 가치를 갖는 물건과는 달리 “그것의 현존이 절대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인격은 다름 아닌 목적 그 자체인 것이다. 그래서 실천 이성의 원칙은 “이성적인 자연 존재자는 목적자체로서 존재한다”는 ‘인간 행위의 주체적 원리’를 전제로 한다. 여기에서 이성이 이성적 존재자인 인간에게 보편 타당한 행위 규범으로 부과하는 실천적인 명령이 나온다. 예컨대,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한낱 수단으로 사용치 않도록 행위 하라”는 칸트 도덕 철학의 정언 명령 같은 것 말이다.

 

인식 가운데 진리와 허위가 있다면, 선과 악은 도덕 행위 가운데 있다. 도덕 행위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실천 행위다. 사람을 인격으로, 그 자체 가치 있는 것으로 대하는 행위는 선하고, 사람을 한낱 수단 가치로 취급하는 행위는 악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선한 행위 가운데서 절대적인 가치를 갖는 존재자, 목적인 존재자가 된다. 목적 자체인 인간을 우리는 존엄하다고 한다. 이성이 제시하는 선의 이념은 이로써 다름 아닌 인간 존엄성의 이념이다. 그런데 자연적 존재자인 인간이 언제나 자기 자신이나 남을 인격으로 대하는 도덕적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자연적인 신체 욕구적 경향성을 제어하고 도덕 명령을 존경하여 준수할 수 있는 힘을 인간이 한편으로 가지고 있음을 전제로 한다. 이 힘이 바로 의지의 자유이며, 인격적 존재자로서의 인간은 자유 의지이다.

 

도덕적 행위의 주체는 자유로운 의지이다. 자유로운 의지에 의해 수행되는 도덕적 실천 행위는 아직 없지만 그러나 마땅히 있어야 할 것 즉 이상을 실현하는 당위적 활동이다. 그리고 그 실현은 자연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

 

인간은 행위에서 자연 존재로서 물리적 법칙에 종속하기도 하면서 자유 존재로서 도덕적 법칙에 종속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물리적-생리적 법칙에 종속하는 한 인간은 여타의 자연 사물과 한가지지만 도덕법칙에 종속하는 한에서는 인격이다.

 

그러나 이때 인격적으로 자연 세계에서 행위 하는 자는 자연적 존재자, 즉 신체를 가진 존재자이고, 그런 한에서 ‘너’와 ‘내’가 구별되는 인간이다. ‘너 자신이 다른 사람을 인격으로 대하라’는 명령은 이미 ‘너’와 다른 사람을 구별하고 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도덕 법칙의 보편적 당위성을 표상하는 실천 이성은 보편적 이성이지만, 그것을 자연 안에서 실행에 옮기는 행위 주체는 개별 자로서 인간, 즉 개인이다. 즉 행위 주체로서의 개개인은 보편성과 더불어 개성을 가진 자유 의지적 존재자이다.

 

 □  절대자로서 정신

 

    칸트는 ‘초월적 의식’ 개념을 세워 대상 인식 현상을 해명하고, ‘인격’ 개념을 세워 인간의 도덕적 행위 현상을 설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거기에 실체로서 ‘정신’은 없었다.

 

이에 반해 헤겔(G. W. F. Hegel, 17701831)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유일한 것으로서 ‘정신(Geist)’을 세계 생성과 운동의 중심에 놓는다. 헤겔은 정신이란 자기 정립적이며 자기 활동적인 것이고, 그래서 자유이자 주체이므로 본래 무엇에 관하여 상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지 않은 것으로 이해한다. 그런 의미에서 정신은 절대자다. 그러나 정신이 삼라만상과 인간을 통하여 그 자신을 드러낼 때, 다시 말하면 개념으로서의 정신, 절대자가 매체를 통하여 전개, 실현될 때, 그것은 여러 모습[]을 보이고 그런 한에서 전변(轉變) 하고 상대적이다. 그러니까 정신은 실재에서는 이를테면 ‘상대적인 절대자’라 할 수 있고, 끊임없이 다른 것으로 되어 가는 중에서 자기 자신을 세우고 자기 자신에 머무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정신은 원래 절대자이건만 현실적으로는 상대적이기 때문에 현실적인 정신의 모습은 언제나 가상(假象)이고 그런 만큼 정신은 본래의 자신을 세우기 위하여, 곧 진상을 드러내기 위하여 자신의 그때그때의 모습을 스스로 부정한다. 그래서 헤겔은 정신을 “순전히 스스로 하는 운동의 절대적 불안정” 또는 “절대적 부정성” 이라고도 말한다. ……

 

이제 헤겔 비판으로부터 자리를 잡은 신칸트학파의 랑게(F. A. Lange, 18281875)는 “영혼 없는 영혼론”, 곧 “마음 없는 심리학”을 발설했고, 20세기 중반을 넘자 마침내 플레이스(U. T. Place)는 ‘의식은 두뇌 과정’이라는 물리주의적 원칙을 주창하였다. 그 후 주로 영미 심리철학들은 물질주의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심리 현상에 대한 용어들은 물리적 현상 외에 아무런 것도 지시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마땅히 제거되어야 하고, 실제로 과학의 발달에 의해 마침내 사라질 것이라고 본다. (제거적 유물론, Eliminative Materialism) 정신 내지 심리 현상의 정체는 오로지 신경 과학(neuro science)을 통해서만 밝혀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에 어떤 사람들은 모든 유형의 심리상태는 그것에 상응하는 일정한 물질적 상태, 곧 두뇌 신경 상태가 있으며, 양자는 존재적으로는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유형 동일론, Type-Type Identity Theory 또는 환원적 유물론, Reductive Mate- rialism) 가령, ‘사랑’이란 오른쪽 1, 2, 3, 4, 5번 뇌세포가 활발하게 운동한 상태이고, ‘미움’이란 왼쪽 1, 3, 5, 7, 9번 뇌세포가 격렬하게 운동한 상태라는 것이다. 이 같은 사조에 따라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정신’, ‘영혼’, ‘마음[], ‘자아’, ‘인격’, ‘의식’ 따위는 물리적 언어로 번역되지 않는 한 지시하는 바가 없는 것으로 치부한다. 이런 유물론적, 물질주의적 주의, 주장들은 학자들 사이의 갑론을박을 거치면서 점점 세밀화 내지 교묘화해 가고 있는 중이므로, 아직도 이론적으로 완성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상황만으로도 ‘정신’ 없는 물리주의가 인간 세계에 미친 파장은 결코 작지 않으며, 인간 세계의 질서 원리를 새로이 모색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물리주의, 다시 말해 세상 만물의 이치를 물리적 내지는 물리학적이라고 보는 견해는 의당 ‘정신’의 존재를 승인하지 않고, 인간에게서도 자기 원인(causa sui)적인 자유(自由)를 인정하지 않으며, 그래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도 당위를 허용치 않음으로써 무엇보다도 결국 인간 사회의 질서 원리인 도덕이 설 자리를 없애 버린다. 물리적 법칙에 따라 만물은 운동하는 것이고, 바위와 소나무 사이에, 사과 나무와 까치 사이에, 개와 개 사이에 당위가 없고 윤리가 없는데, 아무런 자유로운 의지나 의사(意思) 없이 똑 같은 자연 법칙의 지배 밑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어떤 종류의 당위, 윤리가 있겠는가?

 

근대 계몽주의 시대에 데카르트가 새삼스럽게 정신과 물체 이원론을 내놓았던 것은, 사실 세계의 진리는 승인하되, 당위적 도덕과 희망적인 성스러움을 여전히 인간 세계에 남겨 두려는 간절하고도 진지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가치의 세계에서는 진리보다는 선함과 성스러움이 으레 우위를 차지 하는 법이니, 정신과 물체의 공존이란 사실상은 여전히 물체가 정신에 종속함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정신이 있다고 받아들여지는 한 모든 사회 질서의 권위는 ‘고귀한 영혼’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영혼의 본거지를 타파하지 않고서는 감성의 ‘독자성’이나 감각의 ‘자유로움’은 비천함을 면하기 어렵다. 인간을 철두철미 감성적, 신체적 존재자로 파악한 마르크스(K. Marx, 18181883가 종교(기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고 규정한 것이나, 니체(F. Nietzsche, 18441900)가 “신들은 죽었다”고 외친 것은, 신을 정점으로 하는 정신 체계의 본거지에 대한 감성적 공격이다.

 

이에 비해 20세기 후반 미국 철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물리주의는 동일한 주의, 주장의 이성적 변형이다. 물리주의는 이성의 옷을 입은 니체 주의인 것이다. 이성적인 논증과 과학적인 사실 입증을 ‘토대로’ 정신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고 천명함으로써 사실상 신의 존재와 인간이 정신적 존재임을 부정하고 나면, 선의 관념 자체가 원천을 잃게 되는 것이고, 결국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자연 물리적 사물들의 관계이거나 아니면 감성적 욕구의 교환, 곧 이해(利害) 관계로 환원될 따름이다. 신도 이성도 없는 곳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 곧 ‘정도(正道)’를 거론할 때 사람들이 기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상호 역학 관계를 맺고 있는 운동체들인 사람들 사이의 힘의 균형밖에는 없다. 이 판국에서 ‘정도’를 제시하는 것은 하느님도 아니고, 이성을 대변하는 탁월한 현자(賢者)도 아니고, 오직 힘있는 ‘다수’일 따름이다.

 

그런데 잦은 이합집산 중에 형성되는 ‘다수’는 변덕장이다. 그래서 아침나절의 ‘정도’는 저녁나절에는 이미 ‘정도’가 아니기도 하고, 오늘의 정도는 내일이면 벌써 ‘사도’(邪道)일 수 있으며, 동쪽에서의 ‘정도’는 서쪽에서는 ‘헛소리’일 수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그래서 모든 가치는 상대적인 것이 되고, 말할 것도 없이 윤리적 가치 또한 상대화되고, 이름하여 도덕 ‘상대주의’가 득세한다. 도덕의 상대성이란 결국 무도덕성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에게는 선한 것이지만, 너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고, 그들에게는 선한 것이지만 우리에겐 악한 것임을 승인하게 되면, 한 행위가 보는 이에 따라서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고 이것도 저것도 아니기도 할 수 있다는 말이 되는 데, 이 상황에서 어떤 윤리적 척도가 제 구실을 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세상에서 자신을 신체적 존재자라고 공공연하게 받아들 이는 사람들의 신체적 삶의 질은 십중팔구 사람들의 영리한 계산능력 곧 지력(知力)에 따라 결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차라리 ‘지력이 좀 모자란다’는 평은 감내할 망정 ‘도덕적으로 악질이다’는 평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못 견뎌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도덕적 가치어’ 들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이론은 그야말로 ‘복음’이다. 형이상학적 명제들과 함께 윤리적 판단들이 무의미한 것으로 확인된 마당에 윤리적 강령들은 어떤 본부에서 발령이 되든 어떠한 권위도 얻지 못한다. 물리주의는 사람들을 도덕의 굴레로부터 해방시키는 ‘복음’인 것이다. 그렇게 ‘해방된’ 인간은 그래서 하나의 물체가 된다. 물체에게 분명 도덕적 가치어 들은 무의미한 것이다.

 

우리가 보통 ‘인간의 존엄성’을 얘기하는 것은 인간이 여타의 생명체보다 지력이 뛰어나고,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온갖 사물을 부릴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만약 그런 것 이라면, 사람 중에서도 가장 존엄한 사람은 가장 지략이 출중하고 뭇 사람을 굴복시키는 사람이라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사람은 그 자체로 존엄하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엔가 쓸모가 있어서 가치가 있는, 그러니까 수단적 가치를 갖는 물건과 달리 사람은 누구나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그러니까 목적적 가치를 가진 존재자로 간주하기 때문이며, 우리가 인간을 스스로 이렇게 높여 보는 것은, 만물 가운데서 사람만이 유독 윤리적 당위 질서에 자신을 복종시킬 줄 알고, 바로 그런 한에서 신성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제 정말이지 물리주의의 주장이 사실이고, 그래서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가 사실에 근거해서 ‘도덕의 세계’를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해야 한다면, ‘인간의 존엄성’ 역시 물리적인 의미밖에는 얻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 있는 사회도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 만사는 기껏해야 물리적-생리적-심리적으로 설명될 것이니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는 윤리 도덕에 그 정당성의 뿌리를 두고 있던 국가 사회의 법령들의 권위도 물리주의적 사회에서는 한낱 물리적 힘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된다. 물리주의적 사회에서는, 우리가 남의 담장 너머까지 가지를 뻗친 감나무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고, 남의 집 처마 밑에 둥지를 튼 제비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듯이, 배고픈 나머지 남의 과수원에서 사과를 따먹은 사람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책임은 스스로 행위 한 자에게나 물을 수 있는 것이지, 물리-생리-심리적 인과 연관에서 기계적으로 운동한 사물에게 물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물리주의적 사회에서는 이른바 ‘범죄자’란 단지 대개의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운동한 자를 지칭할 터이니, 범죄자는 더 이상 처벌의 대상일 수가 없고, 오직 치료의 대상이거나 수리(修理)의 대상일 따름이다. 톱니가 손상돼 빨리 내닫는 시계는 톱니를 좋은 것으로 바꿔 주거나 쓰레기로 버리듯이, 아비가 없어 죄지은 자에게는 아비를 만들어 주고, 정서가 불안정하여 남에게 행패를 부린 자에게는 적절한 치료를 해주거나 그래도 쓸모가 없으면, 또는 수리비가 효용보다 더 들 것 같으면, 내다 버리는 것이 물리주의적 처리 방식이다. 물리주의적 세계에는 기껏해야 ‘물격’(物格)과 그것의 등급인 ‘물품’(物品)이 있을 뿐 ‘인격’(人格), ‘인품’(人品)의 자리는 없다. 그런 곳에서 이른바 ‘선비 정신’이란 선비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의 생리-심리적 운동 규칙 이상을 의미할 수는 없는 것이며, “현대인들은 정신적 가치보다는 물질적 가치를 더 추구한다”는 따위의 말은 애당초부터 무의미한 말일 수밖에 없다.

 

 □  인간 세계의 가치 원리로서 정신

 

    그래서 진정한 문제는, 단순히 ‘정신이란 무엇인가?’보다는 ‘어떤 의미에서 정신인가?’이고, 정신이 과연 있느냐 없느냐 보다는, ‘정신이 있다’, ‘정신이 없다’가 무엇을 함축하느냐 이다. 정신을 세계 주재(主宰)의 원리나, 세계에 대한 인간 인식의 주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사실적 증거들이 필요할 터다. 그럼에도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정신은 있으며, 적어도 인간세계를 규제하는 가치 원리로서 있다. 그 가치 원리가 어떤 초월적 신에게서 유래한 것이냐, 인간의 자연 심성에서 발원한 것이냐, 인간의 이상에서 정립된 것이냐, 아니면 유한한 인간의 한낱 환상이냐는 물론 여전히 ‘사실적’으로 답해질 문제다. 그러나 인간은 줄곧 가치 체계 속에서 살아 왔으며, 살고 있고, 살 수 밖 에 없을 것인바, 그 가치 체계의 원리를 우리는 충분히 ‘정신’ 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정신’이 결코 물리적 원리와는 다른 것임을 말하기 위해서다.

 

 

 

 

 

■ 윤리학설의 분류

 

 

 

 

. 목적론적 윤리설과 의무론적 윤리설

 

 

고전적인 윤리학설들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즉 목적론적 윤리설(teleological ethics)과 의무론적 윤리설(deontological ethics)이 그것이다.

 

목적론자들은 인생 또는 우주 전체에, 우리가 그 실현을 위해 힘을 쏟아야 할 객관적인 목적이 있다고 믿는다. 어떤 행위가 옳으냐 또는 그르냐 하는 문제는 그 행위가 인생의 궁극적 목적 달성에 어느 정도 이바지 하느냐 아니면 방해가 되느냐에 따른다. 그러므로 목적론적 윤리설이 대답하여야 할 최초의 근본 문제는 '인생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이냐?'이다.

 

 

 

한편 의무론자(법칙주의자)들은 인생이 힘써 도달해야 할 목적이 따로 주어져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대신, 옳은 행위와 그른 행위를 분간함에 표준의 구실을 할 수 있는 도덕의 법칙이 주어져 있다고 믿으며, 그 법칙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나 타당하는 절대적 권위를 가졌다고 믿는다. 이들에 의하면, 어느 행위의 옳고 그름은 저 도덕률(道德律)을 적용함으로써 간단히 판별된다. 따라서 최초의 근본 문제는 "시대와 지역의 차이를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타당한 행위의 법칙 즉 도덕률이 무엇이냐?"하는 것이다.

 

 

 

목적론과 의무론(법칙론)의 대립이 윤리학에서 흔히 논의하는 '결과주의'와 동기주의'와의 대립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목적론이 결과주의와 결합하기 쉬운 반면에, 의무론이 동기주의와 쉽게 결합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목적론자가 반드시 결과주의자가 되어야 할 이유는 없으며, 의무론자가 반드시 동기주의자가 되어야 할 필연성도 없다. 실제로 목적론과 의무론의 대립은 결과주의와 동기주의의 대립처럼 심각한 것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양자(兩者)가 주장하는 인생의 길이 그 내용에 있어서 별로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예컨데 인생의 목적을 행복(eudaimonia)이라고 본 아리스토텔레스는 대표적인 목적론자인데, 그 행복을 종국에 도달할 어떤 상태라고 보지 않고 그때 중용(中庸)을 지켜 살아가는 '이성적 활동의 과정' 그 자체라고 보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행위할 것인가?"하는 실천 문제에 대한 그의 해답은, "이성의 법칙을 따라 처신하라"고 권고하는 법칙주의자의 주장과 실제로는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동기를 소홀히 생각하지 않았음은, 그가 역설하는 '중용'이 단순히 행동의 외면적인 문제가 아니라, 행위의 내면적 동기를 포함하는 문제라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결론적으로, 비록 법칙주의자일지라도 목적 관념을 떠나서 인생의 문제를 고려할 수는 없다. 다만 목적론자들이 인생의 목적을 개개의 행위의 총결산으로서의 '생애' '인격'이라는 관점에서 포착하려 했음에 반하여, 법칙론자들은 하나 하나의 행위 그 자체에 주목하고 그 하나 하나를 올바르게 함이 곧 인생의 목적이라고 믿는 것이다. (김태길, 윤리학)

 

 

 

. 형이상학적, 자연주의적, 직각론적 윤리설

 

 

 

무어(Moore, G.E., 1873-1959)는 인생의 목적 또는 행위의 법칙의 발견에 관한 방법론을 기준으로 종래의 윤리학설을 크게 세가지로 분류하였다. , 형이상학적 윤리설, 자연주의적 윤리설, 직각론적 윤리설이 그것이다.

 

무어의 설명에 따르면, 형이상학적 윤리설은 실재(reality)에 관한 형이상학적 이론이 선(Good)에 관한 윤리학적 문제 해결의 참된 기초라고 믿는 견해를 말한다. 여기에 해당하는 사상가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스피노자를 들 수 있다.

 

 

 

자연주의적 윤리설이란 자연적 사실, 즉 경험할 수 있는 사실을 근거로 삼고 보편적인 인생의 목적 또는 절대적인 행위의 법칙을 추론해 낼 수 있다고 믿는 견지를 두고 말한다. '있는' 현재가 '있어야 할' 장래를 밝힘에 유일하고 충분한 근거가 된다고 보는 점에 있어서 자연주의 윤리설은 형이상학적 윤리설과 입장을 같이한다. 그러나 형이상학적 윤리설은 '있어야 할 것' 즉 당위의 근거를 초경험적 '실재'에 구하고 있음에 반하여, 자연주의적 윤리설은 같은 근거를 경험적인 사실에 구하고 있은 점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전자가 합리론적 세계관의 전통을 이어받은 윤리설이며, 후자가 경험론적 세계관의 전통을 이어받은 윤리설이다. 자연주의 윤리설에 해당하는 사상가는 쾌락주의의 에피쿠로스, 경험주의의 홉스, 흄 그리고 공리주의의 벤담과 밀 등이다. 나아가 페리(Perry)와 듀이에 의한 자연주의적 윤리설의 새로운 시도가 따른다.

 

 

 

그리고 직각론적 윤리설은 '도덕감(moral sense)'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선천적 기능이 행위 하나 하나의 옳고 그름을 모든 개별적 사례에 있어서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한다고 믿는 견해를 말한다. 여기에 해당되는 사상가는 리차드 프라이스와 칸트이다. 나아가 무어(Moore)와 로스(W.D.Ross)에 의한 새론운 시도가 이어진다.  (김태길, 윤리학)

 

 

 

 

■ 팡 세  (파스칼, 1670); Pensées=pensee=묵상

 

18

왜냐 하면 인간의 주요한 병폐(病弊)는 자기가 알 수 없는 사물에 대하여

불안한 호기심을 가지는데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무익한 호기심 속에 있는 것 보다는 오류(誤謬) 속에 있는 편이 낫다.

 

23

말은 배열(配列)을 달리하면 딴 의미를 갖게 되고, 의미는 배열을 달리하면

다른 효과를 가지게 된다.

 

37

인간은 만능일 수 없고 만사에 관해 알 수 있는 일체(一切)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만큼

만사를 조금씩 알아야 한다.

만사를 조금씩 아는 편이 한 가지 일을 완전히 아는 것보다 훨씬 낫기 때문이다.

 

이런 보편성(普遍性)이야 말로 가장 좋은 것이다.

만일 양자를 겸비할 수 있다면 더욱 좋은 일이지만,

양자 중 택일 하여야한다면 전자를 택하여야 할 것이다.

 

世人도 그것을 느끼고 실천하고 있다. 世人이란 대개 훌륭한 판단자이기 때문이다.

 

66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진리를 발견하는데 도움은 되지 않을 지라도, 적어도 자기생활의 질서를 세우는 데는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 당연한 일은 없는 것이다.

 

72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전 세계란 자연의 광대한 품 안에서는 눈에 잘 띄지도 않는 한 선에 불과하다.

어떤 관념도 그것에 접근할 수는 없다. 우리의 상상력이 미치는 공간보다 더 멀리 있는 것은, 우리의 사고를 확대해 보아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산출하는 것은 사물의 실제에 비하면 아주 미세한 원자에 불과하다.

그것은 중심을 여러 곳에 가지고 주변은 아무데도 없는 무한한 구상체(球狀體)이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의 상상력이 사라지게 됨은

신의 전능을 믿게 되는 가장 큰 특징이다.

 

사람이 자신을 깊이 성찰한다면 사람은 스스로에게 두려움을 갖게 될 것이다.

또 자연이 그에게 부여해 준 육체가 무한과 허무의 두 심연 사이에 가로 놓여 있음을

생각하고 그 불가사의 전율을 느낄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호기심은 마침내 경탄으로 변하여 주제넘게 탐구하려고 들기보다는

묵묵히 그것을 바라보고자 하는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인간이란 자연에 있어서 무엇인가?

무한에 비하면 허무, 허무에 비하면 전체, 허무와 전체의 중간이다.

자연은 자신의 像과 그것을 지은 자의 상을 모든 사물에 새겨 놓았으므로....

 

은혜는, 그것을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기분 좋은 것이다.

그러나 갚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면 감사는 어느덧 혐오로 변한다.- 타키투스

 

우리 이성은 언제나 불안정한 외관에 속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유한을 두 개의 무한사이에 고정시킬 수는 없다.

그 무한이란 유한을 포함함과 동시에 유한에서 벗어나고 말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이해한다면 인간은 자기가 놓여있는 상태에서 안주하게 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중간이 양극에서 떨어져 있는 한,

어떤 사람이 사물에 대하여 좀 많이 알고 있다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만일 인간이 그것을 좀 더 많이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약간 높은 위치에서 사물을 바라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궁극에서 보면 모든 인간은 무한히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우리의 수명이 10년쯤 연장된다 하더라도 영원에 비한다면 역시 무한히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들 무한에서 본다면 유한자는 모두 같은 것이다.

 

인간은 그 자신에 있어서, 모든 자연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난해한 대상이다.

왜냐하면 그는 육체가 무엇이며 정신이 무엇인지 모르며,

육체가 어떻게 정신과 결합할 수 있는지는 더욱더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을 이해하는 데 가장 어려운 점이기는 하나,

또 인간 존재의 본질이기도 하다.

‘정신이 육체와 결합하는 방법을 인간은 결코 이해 할 수 없다.

바로 그것이 인간이다.‘-아우구스티누스

이성의 한계를 초월하는 것

 

80

육체적인 절름발이는 불쾌하게 하지 않는데,

정신적인 절름발이는 우리를 불쾌하게 함은 무슨 이유일까?

육체적인 절름발이는 우리가 바로 걷고 있음을 인정하지만,

정신적인 절름발이는 마치 우리가 절뚝거리며 걷는 것처럼 말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들을 불쌍하게 생각할망정

화를 내지는 않을 것이다.

 

100

자애와 인간의 자아의 본성은, 자기만을 사랑하고 자기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그렇게 하는 것일까?

그가 사랑하는 대상이 결함과 비참에 가득 차있음은 그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는 위대해지기를 바라지만, 자신의 미소함을 알게 된다.

행복해지기를 원하면서도 자신의 비참을 목격하는 것이다.

완전해지기를 원하면서도 자신의 불완전을 알고 있다.

남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기 원하면서도 자기의 결함으로 인해

남들의 혐오와 경멸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다.

 

그가 당면한 이 곤란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부정하고 죄 많은 정욕을

그의 마음에 일어나게 한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를 책망하고 자기의 결함을 깨닫게 하는 이 진실에 대하여

심한 증오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는 이 진실을 없애 버리고 싶지만 진실 그 자체를 파괴할 수는 없으므로,

자신의 의식과 남의 의식 속에서 힘이 닿는데 까지 그것을 파괴한다.

그것은 자기의 결함을 남과 자기 자신에게까지 감추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며,

그 결함을 자주 지적하거나 남이 보는 것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의적인 착각 위에 결함을 더하기 때문

 

결함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은 분명히 하나의 악이다.

그러나 결함에 가득 차 있으면서도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은 더욱 큰 악이다.

그것은 고의적인 착각 위에 결함을 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에게 속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또 남이 자기의 분수에 맞지 않게 우리로부터 존경을 받으려는 것도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가 남을 속이는 것도, 자기의 분수에 맞지 않는 존경을 남에게 받으려는 것도 모두 잘못된 일이다.

그러므로 남이 실제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결함이나 악덕을 지적해 준다면,

그들이 우리에게 옳지 않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한 일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리의 결함을 알고 우리를 멸시한다고 해서 우리가 화를 내서는 안된다.

 

우리는 진실이나 거기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 싫어하고, 남이 우리 편이 되어

우리 자신을 기만해 주는 것을 좋아하여 실제 이상으로 남에게서 평가받기를 바라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

여기에 내가 두려움을 갖게 되는 한 증거가 있다.

 

혐오는 자애와 불가분의 관계-

 

이 나쁜 민감성으로 말미암아 남을 질책해야 할 사람이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많은 우회와 절제를 취해야만 하는 것이다.

즉 그들은 일부러 우리의 약점을 대단찮은 것으로 생각하는 척하면서 그것을 변호하고,

찬사와 애정과 존경한다는 태도를 취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만으로도 이 藥은 자애심에게는 여전히 쓴 것이다.

자애심은 되도록 이 약을 적게 마시고, 이 약을 주는 사람을 싫어하면서도 받아들이고

있으며, 또 그런 사람들을 마음속으로 증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누가 우리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조금이라도 자기에게 득이 된다고

생각하면 우리에게 불쾌를 주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우리를 취급한다.

우리가 진실을 싫어하면 그것을 감추어 버린다.

우리가 아부하기를 원한다면 그들은 우리에게 아부한다.

우리가 기만당하기를 좋아하면 우리를 기만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요행히도 세상에서 지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더욱 진실에서 멀어진다. 

 

인생이란 끝없는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 속이고 아부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는 것이다.

누구든지 우리 앞에서는 우리가 없을 때처럼 말하지 않는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결합이란 것도 이런 상호 기반위에 이루어진 것일 따름이다.

 

그리고 만일 친구가 자신이 없을 때 자신에 대해 한 말을 알게 된다면,

비록 그 친구가 진실하고 정당하게 말했다 하더라도 우정을 지속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란 자기 자신에 대해서나 남에 대해서나,

위장과 허위와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은 남들이 자신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자기가 남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도 삼간다.

이와 같이 공정과 도리에서 떨어져 있는 이 모든 성향은 선천적으로 인간의 마음속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다.

 

110

현재의 쾌락을 거짓된 것으로 느끼고, 아직 맛보지 못한 쾌락이 헛된 것임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 마음에 동요가 생긴다.

 

148

우리는 자부심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자신이 세계에 알려지고,

자기가 죽고 난 후 이 세상에 태어날 사람에게까지 자기의 존재가 알려지기를 원한다.

또 우리는 자신이 너무 공허하기 때문에 우리 주위에 있는 불과 대여섯 명 정도의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받아도 유쾌해지고 만족을 느낀다.

 

164

이 세상의 공허함을 모르는 사람은 실로 그 사람 스스로가 공허한 것이다. 

 

176

크롬웰은 모든 기독교 국가를 정복하려하고 있었다.

왕가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으나 그의 일가만은 영원히 번성할 것 같았다.

작은 모래알이 그의 수뇨관에 들어가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로마 교황청까지 그의 말밑에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조그만 결석이 그곳에 들어가자 그는 죽고 그 일가는 몰락했으며,

세상은 다시 평화를 되찾고 왕은 복위했다

 

180

위대한 사람도 비천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같은 사고. 같은 고민. 같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은 차바퀴 가장자리에 있고 비천한 사람은 그 중심에 있으므로,

같은 회전에도 비천한 사람은 조금밖에 움직이지 않는다.

 

193

‘작은 것을 경멸하고, 큰 것을 믿지 않는 자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194

될 수 있는 한 용감하게 행동하라.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생애를 기다리는 마지막인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결국 인간성의 타락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라는 두 가지 사실을 확증 하는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결국 도리에 어긋나지 않은 인간이란 두 가지 종류밖에는 없다.

그것은 신을 일고 있으므로 마음을 다하여 신을 받드는 자와,

신을 모르기 때문에 온 마음으로 신을 구하는 자이다.

 

거만하면서도 유쾌하게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인간을 무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약함과 괴로움 속에 죽어가야 하는데도, 전능하고 영원한 신을 경멸하는 것이 인간의 용기란 말인가?

 

200

신을 구하는 사람들의 열성만이 신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신을 구하지 않는 사람들의 맹목도 또한 신을 증명해 주는 셈이다.

 

205

내 생애의 짧은 기간이 그 전과 후의 영원 속에 흡수되고,

내가 차지하고 있으며 현재 내다보고 있는 이 작은 공간이

내가 모르고 있으며 또 나를 모르는 무한한 공간의 넓이 속에 가라앉아가고 있음을 생각할 때,

나는 나 자신이 여기에 있고 저기에 있지 않다는 사실에 두려움과 놀라움을 느낀다.

 

왜냐하면 어째서 내가 저기에 있지 않고 여기에 있으며,

그때에 있지 않고 지금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누가 나를 여기에 두었는가? 누구의 명령과 조치로 이곳과 이때에 내가 놓이게 되었는가?

 

‘단 하루만 머물렀던 나그네의 추억’

 

206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

 

208

어찌하여 나의 지식은 제한된 것일까? 왜 나의 신장은? 또 나의 수명은

왜 천년이 아니고 백년인가?

무슨 까닭으로 자연은 나에게 이런 수명을 준 것일까?

무한에서 보면 그 어느 것도 다른 것보다 낫지 않으므로, 다른 것을 버리고 어느

하나를 택할 이유가 없을 텐데,

이 수를 택하고 다른 수를 택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가?

 

211

우리는 우리와 비슷한 자들을 사귈 때 마음 놓을 수 있음을 기뻐한다.

그런데 우리처럼 비참하고 무능한 그들은 결코 우리의 도움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사람은 혼자서 죽어가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혼자인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212

인간이 소유한 모든 것이 유전하고 있음을 깨닫는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팡세: 파스칼(Pascal)

 

 

 

■ 우상 (偶像, idol)

 

우상이란 명석한 사고를 가로막는 그릇된 정신 경향을 가리키는 철학 용어

프랜시스 베이컨은 신기관 Novum Organum(1620)”에서 우상을 4종류로 나눔

  . 종족의 우상 - 인간의 공통적 편견 (인간)

       모든 환경이 인간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인류의 턱없는 착각

  . 동굴의 우상 - 개인의 특유한 편견 (개인)

       자신의 기호나 관점이 보편적이고 건강하며 합리적이고 전체적이라는 무의식적 착각

  . 시장의 우상 - 사회집단과 모국어에 의한 편견 (언어)

       언어가 대상과 일치할 것이라는 소박한 믿음. 언어는 실재를 드러내기보다 감추고 왜곡시킴

  . 극장의 우상 - 다양한 학파가 가르치고 조장하는 편견 또는 그릇된 관념 (관습)

 

      타자의 권위를 승인하는 맹목성을 말함

      문화적 습관이나 전통에 의해 일정한 태도와 가치관념을 주입 받음

      집단의 가치관/문화/이념/종교를 배타적으로 고집하는 것 

 

 

□  신기관(Novum Organum, 1620, 프랜시스 베이컨, 영국)

                                                  

. 파괴편

                                                                                       S 타임즈, "과학 고전읽기" 중에서 일부

프랜시스 베이컨은 아리스토텔레스로 대표되는 고전적 세계관과 결별하고 새로운 학문 탐구 방법을 제시하려고 했다. 이 책은 ‘파괴편’과 ‘건설편’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파괴편에서 파괴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 정신을 사로잡고 있는 우상들이며, 학문의 혁신을 위해서는 인간의 지성을 유린하는 우상과 그릇된 관념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했다.

 

인간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는 우상에는 네 가지가 있다.

   .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

 

‘종족의 우상’은 인간성 그 자체에, 인간이라는 종족 그 자체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다. 우주를 인간 중심으로만 파악하려고 하는 데서 나온다. 표면이 고르지 못한 거울은 사물을 본 모습대로 비추지 못한다. 인간의 지성도 그와 비슷한 면이 많다.

 

‘동굴의 우상’은 각 개인이 지니고 있는 우상이다. 각 개인은 자연의 빛을 차단하거나 약하게 만드는 동굴 같은 것을 마음 속에 갖고 있다. 선입관이나 편견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시장의 우상’은 인간 상호 간의 교류와 접촉에서 생기는 우상이다. 인간은 언어로써 의사소통을 하는데 그 언어는 일반인들의 이해수준에 맞추어 정해진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말이 잘못 만들어지면 지성은 심각한 방해를 받는다. 언어는 지성에 폭력을 가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공허한 논쟁을 일삼도록 한다.

 

‘극장의 우상은 철학의 다양한 학설과 그릇된 증명 방법 때문에 사람의 마음 속에 생기게 된 우상이다. 지금까지 고안된 철학 체계들은 연극 대본과 같은 것이다. 그릇된 논증의 규칙에 의해 사람들에게 공공연하게 주입되고 때로 그들에 의해 신봉되기도 한다. 속담에 이르기를, 절름발이도 길만 바르면 헤매는 준족보다 빠르다고 했다. 길을 잘못 접어들었을 때에는 걸음이 빠르면 빠를수록 정도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법이다. 학문의 발전을 위해서는 먼저 이러한 극장의 우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모든 우상 중에서 가장 성가신 것은 시장의 우상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성이 언어를 지배한다고 믿고 있지만, 실상 언어가 지성에 반작용하여 지성을 움직이는 경우도 많다. 이런 경우에 철학이나 여러 학문들은 궤변으로 전락하고 만다. 특히 ‘무겁다’ ‘가볍다’ ‘희박하다’ ‘빽빽하다’ 처럼 성질을 가리키는 말들에서 잦은 실수들이 유발된다. 인간의 지성은 무엇이든 추상화하는 본성이 있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성질의 것을 고정불변한 것으로 여기기 십상이다. 인간 정신은 어떤 것이든 곧바로 일반적 명제로 비약하여 그곳에서 안주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의 지식이 곧 인간의 힘이다. 참된 지식의 성립을 위해 우선 필요한 것은 모든 것의 원인을 밝히는 일이다. 삼단논법은 명제로 구성되고, 명제는 단어로 구성되고, 단어는 개념의 기호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개념들이 모호하거나 함부로 추상화된 경우, 그런 개념들을 기초로 하여 세운 구조물은 결코 견고할 수 없다. 따라서 참된 귀납법만이 우리들의 유일한 희망이다. 감각과 개별자에서 출발하여 지속적으로, 그리고 점진적으로 상승한 다음, 궁극적으로 가장 일반적인 명제에까지 도달하는 방법이다.

 

철학이 저지르는 무절제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독단이요, 다른 하나는 아무 목표 없는 연구 태도다. 전자는 지성을 억압하고 후자는 지성을 약하게 만든다. 인간의 감각이나 지성은 연약하기 때문에 언제나 도움이 필요하고 철학이 그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데 시간은 강물과 같아서 가볍고 동동 뜨는 것들만 실어 나르고, 무겁고 견고한 것은 가라앉히고 만다. 모든 징후 중에서 그 결과보다 더 확실하고 가치 있는 것은 없다. 결과와 성과야말로 철학의 진리성을 보장하는 보증인이다. 고대에 대한 무조건적 숭상과 철학계 거장들의 권위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과 일반적 동의가 학문의 진보를 더디게 한다.

 

고대인은 우리와 비교하면 연장자들이지만 세계를 기준으로 보면 우리보다 더 어린 사람들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고대보다 더 많은 나이와 더 많은 경험을 갖고 있다. 진리는 시간의 딸이지 권위의 딸은 아니다.

 

지적인 문제에서는 만장일치로 내리는 결론보다 더 나쁜 것은 없다. 대중의 찬성은 상상력을 자극하거나 통속적인 개념의 끈으로 지성을 꽁꽁 묶어놓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중적 동의를 얻어 지금까지 군림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또한 논박되어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학문의 진보를 방해한 것이 많았다고 해서 희망을 잃을 필요는 없다. 그것이 많을수록 앞날의 희망의 근거도 그만큼 많은 것이기 때문이다. 사물의 발견은 자연의 빛에서 구할 것이지 옛 시대의 암흑에서 찾으려 할 것이 아니다.

 

학문의 진정한 목표는 여러 가지 발견과 발명을 통해 인간 생활을 풍부하고 윤택하게 하자는 것이다. 올바른 순서를 알고 그것을 따를 때에 학문의 진보가 이룩된다. 우리의 주장은 인간의 감각을 깔보자는 것이 아니라 도와주자는 것이며, 인간의 지성을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라 바른 길로 인도하자는 것이다. 고정관념을 버리는 일, 그리고 적당한 시기가 될 때까지 성급한 일반화의 유혹을 물리치는 일, 이 두 가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 건설편

 

베이컨은 <신기관> ‘파괴편’에서 인간 정신을 미혹하여 지식 발전을 저해하는 우상들을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건설편’에서는 우상을 파괴하는 것과 더불어 수행해야 할 인간 지식의 수립 과정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학자는 우연히 얻은 경험이 아닌, 계획된 실험을 통해 얻은 경험에서 1차적인 공리를 이끌어 내고 이 공리에서 다시 새로운 실험을 전개해야 한다. ‘원리나 핵심 공리’를 전제한 삼단논법의 결론은, 베이컨이 보기에는 자연에 대한 예단에 불과했다. 모든 탐구에서 어둠과 난관을 물리치는 밝은 진실의 빛은 오로지 1차적인 공리로부터 나온다. 1차적인 공리란 바로 사물의 형상을 발견하는 데에 필요한 중간 수준의 공리(intermediate axiom), 즉 실험과 경험을 통해 매개된 결론을 가리킨다.

 

인간이 규명해야 할 것은 사물의 형상, 즉 사물의 법칙이다. 사물의 본성을 지배하는 법칙을 알아야 어떤 물체에 새로운 본성을 부여하거나 추가할 수 있다. 즉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다. <신기관>의 부제는 “자연의 해석과 인간의 자연 지배에 관한 잠언”이다.

 

인간의 힘과 인간의 지식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거의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학문이 해야 할 일은, 어떤 물체의 본성의 형상이나 그 본성의 진정한 종차(種差), 그러한 본성을 낳은 본성, 그러한 본성이 유래되는 근원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작용인(efficient cause)과 질료인(material cause)이 형상을 만들어내는 연속적인 과정, 즉 모든 물체의 생성과 운동 속에 숨어 있는 잠재적 과정을 발견하는 것이며, 운동하지 않고 정지해 있는 물체에 대해서는 그 속에 숨어 있는 잠재적 구조를 발견하는 것이다.

 

형상을 발견하기 위해 참된 귀납법이 먼저 해야 할 일은 (1) 탐구대상본성이 존재하는 사례들을 놓고 보았을 때 그 사례에서 발견할 수 없는 어떤 본성이 있는지를 살펴보고, (2) 탐구대상본성이 부재하는 사례들을 놓고 그 사례들 중에서 발견되는 어떤 본성이 있는지를 살펴보고, (3) 탐구대상본성이 증가하는데도 감소하거나 혹은 그 반대현상을 보이는 어떠한 본성들이 있는지를 살펴본 다음, 이러한 본성들을 찾아내어 제외하거나 배제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과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한 번에 직관적으로 일반적인 법칙으로서 공리를 파악하는 것은 형상의 부여자인 하느님이나 할 수 있는 일이며, 인간은 그러할 수 없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부정적 사례에서 출발하여 하나씩 그것들을 배제함으로써 긍정적 사례에 도달하는 것이다. 귀납 추리의 단점은 새로운 사례가 등장할 때마다 매번 다시 검증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절대적 기준에 대한 회의적 태도이지만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과학의 개방적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당대의 혁명적 지식인이었던 베이컨의 학설도 시대가 지나면서 약점과 한계를 드러내 보였지만, 인간 지성이 빠져들기 쉬운 편견과 오류를 타파하고자, 확고부동했던 이전 시대의 규범에 과감히 맞섰던 도전의식은 과학의 진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지식을 쌓고 그 지식을 활용하는 새로운 규범을 수립하고 제시했으며, 인간의 불완전함을 철저하게 인정함으로써 조금 더 완전함에 가까워질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원저 : 프랜시스 베이컨, .석용 역, ”신기관” 2001)

 

□ 동굴의 우상

……

베이컨의 '동굴의 우상'은 플라톤이 국가에서 언급한 '동굴의 비유'로부터 영감을 얻은 것이다.

 

깊은 동굴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손발이 모두 묶인 채 동굴의 안쪽만을 바라본다. 동굴 안의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해가 떴을 때 동굴의 안쪽 벽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뿐이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그곳에 앉아 그림자만을 보았기 때문에 그림자가 유일한 실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들 중의 한 사람이 포박을 풀고 태양이 비치는 동굴 밖의 세상으로 나왔다. 그가 처음으로 바라본 동굴 밖 세상은 너무도 아름답다. 하늘에는 태양이 떠 있고 온갖 꽃, 새 그리고 동물들의 진짜 모습을 뚜렷이 볼 수 있다.

 

비로소 그는 동굴 안의 물체들이 모두 그것들의 모조품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제야 그 행복한 사람은 자연으로 뛰어나가 갓 얻어낸 자유를 만끽하려 한다. 하지만 그 순간, 아직도 저 깊은 동굴에 갇혀 있는 다른 동료들을 생각해내고 발길을 돌린다. 다시 동굴로 돌아온 그는 동료들에게 동굴 벽에 어른거리는 것은 그림자이지 사물의 실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려고 애쓴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동굴 안의 많은 사람들은 동굴 벽을 가리키며 그들이 거기서 보는 것이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당신은 자신의 실체를 제대로 보고 있는가? 혹시 본래의 자기 모습은 보려 하지 않고 그림자만 쫓아다니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존재하지 않는 허상을 따라다니며 세상은 이루지 못할 것들로 가득 차 있다고 한탄하고 있지는 않는가?                                                                                    .균승 칼럼 중에서 발췌

 

 

□ The New Organon, Francis Bacon (1561-1626)

                                                                                                         From: Blog, bluespirit  

……

The New Organon is presented not in the form of a treatise or methodical demonstration but as a series of aphorisms, a technique that Bacon came to favor as less legislative and dogmatic and more in the true spirit of scientific experiment and critical inquiry. Combined with his gift for illustrative metaphor and symbol, the aphoristic style makes the New Organon in many places the most readable and literary of all Bacon’s scientific and philosophical works.

 

. The Idols

 

In Book I of the New Organon (Aphorisms 39-68), Bacon introduces his famous doctrine of the “idols.” These are characteristic errors, natural tendencies, or defects that beset the mind and prevent it from achieving a full and accurate understanding of nature. Bacon points out that recognizing and counteracting the idols is as important to the study of nature as the recognition and refutation of bad arguments is to logic. Incidentally, he uses the word “idol” – from the Greek eidolon (“image” or “phantom”) – not in the sense of a false god or heathen deity but rather in the sense employed in Epicurean physics. Thus a Baconian idol is a potential deception or source of misunderstanding, especially one that clouds or confuses our knowledge of external reality.

 

Bacon identifies four different classes of idol. Each arises from a different source, and each presents its own special hazards and difficulties.

 

. The Idols of the Tribe

These are the natural weaknesses and tendencies common to human nature. Because they are innate, they cannot be completely eliminated, but only recognized and compensated for. Some of Bacon’s examples are:

    . Our senses – which are inherently dull and easily deceivable. (Which is why Bacon prescribes instruments and strict investigative methods to correct them.)

   . Our tendency to discern (or even impose) more order in phenomena than is actually there. As Bacon points out, we are apt to find similitude where there is actually singularity, regularity where there is actually randomness, etc.

   . Our tendency towards “wishful thinking.” According to Bacon, we have a natural inclination to accept, believe, and even prove what we would prefer to be true.

   . Our tendency to rush to conclusions and make premature judgments (instead of gradually and painstakingly accumulating evidence).

 

. The Idols of the Cave

 

Unlike the idols of the tribe, which are common to all human beings, those of the cave vary from individual to individual. They arise, that is to say, not from nature but from culture and thus reflect the peculiar distortions, prejudices, and beliefs that we are all subject to owing to our different family backgrounds, childhood experiences, education, training, gender, religion, social class, etc. Examples include:

   . Special allegiance to a particular discipline or theory.

   . High esteem for a few select authorities.

   . A “cookie-cutter” mentality – that is, a tendency to reduce or confine phenomena within the terms of our own narrow training or discipline.

 

. The Idols of the Market Place

 These are hindrances to clear thinking that arise, Bacon says, from the “intercourse and association of men with each other.” The main culprit here is language, though not just common speech, but also (and perhaps particularly) the special discourses, vocabularies, and jargons of various academic communities and disciplines. He points out that “the idols imposed by words on the understanding are of two kinds”: “they are either names of things that do not exist” (e.g., the crystalline spheres of Aristotelian cosmology) or faulty, vague, or misleading names for things that do exist (according to Bacon, abstract qualities and value terms – e.g., “moist,” “useful,” etc. – can be a particular source of confusion).

 

. The Idols of the Theatre

 Like the idols of the cave, those of the theatre are culturally acquired rather than innate. And although the metaphor of a theatre suggests an artificial imitation of truth, as in drama or fiction, Bacon makes it clear that these idols derive mainly from grand schemes or systems of philosophy – and especially from three particular types of philosophy:

    . Sophistical Philosophy – that is, philosophical systems based only on a few casually observed instances (or on no experimental evidence at all) and thus constructed mainly out of abstract argument and speculation. Bacon cites Scholasticism as a conspicuous example.

   . Empirical Philosophy – that is, a philosophical system ultimately based on a single key insight (or on a very narrow base of research), which is then erected into a model or paradigm to explain phenomena of all kinds. Bacon cites the example of William Gilbert, whose experiments with the lodestone persuaded him that magnetism operated as the hidden force behind virtually all earthly phenomena.

   . Superstitious Philosophy – this is Bacon’s phrase for any system of thought that mixes theology and philosophy. He cites Pythagoras and Plato as guilty of this practice, but also points his finger at pious contemporary efforts, similar to those of Creationists today, to found systems of natural philosophy on Genesis or the book of Job.

 

 

 

■ 도덕의 객관성과 가지 윤리

 

                                                                                    논문(우명섭, 1999. 시대와 철학 10),  개요

오늘의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갈등과 모순의 밑바탕에는 윤리적으로 덕 중심의 윤리와 권리 중심의 윤리간의 대립이 놓여 있다. 이 양자의 윤리를 어떤 관점에서 어떻게 절충할 것 인가하는 문제는 풀어야할 중요한 과제이다.

 

고대 그리스 도덕은 덕 중심의 윤리로 해석될 수 있는 윤리이다. 고대 중국 유가의 도덕도 대체로 그러한 윤리이다. 한편 현대 서 유럽과 북미의 윤리는 권리 중심의 윤리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서로 다른 도덕성 사이에서 우리는 어느 한 도덕(), 혹은 어느 한 해석이 도덕적 진리에 더 근접하고 있다거나 참된 해석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절대론자들이 가정하듯이 이들 여러 도덕성이 등장하게 된 까닭이, 그 여러 도덕적 이상들 중 하나의 참된 이상을 해석하고 가려내는 데에 사회 구성원들의 잘못된 추론이나 그릇된 믿음이 끼어 들었기 때문이라면,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그런 잘못을 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줄 수 있겠는가?

 

덕 중심의 윤리와 권리중심의 윤리와의 차이점을 어떻게 드러낼 수 있는가?

단 하나의 참된 도덕성을 추구하는 절대론자들의 이론은 타당하지 않다는 점과, 상대론의 입장에서 도덕적 개혁과 혁신을 전망하면서 두 윤리간의 최대한의 조정이론을 확립 할 수 있다는 점을 논의해본다.

 

 

 

■  “책임”의 철학적 의미

                                                                                                           문.성원 (부산대 철학과)

          . 모든 타자는 모두 다르다(Tout autre est tout autre). : 자크 데리다

          . 타자(타인) 앞에서 '나'는 무한한 책임을 진다. : 엠마뉴엘 레비나스

 

□  책임과 권한

 

…… (중략).

우리는 어린아이나 정신 이상자와 같이 스스로에 대한 통제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는 그 행위에 대해 직접 책임을 묻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또 가까운 주변의 사람이 저지른 일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직접적인 통제 범위를 넘어서는 일 때문에 책임을 추궁 당하는 것은 부당하거나 가혹하다고 생각한다. 무릇 책임이 어떤 주체의 행위에서 비롯된 결과와 결부되는 것이라면, 그 주체가 통제할 수 있는 힘과 권리가 미치는 한도 내에서만 책임을 묻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책임 문제가 주요한 철학적 주제로 등장하는 데 크게 공헌한 인물인 한스 요나스(Hans Jonas)에 따르더라도 책임은 권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는 "사람은 행하는 것이 적으면 적을수록 책임질 바도 그만큼 적은 법"이라고 말한다. 책임 의식은 행위의 이 같은 인과적인 면 위에, 예상되는 행위 결과에 대한 도덕적 반성이라는 형태로 자리잡는다. 이처럼 '책임'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행위 결과에 대한 고려이다.

 

이른바 '책임 윤리'가 '의무'를 강조하는 윤리와 크게 다른 것도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권리-의무'의 쌍이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원칙이나 동기에 대한 강조로 흐르기 쉬운 데 비해, '권한-책임'의 쌍은 구체적인 행위 결과에 대한 예상과 그 결과에 대한 대응에 주안점을 두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요나스가 의무 중심의 전통적인 윤리, 특히 칸트 식 윤리 대신에 책임 중심의 '새로운' 윤리를 내세우는 바탕에는, 환경 문제 등에서 보듯이, 우리의 행위 결과를 철저하게 고려하지 않고는 윤리적 가치들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존마저도 위협 받을 수 있다는, 오늘날의 현실에 대한 인식이 깔려 있다.

 

그래서 요나스는 책임에서 힘과 지식을 강조한다. 책임은 "힘과 지식의 함수"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힘의 범위와 일치하는 광범위한 책임성을 갖추어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 힘의 결과를 알 수 있는 지식을 또한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발상은 '권리-의무'의 틀을 넘어설 뿐만 아니라, '권한-책임'의 관계마저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면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힘과 그 힘이 낳는 결과들을 예상하는 가운데, 우리의 권한을 조절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다시 말해 예상된 행위 결과에 책임을 지기 위해 우리의 능력을 적절한 한도 내에서 제한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권한에 따라 책임이 주어진다기 보다는 오히려 책임에 입각하여 권한이 설정된다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게 된다. 이 경우 권한보다 더 우선적이고 근본적인 위상을 갖는 것은 어떤 행위 결과를 낳을 수 있는 힘, 즉 현실적·잠재적 능력이다. 그러니까 '능력-책임'의 연관이 권한 설정의 밑바탕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 따르면, 책임이 권한 뒤로 물러설 수는 없다. 오히려 책임은 권한에 비해 우선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권한을 조정하기 위해 책임을 방기한다든가, 이를 협상 수단으로 삼는 따위는 사태의 본말을 뒤엎는 꼴이다. 물론 요나스에게서 초점이 되는 것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책임, 즉 인류 전체의 생태학적 책임이지만, 특정한 인간 집단의 경우라고 해서 권한과 책임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과학자나 의사 집단의 경우, 그 권한에 따라서 책임이 주어진다기 보다는 그들이 지닌 과학적 내지 의학적 지식의 잠재적 힘과 그 활용 결과에 대한 고려가 우선하고, 그에 따른 책임 문제에 비추어 권한이 규정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책임과 권한의 관계는 '권한-책임'이 아니라 '책임-권한'으로 설정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이렇게 본다고 해서 사회적이고 제도적인 권한 규정이 현실에서 감당해야 할 책임의 폭과 강도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거나 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책임이 징벌이나 보상 따위와 같이 법과 제도에 따르는 형태를 취할 경우, 그 준거가 되는 것은 법이나 제도에 의한 권한 규정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여기서 이런 식의 제도적인 책임 규정은 보다 근원적인 책임성에 입각한 것이어야 함을, 곧 제도적 책임을 규정하는 제도적 권한은 능력과 행위 결과에 대한 고려 속에서 나온 책임성에 의해 먼저 규정되는 것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제도상의 허점을 이용하는 책임 회피에 대해 우리가 사회적 비난을 퍼부을 때, 우리는 이와 같은 보다 근원적인 책임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  응답으로서의 책임

 

…… (중략)

영어의 responsibility나 불어의 responsabilité, 또 독어의 Verantwortung은 모두 응답을 뜻하는 response나 réponse, 또는 Antwort에서 파생한 것이다. 곧 이런 형태의 '책임'이라는 말은 어떤 부름이나 호소에 대한 응답이라는 뜻을 지니는 셈이다.

 

리차드 니버(Richard H. Niebuhr)는 이 같은 응답성(responsiveness)에 주목하여 책임의 첫 번째 요소를 응답에서 찾고 있다. 그는 인간의 삶이 응답성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며, 이를 바탕으로 책임의 윤리를 제창한다. 니버에 의하면, 이 책임의 윤리는 '좋음'을 앞세우는 목적론적 윤리나 '옳음'을 기준으로 삼는 의무론적 윤리와는 달리, '적합한'(fitting) 응답 행위를 근본적인 것으로 본다. 이 적합한 응답 행위들이 좋음과 옳음을 이루어낸다는 것이다. 나아가 니버는 이렇듯 응답을 중심으로 한 이 책임 개념 안에, 관련된 여러 요소들을 포함시킨다. 즉, 삶 속에서 주어지는 여러 요구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해석의 다양성 문제나, 응답에 따른 반응을 계산하고 거기에 대처하는 책무(accountability)의 문제, 또 우리의 응답이 관여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유대성에 관한 문제 등이 책임 개념의 내용 속에 들어간다. 이렇게 하여 니버는 응답으로서의 책임 개념을 통해, 우리의 자아를 '책임적 자아'(responsible self)로 규정해 낸다. 우리는 "'당신'(Thou)들에 대한 응답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 때 '당신'에 해당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책임적 자아의 응답 양상, 곧 책임 양상이 달라진다. 이 당신은 우선 한 사회 속에서 서로 요구를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다른 자아들, 곧 우리 주위의 사람들일 테지만, 이들의 요구나 호소가 지니는 성격에 따라 그 '당신'은 직접적인 타인의 범위를 넘어설 수 있다. 즉 그것은 나와 타인들의 자아가 몸담고 반응하는 자연일 수 있으며, 자아들의 단순한 집합체를 넘어서는 '자아초월적' 사회일 수 있고, 시간적 연속성이나 시대성을 바탕으로 하는 역사일 수도 있다. 나아가 그 당신은 우리 삶의 궁극적인 의미와 우리 존재 자체를 주재하는 절대자나 신일 수도 있다. 물론 이러한 양상들은 대개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예를 들어, 의사에 대한 환자의 호소는 직접적으로는 그 환자 자신의 호소이겠지만, 이 환자에 응답하는 의사는 보는 각도에 따라 여러 '당신'들을 상대한다고 볼 수 있다. 즉 병든 환자의 몸은 의사의 적절한 응답을 기다리는 자연의 호소일 수 있고, 의료 행위를 둘러싼 제도와 체제는 의사의 대응에 사회성을 집어넣는 사회적 당신일 수 있으며, 암이나 환경병에 대한 지속적인 치료 노력의 경우처럼 시대성의 요구가 의사들의 대응 뒤에 자리잡고 있을 수도 있다. 또 죽음과 대면해 있는 환자들의 호소 가운데서 삶과 죽음의 주재자와 얼굴을 마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떠한 각도에서 보건 이러한 책임 양상들에서 중심을 이루는 것은 호소 내지 요구에 대한 '응답'이라 할 수 있다. 행위 결과에 대한 고려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겠지만, 그 고려에 앞서서 책임을 규정하는 본질적인 특성이 되는 것은 호소나 요구에 대한 응답이다. 이 점을 받아들일 때, 책임은 호혜성에 우선하게 된다. 즉 이때의 책임은 행위 결과에 대한 계산 이전에 이미 시작되는 것이며, 또 그러한 계산을 뛰어넘는 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의 부르짖음에 대한 응답이 내가 물에 빠질 가능성을 염두에 둔 계산에서 비롯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에 대한 의사의 대응이 치료의 결과로 얻어질 금전적 대가를 계산하는 데 따라 좌우된다고 생각할 수만은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물에 빠진 이의 호소를 듣고도 그 사람을 건져 줘 봐야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 전혀 없다는 냉정한 판단 하에 외면하고 돌아선다면, 또는 어떤 의사가 합당한 금전적 대가를 기대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고통 받는 환자의 치료를 거부한다면, 그런 사람들은 사태의 결과를 고려하기에 앞서 이미 자신의 무책임성(ir-responsibility)을, 즉 응답 능력의 결여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응답으로서의 책임'이 책임 문제의 모든 범위를 포괄하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제도에 따른 책임 규정이 가지는 현실적인 효력을 무시할 수 없을뿐더러, 행위 능력과 결과에 대한 고려가 책임 문제에 대해 지니는 중요성도 결코 경시할 수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는 '응답으로서의 책임'을 통해 드러난 책임의 비호혜성과 비대칭성의 문제를 한층 더 밀고 나가 볼 수도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대가를 염두에 두지 않는 응답의 형태, 곧 '증여'와 '희생'으로서의 책임을 만나게 된다.

 

□  희생과 책임

 

무한 경쟁이 운위되는 오늘날의 사회 현실에서 대가 없는 책임, 희생과 결부된 책임을 논한다는 것이 대단히 비현실적인 일로 비치리라는 점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가 판치는 자본주의 교환 경제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이 강퍅한 현실을 넘어서려는 대안 모색의 노력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책임을 권한에 의해 규정되는 것으로 한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 권한을 규정하는 것이자 권한보다 더 근본적인 것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도, 바로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권한이란 대개, 상품 교환 경제를 뒷받침하는 개인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전제들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책임과 희생을 같이 논하는 일도 그저 공허한 사변에 그치지는 않는다. 호혜성을 넘어서는 비대칭성에 주목함으로써, 교환과 거래를 절대화하는 자본주의 현실의 바깥을 지향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그러한 노력은 얼핏 모든 것을 장악한 것처럼 보이는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각질을 뚫고 보다 근본적인 가능성의 터전을 확인하고자 하는 시도인 셈이다. 어쩌면 오늘날의 지배적 현실과 대극에 서 있는 극단적인 논의가 오히려, 우리가 자칫 잊기 쉬운 삶의 조건과 의미를 드러내 주는 자극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희생과 책임의 문제를 연관하여 다루는 자크 데리다의 논의는 충분히 우리의 관심을 끌만 하다. 데리다는 니버와 마찬가지로 책임을 응답으로 해석한다. 또 니버가 기독교 윤리를 신에 대한 응답의 형태로 보고 결국 이를 책임의 궁극적인 귀착점으로 삼듯이, 데리다는 응답의 문제를 우리가 한정 지을 수 없는 타자(他者)와 관련시킨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응답'과 책임이 동일한 개체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넘어선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합리적인 이기심을 가진 개체들이라든지 일정한 소유권을 지닌 개체들 사이의 관계 따위로 한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데리다는 여기에 '신비'(secrets)가 개입한다고 말한다. 즉 응답과 책임은 계산이나 객관적인 지식으로 완전히 파악될 수 없는 면모를 지닌다는 것이다. 책임이 관계하는 타자는 우리에게 고스란히 다 드러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 타자는 '보이지는 않지만 보고 있는 자'이다. 우리는 이 타자를 통해 우리의 한계를 넘어 무한과 접촉한다.

 

이렇게 되면 논의의 성격은 불가불 종교적인 색채를 띠게 되는데, 아닌 게 아니라 데리다는 종교란 "바로 책임이며 책임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종교는 책임의 경험을 통해, 달리 말하면 응답성의 경험을 통해 성립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때의 책임은 우리의 인위적인 규정들을 넘어서는 책임, 무한과 닿아 있는 책임이다. 무한에 대한 응답 방식 또는 신비에 대한 체험이 어떤 질서 잡힌 형태를 갖출 때, 그것을 종교라고 부른다는 얘기다. 이런 맥락에서 데리다는 또한 죽음과 책임을 관련 짓는다. 그에 따르면, 권한 따위에 한정되지 않는 책임, '신비'에까지 관여하는 책임은 '죽음을 준다는 것'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데리다는 이러한 사례의 잘 알려진 예로서 소크라테스와 예수를 든다. 이들은 타인을 위해 죽은,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인물들이다. 자신의 '죽음을 줌'으로써 타자에 대해 무한한 책임을 짊어지는 예를 이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서 책임은 그 비대칭성의 모습을 극단적으로 드러낸다. 죽음은 상호적으로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죽음을 준다는 것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죽음은 분명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듯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준다는 점이 '죽음의 증여'가 '신비'의 영역과 관여하게 되는 이유이다. 혹자는 이 '죽음을 준다'는 것이 실상은 자기가 가진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면 누군가가 그 생명을 산 채로 가지고 있어야 할 일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나 예수가 죽음을 주었다고 할 경우에, 그 줌의 대상은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다. 그리고 그렇게 주어진 죽음은 현존하는(present) 것이 아니고 따라서 선물(present)이 아니다. 그래서 죽음을 준다는 것은 결코 교환 행위가 아니며, 접근할 수 없는 신비를 동반한 바침이고 희생이 된다. 이렇게까지 해석된 책임은 전가(轉嫁)하거나 대체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데리다는 그가 논의의 실마리로 삼는 체코 철학자 파토카(Jan Patočka)의 견해를 소개하면서 책임의 이러한 대체 불가능성이 무시되고 있는 세태를 비판한다. 이 같은 세태는 객관적인 역할만을 중시하는 개인주의의 탓이며, 또 이 개인주의는 존재를 힘으로만 나타내는 잘못된 '힘의 형이상학'에 뿌리박고 있다는 것이다. 책임이 응답이라면, 이 책임은 응답하는 자의 자리와 관계할 수밖에 없는데, 이 자리를 어떤 지위나 권한 따위와 연결해서만 생각할 경우, 책임 또한 어떤 역할에 대한 것, 따라서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고 교환할 수 있는 것이 되어버린다. 이럴 때 책임을 희생과 결부시키기란 불가능하다. 기껏해야 각 역할에 해당하는 책임의 공정한 분배를 논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이 같은 공정성도 현실 사회가 지향해야 할 중요한 가치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에 따를 때, 우리는 그 이상의 책임, 즉 희생을 동반하는 책임을 설명하지 못한다. 비단 예수나 소크라테스 같은 경우뿐 아니라, 우리 삶 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비대칭적인 책임의 형태, 이를테면 자식에 대한 부모의 책임 같은 경우마저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반면에, 데리다는 대체 불가능성이야말로 책임의 궁극적인 모습이며, 우리는 이 점을 '죽음의 증여'에 이르는 극한적인 사태를 통해서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책임은 대체할 수 없는 고유성을 요구한다. 이러한 대체 불가능성에서 출발해서야 우리는 책임을 지는 주체라든가, 자기의식인 영혼이라든가, 자아 따위에 대해 얘기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대체 불가능성을 줄 수 있는 것은 죽음뿐, 또는 죽음을 배우는 것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인간이 자신의 대체 불가능성을 경험함으로써 책임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이데거(M. Heidegger)가 말하듯, 죽음은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도 나의 죽음을 대신하지 못하며, 나 또한 그 누구의 죽음도 대신할 수 없다. 각자의 죽음에 대한 응답의 자리는 대체 불가능하다. 이 점을 깨달을 때, 우리는 우리의 삶 역시 대체 불가능한 것임을, 또 우리의 응답성과 책임성은 궁극적으로 대체 불가능한 자리에서 비롯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우리는 이러한 고유성을 바탕으로 우리 자신에게 책임을 진다. 우리 자신의 삶에, 또 죽음에 응답하는 것은 우리이다. 이에 대한 우리 자신의 책임을 대신할 수 있는 자는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는 우리의 자리에서 타자와 만난다. 우리는 타자의 부름에 응답하며, 타자에게 책임을 진다. 이 타자가 처음부터 우리 삶 속에 들어와 있으며, 우리 삶의 자리가 바로 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것임을 받아들일 때, 우리의 대체 불가능한 책임은 우리 삶에 대한 책임임과 동시에 타자에 대한 책임이 된다. 더욱이 이 타자가 한정된 존재에 그치지 않고 무한으로 이어진다고 할 때, 이에 대한 우리의 책임도 무한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레비나스처럼 "타자(타인) 앞에서 나는 무한한 책임을 진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 무한한 책임을 경험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이 꼭 '죽음을 주는' 것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죽음의 증여'는 다만 책임이 지니는 비대칭성과 대체 불가능성을, 또 그러한 한에서 책임이 수반하는 희생성을 그 극한에서 보여주는 방식일 뿐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책임에는 특정한 권한의 상관물 이상의 것이 담겨 있음을, 또 사회구성원 사이의 상호적인 제약 이상의 것이 담겨 있음을 시사 받는다. 그러한 면모는 우리가 일상 속에서 경험하는 책임들 속에서도 드러난다. 그것은 계산과 대가를 넘어서는 책임이고, 그런 의미에서 '사랑'과 이어지는 책임이다. 부모 자식 간의 책임뿐만 아니라 친구와 친구 사이의 책임, 나아가 의사가 환자에 대해 갖는 책임이라고 해서 이런 책임의 면모를 갖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또 우리는 데리다나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를 꼭 특정한 종교의 신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레비나스 스스로도 자신이 신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인간 관계에서 출발할 때뿐이라고 말하고 있고, 데리다도 신이란 우리가 간직하는 신비에 대한 이름이자, 비가시적인 내면성을 일컫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특정한 종교적 견지와 관계없이 우리가 이들에게서 받아들일 수 있는 중요한 통찰은, 우리가 삶 속에서 맺게 되는 관계를 인위적인 규정들로 한정할 수 없으며, 그러한 한 우리의 책임 역시 그 한정된 규정 안에 가둘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범위 면에서나 심도 면에서 무한한 타자와 만날 수 있으며, 그에 따른 무한한 책임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런데 이런 점에서 보면, 책임은 이제 더 이상 책임을 지는 우리 각자의 희생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대체 불가능한 책임, 교환할 수 없는 책임, 대가를 계산하고 기대할 수 없는 책임을 이야기하는 것은, 언뜻 보기엔 책임을 지는 우리 각자의 희생을 요구하는 듯하다. 하지만 책임에 대해 조금만 더 숙고해 보면, 타자에 대한 무한한 책임을 다하지 못 하는 우리에 의해 희생당하는 것은 바로 그 타자임을 깨닫게 된다.

 

□  타자에 대한 책임

 

데리다에 의하면, 책임이 무한에 대한 책임, 한정될 수 없는 것에 대한 책임인 한, 그것은 패러독스를 피할 수 없다. 이 패러독스를 잘 보여 주는 것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의 행위이다. 잘 알다시피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부름에 따라 자신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모리아 산을 오른다. 자신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신의 요구에 대한 응답이고, 신에 대한 책임짐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신에게 바칠 제물이 어디에 있느냐는 이삭의 질문에 바로 응답하지 못한다. 신에게 책임을 지기 위해 아브라함은 아들에게는 책임을 지지 못하는(ir-responsible) 것이다. 신에 대한 책임이 일단 아들에 대한 무책임으로 나타나는 셈이다. 데리다는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의 표현을 빌어 이것을 내면성이 '외면성과 통약 불가능한' 채로 남아 있는 신앙의 패러독스라고 말한다.

 

이때 신에 대한 책임을 내면의 절대성에 대한 책임으로 해석한다면, 이 패러독스는 자신의 내면적 믿음에 대한 책임을 위해 외적인 책임을 희생할 때 겪게 되는 아포리아로 이해할 수 있다. 가령 자신의 사상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가족을 희생해야 하는 사태가 여기에 해당한다. 또 이 내면성에 대한 책임을 민족이나 국가에 대한 책임으로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독립 운동을 위해 가족과 친지들을 희생해야 했던 많은 사람들의 경우도 책임의 이와 같은 아포리아에 부딪힌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책임을 명확히 규정된 권한들의 함수로 한정하고 이 권한들을 통약 가능한 것으로 설정한다면, 혹 이러한 패러독스와 아포리아를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럴 때 내적인 신념에 대한 책임이라든지 국가와 민족에 대한 책임처럼 무한하고 절대적인 것으로 다가오는 책임은 그 본 모습을 훼손당할 것이고, 결국 그와 같은 해결 방식은 우리 삶에 나타나는 책임 문제의 중요한 성격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 속에는 아브라함의 패러독스와 유사한 패러독스가 언제나 도사리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일까? 데리다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매일매일 아브라함의 역설을 경험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삭의 희생'은 책임에 대한 가장 공통적이고 일상적인 경험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그 구조는 다음과 같다.

 

나는 또 다른 타자를, 또 다른 타자들을 희생하지 않고서는, 한 타자의 부름에, 요구에 응답할 수 없다. 그러한 희생이 없이는 한 타자에 대한 의무에 응답할 수도 없고, 심지어 그 타자에 대한 사랑에 응답할 수조차 없다. 모든 타자는 모두 다르다(Tout autre est tout autre).

 

모든 타자는 모두 다르다. 우리는 한 타자에 응답하면서 다른 타자를 희생시킨다. 유한한 우리로서는 모든 타자에게 모두 응답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책임짐은 매 순간 우리의 배반이기도 하다.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를 배반하기 위해, 그들의 목에 칼을 겨누기 위해, 직접 모리아 산까지 오를 필요는 없다. 이 세상의 모든 모리아 산에서 우리는 시시각각 그러한 일을 하고 있다. 지금 나는 어떤 타자들에 대한 나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나는 다른 타자들을 희생시킨다. 내가 내 눈앞의 가족과 친지를 돌보고 있을 때, 나는 내가 모르는 무수한 타자들에 대한 책임을, 혹은 병들고 혹은 굶주리는 그 타자들에 대한 책무를 희생하고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와 같은 데리다의 주장이 성립하는 것은 타자에 대한 우리의 관계가 한정되어 있지 않으며, 또 한정될 수 없다고 보는 한에서이다. 자신의 관계를 매우 좁고 명확하게 설정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데리다의 이런 지적이 황당하고 터무니없는 것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데리다의 시각에서 보면, 그런 사람들조차 바로 그 순간, 자신이 설정한 협소한 한계 속의 타자를 위해 다른 타자들을 희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타자와 맺고 있는 관계를 이렇게 열어 놓는 한, 타자에 대한 우리의 책임짐은 언제나 다른 타자에 대한 희생을 동반한다. 이것은 우리의 책임이 무한한 데 비해 우리의 책임짐이 유한할 수밖에 없는 이상, 피할 수 없는 사태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일까? 왜 하필 다른 타자가 아니라 이 타자에 대해 내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왜 저 타자는 아니며, 왜 저 타자는 희생되어야 하는가? 이 타자는 나와 가깝기 때문이라고 답하는 것은 문제를 해소하지 못한다. 왜 이 타자는 가깝고 저 타자는 멀어야 하는가? 사소하게는, 내가 매일 아침 먹이를 주는 이 고양이에 대해 세상의 다른 많은 고양이들이 희생당한다는 사태는 도대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데리다가 말하듯, 이런 점에 관해 우리는 침묵하는 수밖에, 그래서 이를 '신비'로 돌리는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 같은 물음이 우리를 하릴없는 궁지로 몰아넣기 위해 제기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물음들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쉽게 잊고 있는 책임의 폭과 깊이를 보여 주며, 우리의 책임이 안이한 방식으로 처리될 수 없음을 드러내 준다. 즉 이 물음들은 책임을 단순히 권한의 함수로 생각할 수 없게 할 뿐만 아니라, 계산을 넘어서는 책임짐의 자세조차 스스로를 희생이라고 여길 수 없게 만든다. 책임짐의 희생은 그 책임짐에서 제외된 타자들의 희생을 동반한다는 점을 부각시켜 주는 까닭이다. 그리하여 이 물음들은 우리의 삶이 책임짐의 끝없음과 책임의 무한함을 벗어날 수 없음을 일깨워 준다. 아마 이러한 무한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즉 누적되는 타자의 희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자신의 삶 전체를 희생하는 것, 그리하여 역설적으로 무한과 하나가 되는 길뿐일는지 모른다.

 

한편, 이 같은 무한한 책임이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 역시 이러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한 사회는 자신의 책임을 일정한 구성원들에게만 한정함으로써 무수한 타자를 희생시킨다. 그 사회의 편파적 행위는 끝없는 희생의 누적을 낳는다. 이 세상의 숫한 아이들을 굶어 죽게 방치하는 사회, 간단없이 벌어지는 전쟁과 그로 인한 무수한 고통에 눈을 감는 사회, 이러한 사회에 요구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무한한 책임에 대한 새롭고도 계속적인 각성이다. 한 사회가 모든 책임을 감당할 수는 없지만, 감당하지 못하는 책임이라고 해서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니다. 그 사회가 자신이 한정한 테두리 내에 갇혀 있지 않는 한, 이 책임은 계속 누적되며 그 누적된 무게로 끊임없이 다가온다. 애당초 책임의 한계를 닫아 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아예 타자를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 책임을 끝까지 회피할 방도는 아마 없을 것이다.  (중략)

 

 

 

 

■ 심리발달 이론

                                                                                                                             인용 글: 용진

 

□  프로이드의 정신분석 이론

 

. 이론의 중심 개념

프로이드 중심개념은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에서 무의식의 차원을 강조하고 있다. 이 무의식은 성적 본능의 지배하에 발현하는 것으로 보고, 단계적인 심리 성적 성격이론을 발전시켰다.

 

. 의식구조

프로이드는 인간의 의식 수준을 전의식, 의식, 무의식으로 나누었다. 전의식은 억압되어 있지만 주의를 집중하면 의식으로 회상될 수 있는 정신세계로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존재하고 있다. 의식은 인간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인식하는 모든 것을 말하고, 무의식은 감각기관으로 인식할 수 없는 마음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는 정신세계로 본능, 열정, 억압된 관념과 감정등이 잠재해 있다.

 

. 성격의 구조

프로이드에 의하면 의식 세계는 성격의 형성과 관련이 깊고 이러한 성격의 기능적 구조를 원초아(id), 자아(ego), 초자아(super ego) 세가지로 나눈다. 원초아(id)는 선천적인 본능적 충동의 덩어리로서 정신 에너지의 근본이 되는 완전 무의식적이다. 그래서 일차적 원시 과정이다. 자아(ego)는 원초아의 욕구를 충족시키거나 통제하기 위해 발달한 것으로 인간 의식의 일부가 된다. 그래서 현실적 원리에 따르는 이차적 과정이다. 초자아(super ego)는 사회문화적인 제 규범이 내면화된 것으로 외부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양심과 이상을 대표하는 기능이다.

 

. 정신 에너지: 리비도와 성감대

프로이드 이론에서 사용되는 '정신'은 성적인 차원에서의 본능적인 에너지를 말하며 이를 리비도(Libido)라 한다. 이 리비도가 집중적으로 모이는 곳을 성감대라고 하였다.

 

. 방어기제

방어기제는 자아가 합리적 방법으로 자신이 느끼는 불안감을 해결하지 못할 때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비현실적인 방법으로 불안감을 제거하려고 하는 무의식적인 심리적 기제를 말한다. 다음의 종류들로 나누어질 수 있다.

 

  . 억압(抑壓): 억압이란 수치스럽다고 느끼는 생각, 죄의식, 괴로운 경험 그리고 싫증나는  일들을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밀어내는 것을 말한다.  . 합리화(合理化): 정당하지 못한 자기 행동에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 그 행동을 정당화하여    불안 의식을 제거하려는 것이다.

 

   . 반동형성(反動形成): 자신이 갖고 있는 죄의식을 본래의 행동과 완전히 반대되는 방향으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 투사(投射):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마치 다른 사람의 것인 양 생각하고      남을 탓하는 것이다.

 

  . 퇴행(退行): 생의 초기에 성공적으로 사용했던 생각이나 감정과 행동에 의지하여 자기 자신의 불안이나     위협을 해소하려는 과정이다. 불쾌감을 일시적으로 해소하지만 사람에 대해     의존적이고 우유부단하게되고, 새로운 변화에 두려워 한다.  . 감정전이(感情轉移): 자신이 느낀 감정을 다른 대상에게 표출하는 것이다.

 

  . 억제(抑制): 해롭고 바람직하지 못한 생각과 충동에 대해서 의식적으로 통제하는 것을 말하다.     이 기제는 억압과 같은 목적을 갖고있지만 개인의 의식적 의도가 있는 것이다.  . 보상(補償): 어떤 분야에서 탁월하게 능력을 발휘하여 인정을 받음으로 해서 다른 분야의 실패나 약점을     보충하여 자존심을 고양시키는 기제이다.

 

  . 치환(置換): 사람의 에너지를 원래의 목표에서 대용 목표로 전환시킴으로 해서 긴장을 해소하는 방식인데    대용 목표와 원래 목표가 아주 유사할 때에만 유용하다.  . 승화(昇華): 정서적 긴장이나 원시적 에너지의 투입을 사회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행동 방식으로 표출하는     것을 말한다. )수녀(테레사)

 

  . 히스테리: 사람이 어렵고 힘든 사태에서 잘 벗어날 수 있는 신체적 증상을 발달시키는 기제이다.     기질적 장애가 없는데도 실제로 신체적 고통을 느낀다.  . 동일시(同一視): 자기가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대상과 자기 자신 또는 그 외의 대상을 같은 것으로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 발달 단계별 특성

프로이드는 인간의 성격은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5단계를 거쳐서 발달한다고 보았다. 각 단계마다 정신(원초아, 자아, 초자아)이 각기 다른 자각 수준(의식, 전의식, 무의식)에서 그 기능을 담당한다고 보았다.

 

  . 구강기(0-1): 이시기 아동의 리비도는 입, , 입술 등 구강에 집중되어 있으므로 먹는 행동을 통해 만족과 쾌감을 얻는다. 이 시기에 만족을 못하면 항문기로 넘어가지 못하고 고착되어 빠는 것에 집착하게 된다. )손가락 빨기, 과음, 과식, 과도한 흡연, 수다, 손톱 깨물기 등의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 항문기(1-3): 이시기 동안 아동의 성적 관심은 항문 부위에 모아지며 대소변을 통해 쾌락을 느낀다. 이때 아동은 배설물에 관심과 흥미를 갖게 되는 시기이다. 이시기 배변훈련을 받게 되는데 조급하거나 억압적으로 시키면 성인이 되어서도 항문기 고착현상이 나타난다. 지나치게 깨끗한 것을 추구하는 결벽증과 무엇이나 아끼고 보유하려는 인색함이 나타난다.

 

  . 남근기(3-6): 이시기는 정신 에너지를 성기에 집중시켜 성기를 가지고 놀며 쾌락을 느낀다. 이때 심리적 변화가 크게 일어난다. 남아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를 경험하게 되고 여아는 엘렉트라 콤플렉스(electra complex)를 격게 된다. 남아는 거세불안(castration anxiety)을 유발시킬 수 있고, 여아는 남근을 선망(penis envy)하게 된다. 그러나 아동들은 자기 부모와 동일시함으로 적절한 역할을 습득하여 양심이나 자아 이상을 발달시켜 나간다.

 

  . 잠복기(6-12): 다른 단계에 비해 평온한 시기로 성적욕구가 억압되어 성적 충동 등이 잠재되어 있는 시기이다. 반면 지적 탐색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지적활동에 에너지를 집중시킨다.

 

  . 생식기(12세 이후): 앞 단계에 잠복되어 있던 성 에너지가 무의식에서 의식의 세계로 나오게 된다. 신체적, 생리적 능력 역시 갖추고 있는 시기이다. 이 시기를 순조롭게 넘긴 청소년은 이타적인 사람으로 성숙하게 된다.

 

. 프로이드 심리발달 이론의 비판적 검토   . 인간의 욕망 특히 성적 욕구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    . 인간을 성욕과 과거의 경험에 지배되는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존재로 보았다.   . 오이디푸스, 엘렉트라 콤플렉스, 여성의 열등감 등에 대한 그의 편견을 비판하고 있다.   . 양심의 발달에 주변 사람들의 격려, 인정, 처벌이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무시했다.   . 이 이론의 자료가 신경증 환자의 치료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이것을 거꾸로 추적해 정상인을      설명하는데 무리가 있다고 비판한다.

  

□  에릭슨의 심리사회 이론

 

. 이론의 중심개념

에릭슨은 인간의 발달을 8단계로 나누고 각 단계별로 극복해야 할 위기(developmental crisis)와 발달 과업을 제시하였다.

 

. 발달 단계별 특성   . 1단계(0-1): 기본적 신뢰감 대 불안감

이시기 세상을 안전하고 믿을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하는 기본적인 신뢰감이 형성된다. 이것은 생의 의욕과 긍정적 세계관을 기르는데 기초한다. 그러나 아기를 다루는데 부적절하고 부정적으로 하면 아기는 세상에 대해 공포와 의심을 가진다.

 

   . 2단계(1-3): 자율성 대 수치심과 회의

자기의 요구에 따른 자율과 독립의 기초가 마련되면 어린이는 세계에 대해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신체 활동과 언어의 사용이 증가된다. 이를 자발성의 요구라고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면 심한 죄책감을 갖게 된다. 질문과 탐색활동이 잦아진다.

 

   . 3단계(3-5): 주도성 대 죄책감

부모의 신뢰감을 얻게되고 자신의 욕구를 처리하는 데 필요한 자율감을 발달시키면 아린이는 독립하고자 한다. 이때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을 허용하고 격려하면 자율성을 형성하게 된다. 이것은 독립심과 존중감을 기르는데 기초가 된다. 그러나 적당한 감독과 제재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지나치면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고 수치심을 갖게되어 심한 자기 회의에 빠지게 된다.

 

   . 4단계(5-12): 근면성 대 열등감

지적 호기심과 성취동기에 의해 활동이 유발된다. 성취기회와 성취 과업의 인정과 격려가 있다면 성취감이 길러진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면 좌절감과 열등감을 갖게 된다.

 

   . 5단계(청소년기): 정체감 대 정체감 혼미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그래서 심리적 혁명이 마음에서 일어난다. 끊임없는 자기 질문을 통해 자신에 대한 통찰과 자아상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하게 된다. 그 결과 얻는 것이 자아 정체성(ego-identity이다.) 이것이 형성되지 못하고 방황하게 되면 역할 혼란(role confusion) 또는 자아 정체성 혼미(identity diffusion)가 온다. 이는 직업 선택이나 성 역할 등에 혼란을 가져오고 인생관과 가치관의 확립에 심한 갈등을 일으킨다.

 

   . 6단계(청년기): 친밀감 대 고립감

청소년기에 자아 정체감이 확립되면 자신의 정체성을 타인의 정체성과 연결시키려고 조화시키려고 노력하게 된다. 자신의 고립을 배우자, 부모, 동료등 사회의 여러 다른 성인들과의 친밀감으로 극복하고자 한다. 그렇지 못하면 고립된 인생을 영위하게 된다.

 

   . 7단계(장년기): 생산성 대 침체성

다른 성인들과 원만한 관계가 성취되면 중년기에는 자신에게 몰두하기 보다 생산적인 일에 몰두하고 자녀 양육에 몰두한다. 이것이 원만하지 못하면 어릴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에게만 몰두하고 사회적, 발달적 정체를 면하지 못한다.

 

   . 8단계(노년기): 통합성 대 절망감

통합성은 인생을 그래도 인정하고 받아들여 인생에 대한 통찰과 관조로 자신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죽음까지도 수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못하면 인생의 짧음을 탓하고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인생을 시도해 보려고 급급 한다. 급기야 생에 대한 절망에서 헤맨다.

 

. 에릭슨 이론의 비판적 검토

에릭슨의 이론에는 애매모호한 개념이 많고 단계설정에서도 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비판받는다. 그러나 정상적인 대상으로 수립된 자료를 기초로 하여 구축된 이론이기 때문에 정상적인 인간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성장, 발달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강점이 있다.

  

□  피아제의 인지발달 이론

 

피아제는 인간의 적응과 발달을 이지적 측면에서 연구함으로써 가장 영향력 있는 인지발달 이론을 제시하였다. 피아제에 의하면 인간의 인지발달은 자연적인 성숙과 환경의 상호 작용에 의해 발달한다. 그 과정은 질적으로 다른 4단계를 순서적으로 거친다고 하였고 그 속도는 아동들 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거의 문화적 보편성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 인지발달의 주요 개념:

인지발달 이론에서 기본이 되는 주요 개념은 도식, 동화, 조절, 평형이다.

 

   . 도식(scheme): 도식이란 유기체가 가지고 있는 '이해의 틀'을 말하며 이 도식(또는 구조)은 유기체가 생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닌, 유기체가 환경과 접촉에서 반복되는 행동과 경험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 동화와 조절(assimilation, assommodation): 피아제는 환경과 끊임없는 상호 작용을 통해 이루어지는 적응 과정을 인간의 인지발달로 보았다. 특히 동화와 조절이라는 두개의 기제가 상호 유기적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았다. 동화는 이미 갖고있는 도식 또는 체계에 의해 새로운 대상이나 사건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인지 과정이고 조절은 기존의 인지 구조로 새로운 대상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경우에 기존의 구조를 변경시키는 과정을 말한다.

 

   . 평형(equalibrum): 평형이란 새로운 상황에서 일관성과 안전성을 이루려는 시도를 말한다. 이러한 평형은 계속적인 동화와 조절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 피아제의 인지발달 주요 원리   . 인간의 발달은 적응과정이다.     적응은 동화와 조절이라는 두 가지 작용에 의해 평형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다.  . 인간의 지적 발달도 동화와 조절에 의해 인지적 균형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고     이는 새로운 지적 구조를 조직해 가는 원천이 된다.

 

  . 지적 발달이란 인지 구조의 변화를 의미하고 지적 기능은 적응과 조건이라는 불변하는 요소로서 존재한다.  . 인간의 지적 발달은 계속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인지 구조는 질적으로 명확하게 구분되는 발달 단계를     거쳐서 변화하게 된다. 이는 발달의 계속성, 단계성과 관련이 있다.

 

  . 한 단계의 인지 구조는 항상 전 단계의 인지 구조에 기초를 두고 이루어지는데 이는 발달의 기초성과     관련이 있다.  . 개인의 경험과 문화의 차이로 인해 한 단계의 발달이 성취되는 연령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그 위계적 순서는 변함이 없다. 즉 발달의 계열성과 문화적 보편성이 있다.  . 또한 발달을 내적 성숙이나 외적인 교육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아동의 능동적인 행동을 통해 더     분화되고 포괄적인 인지구조를 세워 나가는 능동적인 구성 과정이라 보았다.

  

. 인지발달의 단계별 특성

 

  . 감각 운동기(0-2)

생후 초기 아동의 인지 활동은 감각적이고 동작적이다. 이 시기동안 아동은 감각을 통해 학습을 하는 데 빠기, 쥐기, 때리기와 같은 행동도식을 조직화하게 되었다.

 

  . 전조작기(3-6)2세가 지나면서 아동은 감각 동작적 행동에만 의존하던 것을 차츰 새로이 습득한 언어와 대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언어 이외의 다양한 상징적 능력도 발달하게 된다. 그러나 아직 개념의 형성은 충실하지 못하다. 전조작기의 여러 가지 특성은 다음과 같다.

 

 . 직관적 사고: 이 시기의 아동은 가시적인 조건에 의지할 뿐 내적 조건이나 객관적 기준에 의한 사고는 불가능하다. 말하자면 아동은 보이는 대로 대상을 판단하는 것이다. 이런 특징을 피아제는 양(quantity)과 수(count)의 본존 개념(conservation concept)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 자아 중심적 사고: 자아 중심성이란 아동이 자신의 조망과 타인의 조망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의미는 이기적이나 독단적인 것과는 다르다. 자아 중심성은 언어사용에서도 나타난다. 독백과 같이 자기 말만 하는 것이 특징이다.

 

       . 물활론적 사고: 물활론적 사고란 물건이나 현상이 살아 있고 또 살아서 움직이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생동론적 사고라고 한다. 전조작기의 어린이는 생물과 무생물 사이의 구별을 성인과 같은 관점으로 하지 않는다. 4-6세 사이의 아동은 활동하는 것은 모두 살아있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6-7세 사이의 아동은 움직이는 것에 한해 생명을 부여한다.

 

       . 상징적 사고: 과거에 체험한 것을 마음속에서 재생해서 그것을 상징적인 형태로 재현하려고 한다. )여아가 인형을 재우려고 노력하는 행동. 영아는 이것이 천으로 만든 인형인 것은 알지만 인형을 어린아이의 상징으로 다루는 것이다.

 

       . 인공론적 사고: 물체가 인과 관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밤은 어른들이 커텐을 침으로써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동의 자기 중심적인 사고에 근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실재론적 사고: 아동들이 자기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은 모두가 외부에 실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심리 현상과 물리 현상을 혼동하는 것이다. ) 생각이란 소리이기 때문에 입을 다물면 생각은 없어진다고 믿고 고기나 뱀은 소리를 내지 못함으로 생각을 못 한다고 믿는다.

 

       . 도덕적 실재론: 이 시기의 아동은 누군가 잘못했을 때 동기에 의해 잘잘못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에 대한 결과 여부에 따라 잘못한 정도를 판단한다. 바로 현재 나타나 있는 현상을 중심으로 판단한다.

 

       . 꿈의 실재론: 자신이 꾼 꿈의 내용이 실제로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실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꿈속에 등장한 사람들은 깨어난 후에도 그 꿈의 내용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구체적 조작기(7-11)

구체적 조작기에 접어들면 아동의 사고는 급격한 진전을 보이게 된다. 즉 전조작기에는 지각적으로 두드러진 대상에게만 자기의 관점을 한정시키는 데 비해 구체적 조작기에는 일반적인 것으로 관점이 확대되고 내적 표상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조정할 수도 있게 된다. 그래서 이 시기의 아동은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 탈 중심화가 된다. 구체적인 세계에만 한정될 뿐 추상적으로 사고하지는 못한다.

 

  . 형식적 조작기(12세 이후)

이 시기의 아동은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고 문제 해결을 하는데 가설을 사용하며 성인과 같은 형태로 사고 할 수 있다. '미래와 눈에 보이지 않는 먼 곳(Remote&Future)'까지 사고가 가능하고 '연역적 문제 해결 방법'을 사용할 줄 알게 된다.

 

.  도덕성의 발달 단계별 특성

 

피아제는 도덕성을 도덕적 사실주의(moral realism)와 도덕적 상대주의(moral relativism)로 구분하였다. 도덕적 사실주의는 형식적 조작기 이전 아동에게 나타나고 도덕적 상대주의는 형식적 조작기 이후의 도덕성을 의미한다.

 

.  피아제 이론의 비판적 검토

 

피아제에 의하면 아동은 어른에게서 직접적인 가르침 없이도 자연적으로 자신의 인지 구조를 발달시킨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많은 연구자들이 훈련 효과를 들어 반박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아동이 같은 속도로 발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피아제는 주로 '평균적' 아동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으며 교육과 문화가 수행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인지 성장과 관련된 것 외에 정서나 인지발달에 대하여 거의 논의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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