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덕과 윤리.........善/1. 도덕 (道德)

도덕의 발상

오갑록 2013. 5. 26. 17:41

사랑스런 ......   

 

      도덕이란 사회의 구성원들이 양심, 사회적 여론, 관습 따위에 비추어 스스로 마땅히 지켜야 할 행동 준칙이나 규범을 말한다. ,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 또는 바람직한 행동기준을 의미하며, 외적 강제력을 갖는 법률과 달리 각자의 내면적 원리로서 작용하며, 또 종교와 달리 초월자와의 관계가 아닌 인간 상호 관계를 규정한다. ( =  인의(仁義), 윤리(倫理))

 

자연환경의 특성에 순응하고 각기 그 집단과 더불어 생활하여 온 인간이 한 구성원으로서 살아간 방식과 습속에서 생긴 것이다. 즉 생활양식이나 생활관습의 경험을 정리해서 공존(共存)을 위해 인간집단의 질서나 규범을 정하고 그것을 엄격하게 지켜나간 데서 도덕은 생긴 것이다.                                                                                                                   (Fm 네이버사전)

 

 

■  선녀와 나무꾼

 

 

기웃거리는행태는 대부분이 욕심이라는 빈 그릇을 채우기 위해서 재고 망설이는 모습인 듯하다.

 

똥 덩이를 앞에 두고 킁킁대며 빙빙 도는 똥 강아지 행태 말고도 기웃거리는 모습들은 여러 가지를 떠 올릴 수 있다. 물에 낚시 담그고 멍청한 채 찌를 응시하고 있는 낚시꾼 모습도 정중동(靜中動)의 기웃거림일 터이고, 크고 작은 도둑들이 남의 재화를 취하기 위해 재는 모습, 마켓팅 활동 중 시장조사(Market survey) 활동, 새 기술이나 새 사업을 대비하기 위한 R&D 활동, 수험생을 둔 학부모가 명문대 입시요강 훑는 모습, 투자나 융자로 한 몫 챙기려는 거대자본의 탐색활동, 혼기 맞은 남녀간의 맞선, ()을 훔쳐 보려고 알랑대는 남정네의 선심, 정의를 훔치려는 듯 악쓰며 두 주먹 오르락 내리락 하는 대선 주자들 유세활동, 세월과 건강을 챙기려고 찬바람 부는 겨울 밤 달음질 치는 개울가 둔치의 장년층 중늙은이들의 운동모습, 믿음 없는 이들 찾아 길거리 교화에 나서서 쪽지 돌리며 흘리는 교인들의 야릇한 웃음 …… 모두 제 나름의 크고 작은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서성대는 모습들이자 기웃거리는 모습들이 아닐까?

 

도둑질과 기웃거리는 짓은 어감으로는 형님 아우 뻘쯤 되는 것 같다.

도둑이라고 하면, 자기의 마음에 닿으면 정당한 대가나 소유주의 사전 허락 없이 낚아 채는 짓, , 남의 물건을 빼앗거나 훔치는 짓, 또는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을 말하며, 도적(盜賊). 적도(賊徒)라고도 한다. 영어로 (사람) a thief; a burglar (밤도둑); a robber (강도); (좀 도둑)a sneak; a pilferer; a filcher; a shoplifter (들치기)...... 등으로 나오지만 그 뜻의 폭이 좁게 느껴 온다. 도둑질은 재물만이 아니라,  남의 알을 탐하고, 분수에 넘는 정을 넘보고, 과도한 정의를 꾀함 까지도  함축된 의미가 아닐까 한다. 어린 날 듣던 옛날 이야기 "선녀와 나무꾼"에서처럼 나무꾼의 행태가 바로 내가 느끼는 그 단어의 뜻과 유사할 것 같다.

 

 

 

 

도둑에 관한 지역별 역사를 들추면,

 

유럽의 경우, 로마 최고의 성문법인 12표법(十二表法)의 제8표에는 야간절도를 행하는 자가 현장에서 잡히면 피해자가 도둑을 죽여도 상관없다는 규정이 나온다. 이처럼 도둑에 대한 제재조치가 가혹했던 것이다. 예수와 함께 처형된 2명의 남자가 강도였던 것도 잘 알려져 있다.

 

중세사회에 들어서 가장 무서운 범죄로는 살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는 행위도 포함되었다. 중세 독일의 법서 (작센 법전)에서도 3실링 이상의 절도는 교수형에 처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근세사회에 들어서는 폭력범에서 절도범까지라는 표현도 있듯이 범죄의 종류가 현저하게 넓어졌다. 이탈리아 전쟁, 종교전쟁, 30년 전쟁 등의 전란과 경제활동의 여파로 인해 사회의 주변부로 영락해 걸식. 부랑자. 무숙자(無宿者) 등에 의한 절도사례가 증대되었다.

 

특히 18세기에 들어서 대도시에 잠입한 강도, 시종 등에 의한 절도가 압도적으로 많아졌는데, 그 한 예로 혁명전야의 파리에서는 범죄의 90%가 절도였으며, 현대사회와 아주 유사한 범죄구조를 보였다. 현대는 그야말로 절도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중국에서도, 고대부터 도둑이 존재했다. 역학(易學)에서는 도둑을 자연현상의 일부로 취급했다. 전란.실정.자연재해 등을 원인으로 하는 궁핍한 상황으로부터 집단적 도적행위를 하게 되는 민중의 봉기가 그 전형적인 것이다. 백파곡(白波谷)에 틀어박혀 활동했던 황건적이 그 대표적인 존재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조선의 범금팔조 중에 도둑질한 자는 주인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는 조문이 있어 당시에 이미 사회분화가 진전되어 도적이 사회문제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회불안.흉년.전란의 때에는 빈민이나 유민들이 집단을 이루어 군도(群盜)가 되기도 했다. 이들은 존재형태에 따라 화적(火賊).명화적(明火賊).수적(水賊).산적(山賊) 등으로 불렸다. 또한 왜구를 가장한 가왜(假倭)가 있었고 삼국시대에는 해적이 되어 일본지역을 습격한 경우도 있었다. 유랑생활을 하는 양수척(楊水尺)이나 사당패 무리들도 군도로 돌변하는 경우가 많아 늘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Daum 백과)

 

 

 

낮 보다는 밤이, 하얀 것 보다는 검정이, 볼록한 것 보다는 오목한 것이 어쩐지 도둑과 더 가까운 어감인 듯 하다. 낮에 남의 물건을 훔치는 도둑을 낮도둑이라 하고, ‘체면을 가리지 않고 제 욕심만 채우는 사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로도 쓰인다 한다. 행태 별로는 밤도둑, 밥도둑, 고추도둑…… 그리고 현대 감각이 드는 것으로는 이동전화나 무선호출 등의 서비스에 가입하지 않고 가입자의 전화를 절취해 사용하는 전파도둑처럼 여러 가지가 있다.

 

직선 보다는 곡선이, 평면 보다는 곡면이, 호수도 잔잔한 때 보다는 일렁이는 여울이 있을 때가, 멈추어 선 나무 보다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가 더 정감이 들곤 한다. 쌓는 분이 있고 퍼 가는 놈이 있음도 음양의 또 다른 한가지 조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누가 감히 남을 도둑이랍시고 쉽사리 침 뱉고 돌팔매질할 수 있으랴. 누구나 도둑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로 도둑의 씨가 따로 없다는 속담도 있듯, 스스로 찔리는 일(도둑질) 저지르지 아니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부모님 고생하시며 학자금 조달 하는 줄 뻔하게 알면서도 학업에는 게을리하고 엉뚱한 짓 하던 기억들이나, 항상 급박하게 운영되는 기업에서 급여를 받는 자가 업무시간 운동이니 사우나니 행차하던 짓도 도덕이라는 면에서는 나무꾼의 행태와 유사하지는 않을런지......

 

피천득 님의 시 한 구절과, 병아리 사려고 닭장의 알을 엄마 몰래 훔쳐 모으던 때의 심정을 블로그 글에 올린 ID 꼬꼬댁 님의 초등학교 1학년 때 기억을 한 토막 실어 본다. 이 도둑은 나무꾼과는 어떤 면이 다를까? 그냥 곱게만 볼 수 있을 것도 같지만......

 

   < 꽃씨와 도둑 >

                                     피천득

 

      마당에 꽃이

      많이 피었구나

 

      방에는

      책들만 있구나

 

      가을에 와서

      꽃씨나 가져 가야지

 

 

 

   < 딸 부자집 알 도둑 > 

                                      블로그 ID : 꼬꼬댁

 

      꼬꼬댁 꼬꼬...

      소리만 나면

      반드시 동그란 알이 하나 있지요

 

      많이 많이 낳아라

      낳기만 하면 감춰 놓을 테다

      ……

      가슴은 콩닥콩닥 도둑의 마음은 다 그럴까?

      손에 쥐어 들면 아직 따뜻한 온기가

      시렸던 손 마져 녹여줍니다

      ……

 

 

천일야화에 나오는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에 등장하는 도둑 떼나, 선녀와 나무꾼에서 선녀의 옷을 훔치는 나무꾼의 도둑질은 음양을 이루며 다듬어진 조화로운 세상의 한 면과 같은 감이 들뿐, 이야기의 흐름이 험하다는 느낌이 들지는 아니하다.

 

얼마 전 KBS 퀴즈에서, “선녀의 옷을 훔친 나무꾼의 죄는?” 물음의 정답으로

선녀의 옷을 훔쳤기 때문에 절도죄에 해당이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선녀의 옷을 훔침으로서 선녀가 강가에 감금 되었기 때문에 감금죄에 해당이 된다고 했다.

 

훔친다는 범죄행위에 대한 폭을 정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대통령 선거를 앞에 두고 서로들 도둑놈이라고 독설이 난무하고 있다. 검찰에 서로를 고발하고, 언론들은 들춰 내고, 민심은 흉흉하다. 이쯤 되니 대선후보를 존경심에 올려 보며 곱게 보던 시각도 차츰 흐려지고, 누가 도둑인지 그렇다면 나는 진실로 깨끗한지 되돌아 보게 된다. 시점과 폭에 대한 어느 변호사의 변과, 소설 속 주인공들의 변, 경제원론과 도둑을 연계한 이야기 그리고 미래 삶의 터전을 빼앗길까 염려하는 환경론자의 변들을 짤막한 글로 엮어 본다.

 

□ 

문익점(文益漸)은 고려 말 공민왕 때의 문신. 1363년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에 갔는데 원나라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강남으로 귀양을 간다. 귀양지에서 3년 동안 생활한 문익점은 그곳에서 목면의 실용성을 확인하고, 귀국할 때 금수품이던 목화씨를 몰래 가지고 들어와 진주에서 장인인 정천익과 함께 3년 만에 목화재배에 성공했다문익점은 전국에 면업을 일으킨 공로를 인정받아 조선시대에 강성군(江城君)으로 봉해졌다.

 

처음에는 목화에서 씨를 제거하고 실을 뽑을 줄 몰랐으나, 정천익이 중국 승려인 홍원(弘願)에게 씨를 빼는 씨아(取子車)와 실을 뽑는 물레(繅絲車)를 만드는 방법을 배워 이를 보급시켰다. 목화가 널리 전해짐으로써 일반 백성들의 의복 재료가 종래의 삼베(痲布)에서 무명(綿布)으로 바뀌게 되었다.

 

전해지는 이야기를 재구성해 보자면, 붓에 목화씨를 숨겨온 문익점이 소남(召南) 관정이란 곳에 살고 있는 장인 정천익에게 이렇게 부탁했다고 한다. “내가 목화 종자를 가져오기는 했는데 목면(木綿)이 아니고 초면(草綿)입니다. 이 초면은 한 해 살고 한 해 죽는 것이니, 이것을 재배해 보십시오.

그래서 정천익이 목화를 재배했는데, 첫해에는 겨우 몇 개만 살아 꽃이 피었다. 그 씨를 까보니 여남은 낱이 되었다. 그런데 물에 담그니, 잔뿌리가 나오지 않아 스스로 영양소를 섭취 못하고 시들어 죽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정천익은 삼 년 만에 재배에 성공했다.

 

문익점은 목화에서 실을 뽑고, 솜을 만들고, 베를 짜는 법은 배워 오지 못했다. 무술 수련 차 조선팔도를 유람하던 중국 승려를 정천익이 만나게 된다. 이 중국 승려가 기르고 있는 목화를 알아보는데, 정천익은 그가 베 짜는 방법도 알고 있음을 간파하고 그에게서 그 기술을 습득하게 된다.

 

eavesdrip은 낙숫물 또는 처마 밑의 낙숫물 자국을 뜻하며, eavesdrop은 “엿듣다, 도청하다”라는 동사이다. eavesdrop을 하는 행위, 즉 남의 비밀을 몰래 훔쳐 듣는다는 것은 좋은 어감만은 아니다. 타인의 장점이나 흠을 정당하지 아니하게 몰래 얻고자 함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eavesdrop 행위 모두를 나쁘다고 하지는 않는다. 전쟁터의 첩보전도 eavesdrop 행위를 기초로 한다. 적진의 큰 비밀을 물어 온다면 아군 측에서는 영웅이 된다. 문익점을 조상으로 모시는 후손들이 면화를 몰래 들여와 우리나라에 널리 퍼뜨린 것을 자랑스레 여김과 비슷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eavesdrop 행위 자체를 무조건 악하다고 할 수는 없다. 시대나 사회, 지역에 따라서 선과 악이 확연하게 달라지는 것이다. 

 

미국이나 일본 같은 선진국의 기술을 빼 내와 국산화 내지 성공적인 상품화를 한 사례는 적지 않다. 우리는 그 기업을 악덕기업으로 바라 보지는 않는다. 회사 직원이 미국의 기술을 빼 내 오려다 FBI eavesdrop에 걸려들어 혼 줄 난 것을 보았다, 그렇다고 그 직원을 도둑으로 보는 임직원은 아무도 없었으며, 오히려 little 문익점 정도로 생각한다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다. 물론 미국인의 눈에는 FBI 요원들이 수행한 eavesdrop 행위가 나쁜 짓이었다고는 보이지 안했을 것이다. 

 

지난 2009.2월 어느 날 매일경제 신문의 광고문 한 편을 보고서도 같은 생각을 했다. 광고인은 자기네 실리콘 관련 기술을 훔쳐갔노라며 A 기업과 그 기업인을 싸잡아 실명으로 공개 질타 하는 내용이었다. 바로 한두 달 전에는 이 A 기업에서도 직원이 동일 제품의 관련 생산기술을 빼내 모 재벌그룹 소속기업에 넘기며 십 수 억 원을 개인적으로 챙겼으며 직장도 그리 옮겨갔다며 이를 고발조치 했다는 기사를 접했었다. 공개된 내용만 갖고 잘잘못을 가늠하기란 어렵다. 설령 공개된 내용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누구를 탓함이 옳은 일인지는 명백하지 않다. 입장에 따라 선과 악이 달리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사랑은 로맨스지만 남이 하는 사랑은 불륜" 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로 생각된다. 내가 내 소를 잡아 먹는다고 죄가 될까? 축산물 가공처리법 등에서 무허가 도살 관련 죄는 법조항이 있을 듯 하지만, 종교나 윤리적인 면에서 보는 살생의 죄는 끝없는 논쟁거리로 남을 수 밖에 없다. 

 

남의 이야기를 엿들었다고 해서, 아니면 훔치거나 도둑질 했다고 해서, 심지어 무엇을 죽였다고 해서 선과 악을 백지에 금 긋듯 또렷하게 그을 수는 없으리라는 생각을 하여 본다. 시대나 사회, 지역에 따라서 선과 악이 확연하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범죄자를 낳은 어머니까지 처벌할 수 있나?

                                                                                       .주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비록 헌법이 도둑질을 기본권으로 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도둑을 예로 들어, 어떤 사람이 도둑질을 하려고 마음먹었다. 과연 언제부터 이 사람의 행위를 제한할 수 있는가?

 마음먹는 순간부터 이 사람은 도둑예정자가 되어 처벌되거나 행위가 제한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도둑질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실질적인 행위를 하는 시점부터 처벌이 가능한가?

 

형법 등 국가의 강제력을 규정한 법에 있어 가장 어려운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위와 같은 것이다. 이는 ‘어떤 행위가 범죄결과를 낳았고, 범죄결과를 낳은 그 행위를 행위자에게 객관적으로 귀속시켜 그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하는 문제로서 이를 인과관계와 객관적 귀속의 문제라고 한다. 인과관계의 폭을 한없이 넓히면 범죄자를 낳은 어머니나 아버지까지 처벌할 수 있을 것이고, 반대로 그 폭을 너무 좁히면 범죄행위로 처벌할 수 있는 행위가 없거나 매우 적게 될 것이다.

 

인과관계와 객관적 귀속의 인정 폭이 줄여져 나간 이유는 바로 인간의 권리에 대한 인식의 확장 덕분이었다. 인간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기 위해서는 공권력의 작용은 최소한에 그쳐야 하고, 이를 위해서 인간의 행동 중에 범죄에 직접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고, 중요한 행위에 대해서만 처벌하거나 금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순정” (성석재 지음)

                                                                                                         네티즌 손.혜민 평 중에서

세상에 모든 것을 다 훔친다. 도둑들이 훔쳐 온 물건도 다시 훔친다. 그렇지만 인간 각자에게 단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은 훔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생명처럼 이 세상에 유일무이하면서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은 훔치면 안 된다.

 

이치도의 도둑 선생인 '왕확'에게서 배운 "도둑의 도"를 충실히 지키려고 했으니,

"도둑의 도" "먼저 훔칠 물건이 어떤 것이며, 자물통은 어떤 게 걸려있는지 잘 살펴 알아두는 것이 거룩함이고, 앞장을 서서 훔치러 들어가는 건 용감함이며, 물러날 때 맨 뒤에 서는 것이 의로움이다. 알맞은 때를 보는 게 슬기이고, 도둑 한 걸 공평하게 나누는 것이 어질다고 한다." 이 다섯 가지에 정통하지 않고서는 천하에 이름난 도둑이 될 수 없다.

 

이쯤 되면 나서야 할 일에 발만 담그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고 양 손에 먹을 것을 쥐고도 입으로 또 떡을 하나 더 물고 도망가는 우리 세상 바쁜 도둑들을 <순정>속의 그들이 비웃어도 할말이 없다 싶다.

 

이 세상에는 절대로 훔쳐서 안 되는 것도 있고, 절대로 훔칠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것을... 이치도가 깨달았을 때,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인생은 얼마나 즐거운 것 인가. 훔칠 것이 있고 훔치는 게 재미있고 훔쳐서 좋은데. 세상은 나를 위해 존재한다. 훔치다가 잘못돼서 쫓겨 다닐 때도 있지만 그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다가 그렇게 된 것이니 참을 만했다. 그런데, 사람은 달랐다. 사람의 운명은 훔칠 수 없고, 하다못해 다른 사람의 마음을 훔칠 수 없고, 생각을 훔칠 수 없고, 사람끼리의 감정 한 조각도 훔칠 수 없다. 사람 그 자체는 납치하고 감금하고 폭행하고 복종케 할 수는 있어도 그 감정, 관계는 결코 훔칠 수 없다.

훔쳐지지 않고, 훔친다 해도 내 것이 아니다.

 

 

 논어, 애인과 지인의 길”  (.재근 지음)

 

 ...... "잘난 도둑은 감옥 안에 있지만 못난 도둑은 감옥 밖에 있는 법이다. 뇌물을 받는 놈도 도둑이고, 뇌물을 바치는 놈도 도둑이다. 급행료를 받고 일을 봐 주는 놈도 도둑이고, 턱 없이 많은 돈을 받고 송사를 맡아 주는 변호사도 도둑놈이며, 없는 병이 있다며 속여서 치료비를 후리는 의사도 도둑놈이다. 그런데 이런 도둑들은 날도둑인데 잡히지도 않고 걸려들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 놈 들은 숨어서 도적질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내놓고 도둑질을 하다 재수가 없어서 감방에 들어왔을 뿐이다. 다들 도둑질로 한 몫 보려는 세상에서 차라리 내놓고 도둑이 되었다가 붙들려 감옥에 왔다고 부끄러울 것은 없다."

 

검은 돈, 더러운 돈, 그리고 사람을 잡는 돈이란 본래 살인 강도의 것만은 아니다. 차라리 손에 칼을 들고 강도질 하는 도둑은 내놓고 도둑질하니까 잡을 수라도 있지만 세금을 잘라먹는 날강도나 등치는 돌팔이들은 버젓하게 행세를 하면서 도둑질을 하기 때문에 쉽게 눈에 띄지도 않는다.

 

세상을 아프게 하는 무리는 누구일까? ……도둑들만이 세상을 아프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도둑들은 법이 엄하게 벌하는 무리들이다. 그러나 법의 비호를 받는 도둑들이 있다. 그러한 도둑을 백성들은 특권층과 모리배라고 부른다. 특권층은 권력의 특혜를 받는 무리들이고 모리배는 금융의 특혜를 받는 무리들이다.

 

겸양은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떠나면 허식일 뿐이다. 허식이나 허세가 마음의 성실을 앗아가는 제일의 도둑인 셈이다. 공자는 이러한 도둑들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한다. 인간은 양과 같을 수도 있고 살쾡이처럼 될 수도 있다. 그렇게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정이다. 그러한 정을 갈무리 할 수 있는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그러한 정을 바탕 삼아 꾸며서 덧 보이게 장식하는 정을 다스린다면 인간의 허세는 부끄러워질 것이다.

 

 

장자철학 우화, 털끝에 놓인 태산을 어이할까”  (.재근 지음)

 

제나라에는 전성자(田成子)란 이가 있었다……전성자는 나라를 훔친 도둑이란 이름을 얻었지만 아무도 그를 도둑놈이라고 욕할 수는 없었다. 큰 도둑이 되면 힘이 붙어서 거미줄 같은 법 따위로는 잡을 수 없다. 낚시로 고래를 잡을 수 있는가?  고래만큼이나 덩치가 커진 큰 도둑에게는 성인의 법도도 아부를 해야 한다.

 

인의의 제도로 나라를 지키는 곳이면 어디라도 큰 도둑이 있게 마련이다. 인위는 본래 인간의 욕망이 낳는 것이며, 또 욕망은 항상 무엇인가 훔쳐야 직성이 풀리는 본능이란 기름이 태우는 불질에 약한 법이다. 이것은 분명 욕망이란 본성일 게다. 다만 자연은 그 욕망을 걸림 없이 내 버려 둘 수 있다. 누가 하늘을 훔칠 것이며 태산을 훔칠 것 인가.

 

뻐꾸기와 뱀은 뱁새의 둥지를 보면 그 주변에서 서성거린다. 뻐꾸기는 제 알을 낳아 두려고 뱁새 둥지를 엿보고, 뱀은 맛있는 뱁새 알이 탐이 나서 그 둥지를 노린다. 사람은 뻐꾸기가 뱁새의 성미를 훔치고 뱀은 뱁새의 알을 훔친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연은 뻐꾸기나 뱀을 도둑으로 몰아 벌을 주지 않는다. 뻐꾸기가 알을 품어 깔 줄 모르는 것은 그것의 본성이고 뱀이 뱁새의 싱싱한 알을 먹이로 삼는 것은 뱀의 본성인 까닭이다.

 

 

□ "큰 손과 좀도둑의 정치 경제학 "  (.윤재 지음)

 

양치기는 자기 양을 굶겨 죽이든 잡아 먹든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바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수고롭게도 양을 먹이고 돌본다.  똘똘한 큰 도둑은 쓸데없이 백성을 못살게 구는 대신, 백성의 걱정거리를 줘가며 이들이 생산을 잘 하도록 도울 것이다.

 

큰 도둑일수록 사회에 피해를 덜 주기 때문에 사람들은 떠돌이 도둑이나 좀도둑이 들끓는 것보다는 큰 도둑이 붙박이로 눌러 앉는 것을 더 좋아한다. 물론 크고 작은 도둑들이 다 사라지면 가장 좋겠지만, 도둑을 막을 도둑이 사라지면 새 도둑이 또 나타나는 법……

 아담 스미스가 경쟁시장에서 보이지 않는 손을 발견했듯, 큰 도둑이 자신의 이익을 밝히는 과정에서 남 좋은 일을 하게 되는 것을 올슨은 또 다른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죄다 도둑 놈들뿐이라고 한숨짓는 것은 부질없는 노릇이다. 도둑도 도둑 나름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큰 도둑보다는 좀도둑이다. 좀도둑을 더 키워 아예 큰 도둑으로, 나아가 큰손으로 만들어 줘야 한다. 도둑 잡는 비결은 도둑이 제일 잘 아는 법……

통치자를 도둑으로 보는 생각은 뿌리가 깊다. 일찍이 장자는 “작은 도둑은 잡히고 큰 도둑은 제후가 된다”고 했다.

 

 

 도둑 맞은 미래”  (다이앤 듀마노스키 외 지음, .복규 옮김)

                                                                                               '환경 책 큰 잔치' 실행위원회 20세기 초만 해도 새로운 화학물질의 개발은 진보와 축복으로 여겨졌다. 오존층 파괴의 주범인 염화불화탄소(CFC), 곧 프레온 가스의 개발자는 1941년 최고 화학상인 프리스틀리상을 수상했고, 심지어 오늘날 전 세계 각국에서 사용이 금지된 DDT의 개발자는 1948년에 노벨상을 받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인가? 오늘날 이러한 화학물질과 화석 연료를 바탕으로 세워진 현대 문명과 산업주의 경제 체제는 생명의 정상적인 활동과 흐름을 뿌리에서부터 파괴•유린하고 있다. 이 책이 그 실체를 밝혀낸 이른바 '환경 호르몬(내분비 교란 물질)'이 그 대표적인 보기이다.

 

  비유컨대, 인간이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생체 구조와 기능을 설계하는 것이 유전자라면 호르몬은 그 유전자에 새겨진 악보를 소리로 재생하는 실질적인 연주자인 셈인데, 바로 그 호르몬이 물. 공기. 음식 따위를 통해 들어온 독성 화학물질에 의해 교란되는 바람에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들이 큰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이다.

 

  특히 DDT. PCB. 다이옥신 등과 같은 난분해성 환경 호르몬은 탯줄이나 모유를 통해 아기에게도 전달되므로 더욱 위험하다. 이런 환경 호르몬 때문에 암과 같은 질병뿐만 아니라 각종 기형아와 허약한 후손의 탄생이 잦아지면서 생명의 질이 떨어지고 있으며, 급기야는 정자수 감소와 불임 증가 등으로 인해 인간의 멸종을 우려해야 한다는 섬뜩한 경고의 목소리마저 나오고 있는 형편이다.

 

건강하게 태어나 튼튼하게 자라야 할 후손, 즉 인류의 미래를 도둑맞게 된 이 가공할 사태를 어떻게 이해하고 또 이에 어떻게 대처할지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

 

 

□   “의적 정의를 훔치다”  (.홍규 지음)

 

 

의적이란 관습과 규율에 비추어 사회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위정자들과 정의에 맞서 싸우는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사람들의 입에 의적이 회자되는 이유와, 현 시점에서 가지는 그 이야기의 의미가 무엇인지 되새겨 본다.

 

                                                                                                네티즌리뷰, .준영 글 중에서

서부 개척시대의 상징적 의적이며, 미국 자본주의의 반항아들인 '제시 제임스와 빌리 더 키드'와 호주의 제시 제임스 '네드 켈리'. 그들의 이미지를 영화로 전화시킨 <내일을 향해 쏴라>와 그 외의 영화와 문학 속에 투영된 의적들의 이야기가 흥미를 돋우고 있다. 한편, 여기서 우리는 '다양한 조로'들의 이야기가 지속적으로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이야말로 '왜 의적들이 대중의 관심과 환호의 대상인가'라는 의문에 대한 역설적 대답이자 증거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의적에 대한 민중들의 열화와 같은 환호와 지지에도 불구하고 현실 권력의 벽은 그 보다 훨씬 강고하고 두텁기 만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의적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환호는 오히려 위험하며 의적은 단지 복수의 화신일 뿐임을 명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홉스봄의 지적은 매우 적절하게 들린다.

 

"의적은 불의를 바로잡는 사람들이라기보다는 복수를 하는 사람, 완력을 발휘하는 사람이다. 그들이 호소력을 지니는 이유는 정의의 대리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가난하고 약한 자도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의 한계와 좌절, 그리고 되풀이되는 부조리와 모순.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바로 인도 의적의 여왕 '풀란 데비'의 파란만장한 삶과 죽음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멕시코 혁명의 영웅 '판초 비야', 시칠리아 민중의 대부 '살바토레 줄리아노', 브라질의 캉가세이루 '안토니오 실비노' 등 역시 의적과 혁명이라는 이중의 이미지를 가졌던 대표적인 인물들 역시 하나같이 쓸쓸하고 불행한 최후를 맞고 있다. 조선 민초들의 꿈과 희망을 한 몸에 안고 있었으나 현실세계에서는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던 조선의 3대 의적 홍길동, 임꺽정, 장길산의 얘기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법하다. 결국 모든 의적들의 무용담은 소수 권력자들이 구축한 현실세계의 벽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는 역설이기도 한 셈이다.

 

 

□  현대경제의 틀에서 본 사례

 

 . "CJ 비자금 사태" 관련 기사를 보며  경제와 도덕 개념의 기준설정은 무엇이 합당한지를 생각하여 본다.

 

 

                                                       (2013.5.21.)

검찰은 이날 오전 해외 비자금 조성 의혹을 받고 있는 CJ그룹 본사, 임직원 자택 등 5~6곳을 압수 수색했다. CJ그룹이 해외에서 국내로 반입한 비자금 규모는 70억원 대로 알려졌다.

 

검찰은 CJ그룹이 설립한 해외법인 들이 국내 CJ그룹 측에 물품을 납품한 것처럼 위장˙가공 거래를 해 거액의 비자금을 조성한 단서를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CJ그룹이 회사 관계자나 위장기업 명의의 차명계좌 등을 이용해 정상적인 거래인양 위장해온 것으로 보고 관련 계좌도 함께 추적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  檢 'CJ 비자금' 수사는 탈세와의 전쟁

 

                                                                                                         2013.05.26 뉴스 부분발췌

특수수사는 외부의 고소·고발이 아닌 검찰이 기획·범죄정보수집 등을 통해 직접 인지해 착수하는 수사를 말한다. 공무원의 뇌물·부정부패, 대기업 범죄, 조직폭력 범죄 등이 주된 대상이다.

 

대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특수수사의 경우 비자금 조성 과정의 횡령과 배임, 계열사 부당 지원, 미공개 정보 등을 이용한 시세 조종, 외환거래 과정의 미신고나 재산국외도피, 분식회계·부실감사 등이 '단골 메뉴'다.

 

탈세 수사는 '본류' 수사로 나아가기 위한 '압박 수단'이거나 '곁가지'인 경우가 많았다. 최근 대기업 수사를 보면 지난해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하이마트 선종구 회장 일가의 탈세 혐의를 수사한 과정에서 파이시티 인허가 비리 관련 첩보가 입수됐다. 이후 중수부는 정관계 로비 의혹 수사에 나서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 박영준 전 차관, 이상득 전 새누리당 의원 등 이명박 정부의 실세 3명을 줄줄이 처벌했다.

 

2011년 한화 김승연 회장의 경우 차명계좌에서 꼬리가 밟혀 탈세 혐의로 수사 대상이 됐으나 수사의 중심축은 횡령·배임 혐의로 옮겨갔다. 1천400억원대 횡령·배임 혐의로 기소된 태광그룹 이호진 회장의 경우도 탈세 혐의를 받았으나 비중은 높지 않았다.

 

2008∼2009년 세간을 떠들썩하게 '박연차 게이트'도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탈세 혐의에서 출발해 결국 정관계 로비 의혹까지 번졌다. 검찰은 최근 경제정의 실현과 지하경제 양성화를 강조하는 요즘 사회 분위기를 볼 때 탈세 수사의 의미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입장이다.

 

CJ그룹이 홍콩과 버진아일랜드 등 해외 조세피난처에 다수의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해 본사 및 계열사와 정상적인 거래를 하는 것처럼 위장하는 수법으로 거액의 비자금을 조성한 의혹을 수사 중이다. 비자금은 수 천억원, 탈세액도 수 백억원에 이를 것이라는 게 검찰의 판단이다. 임직원 명의의 차명계좌도 수백 개에 이른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번 사건에는 2005년부터 이 회장의 개인 비자금을 관리하며 '집사' 노릇을 한 전 재무팀장 이모씨와 홍콩에서 20년 가까이 근무한 임원 신모씨가 깊숙이 개입했다.

 

검찰은 이 같은 과정을 통해 회장이 수년간에 걸쳐 수 백억원 대의 양도소득세와 종합소득세, 법인세 등을 탈루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특수수사는 사회의 구조적 비리와 거악을 필벌하고 규범을 제시한다는 의미가 크다"며 "국내외에서 장기간에 걸쳐 거액을 탈세해 막대한 재산을 불린 범죄는 국민의 법 감정에 어긋나는 중대 범죄"라고 강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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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5.22.인터넷 뉴스 중에서

해외 비자금 조성과 관련해 지난 21일 CJ그룹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한 검찰의 서슬퍼런 칼끝이 이재현 CJ회장을 겨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이미 이 회장 일가가 해외에 설립한 위장 계열사 등을 통해 수천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정황을 포착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난 21일,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는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에 위치한 CJ 본사와 쌍림동 제일제당센터, 임직원 자택 등 5~6곳에 검사와 수사관들을 보내, 회계 장부를 비롯해 컴퓨터 하드디스크와 각종 내부 문건 등을 확보했다.

 

금융정보분석원(FIU)으로부터 CJ그룹의 수상한 해외 자금 흐름이 있다는 사실을 통보받은 검찰은 이를 토대로 국제협력단 자금추적팀 등을 통해 구체적인 분석 작업을 진행했으며,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하며 공개수사로 전환함과 동시에 압수수색을 실시한 것이다.

 

검찰은 그 동안 여러 차례 이 회장과 CJ의 비자금 문제에 대해 조사를 펼쳤지만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지난 2008년 이 회장이 40여 개의 차명계좌를 이용하여 수 천억원의 개인 자금을 관리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 회장이 서둘러 1,700억 원의 세금을 납부하며, 故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상속재산이라는 이유로 법망을 교묘히 빠져나갔다.

 

2009년에는 천신일 세중나모 그룹 회장과 CJ그룹간의 편법 거래 의혹이 진행됐지만, 검찰은 혐의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후원자였던 천 회장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주장이 오갔지만 모두 의혹으로 끝난 것이다.

 

올 초에는 서미 갤러리의 탈세 혐의 조사 과정에서 CJ그룹이 서미 갤러리를 통해 해외 미술품을 1,400억원 이상 구매한 것으로 밝혀지며, 비자금 세탁과 관련한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수사를 통해서도 검찰은 이 회장과 CJ의 비자금 문제를 명확히 밝혀내지는 못했다. 때문에 또다시 본격적인 CJ그룹의 비자금 문제에 칼을 들이 댄 검찰의 조사에는 더욱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검찰은 CJ그룹이 대표적인 조세피난처인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계열사인 ‘ENVOY MEDIA PARTNERS(EMP) LTD’와 ‘Water Pipeline Works Limited’를 통해 비자금을 조성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들 계열사는 CJ CGV와 CJ대한통운이 각각 지분율 94.4%, 100%로 운영하고 있으며, 버진 아일랜드를 조세 피난처로 이용해 탈세를 벌이고 있는 한국인의 수도 적지 않다는 주장이 최근 제기되기도 했다.

 

현재 FIU가 확인하여 CJ그룹이 국내로 들여왔다고 의심하고 있는 비자금의 규모는 70억원 대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그 동안 진행됐던 CJ와 관련한 일련의 비자금 의혹들을 종합해 볼 때 CJ그룹의 비자금 규모는 이보다 훨씬 많은 수천억 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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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5.24  인터넷 뉴스

검찰이 수사중인 5000억원대 CJ그룹 비자금 의혹은 5년 전 압수됐던 망가진 USB 메모리카드가 복원되면서 수사의 결정적 단초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현 CJ그룹 회장 비자금 의혹은 2008년 당시 CJ 재무팀장 이모(44)씨의 살인 청부 의혹사건을 통해 드러나기 시작했다.

 

지난 2007년 5월 27일 새벽 강남구 논현동에서 귀가하던 박모(43)씨가 정체 불명의 남성 2명으로부터 스패너로 머리를 얻어맞고 1억원 상당의 수표와 수첩 등이 든 손가방을 빼앗겼다. 박씨는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지만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미제로 남아있던 이 사건은 1년 뒤 서울지방경찰청 강력팀이 “살인 청부 의혹’에 대한 첩보를 입수해 재수사에 나서면서 실체가 드러나는 듯했다. 경찰은 당시 이 회장의 자산관리를 맡고 있던 이씨가 사채업자인 박씨에게 이 회장의 돈 170억원을 빌려줬다가 원금을 회수하지 못하자 박씨에 대한 살인을 교사했다는 정황을 포착했다.

 

이를 토대로 경찰은 수차례 영장을 청구했지만 기각 당했다. 경찰은 당시 이씨로부터 망가진 USB를 압수했지만 제대로 복원하지 못했다.

 

당시 수사를 지휘했던 서울중앙지검 형사 3부는 자꾸 영장이 기각되자 경찰로부터 압수물 등을 넘겨받아 다시 수사에 나섰다. 검찰은 이 USB를 복원하자 여기에서 예금, 주식, 미술품 등 이 회장의 차명재산과 관련한 정보가 쏟아져 나왔다. 검찰은 이를 바탕으로 경찰에 재수사를 지휘했고, 2008년 12월 이씨를 구속 기소했다.

 

USB 안에선 이 전 팀장이 이 회장에게 쓴 A4 용지 10장 분량의 편지도 발견됐다고 중앙일보가 보도했다.

 

이 회장을 ‘회장님’으로 지칭한 이씨는 편지에 “CJ 재무팀이 관리하던 차명주식을 매각해 대금을 세탁하고 서미갤러리를 통해 해외 미술품 1100억원어치를 구매했다”고 썼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문제되지 않게 잘 처리했다”고 쓴 것으로 전해졌다고 중앙일보는 전했다.

 

검·경은 당시 USB에서 확보한 내역을 통해 4000억원 대에 이르는 이 회장의 차명재산을 국세청에 통보했고, CJ는 2008년 8월부터 1700억원의 세금을 분할 납부했다. 이씨는 1심 재판에서 징역 6년을 선고 받았지만 항소심은 입증이 부족하다는 등의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고 2012년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당시 1심은 이씨가 관리하던 이 회장의 차명자금 규모가 537억원이라는 그룹 관계자의 진술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이 회장의 차명 재산과 관련해 납부한 세금이 1700억원을 넘은 점을 감안했을 때, 이씨가 관리했던 전체 차명재산은 더 많을 것으로 본다”고 언급하며 추가 비자금에 대한 의혹을 남겼다.

 

검찰은 현재 2008년 이재현 회장이 차명재산을 실명으로 바꾸면서 낸 세금 1700억원과 비자금의 연관성도 살펴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도덕성 발달에 관한 이론” (콜버그를 인용한 보고자료)

                                                                                     

   인간의 도덕성 발달 과정에 관한 이론을 전개한 내용이다.

"아내의 중병치료를 위해 과도하게 비싼 값을 요구하는 약사로부터 약을 훔친 어느 남편의 행위"

사례로 들면서, 연령층 단계별로 나누어 도덕성 발달과정을 분석하고 있다.

 

                                                                                       꿈과 비전, 카페 글 중에서 부분 발췌

ㅡ 수준 1 - 전인습적 : 전도덕성

    도덕적 선악의 개념은 있으나, 준거는 권위자의 힘이나 개인적 욕구에 관련시켜 해석한다.

 

   . 1단계 - 주관화 : 복종과 처벌지향

약을 훔치는 것은 벌을 받게 되기 때문에 잘못이라고 판단한다. 권위자의 벌을 피하고, 권위에 복종한다. 3-7세에서 나타나는 이 단계는 벌과 순종을 향하여 있다.

 

   . 2단계 - 상대화 : 상대적 쾌락주의

약을 훔쳐서라도 자기 아내의 생명을 구해야 한다고 판단하는 시기이다. 자신의 욕구충족이 도덕판단의 기준이며, 욕구 배분의 동기는 있으나 자신의 욕구충족을 우선 생각한다. 8-11세의 어린이에게 나타나는 이 단계는 순진한 도덕적 상대주의(naive instrumental relativism)에 있게 된다.

 

ㅡ 수준 2 -  인습 수준 : 타율 도덕성

 

    자신이 속한 집단의 기대나 기준에 맞추어 행동하는 것을 이상으로 여기며 사회질서에 동조하고자

    하고 힘있는 사람과의 동일시를 하려 한다. 다른 사람의 상호작용을 고려한 사회 지향적 가치기준을

    갖는다.

 

   . 3단계 - 객체화 - 착한 아이 지향

 

남편이 약을 훔치는 것은 약사의 권리를 침해하여 남에게 해를 끼치기 때문에 옳지 못하다고 판단한다. 대인 관계 및 타인의 승인을 중시한다. 12-17세의 청소년에게 나타나는 이 시기는 상호 인격적 일치가 나타난다. 청소년은 다른 사람의 관점과 의도를 이해할 수 있고, 고려할 수 있다. 정의는 항상 다른 사람을 부정하고 해치지 않는 옳은 것에 대한 인습적 형상(image)을 포함한다.

 

   . 4단계 - 사회화 - 사회질서와 권위 지향

 

법은 어떤 경우에도 지켜져야 하기 때문에 남편의 행동은 정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는 시기이다. 법과 질서를 준수하며, 사회 속에서 개인의 의무를 다한다. 18-25세의 시기에 주로 나타난다. 이 때에는 법과 질서가 호소력이 있다.

 

ㅡ 수준 3 - 후인습수준 : 자율도덕성

 

    자신의 가치관과 도덕적 원리원칙이 자신이 속한 집단과 별개임을 깨닫게 되면서 개인의 양심에 근거

    하여 행위를 하게 된다.

 

   . 5단계 - 일반화 : 민주적 법률

 

남편이 약방 문을 부수고 들어간 것은 잘못이나 인명을 구하기 위한 일이므로 용서해야 한다고 판단하는 시기이다. 인간으로서의 기본원리에 따라 행동한다. 사회적 책임으로서의 공리주의, 가치기준의 일반화를 추구한다. 25세 이상의 시기에 나타난다. 이 단계의 사람들은 신념이 서로 다른 사람들의 상호 유익을 위하여 합의를 시도한다. 그러므로 소수까지 포함된 모든 개인의 권리가 인정되는 것이 모두의 관심거리가 된다.

 

   . 6단계 - 궁극화 : 보편적 원리

 

법이나 관습 이전에 인간 생명이 관여된 문제로서 생명의 가치는 무엇보다도 우선하여 생각해야 한다고 한다. 보편적 도덕원리를 지향한다. 스스로 선택한 도덕 원리, 양심의 결단에 따른다. 이 단계에서 보편적 도덕의 원칙을 인식하게 된다. 사회적 질서에 대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회와 모든 사람을 결속시키는 도덕적 원칙에 대한 존중이 극에 달하게 된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인간 관계의 지고의 측면에 인도하기 때문에 의무적이다. 어떤 상황에 있어서의 정의는 모든 주장에 대하여 동등하게 생각하는 것이며, 모든 사람이 결코 수단으로만 여겨지지 않고 목적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 7단계 - 우주적 영생을 지향하는 단계

 

콜버그는 말년에 7단계를 추가한다. 그것은 도덕 문제는 도덕이나 삶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우주적 질서와의 통합이라고 보는 단계이다. 예수, 간디, 마틴 루터 킹, 공자, 소크라테스, 칸트, 본 회퍼, 테레사 등의 위대한 도덕가나 종교지도자, 철인들의 목표가 곧 우주적인 원리이다. 우주적인 원리가 속하는 것은 ‘내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율과 같은 곳에서 드러난다. 생명의 신성함, 최대다수를 위한 최선의 원리, 인간 성장을 조성하는 원리 등이 우주적인 원리에 속한다.

 

 

ㅡ 콜버그 이론의 특징

 

    콜버그의 도덕성 발달 단계는 각 발달단계가 순서대로 진행된다고 가정하며 일단 한 사람이 도덕적

    발달의 상위단계에 도달하면 결코 전 단계로 퇴행하지 않는다고 한다.

 

   . 각 단계들이 불변의 연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신체적, 정신적, 손상을 입은 경우를 제외하고 사람은 반드시 순서에 따라 각 단계를 거쳐간다. 다시 말해서 도덕 발달은 다른 모든 발달처럼 일정한 원칙을 가지고 진행되므로 하룻밤 사이에 지고의 도덕 군자로 변신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 각 단계들은 계층적 통합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낮은 단계는 높은 단계의 도덕적 추론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높은 단계는 낮은 단계의 도덕적 추론을 포괄하고 이해한다. 단계의 이동은 도덕적 추론을 구성하고 있는 일련의 인지적 구조가 재조정되는 것을 의미한다.

 

   . 발달은 인지적 불균형이 생성될 때 발생한다. 도덕적 난관에 부딪혔을 때 그것을 해결하려는 인지적 판단이 서지 못한 상태를 불균형이라 한다. 이러한 딜레마적 상황에서 현재의 인지적 판단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 새로운 인지적 구조로 전환하여 해결해 나가는 것이 발달의 특성이다.

 

 

 

 도덕적 세계

       칸트와 이제마 비교,                                                                              Do.ol  강론 중에서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는 과학적 세계를, 실천이성비판에서는 도덕적 세계를, 판단력비판에서는 심미적 세계를 썼습니다. 순수이성이 대상으로 하는 과학적 세계는 필연의 세계죠. 그런데 실천이성은 자유의 세계입니다. 과학적 법칙의 세계는 오성의 카테고리 속에서 다 해결이 되는 세계죠. 그러나 이러한 순수이성이 대상으로 하는 과학적 세계를 벗어난 신의 존재, 영혼 불멸, 자유 의지(인간의 도덕적 의지가 자유로운 것) 등의 문제를 순수이성으로 따져 들어가면 필연적으로 이율 배반(antinomy)에 빠집니다. 예를 들면 God의 존재에 대해서 ‘신은 있다’ 해도 되고 ‘신은 없다’ 해도 다 맞다는 것이죠. 반대되는 것이 다 맞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과학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문제가 되겠죠. 이러한 문제는 순수이성에서 실천이성으로 넘어가죠. 신이 있다 라는 것은 순수이성에 의해서 증명될 길이 없지만 실천이성에 의해서 신은 있어야 한다고 요청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왜냐 하면 신이 있어야 우리가 사는 도덕적 가치의 기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실천이성은 요청의 세계예요.

 

  칸트는 이런 책을 썼죠.  이성의 범위 내에서 종교, 칸트는 종교도 감성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순수하게 이성의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대개 목사님들이 신앙을 신도들에게 불어 넣는 방식이라는 것은 감성에 호소하는 수가 많죠. 따지기 전에 무조건 믿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종교를 이성적으로 파악하는 사람들은 아니죠. 종교를 순수하게 이성적으로 파고들어 갈 적에는 칸트 같은 결론에 안 이를 수 없어요. 칸트는 사실은 무신론자예요. 그러나 신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신이 있다고 요청할 수 있는 무신론자죠. 많은 문제가 신이 있으므로 써 해결되니까.

 

  인간 사회를 살아가는데 왜 하나님이 필요하냐   하나님이 있으므로 써 많은 문제가 해결된다는 거예요. 도둑질하지 말라! 그것은 나쁘다. 이런 말은 자연세계에서는 이상한 말이죠. 호랑이들이 사는 것을 보면 다 도둑질하고 사는 것 아니예요. 동물의 세계라는 것은 도둑질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 아니예요. 자연세계의 ecology에서는 다 그렇게 돌아갑니다. 왜 도둑질하는 것은 나쁘다고 생각하게 되었느냐 서로 도둑질하다 보면 돌고 돌 텐데 그런 식보다는 도둑질하지 않고 질서를 지키고 사는 것이 그래도 도둑질을 서로 해 먹는 세상보다는 더 낫다고 생각되지 않느냐. 그러므로 도둑질을 안 하는 것이 좋다. 도둑질을 안 하는 가장 궁극적인 이유가 뭐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질서를 지켜서 사는 것이 도둑질을 하는 것보다 낫다고 할 적에 그 낫다라는 가치판단의 기준은 어디에 있느냐 라고 물어 들어가기 시작하면 나중에 God이라는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요청해서 도덕적 질서를 유지합니다.

 

  칸트는 도덕적 세계에 대해서는 어떠한 최소한 기준이 되는 절대적인 법칙을 우리는 요청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칸트는 순수이성에서 최소한 지켜야 할 법칙을 만들었어요. 1의 법칙은 나의 개인적 행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는 공리에 따라서 행동하라(도덕 관념이라는 것은 보편적인 나의 행동이 나라는 개인에 의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보편적인 법칙이 되도록 행동한다). 인간이라면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하나의 명령이에요. 이것을 정언 명령(categorical imperative)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categorical이라는 말은 무조건적이라는 의미예요. 2의 법칙은 모든 인간을 수단으로써가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나의 쾌락의 수단으로써 인간을 삼을 수 없어요. 모든 인간은 자율적 주체이고 그 자율성을 존중함에 있어서는 그 인간을 목적으로 취급해야 합니다). 3의 법칙은 목적의 왕국의 입법자로서 인간은 행동하라.

 

  이제마에게 있어서 순수이성비판의 세계는 四端의 세계이고 실천이성비판의 세계는 心의 세계로 性命입니다. 그러니까 사단의 세계는 필연의 세계예요. 성인과 중인이 공유하는 세계로 이것은 장기의 법칙의 세계죠. 칸트에게 있어서는 이 필연의 세계는 오성의 카테고리에서 결정됐지만 이제마에게 있어서 이것은 장부의 법칙으로 성인과 중인이 차이가 없는 필연의 보편적 세계입니다. 그러나 성명의 세계는 중인과 성인의 차이가 나는 세계입니다. 성인과 중인이 차이가 나는 것은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이에요.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실천이성비판의 세계는 천차만별의 세계로 개성이 발현된 세계이고 이 개성이라는 것은 선악으로 발현됩니다.

 

  이제마에게 있어서 실천이성비판의 세계는 칸트가 요청의 문제를 제기했듯이 이제마도 결국 이 문제를 요청의 문제로 해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도덕적 문제는 과학적 법칙의 대상이 될 수는 없어요. 도덕이라는 것은 타부의 세계입니다. 타부라는 것은 무엇 무엇 하지 말라는 거예요. 십계명 같은 것이 타부의 대표적인 것이요. 이 타부라는 것은 살고자 하는 문명의 가치를 위해서 이렇게 이렇게 하지 말라는 거예요. 프로이드는 타부의 체계를 슈퍼이고라고 했어요. 이 슈퍼이고는 어릴 적에 엄마로부터 오는 거예요. 엄마의 존재라는 것은 어린애를 양육하는 동시에 타부의 체계예요. 엄마는 나에게 무엇 무엇 하지 말아라 하는 가치관의 총칭입니다. 엄마가 어렸을 적에 나에게 준 타부 체계를 가지고 평생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도덕 가치라는 거예요. 프로이드의 슈퍼이고는 도덕적 자아로 번역이 됩니다. .....

 

 

 

■ 이제마의 선과 악

                                                                                        Do.ol  강론  중에서

                                                                                       선악에 관한 내용 일부발췌

……

주자학에서 말하는 명제는

人欲을 제거해서 天理를 존하여 성인이 되는 학문이다(存天理 去人欲 爲聖之學).

주자학적 패러다임과 의학적 패러다임은 인체에서 질병의 발생을 人欲으로 보는 것이죠.

天理를 存한다는 것은 의학적으로 말하면 건강한 상태가 되는 것이죠.

 

사실 성인이라는 개념을 의학적으로 말하면 건강한 사람(Healthy Men)이다.

주작학적 패러다임과 의학적 패러다임이 만나게 되는 것이 원나라 때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쇼크를 받았다. 이혼을 당했다. 억울한 일을 당했다. 그런 뒤 얼마 안 있으면 암에 걸려 죽습니다.

감정의 상태를 조절하지 못 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몸에 가장 데미지를 주는 거예요.

육체적 노동이라는 것은 회복이 쉬워요.

여태까지 현대의학에서는 싸이코라고 해서 정신적인 틀에서만 보는 것입니다.

……

 

   인간과 동물이 다른 것이 뭐냐?

 

동물은 과도하게 감정을 내지는 않는다.

예를 들자면, 개가 자기와 놀다 다른 개에게 간다고 해서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는 이런 현상은 개한테

는 없잖아요. 생리적 범위 내에서만 감정이 움직이죠.

 

동물에게도 감정(喜 怒 哀 樂)이 있어요. 그러나 과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동물에게서만 유독 생리적 범위를 넘어서 감정을 발출하는 메커니즘이 발달되어

 있는 유일한 동물입니다. 아마 이 우주상에 존재하는 희귀한 동물입니다.

이것은 생명 현상에 없었던 문제이고 DNA에도 없었던 문제이다.

 

그런데 이것이 왜 생긴 줄 아십니까?

 

이것은 언어 때문에 생긴 것이에요.

인간에게 언어만 없었다면 마누라가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화를 낼 일 없어요.

네가 나를 이렇게 배반할 수가 있느냐! 이것은 언어거든요.

언어는 항상 들어 있으니까, 슬프고 괴로워 인간을 괴롭힌다.

 

이 언어가 주는 부담으로 오는 질병이 제일 큰 질병이에요.

이렇게 명백한 것을 의학에서 안 다루고 있다는 것이 희한한 것이에요.

의학 공부를 제대로 하려면 나처럼 언어학 공부도 해야 됩니다.

 

이런 패러디임을 완성한 것은 李東垣으로부터 시작해서 朱丹溪에 이르러서 완성이 됩니다.

동양의 병리 생리의 문제가 여기서 완성이 됩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선악이라는 것은 good & evil의 번역이에요. 현대어에서 말하는 선악이라는 것

good & evil이라는 서양적인 그릇된 전제 속에서 생겨난 개념들입니다. 여러분 서양 사람들은 선악

이라는 것을 무엇으로 쉽게 생각해요? "good은 천사이고 evil은 마귀입니다." 선악에 대한 definition

 이 것 밖에는 없습니다.

 

{Principia Ethica} G.E. Moore의 대표적인 작입니다.

서구라파 역사의 윤리학의 종결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만큼 20세기에 가장 위대한 윤리학 책이라고

부르는 책이에요. 이 책을 보면 선악이라는 것을 말해 준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얘기해요.

선악이 도대체 무어냐? 원래가 선악이라는 것은 없는 거예요.

동양 사람들은 선악이라는 말이 예로부터 없었고 善에 대해서 不善이라는 말을 썼어요. 不善이라는 말

은 뭐예요? 善에 대해서 악을 실체로 파악 안 했다는 거예요. 不善이라는 것은 善하지 않은 상태일 뿐

이죠. 악이 따로 없는 거죠.

 

惡이라는 것은 美(아름다움)의 반대 개념으로 썼어요.

선악이라는 것은 인간의 몸 철학으로 본다면 궁극적으로 단 두 가지 결론밖에는 없어요.

내 몸의 좋은 것이 선이고 내 몸의 싫은 것이 악이에요.

 

그러면 선악이라는 말의 의미 체계는 "좋음 싫음" 밖에는 없어요. 이것을 여태까지 모든 학자들이 마치

선악이 있는 것처럼 오해한 것입니다. 동양인들에게는 선악의 아규먼트가 없어요. 단지 "좋음 싫음"

고 그 기준은 내 몸입니다.

 

동양 사람들에게는 서양이 말하는 evil이라는 악이 없고 惡는 전부 ""로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동양에는 '성악설'이 없고 '성오설'만 있다는 얘기다.

순자의 책을 보면 성오설입니다.

 

무슨 얘기냐면, 인간이 왜 다른 인간이 싫어할 짓을 하느냐에 대한 아규먼트입니다.

순자의 성오설은 인간의 본성이 선하냐 악하냐 하는 존재론적(ontological) 탐구 논문이 아니란 말입

니다. 왜 인간이 살면서 다른 사람이 싫어할 짓을 하는가에 대한 논의예요.

 

肺惡惡聲에서 악이라는 것이 악일 수 없죠. 나쁜 소리를 싫어한다는 애기죠.

나쁜 것을 싫어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입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용어로 혐오감이라고 할 때

 이 오자를 쓰죠. 그러니까 선오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몸의 상태나 감정을 나타내는 말에 불과하다는

얘기예요.

 

선악이라는 것이 독립해서 하늘에 천사 악마가 있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G.E. Moore

{Principia Ethica}의 내용이에요. G.E. Moore [Emotive Theary]는 모든 윤리라는 것은 감정의

발설에 불과한 것이다 라는 얘기예요. 선악은 없는 것이고 단지 기분 나쁜 것이 악(evil)이고 기분 좋은

것이 선(good)이다.

 

서양에서는 악이라는 것을 실체화시켜야 악의 주인인 악마가 있고 거기에 대해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존재가 정당화되죠. 그러니까 하나님을 존재화 시킬 수 있고 그 존재를 믿게 만들 수 있잖아요.

"네 속에 악마가 있나니 그 악마를 죽이기 위해선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이 악마를 쳐 부시게 하라!"

 

서양의 윤리적 이원주의는 극단적인 금욕주의 아니면 극단적인 방탕주의로 나타납니다. 그런 데에

반해서 동양인들은 그러한 양극단을 겪지 않고 뭔가 조절하려 합니다.

 

선악이라는 것은 없고 좋고 싫음을 잘 조절해서 살자.

섹스를 여자와 한번 했다고 해서 이 더러운 새끼! 이 더러운 년! 섹스라는 이유가 있고 상황이 있는 것

이지 이렇게 될 수는 없어요. 왜 지탄이 되느냐는 것은 주변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준다든지 관련된

사람들에게 뭔가 질투감을 나타낼 뿐 아니겠어요. 혼외정사를 했다고 해서 무지막지하게 나쁜 놈들은

 아니잖아요. 동양 사람들의 윤리 의식에는 그런 것이 없단 말이다. 그것으로 인해서 누가 얼마만큼

좋고 싫게 되었냐 그것 좀 타협하자 이런 이야기입니다.

......

 

存天理去人欲

 

……

주자학의 명제는 人欲을 버리고() 天理를 존()한다. "存天理去人欲"이 주자학의 대명제입니다.

 

예를 들면 칸트 철학에서 moral maximum이 있어요.

칸트의 정언 명령의 제1명령이 "사람을 수단으로 보지 말고 목적으로 다루라."이다.

이런 식으로 철학의 모든 것이 연역되는 대전제가 있거든요.

 

주자학의 가장 중요한 것은 "存天理去人欲"입니다.

그래서 천리를 존하고 인욕을 거한다고 할 때 천리는 상당히 형이상학적(metaphysical)인 것이고

인욕은 형이하학적인 것이겠죠.

 

그러니까 천리는 도덕적인 법칙()이 다 들어 있는 것이고

인욕은 인간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천리는 좋은 것이고 인욕은 나쁜 것이다.

 

우리가 조선조의 문화를 주자학의 문화라고 하는 것은 뭐예요? "인욕을 억누르는 문화죠."

이것이 주자학의 특징이에요.

여자들의 문제에 대해서 feminist들이 조명하는 조선조의 역사는 去人欲의 문화입니다.

 ……

 

 

 □  도덕  (채근담 에서)

 

도덕을 지키며 사는 사람은 한때 적막하고,

권세에 아부하는 자는 만고에 처량하다.

이치에 통달한 자는 물욕에서 벗어나 진리를 깨닫고,

죽은 후의 명예를 생각하니,

차라리 한때의 적막함을 당할지언정, 만고의 처량을 취하지 말라.

 

      棲守道德者 寂寞一時   依阿權勢者 凄凉萬古

      達人 觀物外之物 思身後之身   寧受一時之寂寞 毋取萬古之凄凉

 

 

 

■  착한 마음현상

                                                                                                    인경, 유식삼십송 강설, 일부발췌

           착한 마음현상은 믿음(), 부끄럼(), 미안감(), / 욕심이 없음(無貪),       성냄이 없음(無瞋), 어리석음이 없음(無痴), / 정진(), 편안함(輕安),       부지런함(不放逸), / 평등함(行捨), 해치지 아니함(不害) 등이다.      (善謂信慙愧 無貪等三根 勤安不放逸 行捨及不害)

 

 마음현상 가운데 착한 마음현상 11개를 열거한다.

 

첫째는 믿음()이다.

믿음은 실재, 덕상, 실천에 대한 깊은 이해로서 마음을 정화하는 가장 중요한 마음현상이다. 종교적인 깨달음의 출발은 바로 믿음에 있다. 실재에 대한 믿음이란 진리, 법에 대한 깊은 신뢰이다. 덕상에 대한 믿음은 바로 스승과 그 제자와 동료에 대한 믿음이다. 실천에 대한 믿음은 최고의 선을 실현할 수 있는 자신의 내적인 열정에 대한 믿음을 말한다.

 

종종 종교가 너무 맹목적인 믿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음을 본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강요하고 혹은 두려움을 불러일으켜서 협박하기도 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검증되지 않는 존재를 향한 어떤 종교적인 의식을 권장하기도 한다. 이런 믿음은 모두 삿된 믿음이다. 유식불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직접적인 경험에 의한 합리적인 이해로서의 승해(勝解)를 원인으로 삼아서 그 결과로 즐거움과 염원을 경험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로 부끄러움()은 선현들에 비추어보아서 자신의 덕행이 부족함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스스로 오만함을 꺾는데 중요한 덕성이다.

 

세 번째의 미안함()의 마음현상은 세상의 비열함과 죄악을 떨쳐내는 마음자세를 말한다. 타인과 세상에 대해서 어떤 미안함을 가지면, 참회의 마음이 발생되고, 그래서 결코 어떤 부정적인 행위를 할 수가 없게 된다.

 

넷째 욕심이 없음(無貪), 다섯째 성냄이 없음(無瞋), 여섯째 어리석음이 없음(無痴)은 이른바 탐진치(貪瞋痴) 세 가지 마음의 독이 없음을 말한다. 탐욕은 욕심으로서 세상의 유형,무형 자산에 탐착을 내는 것이요,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화를 내게 되는데, 이것이 성남이다. 반대로 어리석음은 이런 탐착의 대상이 본래 존재하지 않음을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무탐, 무진, 무치를 세 가지 선근(善根)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착한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힘이란 뜻이다.

 

일곱 번째의 정진()은 착한 마음을 일으키고 악을 끊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매우 힘겨운 일인 까닭에 경전에서 용맹한 정신을 요구한다.

 

여덟 번째의 부지런함(不放逸)은 죄업을 제거하기 위해서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악을 근절하고 선을 닦는 마음현상이다. 그래서 마음이 거친 파도처럼 흔들리지 않고 편안함에 이름을 경안(輕安)이라 한다. 번뇌는 마음을 무겁게 하지만 착한 마음은 마음을 가볍게 만들고 조화롭게 만든다.

 

열 번째의 평등함(行捨)은 삿되지 않는 공평함을 말한다.

선정에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마음의 평정, 마음의 정직으로서 의도하거나 조작하는 마음이 사라진 마음을 말한다. 자비(), 공감(), 기쁨(), 평정()의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四無量心)에서 가장 중요한 마음의 평정이 바로 이것이다. 자비, 공감, 기쁨에 마음의 평정이 없다면, 그것을 감정적인 늪에 빠지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열한 번째는 해치지 아니함(不害)이다.

이것은 살아있는 모든 목숨을 해치지 않는 마음을 말한다.

 

 

 

■  근본 번뇌의 마음현상

 

                                                                                                    인경, 유식삼십송 강설, 일부발췌

     번뇌의 마음현상은 탐욕, 성냄 / 어리석음, 거만, 의심, 잘못된 견해 등이고 /      뒤따르는 번뇌는 분노, 원망, 죄를 감추는 것, 기만 등이다     (煩惱謂貪瞋 癡慢疑惡見 隨煩惱謂忿 恨覆惱嫉)

 

먼저 탐욕(), 성냄(), 어리석음(), 거만(), 의심(), 잘못된 견해(惡見) 6가지는 모든 번뇌의 근본적인 뿌리인 까닭에 근본번뇌라고 한다.

 

탐욕()은 모든 집착의 근본으로써 정신적인 측면이나 물질적인 관점에서 제어가 어렵다. 실제로 탐욕이 없으면 생존하기가 어렵고, 실존은 바로 이런 애착 위에 존재한다고 할 수가 있다. 더구나 어린 시절에 엄마와 같은 의미 있는 타자와의 안정적인 관계가 결여된 경우에 평생을 공허감 속에서 힘들어하는 사례를 볼 때, 애착의 문제는 종교나 심리치료에서 필연적으로 직면해야하는 핵심된 과제이다.

 

성냄()은 애착의 관계에서 만족하지 못하면 대상을 공격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사람은 공격을 인간의 본능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공격은 탐욕, 애착과의 관계에서 발생된다. 자신이 원하는 대상을 이루지 못한 경우에, 성남과 공격은 일어난다. 성남은 자기방어적인 성격이 강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자기 자신을 향한 공격으로 바뀌기도 한다.

 

어리석음()은 반복적으로 탐욕과 성냄이 좌절되면서 발생된다.

세상에 대한 관심을 끊고 무표정한 상태로 자신 속으로 침잠한다. 자신과 세상에 대한 어떤 분별도 거절하면서, 더 이상 상처받기를 거부하면서, 암울한 골방에 스스로를 밀어 넣는다. 그렇지만, 종교적인 의미로는 어리석음은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관찰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알아차리고 지켜보는 지혜의 작용이 발생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거만함()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우월함을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거만함의 그림자는 열등감이다.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은 그것을 방어할 목적으로 목에 힘을 주고, 스스로의 결핍감을 보완할 심리적인 노력으로 과장된 허위의식을 만들어낸다.

 

의심()은 심리학적으로는 안정망이 불안할 때 생겨난다.

과연 이곳은 안전한가? 이곳에서 얼마나 오래 머물 수가 있는가? 자신의 생존에 대한 안정망을 구축할 목 적으로 사용된다. 다시 말하면 확실하고 명철한 근거를 확보하려는 마음현상이다. 하지만 종교적인 의미에서는 진리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경우를 말한다.

 

잘못된 견해(惡見)은 사물의 본질을 잘 관찰하여 말하지 않고, 자기 식으로 상상하여 자기와 세상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내놓고 주장하고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잘못된 믿음을 낳고, 결국은 사물의 본질을 통찰하는데 방해가 된다.

 

그래서 이것들은 근본적인 번뇌가 된다.

 

 

 

 

 

■  습기와 종자

 

                                                                                                     인경, 유식삼십송 강설, 일부발췌

      일체 행위의 습기로 말미암아서 2가지 관점의 습기가 갖추어지고       앞의 이숙이 다하면, 다시 다른 이숙이 발생된다.        (由諸業習氣 二取習氣俱 前異熟旣盡 復生餘異熟)

 

행위()과 습기(習氣)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행위란 가치와 관련된 행동을 말한다. 아무런 의미가 없이 반사적인 운동은 업, 행위가 아니다.

 

행위란 선악의 가치에 의해서 마음에 의한, 의도에서 발생된 행동을 말한다. 심리학적인 용어로는 의도, 소망, 갈망 등과 연결된 행위를 말한다. 이런 행동은 어떤 문화적인 배경 아래서 반복됨으로써 학습 되어 진 경우가 많다. 이럴 때는 ‘습관화된 기운’, 혹은 ‘학습된 힘’이란 의미에서 습기(習氣)라고 한다. 이것은 아뢰야식에 저장된 관계로 다시 반복되는 성격을 가진다.

 

그런데 습기는 상견(相見), 명색(名色), 심심소(心心所), 본말(本末) 등의 2가지 관점을 포섭한다. 습기는 애착에 의한 경험정보인 까닭에 경험된 측면과 경험하는 측면이 존재하고, 그것은 심리적인 측면과 물질적인 측면이 있을 수가 있으며, 마음과 그에 상응하는 마음현상에서 함께 작동되고, 근본적으로 제8식에서 드러난 결과로서 다른 의식에 변화를 가지고 온 까닭에 본말이 있게 된다.

 

이런 습기를 종자라고도 부르는데, 종자는 싹이 돋아날 잠재적인 힘을 가진 까닭이다. 이 습기는 3종류가 있다.

 

하나는 언어적인 습기이다.

사실 언어는 반복적으로 반응함으로써 학습된다. 정확히는 낱말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익숙해지면서 자동적인 반응의 수준으로 학습된 것이다.

 

두 번째의 습기는 자아의식이다.

이것은 ‘나’라는 의식과 ‘나의 것’이라는 의식을 포함한다. 이것은 제7식에 의한 생득적인 자아의식과 제6식에 의한 분별로서의 자아의식으로 분류된다. 전자는 독립적이고 본질적인 자아의식을 말한다. 후자는 타자와의 비교를 통한 자기를 가리킨다. 타자와의 비교에 의한 분별적 자아의식은 견도위(見道位)에서 소멸되고, 독립적인 자아의식은 다음 단계인 수습위(修習位)에서 소멸된다.

 

세 번째의 습기는 선악의 행위를 가리킨다.

애착에 의한 행위의 습기와, 착하지 못한 행위의 습기로 구분된다.

 

현대 심리학에서 종자, 혹은 습기와 가장 가까운 개념은 ‘도식(schema)’이다. 도식은 어린 시절에 형성되며, 언어적인 측면과 관련되고,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주며, 역기능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식심리학에서 이것을 폭류라고 했다.

폭류에 휩쓸리면 어쩔 수 없이 끌려다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산과 들판을 넘치게 할 뿐만 아니라, 마음을 물들게 한다. 폭류는 그 물결이 서로 상속하여 12연기처럼 미혹과 고통의 악순환에 빠지게 한다. 이를테면 접촉으로부터 느낌이 발생되고, 이 느낌으로부터 애착과 혐오가 발생된다. 즐거운 느낌에는 탐착이 불쾌한 느낌에는 혐오가 일어난다. 다시 탐착은 집착을 발생시키고 대상을 끝내는 소유하게 하고, 혐오는 회피와 도피를 발생시키고 성남과 짜증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것들이 상호 의존되어서 끊임없는 고통을 만들어낸다 

 

 

 

 

■ 덕의 감상적 표현        

                                                                 .승환, 고려대 철학과 교수                                                                "유가 전통에서 덕의 감상적 표현에 관하여" 중 일부분 발췌

□ 동양의‘언어 최소주의’전통과 ‘몸의 언어’

 

……

공자는 ‘교묘한 말은 덕을 어지럽힌다’고 보고, ‘말은 뜻이 전달되면 그만이다’고 말한다. , 공자는 ‘말의 정교함(辭巧)’보다는 ‘의미의 전달’에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 맹자는 ‘시()를 읽을 때, 하나 하나의 글자로써 말을 그르쳐서는 안 되며, 한 구 한 구의 말로써 뜻을 그르쳐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 언어의 표피에 떠도는 자구(字句)에 집착하지 말고 발화자(작자)의 원래 의도를 파악해 내는 일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는 뜻이다. 『주역』에서는 공자의 말에 가탁 하여, ‘글은 말을 다 표현해 주지 못하고, 말은 뜻을 다 표현해 주지 못한다’고 적고 있다. 유가적 관점에서 볼 때, 문어(written language), 구어(verbal language), 그리고 의미(meaning)의 가치 서열은 뜻()> ()> ()의 순으로 정리될 수 있다.

 

노자(老子)는 ‘진정으로 위대한 웅변은 마치 더듬거리는 것과 같다(大辯若訥)’고 하여, ‘말을 통하지 않는 가르침(不言之敎)’을 숭상한다. 노자는 또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知者不言, 言者不知), ‘믿을 만한 말은 아름답지 아니하고, 아름다운 말은 믿을 만하지 못하다(信言不美, 美言不信), ‘선한 자는 변론하지 아니하고, 변론하는 자는 선하지 못하다(善者不辯, 辯者不善)’고 하여 언어에 대한 강렬한 불신감을 토로한다. 장자(莊子) 역시, ‘언어의 궁극 목적은 의미의 전달에 있다. 의미를 얻고 나면 언어를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

천태(天台). 화엄(華嚴)과 더불어 동양 불교의 삼족(三足)을 이루는 선종(禪宗)에서는 언어나 문자를 통하지 않고 즉각적인 깨달음을 얻는 ‘불립문자(不立文字)’를 견성(見性)에 이르는 최선의 방법으로 채택한다.

 

언어에 대한 불신은 상대적으로 눈빛. 낯빛. 몸짓과 같은 ‘비언어적 기호체계’를 의사소통의 대안적 기제로 채택하게 만든다. ‘몸’은 ‘말’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실하기 때문이다. ……

 

 

□ 정신/육체의 통일로서의 ‘몸’

 

유가 전통에서는 ‘수신(修身)’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수신’은 ‘몸()’을 ‘닦는다()’는 뜻이다. 왜 유가에서는 수양을 말하면서 ‘마음’ 대신 ‘몸’의 수양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유가 전통에서 ‘몸’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몸’의 동양적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동양 바깥의 지적 전통에서의 정신과 육체의 문제로부터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왜냐하면 나는 거울을 통해서만 나의 얼굴을 볼 수 있듯이, 동양적인 것은 동양적이 아닌 것에 비추어 볼 때 그 특징이 한층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근대 서양의 이원론적 전통에서는 ‘나(self)’를 정신과 육체로 나누어서 고찰한다. ‘나’를 정신과 육체로 나누어서 고찰하려는 태도는 존재의 세계를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으로 범주 짓는 형이상학적 이분법과 뿌리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존재의 세계를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으로 나누려는 형이상학적 이원론은 여기에 대응하는 인간의 지적 능력도 각기 이성과 감성으로 구분할 뿐 아니라, 나아가서 인간 자신까지도 ‘생각하는 것’ 의 나와 ‘물질적인 것’ 의 나로 구분한다.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 아래서 몸은 자연과학적 실험과 관찰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마음은 심리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고착되게 된다.

 

이원론적 전통에서 ‘몸’은 생겼다 없어지는 것, 우연적인 것, 저급한 것으로 여겨지고, 오직 ‘마음’ 혹은 ‘이성. 영혼. 정신’만이 영원한 것, 필연적인 것,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이러한 지적 전통에 따르면, 참다운 인식을 보장해 주는 것은 육체에서 독립한 순수 이성뿐이고, 이성이 제거된 육체는 불확실하고 일시적이며 상대적인 감각자료를 수용하는 기관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원론적 전통에서의 육체는 아예 철학적 관심에서 제외되거나 무시되어 버리고, 아니면 암묵적으로 방치되고 만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 의 나와 ‘물질적인 것’의 나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한 ‘나 = 생각하는 주체 = 이성’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나’와 ‘몸’ 사이에는 이어질 수 없는 정신분열증적 단절이 생기게 된다.

 

과연 몸과 마음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과연 생각하는 주체로서의 마음만이 참된 나의 모습이며, 몸은 ‘기수를 태우고 다니는 말’이나 ‘선장을 태우고 다니는 배’ 혹은 ‘영혼이 갇혀있는 감옥’에 불과한 것일까? 과연 나의 몸은 다만 물리화학적 실험의 대상이 되는 ‘살덩어리’에 불과한 것일까? 동양의 지적 전통은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아무런 답변도 해줄 수가 없다. 만약 동양철학에게서 몸과 마음의 관계에 대한 대답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애당초 잘못 던져진 물음일 것이다.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신봉하지 않는 사람에게 ‘정신/물질’ 혹은 ‘마음/몸’ 사이의 관계를 묻는 일은, 마치 영혼의 존재를 믿는 사람에게 영혼의 무게가 몇 그램이냐고 묻는 것과 같은 범주착오일 것이다.

 

맹자에게 있어서 마음()의 본질은 기()이고, 장자에게도 정신()이란 정신적 속성을 띠는 ‘신기(神氣)’에서 드러난 '현상'이며, 범진(范縝)에 있어서도 정신()은 결코 육체()와 분리될 수 없는 한가지 것으로, 촛농이 다하면 불꽃도 사라지듯 육체()가 시들면 정신()도 함께 사라지게 된다. 성리학자들에게 있어서도 마음()은 기()의 작용에 수반된 현상이며, ()/() 역시 혼()/()과 마찬가지로 기의 작용에 수반된 ‘현상’에 불과하다. 동양의 지적 전통에 정신()/육체()의 현상론적 ‘속성 이원론’은 있을지언정 양자를 두 개의 실체로 간주하려는 ‘실체 이원론’은 찾아볼 수 없다. ……

 

동양적 전통에서 볼 때 ‘나’란 육체와 정신이 분리되지 않은 ‘몸()’ 그 자체이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전인 『이아 爾雅』 「석고 釋 」에서는 ‘몸()’은 곧 ‘나()’라고 풀이하고 있으며, 『대학』에서는 도덕적 수양을 말하면서 ‘마음 수양(修心)’ 대신 ‘몸 수양(修身)’을 이야기한다. 『삼국지』에서 장비는 눈을 부릅뜨고 “이 ‘몸()’은 장익덕이다! 이리 나와서 생사를 결판내자!”하고 외친다. 또 공자는 “진실로 제 ‘몸()’을 바르게 하면 정치를 행함에 어려울 것이 무엇이며, 제 ‘몸()’을 바르게 하지 못하면 백성을 어떻게 바르게 하리요?”라고 반문한다. 맹자도, “한 아름이나 되는 오동나무도 사람이 기르려고만 하면 기르는 방법을 알게 되는데, 자기 ‘몸()’에 이르러서는 그 기르는 방법을 알지 못하니 어찌 몸 사랑(愛身)이 나무사랑보다 못하단 말인가!”하고 한탄한다. 순자도 “예는 ‘몸()’을 바르게 하는 소이이며 …… 스승은 ‘몸()’으로 의표를 삼는다”고 말한다. 동양의 전통에서 볼 때 ‘나’는 곧 ‘몸’이다.

 

□ 기호로서의 ‘몸’

 

‘나’는 존재하는가?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어떻게 확인될 수 있는 것인가?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했지만, 유학자들은 아마도 ‘나는 드러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했을 것이다. 유가 전통에서 나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는 것은 몸과 유리된 순수 의식이 아니라, 나의 ‘몸’을 바라보는 공동체 안의 상호주관적 시선이다.

 

『대학大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소인이 혼자 있을 때에 불선한 짓을 하되 이르지 못할 곳이 없이하다가, 군자를 보고나선 슬쩍 시침을 떼고, 그 불선을 가리고 선을 드러내 보이려고 하지만, 남이 자기를 알아봄이 마치 그 폐와 간을 뚫어 보듯 한 데서야 그 무슨 소용이랴? 이런 것을 일러 '성실하면 밖으로 나타난다'고 하나니, 이러한 때문에 군자는 반드시 그 안으로 깊숙한 곳을 조심한다.

 

증자가 말했으니, "열 눈이 보는 바이오, 열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 그 삼엄(森嚴)함이여!"

 

유가 전통에서 ‘나’의 존재는 나의 순수 의식에 의하여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나’를 주시하는 타인의 시선, 즉 ‘나’를 향한 타인의 관심에 의해 확인된다. , ‘나는 생각한다’가 아니라 ‘나는 드러난다’이다. 맹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군자가 본성으로 지니는 인 의 예 지는 마음에 뿌리박고 있어서, 그것이 빛으로 발하면 얼굴에 윤택하게 나타나고, 등에 넘쳐흐르고 사체에 뻗어나니, 사체는 말하지 않아도 그것을 알게 해준다.

 

유가 전통에서는 나 혼자만의 순수 의식이 진리를 담보해 주지 않는다. 행위나 표현을 통해 드러나지 않고 영혼 속에 깊이 감추어 둘 수 있는 순수한 ‘내면적 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덕, 나의 감정, 나의 의지는 반드시 행위와 몸짓을 통하여 공동체의 상호주관적 시선에 드러날 때 그 존재가 확인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나의 ‘몸’뿐 아니라 나의 ‘마음’ 역시 공동체의 상호주관적 시선에 공개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이다. 나의 ‘몸’은 공동체 구성원의 ‘독해(decoding)’를 기다리는 ‘기표’가 되며, 내면의 덕과 감정은 이에 상응하는 ‘기의’가 된다. 유가 전통에 의하면, 공동체의 문법에서 벗어난 혼자만의 사적 언어는 애당초 불가능할 뿐 아니라,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개인이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가 공동체의 문법에 의해 규정되듯이, 개인이 드러내는 몸짓의 의미 역시 공동체의 ‘약호 체계(code system)'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나’는 어떻게 드러나는가? 다시 말해서 나의 ‘마음’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정신과 육체를 따로 떼어서 생각하는 이원론적 전통에서 ‘나’는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나의 ‘살덩어리’ 만이 드러날 따름이다. 심리철학자들이 주제로 삼고 있는 “다른 사람의 마음은 존재하는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들은 물음의 밑바닥에 몸/마음의 이원론을 전제로 깔고 있다. ……

 

정신과 육체의 통일체로서의 ‘몸’을 생각하는 유가 전통에서는, 몸은 의식의 드러남이다. 의식은 몸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낸다. 증자가 말한 것처럼 “열 눈이 바라보고 열 손가락이 가리킬 때 소인이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그의 ‘몸’이, 나아가서는 그 ‘자신’이 ‘기호화’ 되어 밖으로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육체와 분리될 수 있는 데카르트의 ‘나’는 투명인간으로 화하여 남의 시선에서 숨을 수도 있겠지만, 몸과 마음을 분리시켜 생각하지 않는 유가전통의 ‘나’는 남의 시선으로부터 숨을 수가 없다.

……

 

몸과 마음이 서로 다른 실체라고 이야기하는 데카르트마저도, 몸에 상처가 나면 고통을 느끼고 고통을 생각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몸과 마음의 상호 침투성을 고백한다. 또 뇌→ 중추신경 → 동공의 확대라는 생리적 사건으로 ‘눈빛’을 설명해 내려는 일원론자들도 사랑하는 연인의 애잔한 눈빛을 보고 자기를 향한 그녀의 뜨거운 감정을 감지해 낸다.

 

일원론자이거나 이원론자이건, ‘마음’을 탐구하는 근대 서양철학자들은 연구실 안에서의 ‘이성적 사고’와 연구실 밖에서의 ‘감성적 체험’을 철저하게 분리한다. 그리고 연구실 안에서의 이성적인 사고만이 진리이며, 일상생활에서의 감성적 체험은 속견이라고 단정짓는다. 근대 서양 철학자들에게는 기이하리만큼 이상한 편견이 있다. 그들은 생활세계 안에서의 일상적 체험에 대해서는 그것이 언제나 진실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도 항상 속견(doxa)으로 단정하고, 과학적 지식(인과적 설명)에 대해서는 그것이 다른 설명 모델에 의해 내일 당장 뒤바뀐다 할지라도 항상 진리(episteme)로 여기려는 습성이 있다.

 

맹자의 눈동자/마음에 관한 진술은 물론 심리철학 식의 인과적 설명에 의해서 증명도 반박도 될 수 없다. 여기서 맹자는 증명도 반박도 될 수 없는 눈동자/마음의 관계를 인과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상대방의 ‘몸’ - 그것이 눈빛이건 낯빛이건 아니면 몸짓이건 - 을 통해서만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이해’란 유비추리(analogical inference)와 같은 매개적이고 인과적인 사유 이전의 직접적이고 감성적인 체험을 가리킨다. 비록 존재론적으로는 한 사람의 내면성(감정과 의지)이 외면성(눈빛과 낯빛)에 우선한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의 내면성에 대한 이해는 전적으로 밖으로 정시된 사상(事象), 즉 눈빛과 낯빛이라는 ‘원본적 소여’에서 출발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맹자는 ‘몸’을 통하지 않고서는 ‘나’를 드러낼 수 없으며, ‘몸’을 통하지 않고서는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마치 ‘기표’없는 ‘기의’를 생각할 수 없듯이, ‘몸’을 경유하지 않는 ‘마음’은 영원히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맹자에게서 볼 수 있듯이 유가전통에서의 ‘몸’은 자아와 세계와의 ‘교통방식’이다.

 

□ ‘표현’의 낯빛과, ‘행위’의 낯빛

 

우리의 감정과 의지가 ‘몸’을 통하여 밖으로 드러난다고 하면, 과연 이렇게 ‘드러난 것’은 생리적 증상이 신체를 통하여 드러난 것과 어떻게 구별될 수 있으며, 또 속마음을 꾸며 가식적으로 드러낸 것과는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는가? , 맹자가 말하는 마음이 올바른 사람의 맑은 눈빛은 올바름/그름의 구분조차 없는 어린 아이의 맑은 눈빛과 어떻게 구별될 수 있으며, 또 사악한 마녀가 꾸며낸 선한 눈빛과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는 것일까?

 

플레쓰너(Helmuth Plessner)는 낯빛이나 몸짓과 같은 몸적 표현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구분한다. 1)홍조와 창백함 기침과 재채기 땀과 구역질 등과 같이 의식이 개입되지 않은 생리적 혹은 심신병리적(psychosomatic) 반응들. 2)말과 행위처럼 의식이 개입되어 있고 우리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낯빛과 몸짓. 플레쓰너는 이러한 낯빛과 몸짓을 ‘행위(handlung)’라고 부른다. 3)웃음과 울음처럼 의식이 개입되어 있으면서도 우리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낯빛과 몸짓. 플레쓰너는 이러한 종류의 낯빛과 몸짓을 ‘표현(ausdruck)’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분류에 따른다면, 비만증으로 인한 동탁의 번지레한 낯빛, 악화된 금창(金瘡) 때문에 나타난 주유의 파리한 낯빛, 노년에 악화된 뇌병으로 시달리는 조조의 초췌한 낯빛은 모두 의식이 개입되지 않은 생리적 혹은 심신병리적 ‘증상’들이다. 이와 달리, 미인계로 여포를 유인하려는 초선의 수심에 찬 낯빛, 독이 스민 뼈를 긁어내도록 화타에게 팔을 맡긴 채 바둑에 몰두하는 관우의 태연한 낯빛, 장판교에서 단창필마로 조조의 십만대군과 대적하는 장비의 기세 등등한 낯빛은 모두 의식이 개입된 자발적 ‘행위’들이다. 그러나, 삼고초려 끝에 공명을 얻은 유비의 환한 낯빛, 관우의 참수 소식을 전해들은 유비의 참담한 낯빛, 차 한잔이 식기도 전에 적장의 목을 베고 돌아오는 관우의 의기양양한 낯빛 등은 모두 의식이 개입되어 있으나 비자발적(involuntary)인 ‘표현’들이다.

 

맹자가 말하는 올바른 사람의 맑은 눈빛은 플레쓰너가 말하는 ‘표현(ausdruck)’처럼 내면의 감정과 의지가 자연스럽게 밖으로 표출된 것을 말한다. 이러한 눈빛은 지향성이 결여된 생리적 ‘증상’도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의도적이고 자발적인 ‘행위’도 아니다. 이러한 눈빛은, 한 사람의 선을 향한 감정과 의지가 내부에서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을 때 내면세계를 감싸는 껍질을 뚫고 외부세계로 돌출하여 밖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렇게, 단순히 지향적 의식작용으로만 머물러 있던 감정과 의지는 낯빛과 몸짓을 통하여 ‘외화(外化)’ 또는 ‘육화(肉化)’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게 되며, 따라서 지각 가능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오르테가는 ‘몸’을 ‘표현의 장(field of expressiveness)’이라 하고, ‘눈’을 ‘영혼의 창’이라고 부른다. 플레쓰너도 오르테가와 비슷하게 얼굴을 영혼의 창이라고 말한다. 오르테가와 플레쓰너의 ‘표현’과 마찬가지로, 맹자가 말하는 맑은 눈동자는 생리적 증상과는 구별되면서, 의도적으로 드러내려 하지도 않아도 저절로 드러나는, 감정의 자연스런 ‘흘러 내비침(流露)’을 말한다. 『예기』에서는 이렇게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몸을 통하여 드러나는 덕성(감정 의지)의 자연스런 유로(流露)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효자의 제사는 (그 낯빛을 보고) 알 수 있다. 자기의 위치에 섬에 공경하는 낯으로 허리를 숙이고, 신주 앞에 나아감에 공경스럽고 기쁜 빛이 감돌며, 제물을 올림에 공경스러우면서 부모님의 혼백이 와서 드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 같고, 자기 자리로 물러나서 제자리에 섬에 곧 부모의 명을 받들려 하는 것 같고, 제물을 철거하고 물러날 때까지도 공경하고 삼가는 빛이 얼굴에서 사라지지 않으면 효자의 제사이다.

 

『예기』에서 말하는 효자의 낯빛은 생리적인 증상과는 분명히 다르면서, 그렇다고 해서 의도적으로 드러낸 것도 아닌, 내면 감정의 자연스런 ‘흘러 내비침(流露)’를 의미한다. 『예기』에서는 자발적으로 표출하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몸을 통하여 드러나는 인간의 기본 감정으로 기쁨 노여움 슬픔 두려움 사랑 싫어함 욕망(喜 怒 哀 懼愛惡 欲) 등의 일곱 가지를 들고 있다. 『예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러한 일곱 가지 감정들은 그 자체에 이미 ‘느낌의 대상’과 ‘느낄 수 있는 상황’ 그리고 ‘사태’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무런 지향성(intentionality)도 지니지 못한 무드나 센티멘탈리티와 구별된다. 이러한 감정들은 나아가서 ‘판단’의 한 형태이다. 예를 들면, 노여움()은 ‘비난 받을 만함’에 대한 ‘판단’을 내포하고 있고, 사랑()과 욕망()은 가치의 높낮이에 관한 ‘평가’를 내포하고 있으며, 두려움()은 예상되는 위험과 손상에 대한 ‘예측’을 내포하고 있다. ‘개념’과 ‘판단’이 ‘이성(Reason)’을 구성하듯이, ‘감정’에도 이미 이러한 이성적 요소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맹자』가 인간의 본성으로 제시하는 네 가지 도덕 감정(四端)은 『예기』의 일곱 가지 감정에 비해서, 한층 더 능동적이고 가치지향적인 성격을 갖는다. 맹자의 ‘측은하게 느끼는 마음(惻隱之心), ‘악을 부끄러워하고 싫어하는 마음(羞惡之心), ‘사양하고 양보하는 마음(辭讓之心),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是非之心)’ 등은 가치의 높낮이를 구별하여 선호/배격할 수 있는 가치지향적 감정들이다. 이러한 감정들 안에는 이미 가치의 높낮이에 대한 개념과 판단이 깃들어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맹자의 ‘사단’은 비이성적인 느낌이 아니라 그 안에 이미 이성을 잉태하고 있는 ‘합리적 감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감정들은 눈빛과 낯빛을 통하여 ‘육화’ 되어 밖으로 드러남으로써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보여지게 되고 읽혀지게 된다.

 

  눈빛 낯빛 몸짓의 사회적 의미

 

눈빛. 낯빛. 몸짓은 한 사람의 내면적 상태(감정. 의지)를 드러내 주는 ‘기호’일 뿐 아니라, 발화행위와 마찬가지로 ‘의사소통’의 매체가 된다. 로빈슨 크루소의 위엄 있는 낯빛은 그가 무인도에 혼자 있는 동안에는 아무런 의미도 지닐 수 없다. 그의 위엄 있는 낯빛은 프라이데이라는 노예가 섬에 상륙하면서부터 의미를 가진다. 프라이데이는 주인의 위엄 있는 낯빛을 통해 더 많은 충성을 요구하는 주인의 의도를 읽어낸다. 이런 의미에서 ‘낯빛’은 ‘비언어적 의사소통(non-verbal communication)’의 중요한 수단이 된다. ……

 

권력은 명령과 같은 명시적 언어행위를 통해서만 행사되는 것은 아니며, 복종 역시 명시적인 순종의 언어를 통해서만 수행되는 것은 아니다. 눈빛과 낯빛을 통한 비강제적이고 비명시적인 형태의 지배/복종 관계가 오히려 강제적이고 명시적인 지배/복종 관계보다 더 일상적이고 빈번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가 전통에서 지배자의 낯빛과 복종자의 낯빛을 이야기할 때, 단순히 ‘물리적 권력’을 염두에 둔 형식적 혹은 가식적 낯빛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지배자의 지위에 있는 사람은 위엄 있는 낯빛을 내보이기 전에 그 지위에 합당한 ‘덕()’을 미리 내면에 갖추어야 하며, 내면에 ‘덕’이 충만할 때 저절로 ‘낯빛’을 통하여 밖으로 내비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종속의 지위에 있는 사람도 무조건 아첨 떠는 낯빛을 꾸며내서는 안되며, 진정으로 존경하는 마음이 내면에 갖추어질 때 존경심은 낯빛을 통하여 저절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학』에서는 “마음이 바르게 된 연후에 몸이 닦이게 된다”고 하고, 공자는 "아양 떠는 말과 꾸민 낯빛에는 진정한 인()이 드물다”고 한 것이다. 『예기』에서는 군자의 내면에 쌓인 덕이 낯빛을 통하여 밖으로 드러날 때 백성들은 이를 보고 훈화되어 저절로 승복하게 된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음악은 마음속에서 발동하는 것이고, 예는 밖에서 발동하는 것이다. 음악의 궁극은 화(), 예의 궁극은 순()이다. 군자가 마음속으로 화락하고 밖으로 드러난 외모가 공순하면, 백성들은 그 낯빛(顔色)을 보고 훈화되어 서로 다투지 않으며, 그 용모를 보고 훈화되어 태만하거나 방탕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므로 덕의 빛이 (군자의) 마음속에서 움직이면 백성은 복종하지 않음이 없으며, (군자가 행위를 통하여) 도리를 밖으로 펼친다면 백성은 승복하여 따른다. 그러므로 “예악의 도를 체득하여 천하에 실시한다면 천하를 다스리는 일이 조금도 어렵지 않다”고 한 것이다.

 

따라서 군자에게는 거시적 행위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의 사소한 눈빛 낯빛 몸짓, 나아가서는 심지어 의복과 말투까지도 모두 ‘수신(修身)’의 대상이 되며, 또 이러한 몸적 표현은 다른 사람을 감화시키는 수단이 된다.

 

『예기』의 다음 구절을 보자.

 

성인이 행위의 규범을 제정함에 있어서 …… 예로써 절제하고, 신의로써 사귀고, 낯빛으로 드러내고, 의복으로 훈화하고, 친구로써 서로 격려하여 극에 이르게 한다 …… 이런 까닭에 군자가 그 (지위에 맞는) ‘옷’을 입었을 때는 ‘낯빛’으로 가다듬어 아름답게 하고, 이미 그 ‘낯빛’이 갖추어지면 군자의 ‘언사’로써 가다듬어 더욱 아름답게 하고, 이미 그 언사를 이룩하였다면 군자의 ‘덕’으로써 충실하게 한다. 그러므로 그 ‘옷’을 입고서 거기에 어울리는 ‘낯빛’이 없음을 부끄럽게 여기고, 그 ‘낯빛’이 의젓함에 거기에 어울리는 ‘언사’가 없음을 부끄럽게 여기고, 그 ‘언사’가 있음에 거기에 어울리는 ‘덕’이 없음을 부끄러워하고, 그 ‘덕’이 있음에 거기에 어울리는 ‘행위’가 없음을 부끄러워한다.

 

『예기』에 따르면, 눈빛과 낯빛뿐 아니라 심지어 의복 역시 한 사람의 정신성이 밖으로 드러난 것이다. 즉 유가적 관점에서 본다면 의복은 단순히 몸의 보호나 보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위를 드러내 주는 기호이며, 나아가서는 자신의 정신성(, 감정과 의지)까지 나타내 주는 ‘의미작용’이다. 『예기』에서는 정신성이 결여된 가식적 꾸밈으로서의 의복을 경계한다. 그 옷을 입었을 때는 반드시 거기에 합당한 덕을 내면에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외면’과 ‘내면’의 일치를 공자는 “표현과 바탕의 일치(文質彬彬)”라는 말로 표현한다.

 

유가에서 이야기하는 눈빛.낯빛. 몸짓. 의복 등은 ‘사회적 약호 체계’이다. 사회적 약호는 ‘신체 언어(body language)’를 비롯한 여러 가지 양상의 ‘비언어적 기호(nonverbal sign)’들로 구성된다. 이들 비언어적 약호는 한 개인의 신분이나 지위를 나타내 주는 약호로부터 시작해서 예의범절의 규칙, 신분과 위치에 알맞은 행동거지, 의상의 착용 등 개인이 다른 사람과 갖는 관계에서 어떻게 행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인간관계의 규칙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의식이나 축제와 같이 개인이 속해 있는 집단에로의 소속감과 유대감을 복 돋아 주는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의 수단 등을 포함한다.

 

유가 전통에서의 눈빛 낯빛 몸짓은 권력관계뿐 아니라 도덕관계를 나타내 주는 복합적 기호체계이다. 『예기』에서는 공동체 안에서 전개되는 다양한 도덕적 상황에서 개인들은 어떻게 각 상황에 적합한 눈빛 낯빛 몸짓으로 처신해야 하는지 예시하고 있다. 한 개인이 다양한 도덕적 상황에 직면하여 각 상황에 적합한 눈빛 낯빛 몸짓을 자연스럽게 표출해 내기 위해서는, 고도로 세련된 표현감각과 독해감각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감각과 독해감각을 익히기 위해서는, 어떤 상황에 어떤 낯빛이 적합한지 즉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직관 능력이 요구된다. ……

 

공자가 인생의 최후 경지로 말한 ‘예술적 경지에서 노닌다(游於藝)’라는 말은 이러한 경지를 말한 것일 것이다. 유가 윤리의 궁극 경지는 행위를 ‘규칙’에 맞게 재단해내는 일이 아니라, ‘몸’을 통하여 타인의 모범이 될 수 있는 ‘전범’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경지이다. 기호의 관습화에 의해 문화는 생겨난다. 관습화와 체화가 잘 되어 있을수록 기호의 사용은 무의식적인 수준에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이런 의미에서 군자의 ‘몸’은 타인에게 도덕적 전범이 된다.

 

감정(의지)의 표출이 더 이상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행위’가 아니라 저절로 내비치는 ‘표현’처럼 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수양을 통한 감정의 체현이 요청된다. 따라서, 내면의 정심(正心)과 성의(誠意)는 물론이고, 일상 생활에서의 눈빛과 낯빛, 걸음걸이나 손의 모양, 심지어 숨쉬는 모양까지 모두가 유가적 ‘수신(修身)’의 대상이 된다.

 

군자의 낯빛은 여유 있고 침착하게 하여야 한다. 존경하는 이를 뵐 때는 삼가고 공손하게 해야 한다. 군자의 걷는 모양은 묵직하게, 손의 모양은 공손하게, 눈의 시선은 단정하게, 입의 모양은 함부로 말하지 않으려는 듯하게, 말소리는 나직하게, 머리 모양은 곧게, 숨은 들리지 않는 듯하게, 선 모양은 덕이 충만한 듯하게, 낯빛은 엄숙하게 하고, 앉을 때는 시()처럼 바로 앉는다.

 

『예기』에 나오는 이러한 아홉 가지 몸적 표현은 ‘구용(九容)’이라고 불리며, 유가 전통에서 두고두고 ‘수신(修身)’의 지침이 되어 왔다. 현대인들이 스킨 케어나 바디 빌딩과 같은 ‘살덩어리 가꾸기’에 치중한다면, 유학자들은 정신(감정, 의지)과 육체의 통합체로서의 ‘몸 가꾸기’에 치중해 온 것이다.

 

 

  도가의 유가적 ‘낯빛’ 비판

 

도가는 유가적 눈빛 낯빛 몸짓에 대하여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낸다. 도가의 관점에서 본다면, 유가의 ‘수신(修身)’을 통하여 다듬어진 ‘예()’에 맞는 눈빛 낯빛 몸짓은 인간이 다른 동물과 함께 공유하는 자연스런 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낸 문화적 무대 위에서의 연출로 보이기 때문이다.

 

장자의 관점에서 볼 때, 유가적 낯빛은 문화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인위적 약호체계’로서, 이러한 낯빛을 자연스럽고 자명하게 여기는 일은 ‘위장된 자연성’이나 ‘위장된 자명성’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다. 장자의 관점에서 유가의 ‘낯빛’이 문제시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의 이데올로기임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로서 이해되기를 거부한 채 마치 자연적이고 자명한 진리인양 스스로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

 

사실 유가에서는 장자가 비판하는 것처럼 ‘가식적 낯빛’과 ‘기만적 동화’를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아첨하는 낯빛과 꾸며낸 낯빛에는 인()이 드물다”고 한 공자의 말처럼, 유가는 가식적 낯빛과 기만적 동화에 대해 장자 못지않게 비판적이었다. 유가에서는 겉으로 꾸며낸 가식적 낯빛 대신 내면의 충실을 먼저 내세운다. 『중용』에서는 ‘밖으로 드러남’의 전제조건으로 ‘안으로 성실함’을 이야기하고, 『대학』에서는 제가. 치국. 평천하의 전제조건으로 정심. 성의. 치지. 격물을 내세우고 있다. 이렇게 ‘안’과 ‘밖’을 이어주는 매개 고리가 바로 ‘몸()’인 셈이다. 유가에서는 "내면()과 외면()이 고루 빛나는 상태”(文質彬彬)에 이르는 공부를 ‘수신’으로 여겼으며, 가식적 낯빛과 기만적 동화에 대해서는 장자 못지않게 비판적이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기만적 낯빛에 대한 장자의 지적은 말류(末流) 유자(儒者)에 대한 비판은 될지언정 유가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가식적 낯빛과 기만적 동화를 비판하는 점에 있어서는 유가는 오히려 장자와 같은 입장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눈빛 낯빛 몸짓과 ‘지인(知人)

 

전통 사회에서 "덕 있는 사람을 어떻게 알 것인가?"하는 ‘지인(知人)’의 문제는 단순한 도덕적 관심사가 아니라, 현실 정치 즉 관직임용과 인사행정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였다. 『상서』에서는 ‘사람을 잘 아는 자는 '밝다'(). 밝은 자 만이 능히 사람을 관직에 안배할 수 있다’고 하여 사람 파악하는 능력의 중요성을 적고 있다. 공자도 ‘지혜()’가 무엇인지 물어보는 번지(樊遲)에게 ‘사람을 잘 아는 능력’이라고 대답한다. 공자는 또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자기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라’고 말한다. 이러한 구절들은 ‘사람에 의한 통치(人治)’ 또는 ‘덕에 의한 통치(德治)’의 전통에서 ‘지인’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졌는지 시사해주는 단편적인 예들이다.

 

그러나 사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맹자의 말처럼 눈동자가 맑은 사람은 속마음도 바르다고 여겨야 하는가? 하지만, 속마음이 바르지만 눈빛이 흐린 사람은, 속마음이 바르지 않지만 눈빛은 맑은 사람과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는가? 과연 우리는 흐린 눈빛을 가진 사람은 속마음도 흐리다고 여기고, 맑은 눈빛을 가진 사람은 속마음도 맑다고 여겨야 하는가?

 

옛날 중국의 비취 상인들은 고객의 속마음을 살피기 위해 귀부인들의 눈동자를 유심히 관찰하곤 했다. 또한 거짓말 탐지기를 발명하기 이전의 범죄학에서는 피의자의 속마음을 탐지하기 위하여 ‘눈빛’을 관찰하기도 했다. 『주례』에서는 피의자를 심문하는 다섯 가지 방법으로, ‘하는 말을 들어보고(辭聽), ‘낯빛을 살피고(色聽), ‘숨쉬는 모양을 살피고(氣聽), ‘무슨 말을 귀담아 듣는지 관찰하고(耳聽), ‘눈빛을 살핀다(目聽)’라고 적고 있다. ()의 혜제(惠帝)는 그가 아직 제위에 오르기 전에 태손(太孫)으로 있을 당시, 절도혐의로 잡혀 온 혐의자 여섯 명의 눈동자를 관찰하고, 그 중 한 명은 절도범이 아니라고 단언한 적이 있다. 심문결과, 과연 혜제의 지적처럼 그 사람은 절도혐의가 없는 것으로 밝혀진 일이 있다.

 

그러나 감성적 직관에 의한 타인의 감정 이해에는 분명히 한계가 뒤따른다. 인간은 자신의 순수한 감정을 은폐하거나 위장할 수도 있으며, 또 타인의 감정을 대하는 사람이 편견이나 선입견을 가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유가 전통에서 ‘사람 알기(知人)’의 조건들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1)한 사람의 감정과 의지(혹은 덕성과 인격)가 타인에게 이해될 수 있기 위해서는, 그의 감정과 의지가 ‘몸’을 통하여 밖으로 표현 되어져야 한다. 2)표현하는 사람이나 그 표현을 읽는 사람 모두가 진실해야 한다. 3)성향에 대한 지속적이고 반성적인 체험이 요구되며, 자아정체성이 불안정한 사람 그리고 자신의 감정과 의지를 은폐하거나 가장하는 사람은 파악하기 어렵다. 4)감성적 직관능력(.)이 탁월해야 타인의 감정과 의지를 잘 읽을 수 있다.

 

한 사람의 감정과 의지를 낯빛이나 몸짓으로 드러내는 일을 ‘약호 엮기(encoding)’라고 한다면, 이러한 낯빛이나 몸짓을 보고 상대방의 의도나 감정을 읽어내는 일은 ‘약호풀기(decoding)’라고 할 수 있다. 유가의 ‘수신’이 ‘약호 엮기’에 해당한다면, ‘지인’은 ‘약호풀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기호가 지닌 한 특징은 거짓말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 있다. 에코(Umberto Eco)에 의하면, “기호학은 원칙상 거짓말을 하기 위해 쓰이는 모든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만약 어떤 것이 거짓말을 하는데 쓰일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실을 말하는 데도 쓰일 수 없으며, 말조차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거짓말은 ‘약호 엮기’나 ‘약호풀기’ 모든 과정에서 다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유가에서는 ‘약호 엮는 사람’과 ‘약호 푸는 사람’ 모두의 진실성과 직관능력을 ‘지인’의 전제조건으로 들고 있는 것이다. ……

 

 

  잃어버린 ‘눈빛.낯빛.몸짓’을 찾아서

 

……

유가적 생활세계에서 육체와 분리될 수 있는 정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곧 정신과 육체의 통합체로서의 ‘몸()’이다. 공동체의 상호주관적 시선에 드러난 ‘몸’을 통하여 ‘나’는 밖으로 드러나고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읽혀지게 된다. 따라서 눈빛과 낯빛은 곧 한 사람의 정신성(기의)이 밖으로 드러난 것(기표)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가전통의 ‘몸’은 자아와 세계와의 ‘교통방식’이기도 하다. 유가전통에서 눈빛과 낯빛, 그리고 몸짓과 옷차림은 일상생활의 다양한 문맥 안에서 상황에 적합하게 절제된 모습으로 표현 되어져야 한다. ‘수신’을 통하여 표현된 눈빛과 낯빛은 한 사람의 내면을 드러내주는 지표가 된다. 눈빛과 낯빛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감정과 의지를 드러내기도 하고, 또 상대방의 감정과 의지를 체험하기도 하면서, 더불어 ‘소속된 삶’을 일구어나간다. 이런 점에서 유가는 철저하게 ‘소속된 삶’을 지향하는 공동체의 철학이다.

 

전통사회에서 지향해 온 ‘소속된 삶’은 자유주의의 범람과 더불어 이제는 과거의 영욕을 뒤로한 채 박물관의 창고 속에 고색창연한 유물로 등록되었다. 몰락한 공동체를 뒤덮는 세속화되고 물신화 된 자유의 물결 속에서 ‘낯빛’은 왜곡된 모습으로 뒤틀려 우리의 눈앞에 드러난다.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는 농도 짙은 몸짓, 절제되지 않고 거칠 것 없는 감정표현, 호전적이고 경계 어린 혹은 냉담하거나 무관심한 눈빛 - 이러한 눈빛들은 자신을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을 공동체 구성원의 상호주관적인 시선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낯선 침입자로 인식하는 ‘이화(異化)’의 눈빛이다. 유가에서 경계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왜곡된 ‘이화’는 아니었는지?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몸짓의 방종함과 무례함을 탓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개인의 낯빛과 몸짓은 의무나 금지의 대상이 아니라 자유재량의 영역에 속하며, 이러한 영역에 관한 논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침해이기 때문이다.

 

모든 가치가 일률적으로 화폐가치로 환산되는 자본주의의 문화에서 ‘낯빛’은 더 이상 한 사람의 진실한 내면의 표현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부를 드러내주는 지표가 된다. 미인대회에서의 조작된 낯빛(이미지 메이킹), 쥔 자와 가진 자의 늠름한 낯빛, 그리고 부를 과시하기 위한 치장과 의복 - 이러한 낯빛. 몸짓. 의복들은 장자가 공자와 더불어 지탄했던 진실성이 결여된 ‘가면’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낯빛의 기만성을 인식하면서도 그 진실성에 대해서 더 이상 캐묻지 않는다. 왜냐하면 더 많이 가진다는 것은 더 좋은 일이며, 가진 것의 표현은 윤리적 고려의 대상이 아니라 사적인 취미판단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상업주의에 편승한 기술문명의 덕택으로 우리는 가족과 친구로부터 해방되었다. 아내와 남편은 직접 눈을 마주치는 대신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스타의 눈빛을 매개로 공감대를 유지해나가고, 아이들은 숙제를 끝마치기 무섭게 오락기 앞에서 팩맨이나 베이버와 같은 우주의 악인을 대상으로 전쟁을 치른다. 친구들은 더 이상 골치 아프게 얼굴을 맞대고 시()와 인생을 논할 필요도 없이, 락 카페나 뮤직비디오 레스토랑에서 영상 속의 뉴키즈를 따라 춤추고 노래하기만 하면 된다. 소녀들은 더 이상 갈망하는 눈빛과 억제하는 몸짓 사이에서 고민할 필요가 없이, 상대방이 걸친 옷의 브랜드와 차종만 보고서 살덩어리를 내맡기면 된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가족과 친구 그리고 연인에게서 실종된 눈빛과 낯빛을 갈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행위의 ‘규칙’만이 우리를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길로 인도해 줄 수 있을 뿐, 눈빛.낯빛 혹은 ‘감정’과 ‘성품’에 관한 이야기는 옛 노인네들이 남긴 진부하고 통속적인 훈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파편화되고 표류하는 자아, 왜곡되고 뒤틀린 자유, 전도되고 식화 된 이성, 그리고 날로 팽배하는 상업주의와 물신주의의 물결에서 잠시 벗어나, 진열장 너머로 먼지를 쓴 채 간직되어 있는 ‘소속된 삶’의 잔영들을 보고 있노라면, 낯설면서도 문득 반가운 기분이 든다. 왜 우리는 선험적이고 추상적 사변에 의한 거대 담론만이 진리라고 여기려 하는가? 왜 우리는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생활세계에서의 체험들은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치부하려 드는가? 이성과 감성, 그리고 합리와 비합리의 경계선은 그렇게도 명확하고 절대적인 것인가? 과연 보편적 행위의 규칙, 그리고 전략적 합리성만이 풍요로운 삶을 보장해주는 것일까? 또한 철학과 비철학, 진리와 통속의 경계선은 과연 ‘누구에 의한’, ‘어떤 기준’에 의해 설정되었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왜 이 땅의 철학자들은 이러한 경계선에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는 것일까?

 

 

 

 

■  소유주의 사상

                                                                           .형효 교수

 퇴임강연글, 중에서

                                                                          부제의 일부내용만 간추려서 발췌하여 본 내용입니다.

 

……

 

현상에 대한 형이하적 문제는 사회생활에서 경제실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편리’라는 진리의 길을 부르고, 형이상적 문제는 인간사회의 정신적 갈등과 소외의 문제와 직결되는데 도덕명분적으로 ‘정의’라는 진리의 길을 요청한다.

 

편리(便利)와 정의(正義), 이 두 가지가 재래의 개념 철학의 영역에서 가장 크게 주목받았던 진리의 대명사라고 보여진다. 그리고 그 두 가지의 진리는 다 현상을 의식의 문제와 대상으로 여겼던 소유론적 사고방식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경제실리주의는 세상의 현상을 물질적으로 장악하여 편리를 제공하려는 인간이성의 지능적 측면과 연계되어 있고, 도덕명분주의는 세상의 현상을 정신적으로 장악하여 정의를 실현하려는 의지적 측면과 유관하다.

 

경제실리적 편리의 진리를 가치로 여기는 자아의 판단은 쉽게 이기배타적인 충돌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그 진리는 이해관계에 사람들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이익을 쟁취하는 자연적 본능의 소리에 쉽게 기울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경제실리주의는 이기배타적 속성을 지닌다. 경제실리주의도 인류의 보편적 편리를 위한 보편주의의 성향을 지니기도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 그러나 그 보편주의적 시각도 인간중심주의적인 이익을 위하여 비인간적인 자연적 존재자들을 일방적으로 희생시키려는 사고방식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이기배타의 구조를 떠난 것은 아니겠다.

 

그렇다면 도덕명분주의가 설파하는 정의의 진리는 이기배타적 속성을 지우는 것 아닌가? 도덕명분주의는 선의지의 사회적 실현을 목표로 삼기 때문에 강력한 보편주의의 명분을 띠고 있다. 그러나 보편적 선의지가 무엇인가? 모든 이가 동의하는 그런 선의지가 실질적으로 가능한가?

 

공자가 말한 육언폐단(六言六蔽)에서 모든 가치가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폐단을 언급하면서 학문의 공부를 통하여 그 폐단이 극복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견지한 것으로 보인다. 즉 도덕적 선의지가 학문적 공부의 성취를 통하여 자신의 어둠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밝히는 공자에 비하여 노자는 전혀 다른 사상을 펼친다.

 

노자는 도덕적 선의지가 이미 그 자체 어둠의 요소를 필연적으로 회임하고 있기 때문에 학문의 공부와 이성의 판단을 통하여 그 어둠이 극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선은 이미 불선을, 그리고 덕은 악덕의 어둠을 자신의 이면에 감추고 있는 것이 이 우주의 도()의 필연성이기 때문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천하가 다 미()를 미라고 여기면 그것은 악()이고, ()을 선이라고 여기면 그것은 불선(不善)이다. 고로 유무(有無)가 상생하고, 난이(難易)가 상성하고, 장단(長短)이 상형하고, 고하(高下)가 상경하고, 음성(音聲)이 상화하고, 전후(前後)가 상수한다.’ ‘고로 선인은 불선인의 스승이고, 불선인은 선인의 자산이다.(故善人不善人之師 不善人善人之資)

 

노자는 선의지가 순진하게 자기 뜻대로 세상을 정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불선의 어둠이 무의지적으로 생기하여 선의지적 도덕명분주의를 퇴색시킨다고 본다. 그러므로 선의지가 비록 도덕명분주의의 이념에 의하여 사회를 정의롭게 만들려 하나, 그런 능위적 작업이 생각대로 되지 않으려니와, 또 세상이 그렇게 선의지에 의하여 소유되지 않음을 노자는 갈파하였다.

 

그동안 인류는 이런 선의지의 능위(能爲)로 세상을 새로 만들려는 그런 의지의 도덕학과 형이상학을 수 없이 펼쳤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구악이 일소되면 거기에 반드시 신악이 등장하여 선의지에 의한 세상의 소유를 불가능하게 하였다. 이제 인류는 이런 낭만적 이상의 꿈에서 깨어나야 할 때에 이르렀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명분주의의 실천철학도 자아의 관점에 따라 다른 차이를 노정하게 된다.

 

내가 제시하는 선이 보편적으로 만인에 의하여 동의되지 않고 반드시 반대의견에 부딪치면서 사회적 이견의 갈등을 불러 일으키고, 이것이 사회적 투쟁의 변증법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왜냐하면 내가 확신하는 선은 타자에 의하여 그 선의 이면에 깃들어 있는 불선의 요소로 인지되어 내가 주장하는 선에 대립하게 된다.

 

 

 

      자아의 의식은 보편적이고 도덕적인 가치를 띄우면서 사회적으로 장식을 해나가지만, 다급하게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 개인의 자아가 위기를 당하면 자아는 자기가 살기 위하여 생존의 본능과 하나가 된다. 도덕명분적인 선의지로 사회적 공동선을 말하던 사람이 자신의 본능적 이해관계에 직결되는 상황을 만나게 되면, 그는 대뜸 이기적 작태로 돌변한다. 도덕명분주의가 아무리 反본능적 사회적 공동선을 설교하더라도 개인적 무의식에 도사리고 있는 본능의 이기적 생존욕망을 저버리지 못한다.

 

경제실리주의는 본디 개인적 이기주의의 모판을 실질적으로 향유하고 있으면서 철학적으로는 인류의 공동 이익과 편리, 경제적 부의 증진에 기여하는 소유론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누구나 부인하지 못할 확실한 소유론의 철학이다. 그런데 그 소유론이 인류의 복리증진에 이바지한다고 이기주의의 틀을 벗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국가간 빈부의 격차가 부국의 이기주의에 기인한다는 소론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한 사회 안에서의 빈부의 격차도 부자계급의 무한 탐욕에 기인한다는 사회정의론의 주장이 전혀 허구로서만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경제실리주의의 소유론이 결과적으로 범인류의 이익을 증진하게 된다는 주장도 있다. 이기주의를 인류의 차원으로 확장한 결과다. 그러나 그것은 위에서 우리가 지적했듯이 인간중심주의가 자신의 이익을 사냥하기 위하여 인간 이외의 중생을 순전히 인간 이익의 도구로 희생시켜도 좋다는 발상을 정당화시켜 준다. 과학기술주의의 의식일반이 이렇게 경제실리주의의 이기심으로 이어진다.

 

도덕명분주의의 反이기심과 反본능론이 경제실리론의 이기심과 과학기술론의 인간중심주의를 이겨 낼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도덕명분론의 정의론과 의() 사상이 이기적 이익을 탐욕하는 인간의 본능적 욕망의 심리를 성공적으로 씻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도덕적 가치는 필연적으로 야누스적 얼굴의 이중성을 띠고 있다. 그래서 정의의 의()가 필연적으로 그 가치를 추종해야 한다는 당위성 때문에 남과 자기의 마음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해치게 되는 ‘賊’과, 가치에의 굳센 신념이 무의지적으로 낳는 경직된 정신적 ‘교’살(‘絞’殺)의 분위기와, ()의 실천이 초래하는 ‘난폭한()’ 심리와 정의감이 수반하는 ‘광()적’인 ‘추상의 정신’등이 일어나게 된다.

 

도덕명분론이 본의 아니게 독선과 위선으로 흐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선의지의 확신적 신념이 그런 결과를 낳는다. 확신의 의지가 없으면 새 사회를 만들 수 없다. 그러나 새 사회를 만들려는 의지는 부지불식간에 고집으로 변한다.

 

신념의 고집은 마치 경제실리주의가 의존하고 있는 이기심과 역설적으로 닮았다. 자기 것이 옳고 타인의 것이 그르다는 판단이 그런 고집을 낳는다. 이것은 이기적 개인의 호오 감정과 무엇이 다를까? 이기적 개인의 호오감정은 물질적 이익뿐만 아니라, 정신적 지배의지도 관계한다. 진리의지와 권력의지는 다른 것이 아니다.

 

(C.G. Jung)은 모든 논리적 보편성과 그 주장의 무의식에는 심리적 호오의 경향이 깊이 숨어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래서 심리가 논리보다 앞선다고 그는 보았다. 이 말은 자아의 의식이 모든 생각의 흐름에 동반하고 있는 한에서 인간의 생각은 아상(我相)과 아애(我愛)와 아견(我見)의 편파적인 틀을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자아의 지성은 부분적이고, 자아의 의지는 편파적이다. 그래서 사회생활에서 늘 타인들의 것과 부딪치고 장애를 일으킨다 

……

 

 

 

■ 본능과 본성

       (마음의 기호의 이중성)                                                           

                                                                          .형효 교수 퇴임강연글, 중에서

                                                                          부제의 일부내용만 간추려서 발췌하여 본 내용입니다.

......

 

 

 

불교와 노장사상에서 ‘선/악’은 ‘진/위’와 같은 상관적 타자로서 서로 서로 연계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런 상관적 대립은 변증법적 투쟁의 관계와 다르다. 왜냐하면 후자는 하나에로 종합해 나가기 위한 투쟁이 필수적이지만, 전자는 이원론의 방치도, 일원론에로의 귀일도 아닌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의 이중성을 한 묶음으로 엮는 그런 차연(差延)의 사유와 만나기 때문이다.

 

무는 죽음으로 상징된다. 꽃이 떨어지고 인간이 죽음으로 되돌아 가는 것과 같은 것은 결국 존재한다는 현상이 소유로서 설명되지 않고 소유의 의지와 탐욕에서 필연적으로 도망가는 자연의 이법을 알려준다. 모든 소유적 기도가 다 허망하게 끝나기에 소유법은 유루법이다.

 

존재론적 사유는 무의 허공을 본성으로 하는 무진장한 에너지()가 끊임없이 등장하고 퇴장하는 생멸의 현상을 여여하게 보는 방식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의 현상은 이미 본질적으로 무의 본성을 함의하고 있기에 ‘유/무’는 ‘생/사’처럼 한쌍으로 읽지 않으면 안된다. 유는 존재하면서 무를 이면으로 품고 있고, 삶은 살면서 이면으로 죽어간다. 그래서 ‘유/무’와 ‘생/사’는 별개의 개념이 아니고, 하나의 차연적 존재방식의 두 얼굴이다.

 

무의 죽음을 삶의 유와 별개의 실체적 존재자로 보지 않고, 모든 무는 유에의 욕망을 회임하고 있고, 또 유는 무에로의 은적을 필연적으로 안고 살아간다고 읽어야 하겠다. 그래서 생유(生有)는 사무(死無)와 다르나 동시에 그것의 연기(延期)며 연장(延長)이고, 그 역의 방향도 역시 그러하다. ‘유/무’와 ‘생/사’는 개념으로 잡히지 않는 차연(differance)이다. 서로 한 쌍의 상관적 대립의 상호교환이다.

 

마찬가지로 ‘선/악’의 이중성도 이원론적 대립이 아니라, 하나의 상관적 차이나 대립의 이중성을 뜻하는 차연이 아닌가? ‘미/추’와 ‘성/속’도 그러하지 않겠는가?

 

예컨대, 선은 악의 차연이고 악도 선의 차연(差延)이다. 서로가 상관적 대립의 입장을 띠면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서로 상대방이 없으면 자기의 존재도 성립하지 않는다. ‘선/악’은 각기 자기 고유성을 지닌 실체가 아니므로 각각 타자의 타자로서 존립하는 타자의 흔적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선/악’의 이중긍정은 비선비악(非善非惡)의 이정부정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선/악’은 각각 자기 것이라고 우길만한 자가성을 띠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산마루의 주름이 산의 양 기슭을 형성하였듯이, 사이의 차이가 ‘선/악’의 이름을 양면성으로 나누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 양면성은 사실상 마음의 양면성에 불과한 것이다.

 

마음은 욕망이고 그 욕망을 하이데거는 세상에로의 나아감인 ‘탈존’ 이나 ‘관심’이라고 불렀다. 마음은 자기를 벗어나서 세상에로 향한다. 나아가되 소유론적으로 향하든지 존재론적으로 향하든지 둘 중의 하나다. 전자의 탈존을 하이데거는 ‘집착’이라 불렀는데, 그것은 소유론적 자의식의 탈존과 유사하다. 소유론적 탈존이든 존재론적 탈존이든 마음은 탈존의 이중적 방식과 같다.

 

‘선/악’과 ‘미/추’와 ‘성/속’도 다 저런 이중성의 차연(差延)관계로서 이해되어야 하겠다. 악은 마음의 선의 상관적 대대법으로서 또 선도 마음의 악의 상관적 대대법으로서 읽어야 하겠다. 그 선이 그런 악을 이면으로 띠고 있고, 그 악이 그런 선을 또한 이면으로 함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의 마음은 이중적이다. 그래서 누구나 인간은 스티븐슨의 소설처럼 선량한 의사 지킬(Dr. Jekyll)과 괴물 하이드(Mr. Hyde)로서 존재한다. 지킬과 하이드가 같은 마음의 이중성이다. 인간의 마음이 고요하여 흔들리지 않으면 그는 지킬이 되고, 어떤 충동에 흔들려 망상의 파도가 일어나면 그는 하이드가 된다.

 

마음은 선/악의 종자와 청/탁의 물을 다 지니는 그런 흔적들의 업이다. 선업은 악업이 없이 일어나지 않고 그 반대도 그러하다. 그 세상에 피어난 선업과 악업은 나의 마음에 깃들어 있는 선업과 악업의 두 모습의 현행이다. 그 선업과 악업은 동전의 양면처럼 차이 속에서 동거한다.

 

그런 이중성을 데리다는 ‘비동시성의 동시성’ 이라 불렀고, 하이데거는 로고스의 이중성으로서 모음과 갈라짐으로 표시했다. 이런 이중성을 원효는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라 명명했다. 번뇌의 마음이 보리의 마음과 차연의 상관성을 띠고 있고, 번뇌를 모르면 보리의 요구가 일어나지 않고, 보리의 지혜는 무명의 번뇌를 잠재운다. 그래서 노자는 ‘선인은 불선인의 스승이고, 불선인은 선인의 자산’(善人不善人之師 不善人善人之資)이라고 했다.

 

불선인은 내 마음의 선인의 이면으로 그 불선인의 흔적이 나로 하여금 선인의 길을 가는 자본을 대준다. 이것이 노자의 도고, 이 도는 개념의 철학으로 설명되지 않고, 차연의 사유로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악을 나의 선과 대립적인 변증법적 타자로서 여겨 공격해서도 안되고, 그렇게 해서 악이 이 세상에 지워지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선의 결의가 있는 곳에 악이 늘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의 악을 지우려는 선은 새로운 악으로 돌변한다.

 

마음은 욕망이다. 그 욕망을 소유론적 욕망과 존재론적 욕망으로 대별케 하는 이중성도 마음의 작용이다. 마음이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이 이익을 좋아하는 기호와 같다는 것을 뜻한다. 마음은 이익을 좋아한다. 선과 불선도 다 이익을 좋아하는 마음의 기호가 갖는 경향의 차이에 기인할 뿐이다.

 

그 경향의 이중성을 갈라놓게 하는 것이 곧 본능과 본성이다. 본능적 마음은 자아가 소유론적 만족을 취득하기 위하여 바깥에서 타동사적으로 남들과 싸워서 그 이익을 쟁취하려는 이기배타적 욕망이다. 이 욕망을 탐욕이라 부르기도 한다.

본성적 마음은 자아가 지워지면서 마음이 스스로 분비하는 기쁨이 솟아나면서 타인들에게 이익을 증여하는 자리이타적 욕망이다. 이 욕망을 원력이라 부르기도 한다. 무아의 마음이 자리이타적 욕망을 분비한다는 것은 마치 허공의 공이나 무가 무한한 존재의 생멸을 용출하고 수용케 하는 그런 종용(letting-be)의 길과 다르지 않으리라.

 

하이데거의 말처럼 종용의 사유론은 세상을 심판하고 판결하려는 마음의 거부와 다를 것이 없다. 선종의 3조인 승찬대사가 《信心銘》에서 ‘지극한 道는 어렵지 않으나 오직 간택함을 싫어할 뿐이다. 다만 미워하고 사랑하는 것을 놓으면 통연히 명백하리라’(至道無難唯嫌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라고 말한 사상이 하이데거의 저 종용의 사유와 어찌 다르다고 할 것인가?

 

소유론적 본능과 존재론적 본성은 같은 마음의 자리에 동거하고 있다. 다만 전자는 이기배타적이고 후자는 자리이타적인 그런 기호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런 마음의 기호의 차이를 짓게하는 척도가 자아와 무아의 구분이라 본다. 마음이 무아의 무심에 접근하면 할수록 세상의 사실은 차연의 법칙으로 보이고, 자아의 아상이 중심을 이루면 세상은 자기중심으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호오(好惡, 좋음과 싫음)를 놓지 않게 된다.

 

차연의 법칙은 장악의 법칙처럼 주관적 의식과 객관적 대상으로 갈라 놓지 않고, 연기법적 얽힘처럼 그렇게 직물짜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세상의 현상을 본다. 이런 세상보기를 불교에서 여여한 사실의 正見이라 말한다.

 

노자가 도덕경에서 설파한 ‘유무상생(有無相生), 난이상성(難易相成), 장단상형(長短相形), 고하상경(高下相頃), 음성성화(音聲相和), 전후상수(前後相隨)’ 등이 문자학적 사유인 상관적 대대법(pertinent opposition)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마음도 소유와 존재, 본능과 본성의 문자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마음이 무아의 고요에 머물 때에 마음은 본성의 기호를 나타내고, 마음이 자아를 의식하는 감정의 파도에 휩싸일 때에 마음은 본능의 기호를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

                                                           

 

(참고자료)

 

. 차연(差延);

모든 존재는 내면적으로 부단히 변화하며 외면적으로 다른 것과의 관계를 떠나서 태어나지 않는다. 존재는 일의성으로 정의되지 않고 이중성을 운명적으로 안고 있다. 이런 이중성을 차이가 나는 두가지가 서로 상대방에게 연결고리를 맺고 있다는 뜻에서 차연(差延)이라고 부르며, -延은 差-異와 延-(또는 延-)라는 두 개의 다른 의미가 하나로 묶여 공존한다. ......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 존재/생성의 이중성, 소유론과 존재론, 自我의 알음알이/無我의 지혜, 能爲/無爲

 

 

 

. "여여함" 이란,

 

불교에서의 여()는 단순히 같다는 뜻보다는 진리와 통한다. 내지는 진리에 위배되지 않는다 는 뜻으로 많이 쓰인다. 부처님을 다른 말로 '여래(如來)'라고 하는데 이는 여여하게 오신분, 또는 여여한 세계에서 오신 분, 진리의 세상에서 오신 분 등으로 번역된다. 여기서 여여하다는 뜻은 진리의 세계 그 자체를 지칭하며, 변함없이 항상 똑같다는 말이다. 불교에서 '여여(如如)하다'라고 할때 여()자의 뜻은 '꼭 그렇다 바로 그것이다'라는 말이다.

 

. 여여월(如如月)이란;                                                                                     : 理覺   ()란 ‘같다’는 뜻을 가진 말이고 ‘같다’란 닮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또한 ‘어떠한 것 같이 생각 된다’는 뜻도 있으니 생각과 생각의 대상이 같다는 뜻으로 본다. 마치 눈 속 망막에 비추어진 그림과 눈앞의 모습은 ‘같다’ ‘닮았다’고 할 수 있듯 생각 속의 사람과 생각 앞의 사람은 같은 모양이지만 사람이 정신 속으로 들어온 것은 아니니 닮았다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꽃의 형상이 빛을 통해 눈으로 들어와 망막에 상이 맺히면 시신경에 의하여 눈앞에 꽃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망막의 그림과 눈앞의 그림은 같은 것이지만 망막의 그림과 눈 밖의 꽃이 따로 보이는 것이 아니기에 사실은 눈에 비춰진 온 세상은 오직 망막에 있는 그림일 뿐이라고 해야 한다. 눈이 있다는 것은 꽃이 보이기 때문이고 꽃이 있다는 것은 눈에 보이기 때문이니 눈이나 꽃 중 어느 하나라도 없다면 ‘꽃이 보인다.’라는 생각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생각이 없다면 눈도 없고 꽃도 없다. 그러므로 온 세상이란 보인다는 생각과 들린다는 생각, 냄새가 난다는 생각, 맛이 있다는 생각, 만져진다는 생각, 그리고 좋다거나 나쁘다는 생각 속에 들어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생각이란 물질도 아니고 그렇다고 있는 것이나 없는 것으로 표현할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물질’이라는 것도 ‘물질이라는 생각’인 것이고 ‘있다’는 것도 ‘있다는 생각’이며 ‘없다’는 것도 ‘없다는 생각’이지만 생각자체는 그 모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일체만유는 생각 속에 들어있는 그림자일 뿐이니 일체 만유와 생각속의 그림자는 같은 것이되 앞에 있는 것처럼 생각되니 ‘생각과 같은 것’이고 ‘생각과 닮은 것’이라는 결론이고 생각은 어떤 것도 아니므로 ‘그러그러한 것()’이다. 마치 환상과 같은 것이니 여()라고 하는 것이며 생각과 같은 것이니 여()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온 천지가 여(그러그러한 물질)와 여(생각)의 만남인 것이다.

 

과거를 생각해도 지금 해야 하고 미래를 생각해도 지금 한다. 보인다는 생각도 지금하고 들린다는 생각도 지금 한다. 산다는 생각도 지금하고 죽는 다는 생각도 지금 한다. 모든 생각을 지금 한다. 그렇다는 생각도 지금 한다. 모든 것은 지금 속에 들고 생각 속에 들었다. 그러므로 지금과 생각은 둘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을 잡으려면 벌써 과거로 지나가 기억이 되고, 생각을 잡으려면 잡으려는 생각이 생기자마자 기억이 되고…… 밖에 나가려면 밖으로 가는 문이 기억이 나야 나가고, 집에 돌아가려면 길이 기억이 나야 돌아갈 수 있고, 반가워하려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이 나야 되고, 친구를 부르려면 친구의 이름이 기억나야 부르고…… 인생은 기억이다. 그리고 인생은 생각이다. 세상도 기억이고 생각인 것이다.

 

해와 밝음과 색깔로 보이는 세상은 음양으로 보면 양이고 정신으로 보면 견정이다. 달과 어둠과 추측과 꿈을 꾸는 세상은 음이고 정신으로 보면 식정이다. 식정은 기억이고 달이다. 그러므로 달은 생각이고 세상이다. 이것이 여여월(如如月)이고, 이것이‘세상의 실체’며,‘나’즉‘생각의 위대한 능력’이다.

 

 

 

■ 동물과 윤리

         스피노자 철학을 기준하여 그 의미를 살펴 봄

 

         ㈜ 선악의 대상 범위를 더 넓혀서 생각할 수 있는지를 참고하여 봄 

 

                                                                                                     인용: 논문(.익현) 중에서 발췌

 

      동물에 대한 인간의 태도가 선악의 평가 대상일 수 있는가를 스피노자 철학체계 내에서 찾아 본다. 동물의 생명권을 인간의 생명권과 동등한 것으로 간주하여 동물에게 어떠한 해도 끼쳐서는 안된다는 동물권에 대한 강한 입장은 스피노자 철학체계와 거리가 멀지만,

 

동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정서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즐거움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며, 따라서 인간과의 교감이 가능한 영역이 있을 수 있다. 동물과 인간 모두 자연권을 가지고 있지만, 동물은 자연권에 머무는 반면, 인간은 자연권을 이성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역량을 증대시킬 권리로 고양시킨다. 그 경우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해 관심과 배려를 하게 된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본문 중에서)

 

…… 에티카 (Ethica)의 저자인 스피노자(B. de Spinoza)는 어떤 동물관을 가지고 있을까? 오늘날 동물윤리를 주장하는 철학자들처럼 동물에게 도덕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스피노자에게도 가능한 것일까?

 

스피노자 당시에는 데카르트(R. Descartes)나 말브랑슈(N. de Malebranche) 등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동물은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심지어는 고통을 느끼는 일조차 없다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데카르트는 동물을 기계로 간주했으며, 말브랑슈는 고통은 원죄의 결과인데 동물은 원죄와 상관없으므로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동물은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스피노자 역시도 동물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선악과 관련시키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스피노자는 동물을 인간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종차별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 동물과 정서

 

동물해방론자인 싱어(P. Singer)는 이성주의자이자 공리주의자이다. 그는 역사적으로 이성의 성숙과 더불어 도덕적 고려의 대상과 범위가 확대되어 왔으며, 이제 도덕적 고려의 대상과 범위를 인간 아닌 것에게로 확장할 것을 주장한다.

 

공리주의는 기본적으로 쾌락과 고통으로 선과 악을 정의한다. 고통의 양을 줄이고 쾌락의 양을 늘리는 것의 공리주의가 지향하는 바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원칙적으로 공리주의가 관심을 가져야 할 존재는 인간뿐만이 아니라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모든 존재다. 따라서 싱어에 따르면,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로서의 동물은 도덕적 지위를 가지며 우리는 동물에 대해 도덕적 고려을 해야 한다.

 

그러나 스피노자 당시의 17세기 철학자들에게는 동물은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데카르트나 말브랑슈의 경우처럼, 때로는 동물은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자동기계로서 고통을 느끼는 일 조차 없는 것으로 때로는 신학적인 이유에서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정신은 그의 심신 평행론에 따라 신체의 관념이고 어느 정도 복잡한 신체의 관념은 느낌을 수반하는 정신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는 동물의 정서와는 무관하게 우리들의 이익을 도모하고 동물을 마음대로 이용하며 또한 우리에게 가장 편리하도록 그것을 취급할 수 있다. 정서가 있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도덕적 고려없이 동물을 대하고 이용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 이유를 스피노자는 “동물은 본성상 우리들과 일치하지 않으며, 그것들의 정서는 본성상 인간의 정서와 다르다”는 데서 찾고 있다. ……

 

그런데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선이란 우리에게 유익한 것, 즉 우리의 역량(활동능력)을 증대시켜 더 큰 완전성에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요, 악이란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본성이 우리의 본성과 전혀 다른 개물은 우리들의 활동능력을 촉진할 수도 억제할 수도 없으며, 또한 만일 그것이 우리들과 어떤 공통점을 갖지 않는다면 일반적으로 어떤 것도 우리에게 선이나 악이 될 수 없다.

 

본성이 다르다고 선을 그어버림으로써 스피노자는 인간과 동물이 적어도 선악과 관련해서는 아무런 관련을 맺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인간이 동물을 위해 도덕적으로 선한 행동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이를테면, 어려움에 처한 동물을 구해주는 행동은 선한 행동이고 불필요하게 동물을 학대하는 것은 악한 행동이라고 할 수 없는가? 스피노자의 철학체계는 이것을 용인할 여지가 없는가? 논자는 그것이 수동적 정서(연민)의 단계에서도 능동적 정서(관용)의 단계에서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

 

스피노자가 동물과의 관계맺음을 부정하는 이유는 인간과 동물 사이의 갈등은 불가피하지만,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갈등은 이성을 기초로 해소될 수 있다는 그의 확신 때문인 것같다. 인간은 이성적이거나 지금은 이성적이 아니더라도 이성적이 될 가능성이 있지만, 동물은 전혀 그럴 가능성이 없다. 동물은 결코 시민이 될 수 없다.

 

. 동물과 인간의 권리

 

정서가 아니라 권리라는 측면에서 동물윤리에 접근하고 있는 철학자가 T. 리건(Tom Regan)이다. 리건에 따르면 ‘삶의 주체(subject of life)’로서의 개체들은 그 자체로 도덕적으로 보호되어야 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인간은 그들에 대해 강력한 도덕적 의무를 지닌다. 삶의 주체가 갖는 특성으로서 리건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의식, 목적을 지닌 어떤 행위를 할 수 있는 능력, 자신이 좋아하고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에 관심을 보이는 능력 등을 제시하고 있다. 이 삶의 주체의 범주에 모든 동물은 아니겠지만, 일정한 영역의 동물들이 포함되며, 그들은 고유한 가치를 지닌 개체들로서 인간에 의해 존중되어야 할 생명과 자유에 대한 평등한 도덕적 권리를 갖는다. ……

 

인간도 자연상태에서는 동물의 경우와 다르지 않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강자(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존재, 더 많은 역량을 가지고 있는 존재)는 약자보다 더 큰 권리를 가진다. 따라서 인간은 동물보다 더 많은 권리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신체가 그 복잡성에 있어서 동물의 신체보다 우월하기 때문이다. ……

 

자연상태에서 모든 개인은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주권을 갖는다. 환언하면, 개인의 권리는 주어진 한에 있어서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권리를 갖는다. 각각의 개인이 스스로 이외의 어떤 것도 고려함없이 자기 스스로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자연의 최고의 법칙이자 권리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최고의 법칙과 권리, 즉 자신의 자연적 조건에 따라 존재하고 활동하는 것은 모든 개인에 속한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자연상태 속에서만 살 수 없다. 더 큰 악을 피하기 위해 협력하기로 하면서 인간은 시민상태로 나아간다. 시민상태에서의 목표는 예속상태로부터 벗어나 자유인이 되는 것, 이성적 삶을 사는 것, 즉 덕있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덕(virtus)이란 오직 자기 자신의 본성의 법칙으로부터 행위하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자신의 본성의 법칙에 따라 행위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성의 명령 내지는 인도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그러면 스피노자가 말하는 이성의 명령이란 무엇인가? “이성은 자연에 반대되는 것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므로 이성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자신을 사랑하거나 자기의 이익, 즉 자기에게 참으로 이익인 것을 추구하는 것 그리고 진실로 인간을 더 큰 완전성으로 이끌어 주는 모든 것을 욕구하거나 일반적으로 말해서 각자가 자기 안에 있는 한 자기의 존재를 유지하도록 노력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덕은 자기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자신을 더 큰 완전성으로 이끌어주는 역량과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각자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 할 수록, 즉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달성하면 할 수록 더욱 더 유덕하다. 그리고 반대로 각자는 자기의 이익을 즉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를 등한시하는 경우에는 무덕하다.

 

그러므로 덕의 기초는 인간의 기본적인 코나투스, 즉 자신을 보존하려는 노력, 그것도 이성의 명령에 따라서 스스로를 보존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참으로 덕있게 행동하는 것은 우리가 이성의 지도에 따라서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기초로 행동하고 생활하며 자기의 존재를 보존하는 것(이 세 가지는 동일한 것을 뜻한다)일 뿐이다.

인간이 이성에 따라 행위하는 한, 즉 이성이 그 자신의 본질적인 특성인 한, 그는 능동적으로 행위하며, 그 자신이 자신의 행위의 타당한 원인이 되는 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가 능동적인가 수동적인가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행위의 타당한 원인인지 아니면 타당하지 못한 원인인지에 달려있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우리가 얼마나 사물에 대한 타당한 인식을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스피노자는 에티카 4부에서 “인간이 타당하지 못한 관념을 가짐으로써 어떤 행동을 하도록 결정 되는 한 그가 덕에 의하여 행동한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인식하는 것에 의하여 그렇게 결정되는 한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각자의 권리는 그의 덕 또는 역량에 의해 규정된다. 역량(potentia)은 ‘할 수 있다’(posse)라는 동사가 실체화된 용어로서, 능동적으로 할 수 있음을 표현하는 용어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이성의 지도에 따른 자기보존 노력이 성공적이면 성공적일수록 우리는 도의심(pietas)이나 관용과 같은 능동적 정서로부터 나오는 행동을 더 많이 할 수 있다. 스피노자의 철학체계 속

에는 도의심이나 관용이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어떠한 징표도 없다. 모든 것은 신의 생동하는 표현들이다.

 

물론 자기보존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것이 더 유리하고 따라서 인간만큼 인간에게 유익한 것은 없다. “인간에게는 이성의 지도에 따라 생활하는 인간보다 더 유익한 어떤 개체도 자연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그의 본성에 가장 많이 일치하는 것, (그 자체로 명백한 것처럼) 인간이 가장 유익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인간이 시민으로서 교제를 하면서 결합할 수 있는 대상은 인간뿐이다. “우리들은 자연에서 인간 말고는 우리들이 즐길 수 있는 자연의 어떤 것도, 또 우리들이 그것과 우정 또는 어떤 종류의 교제를 맺을 수 있는 어떤 개물도 자연 속에서 찾지 못한다.

시민으로서 결합하지 못한다고 해서 도덕적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시킬 필요는 없다. 스피노자에게 대수롭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신의 필연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능동적 정서, 완전성의 증가에 따라, 자신의 본성으로부터만 행동할 수 있는 역량은 이해를 통한 사랑, 즉 관용의 범위와 깊이를 증가시킨다. 자신의 존재와 본질을 유지하면서 증대시키려는 충동은 생존하려는, 그리고 다른 것을 지배하려는 맹목적인 충동이 아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모든 양태는 인과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모든 양태는 자신과 직간접으로 관련된 모든 것을 배려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러한 배려는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도 필요하다. 그렇게 자신의 존재를 유지발전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 스피노자의 용어로 하자면 좋은 만남의 대상이요 선이다.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데 필요하다면, 이성적 인간은 얼마든지 다른 것을 위해 의미있는 일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철학은 동물에 대해서도 우리가 충분히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있음을 용인한다고 할 수 있다.

 

 

바뤼흐 스피노자 (Baruch de Spinoza, 1632~1677)

        네덜란드 태생의 포르투갈계 유태인 철학자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스피노자(Spinoza)는 ‘사과나무의 철학자’,

생계를 위해 평생 안경알을 갈며 산 ‘은둔의 철학자’,

만물에 깃든 신성(神性)을 관조한 ‘신비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스피노자는 신교도, 구교도가 얽힌 종교개혁의 시대 논쟁의 중심지 네델란드로 이민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당시 해상무역이 활발한 암스테르담에서 유태인 공동체의 학교를 다녔다.

호기심이 너무 많았던 스피노자는 신에 대한 다른 의견을 가졌다는 이유와, 부계상속을 비난하는 글을 썼다는 이유로 대부분이 동인도회사의 주주들이었던 장로들은 그를 파문한다. 당시, 그의 나이 24, 때문에 무역업에 종사하던 아버지의 재산을 한 푼도 물려받지 못한다.

 

은둔과 단절을 택한 스피노자는 당시 최첨단 인기 직종인 렌즈 깎는 일을 배운다. 대신 고립을 피하기 위해 도시 근처에 머물면서 자유 사상가들과 친교모임을 가진다. 프랑스 혁명이 있기 100 여 년 전인 이때 왕당파와 공화파를 가리지 않고 혁명적 사상이 스며들 정도로 혼란의 도가니. 스피노자는 렌즈를 갈고 닦으며, 밤에는 저작에 전념 "비록 불확실할지라도, 온 힘을 다해 길을 찾으려 애썼다."

 

1663, “데카르트의 철학 원리를 출간. 카톨릭교도, 루터파, 칼뱅주의자, 유태인, 데카르트주의 등 모든 모임에서 비난과 모략이 극에 달한다. 곧이어 신학정치학 논고를 익명으로 출간한다. 폭압적인 지도자는 파탄 난 영혼들을 필요로 한다. 마치 파탄 난 영혼들이 폭압적인 지도자를 필요로 하듯이 …… 광신도들의 암살 기도가 잇따랐기에 이리저리 옮겨 살아야 했다. 1675, “에티카(윤리학)”를 완성 하지만 출간은 포기한다.

린스부르크로 옮겨 집을 빌려 살며 방랑은 이어지지만 그가 선택한 것은 부()를 멀리하는 것. 스피노자의 겸손과 청빈, 그리고 검약은 계속된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교수로 초빙했지만 정중히 거절한다.(41)

 

철학자 라이프니츠가 전한 당시 교수 사회 풍경, "공식 교수들은 기존의 감성, 도덕성의 질서, 정치체제를 결코 어지럽히지 않는다", 대신 스피노자는 가치를 전복하고, 망치로 때리듯이 철학을 구성하는 재야 사상사 계열로 이름을 드높인다. 그리고 평생을 두고 고민한 주제는, 어떻게 인간의 잠재적 힘을 높일 수 있을까? 어떻게 대중을 노예들의 무리 대신 자유로운 인간의 집단으로 바꿀 수 있을까? 였다.

 

스피노자가 부른 제 3의 눈, 정신의 눈. "모든 허위적 겉모습, 정념, 죽음들을 넘어선 삶을 바라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확신시키거나 명령하지 않았다. 오로지 삶의 즐거움과 미래의 전망을 믿었다. 단지 안경알을 만들고 렌즈를 깎으며 ……

 

. 코나투스(conatus)

 

유럽 철학계에서는 20세기 후반부터 스피노자의 철학을 재조명하는 바람이 불고 있다. 이에 따르면 스피노자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했던 철학자였던 것 같다.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소위 우리가 근대철학이라고 부르는 철학의 시기에 정신과 신체를 구분하여 그것들의 연합으로 설명하려는 데카르트의 시도가 가지는 난점을 타개하기 위해서 스피노자는 코나투스(conatus) 개념을 제시한다. 스피노자는 사유와 물체, 정신과 신체를 실체의 양태로서 이해한다. 코나투스는 정신과 신체가 분리된 상태가 아니라 이 두 가지가 동시에 표현하는 역량으로 표현하여 데카르트의 난점을 해소한다. 스피노자에게서 정신과 신체가 함께 움직이는 것을 지칭한다. 스피노자는 코나투스(Conatus, )을 언급한다. 에피쿠로스의 용어로 보면, 스피노자의 코나투스는 살고자하는 욕구 내지는 의지라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코나투스의 완전한 표출을 행복으로 보았다.

 

스피노자가 제시하는 코나투스에 관한 명제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각각의 사물은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만큼 자신의 존재 속에서 스스로의 보존을 추구한다. 각 사물이 자신의 존재 속에서 지속하고자 하는 코나투스는 그 사물의 현실적 본질(actualem essentiam)이다. 각 사물이 자신의 존재 속에서 지속하고자 하는 코나투스는 유한한 시간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시간을 포함한다.

 

. 스피노자 사상의 개요

 

만물은 자신의 역량에 따라 존재를 유지하려고 애쓴다. 이런 본능적 의지 또는 욕망을 ‘코나투스(Conatus, )’라고 한다. 사람은 이성적 동물이나 신의 복사판이 아니라 코나투스를 가진 존재이다. 자신에게 이로운 것을 추구하고 해로운 것을 피한다.

감정도 코나투스와 관계가 있다. 기쁨이란 자기보존 욕망이 실현돼 자기가 더 커질 때 느끼는 감정이고, 거꾸로 슬픔은 자기보존 욕망이 방해받아 자기가 더 작아질 때 느끼는 감정이다. 인간은 타인의 감정에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다.

 

인간의 ‘명예욕(Ambition de gloire)’은 자신의 기쁨뿐 아니라, 타인이 기뻐할 일을 찾고자 노력한다. 사회성의 토대는 공동선()의 이념을 형성하도록 만드는 명예욕이다. 국가 또는 사회는 합리적 판단에 근거한 계약이 아니라 감정모방의 메커니즘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스피노자는 우주의 삼라만상에는 저마다 고유한 존재의지가 있고, 비록 내일 인류가 멸망하더라고 그 코나투스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보았다.

 

□ 스피노자가 남긴 명언

 

. 비록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하여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 모든 것 중에서 최선은 부귀, 명성, 쾌락의 세 가지로 요약된다.   사람은 이 세 가지에 너무 집중하기 때문에 다른 좋은 것은 거의 생각하지 못한다.

 

. 세 사람이 한 자리에 모이면 생각이 모두 다르다.   당신의 의견이 비록 옳아도 무리하게 남을 설득하려고 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사람은 모두 설득 당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 의견이란 못질과 같아서 두들기면 두들길수록 자꾸 앞이 들어갈 뿐이다. . 진리는 인내와 시간에 따라 저절로 밝혀질 것이다. . 음악은 우울증 환자에게는 좋지만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는 좋지 않다.   그러나 귀머거리에게 음악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 자만심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너무 높게 생각하는 데에서 생기는 쾌락이다. . 자신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은 그것을 하기 싫다고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실행되지 않는다.

 

. 자유로운 사람이란 죽음보다 삶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다. . 증오라는 것이 사랑에 의해 완전히 정복되면 사랑으로 바뀐다.   그와 같은 사랑은 증오에 의해 선행되지 않았던 어떤 사랑보다도 훨씬 위대하다.

 

. 최고로 손꼽히는 사람이 되고자 하지만 좀처럼 되지 않아 조바심을 내는 사람은   옆에서 치켜세우는 겉치레에 더 잘 속아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