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간과 우주.......眞/3. 종교와 세계관

종교와 세계관

오갑록 2010. 7. 7. 18:44

  행복과 안녕 ......

        

우주와 생명의 기원은 ?


          성경을 인용하며                                                  

                 Fm: k.daum.net    luckyboy, 2004                                                                                                         

과학과 종교가 서로를 보완하면서 우주와 생명의 기원을 밝혀줄 수 있을까?
“종교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이며, 과학 없는 종교는 장님이다.”  -  앨버트 아인슈타인.

 

   □  우주와 생명의 기원은 ?


      우리는 전대미문의 규모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주에서 새로운 사실들이 발견되는 바람에, 천문학자들은 우주의 기원에 대한 견해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우주에 매료되어 있으며, 우리가 우주에 존재함으로 생기는 아주 오래된 이러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주와 생명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으며, 그렇게 존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시선을 신체 내부로 돌려, 최근에 완성된 인간 유전자 지도를 보더라도 이러한 질문이 생깁니다. ‘무수히 많은 생명체는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가? 누군가가 창조한 것이라면, 그는 누구인가?’ 인간의 유전자 청사진이 어찌나 복잡한지 미국의 한 전직 대통령이 “우리는 하느님이 생명을 창조하실 때 사용하신 언어를 배우고 있다”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유전 부호 해독에 참여한 수석 연구원 중 한 사람은 겸손하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하느님만 알고 계시던 우리의 유전 정보를 어렴풋이나마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 존재하게 되었고, 그렇게 존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  “두 개의 창문”

 

      어떤 과학자들은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이성적 분석으로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에 초자연적 지혜라는 개념을 도입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견해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과학과 종교 양쪽을 모두 고려하여 본질을 파악하려고 합니다. 과학은 우리와 우리 주위에 있는 우주가 어떻게 해서 존재하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는 반면, 종교는 주로 그렇게 존재하게 된 이유를 다룬다고 그들은 생각합니다.

 

물리학자인 프리먼 다이슨은 그러한 이중적 접근 방식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람들은 과학과 종교라는 두 개의 창문을 통해 내다봄으로, 바깥에 있는 거대한 우주를 이해하려고 한다.”

 

저술가인 윌리엄 리스-모그는 “과학은 측정할 수 있는 분야를 다루고, 종교는 측정할 수 없는 분야를 다룬다”는 의견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과학은 어떤 도덕적 명제나 미학적 명제도 증명하거나 반증할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의 존재도 증명하거나 반증할 수 없다. 이웃을 사랑하거나 인간의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는 데는 과학적 이유가 있을 수 없다. ···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대단한 오산이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인생에서 가치 있게 여기는 거의 모든 것, 하느님이나 인간의 정신뿐 아니라 사랑과 시와 음악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과학이라는 “종교”

 

과학자들의 이론은 종종 그들만의 신념에서 나온 전제에 의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생명의 기원과 관련해서 생각해 보면, 진화론자들은 대부분 어떤 “교리” 같은 것에 대한 신념에 입각한 사상에 집착합니다. 사실을 이론과 혼합합니다. 더 나아가, 과학자들이 그들의 권위를 내세워 위압감을 조성함으로 맹목적으로 진화를 믿도록 강요한다면, 그들은 사실상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행실에 대해 도덕적 책임이 없다. 그들은 단지 생물학과 화학과 물리학의 산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는 우주에는 ‘설계도 없고, 목적도 없고, 선악도 없다. 단지 무의미한 무관심만 있을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어떤 과학자들은 그러한 신념을 고수하기 위해, 생명의 기원에 대한 그들의 가설의 이론적 바탕이 되는 학설에 위배되는, 다른 과학자들의 광범위한 연구를 무시하기로 작정합니다. 하지만 수십억 년이 지난다 하더라도 특정한 기능을 담당하는 살아 있는 세포가 형성되는 데 필요한 복잡한 분자가 우연히 생성되는 일은 수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따라서 많은 교과서에 실려 있는 생명의 기원에 대한 독단적인 이론들은 근거가 빈약한 것으로 여겨져야 합니다.

 

생명이 맹목적인 우연에 의해 생겨났다고 믿으려면 생명이 창조되었다고 믿는 경우보다 더 큰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천문학자인 데이비드 블록은 이러한 견해를 제시하였습니다. “창조주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창조주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더 큰 믿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막연한 말―신념에 근거한 가정―을 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과학적으로 발견된 사실들로 인해 외경심을 나타내는 과학자들도 있습니다. 앨버트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인정하였습니다. “높은 경지에 이른 과학자 치고 종교적 감정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 그러한 종교적 감정은 자연 법칙의 조화에 대해 열광적으로 경탄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한 조화에는 매우 고차원적인 지성이 깃들여 있어서, 그러한 지성에 비하면 인간의 모든 체계적 사고와 행동은 아무 가치도 없는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학자들이 반드시 창조주 즉 인격체이신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  과학의 한계

 

과학적 지식과 업적에 대해 합당한 존중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과학이 지식을 얻는 한 가지 방법이기는 하지만 지식의 유일한 근원은 아니라는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과학의 목적은 자연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설명하고 그러한 현상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는지를 알아내는 것입니다.

 

과학은 관찰이 가능한 모든 것 즉 물질적 우주를 깊이 있게 이해하게 해 줍니다. 하지만 과학적 연구가 어느 정도까지 진전되든지 간에, 그러한 연구로는 목적에 대한 질문 즉 애초에 우주가 존재하게 된 이유에 관한 질문에 결코 대답을 해 줄 수가 없습니다.

 

저술가인 톰 어틀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과학자들이 결코 대답해 줄 수 없는 문제가 몇 가지 있다. 120억 년 전에 실제로 대폭발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폭발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인가? ··· 애초에 입자가 어떻게 그곳에 있게 되었는가? 그전에는 그곳에 무엇이 있었는가?” 어틀리는 이렇게 결론 내립니다. “그에 대한 답을 애타게 찾고 있는 사람들을 과학이 만족시켜 줄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것이 이전 어느 때보다도 명백해진 것 같다.”

 

그렇게 철저히 연구해서 얻은 과학적 지식은 하느님이 필요 없음을 증명하기는커녕 오히려 우리가 엄청나게 복잡하고 정교하며 외경심을 불러일으키는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확증해 주었을 뿐입니다. 생각 있는 많은 사람들은 DNA와 생물의 놀라운 다양성뿐 아니라 물리 법칙과 화학 반응 역시 창조주의 존재를 지적하는 것이라고 결론 내리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반대임을 입증할 만한, 반박의 여지가 없는 증거는 전혀 없습니다.

 

   □  ‘실제적 가치가 있는 믿음’

 

우주를 창조한 창조주가 존재한다면, 망원경이나 현미경 등 과학 기구를 사용해서 그분이나 그분의 목적을 이해하게 될 것으로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도공과 도공이 만든 꽃병에 관해 생각해 보십시오. 꽃병 자체에 대해 아무리 연구해 봤자 꽃병이 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답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 답을 얻으려면 도공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분자 생물학자인 프랜시스 콜린스는 과학이 메울 수 없는 공백을 채우는 데 믿음과 영성이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는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종교가 인간 게놈의 배열을 알아내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적당한 도구라고 볼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과학 역시 초자연적 현상에 접근하는 올바른 수단이라고 볼 수 없다.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든지 ‘인간이 영적인 것을 갈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와 같은 매우 흥미롭고 중요한 질문에 대해, 과학은 그다지 만족스러운 답을 제시해 주지 못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많은 미신이 생겨났다 사라져 갔다. 그러나 실제적 가치가 있음을 보여 준 믿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  이유를 설명하려면


참 종교는 우주와 생명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인생의 목적을 다루는 과정에서, 생활의 지침뿐 아니라 가치관과 도덕관과 윤리에 대한 표준까지 제시합니다. 과학자인 앨런 선데이지는 그 점과 관련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기 위해 생물학 책을 펴지는 않는다.”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기 위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깨달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또한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매우 만족스러운 대답을 찾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존재합니다. 하지만 어디에 존재한단 말입니까?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널리 배부된 신성한 책인 성서에 존재합니다.

 

성서에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특별히 염두에 두시고 땅을 만드셨다고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이사야 45:18에서는 땅과 관련하여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헛되이 창조하지 않으시고 사람이 거주하도록 지으셨다’고 알려 줍니다. 또한 그분은 사람이 단지 존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온전히 즐기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땅에 갖춰 놓으셨습니다.

 

인간은 땅을 관리할, ‘그곳을 경작하며 돌볼’ 책임을 부여 받았습니다. (창세 2:15) 성서에서는 또한 지식과 지혜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며 우리가 서로 사랑과 공의를 나타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욥 28:20, 25, 27; 다니엘 2:20-23) 따라서 인간은 그들에 대한 하느님의 목적을 찾아서 받아들일 경우에만 삶의 목적과 의미를 알게 될 수 있습니다.

 

현대의 생각 있는 사람들은 과학적 추리와 종교적 믿음 사이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틈을 어떻게 메울 수 있습니까? 지침이 되는 어떤 원칙들이 그렇게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까?

 

   □  몇몇 과학자의 말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종교에 관심이 없거나 과학과 종교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논쟁에 말려들고 싶지 않기 때문에 영성과 신학이라는 문제를 회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과학자들도 있지만, 모두가 다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다음과 같은 과학자들의 말에 유의해 보기 바란다.

 

“우주에는 시작이 있다. 과학자들이 그 이유를 설명하지 못할 뿐이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하느님이다.” “나는 성서가 진리를 담고 있는 책이며 하느님의 영감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복잡한 생명체에는 지성이 깃들여 있는 것이 분명하다.” ― 켄 타나카, 미국 지질 조사국 행성 지질학자.

 

“여러 종류의 지식(과학적 지식과 종교적 지식)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는 매우 인위적인 것이다. ··· 창조주에 대한 지식과 창조에 대한 지식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 엔리케 에르난데스, 멕시코 국립 자치 대학교 물리학·이론 화학과 연구원 겸 교수.

 

“우리가 [인간 게놈에 대한] 이 모든 정보를 풀어 갈수록, 이 모든 물질의 복잡성, 상호 의존성이 밝혀질 것이다. 그리하여 이 모든 것이 지성 있는 창조주 즉 지성을 갖춘 존재로부터 기원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 드웨인 T. 기시, 생화학자.

 

“과학과 종교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양쪽 다 동일한 진리를 추구하고 있다. 과학은 하느님의 존재를 알려 준다.” ― D.H.R. 바턴, 텍사스 주의 화학 교수. 
                                                                                   

내용출처 : [Awake!] 2002년판 참조

 

 

 

■ 스티븐 호킹 박사의 우주관

          “과학법칙으로 지배된 우주어떤 신의 손길도 필요 없다

 

신문기사 중에서 발췌

…… 스티븐 호킹의 신간 위대한 설계”(전대호 역) "철학은 죽었고 신은 필요 없다. 물리학이 우주의 존재에 관한 본질적인 의문을 모두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생물학계의 석학 리처드 로킨스는 자신의 무신론 견해를 뒷받침하는 책의 출간을 환영하며 "호킹이 신의 존재에 관한 논의를 종결시킬 수 있는 결정적 한방을 시도한다."고 말했다.

 

호킹은 "그리스인들의 뒤를 이은 기독교도들은 우주가 냉담한 자연법칙에 의해서 지배된다는 생각을 거부했다. 그들은 또한 우주에서 인간의 지위가 특별하지 않다는 생각도 거부했다.…1277년 파리의 탕피에 주교는 교황 요한 21세의 지시를 받들어 저주받아야 마땅한 오류 혹은 이단적인 주장 219개의 목록을 공표했다. 그 오류 중에는 자연이 법칙들을 따른다는 생각도 있었다. 이 생각은 신의 전능함과 상충하기 때문에 저주받아야 마땅했다. 흥미롭게도 교황 요한 21세는 몇 달 뒤에 중력법칙의 작용에 의해서 죽음을 맞았다. 그의 처소의 지붕이 무너져 덮치는 바람에 사망했던 것이다."라며 과학이 발달한 역사를 설명했다. 성경 '창세기'의 내용이 참이라는 입장을 고수하는 사람들에게 호킹은 그렇다면 화석은 속임수냐고 되묻는다.

 

1625~1656년 아일랜드 교회의 수장을 지냈던 어셔 주교는 세계의 기원을 정확하게 기원전 4004 10 27일로 못 박았다. 호킹을 비롯한 물리학자들은 우주가 훨씬 더 이른 시기인 137억년 전에 존재하기 시작했다고 믿는다.

 

호킹은 "여러 세기 동안,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많은 사람은 우주의 시작에 관한 문제를 회피하고자 우주가 영원한 과거부터 존재했다고 믿었다. 다른 사람들은 우주의 시작이 있었다고 믿었고 그 믿음에 근거하여 신의 존재를 증명했다. 그러나 시간이 공간처럼 행동한다는 깨달음에서 새로운 대안을 얻을 수 있다. 그 깨달음은 우주의 시작이 있다는 생각에 대한 해묵은 반발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우주의 시작이 과학법칙들에 의해서 지배되며 어떤 신의 손길도 필요로 하지 않음을 의미한다."며 혁명적인 시야를 제공한다.

 

호킹은 대상들이 단일하고 확정된 역사를 가지지 않았다는 양자 이론을 우주 전체에 적용하여 인과관계의 개념을 흔든다. 과거가 확정된 형태를 가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역사가 우리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과거를 관찰함으로써 역사를 창조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인류가 우주와 같이 아주 오래 전부터 존재했다는 생각은 인류의 지식과 기술이 급속도로 향상되어 왔음을 생각할 때, 만일 인류가 수백만 년 전부터 존재했다면 인류는 실제보다 훨씬 더 유능해졌어야 한다는 결론 때문에 부정된다.

 

호킹은 우주에 관한 완전한 이론일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후보로 “M이론을 내세운다. 하나의 이론 틀 속에 끈 이론을 통합시킨 M이론은 시공의 11차원이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제각각 고유의 법칙들을 가진 서로 다른 우주의 숫자를 사실상 무한대(정확히는 10 500제곱) 허용한다. 다중우주에서 우리의 우주는 다수의 우주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며 에서 자연발생 한 다중우주는 각기 다른 자연법칙을 갖고 있다.

                                     (서울.신문 2010.10.16)

 

 

 

■  과학과 종교의 가치

                                                                                                                           (위키백과)

과학적인 가치는 그 믿음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객관적. 보편적 기준이 존재하여 철저한 검증 단계를 거친 것들만이 살아 남게 된다. 이에 반해 기독교로 대표되는 종교적인 가치는 그 옳고 그름을 판단할 객관적 기준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적 믿음에 대해서는 객관성을 요구할 수 없고, 따라서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이다. 과학이 이러한 기준에서 바라본 기독교는 탐탁치못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과학과 종교, 특히 기독교에 있어서 충돌을 일으키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은 창조에 관한 학설, 창조론의 진실성이다. 이러한 창조론과 진화론의 관계에 따라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대한 논리는 3가지, 제거론, 분리론, 그리고 친구론으로 나뉜다.

 

다만, 창조론이 과학적인 사실로써 진화론과 동등한 권위를 가지고 교육해야 한다는 주장은, 기독교 전체가 아니라 특히 미국에 많이 존재하는 일부 창조론자들의 것이다. 창조론이 정규 교육에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들 외에는 로마 가톨릭, 동방 정교회, 개신교를 막론하고 그다지 많지 않다.

 

. 과학적 비판에 대한 창조이론

 

과학적인 비판을 받은 창조론은 성경에 적혀있는 말 그대로는 도저히 과학적인 반박이 불가능해 보였다. 이에 창조론자들은 성경을 재해석하여 말들 속에 숨어있는 숨겨진 원리들을 찾아나가게 되었고 그로써 단순히 수천년전 지구가 생겼다라고 하는 것에대한 나름인 근거들을 붙여나가기 시작했다. 다음은 이에 관한 7가지 해석법이다. 물론 이 역시 엄밀히는 과학과 별개의 영역에 속하며 종교적으로도 제각기 논란이 있다.

 

. 간격이론(Gap theory)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지질시대 의 시간적 간격이 있었다고 보는 관점. 제일 먼저 만들어진 빛에의해 성숙된 지구가 만들어지고, 그 후에 피조물들이 창조되었다고 보는 관점이다.

 

. 날-시대 이론 (day-age theory) 천지창조가 이루어진 창조주간 의 하루하루를 24시간으로 보지 않고 상징적으로 해석하여 오랜 세월을 포함하는 지질학적 시대로 본다.

. 골격 가설(frame work hypothesis) 성경이 언제나 창조를 구속 의 중심적 사실- 예수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취급하고 있으므로, 창 세기 1장을 창조과정에 대한 선포가 아니라 하느님(하나님)의 창조행위를 구원 사역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는 주장.

 

. 유신론적 진화론(theistic evolution) 하느님이 진화의 과정을 통해 모든 생물을 창조했다는 이론이 다. 즉, 하느님의 창조사역이 섭리사역(진화)에 의해 조종되는 동시에 섭리사역의 일부분이라는 주장.

. 진행론적 창조론(progressive creation) 생물체가 오랜 지질학적 시간에 걸쳐 진화되는 동안 진화과정으로는 완성시킬 수 없는 부분은 하느님(하나님)이 그때마다 중재하여 창조한다는 내용.

 

.  성숙한 창조물의 출현이론 (Appearance of age theory) 하느님(하나님)은 몇 천년전에 지구를 만들었으나, 지구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성숙한 지구의 형태로 만드셨다는 이론. 창조론이 사실이라 가정한다면 만들어진 지구는 절대 빅뱅이전의 무(無)의 상태가 아니었을 것인데 어떤 원리에 의해 만들어져있는 과학적인 모델에 따르는 이미 성숙되어있는 지구의 형태로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이론이다. 그러나 방사성연대측정법과 대립하여 과학적으로 큰 문제가 있다.

 

. 성서적 창조론(biblical creation) 앞서 제시된 이론들과는 달리 창세기 1장의 창조를 해석함에 있어서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실임은 물론 그것이 일어난 기간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구약의 창세기가 현대과학과 상치하는 부분이 많아 과학으로 인정되기 어렵다.

 

 

 

 

■ 에너지- 마음과 물질

        

유란시아(?) 중에서 일부분 발췌


42:0.1
 에너지가 모든 실재의 기초라는 면에서 볼 때 우주의 기반은 물질로 되어있으며, 순수한 에너지는 우주 아버지에 의해 조정된다. 기세. 에너지는 우주 절대자의 실재와 현존을 명시하고 입증하는 영구한 기념비로서 있는 하나의 사실이다. 낙원 현존들로부터 나오는 광대한 흐름의 이 에너지는 쇠퇴한 적이 결코 없고 실패한 적이 없으며; 무한의 지탱에서 결코 깨진 적이 전혀 없었다.

 

42:0.2
우주 에너지의 조종은 우주 아버지의 품성적 의지와 모든-지혜의 명령에 항상 따르고 있다. 명시되는 힘과 순환하는 에너지에 대한 이 품성적 조정은 영원 아들의 합동적 활동과 결정에 의해서, 또한 마찬가지로 공동행위자에 의해 실행되는 아들과 아버지의 결합된 목적에 의해서 변경된다. 이들 신성한 존재들은 품성적으로 그리고 개별적으로 활동한다; 또한 그들은 우주들의 우주에서 영원하고 신성한 목적을 다양하게 각각 표현하는 거의 한없는 숫자의 종속들의 품성체와 힘으로서 기능한다. 그러나 이렇게 신성한 힘의 기능적이고도 일시적인 변경이나 변형들이, 모든 기세(에너지}가 모든 것들의 중심에 계시는 품성적 하느님의 궁극적 조정 아래에 있다는 선언적 진리를 조금도 약화시키지 않는다.


42:1.1
우주의 기반은 물질이지만, 반면에 생명의 본질은 영이다. 그리고 영들의 아버지는 또한 우주들의 조상이기도 하다; 기원적 아들의 영원한 아버지는 또한 기원적 원형틀, 낙원 섬의 영원-근원이다.

 

42:1.2
하나의 우주 현상이 우주 아버지 안에서 선척적인 것처럼, 물질(에너지)은, 실재하는 그러면서 동일한 조화우주 실체의 다양한 표현이다. "그의 안에 모든 것들이 존재한다." 물질은 선천적 에너지를 드러내기 위하여 그리고 자아-충만된 힘들을 내 보이기 위하여 출현할 수도 있지만, 이 모든 물리적 현상 속에 고려되는 에너지들 속에 포함된 중력 계통들은 낙원으로부터 유래되고 낙원에 의존한다. 에너지로부터 나온 최초의 측정 가능한 물질인 극자는 낙원을 자신의 핵으로 삼는다.

 

      *  유란시아 (The Urantia Book)

 

           인용 : wikipedia

 

     하느님, 과학, 종교, 인류역사, 철학 그리고 인간의 운명을 논하는 영적 철학적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의 기원은 1924년과 1955년 사이 어느 시기에 미국 시카고에서 출현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저작자가 누구이며 어떤 경로로 출현하게 된 책인지 명확하지 않다.

 

미국 시카고의 의사인 윌리엄 에스 새들러가 잠을 자면서 중얼거리는 것을 1925년 초 “속기사가 받아 쓴 방대한 분량의 문서”에서 시작된 것으로, 유란시아 세계재단은 일리노이 주에서 면세 교육단체로서 1950년에 설립되었으며, 개별적인 모금을 통하여 1955.10.12 에 국제 저작권을 가지며 유란시아 책을 출판하게 되었다.

 

5번째 시대적 계시서로 불리는 영어 원본 유란시아는 총 196 편의 글로 구성되어 있으며 2,097페이지에 달하는 내용으로 크게는 아래와 같은 4개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 (1 ) 중앙 우주와 초우주,  (2 ) 지역우주,  (3 ) 유란시아의 역사,  (4 )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

 

 

 

 

 

■ 유교의 성리학자료 : Fm, cyberspacei


성리학은 유교에 철학적 세계관을 부여하고 유교를 심성 수양의 도리로 확립한 학풍으로서,

 

중국에서는 이미 당대부터 종래의 훈고학(訓學)과는 다른 유교학풍을 세우려는 노력이 있었으며, 그 노력은 북송대에 이르러 성리학이라는 사상체계와 학문방법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후 남송의 주희(朱熹 : 1130~1200)에 의해 성리학의 집대성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성리학을 주자학(朱子學)이라 부르기도 한다. 명대의 왕수인(王守仁 : 1472~1528)의 학문·사상, 즉 양명학까지 성리학에 포함시킬 수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주자학만을 성리학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송대 성리학의 성립에는 불교 철학이 많은 영향을 미쳤으나,

 

성리학의 세계관과 불교의 세계관은 근본적인 성격이 달랐다. 불교의 세계관에서 현실의 자연과 사회는 궁극적으로 부정되어야 할 가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리학의 세계관은 자연과 사회를 도덕적인 본성을 갖는 것으로 인식하고 그 속에 존재하는 사물들의 개별성을 긍정했다.

 

주희에 의해 집대성된 성리학은 자연과 사회의 발생·운동을 이(理)와 기(氣)의 개념에 의해 설명한다.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에 의해 우주 만물이 생성되며, 그런 점에서 기는 만물을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 그런데 기는 맑음과 흐림, 무거움과 가벼움 등에 따른 차이가 있으며, 따라서 기에 의해 구성되는 우주 만물은 차별성·등급성을 갖는다. 결국 자연·인간·사회가 모두 위계적 질서를 갖는 것이다.

 

한편 태극(太極), 즉 천리(天理)·이의 개념은 만물 생성의 근원이 되는 정신적 실재로서 기의 존재 근거이며, 동시에 만물에 내재하는 원리로서 기의 운동법칙이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이 만물의 존재 근거가 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만물에는 모두 이가 내재한다는 점에서 이의 개념은 인간과 사물의 원리적 보편성을 설명하는 범주이다.

 

이기론에 바탕을 둔 인간 이해는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의 개념을 중심으로 하는 인성론으로 체계화되었다. 본연지성은 모든 인간의 마음 속에 본래 존재하고 있는 이로서, 도덕적 본성을 의미한다. 이에 반해 기질지성은 인간 형성에 관여하는 기에 의해 형성되는 것으로 육체와 감각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인간 본능을 의미한다. 이 가운데 본연지성에 따른 행위는 선한 것이며, 기질지성에 따른 행위는 인욕에 의해 악으로 흐르는 경향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인욕을 없애고 천리를 보존하는 도덕 실천을 통해 본연지성에 따르는 생활방식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활방식을 가지기 위해서 사물에 존재하는 천리를 인식하는 궁리(窮理)와 인욕의 발동을 억제하는 내면적 수양으로서의 거경(居敬)이라는 수양 방법이 제시되었다.

 

그런데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이의 구체적 내용은 삼강오상을 비롯한 유교적 윤리도덕이었으며, 나아가 관료제적 통치질서, 신분계급적 사회질서, 가부장제적·종법제적 가족질서를 포함하는 명분론적 질서였다. 따라서 성리학은 이의 보편성을 통해 유교적 윤리도덕과 명분론적 질서의 보편성을 교설하며, 인간은 명분론적 질서 속에서 각각의 계층적 지위에 합당한 일을 성실하게 수행해야 하는 존재로 설명했다. 결국 성리학은 명분론적 질서를 합리화하는 사상체계였으며, 명분론적 질서에 맞는 생활을 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도덕적 의무라고 했다.

 

유교는 교주, 교리, 교단, 내세 관념 등의 가변적이거나 매우 희박하므로 종교가 갖춰야 할 것을 가지지 못한 하나의 통치 사상(이념)에 불과하다고 보는 주장과 본질적으로는 종교라고 할 수 없으나 다른 사상과 종교를 억압하면서 스스로 종교적 성격을 자초한 측면이 크다는 주장이 있다. 종교가 아니라고 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유학(儒學)이라고 표기 한다.

 

 

 

■ 불교의 기본사상에서 자료 : Fm, 108world

 

불교에서는 모든 존재, 즉 인간을 포함한 일체의 성질에 대하여

 

□ 제행무상 (諸行無常)

 

첫째, “모든 것은 멈추어 있지 않고 변한다(諸行無常)”
거대한 우주에서 작은 생물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물론 인간도 예외일 수 없다. 무상(無常)이란 말을 ‘덧없다’거나 ‘허무하다’라는 뜻이 아니라 변한다는 의미로서, 사물이 변하고 인간이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것이 그 누구의 뜻에 따른 것이 아닐 뿐더러, 또한 죄악의 대가도 아닌 것이다. 또한 무상이란 좋고 나쁘고 기쁘고 슬프고 하는 감정의 문제가 아닌 만물의 성질을 나타내는 법(法)이다.

 

□ 제법무아 (諸法無我)

 

둘째,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기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諸法無我)”라고 한다.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말은 어떤 일에 몰두해서 자기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는 망아의 경지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서 무아(無我)는 ‘나’라고 할 수 있는 고정 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제법은 무아’라고 할 때, 이것이 인간만 아니라 모든 사물에게도 다 적용됨을 말한다. 모든 존재는 서로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존재의 원인과 근거가 된다는 , 연기적 관계를 벗어나 홀로 존재할 수 없다. 또한 무상의 진리에서 본다면 어떤 존재도 불변의 실체나 자아를 유지할 수 없다. 그 존재를 유지시키는 원인과 조건도 변화하기 때문이다.

 

□ 일체개고 (一切皆苦)

 

셋째, 모든 존재의 속성을 밝히는 법으로서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들 수 있다.
괴로움, 고(苦)란 말은 인간의 가치관이나 감정이 개입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들의 성질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고(苦)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느끼는 고통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는 의미를 갖는 일체(一切)가 모두 고(苦)라고 말하는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불완전하고 불편한 상태이며, 이러한 상태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갖은 힘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모든 존재들이 스스로를 유지하려고 힘을 들이고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한 마디로 고(苦)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만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사물 즉 일체가 이와 같은 상태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상이라는 진리 속에 서 있는 존재가 가진 ‘불완전성’과 그 불완전한 개체를 지속시키려고 ‘힘들이는’ 모든 작용까지도 함축한 것이 바로 고(苦)인 것이다. 이는 모든 존재의 속성을 밝혀낸 법(法)이다.

 

 

 

 

■ 불교의 세계관

 

자료 : 용주사

 

불교에서는 세계를 관계의 존재라고 한다.

서로 의지하고 돕는 관계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세계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기본 세계관은 연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그물처럼 이루어져 있는 것이 세계요 삶인 만큼 따로따로 나뉘어져 있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삶의 문제를 나누어 사고하는 것은 불교적으로 옳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진실로 열의를 기울여 사유하는 성자에게 법의 참된 모습이 밝혀질 때 일체의 모든 의혹 사라졌으니, 연기의 도리를 알았으므로…. 『자설경(自說經)』

 

고요히 명상에 잠긴 수행자에게 진실의 법칙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 순간 모든 의혹이 사라졌으니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의 원인을 알아낸 까닭이다. 『마하박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직후 자신의 감흥을 읊은 내용이다. 깨달음을 통해 밝혀낸 진리가 연기법임이 분명하게 잘 드러나 있다. 보통 ‘존재의 실상을 깨달았다.’ 또는 ‘진실의 법칙을 밝혀냈다.’고 한다. 수행을 통해 밝혀낸 ‘존재의 실상’ 또는 ‘진실의 법칙’이 연기법인 것이다. 부처님이 깨달은 법 또는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연기법이라고 한다는 의미이다. 부처님께서 연기법을 영원한 진리라고 했다. 여래의 출현 여부에 관계없이 본래부터 존재하는 영원한 법칙이라고 했다. 부처님 가르침이 팔만 사천가지라고 하지만 그 어떤 내용도 연기법을 벗어난 가르침은 없다. 연기법은 불교의 전부이다. 연기법을 벗어나면 그것은 이미 불교가 아니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영원한 법칙으로서의 연기법, 불교의 기본으로서의 연기법, 불교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연기법은 어떤 내용인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잡아함경』

 

일반적으로 연기법의 공식처럼 평가되는 경구이다. 이 세상 모든 존재(세계)가 서로 의지하고 서로 돕는 총체적 관계에 의해 생성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하는 것을 뜻한다. 불교의 핵심인 연기법의 세계관을 가장 깊고 풍부하게 다루는 경전이 『화엄경』이다. 특히 심오하고 불가사의한 연기법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멋진 비유가 인드라망 즉 제석천 궁전의 그물 비유이다. 인드라망 비유만큼 중중무진(重重無盡)한 연기법의 세계관을 실감나게 잘 드러낸 비유는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를 화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제석천 궁전에 투명한 구슬그물(인드라망)이 드리워져 있다. 그물코마다 박힌 투명구슬에는 우주삼라만상의 영상이 찬란하게 투영된다. 삼라만상이 투영된 구슬들은 서로서로 다른 구슬에 투영된다. 이 구슬은 저 구슬에, 저 구슬은 이 구슬에, 작은 구슬은 큰 구슬에, 큰 구슬은 작은 구슬에 투영된다. 동쪽 구슬은 서쪽 구슬에, 서쪽 구슬은 동쪽 구슬에, 남쪽 구슬은 북쪽 구슬에, 북쪽 구슬은 남쪽 구슬에 투영된다. 너의 구슬은 나의 구슬에, 나의 구슬은 너의 구슬에, 정신의 구슬은 물질의 구슬에, 물질의 구슬은 정신의 구슬에 투영된다. 인간의 구슬은 자연의 구슬에, 자연의 구슬은 인간의 구슬에, 시간의 구슬은 공간의 구슬에, 공간의 구슬은 시간의 구슬에 투영된다. 동시에 겹겹으로 서로서로 투영되고 서로서로 투영을 받아들인다. 총체적으로 중중무진하게 투영이 이루어진다. 『화엄경』

 

연기법의 세계관으로 보면 이 세상 어느 것 한 가지도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은 없다. 시간과 공간, 인간과 자연, 정신과 물질, 중생과 부처, 신과 인간, 너와 나, 과거와 현재, 미래 등 모든 이 중중무진의 관계 속에 성립 전개되고 있다. 영원에서 영원 너머에 이르기까지 중중무진(重重無盡)한 총체적 관계 속에 끊임없이 생성변화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주요, 우리들의 삶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