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명의 과학.......眞/2. 생명과 정신

생명. 정신

오갑록 2011. 11. 16. 21:28

싱싱한 ......

 

■ 생명과 정신

 

물의 중요성을 앞세운 어느 일간지의 광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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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란 본래 자연의 균형과 조화에 의해 탄생하고 유지하며 발전한다. 그러므로 자연의 원리와 힘에 어긋나는 건강법은 고장이 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법칙을 피할 자는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만약 값 비싼 어떤 약이나 주사 한방이 건강을 지켜줄 수 있다면 돈이 많은 사람이 병을 못 고치고 죽을 까닭이 없는 것이다.

자연의 원리와 힘에 따른 건강법 중에서 물이 가장 우선하며 중요하다. 왜냐하면 물이 생명의 원천이자 근원이며 유전자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 인체의 70%, 혈액의 83%, 세포의 90% 이상을 물이 차지하고 있다. 이 절대 비중의 물을 어떤 물로 채우고 갈아 주느냐에 따라서 건강상태는 달라 질 수 밖에 없다. ……   

                                                                                        

 (모 일간지(2007.6.21.)의 광고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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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세상의 시작이나 종말 같은 형이상학적 궁극적인 의문에 대해서는 믿음 없이 이해 못할 교리를 내세우기도 한다. 그 믿음을 의심하며 교리를 본다면 구성이 잘못된 단편소설과도 같을 것이다.


위의 광고문도 이와 유사한 점이 있다고 느껴진다. 물이 생명과  건강에 가장 중요하다고 단정 하고 있다. "물"을 숭배하는 종단 교주님이 작성한 교리라고 하면 웃기지도 않는 억지겠지만, 빛과 공기, 땅이며 유기물을 숭상하는 눈으로 보면 서운하리라는 생각도 든다.

 

생명과 건강에는 우리가 대하고 있는 모든 것이 다 중한 것은 아닐까?
그 정답은 모두 맞춰서는 아니 될, 끝이 없는 의문으로 남아야 할 신의 영역일 수도 있다.

우리 건강도 믿음으로부터 시작된다고도 할 수 있다.

“아무것이나 맛나게 꼭꼭 씹어 먹어야 건강하다”며 나를 달래던
어릴 적 어머님의 말씀도 이와 큰 차이는 없지 않을까?

 

생명과 건강의 연계가 되는 고리는 주변에 허다하다.
물, 공기, 마음, 운동, 식단, 건강식품, …… 

물론, 이들 각각은 우리에게 중요하고 과부족이 되면 탈이 난다.

그리고 누구나 한 두 가지의 건강비법은 신봉하고 있다.

 

깡마른 체격의 아들을 두셨던 어머님은 체격이 건장하고 뚱뚱한 사람만 보면 건강하다며 부러워하셨다. 맏며느리 감을 택할 즈음에도 뚱뚱한 색시만 보면 욕심을 부리신 기억이 난다.

 

이처럼 건강의 기준도 사람마다 제 각각 다른 것들로 구상된다.
무병장수 함을 통칭하기도 하나, 정력에 좋다는 보양식 찾기 즐기는 분이라면 또 다른 생각이 있을 법 하다. 갑작스런 질병으로 인해서 응급 수혈을 받아야 하는데도 종교적인 이유로 수혈을 거부하다 타계한 대학 친구를 생각하여 본다.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을 남겨 둔 채 세상을 등진 친구 상가의 애도 속에서 충실한 믿음이 이제껏 내가 생각하여 오던 건강 기준보다 우선할 수 있음을 경험한 적이 있다. 사회에 쓸모 있는 구성원 역할을 해야만 건강하다고 여기는 색다른 개념의 건강도 생각할 수 있다. 이들은 아픈 곳 떨치려고 애쓰며 병실을 지키는 중환자가 보는 건강 개념과는 사뭇 다르지 아니한가?

 

생명의 태동과 성장, 소멸과 진화, 그리고 그 중심에 서 있으면서, 비록 한정된 짧은시간이지만 정신과 마음을 품고있는 "나"라는 한 개체와의 상관관계는 한 없는 의문점을 자아 내곤 한다. 생명과 정신, 우리들의 건강 주제는 그 가운데 극히 작은 한 조각으로 볼 수도 있다.

 

물론 내가 편히 배부르게 먹으며 아프지 아니하고 생각하며 건강하게 오래도록 사는 것은 아주 중하다.
나와 이웃이 살아가는데 동식물과 같은 뭇 생명체들 또한 직간접적으로 중하다. 이웃한 생명체들이 있기에 나 또한 존재 할 수 있다. 이들이 씨를 유지하고 불리는 과정에 관한 주제들은 우리의 존재가치를 알아 가는데 있어서는 중요 한 이야기인 듯도 하고, 사소한 말 장난 같기도 하다.  "나"와는 밀접하면서도 아주 먼 곳에 있는 허황되리만큼 커다란 명제일 수도 있다.

 

생명, 의식, 기억 그리고 정신의 본질은 무엇이며, 이들이 물질과 육체와는 어떻게 연계 되는가?  건강한 생명, 건강한 정신이란 무엇일지? 관심과 의문을 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네 사회.정치.경제 환경의 급변하는 격랑 속을 떠 도는 가랑잎 쪽배에 몸을 맏긴 신세에 너무나도 한가한 생각은 아닐까?, 관심 둘 가치 조차 없는 쓸데없는 공상은 아닌지? 하는 자책감도 가져 본다.    

(오갑록)

 

 

 

 

■ 생명을 보는 관점은 ?

                                                                                        자료 Fm : 장.희익 교수,  일부내용 요약

   .  ......

   . 생명이란 말은 두 가지 의미로 볼 수 있는 바,
      . 현상으로 보았을 때 생명이 지니게 되는 의미, 즉 객체적 측면과 
      . 삶의 주체 입장에서 보았을 때 생명이 지니는 의미,  즉 주체적 측면이 있음

 

   . 자연계에 존재하는 많은 현상 가운데에는 생명현상이라 불릴 독특한 현상과
   . 이러한 생명 체계의 내부에서 자신을 주체로 파악하는 '의식'이 발생하는 현상이 있음

      . 의식은 그것의 주체가 되어보지 않고는 파악할 수 없는 특성이 있음

 

   . 의식과 물리적 여건 사이에 인과관계가 존재하는가?
      . 생명현상이 물리적인 인과관계를 벗어난다는 증거는 없음

      . 의식을 담당하는 기구인 중추신경계도 같음
      . 그렇다면 의식 그 자체도 물리적 인과관계에 예속되는 것인가? 
      . 의식 주체(자유의지)도 실은 물리적 인과의 사슬에 묶여 있는 허상에 불과한 것인가?

 

   .  내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내 몸을 움직인다고 할 때에는 
      . 이미 내 몸이 이를 움직여낼 물리적 여건을 갖추고 있다는 의미이지,

      . 내 의지가 물질에 종속된다는 말과는 다름

 

   .  "나"와 "물질"을 별개로 보는 이원론적 관념의 결과로 부터

      .  '내가 의지를 발동하여 몸(물질)을 움직인다'

      . '내가 몸(물질)에 이끌리어 그러한 의지를 발동하게 된다'고 생각하게 됨

 

   .  물질적 구도에 지나지 않는 우리 중추신경계 안에서 '나'라고 하는 의식이 발생한다는 사실은
      . 현재로서는, 물리학으로  해명해낼 수 없는 커다란 신비며

      . 우리 생명이 지닌 매우 놀라운 특성임

 


 □ 주체적 삶이 내포하는 '나'의 내용

 

   . 우리의 이른바 의식이라는 것이 신체, 특히 그 중추신경계를 통해 발생하는 것이므로 
      . 물리적 기구의 주체적 양상

      . 의식의 주체로서 자기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물리적 기구가 어디에 어떻게 있는가?

      . '나'라고 생각하는 주체의 내용이 이러한 물리적 기구와 일치하는가?

 

   .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나'라는 것이 '내 몸' 곧 의식을 일으키는 내 신체를 지칭
      . '나'라는 내용 속에는 신체로서의 내 몸과 함께
      . 인격체로서의 '나' 와

      . 그리고 한 '삶'의 주체로서의 '나'가 어우러져 있음

 

   .  주체적 측면에서의 생명은

      . 일차적으로는 자신이 속한 개체를 '나'로 의식하게 되지만, 
      . 자신이 지닌 생명의 모습을 객체적으로 파악해나가면서

      . 자신이 곧 생명 그 자체임을 알게 된다

 

 

 

■ 의식을 보는 관점


                                                                                             

.재진교수 글 중, 일부내용 요약

 

□  인간의 의식 능력은 인간의 생존에 가장 적합한 정도로 진화되었다.

 

우리의 일상적 의식은 우리가 세상에서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만큼의 크기로 작동하며, 이 과정에 우리 주변의 수많은 물리적 자극 중에서 생존과 관련된 자극을 분류해 여과시켜 받아들인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조화롭고 안정된 의식을 유지하고 있다.
……

 

□  우리의 일상적인 의식은 지극히 개인적인 구성물이다.

 

이성적이라고 생각되는 우리의 의식은 단지 하나의 특수한 의식 유형에 불과하다.
과학에서 실험적 증거에 바탕을 논리의 전개는 나름대로 최선이기는 하나, 코끼리를 만진 장님의 경우와 같을 수 있다.
……

 

□  제한된 인간의 의식은 역기능도 갖고 있다.

 

인간은 현재 자신의 의식에 만족해 하지 않고, 아주 가까이 있는 다른 형태의 의식을 추구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다른 형태의 의식을 찾아 흔히 인위적인 무엇을 즐기고 있다. 흔한 예가 어떤 물질을 이용하는 것이다. 커피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는 일은 약간의 기분전환 정도의 의식변화 시도로 볼 수 있다. 음주는 좀 더 큰 의식변화 시도의 예다.
……

 

□  인간의 생명은 의식을 통해 그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있다.

 

의식을 상실한 채 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우리는 흔히 식물인간이라고 부른다. 지금은 비록 의식이 없으나, 언젠가 다시 의식이 돌아와 그 사람의 가치를 세상에 내보일 수 있다는 기대가 있으므로, 그 존재는 여전히 존중되고 있다. 사실의식에 대한 견해는 시대에 따라 달라져왔고, 역사적 배경에 따라, 지역에 따라, 종교에 따라, 혹은 학문적 배경에 따라 다르다. 과학의 관점에서, 그리고 진화론의 관점에서 의식은 필연적으로 우리의 생존, 그 자체다. 의식은 우리 내외부의 복잡한 환경에서 감각정보를 선택하여 단순화하고, 우리의 행위를 유도하고 감독하며, 이 과정에서 우선순위를 결정하고 불일치를 탐지하여 해소하는 기능을 하여, 결국 이 복잡한 세상에서 우리를 생존하게 한다.

……

 

□  일상적 의식은 자동화되어 있다.

 

굳이 우리가 의식을 의식하지 않아도 항상 우리를 지배하며 우리의 생존을 돕고 있다. 그러나 그 대가로 우리는 더 풍부한 세계를 바라볼 기회를 상실하기도 한다. 때로 자동화된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의식을 체험하게 되면 우리의 삶은 좀 더 풍부해질 수 있다.


……

 

 

■ 면역학이 말하는 ‘제2의 자아’         .동진의 醫文化 칼럼에서                                                                           일부발췌

 

‘당신이 말하는 마음은 뇌의  마음인가요,  몸의  마음인가요’

 

얼마 전 몸과 마음의 관계에 대한 리포트를 준비하던 과정에서 우리 몸에 ‘제2의 두뇌’, ‘몸 자체의 마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마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프란시스코 바렐라(Francisco J. Varela)가 들려준 이야기였는데, 한의사인 내가 생물학자의 말에서도 영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창피한 일이기도 했다.

 

한의대 학창시절에 이미 오장(五臟)에 깃들어있는 혼(), (), (), (), ()를 달달 외우고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그게 ‘뇌의 자아’에 대비되는 ‘몸 자체의 자아’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렐라는 그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신경계의 기능이 그 자체의 기억과 생각과 습관을 가진 인지적 정체성, 자아에 대한 감각을 가지는 것처럼 몸 또한 기억, 학습, 예측과 같은 비슷한 인지적 자질들을 가진 정체성 혹은 자아를 지니게 됩니다. 이 정체성은 면역계를 통해 제 역할을 하지요.

 

“면역계의 순환하는 연결망을 통해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에 내 피부의 분자는 내 간의 세포에게 연락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네트워크 면역학의 관점에서 보면, 뉴런들이 신경계 내에서 떨어진 지점들을 연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면역계는 다른 무엇보다 몸속에 있는 모든 세포들이 끊임없이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바렐라는 면역계를 통해 ‘신경계의 자아’와 구별되는 ‘제2의 자아’가 발현되고 있음 주장하였다. ‘자아’를 탐구하는 과학의 분야는 뇌신경과학이라고만 알고 있던 필자에게, 바렐라가 말하는 ‘몸의 자아’라는 개념은 한마디로 충격일 수 밖에 없었다. 더욱이 한의사로서 마음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머릿속에 주입된 대답만을 나열했던 기억이 있는 나로서는 드디어 내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멋진 대답을 찾은 것이었다. 앞으로 그와 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당신이 말하는 마음은 뇌의 마음인가요, 몸의 마음인가요’라고 되물을 수 있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행복한 일이다.  ......

 

 

 

 

 

■ 데카르트와 프로이트, 존재와 의식

 

                                                                        

F.A울프 "기계론적 우주관의 종말" 중에서 발췌

 

□  데카르트[Descartes, Rene 1596~1650]                                  

                                                                                                                   

   (Daum백과)

   . 프랑스의 수학자·과학자·철학자                                               
 
      스콜라 학파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처음 반대한 사람으로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 모든 형태의 지식을 방법적으로 의심하고 나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직관이 확실한 지식임을 발견했다. 사유를 본질로 하는 정신과 연장(延長)을 본질로 하는 물질을 구분함으로써 이원론적 체계를 펼쳤다. 데카르트의 형이상학 체계는 본유관념으로부터 이성에 의해 도출된다는 점에서 직관주의적이나, 물리학과 생리학은 감각적 지식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경험주의적이다.


본유관념(本有觀念 : 철학에서 경험을 통해 얻거나 구성한 관념과 달리 인간의 마음속에 태어날 때부터 있다고 주장되는 관념)에 기초하여 데카르트는 각자의 마음이 정신적 실체이고 육체가 물질적 실체라고 확신했다. 마음이나 영혼은 비연장적이어서 연장을 가진 육체처럼 부분들로 쪼개질 수 없는 까닭에 사멸하지 않는다. 데카르트는 나아가 신이 존재한다는 점도 증명하고자 했다. 그는 자신이 완전자로서의 신에 대한 본유관념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출발하여 신이 필연적으로 존재함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신이 필연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은 완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의 존재에 대한 이와 같은 존재론적 증명은 감각경험의 도움없이 본유관념에서 출발하는 추론에만 의거하여 사물에 관한 지식을 확립하는 데카르트의 합리론에서 핵심을 이루고 있다. 데카르트는 신은 완전하기 때문에 인간을 속이지 않으며, 따라서 세계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데카르트는 자신의 마음·신·세계 등이 존재하기 위한 형이상학 기초를 놓았다고 선언했다.

 

   . 철학과 도덕관

 

      데카르트의 목표는 자연에 정통하는 것이었다. 〈세계·광학·기상학·지리학〉에서는 지식 나무의 줄기에 대한 이해를 제공했고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에서는 그 뿌리를 해명한 뒤, 역사·의학·도덕 등 지식의 가지를 연구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역학은 의학이나 생리학의 기초이고 의학 또는 생리학은 도덕심리학의 기초이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육체를 포함한 모든 물체가 역학원리에 따라 작동하는 기계라고 믿었다(→ 기계론). 생리학을 연구하면서 동물의 육체를 해부하여 각 부분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보였고, 동물은 영혼을 갖지 않기 때문에 생각할 수도 느낄 수도 없다고 주장했다. 또 혈액순환에 대해서도 기술했으나, 심장의 열기가 혈액을 팽창·분출시킨다는 잘못된 결론을 내렸다. 

 

   .  나는 생각한다

 

       데카르트는 1691년 바바리아에서 폭설이 내린 2주일간 집안에 갇혀 지내면서 착상을 얻었다.
그것은 이른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다시 고대 그리스인들의 관점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 내려온 '존재 대 변화' 의 논쟁이었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그 논의를 한 걸음 더 발전 시켰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논리적으로 추론해 냈다. 즉 자신이 존재한다는 자각이야말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대단히 힘차면서 단순한 논리였다. 물론 태어나기 전이나 죽은 뒤에도 자신이 존재한다고 상상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그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 데카르트는 존재와 변화가 상호 보완적인 것임을 인식하게 되었고, 모든 것은 존재하는 것만도, 또 변화하는 것만도 아니라고 믿었다.
'나는 존재한다.' 는 말은 존재를 의미하며 '나는 생각한다.'는 말은 변화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존재는 변화의 토대이다. 또한 변화는 존재를 자각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데카르트는 뉴턴에게 '논리적 사고'라는 확고한 토대를 제공해 주었다.
 
데카르트는 대담하게도 '존재와 변화의 요소'만 가지고 우주에 관한 완전한 이론을 만들려고 했다. 그 요소란 바로 물질과 운동이다. 또한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우주관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을 연결하려고도 했다. 그는 운동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임을 이해하고 있었다.


......

 

□  프로이트

 

      1925년 미국의 어느 고등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쳤다는 죄목으로 법정에 선 스코프스를 피고로 한 이른바 `원숭이 재판'에서 진화론을 변호했던 유명한 변호사인 다로도 뉴턴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또 다른 유명한 재판인 악명 높은 레오폴드·로엡 살인 사건 재판에서, 그 살인자들이 유전과 환경의 희생자임을 역설하면서 그들을 변호하였다. 그들은 분명히 죄를 지었지만, 살인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자율적 행동이 불가능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들이 자라온 환경도 그러한 원인의 일부가 되었다. 따라서 자율적 행동이 불가능한 상황에 처했던 그들을 이 사회가 어떻게 처벌할 수 있겠는가? 그 살인자들 역시 그들에게 살해당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죄의 희생자들인 것이다. 뉴턴의 시계 장치를 멈출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처럼 라플라스, 마르크스, 다로가 뉴턴적 기계관에 영향받은 것은 분명하다. 확실히 전체를 다른 방법으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부분의 합으로, 그리고 부분을 이해함으로써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편하다.

 

과연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을까?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마음조차 물질에서 나온 복잡한 기계 장치에 불과하다. 바로 이렇게 생각한 사람이 지그문트 프로이트였다.
프로이트는 어떤 꿈의 영상들을 원초적인 관념, 신화, 의례 등과 연관지어 생각했다. 그는 이 꿈의 영상들이 `고대의 단편적 흔적'- 즉, 태고 적부터 두뇌에 잔존되어 왔던 정신적 요소들 - 이라고 주장했다. 잠재 의식이란 일종의 쓰레기더미인 것이다. 우리는 죄짓는 것을 근심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수천 년 전부터 살인, 강도, 도둑질을 해 왔던 우리의 선조들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 융 (Carl Gustav Jung 1875∼1961, 스위스 정신과 의사)

 

      융과 프로이트를 비교해 보면, 프로이트는 생물학적, 과학적인 데 비하여 융은 종교적, 철학적 색채가 짙다. 그의 심리학은 정신분석 이라기보다는 ‘구제법(救濟法)’에 가까웠고, 심적 결정론이라기보다 목적론을 강조했다.

 

리비도를 프로이트 처럼 성적(性的)이 아니라 모든 지각, 사고, 감정, 충동의 원천이 되는 에너지로 간주하였고, 마음은 쾌감원칙에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이 에너지에 의해 자율적으로 조절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마음, 즉 인격은 의식(意識)과 무의식으로 나누어서, 무의식은 개인적 무의식, 집단적 무의식으로 나누어 생각했는데, 의식은 자아(自我)와 가면(假面)으로 성립되고, 자아는 의식의 핵심이 되며, 가면은 환경에 대처해 가는 얼굴이다. 자아와 가면이 조화되지 못하면 심리적 부담을 일으킨다. 개인적 무의식은 경험에 바탕을 두는 것이지만 억압된 원망(願望)을 이르는 말이며 기본적으로는 의식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집단적 무의식은 전혀 의식되는 일이 없는 것이지만 인격 전체를 지배하고 종족적으로 유전된 것이며 개인적 경험을 초월한 것이다. 이 집단적 무의식은 애니마(anima), 즉 정신이 매우 깊고 오묘한 기저(基底)에 있는 여성상(女性像)과 애니무스(animus), 즉 남성상 등의 원형(原型)으로써 성립되어 있다. 이는 선사 시대로부터 계승된 인간의 표상능력(表象能力)이며, 모든 시대의 모든 인간이 만나지 않으면 안 될 곤란과 위험에 처하여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이 원형이 발달되어 통일된 인격이 만들어지는데, 이러한 인격의 개개 양상을 기술하는 것으로서 인격의 유형론이 거론되어 내향(內向), 외향 유형으로 구별되고, 지각, 사고, 감정, 충동의 심적 기능에 대응되어 8 유형으로 구별된다.

 

 

■ 의식과 생명


                                                                                               

 자료  : 소.흥렬,  일부내용 요약

 

의식의 기능 또는 의식적 기능은 새로운 차원의 기능이다.

물리적기능이나 화학적 기능과는 다른 차원의 기능이다. 자연의 세계에서는 생명이 있는 것과 생명이 없는 것으로 구별 할 수도 있다. 물리.화학적 반응은 하면서도 의식적 반응은 하지 않는 것은 생명이 없는 것이다. 자연 지능인 생물체의 지능은 중층적 반응을 하는 중층적 구조를 하고 있다. 이러한 중층적 사고는 진화의 산물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더 높은 단계로 진화 했다는 것은 인간의 두뇌가 다른 동물의 두뇌와는 다른 차원의 사고 기능을 할 수 있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을 합리적 동물이라고 말 할 때는 이성적 사고 능력을 뜻한다. 다른 동물보다 좀 더 차원 높은 사고 기능을 가진다고 보는 것이다. 문자화, 기호화 된 언어로 논리적인 계산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 특유의 능력이다. 연역 논리적 계산만이 아니라 비연역 논리적 학습과 창안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인간 특유의 사고 능력이다.

 

인간 의식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사고의 과정은

무의식 또는 잠재의식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영향을 받는다. 이를테면 소리를 듣는 청각 기능이 음악을 감상하는 차원에까지 이르고, 나아가서는 영혼의 감동을 체험하는 차원에까지 이를 수 있다는 것은 인간 특유의 중층적 두뇌기능이 아니면 불가능 할 것이다. 이것은 진화의 산물이며, 생명체로의 진화 과정에서 성취 된 능력이다. 

생명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분석한 형상인, 질료인, 목적인, 동력인이라는 네 가지 원인조건이 모두 갖추어야 한다.


컴퓨터 프로그램은 형상적으로 생명현상을 모의한 목적인에 해당하며 이를 구동하는 전기의 힘은 생명의 동력인 여러 형태의 열량과는 다르며  컴퓨터의 재료 또한 여러 가지 세포로 구성된 다양한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유기체며 복합체인 생명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생명체는 진화의 산물이기 때문에 기능적으로 다양한 중층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모든 생명은 의식 기능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때의 의식기능은 신경기능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의식의 진화 과정은 너무나 큰 정도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으므로, 이를 테면, 인간의 의식과 식물의 의식을 같은 차원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의식은 생명현상이 토대가 되어 나타난 것이고, 생명체와 더불어 진화되어 온 것이기 때문에 생명체로서의 반응을 하지만 더 높은 수준의 의식적 반응을 하지 못하는 “식물인간” 이나 인공 생명의 경우와 구분되어진다.

의식 진화도 높은 수준의 의식은 식물적 의식이나 동물적 의식과 같은 의식 수준을 바탕으로 해서만 된다.


우리의 잠재 의식이나 무의식은 그러한 하위 차원의 의식 기능을 말 하는 것으로 이해 된다. 우리 속에는 동물적인 것 또는 짐승적인 것이 살아 있고, 심지어는 식물적 의식까지도 잠재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 자아와 관념

 

생명체의 몸은 하나의 세포로부터 시작하여 성장해 간다.

다양한 세포들과 다양한 기관들을 만들어 가면서 성장한다. 성장하고 변화해 가면서도 하나의 몸으로 그 구조와 기능을 유지해 간다. 말하자면 신체적 자아의 기능을 하는 것이다. 몸이 필요로 하는 것을 추구하고 섭취한다. 몸의 이러한 자아 기능은 모든 생명체에게 필요한 의식 기능이다. 신체적 자아 기능 또는 본능적 자아 기능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것은 관념적 자아와 구분 된다. “나는 생각한다”, “나는 배 고프다”라는 언어적인 표현에서의 주체가 되는 것이 “개념적 자아, 관념적 자아”이다. 다른 동물들에게 이러한 관념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세계에서의 자아개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인간의 자아 의식이 특이한 것은

그것이 관념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종의 가상현실(Virtual reality) 이라고 할 수 있다. 관념적으로 만들어진 가상 현실의 세계이며 언어적으로 표현 될 수 있는 가상 현실의 세계이다. 언어적으로 표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이 객관화 될 수 있다는 것이고 일반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 속에 있는 관념의 세계이지만 객관적 사회성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가상 현실의 관념세계를 갖게 됨으로서 우리 인간은 비로소 “나의 생각”, “나의 세계” 그리고 “나의 마음”을 말 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가상 현실의 세계는 마음대로 조작 될 수 있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주관적 세계, 자율적 세계, 자기만의 세계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이며, 그 세계의 주인이 마음으로서의 자아이므로 실제 현실에서는 속하지 않는 초월적 존재로 인식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가상현실의 관념 세계가 몸과 마음의 이원론을 생각하게 하며 관념적 초월성을 믿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자주적이고, 자율적이고, 사변적이고, 창조적일 수 있는 것은 가상 현실로서의 관념적 세계 때문이다. 데카르트가 구별하고자 한 마음의 세계도 이 관념의 세계였다. 관념적 자아 현실은 물질적 실제 현실로부터 독립된 또 다른 실제의 세계로 생각한 것이었다. “나는 생각한다”라는 언어적 표현은 그 관념의 세계에서 언명되는 것이며, 그러한 언어의 주체인 자아도 그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정신적 자아, 즉 관념적 존재로서의 자아라는 것이다.

 

그러나 관념의 세계인 가상 현실은 기능적으로 초월적이고 추상적이긴 하지만 현재 현실을 떠나서 독립적으로 존재 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관념의 세계는 기능적으로 실제의 세계로부터 소외될 수 있다. 격리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기능은 실제 세계에 의존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두뇌의 기능이 없으면 관념적 마음의 기능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신체의 기능이 없이는 두뇌의 기능이 있을 수 없다. 마음의 가상 현실은 몸의 실제 현실과 구분 될 수 있으나, 분리될 수는 없다.  몸을 떠난 마음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마음대로 생각할 수도 있고, 마음대로 행동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지나치게 되면 착각과 환상에 빠지게 된다. 결코 몸을 떠날 수 없는 마음이 몸의 실제 현실을 부정하는 과오를 범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죽이고 몸대로 행동해야 할 때가 있다. 마음을 비우고 몸이 알아서 하도록 해야 할 때가 있다.

 

개념적 자아 또는 관념적 자아는 인간 특유의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것은 신체적 자아나 본능적 자아를 토대로 해서만 진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아의 기능이나 자아의 의식이 하등 생물로부터 우리 인간에게까지 진화해 온 것이다.

 

 

■ 정 신 (精神, mind)

 

인용 : FM 국어사전, 위키백과

 

. 정신이란, 육체나 물질에 대립되는 영혼이나 마음   . 사물을 느끼고 생각하며 판단하는 능력. 또는 그런 작용   . 마음의 자세나 태도   . 사물의 근본적인 의의나 목적 또는 이념이나 사상   . (철학) 우주의 근원을 이루는 비물질적 실재

 

   . 영혼 :

정신은 관습적으로 육체나 물질에 대립하는 영혼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어 왔음,

     대다수의 종교는 육체에 대립되는 정령.신령.성령과 같은 형식의 정신에 대한 믿음을 가짐

      . 정령은 코란의 114개 항목들(꾸란(코란)의 수라 중 하나인 알진(정관사) 항목). 성령은 기독교 교리의 항목들. 신령은 산신령과 같은 동양 고유의 믿음

 

 

   . 마음 :

심리학에서 정신은 마음의 작용을 나타내는 말로 쓰임. 프로이트는 정신의 작용을

     리비도, 자아, 초자아 등으로 분석하여 프로이트 이론을 따르는 심리학을 정신분석학이라

     부르기도 함

 

   . 이념 :

정신은 “민주주의 정신”과 같이 개인이나 집단이 갖는 이념과 사상에 대한 태도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함

 

   . 철학 :

고대 그리스 철학 이후 서양 철학에서 정신은 형이상학의 주된 주제였음. 서양 철학에서 정신은 종종 신과 같은 성질의 것으로 취급되었고, 인도 철학에서 정신은 생명의 본질로 다루었으며, 힌두교의 아트만은 육체 보다는 정신을 우위에 둔 사상임. 불교에서 정신은 불구부정 부증불감(不垢不淨 不增不減)”의 존재로 여겼으며, 유교에서 정신은 경원의 대상이었음. 공자는 하늘의 이치를 예()의 준거로 제시하였으나 괴력난신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사후 세계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음

. 不垢不淨 不增不減  : 더럽혀질 수도 깨끗해질 수도 없고 더할 수도 뺄 수도 없다는 뜻                      반야심경의 한 구절. 유교 : 〈선진제십일〉에서 공자는 사후 세계를 묻는 계로에게 “삶도 알 수 없는데,           죽음을 어찌 알랴?(曰未知生焉知死)고 대답하였음

 

 

 

□  정신 (精神, mind)

     인용, FM 다음백과

. 지각·기억·고려·평가·결정 등을 포함하는 복합적인 능력

 

. 정신은 어떤 의미에서는 감각, 지각, 감정, 기억, 욕구, 여러 형태의 추론, 동기, 선택, 인격적 특색, 무의식 등으로 반영되는 그 어떤 것이다. 관찰할 수 있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정신 영역은 흔히 인간만의 고유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이론에서는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에게도 정신이 존재한다고 보며 어떤 이론은 정신을 보편적 물질의 성질로서 간주하기도 한다. 또 다른 관점에 따르면 초인간적 정신이나 지능 또는 하나의 절대적 정신, 초월적인 정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  정신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는 것들

 

. 사고(思考)와 감각 :  사고한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없다면, 정신은 거의 또는 전혀 의미가 없을 것이며, 사고는 거의 모든 관찰자에게 단순히 막연한 느낌의 수용 이상을 나타낸다. 사고는 반사적일 뿐만 아니라 반성적(反省的)인 것이어서 사고 자체를 숙고하고 사고의 본성을 정의하며 정신이론을 발달시킬 수 있다. 자의식이나 자기인식(self-knowledge)이 없는 세상은 아마도 전통적인 개념의 정신이 나타나지 않는 세상이 될 것이다.

 

. 지식(知識) : 만일 어떠한 형태의 사고·판단·추론 등이 없는 감각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곧 최소한 초보적인 형태의 지식, 즉 한 두 가지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의식 또는 앎이 존재한다는 것이나, 사고가 완전히 결여된 상태에서는 옳고 그름의 구별, 지식과 오류와 무지의 차이, 또는 지식·신념·의견 간의 차이 등을 감각에 적용할 수 없을 것이다. 지식을 이러한 특성을 가진 것으로 이해하면 사고의 존재를 의미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유로 정신의 존재를 의미하게 된다. 더욱이 자각(自覺)이 있다는 사실로 인해 정신의 존재는 더욱 분명해진다. 감각은 대상에 대한 인식이며, 이 범위에서 보면 지식의 일종이다. 그러나 결코 감각은 그것 자체를 감각하거나 알 수는 없다.

 

. 목적 또는 의도 : 바라고 예견한 목적을 위해서 어떤 방법을 사용하여, 목표나 업무를 예지하고 행동의 방향을 계획 또는 의도한다. 감수성의 경우에서와 같이 욕구라는 현상도 그 이상의 또 다른 어떤 조건 없이는 정신의 영역을 나타내지 않는다. 목적은 감각 이상의 요소, 즉 생물체의 행동의 수준을 요구한다. 이때 감각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을 제공하는 것으로 목적은 감각과 같은 제한점을 갖는 열정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미래의 결과에 도달하기 위한 행동 방향이라고 불릴 수 있는 요소인 목적은 정신의 모든 의미에 있어 공통적 요소이거나 최소한 정신과 연관된 요소인 것이다. 이것은 때때로 의지력, 즉 이성적 욕구나 지적 욕구라고도 불린다. 목적은 때때로 의지적 행위로 간주되기도 하는데, 의지는 사고와 함께 정신과 이해의 2가지 주요활동의 하나이다. 때로는 목적이 정신성의 본질로 간주되기도 한다.

 

. 사고·지식·자기인식·목적 등은 모든 정신이론에 보편적이며 개념의 발달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인간정신이란 무엇인가,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는가, 어떤 요소들로 구성되는가, 또한 정신 자체는 어떠한 전체적인 것에 속해 있는가 등에 관련된 이론적 갈등은 그 주제에 대한 전체 논쟁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  정신이론에서의 질문들

 

   . 정신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 정신적 작업을 할 때 정신은 어떻게 그러한 작업을 수행하는가?   . 어떠한 장점이나 결함을 가지고 있는가?   . 물질, 신체기관, 물질적 조건 등과 정신과의 연관성은 어떠하며,    . 하나의 정신과 또 다른 정신과의 관계는 어떠한가?(심신이원론)   . 정신은 인간과 동물의 공통적 소유물인가?    . 아니면 인간의 정신과는 분명히 다른 동물의 정신이 따로 있는가?   . 인간과 세상의 실체적인 생활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정신이 있는가?    . 정신과 관련된 기능을 수행하는 기계의 능력인 이른바 인공지능의 한계는 무엇인가?

 

   . 이러한 논쟁에서 볼 수 있는 견해로서는 인식론과 형이상학, 논리학, 윤리학, 종교철학 등에서 정신철학에 관련되어 있으며, 이러한 상호관계는 신경학·심리학·사회학·역사학 등과 같은 경험 학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  의식의 인식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중에서, 윌리엄 제임스(Wiliam James)

"소위 우리가 합리적인 의식이라고 말하는, 정상적으로 깨어 있는 의식이란, 의식의 특정한 한 유형에 불과하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다른 형태로 존재 할 수 있는 또 다른 의식들이 있다. 우리는 이런 의식들이 존재한다는 것 조차 인직하지 못한 채 살고 있다. 그러나 어떤 필요에 의한 자극을 통해서 필시 어딘가에 적용될 수 있고, 또 적응 할 수 있는 정신의 명확한 유형으로서의 그 의식을 그가 들어 있는 어떤 영역 안에서 끌어낼 수 있다."

 

 

 

 

  정신은 무엇인가?

                   헤겔의 정신현상학

                                                                                                                 글: 철학으로 세상열기

      정신은  감각, 지각, 감정, 기억, 욕구, 여러 형태의 추론, 동기, 선택, 인격적 특색, 무의식 등으로 반영되는 것이다.  정신을 보편적 물질의 성질로서  초인간적 정신이나 지능 또는 하나의 절대적 정신, 초월적인 정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思考, 사고한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없다면, 정신은 거의 또는 전혀 의미가 없을 것이다.  사고를 감각의 결과로 여기는  의견이기도 하다. 양자 모두 사고를 감각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며, 감각으로 얻어진 자료들을 정교화한 것 또는 전적으로 감각의 범위를 넘는 대상에 대한 이해로 간주하고 있다.

 

知識, 어떠한 형태의 사고·판단·추론 등이 없는 감각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곧 최소한 초보적인 형태의 지식, 즉 한 두 가지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의식 또는 앎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고가 완전히 결여된 상태에서는 옳고 그름의 구별, 지식과 오류와 무지의 차이, 또는 지식·신념·의견 간의 차이 등을 감각에 적용할 수 없음은 사실일 것이다. 지식을 이러한 특성을 가진 것으로 이해하면 사고의 존재를 의미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유로 정신의 존재를 의미하게 된다. 더욱이 자각(自覺)이 있다는 사실로 인해 정신의 존재는 더욱 분명해진다. 감각은 대상에 대한 인식이며, 이 범위에서 보면 지식의 일종이다. 그러나 결코 감각은 그것 자체를 감각하거나 알 수는 없다.

 

  '정신'의 모든 의미에서 공통된 요소로  '지성(知性)의 반사', '이해의 재귀력', '자신의 행동을 반영하는 이해력'이나 '자의식'으로 표현된다. 표현이 어떻든 간에 자의식이나 자기인식(self-knowledge)이 없는 세상은 아마도 전통적인 개념의 정신이 나타나지 않는 세상이 될 것이다.

 

무생물적·무감각한 자연스런 경향조차도 욕구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즉 여기에서 정신의 증거로서 받아들여지는 목적이나 의도는 욕구에 내포되지 않는다.

 

목적은 감각 이상의 요소, 즉 생물체의 행동의 수준을 요구한다. 이때 감각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을 제공하는 것으로 목적은 감각과 같은 제한 점을 갖는 열정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열정은 제어되지 않았을 때 즉각적으로 감정적 배출을 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미래의 결과에 도달하기 위한 행동 방향이라고 불릴 수 있는 요소인 목적은 정신의 모든 의미에 있어 공통적 요소이거나 최소한 정신과 연관된 요소인 것이다.

 

이것은 때때로 의지력, 즉 이성적 욕구나 지적 욕구라고도 불린다. 목적은 때때로 의지적 행위로 간주되기도 하는데, 의지는 사고와 함께 정신과 이해의 2가지 주요활동의 하나이다. 때로는 목적이 정신성의 본질로 간주되기도 한다.

 

 사고·지식·자기인식·목적 등은 모든 정신이론에 보편적이다. 인간정신이란 무엇인가,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는가, 어떤 요소들로 구성되는가, 또한 정신 자체는 어떠한 전체적인 것에 속해 있는가 등에 관련된 이론적 갈등은 그 주제에 대한 전체 논쟁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정신은 인간과 동물의 공통적 소유물인가, 아니면 인간의 정신과는 분명히 다른 동물의 정신이 따로 있는가, 인간과 세상의 실체적인 생활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정신이 있는가, 일반적으로 정신과 관련된 기능을 수행하는 기계의 능력인 이른바 인공지능의 한계는 무엇인가 등이다.

 

인식론과 형이상학, 논리학, 윤리학, 종교철학 등에서 얻어지는 결론은 모두 정신철학에 관련되어 있으며, 정신철학의 결론도 이 분야에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이러한 상호관계는 신경학·심리학·사회학·역사학 등과 같은 경험 학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백과사전)

 

 

 

예나 전투의 포성 속에서 헤겔이 쓴 “정신현상학”에는 크게 두 가지 사상이 들어 있다.

 

하나는 철학에서 중요한 인식론의 문제로서 인간의 지식이 성장하는 과정을 역사적 맥락에서 변증법적으로 제시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통해 인간 노동의 중요성을 밝힌 것이다.

 

첫번째 문제와 관련해서, 헤겔은 인간의 인식 능력의 발전 단계를 감각적 확신, 지각, 오성, 정신으로 제시하고 있다. 

 

보기를 들어 설명해 보자. 우리가 김포공항에서 눈앞에 있는 비행기를 보고 "이것은 비행기다"라고 말했다고 하자. 이것이 감각적 확신 단계의 인식이다.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비행기를 보니까 조금 전 앞에 있는 비행기를 보고 한 말이 또 나온다.  분명히 처음에 "이것은 비행기다"라고 한 것은 앞에 있는 비행기를 보고 한 말인데 옆에 있는 비행기에도 맞는 말이다. 왜 그럴까? 앞에 있는 비행기와 옆 비행기가 공통의 속성들, 즉 보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비행기는 모두 몸체, 날개, 바퀴, 엔진 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비행기가 몸체, 날개, 바퀴, 엔진 등으로 이루어진 사물이라고 인식하게 된다. 이것이 지각 단계의 인식이다.  그런데 몸체, 날개, 바퀴, 엔진을 을 아무렇게나 조합해 놓으면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된 비행기라 하지 않는다. 적어도 비행기는 그 기능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어떤 구조적 원리에 의해 만들어 져야 한다. 우리는 비행기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저 비행기가 구조적 원리에 맞도록 잘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이런 인식은 과학의 법칙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가령 만유인력 법칙의 경우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이 법칙 자체를 볼 수는 없다.

 

돌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모습, 행성의 운동, 비행기가 날아가는 모습 등을 보고 만유인력 법칙을 인식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만유인력 법칙이 구현되어 있는 구체적인 사물이나 운동을 보고 이 법칙을 인식할 수 있다. 이것이 오성 단계의 인식이다.  돌이 떨어지고 비행기가 날아가는 '현상'을 통해 만유인력 법칙이라는 '본질'을 인식하는 것은 객관적 진리를 인식하는 것이다.  객관적 진리는 인간 의식이 파악한 사고의 내용과 사물의 본질이 일치할 때 얻을 수 있다. 이런 진리를 얻는 것이 인간의 이성이다. 이 단계에서는 개별 현상과 보편 본질 사이의 구별이 없고 일치한다.

 

그런데 헤겔에 의하면 감각적 확신, 지각, 오성으로 전개되는 인식 능력의 각 단계는 이전의 상태를 언제나 잊어버리고 발전하는데, 이전의 단계를 모조리 포함하고 각 단계를 자신의 계기로 파악하는 것이 정신이다. 다시 말해서 정신 이전의 모든 단계는 정신의 낮은 형태의 인식 능력이다.

 

정신은 이성이 인간 사고의 내용과 객관적 사물의 본질을 일치시키고 종합함으로써 생겨나는 능력이다. 그리고 이 정신이 최고의 절대 지식을 얻는 이른바 절대 정신이다. 인간이 대상을 인식해 가는 과정은 언제나 낮은 단계의 지식을 매개로 발전하면서도 낮은 단계의 지식을 부정하고 궁극적으로는 정신에 의해 통합되는 과정이다. 이런 뜻에서 헤겔의 인식론은 변증법적이다. “정신현상학”에서 정신은 다른 낮은 형태의 배역들을 무대에 적절히 등장시키면서도 자신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는 연출자와 같다.

 

그리고 그 연출자는 배역을 임의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들로부터 빌려 온다. “정신현상학”에 나타난 감각적 확신, 지각, 오성, 이성과 같은 의식의 형태들은 그렇게 해서 정해진 배역들이다. 트로이 전쟁이 끝난 뒤 오디세이가 고향 아티카에 도달하기까지 숱한 우여곡절을 겪어야 하는 운명에 놓인 것처럼, 인간 의식 역시 절대 지식에 도달할 때까지 숱한 대립과 모순의 과정을 겪으면서 '경험의 역사'를 이루어 가야 하는 운명에 놓여 있는 것이다.

 

요컨대 “정신현상학”은 헤겔이 의식의 이런 운명을 인위적으로 꾸며내어 자신의 예술적 입맛에 맞게 구성한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가 겪어 온 과정을 의식의 형태들을 통해 철학적으로 기술한 것이다. 헤겔 철학은 자기 시대가 던진 현실 문제를 철학적으로 기술하려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 문제와 관련해서, 헤겔은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통해 노동의 중요성을 끌어낸다. 헤겔이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통해 자의식과 노동을 설명한 것은 역사적으로 최초의 계급 사회인 고대 노예제가 형성되는 과정에 해당한다. 헤겔에 따르면 인간이 자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은 욕망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이 욕망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 받고 싶은 욕망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언뜻 자기 스스로 만족을 얻고 싶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은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무시한 명예, 돈, 권력은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명예, 돈, 권력은 사회에서 인정하는 명예, 사회에서 유용한 돈, 사회적 관계에서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권력이다. 자기 스스로의 만족도 따지고 보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음으로써 얻는 만족이다. 

 

인간의 역사에서는 서로 인정 받으려 하는 욕망 때문에 싸움이 일어났고 그래서 주인 (지배 계급)과 노예(피지배 계급)가 생겼다. 인정을 받기 위해 두 자의식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승리한 쪽은 주인이 되고 패배한 쪽은 노예가 되었다. 이 '인정 투쟁'에서 패배한 노예는 자신을 살려 준 대가로 주인에게 봉사해야 한다. 노예는 노동을 통해 자연과 관계하면서 주인은 노예의 노동 산물을 향유한다. 노예는 끊임없이 주인에게서 죽음의 공포를 경험한다. 게으름은 곧 죽음을 뜻한다. 노동의 노예가 생존하는 방식이다.

 

고대 노예에게 집어 넣은 죽음 공포는 채찍과 같은 직접적인 물리력이었지만,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가 노동자에

게 불어넣은 죽음의 공포는 해고라는 딱지다. 그러나 헤겔은 죽음에 대한 공포 속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이야말로 자립적인 자의식을 확립하는 계기라는 사실을 밝혀 냈다. 노예는 노동하는 과정에서 노동 대상의 객관적 법칙을 인식하고 그 대상을 자신의 의지에 종속 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깨달음은 자신의 잠재 능력에 대한 확인이다. 이에 반해 주인은 물질 생활 전체를 노예에게 의존함으로써 오히려 자립성을 잃는다. 노예가 없으면 주인은 물질 생활을 영위할 수 없고 나아가 생존마저 위협을 받게 된다. 반면 노예는 주인이 없더라도 자신의 창조적 노동을 통해 스스로 생산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사실 주인은 노예의 노예이고, 노예는 주인의 주인인 셈이다.

 

이처럼 주인과 노예의 실질적 관계가 역전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죽음의 공포를 경험하면서 자의식을 확립하는 노예의 노동이다. 노동이야말로 인간이 참으로 현실의 생활을 영위하고 역사를 형성해 가는 원천이다. 헤겔의 이런 노동관은 마르크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정신은 진화의 우연한 결과인가?                                                                                                                                                                                      .용현, 1997  :   내용중 일부 발췌

 

 

 진화와 자연선택

 

 

다아윈의 진화론에서 종의 진화가 발생하는 두 가지 과정은,

   . 다양성을 낳는 생산자   . 다양성을 걸러내는 필터  

첫째는 무작위적으로 발생하는 (돌연)변이이고, 둘째는 자연환경임

 

다아윈에 와서 생명은 스스로 환경에 적응해가는 능동적 존재에서 환경에 의해 선택(또는 도태)되는 수동적 존재로 바뀌었다. 데카르트에서 시작된 불활성 또는 수동적 존재로서의 실체개념은 다아윈에 와서 생명의 영역에 까지 확장되었다.

 

관성의 개념이 도입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운동의 원인이라는 개념이 물리학에서 추방되었고 이제 물리학에는 운동변화의 원인 즉 가속도의 원인만이 문제되게 되었다. 이로써 물질의 활성은 수동적인 불활성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라마르크의 변이의 원인이라는 개념이 생물학에서 추방되고 생물학은 이제 변이의 보존의 원인만을 문제 삼게 되었다. 여기서 생명이 가졌다고 간주되던 고유한 활성 또는 생기는 물질적 불활성으로 대체되었다. 이제 생명은 물질과 마찬가지로 단지 우유적 산물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자연선택론이 진화론과 양립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진화가 보다 나은 것에로의 진보를 의미한다면 자연선택에 관한 다아윈 본래의 의도와는 양립하기 어려워 보인다.

 

자연선택과 진화의 관계에 대해서 다음 세가지 입장이 가능

   . 서로 동일한 것이다.   . 서로 전혀 다른 것이다.   . 서로 일정한 논리적 연관이 있다.

 

 다아윈은 자연선택을 "환경에 적합한 변이의 보존"으로 정의하고 있다. 즉 진화의 가장 크고 쉬운 양상은 다른 것이 정체되거나 축소되거나 사멸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증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첫째는 현재의 종의 생존을 설명해준다. 그러나 그것의 미래의 생존을 예측해 주지 못한다. 이 예측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환경에의 적합성의 기준이 종의 생존과는 별도로 주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기준에 의해서 우리는 특정 종의 과거와 현재의 생존과 번영을 설명할 수 있고, 그것의 미래의 생존과 번영을 예측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적합성의 기준이 바로 진화의 기준이다.

 

그렇다면 진화의 기준은 무엇인가? 스펜서에 의하면 진화란 물질의 완성이요 또 이에 수반하는 운동의 소산(消散)이다. 진화가 있는 동안에 물질은 불확정하고 고르지 않은 '동질성'(intergration)으로부터 확정되고 잘 어울린 '이질성'(differentiation)으로 넘어간다. 그래서 스펜서는 생물들이 보여주는 기능의 분화 및 전문화의 양을 진화의 척도로 삼고 있다. 진화를 결정하는 기준은 각 기관의 다양성, 전문성, 그것에 따른 효율성의 증가이다. 그리고 자연선택에서의 성공, 즉 많은 자손의 생존과 번영은 첫째의 입장이 말하듯이 그 자체 진화가 아니라 그것의 결과인 것이다.

 

둘째의 입장은 본래 다아윈의 입장인데 다음 인용문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자연선택은 반드시 진화적 발달을 포함할 필요가 없다. 자연선택은 단지 복잡한 생활관계 밑에서 각각의 생물에게 발생하는 유리한 변이를 이용하는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아윈은 자연선택과 진화를 엄격히 구분한다. 물론 자연선택에 의해서 효율적인 변이가 보존되고 축적됨으로써 그 결과로 유기체가 점점 개량된 형태로 '진화'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진화된 유기체가 덜 진화된 유기체 보다 자연선택의 체에 먼저 걸러져 도태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므로 그 결부는 우연적인 것이며 개념상 명백히 구분되어야 한다. 사실 흔히 오해되고 있지만 다아윈의 『종의 기원』은 진화를 다루고 있는 책이 아니다. 이 책의 '진화의 체계'라는 절에서 겨우 몇 페이지 간략히 (그것도 부정적 시각으로)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진화를 논외로 한 자연선택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첫째의 입장에서처럼 진화가 자연선택과 동어반복이 아니라면 다아윈이 생각한 '진화적 발달'이란 도대체 어떠한 것일까? 그는 여기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다.

……

 

  진화의 방향

 

……

최근 프리고진(I.Prigogine)에 의해서 다듬어진 물질의 자기조직화 현상은 진화를 자연의 내재적 성향으로 볼 수 있는 좋은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이제 목적론에 빠지지 않고도 진화를 논의할 수 있게 되었다. 생명은 설계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기계론자 들이 보듯이 전적으로 무작위적인 것은 아니다. 물질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를 조직화 할 수 있다.

 

 프리고진에 의하면 평형에서 먼 혼돈은 자기조직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는 만일 열평형에서 멀리 떨어져 나올 수 있다면 많은 시스템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을 조직화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유명한 '벨로우소프-자보틴스키(Belousov-Zhabotinsky) 반응'이다. 시료들 중 하나의 농도가 임계점까지 증가되면 화학작용은 변환되어 화학적 농도가 마치 화학시계처럼 규칙적으로 요동하기 시작한다.

……

수십 억 개의 분자들의 활동으로부터 유래되는 이러한 정도의 질서는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보이며, 사실상 화학시계들이 관측되지 않았다면 아무도 그러한 과정이 가능하다고 믿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단번에 색을 바꾸기 위하여 분자들은 '교신'할 수 있는 방법을 지녀야만 한다. 계는 전체로서 행동해야만 한다. 우리는 화학에서 신경생리학에 이르기 까지 너무나 많은 분야에서 명백하게 중요한 교신이라고 하는 이 중요한 단어를 계속해서 접하게 될 것이다. 산일 구조들은 교신을 위한 가장 간단한 물리적 기구들 중의 하나를 도입하는 것이다.  

 

 프리고진의 이러한 물질의 자기조직현상은 혼돈계의 연구를 통해서 더 자세히 규명되어 가고 있다. 혼돈이론을 정착시킨 산타페 연구소의 설립자중의 한사람인 도인 파머(J.D.Farmer)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들은 대부분 자기조직화가 일반적 속성(우주 전체는 물론 소위 '복잡계'라고 불리는 수학적 계에 있어서 조차도)이라고 믿고 있다. 복잡계는 일단 가동시켜 보면 그들은 자연스럽게 카오스라는 조직화되지 않고 무차별적인 상태에서 조직되고 고도로 차별적인 그리고 고도로 자율적인 상태로 발전해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직된 구조는 그저 계를 움직이게만 해도 자발적으로 진화되어 나온다. 물론 그 중에는 더 잘되거나 더 높은 수준에서 진화되어 나오는 계도 있기 마련이며 그 모두 어느 정도 우연성이 개재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무질서에서 조직화로의 발전은 자연진화에 의해 시작단계의 적응도에 따라 다르다. 때로는 시간이 지나면서 역행하는 것도 있다. 하지만 복잡계의 전반적인 경향은 자기조직화를 지향하고 있다...자기조직화의 간단한 형태가 여러 상이한 컴퓨터 시뮬레이션 속에서도 나타나는데 이는 그 중에 약한 '복잡계'도 많다는 것을 시사한다. 약한 계는 오직 간단한 자기조직화 형태로만 나타나며 그 중 강한 것은 생명체와 같은 복잡한 형태로 발전되어 간다.

 

최근에 논의되고 있는 인공생명(artificial life)은 특히 흥미롭다. 콘웨이(J.H.Conway) "라이프"(Life)는 단순한 규칙에서 어떻게 복잡한 질서가 출현할 수 있는지를 인상 깊게 보여주고 있다. 파운드스톤(W.Poundstone)은 『우주의 회귀적 구조』(The Recursive Universe)라는 책에서 이 라이프를 상세히 다루고 있다……

 

사물의 능동성이나 자기조직화 자체가 새로울 것은 없다. 그것은 오히려 물의 수동성과 우연성에 기초한 기계론적 전통보다 훨씬 오래된 직관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항상 목적론, 생기론, 신비주의의 형태로 표현되어 왔다. 문제가 있었다면 그 직관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 표현방식에 있었다. 생명의 현상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대안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비평형열역학』 『혼돈이론』,『인공생명』은 이 직관을 표현할 새로운 언어를 제공해주고 있다.

 

이제 우리는 공허한 신비주의나 동어반복적인 목적론에 빠지지 않으면서 생명의 의미나 진화의 방향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다아윈은 목적론에 호소하지 않고 진화를 논의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이 없었지만 (그래서 그는 결국 침묵의 전략을 택했다) 이제는 그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것은 앞으로 생명에 대한 논의의 공간을 훨씬 넓혀 놓을 것이다.

 

 

  저절로 출현하는 질서로서의 생명

 

생명은 어떻게 출현한 것일까?

자연신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신의 설계인가 아니면

기계론자들이 주장하듯이 물질들의 우연한 조합인가?

 

페일리(W.Paley)는 전자를 옹호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풀밭을 걸어가다가 돌 하나가 발에 채였다고 상상해보자. 그리고 그 돌이 어떻게 거기에 있게 되었는지 의문을 품는다고 가정해보자. 그것은 항상 거기에 놓여 있었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답의 어리석음을 입증하기란 그렇게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돌이 아니고 시계를 발견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그 장소에 있게 되었는지에 대해 앞서 했던 것과 같은 대답 즉 그것은 항상 거기에 있었다고 대답한다면 그것의 어리석음을 입증하기란 아주 쉬울 것이다.

 

 그러나 기계론자들은 우연의 조합으로도 충분한 시간과 공간이 주어지면 시계와 같은 복잡한 것이 출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페일리가 말하듯이 이들의 주장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보여주기란 아주 쉽다. 이 문제를 도식적으로 검토해보자. 시계를 만드는 모든 부품들이 들어있는 저장 통이 있고 이 부품들을 가지고 그와 똑같은 시계를 만들고자 한다고 해보자. 이 부품들의 수가 100(실제로는 훨씬 많겠지만)라고 가정하자. 100개의 부품들이 시계가 되도록 배열되는 방법은 오직 1가지가 있을 뿐이다. 마구잡이로 이 부품들을 배열하여 이 한가지 방법을 얻을 수 있는 확률은 얼마일까? 우발적으로 이것이 얻어질 수 있는 확률은 (1/2)^100 1/10^30이다. 이것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큰 수이다. 더우기 생명은 고작 100개의 부품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다. DNA를 구성하는 분자들이 무작위적 배열로 DNA를 조립할 확률은 10^40,000(?)분의 1이다. 이것은 우주의 전자의 총수 10^80(?)에 비해 엄청나게 큰 수이다. 이것이 저절로 출현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여기서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이 두 입장의 차이가 아니고 오히려 그 공통점이다. 어느 입장이든 지구상의 생명의 출현은 극히 이례적인 현상이며 1회 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생명은 이 우주의 이방인이다. 생명의 우연적 출현을 주장해온 모노(J.Momod)는 그 심정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인간은 결국 우주의 냉혹한 광대함 속에서 자신이 혼자라는 것을 알아버렸다. 이 광대한 우주로부터 인간은 우연히 출현하였다. 인간의 운명과 의무 그 어느 것도 정해져 있지 않다.

 

 필자는 자연신학들이 보는 우주가 신을 논외로 한다면 이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물질이 스스로 자기조직화 한다면 생명의 출현은 자연신학자들이 주장하듯이 그렇게 불가사의한 것도 아니며 확률론적 논증이 보여주는 것처럼 그렇게 불가능한 사건도 아니다.

 

카우프만(S.Kauffman)은 이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주었다. 카우프만은 100개의 전구들의 연결망을 만들었다. 각 전구들은 다른 임의의 두 전구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두 전구들의 현재의 상태에 의해 그 전구의 다음 시간단계에서의 상태가 결정된다. 그 결정조건도 16개의 불함수 중 어느 하나가 임의적으로 주어졌다. 예컨대 불함수 중 'OR'조건은 A B의 어느 하나가 켜지면 C의 전구에 불이 들어오고,'AND'조건은 A B 둘 다에 불이 들어올 때 C에 불이 들어온다. 전체적으로 가능한 상태의 수는 100개의 전구가 각각 두 가지 상태(on또는 off)를 취할 수 있기 때문에 앞서와 같이 10^30이다. 여기에 일정한 패턴이 출현한다는 것은 확률론적 논증이 보여주는 것처럼 불가능하다. 그러나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첫 몇 단계 동안은 확률론자들이 예측한 것과 마찬가지로 혼돈의 양상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14단계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이 단계가 10번째의 단계를 재현한 것이다. ……

 요컨대 이것은 주기 4의 순환끌개(Periodic attractor)로 정착되었다.

 

무작위적 상황하에서의 이 놀라운 자기조직화 현상은 질서의 출현 그리고 궁극적으로 생명의 출현은 기적도 아니며 우연도 아니고 우주가 가진 한 보편적 성향이라는 것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일찌기 폰노이만은 자기재생산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청사진에 따라서 유기체를 복사(transcription; 전사)하는 것과 청사진 자체를 복사(replication; 복제)하는 두 단계의 복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밝혔다. 후에 왓슨과 크릭은 바로 실제 유기체의 복사방식이 폰 노이만식 방법임을 보여주었다. 이 외의 방법으로는 자기언급적인 논리적 순환논법에 빠지기 때문에 복사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외계의 생명체도 복사에 있어서 이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물론 세부적 사항에서는 다를 것이다. 그것은 2중 나선이 아닐 수도 있으며, A,G,T(U),C 의 넷 염기로 구성되어 있지 않을 수도 있으며 셋 염기가 한 조가 되는 트리플(아미노산)의 형태를 이루고 있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세부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기본설계가 같다면 그 세포들이 모여서 만드는 총합적 형태는 수렴진화를 통해서 지구상의 생명체와 비슷하리라고 추측해 본다. 

 

 

  진화, 정신의 발현을 향해 수렴되어 가는 과정

 

그렇다면 정신의 경우는 어떠한가?

 

여기에도 생명의 출현에서와 똑같은 대립된 입장들이 있다. 그것은 창조론자들이 보듯이 초월적 존재에 의해서 이식된 것인가 아니면 생명의 진화가 만들어낸 우연적 사건인가?

 

필자는 이것 역시 창조도, 우연도 아니며 생명의 진화 과정 속에서 적절한 여건이 주어지면 발현할 수 있는 한 사건으로 본다. 생명의 진화는 무작위적으로 출현하는 변이와 환경에 의한 변이의 선택이 결과한 우연적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정신의 진화를 향해 수렴되어가는 한 과정이다. 데이비스(P.Davies)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확실히 우리의 심성가운데 세부적인 것은 진화의 역사에서 발생한 우연적인 작은 특정사건에 의존하는 것이지만 우주 속에서의 의식의 출현은 언제, 어느 곳에서 이루어지든, 또 많든 적든 자연에 의해 보장된다고 나는 주장한다.

 

 의식은 영화를 다시 돌렸을 경우 반복되지 않았을 어떤 사소한 요행수의 결과로서 어딘가에서 '그냥 일어나는' 어떤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물리법칙과 우주의 초기조건이 주어지면 생명과 의식이 출현한다고 기대할 수 있다. 물론 의식의 출현을 재현하는 경우 세부적인 내용들은 달라질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고, 지구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주 어딘가에 의식을 가진 생명체가 창발적으로 출현할 것이다.

 

나는 호모 사피엔스가 기본적으로는 물리법칙들로 작성되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순한 것으로부터 복잡한 것으로, 의식으로 나아가는 일반적 경향이, 물리법칙들이 작용한 자연적 결과들의 일부인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 의식은 우주의 기본적 법칙들 속에 함축되어 '이미 거기에' 있었다. 

 

생명은 삶을 위해 환경과 교섭하며 그 과정에 적응한 종은 살아남는다. 그러나 환경에의 적응은 불가피하게 환경에 자신의 신체를 뜯어 맞추는 "특수화"를 낳는다. 환경이 바뀌면 어떻게 될까? 정상적인 상황하에서는 그들에게 그렇게 유익하였던 그들의 특수화가 이제 저주스러운 숙명으로 바뀐다.

 

그런데 이러한 환경의 변화는 우연적으로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도래하게 되어있다. 환경과 생물은 일종의 되먹임 구조를 이루고 있다. 환경은 생물의 도태에 관계하지만 반대로 그것에서 결과한 종은 환경자체를 변화시킨다. 그래서 처음에 어떤 유기체에게 도움을 주었던 그 환경은 유기체 자신의 번성의 결과로서 변형되어버린 새로운 환경에 의해 치명적인 것으로 변해 갈 가능성이 항상 있다.

……

 

정신의 출현은 지구라는 환경에서 생겨난 특수한 현상이 아니라 일반적인 현상이다. 유기체들이 환경을 규제하고 역으로 그 환경이 유기체를 규제하는 자기 되먹임 구조가 될 때 환경이 예측 불가능한 혼돈상태가 된다는 것은 오늘날 혼돈이론을 통해서 잘 알고 있다. 변화의 와중에서도 항상 국부적인 불변적인 점이 있다. 그 생태적 니체를 이용하고자 하는 것이 특수화적 적응전략이다. 이것은 논리적 문제이다. 꼭 특수한 지구환경을 전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변화하는 환경 자체를 생태적 니체로 선택할 수도 있다. 이것이 비특수화적 전략이며 역시 논리적 문제이다. 이것은 생명 속에는 이미 정신이 함의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생명이 지구상에서만 발현할 수 있는 특수한 현상이 아니듯이 정신 역시 지구상의 특수한 1회 적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필자는 이 보편성을 좀 더 밀어 부칠 용의가 있다. UFO에 대한 보고들은 흥미롭다. 목격자들이 그리고 있는 외계의 지적 존재들은 세부적으로는 우리의 모습과는 차이가 있지만 기본설계에서는 우리와 비슷하다. 그야말로 초월적인 영적 존재가 아니라면 그들이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는 나는 그 관찰자들의 보고에 동의한다.    

 

  도구, 의식, 언어는 그 보편적 구조에서 같다. (『정신은 어떻게 출현하는가』(서광사,1996) 참조) 외계지성이 우주선을 타고 이동하는 기술문명을 구현하고 있다면 그들은 우리와 유사한 방식으로 손을 사용하고, 도구를 제작하고, 언어를 구사할 것이다. 도구와 언어의 구성원리가 같고 언어와 수학의 구성원리가 같다는 필자의 논증이 타당하다면 그들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이해가능하며 그것을 매개시켜주는 것은 수학일 것이다.

 

 

   정신과 우주적 자기의식

 

생명의 진화는 무작위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으로 수렴되어가는 일정한 방향성을 갖고 있다. 왜 세계는 생명을 탄생시키고, 정신을 탄생시켰는가?

 

그것이 우연한 과정이 아니고 잠재성의 현실화라고 한다면 세계의 이념 -그것은 필연적으로 현실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화로 향한 한 성향이다- 은 바로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세계는 정신의 출현을 통해서 완성된다.

 

헤겔의 "정신현상학", 헤겔의 철학을 형이상학적 측면에서 본다면 그것은 신이 자기자신을 실현해가는 과정에 관한 서술이다. 헤겔에 따르면 자기자신을 완전히 실현한다는 것은 자기자신을 완전히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창조의 시작에 있어서 신은 자기의식의 요건을 결여하고 있다. 즉 신은 신인데 그 자신이 신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신의 자기실현의 역사적 과정은 본질적으로 자신이 신이라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신이 그 자신을 의식하기 위해서는 그 자체 속에 머물러서는 안되고, 자신을 밖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표현행위가 바로 신의 창조행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의 창조행위는 신이 자신을 실현시키기 위한 필수적 과정이다. 이 헤겔의 신을 세계로 바꾸어 보자. 세계는 자기의식에 도달할 때까지 아직 완성되었다고 볼 수 없다. 정신의 출현은 세계의 자기완성을 위한 종착점이며 그 도상에 생명이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생명과 정신은 우주 자신의 자기표현이며 자기가능성의 실험이라고 하겠다. ……

 

 150억년의 물질, 생명, 정신의 진화는 세계가 자기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이것은 절대정신이 스스로를 전개하면서 자기자신에 도달해간다는 헤겔의 도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창조적 천재들의 보편적 느낌이 바로 이러할 것이며 물리학자 다이슨(F.Dyson)의 다음 말은 그 느낌을 대변하고 있다.

 

나는 이 우주에서 이방인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우주를 탐구하고 우주의 구조를 상세히 연구할수록 나는 어떤 의미에서 우주는 우리가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 틀림없다는 증거를 많이 발견하게 된다.

 

 

■ 화학적 진동 

 

□  비선형 화학동력학 (Belousov-Zhabotinsky 진동반응)

 

. 화학적 진동

   . 전기적 진동과 유사함

   . 반응물, 중간 생성체 혹은 생성물들이 시간적. 공간적으로 주기성을 갖고 나타나는 것을 의미함

   . 화학적 진동의 기원은 생명체와 함께 오랫동안 나타나고 있음

   . 모든 생명체는 수십 내지 수백 개의 화학적 진동을 포함하고 있음

   . 넓은 의미의 비선형 화학동력학임

 

. 1828 Fechner는 진동하는 전류를 생성하는 전기 화학적 전지를 만들어 처음으로 화학적

  시스템에서의 진동현상을 보고함

. 1899 Ostwald는 크롬이 산에 용해되는 속도가 주기적으로 증가. 감소 하는 현상을 관찰함

. 이 두 시스템은 모두 비 균일 계 임 (균일 계에서의 진동 반응은 불가능하다고 믿어 왔음)

 

 

□   비선형 화학동력학의 개념들 (Atkins의 물리화학 교과서)

 

. Lotka-Volterra 모델

   . 특징은 진동을 보여주는 대부분의 화학 시스템에 해당되는 자동촉매작용(autocatalysis)

   . 자동촉매작용이란 화학물의 성장속도가 그 화합물의 농도에 따라 증가하는 것을 의미함

   . Lotka-Volterra 메커니즘의 3단계

      . 중간 생성체 X Y의 농도변화가 나타내는 주기성

      . 주어진 초기 조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X, Y의 주기적 변화

      . 주어진 조건에서 X, Y의 주기적 변화는 한 개의 사이클을 만듦

 

. Brusselator 모델

   . 1968 Brussels Prigogine Lefever에 의하여 제안됨

   . 1973 Tyson에 의하여 "Brusselator"라고 명명 하여 발표됨

   . Brusselator는 화학적으로 공명성을 나타내는 메커니즘으로서 자기조직(self-

     organization)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메커니즘

 

   . 질량 작용 운동론을 사용하여 단순한 화학 반응들로부터 진동적 거동을 만들어냄

   . 이 모델은 어떠한 실제적인 화학적 시스템에 대하여 잘 적용되지 못함

 

   . 모델의 개념

      . Lotka-Volterra 모델에서 만약 시스템이 섭동 된다면, 즉 약간의 a, x, y를 가할 경우 다시 섭동이

        가해질 때까지 새로운 진폭과 주기로서 진동을 계속할 것이나,

      . 실제 화학적 시스템에서는 파라메터 들의 유한한 범위 내에서 진동 거동을 나타내고 단일 진동

        방식만을 가짐

      . 반응물 A B는 일정한 농도가 되도록 유지하기 때문에 두 개의 변수는 X Y 농도인데,

        이 두 농도는 반응속도식으로부터 수치적으로 구할 수 있음

      . 특징은 X Y의 초기 농도와 무관하게 시스템은 농도의 동일한 주기적 변화를 나타낸다는 점임

      . 시스템이 이주하는 공통적인 궤도는 한계적 사이클이라 하고, 이것의 주기는 반응속도상수에 의존

      . 한계 사이클은 수학자들이 사용하는 유인자(attractor)라는 구조의 한 예가 됨

      . 왜냐하면 유인자는 궤적자들을 유인자의 근처에 끌어당기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임

      . 반응물과 생성물의 닫힌 계를 다루는 일반적인 화학에서 평형상태는 주어진 온도.압력에서 Gibbs

        자유에너지가 최소 값에 의해 결정되는 유인자이며, 열린 계에서는 한계 사이클이 유인자임

      . 초기조건에 관계없이 하나의 닫힌 궤도를 형성하는 진동반응의 닫힌 궤도를 한계적 사이클이라 함

 

. Belousov-Zhabotinsky 진동반응

 

   . 현대 비선형 화학동력학은 Boris Pavlovich Belousov(1893-1970)의 실험에서 시작됨

   . 구연산이 중간 생성체로 작용하는 신진대사 과정에 대한 Krebs cycle에 대하여 연구함

   . Ce4+ 이온이 들어있는 황산 용액에서 브롬산과 구연산간의 반응의 조사과정에서

     노란 색의 Ce4+가 무색의 Ce3+로 전환될 것으로 기대했었는데,

     용액은 맑아졌다가 다시 노란 색으로 변함

   . 온도 및 초기 농도의 영향을 포함하여 그 반응에 대하여 주의 깊게 조사하였고,

     용액을 젓지 않고 방치하면 용액 속에 노란 색의 파가 이동하는 것을 볼 수 있었음

   . 1961 Zhabotinsky는 원래의 방법대로 0.2 g KBrO3, 0.16 g Ce(SO4)2, 2 g Citric acid,

     2 ml, H2SO4 (1:3) 혼합하여 충분한 물을 가하여 10 ml 의 용액을 만들었음

   . 구연산 대신 말론산(malonic acid)을 사용했을 경우 더 선명한 현상을 관찰 함

   . Zhabotinsky는 그의 실험 결과를 Belousov에게 보내 그의 자문을 구했으며,

     그 후 Belousov-Zhabotinsky 반응에 대한 논문이 여러 편 발표됨

   . Belousov는 산화환원 지시약인 ferroin을 사용하여 진동 동안 일어나는 색의 변화를 좀

     더 선명하게 관찰하였고, Ferroin은 환원된 용액에서는 붉은 색을 띄고, 산화된 상태에

     서는 푸른색을 띔

   . 이것은 옅은 노란 색을 띄는 Ce3+-Ce4+ 산화환원 계보다는 더욱 뚜렷한 변화를 나타냄

 

 

          

 

 

          

 

 

. BZ 반응의 메커니즘

 

   . 1972 Field, Krs, Noyes (FKN) 연구진의 BZ 반응 메커니즘에 관한 발표 논문

   . FKN 메커니즘에서는 기본적인 A, B, C의 3 가지 과정이 진동 주기 동안 작동되고 있음

   . 과정 A: 브롬 이온을 소비하는 느린 반응 주기,

                브롬 이온의 소비가 브롬산 이온(BrO3-)에 의하여 조절 됨

   . 과정 B: 브롬 이온의 빠른 소비 주기에 해당

     과정 B가 우세하기 진행되는 시점에서는 브롬 이온에 대하여 HBrO2와 브롬산 이온이

     경쟁 반응을 하기 때문에 브롬 이온은 빠르게 소비됨

 

   . 아브롬산(HBrO2)의 공급 및 소비에 대하여 과정 B와 과정 A는 경쟁관계에 있고,

     HBrO2에 있어서 자동촉매반응(autocatalysis)이 됨

   . 브롬 이온의 농도가 임계값으로 떨어지면 아브롬산은 브롬산 이온과 반응하여

     BrO2 라디칼을 생성하며, 이 과정은 브롬 이온의 낮은 농도 조건에서 Ce(III) 이온이

     Ce(IV)으로 빠르게 산화됨으로서 특성이 나타남
 

   . 과정 C: 과정 B에서 공급되는 Ce(IV) 이온이 브로모말론산을 공격하여 브롬 이온이

     생성됨으로서 과정 A를 조절하는 과정이며, 또한 과정 B에서의 라디칼 반응도 조절함

 

   . MA는 말론산(malonic acid)이고, BrMA는 브로모말론산(bromomalonic acid)이며, P는 과정 C에서 생성되는 나머지 생성물들을 나타내며, Br- 이온에 대한 화학량론 계수는 Ce(IV) 이온 2몰이 환원되어 생성되는 이온 몰수를 의미함, 이 계수는 BrMA에 의하여 환원되느냐. MA에 의하여 환원되느냐 혹은 두 혼합물에 의하여 환원되느냐에 따라 다름. BrMA에 의하여 Ce(IV) 이온이 환원될 때 포괄적으로 계수는 2이며 그렇다고 항상 2는 아님. 즉 계수 범위는 2에서 0 사이의 값이 됨. 진동반응은 BrMA의 존재에 의존함


   . 이상의 고전적 BZ 반응은 말론산 농도에 따라 약간 다르게 나타날 수 있으며, 이 반응에서 몇 가지 중요한 중간 생성체 들이 존재함. 아브롬산은 반응에서 자동촉매화 반응의 화학종이며 브롬 이온은 조절되는 중간 생성체이며, Ce 금속은 촉매임. 반응 중에 생성되는 두 개의 라디칼은 말론닐(malonyl) 라디칼과 브로모스(bromous) 라디칼임. 이러한 중간 생성체들 모두는 진동하며 브롬 이온과 Ce 농도를 앞으로 측정하여 진동 현상이 규명되며, 여기 Ce은 두 가지 산화상태 Ce(III) Ce(IV) 사이를 진동함

 

. Bromate-Ferroin-Bromomalonic Acid 반응

 

   . Ce(IV) 이온 대신 지시약 ferroin 용액을 사용하면 산화-환원 반응에 따른 색깔 변화를 선명하게 관찰할 수 있어 bromate-ferroin-bromomalonic(BFB) 반응계를 선택하여 실험

 

   . 페로인은 황산철과 1,10-orthophenanthroline 간에 형성된 착물로서 직접 산화-환원 반응에 참여하고, 세륨 반응계와 페로인 반응계 간에는 2가지의 중요한 차이가 있는데, 하나는 Fe(phen)32+/Fe(phen)33+ (1.14 V) Ce3+/Ce4+ (1.6 V) 간의 산화-환원 포텐셜 차이이고, 다른 하나는 페로인은 유기 리간드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임. 페로인의 낮은 포텐셜 때문에 기본반응 단계들의 평형은 Fe(phen)33+ 산화상태로 이동이 일어날 수 있음. 1984 Rovinsky Zhabotinsky는 세륨 반응계의 반응메커니즘을 수정한 FKN 메커니즘을 발표하였으며, 이 메커니즘 모델에서는 COH(COOH)2 유기물질이 관여하는 기본반응단계들을 포함하지 않았으나, 1994 Zhabotinsky 연구진은 생략된 기본반응단계들을 추가한 메커니즘을 발표함

 

 

 

 

■ 형이상학의 부활


      

  생성과 운동, 차이와 질적 풍요로움, 복수성, 그리고 창조와 생명

                                                                                       

현대철학의 파노라마,  이.정우컬럼 중 일부

□ 베르그송의 사유(思惟)는

         . 사유(思惟) :  철학에서 감각·지각 이외의 인식작용, 분석·종합·추리·판단 등의 정신작용을 뜻함


'지속의 직관(l'intuition de la dur e)' 개념을 기초로 한다.
지속은 시간의 본성이고, 직관은 시간의 본성을 인식하는 방법이다.

     

 시간, 변화/생성/운동(changement, devenir, mouvement)은
결코 분할 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그럼에도 인간의 지능(l'intelligence) 또는 오성(entendement)은 자꾸 사물을 나누어서 즉 분석해서 본다.

 

지능은 인간이 진화 과정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무기이며,
그 근본적인 기능은 사물들을 다루는 것 즉 조작하는 것(op rer)이다. 그런데 조작이란 고체에서 가능하며(우리는 물이나 공기를 자를 수 없다 → 싯달타의 깨달음과 비교), 때문에 인간의 지능 그리고 그로부터 생겨난 논리학, 분석적 지성은 기본적으로 고체를 모델로 하는 사유이다(分析이라는 말을 음미).

 

지속 이란 흐름이며 액체적 사유를 요청한다(→ 詩와 비교).
지속의 첫 번째 속성은 연속성이다. 베르그송은 제논의 파라독스가 연속적 운동을 불연속적 공간들의 합으로 환원시킨 첫 번째 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사유는 과학적 합리성 및 형이상학적 사변의 근저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그는 이런 통찰을 과학과 철학의 역사 전체로 확장 시킨다.

 

과학적 합리성의 이런 한계를
뛰어넘은 것이 무한소 미분(le calcul infinit simal)이었다고 본다. 무한소 미분은 유클레이데스 기하학에서 배제된 연속성과 운동성, 그리고 (비본질적으로는) 시간성을 도입함으로써 사유의 역사에 큰 이정표를 새겼다. 또 무한소 미분은 '극한으로의 이행(passage la limite)'라는 중요한 개념을 도입했다(극한 개념은 후에 데데킨트, 바이어스트라스, 칸토르 등에 의해 정교화된다).

 

그러나 수학과 실재는 다르다.
실재는 결코 수학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비합리주의/'irrationalisme' → '비이성적인 것'과 혼동하면 심각한 오해), 궁극적으로 말해 '절대적인 질적 풍요로움'이다. 실재는 '등질성(homog n it )'이 아니라 '다질성(h t rog n it )'으로 되어 있다(→ 동질성/이질성 개념 쌍과 비교).

 

베르그송의 사유는 차이(diff rence)와 복수성(multiplicit )의 사유이다.
그러나 그의 차이는 체계를 전제한 차이가 아니라, 질적 창조라는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차이이다. 전통 철학이 대개 "전체는 주어졌다"는 가정 위에서 사유했다고 본다. 그의 차이는 우주에서의 절대적 창조로서의 차이이다. 이 복수성은 외적 복수성이 아니다. 그것은 잠재적 복수성, 내적 복수성이다.

 

우주에는 근본적으로 두 가지 운동이 있다.
하나는 차이와 복수성을 끊임없이 생겨나게 하는 진화의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을 열적 평형으로 몰고 가는 엔트로피의 운동이다. 그는 이 두 운동(우주의 '상승 운동'과 '하강 운동')의 투쟁이 우주의 근본 운동이며, 이 투쟁의 결과로 각종 'eidos(= forme)'들이 생겨난다.(그러므로 그를 '관념론자'로 부르는 것은 극히 피상적인 이해이다)

 

생명은 차이를 낳는 힘인 동시에 또한 기억이기도 하다.
그는 지속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기억으로 보며, 생명과 물질의 투쟁은 또한 기억과 물질의 투쟁이기도 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연속성의 사유에 입각해 '무(le n ant)' 개념을 사이비 개념으로 비판했다.
무 개념은 '가능성(la possibilit )' 개념을 전제하며, 그는 무와 가능성 개념이 결국 인간의 주관(관심, 욕망, 바람, 아쉬움, ... )에서 유래함을 역설한다('무의 인간화'). 그는 충만한 존재의 철학자이며, 무를 부재(不在)일 뿐인 것으로 봄으로써 서구 철학의 전통에 충실했다고 할 수 있다.

 

습관은 석화(石化)된 생명이다.
사회는 차이나 복수성, 운동, 생성보다는 규범, 법, 관례 등을 중시한다. 때문에 사회란 기본적으로 '닫힌 사회'이다. 그는 우주의 '창조적 진화(l' volution cr atrice)'의 원동력인 '생명의 약동(l' lan vital)'이 우리 가슴속에서 숨쉬고 있다고 보며 그것이 바로 '사랑의 약동(l' lan d'amour)이라고 말한다. 때문에 윤리나 도덕에서 필요한 것은 이론이 아니라 자신의 가슴속에서 맥놀이 치는 사랑의 약동을 실제 직관하고, 그 직관을 통해 우주와 인간과 삶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리고 그 자신 자신의 철학에 충실하게 살았다.

 

베르그송의 사유는
생성과 운동, 차이와 질적 풍요로움, 복수성, 그리고 창조와 생명, 사랑의 사유였다.
현대 형이상학의 근본적인 통찰이 그에 의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사유는 이후 하이데거, 화이트헤드, 메를로-퐁티, 들뢰즈 등의 철학, 루이 드 브로이(양자역학), 일리야 프리고진(카오스 이론) 등의 과학, 마르셀 프루스트 등의 문학, 인상파 미술·음악, 그리고 정치(베르그송은 미국 대통령 윌슨을 설득해 제 1차 세계 대전에 참전케 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국제 연맹의 활동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년 빠리 태생,

 

   베르그송의 사유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서구 사유의 역사에서 한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위대한 사유이며, 현대의 모든 형이상학적 탐구는 그에게서 비롯된다. 그를 '현대 철학의 아버지'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베르그송이 생각하는 "물질 생명 기억"

 

 

□  “창조적 진화" (L'evolution creatrice, 1907)

 

. 물질은 생명을 낳고, 진화는 생명을 길러    . 사물의 속성은 지속   . 지속의 한 예가 진화   . 진화는 연속이자 비약   . 비약은 이를테면 창조

 

.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1859~1941)은 한때 일군의 독일어권 철학자들과 묶여 소개됐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프리드리히 니체, 빌헬름 딜타이 같은 실존주의 색채가 짙은 ‘생철학’의 일파로 이해된 것이다. 최근 들어 프랑스 현대 철학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면서 베르그송 철학은 프랑스 철학의 계보 속에 다시 자리매김되고 있다. 멘 드 비랑에서 출발해 베르그송을 넘어 조르주 캉길렘으로, 마침내 질 들뢰즈로 이어지는 독특한 프랑스적 사유의 한 중요한 변곡점으로 그가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르네 데카르트 이후 독일어권으로 넘어갔던 서구 철학의 본무대가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다는 점에서 베르그송이 철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

 

프랑스 철학의 특징은 거의 언제나 개별 과학들의 성과에 기초해 철학적 사유를 펼친다는 점에 있다. 베르그송의 경우는 전형적이어서, 그는 자기 고유의 철학을 생물학.물리학.심리학 등의 경험적 연구에 기대어 진전시켰다. <창조적 진화>에서 그가 집중적으로 살피는 영역은 생물학, 특히 진화생물학이다.

 

 

베르그송 철학은 한마디로 줄이면, ‘지속의 형이상학’이라고 할 수 있다. ‘지속’은 그가 평생 파고든 철학적 주제였다. 그는 젊은 시절 직관적 인식을 통해 지속이야말로 인간과 사물을 포함한 만물의 존재 양식임을 알아차렸다고 한다. 모든 것은 지속, 다시 말해 끊임없는 흐름과 운동 속에 존재한다. 이 지속의 철학은 서구의 정통 형이상학을 뒤엎는 발상이다. 정통 철학은 만물의 존재 형식을 공간 속에 일정한 크기로 존재하는 형상으로 이해했다. 진정한 존재를 운동 기능이 멈춘 영원한 정지체라고 본 것인데, 베르그송은 이런 사고방식이 인간 지성의 불완전한 능력이 빚어낸 결과라고 말한다. 사물의 속성은 지속에 있으며, 고정되고 정지된 상태는 부분적이고 파편적인 인식의 표상형태일 뿐이다.

 

이 지속의 철학을 진화생물학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통해 우주론적 형이상학으로 들어올린 것이 <창조적 진화>. 그는 이 저작에서 생명과 물질의 대립을 근원적으로 해소해 세계를 일원론적으로 해석하려 한다. 생명현상에서 ‘지속’을 가장 비근하게 보여주는 것이 ‘진화’다. 모든 생명체가 어떤 기원에서부터 끝없이 전개돼 왔다는 것이 진화론인데, 베르그송은 그 진화가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다. 진화는 연속임과 동시에 질적 비약인데, 그 비약이 이를테면, ‘창조’다. 생명현상의 지속은 ‘창조적 진화’의 형식을 띤다는 것이다. 이때의 ‘창조’는 베르그송의 다른 유명한 개념으로 풀면 ‘엘랑 비탈’(생명의 비약. 약동)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생명이 물질과 연속적 관계에 있다는 베르그송의 설명이다. 생명과 물질은 우선은 대립적이다. 우주 속의 모든 물질은 ‘엔트로피 법칙’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화하는데, 생명 현상은 이 엔트로피 법칙을 거스르는 특수한 현상이다. 적절한 조건 아래서 물질적 흐름을 거스르는 에너지가 충만해지면 우주 어디서든지 생명이 탄생할 수 있다고 베르그송은 말한다. 그는 생명 탄생 현상을 ‘수증기 비유’로 설명한다. 고압의 수증기통에서 수증기가 뿜어져 나와 물방울이 맺히는 장면을 떠올려 본다면, 이때 솟아오르는 수증기는 생명의 에너지와 같고, 물방울이 맺혀 떨어지는 것은 새로운 생명체가 태어나는 것과 같다. 물질 속에서 생명이 파생하고 그 생명이 진화를 통해 이어진다면, 우주의 탄생에서부터 인간의 출현까지 모든 것이 ‘지속의 철학’으로 설명되는 셈이다.

                                                                                                              (한겨레 2005.02.18)

 

 

 

□   우주의 모든 존재물은 운동이며 흐름이고 지속이다

 

1907년에 출판된 앙리 베르그송(1859~1941) <창조적 진화>는 방대한 규모의 우주론과 형이상학을 구축한 대작으로 베르그송 철학의 집대성이라 불린다. 베르그송은 이 책에서 현실과 괴리된 순전한 사변적 기초 위에서 이론을 전개하려 한 것이 아니라,물리학 생물학 심리학 등 당대의 자연과학적 지식에 충실하면서도 과학과 철학의 근본적인 결합을 모색하고 있다. 이 책은 이미 전 세계적으로 고전의 반열에 올라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제논의 역설 중에 '아킬레우스와 거북이'의 역설이 있다.

이 역설은 거북이가 먼저 출발한 상황에서 아킬레우스는 아무리 빨리 달려도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을 논증한 것이다.

이러한 역설이 왜 생긴 것일까?

베르그송은 우리의 운동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이런 역설이 생긴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아킬레우스와 거북이의 운동 자체를 보지 않고,운동을 대신하여 우리의 머릿속에서 그린 그 운동의 궤적을 운동 자체와 혼동하여,그 궤적이 사유 속에서 무한히 나누어질 수 있는 것처럼 실제 운동 자체도 무한히 나누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역설이 생긴다는 것이다.

 

   . 제논의 역설 (Zēnōn's Paradoxe)       .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엘레아의 제논(BC 490?~BC 430?)

      . 사물이 움직이고 있다고 우리가 느끼는 것은 모두 환상이라는 파르메니데스의 설을 돕기 위하여

         ()와 운동의 존재를 인정하면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증명한 논리

 

 

      . 귀류법(歸謬法)의 한 종류

 

         . ()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무한소(無限小)인 동시에 무한대(無限大)이며          . 유한이면서도 무한이 아니면 안 된다고 반박하였음         . 또 운동에 관해서도 이분법(二分法), 아킬레우스와 거북, 비시정지(飛矢靜止), 주로(走路)

        유명한 논법으로 운동의 배리성(背理性)을 공격하였음

       . 아킬레우스와 거북

(조건1) 아킬레우스가 거북이보다 2배 빠르다.

(조건2) 달리기 경주를 할 때에 거북이가 50m 지점 앞서서 출발한다.

 

      . 아킬레우스가 50m 지점에 도착하는 동안 거북이는 25m를 가서 75m 지점에 가 있게 되고,      . 그리고 아킬레우스가 75m 지점, 25m를 가는 동안 거북이는 12.5m 더 가 있게 되며,      . 계속 이런 식으로 나가면 아킬레우스는 절대로 거북이를 추월할 수 없다는 논리    . 이분 역설

   . 어떤 물체가 A지점에서 B지점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그 중간 지점인 C를 통과해야 하며,

   . 그리고 마찬가지로 A에서 C로 가려면 그 중간 지점인 D를 통과해야 하고,

   . A에서 D로 가려면 그 중간 지점인 E를 통과해야 하고...

   . 이런 식의 사고를 계속하다 보면 A B사이의 거리가 아무리 짧다 해도, A에서 B까지 가려면

     무한히 많은 점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물체는 이동할 수 없다는 이야기

 

   . 화살의 역설

   . 화살이 날아가고 있다고 가정할 때,

   .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화살은 어느 점을 지나는데,

   . 한 순간 동안이라면 화살은 어떤 한 점에 머물러 있을 것이고,

   . 그 다음 순간에도 화살은 어느 점에 머물러 있을 것 이여서

   . 화살은 항상 머물러 있으므로 사실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는 이야기

 

 

 

 

베르그송은 여기에서 우리에게 참신하고 혁명적인 사유의 전환을 요구한다.

우리들은 존재하는 것들은 무한히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고,또 어떠한 무한소들이 뭉쳐서 존재물들을 구성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베르그송은 그런 생각 대신에 존재물들은 일종의 흐름이며 운동이며,지속(duree)으로 생각하라고,더 나아가 이런 생각을 우주의 모든 존재물에 까지 확대시켜 적용해 보라고 요구한다.

 

참신하다는 것은 그것이 이전의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사유 방식이라는 것이며,혁명적이라는 것은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사유의 전환(revolution)을 보인 코페르니쿠스와 마찬가지로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의 급격한 전환을 선보인다는 것이다.

 

<창조적 진화>는 결국 이런 '지속'이라는 새로운 사유 방식을 인간과 전 우주에 확대 적용하는 시도를 선보인 책이며,동시에 이런 시도를 통해 새로운 사유 방식이 타당함을 입증한 책이기도 한 것이다. '진화'라는 것이 '지속'이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특성을 지적한 말이라면,'창조적'이라는 것은 이런 연속적 변화 속에 '질적 비약'이 존재함을 가리키는 말이다.

 

□   원문 중에서

 

. 요컨대 수학자가 조작하는 세계는 매 순간 죽고 다시 태어나는 세계,즉 데카르트가 연속적 창조에 관해 말했을 때 생각한 세계이다. 그러나 그렇게 상정된 시간 속에서 어떻게 진화를,즉 생명의 고유한 특성을 생각할 것인가? 진화,그것은 과거가 현재 속에 실제적으로 연속되어 있다는 것,지속이 그 연결 부호임을 함축한다. 다시 말하면 생명체,즉 자연적 체계의 인식은 지속의 간격 자체를 근거로 하는 인식이며,반면에 인공적 체계,즉 수학적 체계의 인식은 극단에만 관계한다. 변화의 연속,과거의 현재 안의 보존,진정한 지속,생명체는 이 속성들을 의식과 더불어 공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더 나아가서 생명이 의식적 활동과 같은 발명이자 부단한 창조라고 말할 수 있을까?

 

 

. 우주는 지속한다.

 

우리가 시간의 본성을 심화시켜 볼수록 더욱 더 우리는 지속이 발명과 형태의 창조,절대적으로 새로운 것을 연속적으로 만들어 낸다는 의미임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과학에 의해 한정된 계들은 단지 우주의 나머지에 불가분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지속하는 것이다. 물론 우주 그 자체 안에서도,'하강'운동과 '상승'운동이라는 두 대립된 운동을 구분해야 한다. 전자는 이미 준비된 두루마리를 펼치는 데 불과하다. 그것은 이완되는 용수철처럼 원칙적으로 거의 순간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후자는 성숙과 창조의 내적 작업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본질적으로 지속하며,자신과 분리되지 않는 전자에게 자신의 리듬을 부과한다.

 

. 기계론적 설명은 우리의 사유가 전체로부터 인위적으로 분리시키는 체계들에 대해 유효하다. 그러나 전체 그 자체와 이 전체 속에서 그것의 이미지를 따라 자연적으로 형성되는 체계들을 기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선험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경우 시간은 무용하게 될 것이고, 심지어 실재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계적 설명의 본질은 사실상 미래와 과거를 현재의 함수로 계산할 수 있다고 간주하고,그렇게 해서 모든 것이 주어졌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가설에서 계산을 수행할 수 있는 초인간적 지성이 있다면,그는 단번에 과거,현재,미래를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 극단적 기계론은 실재 전체가 영원 속에서 통째로 주어지는 형이상학을 함축하며,거기서 사물의 명백한 지속은 단지 모든 것을 한 번에 알 수 없는 정신의 불구성을 표현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 속에서 더 이상 논의의 여지가 없는 것에서,즉 의식에서 지속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우리는 지속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는 흐름으로 파악한다. 그것은 우리 존재의 근본이며,우리가 잘 느끼고 있듯이 우리가 소통하는 사물의 핵심 자체이다. 보편학의 관점을 우리에게 강조해도 소용이 없다. 우리는 체계의 요구들에 경험을 희생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우리는 극단적 기계론을 배격한다.

 

 

 

□  3장 (생명의 의미) 목차와 해설

   . 지성과 물질   . 철학과 과학의 관계   . 지속과 공간   . 기하학의 질서와 생명의 질서   . 물질의 운동과 생명의 운동

 

. 지속과 공간

 

베르그송은 물질과 지성의 관계를 밝히기 위해 내적 관찰을 그 시발점으로 삼는다. 우리는 고도의 긴장을 통해 다양한 내적 상태들의 지속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외부사물을 지각하는 것은 지성이 가진 공간 표상의 작용이다.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 우리의 고유한 삶의 가장 내부에 있다고 느껴지는 지점을 찾아보자. 그 때, 우리가 잠기게 되는 곳은 순수 지속 안이다.

 

우리의 외부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있고, 지성의 작용이 가장 덜 미치는 곳에 집중한다면, 즉 우리 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 생명의 가장 내적인 부분이라고 느껴지는 곳을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순수 지속 안에 놓이게 된다. 순수 지속 안에서는 과거의 기억이 끊임없이 전진하면서 새로운 현재에 의해 불어나고 있다. 우리의 의지와 인격은 이것들을 종합하여 의식의 가장 끝에 집중하여 강하게 수축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긴장(la tension)의 순간에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갖는다. 하지만 이것은 완벽하게 도달하기는 어려운 상태이다. 이와 반대로 우리의 긴장을 최대한 이완(la détente)시켜보자. 긴장이 최대로 이완되면 기억도 의지도 사라지고, 우리는 절대적으로 수동적인 상태에 놓이게 된다. 진정한 자유를 갖는 순간에 완벽하게 도달하기 어려운 것처럼 절대적으로 수동적인 상태에도 완벽하게 도달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러한 상태를 예측할 수 있는데 그것은 지속이 사라진 상태일 것이다. 여기에서는 모든 지속이 완전히 사라지고 끝없이 다시 태어나는 순간들의 반복만이 계속된다. 아마도 물질성은 이 방향 속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물질은 지속에 기반한 흐름이기 때문에 순간들의 합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때문에 이 때 우리가 도달하는 곳은 지성의 순수 공간이다.

 

 

 

□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L'evolution creatrice, 1907)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홈피에서                                                        .종렬 (2004.09.29),  비에이야르-바롱 교수의 요약 글 정리

 

 

    베르그송(Henri Bergaon, 1859-1941)은 이 유명한 저작에서 자기 철학의 주요주제들을 모두 함께 묶어 놓았다. 지속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는 진화론으로, 정신에 대한 것은 생명으로 귀착한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의 코기토(Cogito)와 단절하면서 베르그송은 지성을 생명의 생산물로서 생각한다. [지구 중심주의가 소멸하고도 르네상스에서는 인간중심주의로 환원한다. 이 인간 중심주의의 발전은 사회와 역사문제로 접근하면서 자아중심주의로 전환한다. 피히테의 자아와 인간의 운명에 대한 논의는 피히테나 헤겔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다. 그러나 데꽁브(Descombe, 1943-)는 이 자아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의 논쟁적 낌새를 알아차린 철학자를 (키에르케골), 니체, 맑스, 프로이트 등이라고들 한다. 이런 논쟁의 바탕에는 인간의 도덕성에 관한 반성을 깔고 있다. 인간의 도덕성에 바탕을 둔 덕목을 중심으로 하는 사유는 이미 동양에서 공자와 맹자, 서양에서 소크라테스와 그 후기 학파로서 퀴니코스 학파와 퀴레네 학파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인성의 근원적 성격에 대한 성찰을 자연자체와 연관시킨 것은 인도에서 브라만과 석가모니, 서양에서 에피큐로스 학파의 자연주의와 스토아학파의 우주론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자연자체의 생성과 변화에서 생명의 진화와 더불어 인성과 인지의 문제를 함께 거론하였던 철학자 일 것이다.]

 

베르그송은 생명자체에 의한 생명의 의식을 설명한다. [그는 의식자체에 의한 의식 스스로의 발생한다는 관점을 지닌다.] 기계론과 목적론에 반대하는 그는 외적으로 진실된 목적성(finalité)이 있다고 보여지지만,  [이 목적성은 가능적 행위의 측면에서 보면 목표(but)일 뿐이며, 사실은 심리적 자아의 본성의 내부에 속한다. 즉 지각의 가능적 내용으로 현재의 영역에 속하며, 심리학적으로 이 목표인 대상 영역은 신체라는 이마쥬(= image, 이미지, 상(). 심상())와 불가분이다. 생명적 자아로 보아 대상처럼 보이는 것은 이미 신체의 이마쥬를 제한하여 대상 이마쥬와 구분하고 있고, 이 구분의 관심은 신체로 하여금 대상의 영역에서 대상을 선택하게 한다. 이 선택의 기제는 생명체(신체 이마쥬)의 한정된 범위를 표현하는 것으로 생명 자아의 일 부분이다. 생성의 관점에서 이 일부가 자기(단위)로서 자기 아닌 부분(다른 단위)과 결합하고 자기도 변환의 길을 걷는다. 이 점에서 생명은 생성, 발전의 길을 걷는다. 들뢰즈는 이 점에서 다른 부분의 결합과정에서 물체 하기(되기), 기관 하기, 동물 하기 라는 표현을 사용할 것이다. 자아의 변환은 생성(하기) 또는 생명체의 다른 역할 하기로서 나타난다. 이런 역할 하기는 자기 영토에서 벗어나서 잘 드러난다는 점에서 변환에는 탈 영토화 연관이 있다.]

 

근본적으로 보아 목적론과 기계론은 거짓이라는 것을 제시한다. [생명에 대하여 이런 접근은 거짓일 뿐이 아니라 지성의 착각이자 환상이다. 그래도 목적론과 기계론이 힘을 발휘하는 것은 이 두 학설이 자아 중심주의의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정당화 하여 주는 배경이며, 물체에 대해 역할을 하는 좋은 도구(기계)이기 때문일 뿐이다. 게다가 목적론은 종교 이데올로기의 배경으로 천국(저 세상)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며, 목적의 극한에서 최후의 심판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것은 구복과 안녕을 위한 미신이다라고 보는 것은 베르그송 이며, 스피노자도 『신학정치론』서문에서 잘 표현하고 있다. 스피노자와 베르그송이 크리스트교 주의자들에게 금서로 되었던 이유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을 무신론자로까지 몰아 부치지 못하는 이유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진화론을 따라서 생명을 고려할 때, 생명의 다양성을 고려할 수 있다. 이 진화는 근원적 도약(élan originel)을 바탕으로 하여 분화(dissociation)와 이중화(dédoublement, 분신화)를 진행한다. [도약(엘랑)은 최초의 충력을 의미한다. 이 충력의 근원은 물질 덩어리 자체가 진동하고 운동하며 변화하는 연속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질의 미세한 부분도 진동하고 있다고 한다. 이 충력 에서부터 시간 지속과정에서 생명은 자기 보존을 위해 분화와 자기분신(double, avatar)을 만들어 나간다. 생명에서 분신은 분화로부터 발생하는 것으로 자신을 보존하는 방편이며, 또한 자신을 달리 표현하는 방식이다. 전자의 경우는 본질(실재성)에 후자의 경우는 속성에 해당한다. 그러나 모두 본질(실체)에 속한다. 우리로서는 이 본질이 자아(의식)의 경우에 몸체를 지녔으며, 속성은 몸체 없이(sans organ) 그림 이마쥬로 돌아다닐 수 있고 소리 이마쥬로 전달될 수 있다고 표현할 수 있다. 이 점에서 그림(소리) 이마쥬들은 몸체 이마쥬의 분신인 셈이며, 몸체를 지닌 다른 분신이 타인(autrui)이다. 소위 말하는 대타자(Autre)는 몸체를 지닌 우주이며(탈 신앙 중심주의), (Dieu)이라 상징되는 대타인은 몸체 없는 분신의 집합으로 만든 것(유일 신앙 중심주의)이다. 예술에서 몸체를 이마쥬로 고정시키려 한 것이 조각이라면, 회화와 사진은 그림 이마쥬로, 음악과 시(문학)은 악보와 언어라는 기호를 사용하여 소리 이마쥬로 돌아다니게 한다.]

 

생명 [또는 생명체] [장애물과 위험들을] 해결하기 위한 여러 방식 중에서 시각을 도출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여기서 문제 해결이란 제기된 문제에 대한 대꾸(응답)이다. [해결은 문제를 푸는 것이지 대꾸가 아니다. 해결은 장애물을 풀어 헤쳐 자신의 분신으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 이 분신으로는 타 생명체도, 타인도, 후손(자식)도 있을 것이다]. 생명체는 행동에 앞서서 자신이 행동하기 위한 가능성[영역과 대상]을 파악하기 위하여 보아야만[눈의 생성] 한다. [느낌으로 알아차리고 확인하는 촉각의 범위는 너무 좁아서, 시각을 발달 시켰다는 것이다. 생명체의 진화 과정에서 이상하게도 연체동물(오징어 달팽이)도 척추동물(물고기 원숭이)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눈을 만들었다.]

 

2장에서는 생명진화의 분화하는(발산하는 과정) 방향들에 대해 다룬다. 적응(adaptation)은 충분한 설명원리가 아니고, 선 존재하는 평면의 발전에 대한 생각도 아니다. 이 생명 도약과 에너지[충력의 힘, 내재적 힘]으로부터 생각하는 것은 왜 생명이 동물과 식물로 나누어졌는가를 이해하게 해 준다. 즉 동물의 신경체계와 식물 엽록소의 동화작용이 에너지 축적과 재생산의 동일한 문제에 대한 두 가지 다른 반응이다. [베르그송으로는 가지치기로 갈라지는 방향인데, 들뢰즈 식으로 보면 두 가지 반응은 상반된 반응이다. 한쪽의 탈 영토화는 다른 쪽의 재 영토화이다. 동물의 해체는 식물의 기반이 되고 식물의 해체는 동물의 기반이 된다. 그러나 이 문제는 베르그송 시대의 해석만큼 단순한 것은 아니다. 이산화탄소에 관하여 생각해보면, 동물의 이산화탄소 배출을 식물만이 변환시키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넓은 부분에서 산호나 조개의 껍질에도 변환하여 고정시키고 있다. 어쩌면 단순하게 이분법적으로만 분화하는 것이라기보다, 다양한 분화가 동시에 발생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분화는 방해물을 넘기 위한 또는 우회하기 위한 방법마다 달리 표현된다. 이 분화가 분신을 만드는 접점, 들뢰즈 용어로 지도리일 것이다.]

 

생명 구조는 생명일반과 생명의 특수한 형식들 사이에, 즉 생명의 창조적 도약과 생명의 고정된 형식으로 있게 되는 물질성의 관성 사이에, 변증법(dialectique)이다. [이 변증법은 걸러서 올라가는(d. aufheben, fr. relever)이라기 보다 상반된 운동으로 다른 방향임에도 서로 보충적이고 보완적 관계를 지니는 대화(dialogue)를 의미한다. 서로가 독립적이면서도 상호 보완적 관계에 있기 때문에 타협물(modus vivendi)이 될 수 있듯이, 사회에서도 일반의지(루소의 정치적 계약)가 생긴다. 여기에 공화적 의미가 있다. 지양(aufheben)의 방식에는 지배와 피지배의 구분이 있는데 비하여, 상호보완의 대화에는 서로가, 들뢰즈가 말하는, 친구(Ami), 연인(Amant), 구혼자(prétendant) 경쟁자(rival) 관계이다.]

 

직접적이고 확실한 본능은, 지성이 적응하는 놀라운 능력으로 다룰 수 있는 새로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우리가 보기에 지성은 새로운 것을 다룰 수 있는 것 같이 행하지만, 실제로는 완전하게 해결할 능력이 없다. 지성의 실패와 무능을 새로이 보충하는 것은 본능의 발전적 권능으로서 직관이다. 이 직관이 직접 개입되지 않고서는 지성으로서 완전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지성은 분석에서 종합으로 가기 때문이다. 그래도 직관을 통하여 완전한 해결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매우 드물고 어렵다. - 이 점은 스피노자와 베르그송이 같은 입장이다. 베르그송이 이 드물고 어려운 해결을 위하여 노력하는 자가 신비가이다.] 생명체 의식은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직접적 행동과 관련해서 연결되어 있다. [탈 영토화하여 영토를 벗어난 개체들이 다른 곳을 재 영토화할 경우에 종의 차원에서 개체의 재 영토화는 멀지만 직접적 (가능) 행위 속에 있다]  

 

이리하여 생명의 철학은 인식의 철학이 된다. [생명 철학의 행동이나 가능적 행위가 인식론의 인식의 내용과 범위와 맞물리게 된다. 구조주의에서 구조와 인식은 또 다른 측면에서 행위영역과 인식영역의 상보적 관계를 설명해 주고 있다. 베르그송에서 행동과 인식은 동일한 한 능력에서 나온 두 측면이라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의 자연에서 두 개의 속성에서 나온 생산하는 두 양태의 비유와 맞먹는다. 스피노자의 ‘연장은 행위’와 ‘사유는 인식(인지)’과 같은 생산적 양태로 받아들여도 같은 의미가 된다.]

 

지성은 본성상 생명을 이해할 수 없다. 본능은 공감이다. 직관은 지성 속에 [그래도 여전히] 남아있는 본능의 너울(frange)이다. 직관은 자연에 대항하여, 욕망(vouloir, 의지로 번역하기 보다 욕망으로 번역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을 욕망 자체에 대하여 뒤틀기(torsion) 때문에[정신분석학의 판타슴(fantasme)의 문제와 연결시키기 위하여 욕망으로 번역하였다. 다른 한편 소펜하우어의 의지의 세계를 생각한다면 의지로 번역할 수 있다.]

 

(욕망) 덕분에 지성은 실재적인 것과 일치할 수 있고, 또 생명의 의식[인식]은 생명[존재]와 일치 할 수 있다. [베르그송은 이 책에서, “직관은 별로 멀리(오래)까지 갈(지속할) 수 없다. (ms 지성은 눈의 시야만큼 가능적 행위, 또는 도구의 사용만큼 가능적 행위를 확장하고 있다) 의식은 직관적으로 외피를 너무 압축하기 때문에 직관을 본능적으로 축소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 일단 자유로운 의식은 자신의 내부에 주름 잡히었다가(se replier, V-B. torsion과 같은 표현일 것이다), 아직 자신 속에 잠자고 있는 잠재력(virtualité)을 각성하게 할 수 있다.”고 썼다]] [여기에서 뒤틀기(torsion)의 표현은 “직관으로 보는 경우에 욕망을 뒤틀어서 솟아나는” 것을 표현한다. ]

 

세 번째 장은 어느 정도 지금까지의 프로그램을 실행해 본다. 과학의 가능성은 사물 속에 질서가 있다는 것을 제시한다. [사물은 근원적으로 무질서처럼 보이지만, 현상에서 질서들 또는 성질들을 드러낸다. 이 성질들이 양화될 수 없는 부분도 있지만, 양화 될 수 있는 부분을 단면으로 만드는 것은 과학의 함수이다. 이 단면을 함수체라고 부르는 것은 들뢰즈이다]. 이런 질서를 설명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칸트(Kant)나 피히테(Fichte)의 지성을 선천적으로 받아 들인다.

 

베르그송은 이런 쉬운[설명 체계 또는 도식]을 거부한다. 그래서 그는 기하 질서와 생명 질서를 구분한다. [이 두 질서는 공간적으로 양분되는 것이 아니다. 이 구분의 극단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양극 점으로 보이나, 두 개의 상반된 힘, 또는 분화하는 힘(또는 에너지)이며 의식의 이중화(분산화)이다. 이 의식의 두(또는 여럿) 방향은 한 타협안(modus vivendi)에 내재한다. 생명의 방향이 분기(가지치기)하는 만큼이나 의식의 발산(분화)이 있다]. 어떤 것도 단 한번에(une fois pour toutes) 주어지지는 않는다. 생명체는 창조이고 물질은 해체(풀어지는 de défaire)하는 창조적 몸짓이다. 클라우지우스(Rudolf Emanuel Clausius, 1822-1888, 1865년 열역학의 엔트로피 기능)의 열역학 제2 원리, 즉 열에너지 저하의 법칙이 [현상의] 이 사실을 우리에게 제시해 준다.

 

이리하여 생명도약은 자기의 창조가 이분화(dédoublement, 분화 또는 가지치기) 즉 식물/동물(végétal/animal)의 분화와 물질(matière, 장애물)에 의해 끊임없이 억제되는 것을 보게 된다. 자연은, 마치 생명 종을 통한 자기 반성처럼, 진화의 정상에 인간을 세우는 것처럼, 또 지성의 첨예한 꼭대기에 직관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처럼, 충돌적이다. [자연 속에서 개체들은 서로 섞일 수 없으나, 서로 지위를 가지고 상보적인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네 번째 장에서, 환상(illusion, 착각)을 거부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이 환상 때문에 빈 것에서 충만으로, 무질서에서 질서로, 무에서 존재로 나아간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반대로 행해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철학사에서 3가지 착각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무가 아닌 하나의 충만한 존재, 무질서가 아닌 두 개의 속성과 같은 두 개의 질서, 정지로부터 설명이 아닌 세 가지 운동의 양태를 말하고자 한다. 이 세 가지 운동의 양태에는 내재적 연속성이 있다. 이 운동의 기원이란 질적 다양성으로 된 존재의 진동 운동 변화를 말한다. 이 존재를 전체(Tout), 대 의식(Concience), 난 바다(océan)로 표현하는 것과 같다]. [이 반대 방향에 위치하는, 지속 속에서 직관에 의해 인식되는] 절대는 자동충족이며, 그렇다고 죽은 영원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천국처럼 상징의 빈 상자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심리학적 본질로 있다.

[형상 형이상학이 말하는] 모든 형상은 이미 앞 선 과정에서 취해진 순간적인 것일 뿐이다. [영속적 지속의 한 단면으로서 순간일 뿐이다. 이 순간을 형상론자는 공간화하여 평면을 형성하고, 논리주의자는 이 순간들을 계기로 연속 하려 한다.]

 

그리고 베르그송은 고대 그리스의 엘레아 학파의 철학에서 스펜서(H. Spencer, 1820-1903)에 이르기까지 철학사를 다시 훑는다. 그래서 철학사에서 어떻게 시간이 평가절하되었으며, 어떻게 기계론적 물리학의 인식이 환상적(착각적)모델로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가를 제시한다.

 

                         비에야르-바롱(Jean-Louis Vieillard-Baron),

                          Les Oeuvres I, Dictionnaire, PUF, 1992, pp, [ ] 속은 “마실” 님이 별도 첨부한 의견임

 

 

 

 

 

□  기억은 어디에 있을까?

                                                                                                      두두 홈피에서  부분발췌           

끝없이 이어지는 상념의 바다에서 헤매다 보면, 나는 과거에 흠뻑 빠져 버린다. 내 눈은 더 이상 현재의 사물을 보지 못하며, 나의 귀는 더 이상 주변의 소음을 듣지 못한다. 내 몸은 현재의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부유하기 시작하고, 몸 안의 세포들은 과거를 향해 더듬이를 뻗쳐 악착스레 추억을 빨아들인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기억이 지워진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든 아슴푸레한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기억들을 간직한다 "라고 말했다. 일상적으로 많이 쓰이는 표현이니 말하는데 아무런 이질감도 없다. 그렇지만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이면, 이런 의문이 생긴다. 간직한다고? 어디에?

 

과학 잡지를 한 번이라도 들춰 본 당신이라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당연히 두뇌지. 기억이 두뇌 말고 어디에 저장 되겠어. 신경계의 주요 인자인 뉴런은 신체 외부에서 들어오는 자극(정보)을 입력하고, 처리해서, 신호로 만들어 저장하고, 또 다른 뉴런들로 전달하거든. 그러니까 외부 지각은 뉴런에 저장되는 거야. 정보의 일부는 소비되거나 사라지고, 일부는 저장되는데 그게 바로 기억이지."

 

플라톤(기원전 428-347) 이래로 기억이 정신의 기능이라는 것을 의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신이 물질과 분리되어 있느냐 아니면 합치되어 있느냐는 문제로 패를 갈라 싸우기는 했어도, 기억은 정신의 영역에 속하며, 정신은 물질보다 우월하다는 ‘말씀’은 진리와 다름 없었다. 그리스 의사이자 철학자였던 갈레노스(131-201)도 이 같은 그리스 전통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정신은 두뇌에 자리 잡고 있지만, 두뇌의 산물이 아니라 두뇌를 작용하는 힘이라고 주장한다. 정신을 상징하는 ‘프누마(pneuma)’는 신경계를 통해 몸 속에서 순환하면서, 두뇌, 감각 기관, 운동 기관과 접촉하며 그것들을 작동시킨다는 것이다.  

 

19세기 생리학자들, 해부학자들이 의심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천 년의 세월을 두고 신주단지처럼 모셔왔던 갈레노스의 두뇌 이론이었다. 갈레노스의 이론이 틀렸다는 것을 주장하는 많은 과학자들의 이론과 실험들이 있지만, 여기서는 독일 생리학자이자 해부학자였던 프란츠 갈(1758-1828)을 언급하는 것으로 만족하자.

 

갈은 ‘골상학’이라는 두뇌학을 주창하는데, 그것은 두개골 모양을 조사하고, 분류하고, 분석해서 사람들의 기질을 판단하는 것이었다. 그는 두개골에 각각 번호를 붙여, 인간의 재생산 본능, 공격적인 성질, 언어를 기억하는 능력, 공간 감각 등등 27개의 기능을 표시했다. 골상학이 틀렸다는 것은 후속 작업을 통해 금방 드러났다. 두뇌의 작용이 두개골 표면으로 직접 드러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골상학은 엄청나게 전복적인 생각을 담고 있는데, 정신은 ‘두뇌를 작동시키는 힘’이라기 보다는 ‘두뇌 작용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골상학은 인간의 정신 기능은 두뇌의 특정 부위와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갈이 종교 재판을 받고 풍기문란죄로 고향에서 쫓겨났으리라고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찌했던 그의 작업은 19세기 두뇌 영역 이론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였다.

 

1861. 외과 의사였던 브로카(1824-1880)는 파리의 남쪽에 있는 비세트르 병원에서 르보흔이라는 환자를 우연히 만난다. 르보흔은 자기 생각을 단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실어증 환자였는데, 모든 질문에 대해 이런저런 몸짓을 하면서 ''이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이 탕(Tan)이 되었다. 탕이 사망하자 브로카는 그의 뇌를 해부해서, 좌반구의 전두엽 아래 부분이 손상되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브로카는 같은 해 8월에 "실어증 관찰에 따른 분절 언어 기능의 영역에 대한 고찰"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탕의 임상 부검 결과를 보고한다. 그는 논문에서 좌반구 전두엽 아래 부분의 손상이 실어증의 원인이며, 이 영역이 언어 기능을 담당한다는 가설을 제시한다. 이 가설은 두뇌 영역 이론에 힘을 실어 주었고, 뇌의 각 영역에 대한 많은 연구들이 쏟아져 나올 계기를 마련했다.  ……                   

 

어찌했던, 의사들은 성당에 퍼져 있는 "정신은 물질을 움직이는 힘"이라는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공기를 들이키면서도, 머리 속으로는 "인간의 정신이란 건, 두뇌가 작동해서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야.. "라고 중얼거렸을지도 모르겠다. 과학자들, 특히 의사들의 학문적 약진과 도전을 접하고서 철학자들이 가만히 있었을 리 없다. 그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이는, ‘마지막’ 정신주의자로 이름을 날린 베르그송(1859-1941)이다.

 

베르그송의 두 번째 책인 " 물질과 기억 "(1896)은 그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

책 앞머리에서 베르그송은 ‘기억’의 문제를 통해서 몸과 정신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당연히 ‘기억은 두뇌 작용의 결과물’이라는 의사들의 주장을 반박하겠다는 뜻이다. 베르그송이 보기에, 두뇌는 "중앙 전화 교환소" 같은 전달자의 역할을 할 뿐이다. 교환소는 들어온 정보(수신)를 정해진 곳에 전달(발신)하는 일을 한다. 여기에서 들어온 정보는 변형되거나 삭제되지 않고 고스란히 전달된다. 두뇌는, 말하자면 전화 교환소처럼, 외부 자극을 수용(수신)해서, 분류하지만, 거기에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고, 단지 실행 기관을 선택(발신)할 뿐이다. 

 

그러니까 두뇌는 정신적 활동을 산출 하기는커녕, 그것들을 간신히 유통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라는 것이다. 베르그송의 지혜書, 혹은 타협안은 이렇다. 기억은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 첫번째 기억은 예컨대 시를 처음으로 외울 때 생기는 기억이다. 시를 외우는 과정을 생각해 보자. 먼저 각 행을 나누어 여러 번 읽는다. 반복할 때마다 암기가 된다. 시어들, 행들은 점점 더 잘 연결되고 조화를 이루며 결국 암기가 된다. 시가 기억이 된 것이다. 두 번째 기억은, 시를 외우고 난 뒤, 시가 어떻게 외워졌는지를 회상할 때 생기는 기억이다. 생각해 보면, 연달아 여러 번 시를 읽었는데, 여기서 각각의 읽기는 고유한 개별성을 가지고 있다. 그 각각은 삶의 고유한 사건으로 기억되는 것이다.   

 

베르그송이 분류한 두 가지 기억 중에서 첫 번째 기억은 습관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감각 중추의 작용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곧 두뇌 작용의 결과인 것이다. 반면에 두 번째 기억은 회상들로 이루어진 진짜 백이 순수한 기억이다. 이 기억은 절대로 두뇌의 작용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두뇌의 성질인 물질성과는 전혀 다른, 완전히 구별되는, 정신성을 갖기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첫 번째, 습관-기억이 저장되는 곳은 두뇌지만, 두 번째, 회상-기억이 저장되는 곳은 아무도 모른다. 정신성이란 어디 저장되고 말고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니, "그게 어디 저장되느냐? "고 꼬치꼬치 물어봐야 돌아오는 말은 이런 것일 뿐이다. "질문 자체가 잘못 됐어요! "  이렇게 보면, 베르그송의 야심 찬 반격이라는 것도 사실, 과학의 성난 파도에 휩쓸려서 오락가락하며 서서히 부서지고 있는 뗏목 같은 신세에 불과할 것이다. 風前燈火, 정신주의 철학의 미래를 예고하는 말로, 이 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있을까?  

 

 

. 기억의 메카니즘

 

우리가 어떤 사건이나 지식을 기억할 때 뇌 안에서는 신경세포와 신경세포가 만나는 시냅스란 곳이 평소보다 더 단단하게 결합한다. 특정 기억이 신경 시냅스 안에 담기는 셈이다. 한번 저장된 기억을 다시 끄집어낼 때 시냅스를 단단하게 만든 단백질이 분해되면서 시냅스가 풀리고, 결국 저장된 기억을 내놓는다. 또 이 과정이 기억을 재구성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이 과정을 억제하면 기억이 변형되거나 사라지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서울대 생명과학부 기억제어연구팀

                                                           

 

 

 

 

□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송, .종원 역(2005)  중에서

 

사람들의 궁극적인 관심사는 여전히 자기 자신이다. 자신의 자신됨을 외부를 나타내고자 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본인이 본인을 분석하면서 헷갈리는 점은 도대체 정신이라는 것이 꼭 집어 낼 수 없으면서도 없다고 장담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인간에게 있어 ‘확실히 있음’이 성립하려면 확실히 물질 형태로 자리 잡아서 인간의 감각에 분명히 포착되어야 하는 것이다.

 

보지 않고는 못 믿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있어 ‘정신’이라는 것도 ‘보이지 않는 것’에 해당되니 정신이라는 것도 없는 것인가? 그런데 정신이라는 것이 없이 로봇이라는 기계처럼 인간이 물질로만 되어 있다면 ‘정신이 있느냐?“라고 묻는 물음도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뭔가 모순을 느낀다. 물질 형태가 아니면 없다고 단정해야 하는 것이 옳아 보이기에 사람들은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내가 여기 있다고’고 말한다. 그렇다면 물질적인 인체만 있다고 ‘여기 있음’이 성립한다면 왜 인간을 파악하면서 신체성 만으로 인간의 온전함을 결정짓지 아니하는가? 즉 왜 팔 다리 등 사지가 멀쩡한 것 외에 다른 요소를 거론하면 바른 인간상을 말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즉 온전한 인간 개조를 위해 왜 정형외과 의사의 수술만으로 완결되지 못하는 것인가? 왜 인체를 해부하고 조립할 능력도 없는 교사나 언론인이나 재판관들이 나서서 인간 개조에 나서야만 하는가? 또 정형외과 의사들이 인체에 손을 보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새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쉽게 말해서 왜 인간은 기계가 아니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

 

베르그송은 인간으로부터 출발해서 실마리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타 동물로부터 힌트를 얻고자 한다. 무핵의 단세포 원시생물에서부터 고등 척추동물에 이르기까지 외적 지각의 진보를 한 발짝씩 따라가 보면 어떨까? 단순한 원형질 덩어리의 상태에서 생명적 물질은 이미 감응을 하고 수축할 수 있고, 그것은 외부 자극요인들의 영향을 받고 거기에 기계적이고 물리화학적인 반응으로 응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기체들의 계열을 올라갈수록 생리적 작업들이 분담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신경세포들이 나타나고, 다양화되며, 체계를 이루는 경향을 띤다. 동물 수준에 이르면, 외적 자극에 더욱 다양한 운동들로 반응한다. 그러나 받은 진동이 곧바로 완성된 운동으로 이어지지 않을 때조차, 그것은 단순히 자신의 기회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인다.

 

신경계의 형성은 작업분담의 표시이다. 작업은 분할되고, 기능들은 나누어진다. 신경계가 감각 섬유와 운동 섬유라는 이중적 구조를 갖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유기체의 감각 세포들은 유기체 전체의 기능에 협조하기 위해서 본래적으로 소유하고 있던 운동 기능을 포기하고 신경계를 통해 유기체 전체에 운동의 필요성만을 알리는 감각 기능만을 소유하고 된다.

 

그러므로 정념적 (감정적) 감각이란 신체의 일부가 직면한 위험을 중추에 알리는 행동에 대한 권유이며, 또 다른 의미로는 운동 기능을 상실한 신체의 부분들에 아직도 남아 있는, 운동을 향한 무익한 노력이다. 이처럼 유기체에다 주변의 변양들을 전달하는 동일한 인상이 유기체로 하여금 그것들에 적응하도록 결정하거나 준비하게 한다. 고등 척추동물들에 있어서 특히 척수에 자리 잡고 있는 반사운동신경작용과 뇌의 개입을 요구하는 의지적 활동 사이의 구별은 뇌 활동의 특별함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뇌 활동에서 분명히 선택 기능이 작동한다. 자극대로 다 반응하는 것이 선별적으로 반응을 나타낸다. 뇌는 일종의 중앙전화국과 같아서 연락을 보내거나 연락을 기다리는 기능을 한다. 즉 뇌는 받아들인 운동과 관련해서는 분석기관이고, 행사된 운동과의 관계에서는 선택 기관이다. 그러나 뇌는 그 어떤 경우에도 기억이나 이미지를 축적하지는 않는다.

 

왜 축적하지 않을까? 그것은 뇌는 신체의 일부로서 곧바로 그때그때의 기억과 행동들을 순발적으로 선택해서 내뱉게 하기 때문이다. 신체는 행동들과 곧바로 연결된다. 신체는 행동을 위함이다. 신체는 결코 정신을 위함이 아니다. 신체는 신체 밖에 존재하는 대상들을 마주하면서 지각이라는 행위를 나타낸다.

 

대상들이 지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각이 대상들 안에 있다. 그 때 지각은 어떤 선택에게 불과하다. 지각은 아무것도 신체 안에서 창조하지 않는다. 반대로 지각이 하는 역할이란 이미지들 전체로부터 신체가 어떤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는 것들을 모두 제거하고, 그 자체로 보존된 각각의 이미지로부터 내가 나의 신체라고 부르는 이미지의 욕구들과 무관한 모든 것을 제거하는 일이다.

 

이것을 제거 함으로서 나타난 현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기억이라는 현상이다. 기억이란 과거의 모든 것을 담고 있거나 축적해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신체가 대상을 만나고 반응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한 기억만 새삼스럽게 ‘기억했노라’고 우기면서 산출해낸다.

 

인식이라는 것이 이런 ‘기억 내놓음’의 터전 위에 등장한다. 즉 인식이라는 것은 주관적이 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나 사물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로서 인식이나 지각이나 모두 지금의 나의 신체가 발휘한 ‘행동’이 된다. 이처럼 신체란 오로지 행동을 통해서 표현할 뿐이다.

 

그렇다면 정신이란 무엇인가? 정신이란 지속적인 기억을 두고 말한다. 지각이 신체에 속한다면 기억은 정신에 속한다. 이 기억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습관적 기억이 있고 다른 하나는 이미지 기억이 있다. 습관적 기억이란 신체에 속한 기억이고 이미지 기억은 정신적 기억이다.

 

예를 들면, 같은 시를 마음 속으로 여러 번 반복하면서 매번 조금씩 진보를 이루며 마침내 나의 기억 속에 그 전체가 완전히 조직화되었을 때 학습이 성사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습관적 기억이다. 그러나 내가 시를 읽을 때마다 나타나는 뉘앙스는 반복할 때마다 고유의 개별성을 따로 띠게 된다. 그리고 그 의식은 기억된다. 이것이 이미지 기억이다.

 

학습에 대한 기억은 신체의 운동능력과 관련 있다. 하지만 이미지 기억을 결코 반복할 수 없는 ‘내 삶의 한 순간의 사건’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뇌 속에 보존되지 않으며, 단지 현실적 상황의 호출에 의해 습관- 기억 체제에 삽입된다.

 

정신과 신체의 구분은 바로 기억 구분을 통해서 밝혀지는 것이다. 이것은 이렇게 구분하지 아니하면 물질과 정신이 혼합된 채로 물질측면이나 정신측면으로 무리하게 설명을 가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유물론이 되든지 아니면 관념론이 되든지 둘 중의 하나로 몰리게 된다.

 

관념론은 모든 것을 육체가 만들어낸 표상으로 보지만 실제로 표상에서는 그 어떤 신체적 행동도 나오지 않는다. 이것이 관념론의 한계이다. 유물론의 한계란 뇌의 특정 지점에서 특정한 역할이나 기능을 담당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설명할 길이 없다는데 있다.

 

이 기억들은 유사성과 인접성에 의해서 기억이 이미지를 조성한다. 그래서 언어에 의해 ‘개념 수립’과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그저 유사성과 인접성에 의한 것이지 결코 정확함이란 있을 수 없다. 즉 모든 사물 규정은 모두 다 은유와 환유로서 묘사된다는 것이다. 유사성은 은유이고 인접성은 환유이다. 모든 게 상징이요 은유인 것이다.

 

사람들이 연장(지속)되는 것과 비연장(단절)되는 것의 구분은 실은 실용적 관심에 의해 세워진 실재일 뿐이다. 인간의 정신은 유용성의 방향으로 늘 굴절되기 마련이고 그것을 인생에 있어 결정적인 전환점으로 간주하게 된다. 이처럼 정신이나 물질이나 모두 신체가 행동하기 위해 느끼는 지속의 양태들이다.

 

요약하면, 베르그송은 신체에 대한 이미지에 특권적인 권위를 부여한다. 다른 이미지하고는 다르다는 말이다. 그것은 인간이 생리적으로 타 생물보다 더 고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른 생물들은 이 세계로부터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에 반응할 뿐이지만 유독 인간들만큼은 신체가 세계의 대한 자립적인 성질을 보여주어 마냥 외부 변화에 수동적으로 순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요로 따라 자발적으로 선택하여 독자적인 세계를 펼친다는 것이다. 그것이 외부적으로는 행동으로 나오고,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감정이라는 것으로 표현된다. 만약 인간이 단순한 자동기계에 불과하다면 감정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바로 이런 고집을 부린다는 것이 정신세계라고 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정신세계란 선별적으로 작업하는 기억의 지속성으로 인해 형성된 것이다. 물론 독자적으로 판단으로 발생된 것이다. 인간의 정신과 물질의 관계는 유물적인 분석이나 기계적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뇌의 변화와 신체의 행동을 통해서 파악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  물질과 기억

        정신과 신체의 관계에 관한 시론 중 기억에 대해 (앙리 베르그송)        

                                                                                                                                 퍼온글

 

베르그 송은 지각이 기억에 물들어 있고, 또 기억은 지각에 의해 현실에 접속한다는 일반적인 지점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더 나아가 지각과 기억에 명확한 선을 그음으로써, 과거로서의 기억에 그 이상의 생기를 불어넣고, 현재로서의 지각에 시간적인 연속성을 명확히 부여한다.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중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은 실재론과 지각, 기억을 연결 지어 설명하는 부분이다. 그는 주체와 대상이 결합하는데 있어서 주관과 객관에 대해 "연장적 지각 속에서, 지각의 주관적 측면은 기억이 응축하여 지니고 물질의 객관적 실재성은 이 지각을 내적으로 분해하면 얻게 되는 무수한 계기적 진동"이라고 이야기 한다. 도대체 어떻게 물질의 주관적 지각을 내적으로 분해한다는 말일까? 예컨대 내가 물병을 보고 응축한 어떤 관념을 분해해본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어제 마신 그 물, 투명하다, 차갑다, 어릴 적의 물놀이, .." 만약 이러한 분해가 그가 뜻한 무수한 진동의 집합이라고 한다면, 이 집합으로 인해 그 물질의 객관적 실체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의 지각은 또는 그 지각을 응축하는 과정은 지우개가루 같은 아주 사소한 것에 대해서도 그 실체를 다 품을 수 있다는 것인가?

 

베르그송은 기억을 두 가지 차원으로 풀어낸다. 먼저 어떤 세부사항도 간과하지 않는, 자연적 필연성으로서 과거를 축적하는 기록의 차원이 있고 또 행동을 향해 과거의 노력을 의식하는 차원이 있다. 특히, 베르그송은 통념과 같이 기억이 순전한 과거축적의 차원에 머무르지 못하게 하고, 현재순간으로의 연장적 방향성에 기억의 의의를 부여한다.

 

베르그송은 이렇게 현재로 연장되는 기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먼저 식별의 토대가 되는 조직된 운동적 질서로서의 순간적 식별이 있다. 한편으로는 좀처럼 발현되지 않고 오로지 지각과 행동 사이의 운동의 균열을 통해 모습을 드러내는 과거의 심리적 삶이 있는데 우리는 지각이 향하는 행동에 거스르는 인위적 노력에 이해 이 과거의 이미지의 장에서 표상을 선택한다.

 

나의 이해가 옳다면, 베르그송의 기억의 다층적 구조에서 현실과 근접해서 분리되지 않고 일어나는 기억이자 지각인 층위가 순간적 식별이고, '깊숙이 펼쳐진 이미지의 장'은 순수기억일 것이다. 베르그송은 반성적 지각의 회로를 다음과 같이 도식화 한다. 지각된 대상의 진동은 각자의 심층을 유지하며 서로를 붙들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서로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각 요소가 지각의 순간 결합될 수 있다. 즉 이 회로 구조에 의해 지각의 순간 기억의 각 층위에서 각 요소들이 상호 작용하고 이미지들이 선택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궁금한 것은 가끔 나는 내가 기억을 억지로 더듬는 것을 스스로 느낄 때가 있는데, 그 때와 내가 기억의 속에서 어떤 이미지를 선택해서 지각에 반영하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할 때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베르그송은 이것은 강도의 차이가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내가 억지로 더듬는 기억은 그것이 현실로 떠오르는 순간 순수기억이 아닌 것인가, 아니면 순수기억은 의식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것인가?

 

다시 베르그송의 논의로 돌아와서, 현재에 관해 베르그송은 붓과 같은 설명을 한다. 이해한 바로는, 화선지(이미지의 장)위로 투명한 붓이 지나간다. 그 투명한 붓 안에는 만년필처럼 먹물이 채워져 있다. 그 먹물은 나의 지각이 형성한 다중적 층위가 섞여 있는 것이다. 화선지 위로 붓이 지나가면서 붓 안의 먹물이 화선지를 만나 선을 그려나간다. 화선지는 젖어있어서, 지나온 선은 명확히 보이지 않게 번져나간다. 붓의 맨 끝은 나의 신체로서, 화선지 위의 이미지를 받고 되돌려 보내는 작용을 하고 있다. 전기 입자가 흐르는 물에 젖은 화선지를 상상해 보았다.

 

베르그송의 원뿔 모형이 바로 붓의 끝머리이다. 이 지점은 현실에 접해 있다. 원뿔의 가장 밑면은 무수한 개별적 이미지들이 펼쳐져 있다. 베르그송은 일반 관념이라는 것이 두 극단 사이를 움직이고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그의 일반 관념을, 우리의 자아의 중심을 이루는 추와 같은 무게 중심으로 해석하였다.

 

우리의 기억과 현실이 만나는 접점은 "우리 기억의 활동적 극단인 동시에 우리 기억의 방향성을 결정해 나간다". 그리고 순수기억-원뿔의 밑면-과 이 접점 사이의 다양한 응축면 사이를 병진 운동에 의해, 기억이 총체적으로 행동을 향해 나아가고, 회전운동에 의해 기억의 가장 유용한 측면이 현재로 향한다.

 

베르그송은 '삶에 대한 주의'라는 개념으로 결론을 맺는 듯 한데, 이 심오하고 중요한 것 같은 개념이 잘 와 닿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현실과 접속할 지를 판가름하는, 즉 주로 회전운동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우리 일반 관념의 태도로 해석해보았다.

 

마지막으로 궁금한 것은 베르그송이 기억의 왜곡을 어떻게 설명할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지각의 그릇된 방향성에서 기인하는가, 아니면 기억의 현실화 과정에서 기인하는가?

 

 

□  베르그송의 ‘시간’ 개념

 

베르그송은 일상적 용어인 ‘시간’과 구별하여 ‘지속’이란 개념을 통해서 시간을 설명한다. 지속은 ‘흐름’이며 ‘지나가는 것’이다. 이 말은 흐르고 있는 어느 한 부분이 지금 지나가고 있을 때 그 흐르는 것 이외에 또 다른 부분은 결코 동시에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근대과학에서 ‘시간’은 일정한 점들이 이어진 ‘궤적’으로 표현되고 측정된다. 그러므로 수학, 또는 과학에서 시간은 점들이 이어지는 선이 된다. 문제는 과학자가 측정하는 선, 즉 시간은 최소한 그것이 재어지고 있는 동안만은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베르그송은 이러한 가정 자체가 비논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시간의 개념은 일상생활에도 그대로 전이되어 사용된다. 일상적인 용어로서 ‘시간’이 사용될 때는 일정한 행위와 연결된 개념으로 사용된다는 점을 베르그송은 주목했다. 예컨대 ‘약속시간’, ‘시간표’, ‘점심시간’ 등이다. 베르그송은 이런 현상이 철학적 소여(所與)로서 ‘시간’의 ‘진정한 직접성’을 훼손하고 있다고 본다. 일상생활과 과학에서 사용되는 ‘시간’은 일정한 행위를 표상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어 공간화가 되기 때문에 순수한 사유의 대상으로서 ‘시간’으로는 쓰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일상적’ ‘과학적 용어’로서 ‘시간’과 ‘지속’으로서 ‘시간’을 구분한다. 사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시간의 문제를 공간의 문제들과 결합하여 사용할 수 밖에 없다. 때문에 주의 깊게 생각하지 않으면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시간’의 개념에 붙어있는 다른 개념을 분리하기란 쉽지 않다. 베르그송은 개념을 이원화하여 철학적 사유를 전개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양과 질, 표층적 자아와 심층적 자아, 물질과 기억, 지능과 직관, 정적 종교와 동적 종교, 닫힌 사회와 열린 사회 등등 수도 없이 많다. 시간을 ‘시간과 지속’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은 시간의 핵심적 성격을 나타내는 것과 함께 일상적 용어로서 시간과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서 시간을 분리하려는 베르그송의 의도가 담겨있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베르그송이 볼 때 시간은 지속적으로 흐르는 것이다. ‘선()’으로서 시간은 그 자체가 완결되어 더 이상 변화될 수 없는 구조이지만 ‘지속’으로서 시간은 ‘무엇인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며 ‘모두가 되어가게 만드는 것’이다. 베르그송은 이러한 시간 개념을 바탕으로 왜 인간이 또는 우주가 시간 속에서 ‘창조적 진화’를 이룰 수 있는지 밝히고 있다. 과학은 전개되는 시간 또는 전개될 시간을 다를 때 마치 그 시간이 이미 전개된 것처럼, 그 흐름이 완료된 것처럼 취급한다. 또한 보통 우리가 시간에 대한 말할 때 ‘지속의 측정’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지 ‘지속 자체’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게 아니다. 이건 상식적인 차원에서의 문제인데 이러한 상식의 요구가 과학의 출발이므로 과학은 물질세계에서 반복과 계측이 가능한 시간, 즉 ‘공간화 된 시간’을 연구할 수밖에 없다. 이런 과학적 방법을 베르그송은 ‘영화적 방법’이라고 명명한다. 그렇다고 베르그송이 과학적 방법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과학의 대상은 물질세계이므로 시간의 지속을 무시한다고 해서 아주 중대한 오류를 범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서 시간을 다룰 때는 다르다. 왜냐하면 철학의 대상은 ‘정신’세계인데 정신 또는 ‘의식’은 적어도 ‘지속’ 자체이거나 적어도 그곳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의식은 어떻게 시간의 지속을 파악할 수 있을까? 이때 베르그송의 ‘내적 직관’이란 개념이 중요하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만약 인간 정신이 실재를 인식하기 위한 도구로서 ‘지성’ 이외의 다른 것을 갖고 있지 않다면 정신의 영역에서 ‘절대적인 실재’에 도달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철학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듯 정신의 영역을 파악하는 것에 있어서 ‘지성의 한계’를 파악했다면 우리는 지성을 넘어서야만 정신의 영역에 다다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노력은 곧바로 모순에 부딪친다. 지성이 시간 안에서 능력을 발휘했다면 지성을 넘어서는 순간 시간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또한 ‘지성화 된 시간’은 ‘공간’이고 지성은 ‘지속의 환영’에 작용하는 것뿐이지 그 자체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성을 넘어서기 위해서 시간 밖으로 나올 것이 아니라 시간 안으로 다시 들어가야 한다.

 

이러한 순수 지속에 자리하기 위해서는 비록 ‘잠정적이지만’ 지성을 벗어나려고 노력해야 한다. 잠정적이라고 한 까닭은 우리가 언제라도 다시 지성으로 돌아와 상식의 세계에서 생활하거나 과학적 사유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순수 지속에 이르기 위해서 지성을 벗어나려는 노력이 바로 ‘직관의 노력’이다. 즉 ‘직관’은 시간 안으로, 시간의 실재인 ‘지속적인 운동성’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인 것이다. 베르그송이 보기에 직관은 무엇보다도 내적 영역을 겨냥하며 성공적으로 대상을 붙잡을 수 있는데, 이유는 여타의 대상들에 대해 우리는 외적이고 피상적인 파악을 하는 데에 반해 스스로는 내적으로 깊이 지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이렇게 말한다. “단순한 분석이 아니라 직관에 의해 우리 모두가 내부로부터 파악하는 실재가 적어도 하나 있다. 그것은 시간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는 ‘우리 자신’이다. 지속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자아이다.

 

베르그송은 이러한 시간의 개념을 바탕으로 왜 인간이 또는 우주가 시간 속에서 ‘창조적 진화’를 이룰 수 있는지 밝히고 있다. ……

 

베르그송은 “의식이 있는 존재에게는 동일한 두 순간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보는데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의식상태가 부단히 변화하는 이유는 “기억 없는 의식은 없기 때문”이고, “현재의 감정에다 지나간 순간들에 대한 기억이 첨가되지 않으면 한 상태의 지속이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의식이 기억이라면 삶은 늙어가는 것을 의미하지만, 역으로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변한다는 것과 동일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시간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지속의 과정이며 인간의 의식은 이러한 시간 위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베르그송은 ‘시간’을 지속되는 삶의 ‘존재 형식’이자 ‘창조적 인과관계’로 파악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시간’을 하나의 생각이 구체화되는 동시에 변해가는 과정이며, 하나의 발상이 숙성과정과 같은 창조적 지속을 역동적으로 진행하는 ‘생명적 과정’이라고 명명했던 것이다. 이것은 창조적 진화와 ‘생명의 역동적 시나리오’를 설명하는 열쇠이기도 하다.

                                                                                                                  .경진 글 중에서 일부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 .건희의 <베르그송의 시간관과 생명의 드라마>

 

 

□  베르그송

 

앙리 베르그송은 1859 10 18일 파리의 유태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10살 때부터 콩도르세 고등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그때 이미 고전문학, 과학, 수학 등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국가경시대회에 여러 차례 입상하는 출중함을 보여줬다. 1878년 파리고등사범학교 철학부에 입학해 1881년에 학업을 마친 그는 교수자격시험에 합격한 후 당시 프랑스 교육체제의 관례에 따라 일선 고등학교에서 철학교사로 근무했다.

 

이 시기에 그는 제논의 역설에 관한 통찰을 토대로 '운동과 지속'에 관한 자신만의 독창적인 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에서 날쌘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이기지 못하며, 공중에 쏜 화살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제논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이론적으로 반박하지 못하는가. 베르그송은 이런 오류가 우리의 지성이 운동을 공간적으로 분할 가능한 것으로 보는 성향을 지녔기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이를 기초로 연구를 계속하다가 베르그송은 1889년 자신의 첫 번째 저작이자 박사 학위논문인《의식에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에 관한 시론 Essai sur les donn s imm diates de la conscience》과 라틴어로 쓴 부 논문 <아리스토텔레스의 장소 개념 Quid Aristoteles de loco senserit>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공간화 될 수 없는 운동의 실재성' '연속적인 질적 변화로서의 지속'에 관한 그의 참신한 학설은 점차 철학계의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 처녀작에 나타난 심층 자아의 지속에 관한 이론은 특히 시인 페기와 소설가 프루스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베르그송은 1894년과 1898년 두 차례나 소르본 대학 교수가 되기 위해 지원했으나 번번이 실패하다가, 자신의 모교인 파리 고등사범학교의 조교수(전임강사)로 임명돼 강의와 연구를 계속했다(1889-1900). 1892 33세 때 베르그송은 루이즈 뇌뷔르제(Louise Neuburger)와 결혼했는데, 결혼식 때 신부의 사촌이자, 장차 유명한 소설가로 알려질 마르셀 프루스트가 신랑의 들러리를 서기도 했다.

 

. 독창적인 철학사상 '지속의 형이상학'

 

1896년 지속의 형이상학에 기초해 물질과 정신의 관계를 다룬 《물질과 기억 Matiere et Memoire》을 출간하면서 베르그송은 독창적인 철학사상의 면모를 확실하게 드러내게 됐고, 4년 후인 1900년 그 유명한 꼴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로 부임하게 된다. 꼴레주 드 프랑스에서 그가 행한 강연들은 당시 프랑스 학계뿐만 아니라 문화계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유명한 사건들이었다. 그는 많은 청중들로부터 감동과 경의의 박수를 받으면서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자가 됐다. 그의 강의시간에는 언제나 청중들로 초만원을 이뤘으며, 강의실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도 창 밖에 매달리거나 복도를 서성거리며 그의 강의를 들으려는 열성을 보여주곤 했다.

 

이 시기에 그는 웃음과 코미디에 관한 철학적 성찰을 담은 《웃음 Le Rire(1900)과 엄청난 인기와 세계적 호평을 받은 《창조적 진화 l' volution creatrice(1907)를 출간했다. 인간과 우주를 '지속'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베르그송의 역동적 형이상학을 완성한《창조적 진화》의 명성은 대단해서 미국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나는 이 책이 오늘날까지 씌어진 책 중에서 가장 훌륭한 철학책이라고 생각한다....나의 생전에 베르그송의 위대한 철학을 접하게 된 것을 신에게 감사 드린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세계적 명성을 얻은 베르그송은 미국이나 영국 등지의 여러 대학에 초청 강연을 다녔고, 1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미국을 방문해 미국의 원조와 참전을 설득하는 외교적인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국제 연맹 산하, 유네스코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세계지적협력위원회'의 의장직을 맡기도 했다. 1919년에는 그가 주로 정신과 육체의 문제에 관해 1900년에서 1914년 사이에 쓴 논문들을 모아 《정신력 l' nergie spirituelle》을 출간했으며, 1922년에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갖는 의미와 결과에 대해서 논한 《지속과 동시성 Dur e et simultan it 》을 출판했다. 1928년 그의 나이 70세 때에는 "가장 심각한 시대에 알맞은 새로운 철학을 전개시켰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것을 보기 드문 아름다운 말로 표현했다"는 이유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 2차 세계대전, 유태인으로서의 비극적 운명

 

1932 74세 때 류머티즘과 싸우면서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던 베르그송은 그의 마지막 대작인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Deux sources de la morale et de la religion》을 탈고했다. 그리고 1934년에는 <형이상학입문>을 포함한 그간의 논문들과 강연록을 모은 《사유와 운동 La pens e et le mouvant》을 출간했다. 교황청은 가톨릭의 근대화를 찬성하는 자들 사이에서 베르그송의 명성이 높다는 이유로 베르그송의 주요 저작들을 금서목록에 올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그송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가톨릭으로 기울어진다. 그러나 정작 베르그송이 가톨릭으로 귀의하지 못한 이유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했던 당시 유태인들이 박해 받고 있던 상황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베르그송은 심하게 앓고 있던 류머티즘과 혹독한 추위에도 불구하고 나치 점령 치하의 파리에서 유태인으로 자신의 신분을 등록하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폐렴에 걸리고 말았고, 그게 원인이 돼 1941년 1월 4 고결하고 성실했던 삶을 쓸쓸히 마감하고 말았다.

 

프랑스 유심론의 전통을 이어받았고, 스펜서의 진화론 철학에 영향을 받았던 베르그송의 철학 사상은 한 마디로 이 우주의 삼라만상이 고정돼 있고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질적으로 변화하는 생성 그 자체임을 밝히는 것이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필연적인 법칙에 따라 결정된다고 보고 질적으로 변화하는 현상들을 양적으로 계산 가능한 현상들로 환원시켜 의식조차도 두뇌의 산물로 해석하려는 과학의 기계론적 측면에 정면으로 대항한다. 과학적 지성을 통해서 파악된 추상적이고 각질화된 존재의 모습에 얽매이지 말고, 우리 의식의 내면에 귀 기울일 때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는 생생한 변화와 시간적 흐름 속에서 '지속하는' 실재의 참 모습을 인식하라고 주장한다.

 

. “물질과 기억요약

 

 '서론' '요약과 결론' 부분을 빼면 모두 '4'으로 이뤄져 있다. 물질과 정신, 영혼과 육체의 관계에 관한 심리학적 분석이자 형이상학적 고찰이다. 소위 유심론과 유물론이라는 어느 한 쪽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여러 이론적 주장들이 있다 해도, 물질과 정신의 실재성은 우리의 상식적인 경험 속에서 체험할 수 있다. 이 책은 정신과 물질이 각기 독자성을 지니지만 실천적인 삶의 움직임 속에서 함께 결합돼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 정신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기억은 결코 두뇌 속에 저장되는 것이 아니며 두뇌가 손상된다거나 육체가 소멸한다 해도 손상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음을 증명함으로써 정신의 독자성을 확보하고 또 어떻게 그 정신이 지각작용 속에서 물질과 만나 자신의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  의식의 극장과 시간

                                                                                     인용: 논문(.정원, 2000.) 중에서, 일부 발췌 

(서문 중에서)

 

      상대성 이론의 시간 속에서는 연대기적 시간의 벽이 무너진다. 과거는 예컨대 ”A는 일어났다로 결정되고 마는 것이 아니라, “A는 일어 났으며 또한 일어나고 있는 중이며 또한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로 보존되는가 하면, 현재는 과거의 현재, 현재의 현재, 미래의 현재 등 여러 현재들로 탈국소화하게 될 것이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과거, 노닐 곳 없는 곤궁 한 현재가 우리를 짓누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무한정 빠른 탈 것이 존재하지 않는 한, 이런 시간은 사실상 우리와는 무관하다고 말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 우리의 신체 자체가 무한정 빠르게 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고 느끼고 행동하고의 싸이클에 갇혀버린 신체는 무겁고 느리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며. 느낄 수 없는 것을 느끼며, 행동하는 대신에 유동하는 물질의 운동을 탈 수 있는 신체는 가볍고 빠르다. 가소적 뇌의 왕성한 운동과 더불어 신체는 가볍고 빠른 체벽 이전의 신체들로 복수화하며 유동적인 열린 체벽을 회복하기 때문이다.

 

의식(그리고 무의식)이란 신체의 운동에 의해 중재되는 물질의 운동이다. 닫힌 체벽의 신체가 중재하는 중심화되고 만곡된 운동인가 하면 복수적 이며 열린 체벽인 신체가 중재하는 더 많은 운동, 뺄셈으로부터 되돌아오는 운동이다.

 

 (본문 중에서) 

 

□  의식과 무의식

 

의식은 심리적 내면이 아니다. 의식을 심리적 내면으로 한정시키고 이를 내면 바깥의 외계 혹은 사물과 대립 시킬 때 심리철학의 모든 풀 수 없는 문제들이 생겨 난다.

 

예를 들면 심신의 문제, 외계(물리적 혹은 관행적)와 심리적 내면 중 어디에 우선성을 부여 할 것인지의 문제, 연장적이지 않은 심리적 내면과 연장적인 물리적 제도적인 외계가 어떻게 서로 상호작용 할 수 있는지의 문제 등 ……

 

그러나 의식은 심리적 내면이 아니다. 의식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의식의 극장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의식은 모든 것이 모든 것에 대해 작용하고 반작용 하는 유동하는 물질의 운동으로 인해 우리 앞에 펼쳐지게 되는 영화다. 이미지들 이다. 다시말해 실체가 아닌 관계들이며 운동들이다.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고 냄새나 맛 촉감을 느끼는 것, 황량한 들판, 무시무시한 산 그림자, 막막한 바다, 빗방울, , 폭풍우, , 나를 에워싼 것들 타인, 가족, 공동체, 사회, 국가, 세계, 역사 …… 이것이 의식(=사물)은 지각이고 감정이며 사고와 행동이라는 말의 의미일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관념론과는 무관하다. 타자를 제거하려는 것이든(주관적 관념론) 목적없는 물질의 운동을 제거하려는 것이든(객관적 관념론) 결국 무기력한 유아론이나 인간 중심주의로 귀결하는 것이 관념론이라고 한다면, 여기서 말하는 내용은 무기력해진 정신이나 사물에게 도리어 힘을 회복해 주는 유물론(스피노자, 니체, 들뢰즈의 유물론적 관점)에 입각한다.

 

무의식은 심리적 심층이 아니다. 무의식은 내성 할 수 있는 심리적 내면에 대립하는 심리적 심층이 아니다. 사물이 곧 의식인 한, 다시 말해 세계가 온통 지각이고 감정이고 사고와 행동인 한, 사물 주변을 서성대며 끊임 없이 사물을 위협하는 반()사물이고 비()사물이며 혹은 사물의 저변인 것이 무의식이다.

 

우리에게 모든 것은 보고 들리는 것이며 클로즈업 되면서 느껴지는 것이고 반성과 행동으로서 주파해 온 혹은 반성되고 행동되어야 할 환경이고 역사다. 그러나 이렇듯 의식이자 사물인 세계는 뺄셈될 수 있는 모든 것이 뺄셈된 중심화 된 세계이고 만곡된 세계다.

 

보일 듯 말 듯 한 것, 보이지 않는 모든 것, 들릴 듯 말 듯한 모든 것, 들리지 않는 모든 것, 느껴질 듯 말 듯한 모든 것, 느껴지지 않는 모든 것, 생각될 듯 말 듯한 모든 것, 생각되지 않는 모든 것, 행동될 듯 말 듯한 모든 것, 행동되지 않는 모든 것이 뺄셈되어 있다. 이 뺄셈 되어 버린 지각(인 사물들 혹은 이미지들)의 저변, 감정과 사고의 저변이 무의식이다. 무의식을 복권 한다는 것은 내면의 억압된 심층에 대한 발굴작업이 아니라 중심화 이전의 세계, 만곡 이전의 세계를 복권하는 것이다. 뺄셈이 일어나기 이전, 유동하는 물질의 목적 없고 중심없는 운동들과 관계들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것이 무의식은 비지각이고 비감정이고 비사고, 비행동이다라는 말의 의미일 것이다.

……  

 

무사심한 비 감정은 가볍고 빠른 체벽이전의 신체, 탈체벽의 신체(의 중재)와 함께하는 물질의 운동이다. 뺄셈된 것을 되찾기 시작한 물질의 운동이다. 유동하는 물질의 운동 속으로 단신 던져져서 끝없이 힘 받는 가운데 신체는 이미 체벽이전의 신체들이 되어 이 완강한 벽에 몸 부딪치고 잇는가 하면, 벽을 기어 오르거나 파고 있다.

 

완강한 체벽에 몸 부딪치기가 영원에 이르렀다고 느껴지고 마침내 이를 넘을 수 없는 자신의 경계로 받아 들이게 되는가 할 즈음 그러나 신체는 이미 탈출에 성공하고 있으며 뺄셈 되었던 무진장한 비감정들과 만난다.

 

기쁨 속의 비애, 슬픔 속의 평정, 사랑 속의 원한, 미움 속의 감사, 두려움 속의 응시, 불안 속의 화해, 절망 속의 인내, 얼음 속의 불, 파탄 속의 환희 …… 목록은 끝이 없다. 이는 완강 하기만 했던 감정의 벽 이편에서는 느껴질 듯 말 듯한 모호함이었고, 혹은 전혀 느낄 수 없던 어둠이었다. (체벽을 고수하려는 한 느낄 수 없다는 점과, 체벽을 벗어나는 점에서만 발생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를 무사심한 비감정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견고한 감정의 벽에 부단히 눈에 안보이는 균열을 만들어 내는가하면 마침내 벽을 완전히 무력화 시키고 마는 이 비감정들은 물질의 운동을 보다 스스럼없이 탈 수 있게 된 체벽이전의 신체, 탈체벽의 신체를 보고한다.

 

비감정은 들뢰즈에 의하면 정해진 시공간을 무효화 시키는 무한한 변용의 힘(affection)으로 설명한다. 에컨대 비감정(인 이미지)으로서의 비는 정해진 시공간에서만 내리는 현실의 비가 아니다. 무사심한 비감정의 힘은 현실의 시공간을 무효화 시킨다. 대신 비는 무한한 시공간으로 충전된 아무 공간(espace quelconque)의 비가 된다. 수백 수천 가지 다른 얼굴로 어디라도 내릴 수 있는 비가 된다. 그치지 않고 소리없이 잎새에서 잎새로 내릴 수 있는 비가 될 수도있고, 연못의 판판한 표면을 소름돋은 살갗으로 만드는 비가 될 수도 있다. 무사심한 비감정이 가볍고 빠른 체벽이전의 신체 또는 탈체벽의 신체와 함께 하는 것이라면 체벽을 고수하려는 신체에 의해 방해 받았던 물질운동이 이제 이처럼 그 본래의 무한한 변용의 힘을 회복하게 될 것은 당연하다. ……

 

뺄셈된 세계는 체벽을 고수하려는 신체의 중재에 의해 정립되는 이미지들로서 기쁨 슬픔 등의 완강한 감정들, 우리를 웃고 울게 하는 완강한 사물들 세력들,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 생생한 사물들 지각들 등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이내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이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된다. 주로 예술가들이나 어디에도 몸 붙일 수 없었던 소수에 의해 발명되어 온 삶이 있다. 무사심한 반감정과 비감정, 체벽이전의 신체들과 탈 체벽의 신체 고압전류 같고 용암 분출 같은 힘의 관통, 뚱단지처럼 알쏭달쏭하고 마술처럼 어지러운 반지각과 비지각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는 단지 예술가들이나 소수의 기이한 발명품이 아니라 뺄셈된 세계에서 뺄셈 되었던 바로 그것, 우리가 찾지 않으면 안 될 바로 그것들이기도 하다. 이런 것들이 뺄셈된 세계의 외부이다.

 

감정과 지각 이외에 반성과 행동도 뺄셈된 세계에 속한다. 체벽을 고수하려는 한, 신체는 무한히 힘 받는 수동상태에 있다. 수동상태의 신체는 체벽 바깥의 외적 원인들에 대해 반성하면서 이에 반응하게 된다. ……

뺄셈된 것들은 행동을 위협한다. 감정은 반감정이나 비감정으로 미끄러지고 지각은 반지각이나 비지각과 교차되곤 하는 가운데 반성과 행동은 신체로부터 그리고 신체와 필적하는 것들로부터 빠져 달아나기 시작한다.

 

낯선 닭장 속에 뛰어들어 이리 쪼이고 저리 쪼이는 한 마리의 나그네 닭이어야 하는 짜라투스트라와, 초인의 도래에 관한 메시지를 달고 나르는 화살이어야 하는 짜라투스투라, 무언가를 잔뜩지고 인적 드문 새벽길을 잰걸음으로 걷는 도둑이어야 하는 짜라투스트라와, 선물꾸러미를 지고 새벽길을 서둘러 가는 선사하는 자여야 하는 짜라투스투라 사이의 아주 작은 차이와 아주 큰 차이는 우리에게 일련의 반감정과 비감정들을 회복 시킨다. 나아가 행동의 극미한 차이로부터 상황의 엄청난 차이가 만들어 질 수 있는 비유클리트적인 무한한 힘의 공간을 복구해야 한다. 행동의 아주 작은 차이와 상황의 아주 큰 차이 사이에는 그토록 수 많은 신체들의 계열 속을 여행하며 인과의 무한 연쇄를 통과 해 가는 짜라투스투라의 무사심한 모험이 있다. 혹은 같은 말이지만 회복된 물질의 운동 즉, 모든 것이 모든 것에 대해 작용하고 반작용하는 유동하는 물질의 운동이 있다.

 

 

 □ 시간

 

뺄셈 된 세계는 시간을 잃어버린 세계이기도 하다. 유동하는 물질의 운동을 복구하고 뺄셈되었던 세계를 회복해 가는 과정은 따라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여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참말로 시간을 잃었을까? “시간을 잃었다라는 말은 대관절 무슨 의미일까?

 

의식의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 중의 하나는 한 번에 하나씩이라는 협량함이다. 의식은 한 번에 하나씩 병목을 통과하듯, 혹은 실에 구슬을 꿰듯한 흐름이며 무의식은 병존하는 방대함이다. 그런데 의식과 무의식이 단지 심리적인 내면에 한정되지 않는다면 예컨대 의식은 뺄셈된 세계 자체이고 사물들 자체이며, 지각이거나 감정이거나 행동된 이미지들 자체라면 그리고 그렇다 하더라도 여전히 의식이 협량하다고 말 할 수 있다면 이 협량함의 의미는 어떻게 음미 되어야 할까? 시간이다.

 

시간이 아니고서는 달리 대답을 찾을 길이 없다.  한 번에 하나씩 병목을 통과하듯한 의식의 흐름은 순차적 시간 안에 있다. 의식의 시간 즉 뺄셈된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순차적 연대기적 시간의 흐름이다. 이는 현재라는 병목을 통과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혹은 실에 꿰어지는 현재들이다. 이미 병목을 통과해 간 시간 혹은 이미 실에 꿰어진 지난 현재들이 과거이며 앞으로 병목을 통과하게 될 시간 혹은 앞으로 실에 꿰어질 다가올 현재들이 미래다. 현재라는 병목은 체벽을 고수하는 신체의 중재로부터 유래한다. 체벽을 고수하려는 신체의 중재에 의해 지각인 이미지, 감정인 이미지, 행동인 이미지들이 정립되므로 현재의 병목은 지각 감정 행동의 병목이기도 하다.

 

체벽을 고수하는 느리고 무거운 신체의 중재를 거치게 되면서 유동하는 물질의 운동은 비가역적인 시간의 흐름 속으로 유입된다. 신체의 중재라는 좁은 관문을 통과하는 시험을 거쳤느냐 거치고 있는 중이냐 거치게 될 것이냐에 따라 물질의 운동이 비가역적 시간성을 띠게 된다. 이는 좁은 관문인 현재가 중심이 되는 시간이다. ……

 

회상이나 꿈 예상은 연대기적 시간을 위협하지 않으며 현재의 협량함을 위협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현재라는 관문 중심의 시간을 살찌우며 공고히 한다. 제 아무리 길고 미로 같은 회상의 여정이나 꿈의 일탈도 거기에 오두막을 짓기 위한 것이 아니라 되돌아 오기 위한 것일뿐이며, 제 아무리 아름다운 혹은 암울한 회상이나 꿈도 생동하는 현재와 혼동되는 일은 없다.

 

이상이 의식의 시간, 즉 뺄셈된 세계의 시간, 즉 우리가 익히 아는 시간이다. …… ()사물이나 비사물로서의 무의식 다시말해 사물의 저변으로서의 무의식은 더 이상 흐르는 시간과 함께일 수 없다. 저변은 보존이고 가없음이어서 흐르는 시간이나 흘러 가버린 시간 안에 있을 수 없다. 저변이 그 안에 있게 되는 시간은 가없는 동시성의 시간이며 보존되는 시간이어야 한다. 더 이상 현재의 협소한 병목이 중심에 있지 않은 시간, 따라서 더 이상 지나간 현재의 순차적 연대기가 아닌 과거, 단지 우리 안에서 회상될 수 있을뿐인 과거가 아니라 우리가 직접 그 안으로 뛰어 들어갈 수 있는 과거, …… 보존되는 가없는 시간을 위해 봉사하는 게시판 같은 현재, 양립 불가능하고 소통 불가능한 점들의 동시성으로서의 현재, 이 같은 동시성은 현재가 보존되는 가없는 시간의 규제를 받는 증거라 할 것이다. 이는 들뢰즈가 되찾아야 할 시간이라고 보는 바로 그 시간이다. 베르그송을 사로잡았던 그 시간이기도 하다.

 

보존되는 과거가 우리에게 전적으로 낯선 시간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빛의 속도는 경이로운 시간체험을 가능하게 한다. 몇십년, 몇백년, 또는 몇백억년 전의 사태들을 현재 진행형으로 도래할 미래형으로 보존하여 우리 앞에다 고스란히 옮겨 놓는다. 빛의 엄청난 속도 덕분에 과거는 사라지지 않고 일어날 것이다의 과거로서 바로 우리의 눈 앞에 되살아나게 된다. 물론 이것은 뺄셈된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체벽을 고수하는 느린 신체가 중재하는 세계에서도 우리는 보존되는 과거를 접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뺄셈된 세계에서의 과거의 보존은 온전한 보존과는 거리가 멀다. 여전히 우리가 아는 과거의 압도적인 부분이 가버린과거이며 단지 회상될 뿐인 과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거는 참으로 가버렸을까? 그렇지 않다. “가버린과거 역시 그 모습 그대로 …… 보존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체벽을 고수하려는 무겁고 느린 신체의 중재에 기대고 있는 한 이렇듯 온전히 보존되는 과거는 우리와 인연이 없는 시간으로 남고 말 것이다. 우리가 과거의 온전한 보존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빛만큼 또는 그 보다 더 빨리 옴직일 수 있는 신체가 필요하다. ……

 

사물에 대한 이미지가 아니라 이미지 자체인 사물을 보여 줌으로서 영화는 자연적 지각에 사로잡힌 우리에게 영화적 지각을 가르칠 수 있었다. 이제 연대기적 시간을 넘어 잃었던 동시성의 시간 안으로 이행 함으로써 영화는 자연적 사유에 사로잡힌 우리에게 영화적 사유를 가르친다고 말 할 수 있겠다.

 

생각한다는 것 즉 사유란, 단지 보고 느끼고 반성하고 행동하고의 주기 안에만 머무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유는 자연적 사유에 불과하다. 생각한다는 것은 보고 느끼고 반성하고 행동하고의 주기를 벗어나 무한한 생성인 시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무엇보다 시간의 직관, “시간인 이미지 봄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것이 스피노자와 들뢰즈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사유이다. ……

 

영화를 만드는 것은 체벽이전의 신체이며 탈체벽의 신체다. 그 같은 신체의 즉 물질의 눈으로 해방된 가볍고 빠른 카메라의 눈이 영화를 만든다. 자유롭게 운동하는 카메라의 눈이 유동하는 물질의 운동을 회복한다면 빠르게 운동하는 카메라의 눈은 우리가 무한히 빠른 탈 것을 타고 여행할 때나 만나게 될 가없는 동시성을 회복한다. 보존되는 과거 그리고 비국소성으로서의 현재. 그것은 무겁고 느린 신체의 중재로는 결코 볼 수 없는 시간 이미지를 확보한다. 회상이 아닌 과거 자체, 그리고 꿈도 환각도 아닌 탈 현행성 자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아 오는 일은 주어진 지난 역사와 현재 경험하는 현실을 발판으로 해서 앞날을 예측하고 설계하는 일과는 무관하다. 이와 같이 해서 미래에 대한 예상이나 전망, 약속을 확보한다해도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아 올 수는 없다.

 

미래에 대한 전망이나 약속을 확보하는 일은 과거로부터 어떻게 일직선이지 않은 성장과 발전의 도정을 추출해 내는가에 달렸고 이러한 도정을 추적하는 일은 다시 주어진 과거, 결국 순차적으로 연대기에 의거한다. 또 나아가 현재의 현실체험에 입각하는 경우에도 이는 결국 지각 감정 행동인 현재 단지 현재의 현재라는 시간적 국소성에만 의거하는 것이다.

 

요컨대 시간문제의 진원은 미래가 아니라 오히려 과거와 현재에서 찾아져야 한다. 어떻게 하면 과거를 그 결정성으로부터 구해내며 현재를 그 국소성으로부터 구해낼 것인가에 문제의 본질이 있다. 어떻게 하면 단지 보고 듣고 느끼고 행동할 수 있을 뿐인 현재라는 좁은 감방을 벗어나느냐가 문제다.

 

니체의 통찰처럼 어떻게 과거가 구제되며 국소적 현재가 몰락하는 반시대성에 도달하느냐가 문제다. 과거와 현재로부터 미래에 대한 약속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모든 질곡으로부터 미래를 깨끗하게 해방하는 것, 아니 이미 그렇게 해방된 미래에 거하면서 과거와 현재를 구제하는 것이 시간 회복의 과제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인식론

                                                                  글쓴이 : .영란,  Fm :  선우 홈페이지에서 일부 발췌

 

인간은 다른 사람이나 대상과의 관계를 통해 인간과 세계에 대해 철학적 반성을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도 사랑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자칫하면 피상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 관계를 심층적으로 다변화시키기 때문이다.

 

 

□ 모든 것은 변화한다?

 

인간은 이 세계를 바라보면서 다양한 경험을 통해 몇 가지 아주 일반적 개념들을 발견해 냈다.

가령 우리는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변화하는 것과 변화하지 않는 것, 비슷한 것과 비슷하지 않은 것 등을 구별한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들 가운데 가장 일차적인 것이라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변화하는 것과 변화하지 않는 것, 혹은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일 것이다. 즉 인간이 가장 먼저 지각하는 것은 어떤 것은 움직이고 다른 것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존재와 무, 또는 동일성과 차이성 등과 같은 개념들도 여러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지만 형이상학적으로 상당히 발전된 내용 체계를 포함하고 있다. 가령 존재와 무의 경우에 우리는 가장 먼저 어떤 것이 존재하다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통해 그것들을 지각할 수 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러한 현상을 변화의 개념하에서 파악했다.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존재한다’와 상대적인 의미에서 파악되었을 뿐이며, 절대적인 의미에서 파악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의식의 발전이 필요했다. 또한 동일성과 차이성의 경우에도 수많은 대상들이 가진 특성들 간의 유사한 점들과 유사하지 않은 점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분류하고, 더 나아가 유 개념과 종 개념 및 종차(種差)를 파악해야 유사한지 또는 그렇지 않은지의 기준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역시 상당히 체계적인 사고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사유의 발전 과정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관심의 변천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초기 자연철학자들은 대부분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의 다양한 변화 및 운동에 주목하면서 변화하는 것들 가운데 변화하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자 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변화한다. 물론 모든 변화하는 것은 변화하는 측면과 변화하지 않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변화하는 대상의 최소한 어떤 부분은 변하지 않아야만, 즉 연속성을 가져야만 그것이 ‘어떤 것’에서 ‘다른 것’으로 변화했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 그렇지 않고 변화하는 대상의 모든 부분들이 변화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변화한다’고 말할 수 조차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생성과 소멸만을 끊임없이 반복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단지 수 많은 다른 것들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가령 어제 뜰에 피어 있던 장미는 하룻밤 사이에 ‘다른’ 장미라고 불러야 할 것이며, 나아가 어제 내가 살았던 이 세계는 하룻밤 사이에 다른 세계라 불러야 하며, 물론 나 자신도 ‘다른’ 나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또한 이 세계는 매 순간 수 없이 생겨났다가 사라져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어제 내가 살았던 세계와 오늘 내가 살았던 세계가 유사한 세계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전혀 다른 세계들이 될 것이다. 사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이러한 방식으로 이 세계의 생성과 소멸을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복잡한 개념적 장치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  변화하는 것과 변화하지 않는 것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근본적으로 모든 변화는 변화하는 측면과 변화하지 않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우선 자연학의 개념 체계로 설명하자면 우리가 알아차릴 수 있는 변화하는 측면은 한 대상을 이루고 있는 뜨거움과 차가움 같은 한 쌍의 대립물들 간에 일어나는 것이며, 변화하지 않는 측면은 물과 같은 ‘기체(hypokei-menon)’이다. 가령 뜨거운 물이 차가운 물로 변화했다고 하자. 여기서 물 자체는 변하는 것이 아니고 물이 처음에 가지고 있던 뜨거움이라는 성질을 잃게 되어 차가움이라는 성질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엄밀히 이것은 뜨거움과 차가움을 각기 따로 획득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보다는, 뜨거움이라는 성질―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로는 ‘형상’을 말한다―을 잃게 되면 자연히 차가움이라는 성질로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변화의 기본 요소들을 설명하는 것으로 변화의 주체와 변화되기 이전 상태 및 변화된 후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

 

. 가능태의 정의
  가능태(dynamis)는 운동 또는 변화의 원천이다.

  변화는 변화하는 것과 변화되는 것을 포함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가능태를 다른 것 속에 있는 변화의 원천으로서, 또는 다른 것으로서 자신 속에 가지고 있는 변화의 원천으로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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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란 어떠한 존재인가?

가장 일반적으로 인간은 영혼과 신체로 이루어진 존재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영혼과 신체란 무엇인가? 그리스어로 영혼과 신체는 단순히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용어들은 아니다. 신체를 가리키는 소마(soma)는 인간뿐만 아니라 그 외의 동물들과 식물들을 비롯한 돌, 나무 등의 모든 물체들에 사용된다. 영혼을 가리키는 프시케(psyche)도 역시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영혼의 개념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추상적인 형이상학적 개념이 아니라 아주 단순한 경험적 관찰로부터 발전된 개념이다.

인간이 감각기관을 가지고 가장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움직일 수 있으나 다른 것들은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다. 왜 어떤 것들은 움직일 수 있고 다른 것들은 움직일 수 없는가? 고대인들은 바로 이러한 문제 의식으로부터 영혼의 개념을 발견해 냈다. 영혼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단지 장소나 공간 속에 이동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영양 공급을 할 수 있으며 성장하고 쇠퇴하며 감각­지각과 사유를 할 수 있는 것도 포함한다. 따라서 어떤 것이 이러한 기능 가운데 하나라도 가지고 있으면 영혼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뿐만 아니라 그 외의 동물들은 물론이고 식물들까지도 영혼을 가진 것으로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식물은 영양 공급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동물은 장소 이동 능력과 감각­지각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은 지성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물론 이러한 각 존재들은 이러한 영혼의 능력들을 각기 따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식물로부터 동물을 거쳐 인간에 이르기까지 점차 부가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구성하는 영혼과 신체의 관계를 설명하면서도 가능태와 현실태의 개념을 도입한다. 가령 그는 이러한 개념들을 통해 영혼이 “가능태로 살아 있는 자연적 신체의 제1현실태”이며, 또 “기관들을 가진 자연적 신체의 제1현실태”라고 정의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과 신체에 대한 정의는 영혼과 신체 각각에 대한 독립적인 정의를 해주지는 않는다. 그것은 단지 영혼과 신체가 존재론적으로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분리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줄 뿐이다. 왜냐하면 소위 영혼의 정의에는 이미 반복적으로 “살아 있는 자연적 신체”라는 방식으로 영혼과 유사한 개념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가능적’이라는 제한 사항만을 가질 뿐이다. ‘살아 있는’과 ‘자연적’은 영혼의 기능들과 기본적으로 중첩되는 기능들을 포함하고 있다.

여기서 영혼과 신체를 구별해 줄 수 있는 차이점은 바로 영혼이 그것의 ‘현실태’로 있다는 것 뿐이다. 가능태로 살아 있다는 것은 영혼을 배제하거나 혹은 잃은 것이 아니라 영혼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인간의 신체는 이미 영혼의 기능을 갖추고 있지만 아직 현실태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의 정의는 사실상 영혼과 신체의 관계를 단순히 상호 규정하는 특징만을 보인다. 왜냐하면 영혼은 실제적으로 신체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개념적으로도 신체와 독립적으로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이 죽으면 영혼은 신체와 분리된다거나 혹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으며, 또는 영혼이 신체와 함께―신체가 영혼보다 좀더 늦게―소멸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 죽음 후의 신체는 인간의 신체가 아니다. 그것은 이름만 인간의 ‘신체’와 동일할 뿐이지, 실제로는 인간의 신체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동음이의어 원리를 통해 마치 도끼가 도끼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형태가 비슷하다면 진짜 도끼와 이름만 동일할 뿐이지 전혀 도끼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인간의 신체가 신체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형태만 비슷하다면 진짜 신체와 이름만 동일할 뿐이지 전혀 신체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


□ 인간은 어떠한 가능태들을 가지고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다양한 가능태들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인간의 변화 혹은 운동의 원천으로서 영혼의 능력을 ‘가능태’라고 자주 표현하고 있다. 영혼의 능력들로는 감각, 판타시아, 지성, 욕구 등이 있다. 감각 능력은 우리가 이 세계를 인식하는 출발점이다. 우리는 감각 능력을 통해 인식의 기초 자료들을 획득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단 감각의 종류를 크게 ‘자체적 감각’과 ‘부수적 감각’으로 구별한 다음에, 자체적 감각을 다섯 가지 고유 감각과 공통 감각으로 구별하고 부수적 감각을 추가하여 세 가지 종류의 감각으로 세분했다. 그는 이러한 구별을 통해 감각­지각이 초래할 수 있는 오류의 범위와 원인을 규명할 수 있게 해준다. 가령 우선 고유 감각은 거의 오류 불가능하며, 다음으로 부수적 감각이 오류 가능성이 높으며, 마지막으로 공통 감각이 오류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와 같이 감각의 종류를 분류하여 감각의 오류 가능성을 진단함으로써, 감각­지각 전체에 대한 원천적인 불신을 제거하고 최소한 인식의 단초로서 감각­지각의 확실성을 확보하는 데 있다.

또한 판타시아(phantasia)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판타시아를 감각이나 지성과 같이 독립적인 영역을 가진 능력과는 달리 그 자체로 존재하는 능력으로 보지 않지만, 판타시아와 다른 능력들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지적하면서 그것의 독자적인 기능을 해명하고 있다. 판타시아는 단순히 거짓된 이미지, 즉 환상이나 공상만으로 이해되지 않으며, 인식론에서 다양한 긍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판타시아는 감각­지각을 통해 수용된 감각 대상의 형상들을 통해 감각­자료들을 형성하고, 이와 함께 과거에 경험했던 기억 내용들과 결합 또는 보완하여 전체적인 인상을 구축하는 역할을 한다. 그것은 감각­자료들을 체계적으로 결합하여 하나의 개념으로 규정짓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어떤 것으로 볼 수 있도록 하나의 종류로 느슨하게 묶어 하나의 그림과 같은 판타스마(phantasma)를 형성한다. 판타스마는 감각­자료들이 가진 결속력으로 인해 일정한 지속성을 가지며,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감각과 지성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고 상호 작용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판타스마는 우리들 각자가 가진 생리적 구조에 따라 지속력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인식 주체의 능력과 기능에 따른 인식 내용의 수용과 보존 상태에 의해 오류 가능성의 정도가 현격하게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판타스마는 한편으로는 지식의 주요 원천이 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꿈이나 환상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성의 두 가지 측면을 구별하였는데, 우리는 이것을 수동 지성과 능동 지성 또는 가능적 지성과 현실적 지성이라 부를 수 있다. 전자는 가능태로 있으며 모든 것으로 되는 것이며, 후자는 현실태로 있으며 모든 것을 만드는 것이다. 수동 지성은 마치 백지와 같이 사유 대상들을 수용하며 다양한 결합과 추론 과정을 통해 지식의 기본적 형태를 만들 수 있다. 능동 지성은 마치 빛과 같이 그 자체로 직접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성의 작용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능동 지성과 수동 지성이 상호 독립적인 기능이나 역할을 한다고 보기 어렵다. 근본적으로 능동 지성은 수동 지성이 작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일종의 원리 혹은 원인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으며, 수동 지성은 다양한 사유 작용들을 수용하여 연합 및 결합을 통해 다양한 사유­자료들을 형성하는 것으로 일종의 질료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지성은 우리가 태어날 때 생성하지만 소멸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즉 모든 인간은 죽지만 불멸하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지성이다.


□ 인간은 어떠한 가능태로서 존재하는가?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고유한 기능 혹은 능력을 잘 발휘하며 사는 것이다. 인간은 다양한 기능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을 그 외 다른 모든 동물들로부터 구별해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성 혹은 지성이다. 그렇다면 인간으로 인간답게 사는 것, 혹은 인간으로서 잘 산다는 것은 이성적 능력을 잘 발휘하고 산다는 것이다.

영혼의 모든 기능들 가운데 이성 이외의 다른 능력들은 모든 동식물들에 공통된 능력이며, 이성만이 인간에게 고유한 능력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이성을 가졌기 때문에 동물과 똑같이 감각­지각을 하더라도 다른 차원의 감정을 가진다. 가령 동물도 기쁨과 슬픔을 느낄 수 있으나 인간과는 다르다. 인간은 단지 물리적 자극에 의해서만 신체적 즐거움과 괴로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며, 정신적 작용에 의해 지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더욱이 인간은 자신의 실존적 상황에 대해 절망과 고독을 느끼며, 타인의 실존적 상황에 대해서도 분노와 동정 및 연민을 느낀다. 인간은 이성을 가졌기 때문에 동물과 다른 차원의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복잡한 사유 체계를 통해 다양한 방식의 행동을 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이성적 능력을 잘 발휘하고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합리적이고 냉철한 것만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수학적 계산을 잘하고 공부를 잘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이성이 작용하는 범위는 매우 넓다. 그것은 단지 그 자체만 아니라 다른 능력들인 감각과 판타시아 및 욕구 능력 등과 상호 작용하여 우리의 행동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이성을 잘 발휘하고 사는 것은 이성 자체의 기능뿐만 아니라 이성이 상호 작용하는 감정과 욕구 및 행동 등을 올바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말한다.


□ 인간이 궁극적으로 실현해야 할 가능태는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궁극적으로 행복을 추구한다고 한다. 즉 인간의 최고의 목적은 행복이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즐겁고 기쁘면 행복하다고 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행복이란 아주 엄밀한 용어이다. 그는 우리가 삶 전체를 알지 못하면 행복한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를 확실하게 판단할 수 없다고 한다. 우리가 아직 삶을 다 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은 이제까지 살아온 과거와 현재의 상황을 미루어 보아 아마도 미래에도 행복할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복잡한 양상을 지닌다. 따라서 행복의 조건도 복잡한 양상을 나타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해지기 위한 현실적인 요건들을 고려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 좋은 외모와 높은 신분, 그리고 재물도 필요하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죽은 이후의 평판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제반 조건들을 갖출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의 조건이라고 할 것이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행복은 인간으로 가장 인간답게 사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인간의 최고의 탁월성을 드러내는 영혼의 활동이라고 한다. 인간은 세 가지 유형의 탁월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신체의 탁월성과 성격의 탁월성, 그리고 지성의 탁월성이다. 신체의 탁월성은 어느 정도는 인간의 행복에 본질적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지나치게 못생겼거나 병약하다면 행복을 감소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격의 탁월성과 지성의 탁월성은 인간의 이성적인 삶 속에 포함된다. 성격의 탁월성은 영혼의 비이성적인 부분의 탁월성이기는 하지만 이성에 귀를 기울인다. 그것은 훈련 혹은 습관에 의해 획득할 수 있다. 성격의 탁월성은 중용에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간의 탁월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지성의 탁월성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행복한 삶은 불변하는 진리를 성찰하는 관조적인 삶이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조적인 삶이 신의 삶과 가장 비슷하며 신은 최고로 행복한 존재라고 한다. 그는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것들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주목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최소한 우리가 불멸하는 존재로서 행동할 수 있고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최고의 것에 따라서 살려고 노력할 수 있는 한 말이다.


□ 인간은 어떻게 가능태를 실현할 수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행복한 삶은 불변하는 진리를 성찰하는 관조적인 삶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수평적인 차원에서 행복이라는 목적과 관련하여 논의된 것이고, 수직적인 차원에서 행복이라는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과 관련하여 논의해야 할 것이다. 즉 우리는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과 과정들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성적 능력을 올바로 발전시킬 수 있는가? 이러한 인간의 고유한 기능인 이성을 올바로 잘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서 우리는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본성적으로 정치적 동물이다” 라고 말한다. 그것은 결국 인간이 사회 혹은 국가(politeia) 속에서 자신의 기능을 탁월하게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는 완전한 공동체이며 다른 모든 형태의 공동체의 목표가 된다고 한다. 심지어 손가락이 손에서 잘라져 나가면 더 이상 손가락이 아니듯이, 인간은 국가를 떠나서는 더 이상 인간이라 말할 수 없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국가는 일반적으로 국가라고 표방하는 모든 국가 공동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즉 그는 그것을 완전한 공동체에 대해서만 사용하고 있다. 그는 국가체제를 세 가지 기본적인 형태인 군주제·귀족제·금권제와, 세 가지 타락된 형태인 참주제·과두제·민주제로 구별한 후에, 최선의 정체는 군주제이고 최악의 정체는 참주제라고 한다.
모든 타락한 국가 체제들에는 정의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 공동체는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보다 나은 삶 혹은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문제삼는다. 국가 공동체의 각 계층들은 법이나 권력에 의해 지배되는 것은 아니고 상호간의 우정 혹은 사랑(philia)에 의해 결속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공동체에 우정이 있다고 한다. 즉 우정은 하나의 사회적 관계로서 어떠한 공동체이든지 인간 관계가 형성된 곳에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공동체에 정의만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우정 혹은 사랑에 관심을 주목했다. 근본적으로 국가는 국민에게 정의로운 정치를 펼쳐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가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출발해야 한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듯이, 또는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듯이, 또는 형제가 서로 사랑하듯이, 국가도 국민을 사랑해야 한다.

근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모든 공동체에서 사랑을 강조하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이익이나 공동체의 이익을 구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이나 대상과의 관계를 통해 인간과 세계에 대해 철학적 반성을 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사랑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자칫하면 피상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 관계를 심층적으로 다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의 고유한 기능을 탁월하게 발휘할 수 있다. 즉 우리는 다양한 인간 관계에서 파생되는 여러 문제들을 서로 비교하고 평가할 뿐만 아니라 추론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세상에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면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감정적인 차원에서 논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근본적으로 인간이 자신의 삶을 완성하는 데 사랑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우리는 사랑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훌륭한’ 삶을 살아가는 데 사랑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우리의 삶에 가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와 우리를 삶의 한가운데로 이끌어 내고 가장 높은 지혜로 향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인간이 가진 모든 기능을 가장 완벽하게 발휘할 수 있으며, 인간으로 가장 행복한 삶을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 정신(精神)의 발견

         동서(東西) 철학에서의 ‘같음’과 ‘다름’

 

                                                                                                         인용: 글 김.시천, 2002. 중에서

 

. 동서(東西)의 ‘같음’과 ‘다름’

 

흔히 서양의 철학 전통은 이원론(二元論)을 바탕으로 하는데 반하여 동양의 철학 전통은 일원론을 특징으로 한다고 말한다. 신과 세계, 본질과 현상, 정신과 물질, 마음과 신체를 이원적으로 나누는 것에서 드러나듯이 서양의 철학 전통은 기본적으로 이원론을 근간으로 한다고 말한다. 이와 달리 동양의 철학적 사유는 기론적(氣論的) 사유를 바탕으로 하여 철저하게 일원론적으로 전개되어 왔다고 한다. 물론 대체적인 차원에서 이러한 대비가 전혀 무리한 주장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동서를 획정하려는 시도는 일정 부분에서는 재고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대비에서 사용되는 ‘서양’이란 말은 유럽과 신대륙 아메리카, 또 고대 그리스와 로마, 중세 기독교 문명과 근대 유럽 등 수없이 다양한 것들을 단순히 하나의 균질적인 ‘대상’으로 환원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실상 이것은 동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고대 중국의 제자백가(諸子百家)를 하나로 또는 한국, 중국, 일본 더 나아가 인도를 하나의 ‘동양’으로 묶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 ‘다름’에서 ‘같음’으로―심신론(心身論)의 예

 

얼마 전 한 대학의 철학 강사가 매우 곤혹에 빠진 일이 있었다. , 현대 서양 철학에서 커다란 논쟁거리로서 정신과 신체의 관계를 다루는 이른바 ‘심신론’(the mind-body problem)을 놓고 고심하던 중, “심신을 이원적인 관계로 설정하고 철학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난센스이며 동양 철학 전통에서는 사이비 문제”라는 극심한 주장을 접하자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동양의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알면 다 해결된다는 말에 그 강사는 그저 멍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 동양 철학 전통에서는 정신과 신체를 구분하는 전통이 전혀 없었을까? 재미있게도 우리는 중국 한대(漢代)의 『회남자』(淮南子)라는 문헌에서 이와 상당히 유사한 개념 구분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정신’(精神)과 ‘형체’(形體)라는 개념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정신’과 ‘형체’는 현대의 심신론에서 쓰이는 ‘mind’나 ‘body’에 상당히 근접하는 개념들이다. 다만 ‘정신’이 서양의 ‘mind’보다 그리고 ‘형체’가 ‘body’보다 약간 넓은 외연을 지닌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회남자』나 『장자』(莊子)와 같은 도가(道家)의 고전에서 ‘정신’은 때로 생물학적 본능이나 의식 일반, 지성이나 이성은 물론 영혼의 의미까지 포괄하는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의학적으로 말하면, ‘정신’은 혼(), (), (), (), ()을 포괄하는 것으로서 간단하게는 그냥 ‘신’()으로 약칭하기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체는 영혼의 감옥”이란 말과 유사하게 『회남자』에서 “신체는 생명이 깃드는 곳”(形者, 生之舍也)라고 할 때 그 의미는 인간의 정신이 형체에 깃든다는 의미이다.

 

이와 비슷하게 서양어 ‘matter'의 번역어로 쓰이는 ‘물질’(物質)이란 말도 한대(漢代) 이후 흔히 쓰이는 말로서 거의 상응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여기서 ‘물’()이란 ‘기’()가 감각적 지각이 가능한 형태를 갖춘 것(有形)을 말하는데, 이 때 ‘물’이 가지고 있는 갖가지 측면 가운데 하나가 ‘질’()이다. 인간의 이러한 ‘질적’ 측면을 말할 때 ‘형체’라 하는데, 이것은 서양의 물리적-해부학적 신체와 거의 유사하다. 이렇게 보면 ‘mind-body’는 ‘정신-형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정신’과 ‘형체’를 구분하는 것을 가지고 이원론이라 단언할 수는 없지만, 여기에 인간의 정신과 신체를 구분하는 눈이 있다는 것은 분명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만약 여기서 흔히 말하듯이 ‘정’()도 기()이고 ‘신’()도 기이고 ‘형’()도 기이므로 이것은 기일원론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논점의 이탈이며 부당한 전제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mind-body’와 ‘精神-形體’라는 유사한 구분법의 뒤에 있는 철학적이고 문화적인 배경과 맥락이다.

 

. ‘같음’에서 ‘다름’으로―정(), (), ()

 

다름의 언어가 필요한 곳은 바로 이러한 배경과 맥락이다. 단순히 정신이 기이고 신체도 기이니 정신과 신체를 구분하는 접근은 사이비 문제다라는 피상적인 접근은 심신 문제에 아무런 통찰도 주지 못한다. 조금 심하게 말해 저기 굴러다니는 돌멩이가 기이고, 인간 또한 기이므로 양자는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무의미한 것이다. 『회남자』나 도교와 한의학 문헌에서 정신과 형체를 나누는 언어가 있다는 것은 분명 나름대로 양자를 구분해야 할 문제 현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문제 현실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것이 현재의 우리에게는 더욱 중요한 과제인 것이다. 이 때 우리는 곧정’, ‘기’, ‘신’이란 무엇인가라는 동양 철학의 어려운 물음에 봉착하게 된다. 이 세 용어는 기원전 250년경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관자』(管子) 내업(內業)에 처음 나온다. 내업이란, "우리 인간의 몸의 내부를 다스리는 일"이라는 뜻으로서 호흡술을 주로 하는 양생론을 다루고 있는 문헌이다. 그래서 영어로는 ‘Inward Training’ 또는 ‘Inner Workings’이라 번역된다.

 

중국의 고대 문헌에서 생명의 근원을 의미하는 이정’기’신’은 우리의 마음()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나온다. 비교적 물질적 의미를 갖는 것으로 해석되는 오늘날의 상식과 달리 여기서기’는 보이지 않는 것, 정신적인 것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 보다 후대의 문헌인 『회남자』에서도 이러한 흔적은 계속 잔존하는데, 정신훈(精神訓)에서는 인간의정신’은 하늘()으로부터, ‘형체’ 곧 신체는 땅으로부터 온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체계화된 음양론(陰陽論)에서는 ‘혼’()과 ‘백’()에 상응한다.

 

『관자』 내업으로부터 『노자』, 『회남자』를 거치는 도가적 사유에서정신’은 충실하게 지켜야 하는 것으로서, 인간의 신체가 지닌 욕구(情欲)을 절제하는 것을 강조한다. , 신체의 정욕이 절제되어야 조화를 이룰 수 있고 거기에 정신이 깃들어 인간의 생명력이 온전하게 유지, 발현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바로 이러한 철학적 토양으로부터 한의학이라는 동양의 과학이 나온 것이다. 실상 기론(氣論)을 통한 체계적인 분류와 일원론적 통합은 이러한 구분의 성립과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다.

 

중국 고대 문헌의 성립 과정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기존의 다양한 용어와 개념들이 하나로 통합되어가는 과정을 추적할 수 있다. 본래 내업에서정’()은 하늘에 속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후대에는정’은백’과 함께 음()에 속하는 것으로신’은혼’과 함께 양()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된다. 또 정신과 신체를 포괄하여신형’(神形)이라 표현하는가 하면, 신체를 가리켜형백’(形魄)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용어의 다양성은 그 이전의 몸에 대한 다양한 인식 체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 또 다른 딜레마―기()의 애매성

 

몇 년 전 중국 철학 문헌에서 ‘기’의 개념이 얼마나 다양하게 변화하는가를 보여주는 책을 번역한 학자는 역자 서문에서 “기의 키가 조금만 더 컸더라면!” 하는 재미있는 표현을 만들기도 하였다. ‘기’를 유물론적 입장에서 해석하려는 대륙 중국의 철학계의 논의처럼 ‘기’를 물질로 보자니 키가 작아서―정신적 의미가 강해서―물질로 규정하기가 애매하다는 것을 뜻한 말이다. 어찌보면 우리는 기에 대해 “물질이냐, 정신이냐?”를 물은 것 자체가 엉뚱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일 수도 있는 것이다.

 

답답한 가슴을 진정시키려면, 우리가 묻는 물음 자체의 의미부터 다시 새겨보아야 한다. 사실 “기가 정신인가, 물질인가” 하는 물음의 실상은 “근대 서양의 물질과 정신이라는 개념에 동일한 동양의 개념이 있는가?” 하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물음을 바꾸어 놓았을 때 이에 대해 쉽게 “그렇다”라고 대답할 동양 철학 연구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없다”고 하자니 서구 문명에는 있는 것이 우리에겐 없다는 부끄러움이 우리를 망설이게 한다. 무언가가 허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서양의 ‘matter(물질) 개념을 우리는 가지지 못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서양의 물질 개념이 뉴톤적 근대 과학의 산물로 성립한 개념이라면, 뉴톤적 근대 과학이 부재한 동양 사회에 ‘물질’ 개념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달리 말하자면 ‘물질’ 개념이란 세계를 바라보는 특수한 전제와 관점들을 전제할 때 성립하는 개념이다. 그러한 전제와 관점이 다를 때 거기에는 다른 것이 들어서게 된다. 바로 그 ‘다른 것’으로서 기 연구는 출발해야 한다.

이것은 곧 기를 인식하고 논의하는 방식과 개념, 전제들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것이 형성된 배경과 본래의 저자들의 문제 의식과 문제 현실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새롭게 얼굴을 바꾸어 출현하는 개념들이 형성된 배경에 대한 물음이 없이 시대적인 비교와 차이의 논증은, 마치 아무런 설명 없이 제목만 붙이고 유물을 전시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거기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기이함과 낯설음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 같음과 다름에서 ‘만남’으로

 

현대 심신론의 ‘mind’는 ‘정신’과 거리가 크지만 여기에 집착하여 동서는 다르다고 말한다면 그 순간 우리는 화이트헤드(A. N. Whitehead)의 ‘reason’이 얼마나 유사한지, 선진(先秦) 도가의 ‘정신’과 오늘날의 ‘정신’이 얼마나 다른지는 의식하지 못하게 된다. 저쪽과 우리와의 다름만큼이나 우리 사이의 다름 또한 결코 작지 않으며, 우리끼리의 같음보다 저쪽과 우리 사이의 같음 또한 결코 작지 않다. 같음과 다름은 그 확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만남을 위한 전제일 뿐이다.

 

만약 우리가 지닌 기에 상응하는 어떤 것이 서양인에게 없다고 투덜대거나, 무시하는 태도를 지닌다면 그 또한 온당하지 못하다. 아직껏 우리는 ‘기’를 소화하여 누구나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하고 있지 못하다는 현실은 분명 인정해야 한다.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이 남에게는 없다고 무시하는 고압적인 태도야말로 동아시아 세계가 지난 100여 년간이나 당해 온 제국주의의 본질이었다면, 우리가 같은 태도를 갖는 것 또한 경계해야 할 아류 제국주의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금 엉뚱하겠지만 ‘만남’이란 같은 것들 사이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것들 사이에서 자주 벌어진다. 더욱이 동서양의 철학이 함께 공존하고 있는 우리와 같은 복잡한 상황에서는 다른 것들 사이의 만남은 권장되어야 할 사항이다. 서로 호환이 될 수 있는 언어를 개발하려는 노력이 중요한 것이다. ‘다름’이란 피아(彼我)를 구분하고, 차별과 배제의 논리의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으로 읽혀져야 한다. 다른 사람이 존귀한 것은 나와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철학을 포함한 학문의 세계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문제들이지 그 문제를 구성하는 언어가 아니다. 우리가 확인하고 천착해야 하는 것은 언어의 다름을 넘어선 ‘문제의 같음’이다.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언어들이 만나야 하는 것이다. 언어의 개념이란 두께가 정해진 것이 아니다. 같은 문제를 놓고 고민하다보면 서로 다른 언어들이 갈마들어서 비슷하게 동글동글해 진다. 어쩌면 서로의 다름을 확인하는 순간 ‘같음’이 드러날지 모를 일이 아닌가!

 

 

   

 

■ 생명과 나

  

 . 감각기관 오감을 통해서 알수 있는 '나'라고 하는  물리적인 주체와

   . 감정을 거친 후에 알 수 있는 '나'라고 하는 삶의 주체를 생각할 수 있다

     사단칠정은 그 감정을 분류해 놓은 좋은 예가 아닐까 한다

      . 4단(四端), 측은지심(惻隱之心)·수오지심(羞惡之心)·사양지심(辭讓之心)·시비지심(是非之心)

      . 7정(七情),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

 

   .  물리적 측면과, 자유의지 라는 둘을 두고 볼 때, '나'는 극히 제한된 부문만이 될 수도 있다

      . 감각기관을 거쳐서 알 수 있는 것만이 '나'인가?

      . 혈액, 뼈, 세포, 자율신경계 등 대다수 하부 조직은 물리적 주체로서 '나'가 분명한가?

      . 정액에 있는 또 다른 개체로서 분화 될 준비를 마친 수억마리의 작은 "나"의 의미는 무엇인가?

      . 배출전, 내가 껴 안고 있는 분비물, 눈물 콧물 땀 분뇨까지도 "나"일까?

      . 조각모음 하여 이어 붙이기를 한다면 몇%까지가 '나'가 될까?

         

   .  객체적 의미의 생명에서, 감각과 정신을 연결하는 고리는 무엇일까??

      . 지금 '나'를 스치는  수 많은 전자기파가 오감으로 느낄 수 없는 것처럼,

        알 수 없는 어떤 파동이나 끈으로 고리를 형성하고 있지나 않을까? 

      . 있다면 어떤 형태의 구조일까?

      . 시간과, 공간 외의 다른 차원에서 연결되고, 유지.관리 되는 것은 아닐까?

        시공간 4차원 외에 우리가 잃고 지낸다고 추정되는 

        나머지 6차원의 세계를 더해서 보는 세상은  얼마나 더 넓고 복잡하며 광활 할까?

 

   .  사회적 동물로서, 삶의 주체로서 '나'는 어디서 시작했고 어디서 끝 맺는 것인가?

      . 나, 가족, 이웃, 국민, 동포, 인종, 인간까지만 선을 그어야  옳은가?

        선조와, 후세, 다른 생명체까지 생각할 때의 '나'는 무엇인가?

      . 태동과 성장을 시작으로 숨 거두는 과정까지, 한정된 시간만이 "나"가 존재하는 기간일까?

      . '나'라는 주체로서, 더 하고 덜 한다는 크기의 의미는 무엇인가?

        시간, 생명, 나이, 육체, 건강, 체력, 아름다움, 사랑, 명예, 자산,

        욕심, 부끄러움, 분노, 미움, 증오, 

        옳다는 것과 그르다는 것  그리고 의식할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

        크고 작음과 , 많고 적음, 부족함과 흡족함

 

 

 

 

■ 생의철학적(生醫哲學的) 생명관

 

                                                                                                 .건희 교수, 글 중에서 발췌

……

생명현상은 경험적 소여(所與)이며 따라서 철학자가 아니라 과학자, 그 중에서도 우선적으로 생리학자나 생물학자가 다루어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생명을 과학자에게만 맡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철학자들은 갖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하이데거의 말처럼 과학이 사유하지 않기 때문인가? 곰곰이 따져 보면 생명 그 자체는 생명현상이라는 경험적 소여를 설명하기 위하여 고안된 철학적 개념이지 결코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의사이자 생리학자인 끌로드 베르나르(Claude Bernard, 1813-1878)는 그의 『동물과 식물에 공통적인 생명 현상들에 대한 강의』에서 생명을 정의해 보고자 시도했으나 결국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고 만다 - "생리학에서 우리는 생명에 대한 정의를 포기해야만 하며, 다만 그 생명의 현상들의 특성을 나타낼 수 있을 뿐이다". 이렇듯 형이상학적 실재로서의 생명은 결코 경험과학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끌로드 베르나르는 생체를 아무리 해부하여 볼지라도 수술칼 끝에 걸리는 것은 결코 '생명'일 수 없다고 갈파하고 있다. 결국 '생명'은 형이상학적 개념이며 따라서 과학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 끌로드 베르나르는 철학자이기도 했다. 이른바 생의철학자로서 생명에 대하여 사유하고 철학적 논의를 전개하였던 과학자는 그 이외에도 많다. 그들이 과학에서 시작하여 형이상학과 만난 경우라면, 베르그송과 메를로뽕띠와 같이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간 (물론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이지만) 철학자들도 있다. 과학의 발전이 지금과 같이 현기증을 일으키기 이전에는 두 방향에서의 접근이 모두 용이했을 것이며, 게다가 두 가지를 동시에 갖고 있는 행복한 경우도 있어서 고대에 아리스토텔레스와 근대에 데카르트, 멘 드 비랑이 그 좋은 예이다. 과학과 철학이라는 두 물줄기가 고대에는 같은 연원에서 비롯하였지만 오랫동안 제각기 흐르다가 근세에 이르러 최소한 두 번 이상 합류하였던 셈이다. 지금은 다시 그 둘이 따로 굽이쳐 흐르고 있지만 언젠가 또 한번 만나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 생기론의 의의(意義)

       * 생기론(生氣論, vitalism); 무생물체에서는 볼 수 없고 생명체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생명력에 의해

                                             생명현상이 나타난다는 과학사상

 

생기론은 결정적인 약점들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초반까지 그 기세를 떨치다가 마침내 점차 쇠락하게 된다. 먼저 라마르크가 그의 『동물철학(Philosophie zoologique)(1809)에서 생기론에 대한 비판을 가하였지만 당시 크게 주목 받지는 못하였고 일반적으로 마장디와 끌로드 베르나르가 생기론에 결정타를 가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 비판의 내용을 살펴보지는 않겠다.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생기론은 '생명과 생명 아닌 것의 대립'을 전면에 내세운 생명관이지만 실상 구체적인 이론의 측면에서 생명에 관한 문제를 해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현대 과학의 입장에서 생기론을 재조명해 보면 그 생명과학으로서의 위치조차 불확실해진다. 그렇다면 생기론의 생의철학사적 의의는 과연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

 

볼떼르의 표현대로 '철학소설(roman philosophique)'일 뿐인 데카르트의 물리학을 뉴우튼의 물리학이 대체한 것처럼 생기론은 또 다른 데카르트의 철학소설인 '동물-기계'를 대체하는 이론임을 자임하였다. 뉴우튼이 물리학에 '중력'이라는 신비로운 힘을 도입시켰으나 그 결과만을 확인할 뿐이지 막상 그 본성은 알지 못하였듯이, 생기론은 생물체에 고유한 이른바 '생명 원리'를 생명과학에 도입하려 한 것이며, 이 생명원리는 그 어떤 '초자연적인(surnaturel)' 원리가 아니라 생명체에 고유한 어떤 특별한 힘으로서 어디까지나 '자연적인(naturel)' 것이었다. 그러나 뉴우튼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생리학을 세워보려는 기획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근대 생리학에 길을 열어 준 생기론은 그것이 갖는 경험주의 이념에서 그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생리학에 실험적 방법을 도입한 사람으로 보통 끌로드 베르나르를 꼽는다. 그러나 그의 생리학에서의 업적은 이 실험적 방법이 효과적으로 쓰여질 수 있는 이론적 틀을 처음으로 마련했다는 점이고 경험주의는 그 이전부터 있었다. 뉴우튼의 성공에 힘입어 영국 경험론이 범유럽적으로 유행하게 됨으로써 사실 당시 생리학자들 모두 다분히 경험주의적이었다. 그런데 이 때 '경험'은 주로 데카르트의 생명관에 반대하는 무기가 되었으며 특히 비샤의 생기론이 바로 이와 같은 의미의 경험주의라고 볼 수 있다.

 

이렇듯 당시에는 경험에 충실하려 했던 생기론에 오늘날 이데올로기적 이미지만이 화석처럼 남겨졌다. 생기론에는 보통 '보수-반동이론'이라는 별칭이 따라 다니지만 처음에는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전혀 갖지 않았다. 생기론의 '반동'이 있었다면 그것은 순수하게 과학적인 동기에서 발생한 '경험주의'의 목소리였다. 생물체는 결코 수력기계가 아니며 또 이미 전부 만들어져 생식세포 속에 차곡차곡 들어 있지 않고 점진적으로 형성되어 가는 것임을 바로 경험과 관찰이 알려주었기에 생기론은 발생한 것이다. 실제로 기계론에 반발하여 고대 히포크라테스에 의거하고자 했던 쉬탈을 제외하고 18세기의 생기론자들은(쉬탈은 엄밀히 말하면 애니미스트이다) 결코 '보수-반동'이 아니었다.

 

생기론이 처음에 뉴우튼 물리학의 영감을 받아 데카르트의 '동물-기계'에 맞섰을 때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분명히 '진보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오히려 보수-반동으로 간주되었다. 한편 18세기를 풍미하던 생기론이 이번에는 생명적 과정에 대한 물리-화학적 설명의 가능성을 물리치려 할 때 다시 한번 여지없이 새로운 과학에 대한 보수-반동으로 낙인 찍히게 된다. 이와 같은 실험적이며 물리-화학적인 생리학이 생명을 설명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등장함으로써 그 자신 분명 경험주의의 기치하에 시작한 생기론은 근대적이며 진보적인 생리학에 대한 반동적 이데올로기로 굳어져 버리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  마음, , 자유의지

 

.을상 철학교실 에서, 일부발췌

http://cafe.daum.net/scheler

 

.  심신이원론과 그 문제점

 

  인간에 관한 철학적 탐구는 몸에 대한 철학적 해명 없이 성립하지 않는다. 전통적인 철학에서 몸의 문제는 항상 정신과의 관계에서 해석되어 왔고, 대체로 방법론적으로 유물론(materialism), 유심론(idealism), 심신이원론(dualism)에 근거하고 있다.

 

유물론이란 단적으로 말하면 모든 존재의 근저에는 물질적인 것이 놓여 있고, 정신 또는 의식은 이 근본적인 물질로부터 파생된다고 보는 입장이다. 유물론의 선구자로는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자들(Thales, Anaximenes,특히 Democritos)과 고대 말기의 스토아 철학자들을 들 수 있지만, 소크라테스에 의해 주지주의가 등장한 이후, 중세에는 그 자취를 감추었다가 근세의 자연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다시 생겨났다. 근세의 유물론은 특히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에 의해 정신과 형이상학적 존재를 부정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고, 점차로 이데올로기화하여 K.Marx, F.Engels 등에 의해유물변증법으로 완성되었다.

 

  유심론은 유물론과 정반대되는 입장으로 세계의 근저에 놓여있는 근본적인 것은정신또는 마음이라 보는 입장이다. 이에 따르면 실재적인(real) 것은 정신뿐이고, 물질적인 것은 비실재적인(unreal) 것 또는 정신의 자기실현을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유심론의 선구자로는 Pythagoras, Parmenides 등을 들 수 있지만, 특히 플라톤에 의해 체계화되었고, 근세에 와서 Hegel에 의해관념변증법으로 완성되었다. 위에서 말한 Marx, Engels의 유물변증법은 Hegel의 관념변증법에 대한 일종의 반론이라 하겠다.

 

  이에 반해 심신이원론은 유물론과 유심론을 종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심신이원론은 근세에 와서 비로소 형성된 것이다. 인간은 본래적으로 신체와 마음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이원적 존재이고, 물질과 정신이 만나는 유일한 장소이다. 그런 까닭에 유물론이나 유심론에 따를 때 우리는 인간의 일면성만 보게 되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데, 이런 오류를 피하기 위해 근세철학은 전통적으로 심신이원론의상호작용설을 받아들였고, 그 대표자는 데카르트(R.Descartes)이다.

 

 

.  데카르트의 이원론적 인간론

 

  근세철학의 창시자로 일컫는 데카르트는 프랑스의 귀족 출신으로 비록 병약하였지만 발랄한 사고와 고도의 철학적 능력을 소유한 자였다. 그리하여 그는 기존의 스콜라철학자들이 세워놓은 전승된 철학적 토대를 아무 비판 없이 받아들이지 않고, 진정하고 확실한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철학의 완전한 체계를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데카르트가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다름 아닌 개념의명석판명성’(clare et distinct)이다. 그런데 이것을 증명하는 그의 방법은 매우 특이하다. 즉 그는 방법론적으로 불확실하고 애매모호한 것을 모두 배제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철저하게 의심해 보는방법적 회의의 방법을 택했다. 물론 그는 회의론자가 아니지만, 의심하고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더욱 강화시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확신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데카르트는 의심하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는 먼저 우리의 감각(sense)을 의심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왜냐하면 감각은 종종 우리를 속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감각을 지식의 원천 또는 지식을 탐구하는 원천으로 보지 않는다. 이와 같이 데카르트가 감각으로부터 성립하는 경험적 지식에 반대하는 논거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이다. 첫째, 우리는 가끔씩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는 경우(환상)가 있고 또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간과하기 일쑤이다. 둘째, 우리는 꿈을 마치 현실인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즉 우리의 감성적 현실 속에는 항상 혼동의 가능성이 함께 존재한다. 그리하여 데카르트는 감각적 경험이 지식의 원천이 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 결론은 우리의 감각이 지식에 필요한 결정적이고 반박될 수 없는 근거를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감각의애매모호성은 어디에 기인하는가? 그것은 두 말할 것 없이 우리의 신체에 기인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체 속에는 언제나 착각과 환상 그리고 혼동 함께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진리의 본성은명석판명성에 있고, 그것은 마치 수학에서 하나의 자명한 공리로부터 문제를 풀어내듯이 연역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신체의 감각을 긍정하는 경험론과 대립할 뿐만 아니라 개연성으로부터 필연성에로 접근하는 귀납적 방식과도 다른 것이다. 이로부터 데카르트는 신체의 사실을 신뢰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 존재조차 부정해 버리는 것은 아니다. 비록 확실성이 신체와 감각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고 하여 부정되더라도 결코 그 존재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만일 그 존재가 부정된다면, 정신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리하여 데카르트는 언제나 그의 존재에 대해 깊이 생각하였고, 마침내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자명한 원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의심은 조금도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를 기만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하고자 하는 만큼 나를 기만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지만 내가 나 자신을 그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상에는 그것은 결코 나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애써서 시험해 본 후에 마침내 다음의 명제를 결론짓고 주장해야만 했다. ‘나는 존재한다는 것은 언제나 내가 마음속으로 이것을 주장하거나 의심할 때 필요한 진리이다.”(R.Descartes, 1951)

 

  이와 같이 사유의 명석판명성을 논증한 연후에 데카르트는 물체의 존재를 연역하는데, 이것은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한 분이다.(대전제)   이 세계는 하느님의 생각에 따라 창조되었다.(소전제)   고로 이 세계는 존재한다.(결론)

 

  여기서 세계라 함은 우리의 의식에 의해 표상되는 것이 아니라 3차원의 연장(extentio), 즉 부피의 관념과 모양, 크기, () 등을 가진 것을 말한다. 이러한 물체의 세계는 공간적 충만성과 운동의 가능성을 나타낸다. 그리하여 물체의 세계는 우리의 정신작용을 전개하는 완전하게 투시할 수 있는 합리적인 기하학과 역학의 모든 정리(定理)에 들어맞는다.

 

  이와 같이 정신-물체의 이원론을 정립한 연후에 데카르트는 이에 입각하여 인간을 설명한다. 이에 따르면 정신은 연장이 없는 사고하는 실체(substance)이고, 신체는 사고하지 않고 연장을 가진 실체이다. 즉 인간은 정신적 측면에서 보면, 사고하는 존재이지만, 신체적 측면에서 보면 물체적 존재이다. 그리하여 데카르트는 실체로서 정신과 신체를 명백하게 구별한다.

 

  확실한 나의 인간 정신에 대한 생각은 그것이 사고하는 존재이고, 길이, 폭 또는 깊이로서 나타나지 않고, 신체의 특성에 기여하지 않는 한, 물질적인 그 어떤 것에 대한 나의 생각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욱 분명해 질 것이다.”(R.Descartes, 1951)

 

  한편 인간을 신체로 볼 때, 인간과 동물, 인간과 물체는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물리학과 합리적 계산의 대상으로서 인간과 동물 그리고 물체는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동물 또는 다른 자연물과 구별되는 점은 바로 정신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데카르트에 의하면 인간에 있어서 비로소 정신과 물체가 서로 만난다.

 

  자연은 고통과 굶주림, 갈증, 이런 감정으로 나에게 내가 단지 배 안에 있는 선장과 같이 나의 신체 안에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좀 더 그것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그 섞임은 그리하여 하나의 전체가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R.Descartes, 1951)

 

  여기서 데카르트는 정신과 신체가 서로 분리되어 존재한다고 주장하다가 다시금 양자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에 대해 Langford는 첫째로  정신과 신체는 상호 배제되는 것이고, 둘째로 정신이냐, 신체이냐의 문제는 흑백이 분명한 것이며, 셋째로 정신은 사()적인 것에 의해 특징지어지기 때문에 매우 개인적이고 비사회적 분야라고 생각되어진다고 단언한다.

 

 

. 심신이원론의 인식론적 모순과 과학적 반론

 

  앞서 우리는 인간에 있어서 정신과 신체가 서로 구별된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이와 같이 정신과 신체가 서로 구별됨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는 인간을 마음과 신체를 가진 복잡한 존재자, 즉 신체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 상태와 사건도 함께 포함하는 존재, 정신적 사건이 인과적으로 신체에 영향을 미치는 존재로 서술한다. 이러한 설명은 이제이원론적 상호작용론으로 알려진 이론에로 귀착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심신이원론은 두 개의 근본적으로 다른 부분, 즉 마음과 신체가 서로 인과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해석된다.

 

  이에 대한 데카르트의 견해는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즉 먼저 마음은 두뇌하고만 작용한다. 이것은 다양한 두뇌과정이 어떤 신체운동을 일으키고, 어떤 신체적 사건이 인과적으로 두되에 영향을 미친다는 과학적 발견과 일치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마음-두뇌의 상호작용론이라 하겠다. 이에 데카르트는 마음과 신체 사이에 상호작용할 수 있는 지점을 두뇌가 아닌 다른 직접적 접촉점을 상정하고, 이 접촉점을 통하여 마음의 인과적 결과가 신체의 모든 부위에 전달되고, 신체 부위의 인과적 결과는 마음에로 전송되는 것으로 본다.

 

  정신이 그 기능을 행사하는 신체의 부위는 직접적으로 결코 심장이 아니며, 두뇌의 전체도 아니며, 그 모든 부분 중 가장 안쪽에 있는 부분, 말하자면 신체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는 매우 작은 어떤 선()이다.”(R. Descartes, 1951)

 

  이와 같이 데카르트가 정신 또는 영혼의 집이라고 생각한 이 선이 다름 아닌송과선이다. 그러나 이 점에서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은 많은 문제점을 노정한다. 그것은 먼저 송과선이 우리 신체의 어디에 존재하는가의 문제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데카르트가 설정했던 그러한 송과선은 우리 신체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정신과 신체가 서로 만날 수 있는 장소가 없다면, 정신-신체의 상호작용론은 근본적으로 그 토대를 상실하고 말 것이다. 그리하여 상호작용론은 체육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가장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져 온 이론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 인식론적으로 모순을 범하고 있다는 반론이 철학과 과학에서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먼저 이에 대한 철학적 반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상호작용은 어디서 일어나는가? 일반적으로 정신적 작용이 신체에 영향을 미치고, 신체의 현상이 정신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하여 데카르트처럼 신체의 내부 어디엔가 상호 접촉점을 지정하는 것은 하나의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곧선결문제 요구의 오류에 빠지고 만다. 왜냐하면 이러한 상호 접촉점의 지정 없이 상호작용이 일어난다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호 접촉점의 지정은 우리가 데카르트의 송과선을 승인할 것인가 안할 것인가와는 별도로 하나의 딜렘마에 봉착한다. 즉 근본적으로 이질적이 두 성질이 상호 작용하기 위해서는 이질적인 두 성질을 결합시켜 주는 제 3의 성질은 띤 어떤 것이 필요하고, 그렇다면 또한 이 제 3의 성질과 이질적인 두 성질을 결합시켜 주는 제 4의 성질을 띤 것이 요구될 것이고, 나아가 제 3의 성질과 제 4의 성질을 결합시켜 주는 다른 성질의 것이 요구되어, 궁극적으로무한소급에로 빠지고 말 것이다.

 

  둘째, 상호작용은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 우리는 마음과 신체가 존재론적으로 상이하다는 점에서 양자를 구별하고, 마음과 신체가 함께 존재한다는 점에서 양자의 상호작용을 주장한다. 그러나 양자 간의 인과적 관계는 성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과적 관계는 동일한 사건의 체계 내지 과정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떤 물리적 힘이 물리적 대상에 가해져서 그 대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 때, 우리는 이 힘과 대상 사이에는 인과적 관계가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 물리적 힘이 화학적 변화의 원인이 될 수는 없다. 이와 같이 물리적 힘과 화학적 변화 사이에 인과관계를 말하는 것이 모순인 것처럼 존재론적으로 전혀 다른 정신과 물체 사이에 인과적 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오류인 것이다.

 

  셋째, 우리는 타인의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는 일반적으로 타인도 나와 마찬가지로 마음과 신체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는 타인의 존재를 승인하고, 타인과의 심적 교류를 통하여 인간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그리하여 공동체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인의 마음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일이다. 이것은 오직 타인을 지각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지각은 신체적 활동을 통해서 일어나는데, 상호작용론은 신체를 통하여 타인의 마음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체는 오직 자기 자신의 마음과만 작용하고, 신체를 통해 지각할 수 있는 것은 순전히 물체적인 것뿐이기 때문이다. 상호작용론에 따른다면 우리는 타인의 껍데기와만 접촉할 뿐이다.

 

  이와 같이 상호작용론에 대한 철학적 반론이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는 형식적인 것임에 반해, 과학적 반론은 보다 실질적인 것이고, 과학적 사실에 근거한 것들이다. 그것은 주로 물리학과 생리학과 진화론적 측면에서 제기되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상호작용론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위배된다. 자연적 존재로서 인간은 분명히 폐쇄된 물리적 체계 속에 살고 있고, 물리적 체계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기초한다. 그러나 심신이원론에 따르면 정신은 물리적 대상이 아닐 뿐만 아니라 물리적 체계를 벗어나 존재한다. 이와 같이 물리적 운동의 지배를 벗어난 정신이 물리적 존재인 신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다름 아닌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위반하는 것이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위반되는 어떠한 존재도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둘째, 정신적 원인이 인간의 활동을 설명함에 있어서 차지할 자리는 없다. 신체적 존재로서 인간은 생리적 현상의 담지자이다. 그리하여 생리학적 설명에 따르면 모든 신체운동은 신경조직에 의해 일어나고, 그 외의 다른 원인에 의해서는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만일 이러한 신경조직 외에 신체운동을 유발하는 다른 원인이 있다면 신경조직이 마비된 후에도 (예컨대 식물인간의 경우) 신체운동이 변함없이 일어날 수 있어야만 하는데 그런 현상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하물며 신경조직 외에 신체운동을 유발하는 다른 원인이 있다면(예컨대 악령이 쓰인 경우),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신체를 통제할 수 있는가? 따라서 신체운동을 설명하는데 신경조직 외의 다른 정신적 원인을 드는 것은 모순이다.

 

  셋째, 물질적 현상에서 진화하는 것은 물질적인 것이다. 인간은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생물의 한 범주로서 존재한다. 생물은 오랜 세월에 걸쳐 진화해 왔고, 진화의 결과 인간은 고도로 발달된 두뇌를 소유하게 되었다. 따라서 두뇌의 활동이 신체를 지배하는 것이지 그 밖에 마음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진화론에 근거한 반론인데, 이에 따르면 신체가 소멸할 때 마음도 함께 사라진다는 점에서 마음을 두뇌의 물질적 현상에 불과하다고 본다.

 

 

. 현상학적 신체 이론

 

  현상학’(Phänomenologie) 20세기 초 독일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Ed. Husserl)에 의해 주창된본질직관의 새로운 방법론이다.  후설은 그 당시에 만연해 있던 실증주의와 신-칸트주의의 사조에 대항하여 현상학을 제창했다. 실증주의나 신-칸트학파에서는 사물을 현실적이고 직접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근본 토대에로 환원시켜 본다. 예컨대 실증주의가 모든 사물을감각 소여’(sense-data)로 환원시켜 보았다면, -칸트주의는선천적 형식의 법칙에로 환원시켜 보았다. 이에 따르면 우리의 주관과 객관이 직접적으로 조우하는 결과로서 현실은 참된 현실이 아니며, 참된 것은 반드시 정신의 이념적 조직에 의해 재정립되는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실증주의와 신-칸트주의는 --비록 모든 지각과 직관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현상 그 자체를 신뢰할 수 있는 인식의 원천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현상학은 직접적으로 생생하게 주어지는 현실이 모든 관념과 생각에 우선한다고 보고, 이러한 현실이 생겨나는 영역 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그리하여 현상학에서현상이란 어떤 객관적 사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에 대한 경험의 대상이 의식 앞에 나타나는 구체적인 모습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전통적인 철학에서 말하는 현상과 후설의 현상학에서 말하는 현상의 개념적 차이를 간과하면 안 되는데, 전통적인 철학에서 현상이 의식과는 유기적이거나 논리적으로 직접적인 관계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어지는 물질을 가리키는 개념이라면, 현상학에서 말하는 현상은 의식을 가리킨다거나 그 의식의 물질적 대상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물질적 또는 비물질적 대상이 의식과의 관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험을 말한다. 즉 현상학에서 현상은 그 대상과의 가장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관계를 말한다. 그리하여 현상학은 인간과 세계의 관계가 무엇인가를 사색하는 하나의 새로운 철학 체계이고, 궁극적으로 세상 한가운데서 인간의 생생한 체험을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현상학적 방법을 신체의 문제에 적용시켜 볼 때 우리는 비로소 심신이원론의 딜렘마를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단초를 발견한다. 왜냐하면 여태껏 인간의 본질적 문제를 정신 우월론적 입장에서 고찰해 온 주지주의자들과는 달리, 현상학은 신체와 정신을 동일한 선상에서 문제삼는 이른바 심신일원론적 사고를 취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현상학은 생리학자가 문제삼는 객관적 신체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살고 있고, 그것을 가지고 세계로 향해 있는현상적(現象的) 신체를 문제삼는다. 그리하여 阿部忍 다음과 같이 말한다.(阿部忍,1990)

 

  현상학에 따르면, 우리들의 신체 운동에는 무의미한 운동은 아무 것도 없고, 기계적이라고 생각되는 어떠한 반사 운동일지라도 환경에로 향하는 우리들의 어떤 지향 활동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서 신체 운동은 결코 객관적인 자극으로부터 결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극 쪽을 향해 그것을 상황으로 해서 존재하게끔 하는 활동이라 하겠다.”

 

  이러한 현상적 신체는 다름 아닌표현 매체로서 신체를 의미한다. 이러한 표현 매체로서 신체는 위에서 살펴본 데카르트적 의미에서의물체로서 신체와 명백하게 구별되는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구별을 간단한 실례로서 설명한 사람이 미국의 심리학자 Jessor이다.(Jessor,1958) 예컨대 두 사람이 지나가면서 서로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한다고 가정해 보자. 생리학자에게 이것은 팔의 위치 이동, 근육의 긴장 변화, 혈액의 분비와 신경 반응의 변경 등을 지시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러한 생리적 운동으로부터 어떻게 인사의 본래적 의미를 설명할 수 있는가? 인사의 본래적 의미는 그 사람에 대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존경심을 표현하는 행위이지만, 생리학자는 단지 물리, 화학적 과정의 과학적 법칙에 의존하여 생리적 운동을 설명할 뿐이다. 그리하여 생리학자는 신체를 단지 물체의 입장에서만 본다. 이러한 물체의 입장에 설 때, 우리는길거리에서 어른을 만나면, 인사해야 한다는 의식과 그 명제의 당위성을 이끌어 낼 수 없다. 그것은 체육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체육의 목표가 단순히신체의 단련에 국한된다면, 이로부터 우리는 어떠한 체육의 이념과 학문성도 이끌어 낼 수 없다.

 

  자기의식을 결여한 신체는 결코나의 신체가 아니다. 신체가 나의 신체가 아니라면, ‘내가 존재한다’(I am)는 어떠한 의식도 우리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의식될 수 있는 모든 것 가운데서 자기 자신을 의식해야만 하는 주체를 결여한 의식은 마치 눈 없이 사물을 보려는 것과 같이 비현실적인 것이다. 그래서 현상학에서는내가 존재한다는 신체의 나의 것임을 강조하고, 신체의 주체성을 역설한다. 그리하여 신체의 주체성 속에서 비로소 모든 심리적 과정의 통일이 나타나고, 그것은 이미 물체의 생리학을 초월해 있는 것이다.

 

  한편 Merleau Ponty에 의하면 신체의 주체성은지각의 시점성의 근원을 이룬다. “우리는 언제나 어떤 시점에서 사물을 본다. 그러나 이 시각은 반드시 그 시점에 감금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Merleau Ponty, 1978) 내가 무엇을 본다고 할 때 나의 시각(視覺)은 모든 감각적 인식의 시점성을 대표한다. 예컨대내가 언덕 위에 있는 집을 본다고 할 때, 내가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집은 각기 다른 형태로 보이는 까닭에 일정한 형태로 나타내는 집은 어느 쪽에서도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집을 볼 때 그 집을 일정한 형태로 표현한다. 이 때 집은 어느 한 시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점의 전체를 나타내는 것이다. 나는 확실히 그 집을 내 자신의 눈으로 본다. 따라서 나의 자아는 단지 물질적인 기관(器官)으로서 기능하는 나의 눈이 아니다. 그리고 나의 눈은 안과 의사들이 취급하는 대상인 물체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눈, ‘자아인 신체의 눈, 즉 시각 속에 있는실존하는 눈’(J.P.Sartre, 1956)이다.

 

  이와 같이 모든 지각은 이미 언제나 그 생리학적 가능성을 초월하여 나타난다. 그리하여내가 본다는 것은 주체로서 내(자아)가 내 자신으로부터 제시되는 존재자의 영역에 발을 들여 놓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대상을 보고 --내가 대상 가운데 머물러 있으면서-- 대상으로부터 주변의 사물을 대상으로 향한 측면에서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내가 어떤 대상을 본다는 것은 모든 대상이 하나의 체계,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 속에서 각자는 자신의 (주체 속에) 숨겨져 있는 광경의 관객으로서 그리고 그 영속적인 현존재의 보증인으로서 자기 자신의 주위에 다른 것을 집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메를로 뽕띠에 의하면 세계에 대한 나의 시점은 곧 나의 신체이고, 신체는 모든 경험의 시점성의 원리이다. 이러한 시점성의 원리에 따라 우리는 절대적,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공간과 시간의 영역을 주체적 생활 속에서 파악한다. 즉 시각의 공간은 주체적인 생활공간이며, 시각의 시간은 주체적 생활의 시간이다. 전통적으로 공간이란 주관에 의해 생성되는 형식 또는 어떤 대상이 존재할 수 있게끔 해 주는 조건으로서 간주되었다. 즉 그것은 사물들이 그 속에 위치할 수 있는 거대한 용기(container)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뽕띠는 공간 속의 위치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공간의 발생에 있어서 주체와의 선술어적인 역동적 상호작용을 기술하면서 공간성의 기초 및 그 근거를 정초한다. 그것은 현상적 신체와 세계 사이의 상호적인 매듭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여기서 신체적 활동의 독립성과 운동의 자율성이 생겨난다. 다른 한편 주체적 생활의 시간은 역사적 시간이고, 모든 물리적 시간을 초월한 심리학적 시간이다. 물리적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의 일정한 방향으로 작용하지만, 지각의 현재는 역사적 지평을 가지고 있고, 과거와 미래의 전체를 요구한다. 현재란 과거의 미래이고, 미래의 과거이다. 물리적 시간은 사물의 생성 소멸을 제약하는 하나의 한계이다. 이러한 시간 속에서 물체로서 신체는 소멸해 버릴 것이지만, 주체로서 신체는 시간을 통하여 살고 있다. 그리하여 신체는 실존의 장소이고, 인격의 근원적 행위이다. 인격적 주체성의 장소는 물리적 공간 속에 있는 점이 아니라, 시간 속에 있는 인격의 확고부동한 존재의 성과이다.

 

  이러한 인간의 주체성과 역사성의 시점 아래서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코페르니쿠스 이전에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천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운행한다는천동설이 지배해 왔지만, 그는 천동설을 지동설로 바꾸어 버렸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더 이상만물의 중심이 아니며, 물리법칙의 지배하에 있는 자연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나 현상학은 이러한 인식을 거부한다. 이 점을 후설이 확인시켜 준다. 후설에 따르면 신체는 모든 방위의 중심이다. 그리하여 대상의 성질로서 파악되는 모든 것은 감성영역의 지향적 체험을 말한다. 그리고 신체는 하나의 의지 기관이다. 즉 물질적 사물은 외부로부터 오는 작용에 대해 기계적으로만 움직이지만, 신체는 자발적으로 자유로운 운동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이러한 운동이 가능한 까닭은 본래 신체가 자유로운 의지의 영역에 속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뽕띠는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나는 살아 있는 내 신체 기능을 내 스스로 그 기능을 수행하는 것에 의해, 즉 내 자신이 어느 정도로 이 세계를 향해 있는가의 정도에 따라 이해한다. 어떤 자극이 감관을 자극하더라도 그것을 감관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자극은 지각되지 않는다. 동일한 맥락에서 싸르트르도 또한타인에 대한 신체가 물체임에 반해, ‘나에 대한 신체는 어디까지나내 자신의 것임을 강조한다.

 

  신체를 자아실현을 위한 원형으로 파악하는 방식은 이미 William James신체 자아의 개념과 Theodor Lipps신체-자아의 개념 속에 암시적으로 나타난다. 유아가 정신적으로 각성해 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주체적 신체성의 체험을 어떻게 사물의 체험으로부터 구별하는가를 우리는 유아가 자신의 사지(四肢)를 가지고 노는 것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이러한 놀이는 오직 인간에게만 나타나는 것인데, 통상적으로 우리는 그것을 생후 4개월에서 5개월 사이의 유아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전혀 동물적인 것이 아닌 인간 특유의 만지고 느끼는 분명한 놀이이다. 자기 자신과 신체성의 관계를 최초로 느끼는 가운데 이미 자기 자신의 정서적인 근원적 반성이 나타난다. 자신의 지체를 가지고 노는 것은 놀면서 느끼는 자기 체험이다. 이 놀이에서 유아는 자기가 자신의 신체를 만지고 있다는 촉감과 감정과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신체와 사물을 구별한다. 즉 자기 자신이 느끼면서 만지는 것과 느끼지 못하면서 만지는 것에서 양자는  구별된다.

 

  이와 같이 신체-자아를 사물과 구별하는 것에서 신체-자아는 감정의 출발점인 동시에 종착점이 되는 감정의 중추로서 파악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체를 통하여 세계를 발견하고, 또한 신체에 있어서 그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여기서 느낀다는 것은 그 무엇을 감각하는 것에서 감각하는 자의 자아 감정으로서 나타난다. 그리하여 신체-자아는 주체로부터 세계를 넘어서 선회하면서 정서적인 세계를 정위하고 자기 자신을 정위하는 원환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 귀환한다. 즉 신체-자아는 감각과 노력과 행위의 주체성의 중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발견물은 이제 일차적으로 신체에 있어서 스스로 발견되는 것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  자유의지 (개요)

 

  자유는 다양한 맥락에서 문제가 되는 개념이다. 우선 인간이 과연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도덕의 영역에서 오래 전부터 논쟁거리였다. 도덕은 자유를 전제할 때 성립한다.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야만 그 선택에 대하여 책임을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이미 앞에서 다루었다.

 

  자유는 또한 실증적인 근대 과학이 성립한 이후 인간 행위를 설명하는 맥락에서도 문제가 된다. 인간 행위도 실증 과학의 방식으로 설명하고 예측할 수 있다면 인간은 자연과 마찬가지로 법칙의 지배를 받는 존재이기에 자유롭다고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와 결정론이 양립할 수 있는가 하는 쟁점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자유는 또한 사회적인 개념이다. 실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사회 제도인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노예제나 신분제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근대에 와서 이러한 제도적 억압을 철폐하고 개인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하여 개인의 권리를 법적, 제도적으로 확립하는 과정을 겪게 된다. 특히 자본주의의 확립과 더불어 개인의 경제 활동의 자유를 보장해 주는 것이 자유 문제의 핵심으로 등장한다. 각 개인이 자유롭게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게 되면 그 결과로 사회도 발전한다는 믿음을 갖고 사유 재산권에 기반을 둔 자유를 주장하게 된다. 그러나 이에 대해 사유 재산권이 사실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보는 사회주의의 도전이 제기되어 20세기 내내 논쟁의 주제가 되었다. 여기서 다룰 두 번째 장점은 바로 이 문제에 대한 것이다.

 

  사회적 차원의 자유 문제에서 중요하게 부각되는 또 하나는 개인의 자유를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나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원칙적으로 자유주의의 기초 원리이다. 그러나 사회의 공공선과 개인의 자유가 상충되는 상황률이 발생할 때, 개인의 자유를 어디까지 인정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온다. 이 문제가 바로 여기서 다룰 마지막 쟁점이다. ……(중략)

 

 

 

■  광수생각  (육신과 영혼 )

 

        Re: 내 영혼이 죽던 날에 부쳐

                                                                                                                          카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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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으로부터 자유를 테러 당하던 날

    그리하여 내 영혼이 죽던 날!”

    내 영혼이 산산이 부서져 내리던 어느 날에 썼느니 ……

 

Free(= 자유로운 상태) vs(verse= 서로 통하는) Liberty(= 인간 권리 자유 행복) “a person who strongly believes that people should have the freedom to do(= 자유로운 행동) and think as they like(좋아하는 방식으로 생각 할 권리)” 속에 자유인(Libertarian)을 칭하는 숭고한 말이다.

 

어떤 이유든지 개인의 권리 자유 행복을 세상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하여, 영혼마저 죽었다고도 하고, 더러는 목이 메어 울부짖다가 그대로 숨져 가기도 한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자!

 

신으로부터 받은 자유(Liberty)라고 한다면, 자유로운 의지(행동= freedom to do)은 제한 받을 수 있으나 이는 회복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좋아하는 방식으로 생각 할 권리(= think as they like)는 아무리 악한 세상이라도 빼앗을 수 없다.

 

“고상한 남성?은 여성의 충고에 따라 더욱 고상해 진다는 말이 무슨 명언에 속하랴 마는 독일의 철학자 문호로서 74세 마지막에는 19세 여성과 결혼한 괴테의여성 충고라니, 나는 자다가도 일어나서 귀를 기울인다.

 

굳이, 프로이드의 무의식과 억압의 방어 기제에 대한 이론 그리고 환자와 정신분석자의 대화를 들춰 낼 것도 없이, 무의식적으로 옛 사랑의 집 앞을 그냥 서성이거나, 장난 삼아 하는 말이나 행동, 꿈에서 하는 말은 그 깊은 마음속에 존재하는 자기 영혼의 표출로 본다. 무의미한 행동은 없다는 점이다.

 

이는, 펜실베니아 대학 정신의 유진(Eugene d'Aquili), 노먼(Norman)의 마음과 영혼의 관계에 대한 연구에서 동물과는 달리우리의 마음속에 영혼이 존재한다는 취지의 연구를 다 마치지 못하고 1998년 이 세상을 떠났다. (신은 왜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가!)

 

우리가 죽기 전에는 몸과 마음은 분리될 수 없다는 취지다. 쉬운 말로, 영혼과 육신이 하나라는 것은 잠재적인 마음으로부터 행동한다는 논리와 같다. 부부 사이의 스킨십에서는 영혼과 육신의 가장 진지한 대화가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우상적인(= 우월적 지위의 존경하는 인물 등) 3자의 신체적 접촉이 많이 제한되는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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