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7.9.(화) 13:00
■ 2019.7.9.(화) 13:00
(어머니)
. 양력 7.9.(음 6.7. 제사 (음 6.6))
. 1922.7.7.생(98세, 만 97세)
(아버지)
. 1922년 음 2월 16일 (생)
. 1978년 음 5월 28일 (제사)
. 일산 한울 요양병원 :
2016.4.18. ~ 2019.7.9. (38개월 20일 간)
. 요양병원 입원 : 2016.4.18.(월)
13:40, 나는 병원 입원을 구실로
먼저 현관을 나섬
14:00, 여동생이 대신 들어 옴
15:00, 여동생이 노인을 권유하여
일산의 노인병원으로 자진 출발
당일은 아침도 못 드셨고, 점심 식사도 억지로 넣은 량이 죽 30% 정도였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20여분 동안 가쁜 숨을 쉬시며, 입가에 약간의 거품이 나고
어려워 보여서 간호실에 연락하니 썩션을 시도 했고 이물질은 나오지 않았다.
이상을 감지한 간호사실에서 응급 조치를 취했으나, 10여분 후 숨을 거두었다.
식사 후 약 30분이 지난. 오후 1시였었다.
동생이 다른 식구 간병 때문에 월요일과 화요일은 내가 간병을 도왔었기에,
임종을 내가 맞게 되었으나 오랜 투병으로 기력이 빠지고 정신도 없는 상황이라
단시간에 숨을 거두시었다.
입원 전 평소 43kg 정도였던 체중은 임종 1개월 전 즈음 마지막 측정 시
28Kg이었고, 그 후 25Kg 정도까지는 빠진 듯했다.
지난 수개월간 자신이 직접 식사는 못하시고,
입을 벌리고 넣어 드리는 방식의 식사 수발을 하여 왔으나,
그도 여의치 못하면, 링거액 투약으로 하루 이틀 정도씩 연명을 이어왔다.
수 개월간 산소 마스크를 착용하며 산소도 공급받았다.
병원 측의 배려로, 중환자실이 아닌 일반 병실을
지정하여 줘서 가족들이 드나들면서 형제들이
서로 돌아가며 간병 하는데 불편함은 없었다.
인근 지역인 일산 백병원을 선정하여
장례식을 모셨는데, 화려한 장례식 보다는
조촐하고 안정된 예식을 진행하려고 애썼다.
딸들의 바램과 늦은 나이에 입문한
본인의 종교 취향을 고려하여 교회 형식의
장례절차를 택하였다.
쾌쾌 묵은 나의 종교 취향과는 거리감은 있었으나,
그 또한 부질없는 욕심 임을 달래가며
곁에서 조용하게 지켜보기로 한 것이다.
비록 우아한 종교 행사는 아닐지라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임 하려는
격식을 만족해 하면서, 마음에 부족함이 없는
빡빡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남에게 보일 것도 없고,
내가, 자손들 스스로가 제각각
품고 가야만 하는 마음 속의 행사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우선 형제와 가족들에게 연락을 취하고, 집에는 보관하던 영정 사진과
수의를 갖고 오라고 하였다.
영정 사진은 본인이 30여년 전쯤(60대 중반)
응암동 동네에서 화백에게 주문하여 그렸던 사진과,
2014년경(94세쯤) 일산 막내 네 동네에서
생일 케이크 컷팅 배경으로 찍은 사진을 확대한
흐릿한 사진 두 점을 준비하여 두었었는데,
젊을 때 그린 사진은 “눈 좀 키워 주쇼!
코 좀 더 키워 주쇼!” 하는 본인의 요구가 반영되어
약간은 무서운 모습으로 변신한 그림이었기에
나도 마음에 들지 안 했는데,
최근 준비한 것과 두 개를 내어 놓고 의견을 물으니,
모두 최근 것으로 하자는 의견에 그것을 선택 했다.
수의는 65세 때 즈음, 삼베를 구입하여
본인이 재단을 하고,
내가 재봉틀 작업을 하면서 직접 제작하여
어머님 방 옷장에 박스로 수 십 년 간 있었는데,
보관상태가 어떠한지 염려스러웠었다.
그것을 가져와서 장례식장 직원과 펼쳐 보니,
아주 잘 보관 되었다는 직원의 평을 들었다.
치마, 속곳, 중우,적삼, 두루마기, 이불보, 버선, 장갑, 꼬깔, 얼굴 싸개 등 …
옷 한 층, 나프탈린 한 봉 씩, 신문지 한 층,
반복하여 켜켜이 쌓아 정성껏 보관하였기에 상태는 좋았으나,
좋으면서도, 매장을 하지 아니하고 화장을
선택한 데에 대한 송구한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확인하지 못해서 은근하게 걱정하던 것이었는데 잘 되어 있었기에,
그 와중에서도 작은 보람과 흐뭇함을 느꼈었다.
미리 열어보고 확인하고 하기에는 왠지 엄두 안 나는
무셔븐 물건이 아니었던가 ..? ㅎㅎ
망자의 복과 후손의 안녕을 바라는 부질없는
욕심까지는 엄두도 못 내고,
나와 우리를 있게 하여 주신 망자에 대한
끝 없는 감사와 함께,
“나는 누구인가?” 라는 맴도는 의문 속에서 보낸
장례 기간이었었다고 생각된다.
지난 3년간 어머니를 돌보던 형제들 각각의
열성에 다시금 갸륵 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 야릇한 감정도 교차하였고,
치매 초기부터 십 여 년 간 감당해야 했던
여린 마음의 우리 가족들이 겪어야만 하던
어려움 무서움이 생각나기도 하고,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이 교차하기도 했다.
그 어려운 기간을 잘 견뎌낸
나 스스로도 대견스러웠고,
맘 여린 부인도 대견스러웠다.
물론, 그 어려운 삶을 잘 이어 오신
어머님에 대한 고마움도 없지는 않았다.
마지막 병원 3년 생활은 자식들에게는
자신의 삶을 정리하여 보는
귀중한 기간 이었음에 분명하다.
망자는 투병 생활이 어려웠을 지라도,
자식들로서는 복잡하고 바쁜
현실 생활에서 벗어나 인생을 관조할
조용한 짬을 자식들에게 쥐어 주셨다고 생각된다.
누군가는 삼태기로 퍼갔을 터이고,
누군가는 마음 속 주머니에 한 가득,
누군가는 트럭 떼기로 품어 날랐을 수도 있다.
그것의 가치는 현금이나 그 어느 보물로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것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본다.
병실 간병은 토막 난 짧은 시간 이었을 지라도,
살아 남은 자손들 맴 속에는
생이 다하는 날까지 언제까지나 생동하며
좋은 생각, 좋은 가치관으로서
아름답게 살아 있으리라고 여겨진다.
못나고 모자란 흠은 사라지고,
넉넉하고 따스하고 아름답던
우리들 마음 속 어머님의 젖줄이
몸과 마음 속에서 잊혀지지 아니하고
언제까지고 생동할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그리움 또한 남을 것이다.
몇 안 되는 친인척에 연락한 게 다였고,
화장과 납골 안치 절차를 따라
2박 3일 간의 짧은 시간을 보냈다.
작은 체중만큼이나 한 줌 정도의
조금 밖에 남지 않은 유골을 바라보며.
잠시 한 순간 다시금 허무 함도 느껴 본다.
남긴다는 것, 남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 잔재 물을 보면서,
종교 의식에서 말하는 영혼과 영생은
너무나도 크고 멀게만 여겨지기도 했다.
한 켠에서는 화장이 진행되고,
한 켠에서는 예배와 찬송이 이어지고,
다른 한 켠에서는 설렁탕 그릇을
비우고 있어야만 하는
야릇한 공간, 순간, 시간 들이 교차하던,
그 장소와 그 때를
어머님을 구심 점에 두고서 경험했던 날이었다.
누구나 한 번은 걸어야만 할,
순간이고 장소이지만 ……
나를 그 구심점에 두고서 생각해 보기는 어려운,
당연하지만 야릇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2019.8.3.
오갑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