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 (彷徨)
자유로운 ......
■ 방황 (彷徨)
이리저리 헤매어 돌아다니거나, 분명한 방향이나 목표를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것을 방황(彷徨)
이라고 한다. 오락가락하거나 이리저리 자유롭게 거닌다는 의미도 있다.
우리들 삶의 과정에서 닥치게 되는 뭇 사안들은 옳고 그름이며 선악의 기준이 빛과 그림자처럼 명료하지 않기 때문에, 갈길을 제대로 못가고, 주저하며 망설이기 일쑤이다. 점점으로 이어지는 그러한 선택의 여정이 삶이라고도 말 할 수 있다. 자기 앞에 닥친 물리적, 정신적 선택의 대상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크게 그르지 않을 것이다. 젖 한모금, 물 한모금도 삼킬까 말까, 울까 웃을까, 만족과 불만의 사이에서 망설이게 마련이다.
성장하고 성인이 되면서 매 순간마다 하게 되는 선택의 과정은 점점 더 복잡하게 진화되어 간다. 현대의 고도화 사회구조는 과거 농경시대에는 미처 상상하지 못할 다양한 일들이, 우리들의 일상을 얽혀 놓았고, 그리 얽혀진 타래실을 헤집으며 풀어보려 애쓰는 모습이 오늘날 우리 현대인의 자화상인지도 모른다.
그 선택의 대상은 의식주에 소모되는 물질뿐만이 아니다. 말 한마디며, 희로애락에 이르는 생각까지, 행복과 불행, 만족과 불만에 이르는 가치관의 선택까지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성패의 조건이나 결과물은 어떠한 경우라도 스스로 생각하는 것과 타인의 평가는 서로 엇갈릴 수 있다.
사람의 일들이 그러할 진대, 하물며, 온 세상으로 눈을 돌려본다면 그러한 평가란 얼마나 덧없는 일인지를 이내 자각하게 된다. “나”나 우리가 좋다고 “너”에게까지 모두 다 좋은 것이 아님을 알기에, 인간에게 좋다고 하여 개나 소에게까지도 좋은 것은 아니라는 진실을 때때로 망각하며 편협된 한편의 세상만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내가 옳고, 우리가 옳고, 인간의 행동이 옳다고 쉽게 말하곤 한다. 내가, 우리가 선하고 착하다고 자만하고 자랑스러워하곤 하지만, 그 가운데는 선악의 모순이 있음을 헤아려보지 못한다. 우리를 위해서 쳐 부순 적을 당연하게 여기고, 자기 배를 채우려고 살생한 동식물에 대해서는 아무런 죄의식도 못느끼며 당연하게 여기면서 살아간다.
옳고 그름, 선과 악, 사회윤리며 도덕의 기준들이 모두 허무한 것이고 물거품과도 같은 것임을 알게 된다. 우리에게 닥친 대다수의 일들이 그러하다. 작은 토막, 좁은 안목에서, 시대와 지역과 사회적으로 동일한 울타리 안에서 판단하는 가치관을 가지고 판단하는 일들을 평가하곤 한다. 시대와 지역, 사회를 벗어난 판단이 옳은 것은 아니겠지만, 거시적 관점에서의 모순이 있음을 헤아려 보는것도 우리들 삶의 가치관을 풍성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을 떨치기 아쉽다.
그 많은 선택의 여정들, 삶의 어려운 단계마다, 우리는 때때로 방황(彷徨)한다는 말을 붙이곤 한다.
젖 한모금, 물한 모금 삼킬까 말까를 망설이던 영아의 시절, 김치가닥 집을까 콩나물 무침 집을까를 망설이던 아침밥상 위에서 젓가락 끝에서의 망설임의 순간과, 내 딛는 발걸음 한 발작 까지도 모두 ……
삶의 과정이란 방황의 연속임을 잊은채, 방황(彷徨)이 어렵고 특이한 순간처럼 이야기하곤 한다.
방황의 순간이란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중간 지점에서 서성대는 것이고, 흑도 백도 아닌 회색이며, 옳고 그름, 선악의 중간 지점을 오가는 것이 된다. 이는 중용이나 중화의 정신과도 맥을 같이 한다.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아니하고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아니한, 떳떳하며 변함이 없는 상태나 정도를 중용(中庸)이라고 한다. 중용은 치우치거나 기대지 않고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는 평상의 이치다. 중화(中和)는 실천적 측면에서 중을 설명한 것이다. 희노애락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중이라고 하며,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라고 한다.
방황을 하며 헤매다 보면, 선과도 부딪치고 악과도 부딪치게 된다. 방황하는 와중에 옳은 일도 경험하지만 그른 일도 저지르게 된다. 좋은 일도 하지만 나쁜 일도 경험하게 된다. 방황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중용(中庸) 중화(中和)에 접근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방황은 시작이라고 하는가 보다. 감정의 세계에도 예외는 아니다. 방황은 감정 입출력에서의 균형과도 닮은 꼴을 찾을 수 있다. 우리의 감정세계만 그러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물질세계, 화학반응의 세계에서도 유사한 이치를 찾아 볼 수 있다. 이전에 남겼던 블로그의 글들을 다시 간추려 본다. 그리고, 어떤 경계를 넘나들며 서성대고 방황하며 균형과 조화를 찾아 헤매는 것이 우리 삶의 여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그려 본다.
; (블로그의 관련 글 : 균형과 조화, 조화 (調和), 경계(境界))
2017.4.22. (토)
오갑록
. 균형과 조화
우리의 삶은 사랑하고 좋아하고, 미워하거나 무서워하는 등의 여러 가지의 감정들이 늘 서로 엉겨 있다. 체 내로의 들 속과 날 속에 따르는 감정에서 묻어난 것이 적지 않다. 생각보다 적다던가 많다던가, 크거나 작게, 또는 좋거나 나쁘다는 감정이 이입되면서 새로운 감정을 살아나게 한다. 여기서 감정의 입출력이 개시되는 양상이 된다. 그리고 균형 있는 입출력이 요구된다. 적당하게 소화해 내고, 적당하게 배출해야 하는 원리는 영양소나 에너지 원으로서의 음식물과 다를 바 없다. 만족, 용서, 이해, 사랑, 망각 …… 따위의 행태는 이입된 감정의 소모나 배출에 응용되는 좋은 도구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을 하여 본다. 감정과 마찬가지로 학문, 지식, 습관 따위도 그들을 습득하여 쌓아 올리고 이를 도에 넘지 않게 바르게 사용하며 균형 있는 삶을 이어가는 것도 식습관이며 감정을 잘 다스리는 것 만큼 중요하다. 자신에게 걸 맞는 적당한 균형을 유지할 때는 주변으로부터 덕망과 존중을 받게 되지만, 과부족을 보인다면 너무 나댄다던가 인색하다는 따위의 악평을 받기 쉽게 된다. …… (From 블로그 글 : 균형과 조화)
. 조화
우리에게 주는 정감이며 정념은 어느 한편의 극(極)점이 주는 첨예함에서 보다는 대응되는 양편의 조화(調和)로움 속에서 색다른 맛과 느낌을 주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식탁에서 반찬과 자극적인 양념 그리고 여러가지의 식재료 각각으로는 맛볼 수 없는 비빔밥의 묘미와 흡사한 면이 있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양극의 첨예함에서 양극간의 조화로움이 요구되고 돋보이는 사안들은 흑백(黑白)의 색상이나, 명암(明暗)을 이루는 빛뿐 아니라, 생각하기에 따라 삶의 과정에 연속되는 크고 작은 여러가지 일들이 모두 해당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져 본다.
흑백(黑白)의 조화, 명암(明暗)의 조화, 과부족(過不足)의 조화, ……
장단(長短)의 조화, 고저(高低)의 조화, 다소(多少)의 조화, 대소(大小)의 조화, 상하(上下)의 조화,
표리(表裏)의 조화, 전후(前後)의 조화, 개폐(開閉)의 조화, 출입(出入)의 조화, 두미(頭尾)의 조화,
비락(飛落)의 조화, 진퇴(進退)의 조화, 승패(勝敗)의 조화, 미추(美醜)의 조화, 빈부(貧富)의 조화,
우열(優劣)의 조화, 완급(緩急)의 조화, 조밀(粗密)의 조화, 예둔(銳鈍)의 조화, 곡직(曲直)의 조화,
선악(善惡)의 조화, 희로(喜怒)의 조화, 애락(哀樂)의 조화, 애증(愛憎)의 조화, ......
우리가 대하는 일상에서는 상당수가 이처럼 양편으로 대응하며 상치되는 일들로 이어지곤 한다. 여기에서 극(極)과 극(極), 첨단의 것을 향하고 추구한다면 원색처럼 산뜻할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삶이 진선미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오히려 대치되는 양극(兩極)의 조화 속에서 그 참 맛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 본다. …… (From 블로그 글 : 조화 (調和))
. 경계
어떠한 기준에 의하여 분간 되는 한계를 두고 “경계(境界)” 라고 말 한다. 그 경계란 지역을 구분 할 때도 있고, 고체 액체 기체와 같은 유형의 사물을 구분 할 때도 있다. 때로는 사고나 사상 과 같은 무형의 것이 구분되는 한계가 되기도 한다.
사물의 경계는 색이나 빛 또는 성분의 물리적, 화학적인 특성으로서 구분 되곤 한다. 그 경계면은 뒤 섞이거나 정돈되지 아니하여 항상 복잡하며, 화학적으로도 새로운 반응이 개시되는 부문들이 대부분 이 곳에서 시작 되므로 새로운 화학구조물이 발생되는 지점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점을 임계(臨界)점이라고 표현한다. 임계점은 어떠한 물리 현상이 갈라져서 다르게 나타나기 시작 하는 경계인 것이다.
임계점이 되면 복잡하고 다양하고 유동적이며 때로는 생산적이 되기도 한다. 계면(界面)은 생산적이기도 하면서 아름다움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미술은 색과 선, 계면의 아름다움을 시현하는 예술이기도 하다. 사진은 선과 음양의 계면이고, 음악은 음의 장단과 고저가 이루는 계면을, 소설은 인생굴곡의 계면을 감상하는 것이다.
계면(界面)에서의 아름다움을 발산함은, “나” 스스로나 우리의 사회 조직에서도 예외는 아닌 성 싶다. 다양할수록, 그 다양한 계면(界面)을 따라 더 살 맛나고 아름다운 사회가 이뤄지는 것은 아닐까? 어느 사회 조직이건, 심지어 종교집단까지도 유사한 면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여 본다. 진리의 구심점이 오로지 한 곳에 있음을 인정하고, 특정 종교만을 인정하는 인류사회로 발전한다면 그 집단의 입장에서는 성공적 진리의 탐침을 이룰지는 몰라도, 사회의 다양성과 아름다움이라는 측면에서는 단조롭게 되리라는 생각을 가져 본다. 개인 각각 모두가 꼭 같은 가치관과 종교관, 행동양식을 가지고 독실한 신앙행태를 유지하는 사회가 된다면 과연 얼마나 더 아름다운 사회로 변모할지는 미지수 라는 생각이다.
인간의 고달픈 삶 속에서 믿음이 주는 정신적인 안식과 평온에의 기여도 위와 같은 계면(界面)의 특성이라는 큰 틀에서 벗어나지는 못할 것 같다고 본다. 삶의 이치들이 그리 돌아 가는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면에서도 계면(界面)의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을까? 아니면, 회한과 두려움, 고통과 압박, 슬픔만이 존재할까?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영생과 행복 그 분과 만남의 순간이 온다며 임종을 앞둔 계면(界面)의 주위에서 기쁨의 노래와 기도를 올리는 종교집단들도 있다. 여기에는 믿음과 그를 의심하는 사이의 또 다른 계면(界面)이 발생한다. 다양성에 한가지를 더 하는 격이다. 임종을 임하는 당사자는 여하간에 그 주위에 있는 나머지 사람들, 삶을 꾸려가는 남은 이들에게는 사고(思考)의 다양성에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이 발생하는 것이 아닐까? …… (From 블로그 글 : 경계(境界))
■ 도서 : “방황의 기술”
레베카 라인하르트 저
□ 삶은 여행이다.
http://blog.yes24.com/document/6610142
인간은 생물적으로 노쇠화되는 육체를 가진 유한적인 존재이다. 어찌 어찌하여 대대로 육체의 조상들로부터 살아 남은 DNA를 물려 받아 한 생애를 사는 존재이다. 그 한 생애는 마치 땅 따먹기하는 어린 날의 놀이처럼 자신의 영역을 조금씩 넓혀 가는 여행이다.
초의 눈 뜨임과 사물의 확인. 부모의 보살핌과 자양분의 제공으로 무탈하게 살아남아 사회에서 밥벌이 할 수 있는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독립된 자아의 세계로 나아간다. 이 때 까지는 잘 조직된 사회와 부모의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움직이는 패키지 여행이다. 한마디로 다소 안전한 여행이다.
자유 여행은 성인이라고 인정받는 사회적인 존재가 되는 순간이다. 지역적 울타리를 벗어나 새로운 인식의 셰계를 넓히고 가족과 현재의 친구 범위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고 새로운 시간의 흐름을 설계하고 그 흐름 위에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세상은 호기심의 대상이고 걸리버 여행마냥 흥미와 즐거움의 대상이지만 다소 위험이 따른다.
그러나 어느 순간 우리는 낯선 것이 익숙한 것으로 바뀌고 그 익숙한 것은 일상의 시간으로 자리잡고 그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의무와 책임감으로 점철된 시간의 지배는 우리들에게 권태와 무기력증을 안겨준다. 더 이상 세상은 재미가 없고 따분할 뿐이다. 국가의 체제 속에서 기본 교육과정을 이수해야 하며, 공공의 선을 추구하기 위해 도덕적 윤리와 법을 지켜야 하며, 정해진 시간내에 출근해야 하며, 정해진 시간에 휴식을 취해야 하며, 일정한 소득을 벌어야 하며 등 등
언제부턴가 우리는 동일한 시간과 장소에서 왕복하는 전동차같은 반복적인 삶을 살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안전하고 평온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삶은 생각대로 결코 안전하지 않다.
삶은 여행이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좌절과 불행이 다가온다. 그 때 우리는 일상에서 벗어난 낯선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과 세상을 비난하기 시작한다. 즉 방황이 시작된다.
저자 레베카 라인하르트는 방황의 시작은 여행의 시작이며 진짜 삶의 모습이라고 한다.
인간의 삶이란 만경창파의 고난의 바다와 같기 때문에 방황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저자는 방황을 자발적으로 받아안고 능동적으로 움직일 때 참 삶이 펼쳐진다고 한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강철주는 "낡은 나를 버리고 새로은 내가 되는 것. 이것이 여행의 본질이다"라고 한다. 방황은 여행인 셈이다.
저자는 "이 책은 미래를 두려워하고 해결을 지향하고 계산에 집착하는 이 시대에 더 많은 용기와 호기심을 갖자고 외치는 변론이다. 자신의 불완전함을 드러날 일을, 심지어 실패할 줄 뻔히 아는 일을 감행해보라는 초대장"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와 함께 사회적 안전망으로부터 단 한걸음도 떼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 안전의 그물망을 뚫고 행복하고 재미있는 인생을 개척할 수 있는 방황의 기술을 제시하고 있다.
그 기술을 익히기 위한 예비 훈련으로 몇가지 사고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첫째,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 시대에서 확실한 것을 찾지 말라고 한다.
현대 사회는 무수한 전문가들이 범람하고 있다. 우리는 무슨 문제가 발생하면 빠른 시간 내에 해결하기 위해 전문가를 찾고 그의 절대적인 말에 의존한다. 타인으로부터 마음의 평화를 얻는 행위는 결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불확실한 것을 방황으로 삼아 자신을 탐구해야 한다.
둘째, “나”를 너무 사랑하지 말라고 한다.
저자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나오는 나르키소서의 신화를 제시한다.
자기애에 대한 경계를 신화를 통헤 일깨운다. 나르키소서의 죽음은 물 속에 비친 자기 자신에 대한 대한 사랑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자신을 타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 말은 우리는 나 자신에게 너무나 집중한 나머지 “나”이외의 다른 것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점에 경종을 울린다. 랭보의 “나는 타인이다”라는 구절로 자신에서 벗어나야 만 새로운 세상이 보인다고 한다.
셋째, 과도한 이분법적 사고로 선과 악을 구분하지 말라
방황을 통해 낡은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나를 재창조하기 위해서는 타인을 호불호 하지 않는 태도이다. 특히 악에 대한 판단은 유보해야 됨을 강조한다. 사람의 본성이 착함이라고 할때 나쁜 짓을 행한 이유가 본성에 있기 보다 악인을 둘러싼 주변환경과 정신신경학적인 문제이므로 과도하게 옳고 그릇됨을 구분하지 말라는 것이다.
도덕적 상대주의로 명확한 판단을 내리지 않는 모호함이 책임감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보다 더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인 셈이다.
넷째, 빈곤해진 상상력에서 벗어나라
저자는 프랑스 철학자 알베르 카뮈의 시시포스의 신화를 통해 빈곤한 상상력에 대해 일타한다.
부한 상상력이 우리의 방황을 도와주는 셈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시시포스는 반복적으로 돌을 밀어 올리는 그의 고단한 뒷모습을 통해 고통받는 속죄자 혹은 자신의 이상을 위해 지치지 않고 노력해도 소용이 없는 무력안 인간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카뮈는 "정상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이제 행복한 시시포스를 상상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하며 빈곤한 상상력에서 일탈하기를 권한다.
한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인생을 맞이할 때 조금 더 우리는 풍부한 삶을 살수 있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네 가지의 예비 훈련을 통해 방황을 위한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방황을 위한 생각도구들을 꺼집어 낸다. 레베카 라인하르트는 니체와 비트겐슈타인을 비롯한 철학자와 그리스 신화의 오디세우스와 디오니소스의 이야기를 제시하고 TV드라마인 24시의 잭바우어와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캐릭터까지 과감히 응용하면서 방황의 도구들을 차례대로 선보인다. 또한 카프카의 변신에 등장하는 그레고리 잠자의 인물도 있다.
저자는 방황의 탁월한 전문가로 오디세우스를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제시하고 있다. 오디세우스는 운명이 정해놓은 길을 거역한 유럽 문화 최초의 영웅이다. 10년의 트로이 전쟁과 10년에 걸친 방황을 끝내고 이카카의 해변에 도착한 오디세우스는 예전과 같은 사람이면서도 같은 사람이 아니라다라고 한다. 20년의 세월동안 친숙한 것을 낯설게, 낯선 것을 친숙하게 만들면서 새로운 인간으로 재탄생했고 그는 그 방황의 힘으로 축적된 내공으로 새로운 삶을 창조해 갔다.
오디세우스의 메시지는 수많은 세상이 있다는 것이다. 10년이 걸릴지라도 자신을 더 잘 알기 위해 낯선 것에 도전하라고 한다. 우리에게 조심성과 권태를 호기심과 용기로 대체하라고 한다.
무미건조하고 지루한 삶에 대한 탈피. 편견과 경계의 삶을 허물고 그 너머의 또 다른 삶을 확장한 인물로 마이클 잭슨을 예로 제시한다. 어린 아이이면서 어른의 삶을 살아야 했던 그. 어른이면서 어린아이의 삶을 살아야 했던 그. 흑인이면서 백인이였던 그. 선인이면서 악인이였던 그. 수만가지 가면을 쓰고 신이 주어진 경계를 뚫고 자신의 원하는 완벽한 인간이 되고자 했든 마이클을 통해 삶의 다양성을 주문한다. 그래서 저자는 "두려움과 편견을 버리고, 낯선 것과의 접촉에 적극 응하자"라고 말한다.
저자는 방황의 기술의 철학적 토대를 스토아 학파에서 찾으면서 에필로그를 갈무리하고 있다.
스토아 학파는 첫째 불확실하고 불안한 상황에서도 편안하게 느낄 수 있다는 자각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과 끊임없이 교류를 나눠야 된다고 한다.
두번째는 자신을 알려면, 인생목표를 알려면 친숙한 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세번째는 인생의 의미는 위기와 실패를 회피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이 불완전하고 상처 받기 쉬우며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며, 이 세상의 비밀이 우리의 인식 가능성보다 훨씬 다채롭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네번째는 매일 매일이 우리가 세상에서 만난 첫날인 것처럼 살아라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낯설고 감탄의 연속일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전체적으로 다소 철학적인 사변들과 난해한 구절도 군데 군데 보이지만 두번 읽고 정독을 한다면 보이지 않던 글자도 보이게 될 것이다. 정 읽기가 힘들다면 마지박 에필로그만 읽어도 자신의 방황에 도움이 될 것이다.
결국 방황의 기술도 인간의 행복으로 귀결된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방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볼완전한 세상에 불완전한 인간으로 태어나 방황을 통해 자신을 재무장하고 세상을 관찰하고 탐험한다면 지금보다 나은 삶이 될 것이다.
(출판사 서평 중에서)
우리의 삶은 그 자체가 항상 “예측할 수 없는 여행”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인간은 왜 방황해야만 하는지, 왜 방황할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낯선 것과의 만남이 인간에게 얼마나 커다란 선물을 줄 수 있는지 가르쳐 준다.
. 방황은 인생의 시기를 불문하고 찾아온다
: 왜 우리는 방황할 수밖에 없는가
세상을 살면서 크든 작든 방황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인생의 고비를 넘을 때마다 우리는 정신적, 육체적 방황을 경험한다. 방황은 엇나간 길로 빠진 청춘들만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다. 방황은 누구에게나 시기를 불문하고 찾아온다.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고 한심해진다. 무엇을 해야 할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지, 도대체 왜 사는지 의문이 든다. 무엇보다도 하루하루가 즐겁지가 않다. 책에서 배운 대로 성공한 사람이 가르쳐주는 대로 열심히 노력해보지만 쳇바퀴 같은 삶은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고, 행복은 요원하게만 느껴진다. 이때 우리는 방황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서게 된다.
유럽 최고의 철학 상담가로 인정받고 있는 레베카 라인하르트는 인생 자체가 예측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때문에 낯선 것과 만나는 기쁨을 포기한 채 안정만을 추구하는 삶이 행복할 리가 없다. 우리의 모든 문제는 낯선 것과 실패를 두려워하고 불확실한 것을 견디지 못하는 태도에서 온다. 우리는 언제부터 방황을 시간 낭비로, 장애물로, 최대한 겪지 말아야 할 것으로, 돌이킬 수 없는 실수로 생각하게 된 걸까? 저자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답을 맞히는 능력이 아니라 방황하는 기술이라고 강조한다. 인생은 알 수 없기 때문에 매력적이다.
. 우리의 방황을 부추기는 안내자들
: 마이클 잭슨과 오디세우스, 바틀비와 그레고르 잠자, 니체에서 비트겐슈타인까지
최근의 철학은 사변적 철학에서 실천적 철학으로 발전하고 있다. 철학자들은 이제 그들만의 리그에서 벗어나 일상을 노크한다. 독일에서도 그런 시도들이 다양하게 이어지고 있는데, 철학자 레베카 라인하르트는 그런 노력에 앞장서는 철학자이다. 그녀는 신작 “방황의 기술”에서 철학적 의미 탐구와 실천적 삶의 지혜를 성공적으로 연결했다는 평을 받으며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저자는 “방황의 기술”에서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방황하라고 부추긴다. 그 방법은 소크라테스의 문답법과 닮아 있다. 그녀는 정상-비정상, 남-여, 삶-죽음 등에 대한 질문을 통해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이분법적 사고에 균열을 일으킨다. 또한 현대인의 방황을 가로막고 있는 시대적 상황과 문화를 분석함으로써 우리의 자리를 돌아보게 한다.
사람들이 맹신하는 전문가의 의견이 얼마나 우리의 생각을 경직시키는지, “나”를 사랑하고 “나”만 바라보는 지나친 자기애가 어떻게 인생의 비밀과 수수께끼를 놓치게 하는지, 손쉽게 판단해버리는 빈곤한 상상력이 어떻게 일상의 부조리함을 익숙하게 만드는지를 일상에서, 신화 속에서, 철학에서 길어낸 여러 가지 사례를 통해 알려 준다.
또한 경계의 아슬아슬함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방황의 길을 함께 할 친절한 안내자를 불러낸다. 고대의 영웅 오디세우스는 운명이 정해놓은 길을 용감하게 거역한다. 10년간의 낯선 체험은 오디세우스를 진정한 영웅으로 성장시킨다. 신의 결정이 아닌 자신의 결정을 따르는 오디세우스에게서 인생의 가치를 “계산”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
최고의 인기를 누렸지만 수많은 스캔들을 뿌렸던 팝스타 마이클 잭슨은 신화 속의 디오니소스와 닮아 있다. 아이도 어른도 아닌, 남자도 여자도 아닌, 흑인도 백인도 아니었던 마이클 잭슨은 디오니소스의 다의성을 현대적으로 구현한 인물이다. 마이클 잭슨은 낯선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의 주인공 바틀비,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는 일상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쉽게 허물어질 수 있는 것인지, 그렇다면 안정이라는 미명하에 돌아가고 있는 시스템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준다.
이렇듯 저자는 대중문화에서 신화, 문학, 철학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방황에 필요한 생각의 도구들로 독자를 무장시킨다.
. 유럽 최고의 철학 카운슬러가 전하는 용기의 철학
: 나를 성장시키는 “자발적 방황”의 지혜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철학자 강신주는 “가만히 있으려도 해도 세계는 여러분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본의 아니게 새로운 환경이 여러분을 엎칠 것이다”고 말하며, 좋든 싫든 인생의 여행을 해야 한다면 급류에 휩쓸리는 타율적인 여행이 아닌,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자발적 여행’을 할 것을 권한다. 낯선 것, 예측할 수 없는 것들과의 만남을 통해 이 세계에서 우리의 자리가 어디인지, 인간이라는 것과 인간성이라는 것이 진정으로 어떤 의미인지 발견하는 매력적인 방황의 즐거움을 역설한다.
혹자는 방황에도 기술이 필요하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방황의 기술은 인생을 화려하게 만들어 줄 연금술은 아니다. 다만 자신의 불완전함이 드러나는 일, 실패할 줄 뻔히 아는 일에 도전해보라는 용기와 호기심을 가득 담은 초대장 같은 것이다. 습관으로 굳어버린 나를 깨우고, 일상의 근심 때문에 미처 보지 못했던 다양성을 발견하는 일, 이를 통해 나의 내면을 성장시키는 지혜이다. 사는 게 재미없다 느껴진다면, 바쁘게 사느라 잊고 있었던 질문들이 떠오른다면 “자발적 방황”을 시작해보자.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보다 지적이고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보다 매력적인 이 책은 기꺼이 길을 잃을 준비가 된 이들을 위한 필수 안내서가 될 것이다.
(내용 중에서)
불안하다. 세상만사가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고 한다. 다시 붙들고 싶다. 불확실한 건 싫다. 실패할까 봐 겁난다. (...) 모든 것이 제자리에 가만히 있어야 한다. 비전과 꿈을 갖는 것이 낭만적이긴 하겠지만 그것으론 건질 것이 없다. (...) 바로 이런 태도가 왜 우리가 여기에 있는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한 탐구를 가로 막는다. 남보다 뛰어난 시간 관리가 과연 인생의 의미가 될 수 있을까? 손실을 최소로 줄이는 것이, 최대한 즐기는 것이 인생의 최종 목표가 될 수 있을까?
_ 프롤로그(p16)
우리가 새로운 위험을 알게 되는 건 대부분 엄청난 전문 지식을 소화하기 쉽게 한 입 크기로 잘게 쪼개어주는 언론을 통해서다. 예를 들어 왜 늘 피곤한지 고민이 될 때도 구글에 한번 들어가 보기만 하면 된다. 해답이 이미 나와 있다. 우리가 170만 명의 다른 사람들과 같이 만성피로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을 확률이 높다는 해답이.
_ 불확실성 시대의 확실성(p30)
나르키소스는 그리스어 나르코시스에서 온 말로, “마취”라는 뜻이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나르키소스의 나르코시스적 상태의 조건은 자기애가 아니다. 그가 사랑에 빠진 것은 다른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한 얼굴이다. 그는 다른 사람을 보고 있다고 착각했다. (...) 우리의 “나”가 복제되고 독립할수록, 그것이 휴대전화 모니터 보호기, 운동화 등의 더 많은 라이프스타일 분야를 확보할수록 원본과 복사본을 구분하기가 힘들어진다. “나”는 누구인가?
_ 나르키소스 2.0(p59)
그레고르의 이야기는 우리를 상상력의 한계선뿐 아니라 행복의 한계선으로 데려간다. “변신”의 독서는 거부와 실패, 시스템 붕괴에 대한, 우리의 편안한 일상을 앗아 갈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과 맞서볼 수 있는 좋은 연습이다. 아무리 믿고 싶어도 영원히 안정된 삶이란 없기 때문이다. 그저 많건 적건 성공한 안정의 노력들이 있을 뿐이다. (...) 살면서 깜짝 놀랄 일이 없다면 그게 인생이겠는가.
_ 인생의 규칙 벗어나기(p263)
자신을 알려면, “인생 목표”를 알려면 친숙한 곳을 떠나야 한다. 그렇지만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난단 말인가? 결과와 효율성만, 다시 말해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는 것만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한다. (...) 지금까지 걸어온 인생길을 되돌아보라. 아마 그 길에서 가장 재미있고 풍성했던 것은 에움길과 샛길이었다는 사실을, 신나게 달리지 못했던 길이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놀라게 될 것이다. 그런 길들이 우리 자신에게, 우리의 판단과 가치관에 윤곽을 부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_ 에필로그(p307)
□ 위험하게 살아라!
http://blog.yes24.com/document/5250171
저자 레버카 라인하르트는 우리의 생각과 낯설다. 저자는 오히려 우리가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방황의 기술”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저자에게 방황은 인생의 장애물이 아니라 멋진 동반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 책을 추천하면서 철학자 강신주는 방황이 얼마나 매력적인 여행인가?를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우리에게 인간은 왜 방황해야만 하는지, 왜 방황할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방황이 인간에게 얼마나 커다란 선물을 줄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려고 한다. “낯선 것, 예측할 수 없는 것들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이 세계에서 우리가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인간이라는 것과 인간성이라는 것이 진정으로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낼 수 있다.”(P10)
이 책에서 말하는 방황의 기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사실을 알아야 한다. 첫 번째는 방황을 가로 막는 것이다. 두 번째는 방황을 위한 도구다. 방황을 가로 막는 것에는 ‘불확실성 시대의 확실성, 나르키소스 2.0, 과도한 이분법적 사고, 모든 것이 당연해진 일상’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방황을 위한 도구에는 ‘지름길 이해하기, 경계 넘나들기, 연속성 느끼기, 죽음 만나기, 기계 전원 끄기, 인생의 규칙 벗어나기, 일상 철학자 되기’에 관한 것이다.
첫 번째에서 눈여겨 볼 것은 모든 것이 당연해진 일상이다. 우리의 일상은 분주하다. 이런 저런 퍼즐을 맞추기 위해 우리는 기계적으로 작동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럴수록 삶은 공허하고 부조리해진다. 무력하고 무의미한 삶을 어떻게 해야 할까? 라인하르트는 시시포스에 답을 찾고 있다. 시시포스는 불손(hybris)의 죄를 졌다. 불신이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인간의 오만을 말한다. 그래서 시시포스는 바위를 산 정상에 밀어 올리는 벌을 받는다. 여기서 벌은 한 번에 끝나지 않는다. 꼭대기에 오르자마자 바위는 도로 굴러 떨어져 시시포스는 다시 바위를 밀고 올라가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시시포스에 대하여 절망하는 동안 카뮈는"시지프 신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바위의 결정 하나하나, 어둠으로 가득 찬 이 산의 광물 하나하나가 오직 그것만으로 그에게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정상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이제 행복한 시시포스를 상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카뮈의 사유는 놀랍다. 삶이 부조리하다고 해서 절망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자살을 한다거나 권태롭게 인생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시시포스를 가엾게 생각하는 것이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정작 시시포스 스스로는 불행하지 않았다. 시시포스는 고통 속에서 자신의 상상력으로 ‘자신이 고통을 초래했던 지식은 동시에 그의 승리를 완성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카뮈가 말한 ‘행복한 시시포스’는 행복한 상상력에 있다.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불행한 시시포스가 아니다.
두 번째에서 눈여겨 볼 것은 지름길 이탈하기다. 지름길 이탈하기에서는 “가치를 계산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한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방향감각이 있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제 갈 길을 간다는 것은 여러모로 모험이다. 어느 정도는 인생의 목표가 있어야 하며 목표에 따라 방향은 바뀌기도 한다. 방향은 목표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그런데 방향이 안개에 가려질 때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안개 때문에 방향을 잃어버리는 것은 혼돈이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그리스 영웅 오디세우스에서 많은 것을 얻었다. 식인 괴물 폴리페모스에게 벗어나기 위해 오디세우스는 포도주를 마시게 한다. 마음껏 취한 폴리페모스는 오디세우스에게 이름을 묻자, 오디세우스는 “내 이름은 ‘아무도 아니다(우데이스Udeis)요”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아무도 아닌 자’ 오디세우스는 어떻게 영웅이 된 것일까?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테오도어 아도르노는”계몽의 변증법”에서 오디세우스를 신화적 인물이 아닌 “계몽된 인간”의 상징으로 해석했다. 즉, 신화적 운명, 숙명은 입으로 나온 말과 하나였다. (…)하지만 그 차이를 이용하는 것이 꾀다. 사람들은 사물을 바꾸기 위해 말에 매달린다. (…)우데이스라는 이름이 ‘영웅’과 ‘아무도 아니다’ 둘 다를 의미할 수 있기 때문에, 우데이스는 이름이라는 마력을 부술 수 있다. (…)그는 “아무도 아니다.”라고 자신을 부인하면서 자신을 인정하고, 스스로를 사라지게 만들어 자신의 생명을 구한다.
“방황의 기술”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방황의 의미는 단순하면서도 명쾌하다. 방황은 “자발적 여행”이라는 것이다. 소심한 사람들에게 자발적 여행은 쓸데없는 고통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타율적인 여행만 하는 것은 허무하다. 이런 허무함의 경계를 넘어서면 우리는 니체가 말한 초인(超人)을 알게 된다. 니체는 “존재의 가장 큰 수확과 가장 큰 즐거움을 거둘 수 있는 비결이다. 위험하게 살아라!”고 했다. 위험하게 산다는 것은 낭만적이지도 비관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그것은 지금까지의 모든 가치를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너는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나는 할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낯설게 깨닫게 된다.
오늘날 물질만능주의와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있다. 정상적인 두 가지 문명 때문에 삶이 안정되고 편리해졌다. 하지만 그만큼 우리는 삶의 가치를 잃어버렸다. 자발적 여행도 예외는 아니다. 방황은 여전히 부정적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에게 오디세우스처럼 자신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희망은 없을까? ”방황의 기술”의 통찰은 아주 유효하다. 방황을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회복시키고 있다. 그것도 용기와 호기심으로 과감히 선택하라고 한다. 그래야 노발리스가 말했듯 “삶이란 주어진 소설이 아니라 우리가 만든 소설”이어야 하지 않을까? 자발적 여행을 통해 우리 삶을 되돌아보는 것은 매우 낯선 만큼 흥미진진한 일일 것이다.
□ 도서 “방황의 기술”
레베카 라인하르트 저
(목록)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방황하는 기술이다
- 방황을 가로막는 것
. 불확실성 시대의 확실성, 전문가들의 의견에 대하여
.‘나’를 너무 사랑하는 나에 대하여
. 과도한 이분법적 사고, 선과 악을 구분하는 일에 대하여
. 모든 것이 당연해진 일상, 빈곤해진 상상력에 대하여
- 방황을 위한 생각 도구
. 지름길 이탈하기, 가치를 계산하는 방법에 대하여
. 경계 넘나들기, 비정상의 새로운 해석에 대하여
. 연속성 느끼기, 진짜 남자와 진짜 여자의 중간에 대하여
. 죽음 만나기,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에 대하여
. 기계 전원 끄기, 아날로그적 놀이와 소통에 대하여
. 인생의 규칙 벗어나기, 안정된 삶이라는 착각에 대하여
. 일상 철학자 되기 _ 인간답게 산다는 것에 대하여
. 에필로그; 방황의 끝, 새로운 시작
■ 방황하는 20대에게 주는
“명언 11가지”
1. 시간의 흐름에는 세 가지가 있다.
미래는 주저하면서 다가오고,
현재는 화살같이 날아가고,
과거는 영원히 정지하고 있다.
- 프리드리히 실러 -
2. 산다는 것, 그것은 치열한 전투다.
- 로맹 롤랑 -
3. 자기가 자신을 지켜야 한다.
"아니오"와 "예"를 똑똑히 말할 줄 모르면
남들은 진정한 사실을 꿈에도 알아주지 않는다.
- 프란츠 카프카 -
4.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가치 있는 사람이 되려고 힘써라.
- 알버트 아인슈타인 -
5. 목표 안에서도 삶을 살고 즐길 수 있다. - 시드 캐사르 -
6. 정말 강한 사람은 자신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누가 뭐라고 한다고 해서 자기가 못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니까요.
- 김어준 -
7. 성공의 커다란 비결은
결코 지치지 않는 인간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 알버트 슈바이처 -
8. 가슴 뛰는 꿈은 없어요.
작은 꿈을 만나 내 가슴이 뛸 때까지 노력하는 것이지요.
- 김미경 -
9. 인생은 곱셈과 같다.
찬스가 오더라도 내가 제로이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 나카무라 미츠루 -
10. 술이 생각해 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떠들어댈 뿐이다.
- 프리드리히 실러 -
11. 이 세상은 한 편의 아름다운 책이다.
그러나 그 책을 읽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게 된다.
- 골드니이 -